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리의 마음이 급해졌다. 혹시 주두희의 남편처럼 뇌진탕? 누워있는 이선근의 눈에 애리 눈이 점점 더 다가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선근의 눈에는 애리가 당장이라도 자기를 삼켜먹을 호랑이 같은 눈으로 보였다. 술도 적당히 마시지! 공포였다. 이선근은 누운 채로 허우적거리며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허깨비가 아닌 성난 처녀 귀신도 아닌 성난 아낙의 벌건 눈이 점점 이선근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거친 숨소리와 조율을 맞춘 차디찬 바람도 점점 더 이선근의 눈앞으로 몰아쳐 오고 있었다. 목소리는 앙칼졌다가 쇠 긁기는 소리로 바뀌다가 풍선 터지는 소리로 끝내 바뀌어버렸다.

　“아이 씨! 뭐야? 또 무슨 소리를 들었길래?”

　분명히 아내의 목소리가 맞았다. 그런데 살점이 떨리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옛말에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는 말이, 하필! 술 기운도 한몫 해, 떠오르고 말았다. 그런 마음 속에서도 마주친 아내의 눈이 해맑은 소녀의 눈처럼 귀엽기도 했다. 주두희의 추한 행위에 대한 상상도 덧붙여 떠오르고 있었다. 겨드랑을 간질이고 싶은 욕정과 욕망도 꿈틀댔다.

　애리가 아내가 아니고 아랫도리가 헤픈 주두희로 보이기도 했다. 다시 한번 머리를 흔들었다. 확실했다. 주두희다. 그래도 두드려보고 건너야 한다.

　“그 별 희한한 놈과 잤지?”

　술 취한 놈과 무슨 말을 하랴! 한숨이 나왔지만 억장도 무너졌다. 잊을만하면 전염병처럼 도지는 이 사람을 어떡해야 하나? 애리는 막막하기만 했다. 시작이 반이라더니 앞으로 술만 마시면 이렇게 재발 하지 않을까? 연애하다가, 헤어졌다가, 결혼했다가, 이혼했다가, 재결합했다가, 이전의 남자를 빌미로 추궁 당하는 듯한 이 기분은 또 뭘까? 내가 당신 말고 만난 남자나 있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한 놈도 없었다.

　그런데 왜? 땅이 꺼지고 있었다. 그때 아차! 이 사람이 만나러 간 사람이 천명구! 그래! 이 사람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기 시작한 때를 내가 왜 잊었지. 혹시 그 놈! 눈길 한번 주지 않았던 그 희한한 놈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나? 눈길조차도 주지 않고 나를 무시한 놈! 그런 놈 때문에 내가 왜 이런 모욕적인 오해를 받아야 하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멱살을 잡고 싶어 멱살을 잡았다. 누가 술에 취해 늘어진 사람에게 파 김치라는 표현을 넣었나?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김장을 하기 위해 절여둔 배추더미 같았다. 드르렁거리는 소리 뒤로 품어져 나오는 냄새. 주머니를 뒤졌다. 돈을 조금 더 줄걸. 후회도 뒤따랐다.

　갑갑한 마음도 마음이었지만 남편 입에서 품어져 나오는 술 냄새와 내장에서 용해돼 품어 나오는 배설물의 썩은 가스 냄새. 악취란 말이 무슨 말인지 마흔이 넘어서야 알게 해주는 오물과 폐수를 처리는 오 폐수 처리장을 남편이 품에 담고 다닐 줄이야. 방에 아니었다. 도저히 옆에 있을 수가 없어 밖으로 나왔다.

　정처 없이 걷는 게 이런 거구나!

　이런 생각을 할 때 초승달이 일렁거리며 지나치고 있었다. 풀벌레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있었다. 하늘을 쳐다봤다. 굽은 낫 같은 초승달 주위로 작은 별 몇 개가 초롱거리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초롱거리던 별은 보이지 않았다. 노란 초승달 만이 강물을 독차지해 은빛의 선을 긋고 있었다.

　누가 우리 부부 사이에 은빛도 아닌 검은 장막의 선을 그어 갈라 세우려 할까? 벌써 반 토막이 나고도 더 찢겨져 나가 삼분의 일로 굽어져 가라지는 초승달로 만들려고 할까? 겨드랑이에 두 주먹을 넣어 팔짱을 끼었다가 다시 내려 잠바 주머니에 양손을 넣었다가 별 짓을 다하며 이 생각 저 생각에 휩싸여 걸었다.

　운동을 하거나 데이트를 하며 지나치는 사람들이 눈길도 주지 않는 나에게 남편은 어떤 놈이 나와 잠자리를 했다고 술주정을 떨었나? 그 별 희한한 놈? 그 놈이 만약에 옆에 있으면 오해를 받느니 같이 자고 그런 말을 듣는 게 났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나치는 사람과 멀리 지나가는 차도 보고 있었다. 그를 기다린다는 듯한 착각과 민망함과 알 수 없는 두려움. 아랫도리가 축축했다. 창피했다. 모멸감도 밀려왔다.

　분산된 정신으로 얼마나 걸었는지 모를 정도까지 이르렀지만, 머리 속에는 단지 남편만 존재한 것 같았지만 아니었다. 머리 속에서 남편이란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고 어떻게 생겼는지도 잊은 그 희한한 놈만이 손을 잡고 걷기도 하고 뒤에서 어슬렁거리며 따라오기도 하고, 내 잡아봐라 하면서 뛰어가는 것 같기도 했다.

　검은 강변을 비추던 불빛이 사라질 무렵 뒤돌아 섰다. 그때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주머니에 동전 한푼 넣지 않고 나왔던 것이었다. 게다가 가로등이 없는 곳. 강변의 끝이었다. 별 생각 없이 걸은 것 같지만 머리에는 늘 그 희한한 놈이 있었는데 그도 도망치고 없었다. 그렇게 너무 오랫동안 너무 멀리 걸어버렸다.

　뛸까? 뛰면 잊혀질까? 애리는 뛰기 시작했다. 전속력으로 달렸다. 그러나 서른 뜀박질도 못하고 숨이 턱 막혔다. 구역질도 나려고 했다. 나이 마흔에 벌써 이러면 안되지! 그러나 마음뿐이었다.

　멀리 긴 의자가 보였다. 딱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길바닥에 앉는 것보다 낫겠단 생각이 들어 저기 가서 앉으려고 했지만 거기까지도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아니! 실제로 너무 멀었다. 헛웃음이 툭 나왔다. 이렇게 기력이 빠진 년 눈 앞에 세계 최고의 미남이 벌거벗고 기다려본들 뭣하리. 이런 년에게 무슨 놈의 바람이 났다고 헛소리를 지껄여대는지? 남편이 한심하기만 했다.

　꾸역꾸역 걸어가 의자에 옆에 앉으려고 했지만 저 여자도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닐까? 처량해 보였다. 방해하기 싫다는 마음이 앉기를 거부해 그냥 지나쳤다. 한참을 걸었다. 한참이라고 해봐야 열 걸음 정도. 고개를 뒤로 돌렸다. 처량한 자기를 보고 손을 잡아달라는 엉큼한 년! 그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손에 쥐가 나도록 손바닥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휴지라도 들고 왔으면 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나쳤던 어떤 사람도 혼자 걷는 자기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던 이유. 멀리서 관심 있게 쳐다 본 후 내린 그들의 판결. 눈물만 흘리지 않을 뿐. 저 여자만큼이나 처량한 걸음이었다. 가장 품위 있고 고상한 척 걸었던 이유가 처량해 보이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런 의도였지만 그 포즈가 보는 이의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처량한 걸음과 미친년의 걸음임을 깨달았다.

　강물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혼자는 외롭다는 생각이 덜컥 들어 자연스레 혼자 앉아서 눈물을 흘리는 여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도중에, 귀신에 홀린 듯이 그쪽으로 가고 있는 자신을 인지하고 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그건 자신을 인지한 게 아니었다.

　똑 같은 년이라는 모멸감에 미친 듯이 집으로 달려갔다. 눈물을 훔치는 그녀는 주두희이었다. 내가 왜 저년과 같아? 나는 아니야! 나는 그 놈과 눈도 못 마주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