이놈이 자기 조부보다 더 독종이란 걸 이놈 아비한테 들었지만 이 정도 일지는 꿈에도 몰랐다며 천명구는 끙끙 앓으며, 세계에서 가장 독한 사채업자가 아닌가? 치를 떨고 힐끔 쳐다봤다. 사늘하게 식어버린 시체처럼 아무런 표정도 없었지만 천명구 눈에는 능글맞은 웃음으로 보였다.

　지구촌의 능구렁이가 한꺼번에 눈앞에 몰려들어 혼 줄을 빼가듯이 자기 필요한 말만 쏟아 부어 입도 뻥긋 못하고 있는데도 요리조리 빠져 나가는 말만 해서 천명구가 뭐라고 말 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그까짓 회원 몇 명 뿔뿔이 흩어지게 한 대가로 이런 보복을 당한다는 말을 어디 가서 할 수도 없었다.

　개도 비웃을 것 같아 천명구는 냉가슴만 앓고 있었다.

　후회하기에는 너무 늦었던 천명구가 할 수 있는 짓이라고는 대성통곡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이 도시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갑부라서, 체면이 구겨질까 봐 그럴 수도 없는 처지였다. 약아빠지기로는 천하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허병식이가 나이도 어린 이놈과 붙어 다닐 때 알아보지 못한 게 천추의 한으로 족보에 길이길이 남을 짓을 천명구는 지금 당하고 있는 중이라고 보면 딱 맞는 상황이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이 놈이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도 있었다. 골머리를 썩히고 있을 때 검정 색 정장을 입은 40대 중반쯤 돼 보이는 여자가 천명구에게 인사를 하며 지나쳤다.

　“사장님! 여기가 시립도서관보다 책이 더 많아서 그런지 사람들이 엄청 많네요. 어떻게 건물에 도서관을 지을 생각을 하셨어요? 정말 떼돈 벌겠다. 사장님!”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 지 엉거주춤한 표정으로 머쓱하게 웃으며 뒤 모습을 보고 있었다. 한 눈에도 중후하고 귀티가 나는 지식인 같았다. 책을 들고 독서실로 가던 이 사람 입에서 반갑게 인사하는 소리가 들려 세 사람이 그쪽을 쳐다봤다.

　“안녕하세요. 차장님! 잘 지내셨죠?”

　이선근이 순간적으로 얼어붙어 버렸다. 서로 잘 아는 사이에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운 그런 표정이 아니라는 게 애리의 한눈에도 들어왔다. 한대 걷어차고 싶을 정도로 이선근은 입을 닫지 못하다가 어물대며 인사를 했다.

　“예! 잘 지내셨죠?”

　“애리도 같이 인사를 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예! 애리씨! 어머 점점 더 예뻐지시네요. 요즘 남편이 편해서 그런 가봐요. 호호호!”

　“아! 예!”

　애리가 머쓱하게 웃으며 인사를 할 때 선생님이란 사람이 먼저 인사를 하고 독서실로 갔다. 이선근은 눈을 떼지 못하고 뒤 모습을 보고 있었다. 애리가 눈살을 찌푸리며 휘돌아서 천명구에게로 왔다.

　“사장님! 잘 지내셨죠?”

　“아이고! 애리씨! 먼데까지 어쩐 일이야? 어! 우리 부장님도 오셨네.”

　네 사람이 반갑다며 손을 잡고 잠시 인사를 하고 앉을 때 안도경의 매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님! 저는 먼저 일어서겠습니다. 제가 자주 못 오니까 둘 중에 하나가 정해서 확답을 주십시오. 약속 꼭 지키십시오.”

　천명구의 인상이 다시 한번 일그러질 때 안도경의 매형이 책을 고르고 있는 사람들과 독서실을 점검하듯이 획 둘러보면서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치고, 빙그레 웃으며 나가면서 이선근에게도 가볍게 목례를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애리가 안도경 매형의 아래 위를 유심히 보면서 말을 했다. 배에 힘도 제법 들어간 상태였다.

　“이봐요! 사람을 보면 아는 척이라고 하던가 싫으면 사과를 하고 가는 게 맞는 게 아니에요?”

　안도경 매형이 빙그레 웃으며 허리를 구십 도로 굽히며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그때 제가 망언을 했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런데 이 사람이 허리를 펴지 않았다. 그 모습에 화가 난 애리가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여긴 도서관이었다.

　“지금 저하고 장난치자는 거에요. 이 사람 정말 희한한 사람이네. 정식으로 사과하세요. 그때 말한 건 제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제가 당신 여동생이나 되는가요?”

　모든 시선을 끌어당겼다. 안도경이 매형이 간략하게 말했다.

　“제가 언제 오빠라고 불러달라 던가요? 먼저 오빠라고 해놓고선!”

　“제가 언제요?”

　제법 앙칼졌다. 이선근이 입을 막을 찰나를 놓쳐버렸다.

　“자기야! 내가 말하던 그 희한한 새끼가 이…….”

　애리가 몇 발짝 뒤로 물러서 이선근의 뒤에서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왜요? 말은 끝까지 해야죠. 이 새끼라고. 처음 봤을 때 주둥이 따라서 저한테 오빠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제가 주둥이 따라 다니지 마라고 야단을 쳤죠. 참! 이부장님! 요즘 회사 어떻게 돌아가요?”

　다짜고짜 나오는 회사 상황을 묻는 것도 문제지만 갑자기 김인태도 잘리고 부장으로 진급한 것도 이상했는데 이 사람이 그 걸 어떻게 알았을까? 이선근이 긴장하고 있었다. 회사 실정을 훤히 하는 말투도 이상해 이선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만 마주치고 있었다.

　말을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알아들었는지 고개만 끄덕이고 나가다가 고개를 갸웃할 일이 벌어졌다.

　김인태의 마누라였던 이훈희가 독서실에서 언제 나왔는지 희한한 놈 옆에 다정하게 붙어서 가고 있었다. 애리 눈이 똥그래져 이선근을 쳐다보고 있었다. 동시에 어깨를 들썩하기만 했다. 그때 또 다른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TV을 보던 천명구와 허병식이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잠깐 저게 무슨 소리야? 저기 울고 있는 여자 주두희 맞지?”

　천명구가 숨이 넘어 가면서 말을 했다. 허병식이 그 뒤를 이어 추측을 하고 있었다.

　“형님! 잠깐만! 방금 포대기에 가려진 시체 봤죠? 혹시 김인태 아냐? 얼핏 나온 얼굴이나 옷을 보니까 맨날 입고 다니던 골프 옷이던데!”

　아나운서가 목격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천명구 뒤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들었다.

　“한 사람이 저기 벤치에 앉아서 소주병을 통째로 나발 불듯이 들이키고 있을 때 몸이 조금 불편해 보인 사람이 지나치다가 술을 들이키는 사람을 유심히 보더니 내 돈 250만원 하면서 소주병을 빼앗아 머리를 찍었습니다. 피할 겨를도 없이 머리에서 피가 철철 흘러 내리는데...... 아이고 소름 끼쳐! 말도 마십시오. 그때 맞은 사람도 피를 철철 흘리며 빈 병을 휘둘러대는 데 무슨 칼 싸움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죽일 듯이 휘두르다가 피가 범벅이 된 채 멱살을 붙잡고 몸싸움을 벌이다가 강둑으로 미끄러져 굴러가서 강물에 빠져, 진짜로 죽어 버린 거죠. 깨진 술병을 휘둘러대서 우리가 말릴 수 없었어요. 말리다가 잘못되면 누가 나를 책임지겠습니까? 어눌하게 말하는 사람이 계속 250만원 내놔 하고, 다른 사람이 내만 먹었나? 하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다가 그렇게 비명횡사 했습니다.”

　그때 이선근은 시체의 옷을 보면서 허둥대며 택시를 타던 주두희가 떠올렸다. 시체를 건져 올려 거적으로 덮어 놓은 얼굴이 약간 밖으로 드러나 있었다. 김인태를 싫어하고 이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하는 바램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시체는 김인태와 많이 닮았고 옷도 어떤 여자에게 선물 받았다고 늘 자랑하던 골프 옷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