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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유해화합물
작가 : llena
작품등록일 : 2018.12.4

이건 금기에 관한 이야기이자 약속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동시에 사랑의 정의를 다르게 쓰는 네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10화. 호흡.
작성일 : 19-01-04 16:06     조회 : 231     추천 : 0     분량 : 5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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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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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 최초의 기억이 뭐냐고 묻는다면, 세 살쯤이었던 것 같다. 어린이집 놀이터에서 코끼리 미끄럼틀을 빙빙 타고 내려가는 동안 슬펐다. 애들은 다 엄마 아빠 손잡고 갔는데 혼자 기다려야 하는 게.

 

 길고 칠흑 같은 미끄럼틀 끝에 빛은 한 번에 확, 쏟아졌다. 재미없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눈앞에 얼굴 하나가 튀어나왔다. 까만 머리에 씩씩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애가 배시시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집에 가자, 선아.’

 

 느리게 깜빡이는 눈꺼풀 사이로 파고드는 파장을 받아 상을 맺었다. 과거의 조각이 꿈이 되어 자신을 무겁게 눌러왔다. 여름인데도 바꾸지 않은 겨울 이불 때문일지도 모른다. 더위와 갑갑함에 못 이겨 자주 발로 차서 이불이 엉켜 선은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윙윙 돌아가는 선풍기 앞에 멍하니 앉았다. 바람에 뻗친 머리카락이 뒤로 날리고 선은 “아.”소리를 내며 메아리처럼 들었다. 조금 늘어져 있던 어깨를 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세먼지와 장마와 더위를 핑계로 미뤘던 대청소 날이었다. 집 안 곳곳 창문과 문을 열고선 먼지를 털어냈다. 케케묵은 추억들도 같이 떨어졌다.

 

 가냘프고 신비로운 분위기가 감돌던 다소 차가운 인상의 미인인 어머니가 몸을 숙여 뒤에서 팔을 둘러 안고 있는 아들은 환한 웃음을 보이고, 차분하고 정갈하게 웃는 아버지는 아주 작은 딸을 품에 안고 있는 사진은 퇴색되지 않고 액자 속에서 선명하다. 어제 일인 것처럼.

 

 집을 깨끗하게 정리한 선은 긴 팔에 긴 바지를 입고 마당으로 나와 밀짚모자를 쓰고 잡초를 뽑았다. 여름이면 생명력 좋은 풀들이 무럭무럭 자랐다. 제초제까지 뿌리고 나니 땀을 한 컵 가득 흘려 기력이 다 소진된 얼굴로 나무에 매달려 있는 그네의자에 몸을 눕혔다.

 

 밀짚모자를 얼굴에 덮어 햇살을 가렸지만 송송 난 구멍 사이로 빛이 살랑거렸다. 불어오는 산산한 바람에 그네가 연약하게 흔들렸다. 지금처럼 몸을 구기지 않고, 다리를 베고 누워 있어도 발바닥이 끝에 닿지 않던 시절도 있었다. 소리가 집 안을 가득 메우던 때도 있다. 이마에 닿는 입술과 떨어지지 않는 손이 익숙하던 나날도 있었다. 좀비가 되어버린 건 자신 같다.

 

 야옹. 작게 우는 소리에 선은 몸을 일으켰다. 얼마 전부터 엄마를 잃었는지 회색이 조금 섞인 아기 고양이는 정원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먹을 거 없어, 라고 단호히 말했는데도 녀석은 계속 이곳을 찾았다. 점점 말라가는 모습에 백기를 든 선은 사료와 물을 챙겨줬다.

 

 배가 볼록 나올 정도로 먹고는 나른하게 선의 허벅지에 기대 누웠다. 팔자 좋은 고양이를 선은 살살 쓰다듬었다. 진동이 오는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받았다.

 

 “-선아, 선아!”

 

 쾌청한 날의 날씨 같은 목소리는 아현이었다. 클럽을 같이 갔던 것도 어느 새 3주가 넘었다. 내일이면 수강 신청, 일주일 뒤면 개강이었다. 방학을 시작할 때만 해도 시간은 두 손 가득 쥐고도 남을 정도라 생각했는데 어느 새 텅텅 비어 있었다.

 

 “-수강 신청 교양 정했어? 이번에 뭐 들을까?”

 “난 아무거나 괜찮아.”

 “-너 아직 전공 시간표도 안 봤지?”

 “응.”

 

 과내에 아는 사람도 없고 무슨 수업을 듣든 크게 상관없어 선은 피 터지는 수강 신청이라는 전쟁터에서 느긋하게 접속했다. 남은 자리에 들어가거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학과사무실에 방문해 조율을 부탁했다. 그나마 아현과 듣는 교양이나 필수 영어 같은 과목만은 사수해냈다.

 

 “-있지, 선아.”

 

 정리를 끝내자 아현의 목소리는 아까와는 달리 촉촉해졌다.

 

 “응.”

 “-그게,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다?”

 

 전화기 너머의 사람은 아현이 분명한데도 낯설었다. 사랑을 초콜릿처럼 씹거나 사탕처럼 핥아댈 것 같은데도 사랑에 다소 낭만적인 이상이 있는 아현은 오히려 십자가처럼 봤다.

 

 설렘과 기대감, 행복감과 초조함이 같이 울렁울렁 밀려왔다. 사랑에 빠진 여자애는 보이지 않아도 세계에 꽃을 피운다. 고양이는 폴짝 뛰어 내려서는 통통 걸어갔다.

 

 “-이건, 만나서 얘기해. 떨려서 말 못하겠다.”

 

 전화를 끊은 선은 떨어진 허벅지의 온기에 조금 문질렀다. 작별하는 태양이 보내는 오렌지빛 물결을 보며 몸을 일으켰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핸드폰에는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 그리고 문자 한 통. [밥 안 먹었지? 나와.] 15분 전이었다. 선은 옷을 껴입고는 젖은 머리카락으로 집을 나왔다.

 

 문을 열자 스쿠터에 기대 앉아 이어폰을 끼고 고갤 까닥거리는 우주가 보였다. 어두운 파란색의 티셔츠에 찢어진 검정 바지를 입은 우주의 짧은 까만 앞머리를 만졌다. 평화롭던 눈썹이 저를 보자마자 대열을 헝클였다.

 

 “머리 다 말리고 나와야지.”

 “배고팠어.”

 “그래도 이게 뭐야.”

 

 우주는 한숨을 쉬었다. 안장 시트를 열어 거북이 등딱지 같은 가방에서 스포츠 타올을 꺼냈다. 선을 스쿠터에 앉혀 놓고는 물기 어린 머리카락 끝을 꾹꾹 눌렀다. 뒷덜미를 스치는 손가락이 아까의 체온 높은 어린 고양이와 비슷하다.

 

 선은 이마를 짚어보려 몸을 돌렸는데 눈앞에 우주가 있어서 손바닥 대신 제 이마를 갖다 댔다. 다행히 미지근했다. 근데 확 빨개진 우주 얼굴이 뒤로 밀려났다.

 

 “너, 진짜.”

 “감기 다시 걸렸나 해서.”

 

 우주는 짧은 머리카락을 손바닥을 헝클이곤 선에게 헬멧을 씌워줬다. 앞자리에 올라탄 우주의 등에 자연스럽게 밀착하자 소라에 가져다댄 파도소리마냥 고동이 생생히 들렸다.

 

 스스로의 의지로 감정을 깨끗하게 드러내는 세민과 달리 우주는 보여주려는 게 아니라 잘 숨기지 못한다. 아기 오리처럼, 삑삑거린다. 감정에 별로 섬세하지 못한 선이 알아차릴 정도니 온 세계 사람들이 다 알 거다.

 

 우주는 “좋아해.”라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사귀자.”도 물론. 우주를 안아주거나, 제가 안기거나, 우주가 손을 잡거나, 제가 손을 내미는 일에 대해도 의미를 묻지 않는다. 구태여 자신도 나서지 않지만.

 

 우주는 뭐 먹을지 잘 묻지 않는다. 선이 좋아하는 건 다 안다. 외관부터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가게는 우주가 레이블 계약을 하고 나서 데리고 온 적이 있는 고급 소고기 집이다. 예약까지 해놓은 방에 들어가 앉으니 금세 코스로 음식이 나왔다.

 

 “맛있게 먹는다?”

 “천천히, 많이 먹어.”

 

 친절과 한 우주는 어울리지 않는다.

 

 “수상한데.”

 “왜, 뭐, 뺏어먹는다?”

 

 그래, 이래야 한 우주지. 선은 부드러운 육질의 고기를 날름 집어 먹었다. 흡족함이 엿보이는 선의 입매를 보고 우주도 까칠한 눈에 힘을 풀고 그제야 젓가락질을 했다.

 

 훌륭한 저녁식사였다. 헬멧을 다시금 씌워주며 우주가 물었다.

 

 “잘 먹었어?”

 “응.”

 “그럼 밥값 하러 가자.”

 

 선이 의아함을 담은 눈을 오므리며 쳐다봤지만 우주는 모른 체했다. 선은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포만감은 사람을 느슨하게 만든다. 가볍고 너무 빠르지 않게 스쳐가는 도시의 밤풍경은 지나치게 밝고 과포화된 색깔들로 어수선하고 혼곤하다. 어둠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이 도시야 말로 백야겠지.

 

 아직 음원으로 출시되진 않았지만, 우주의 곡 중 <야夜>는 그런 가사를 담고 있다. ‘우리에겐 어둠에 잠길 시간도 필요해 빛을 쫓는 것도 되는 것도 비는 것도 잠시 멈추고 숨소리에 귀 기울여 당신에게 기대지 않고 홀로 눈을 감고 바닥으로 떨어져’

 

 선은 그 노래를 가장 많이 들었다. 우주 특유의 거칠고 낮은 목소리를 그대로 말하듯 담기기도 했고 해저에 사는 고래가 내는 듯한 울음 같은 비트까지도 마음에 들었다.

 

 가사의 한 구절이 귓가를 선회해 선은 입술을 벙긋거렸다. 스쿠터가 멈췄다. 은색의 커다란 건물은 THE HIDDEN 이 옆으로 누워져 크게 박혀 있었다.

 

 “피처링 해줘.”

 

 선은 눈을 깜빡이지 않고 가만히 우주를 쳐다봤다. 얼마 전에 우주는 여자 보컬 가이드를 요청했었다. 높지 않은 키에 길지 않은 소절이어서 간단히 했다.

 

 “보컬 구하려고 했는데 노래들은 형들이 네 목소리가 잘 어울린다고 그대로 보컬 가자고 그러더라고. 녹음은 나랑 엔지니어 형이랑 둘만 할 거라서 부담 안 가져도 돼.”

 

 선의 헬멧을 벗기곤 우주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매만져줬다.

 

 “노래 다 들려줄 거야?”

 

 우주는 수록곡 여섯 개 중에도 그렇고 여태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처음으로 이 곡을 숨겼다. 멜로디인 여자 보컬 하는 부분만 들려주곤 감췄다. 처음으로 작곡한 곡이면서. 예상치도 못한 질문이었는지 우주는 눈을 조금 찡그렸다.

 

 “발표되고 들어.”

 “노래의 전체적 흐름을 모르고 부르는 건 이상하잖아.”

 “몰랐는데 부른 버전 정도로 만족해. 그 느낌도 괜찮아.”

 “내가 모르는 한우주 노래는 없었는데.”

 

 바닥에 운동화 밑창을 닿고 일어나서는 선은 작게 중얼거렸다. 우주가 선의 팔목을 잡았다.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노려보는 눈이 매서운데 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웃었다. 마음 약해진 우주를 안다. 우주는 팔목을 놓고는 등을 돌려 저벅 저벅 걸어갔다.

 

 언젠가 우주에게 제가 필요 없어질 걸 안다. 언젠가 이렇게 찌푸리는 얼굴보다 텔레비전 속에서 웃는 모습을, 녹음하는 우주보다 완성된 노래를, 더 많이 만나게 될 거다. 모든 건 아름답게 피우는 시기가 있으면 꽃잎을 보내줘야 하는 때도 있으니까. 그건 그리 멀지 않을 테고 미련도 없다.

 

 엘리베이터는 4층으로 올라갔다. 녹음실에 들어가자 기다리고 있던 엔지니어와 인사를 가볍게 나누고는 선은 우주를 따라 부스로 들어갔다. 우주는 헤드폰을 쓰고 음량을 듣더니 마이크 높이를 맞춰주곤 소리를 내게 시켰다. 아, 아. 거리는 옆얼굴은 열여덟 때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데도 생경하다.

 

 아현도, 우주도, 다 한 발씩 내딛는다. 어디론가, 어딘가로.

 

 “긴장하지 말고. 그냥 부르면 돼.”

 

 우주는 헤드폰을 씌어주곤 부스를 나갔다. 조금 낮은 조명의 부스는 유리창 바깥이 대조적으로 너무 밝아서인지 아득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그린 음표에 우주의 목소리를 따라 적은 가사, 선은 악보를 꼭 잡으며 엷게 막혀오는 숨을 겨우 틔어냈다.

 

 “like blue, blue, adiantum blue. 적시고 싶은 건지, 말라버리고 싶은 건지.

 like blue, blue, adiantum blue. 헤엄치고 싶은 건지, 가라앉고 싶은 건지.”

 

 이 색은 밤바다의 푸름에 가깝다. 깊이를 알 수 없고 아름다움이나 찬연함 보다 두려움과 쓸쓸함이 먼저 드는, 몸을 내던지면 그대로 삼켜질 것만 같은, 눈을 감기만 해도 내려앉는, 그런 블루.

 

 선은 산소가 모자란 것처럼 느껴졌다. 벌컥 문이 열리고 우주가 파리한 선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선아.”

 

 잠을 깨우듯 선명한 목소리.

 

 “숨 쉬어.”

 

 아주 찬 공기가 맞고 싶다. 냉정하고 자비 없이 자신의 뺨을 내리쳤으면 좋겠다. 옅고 빠른 호흡을 뱉으며 어지럼증을 느꼈다. 우주는 그대로 입술을 맞춰왔다.

 

 어깨 너머로 녹음실 문이 열리고 거기엔, 바삭바삭 부서지는 햇살이 서 있었다.

 

 아아.

 약속했잖아.

 

 선은 눈을 감으며, 호흡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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