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도 못 내밀고 서류 전형에서 탈락한 기분은 곧 모멸감을 가지고 왔다. 어울려서는 안 되는 부류라고 단정을 짓고 두희와의 만남뿐만 아니라 두희 주변 인물들에게 자신의 이름이 나오는 것조차 불쾌하게 여기고 차단해버린 사람에게, 철저히 배제된 기분이 가지고 오는 자아의 상실감마저 애리는 느끼고 있었다.

　애리가 두희와의 만남을 유달리 꺼려 하는 데는 환경이 한몫을 했다.

　두희는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새에 끼어들어 시끄럽게 떠드는 걸 좋아했지만 자신은 그런 환경을 싫어했다. 가게에 오는 손님들과 이런저런 살아가는 얘기를 도란도란하면서 돈도 버는 삶을 원해서 가게를 차렸다. 그리고 그런 삶을 지금 영위하고 있다.

　그랬던 내가 무얼 더 바라고 있는가?

　자문을 해봤지만 뚜렷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언제 일어섰는지 창가에 서 있었다. 지나치던 사람들이 진열해둔 옷을 보고 있었다. 밖에서 쳐다 보지만 말고 들어와서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구경만 하고 가도 된다는 그런 바램도 있었다.

　위층에서 바닥이나 벽을 뚫는 드릴이 돌아가는 소리라도 들렸으면 하는, 그런 심정으로 그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언제부턴가 근무 중이야 할 남편이 갑자기 가게를 들이닥쳐 몇 만원만 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남편이 그렇게 쳐들어오지 않아 엄청 편했다. 남편이 갑자기 돈이 필요할 때는 그 놈의 부장 때문이란 걸 잘 알고 있었고, 그런 날은 늘 고주망태가 돼 들어와 드러누운 남편의 이런저런 신세 한탄과 하소연도 들어줘야 했다.

　거의 매일 그렇게 술을 마시고도 부장이라는 놈이 죽지 않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 들어 돈을 얻으려 가게에 오지도 않고 퇴근하면 바로 집으로 가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가끔씩 가게 주위를 기웃거리며, 들어 왔다가 나갔다 하면서, 배고픈 아이마냥 문이 닫히길 기다리고 있을 때는, 조바심이 날 정도로 마음을 허둥대게 했지만 요즘은 전혀 그렇게도 하지 않았다. 조퇴하듯이 문을 일찍 닫게 하고, 가까운 시골의 한적한 길로 드라이브를 하다가 어두컴컴한 곳이 보이면 차를 세우고, 차 안에서 했던 민망한 짓은 아예 없어져버렸다.

　그렇다고 일찍 집으로 가서 같이 있다고 해서 차 안에서 했던 그런 사랑놀이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어둑해진 지 꽤 오래된 것 같았다. 오늘은 이유를 알아야겠다고 다짐을 하고 손님이 그만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리에는 하나 둘 불이 켜지고 있었다.

　그 시각에 애리 남편 회사의 부장인 김인태가 천명구의 주상복합아파트 지하에 있는 골프 연습장으로 들어 갔다. 천명구는 자기 건물에 살지도 않는 김인태가 오는 걸 굉장히 꺼려 했다.

　“사장님. 영업 좀 하십시오. 아무리 사장님 건물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회원이 없어가지고 전기세나 나오겠습니까?”

　정말 듣기 싫은 말을 ‘안녕하세요’ 나 ‘잘 지내시죠’ 처럼 먼저 하고, 서너 명 정도인 연습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눈살을 찌푸려, 못마땅한 표정으로 노려 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한심하다. 딱 그 표정이었다. 그때 천명구의 가슴이 덜컹 했다. 제발 오지랖만은 부르지 마라. 부릴 거면 차라리 허병식이 연습장에 가서 부려라.

　허병식이와 친한 동생 같은 놈이 여기에는 없다는 보장을 나는 절대로 못한다. 두 해전에 허병식이와 친한 동생이 지나치는 김에 연습장에 들렀다가 허병식이 채로 연습을 할 때였다.

　다른 사람들은 그 놈의 실력을 절 알아서 아무도 입을 대지 않았는데, 김인태만 처음 보는 그 놈에게 이래 쳐라 저래 쳐라, 그것도 반말로 입질을 하다가, 그 놈이 스크린 게임을 한판 붙자고 했다. 내기는 진 사람이 아구 통 한대 맞기였다. 그때 젊은 그 놈이 반말로 김인태의 염장을 파헤치는 바람에 김인태가 오기로 붙었다가 턱 주걱이 박살 난 적이 있었다.

　천명구 눈에서 나오는 가련한 눈빛의 의미를 알아차린 김인태가 고개를 휙 둘러, 커피 자판기 앞으로 가서 또 천명구의 비위를 거슬리게 하는 말을 했다.

　“아니! 이게 몇 푼 한다고 꼭 이백 원을 넣어야 합니까? 그러니 연습하러 오는 사람이 없지.”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 그냥 연습이나 하고 빨리 갔으면 하는 바램뿐이었지만 그나마 몇 명 되지 않는 고객 중 하나라 천명구는 입술을 부르르 떨며 참고 있었다. 그러나 김인태가 집에 갈 일이 만무했다. 김인태 집에는 대학생인 자식 둘과 중학교 선생인 마누라가 있었다. 한때는 마누라와 같이 손까지 잡고 사이 좋게 연습장에 오다가 한 순간에 마누라는 사라져버렸다.

　그건 천명구의 잘못이 절대로 아니었다.

　천명구가 골프 동아리 회원들과 골프를 치러가서 김인태의 마누라를 우연찮게 보게 되었다. 그 후로 자주도 보았다. 같이 짝을 맞춰 온 동반자도 항상 같은 인물이었다. 잔디를 걸을 때 가끔 짝도 바뀌어야 하는데 그들은 항상 신혼여행 온 부부처럼 껌 딱지처럼 붙어 있었고, 신혼여행이니 당연히 짝도 바꾸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무더운 여름에도 골프를 치고 나면 골프장 사우나에서 땀이라도 씻어내고 골프장에서 나가는 일반 사람들과 그들은 늘 도망치듯이 씻지도 않고 땀으로 끈적거려진 상태로 사라졌다.

　그 의미가 무엇이었겠는가?

　골프를 치는 사람들 중 이유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한번이 아니고 자주 마주친 후 김인태 마누라는 연습장에서 한 순간에 사라졌다. 그렇다고 천명구가 연습장을 접을 수는 없지 않은가? 부담스런 사람이 떠나는 건 당연한 이치이다. 그렇게 김인태 마누라는 알아서 사라져 버렸고 김인태는 지금 잠시 잠들기 전까지만 집에서 사라져 있는 상태였다.

　천명구는 가끔, ‘만약에 마누라가 선생이 아니고 평범한 주부라면?

　자신이 콩알만한 회사의 부장이 아니고 대기업의 부장이라면 같이 살고 있겠는가?’

　벌써 이혼할 놈이란 걸 김인태를 한번만이라도 접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얼른 연습하고 사라져주길 뻔히 알면서도 연습은 하지 않고 늘 하던 시건방진 자세인 한쪽 다리를 다른 한쪽 허벅지 위까지 올려 드러누울 정도로 소파에 기대 앉아 시간을 축낼 작정을 하고 있었다.

　“그 뭐라 했죠? 반반한 년들 데리고 다니는 그 새끼 이름이 뭐라고 했죠. 병식인가 뭔가. 그 새끼가 회원들 많이 뺏어갔죠? 보니까 우리 직원 마누라도 거기서 노는 것 같은데. 연습장이 무슨 엔조이 배필 소개소도 아니고 어떻게 그런 식으로 영업을 하는지. 세상 참 망조다. 망조! 바람난 년들이 은밀하게 바람 피우려고 하고 싶어하지 그렇게 큰 매장에서 피우고 싶어 하겠어요. 그렇게 소문나 있다고 소문 팍 내버리십시오. 그럼 전부 여기로 올 겁니다.”

　천명구는 큰소리로 웃을 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