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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로즈 앤 스노우
작가 : 쿠페
작품등록일 : 2018.12.31

옛 동료들에게 쫓기게 된 두 킬러의 이야기

 
1
작성일 : 18-12-31 23:48     조회 : 290     추천 : 0     분량 : 8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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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씨구. 갈수록 가관이네.”

  “시끄러.”

  블랑코는 투덜거리며 쓰레기더미에서 몸을 일으켰다. 초겨울 첫눈처럼 새하얗던 양복은 군데군데 얼룩지고 빛이 날 정도로 닦아져 있던 구두도 먼지로 흐려져 있었다. 유일하게 변함없는 부분은 수트 안에 입은 검은 셔츠 정도였다. 로제가 가볍게 혀를 찼다.

  “매번 옷을 더럽힐 거면서 왜 흰색(Blanc) 같은 걸 고른 건지. 얼룩무늬(Moucheté)라고 부르는 게 낫지 않아?”

  “누군 좋아서 고른 줄 알아? 나도 맘에 안 들지만 다 의미가 있는 거라고.”

  “어이구 그러셔?”

  “그런 의미에서 넌 편하겠네. 일 한 두 개 정도 해치워도 별로 티가 나지도 않을 테니.”

  하얀 정장을 입은 킬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빨갛게 차려 입은 동료에게 쏘아붙였다. 그녀는 블랑코만큼이나 특이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빨간머리를 하나로 모아 등 뒤에서 묶고 의사복과 닮았지만 역시 붉은색 계통의 색상으로 물든 가운을 롱코트처럼 걸쳐 입고 있었다. 코끝에 걸친 안경은 그녀에게 지적인 분위기를 더했지만 입술에 발라진 새빨간 립은 안경과 대비돼 묘하게 색정적인 느낌을 주었다.

  로제는 농염한 입매를 올려 사납게 미소 지었다.

  “어머. 그렇지만도 않아. 피는 산화하면 갈변하니까. 이래봬도 별로 묻히지 않도록 신경 쓰고 있다구.”

  “그래서 신경 쓴 결과가 이거냐?”

  블랑코는 보란 듯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빼곡히 들어선 빌딩의 사이, 오수에 반사된 네온 빛이 쓰레기 몇 개만 비추고 있던 골목은 때 아닌 손님들로 이제껏 없던 만실을 이루고 있었다. 하나같이 검은 수트를 갖춰 입은 것으로 보아 복장 매너는 충분히 훌륭한 것 같았지만 안타깝게도 손님들은 그 이상의 예의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무례를 탓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누구라도 사지 일부가 기형적으로 꺾여있거나 몸 어딘가에 구멍이 한두 군데 정도 뚫린 상태에선 장소를 가리지 않고 드러누워 버리곤 하는 법이다. 게다가 여기엔 그들 말고 달리 사람이라곤 없었을 뿐더러 유이하게 있는 두 명은 이런 종류의 무례에 퍽 관대한 듯 보였다. 어쨌거나 그들의 무례함을 야기한 장본인은 그 이인조였으므로.

  수개월에 걸쳐 진행해온 일이 무사히 끝난 기념으로 펠먼 시내에서 조촐한 자축 파티를 벌이던 두 킬러가 느닷없는 습격을 받은 것이 사흘 전의 일이었다. 완전한 방심 상태에서 이루어진 기습은 두 사람을 당황시키기에 충분했지만 숱하게 수라장을 넘는 동안 몸에 본능처럼 배어버린 습관은 그들의 객사를 쉽게 허용하지 않았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습격은 사흘 내내 이어졌다. 실로 끈질기다고 할 만한 추격을 받아내며 적에 대해 파악한 두 사람은 마침내 사흘째가 되던 날 역으로 그들을 유인해내는 것에 성공했다.

  “누워있는 게 나인 것보단 옷 좀 더럽히는 게 낫지. 넌 눕기도 했고 옷도 더럽혔지만.”

  “말해두겠는데, 마지막에 나온 놈이 비겁하게 뒤에서 덤벼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어.”

  “그래, 어련하시겠니.”

  으르렁거리는 블랑코를 무시하고 쓰러져 있는 남자들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로제는 그 중 하나를 거칠게 뒤집었다. 피를 흘리며 가쁜 숨을 내쉬는 그 남자는 거의 죽은 것과 다름없어 보이긴 했지만 어쨌든 아직 살아있었다. 로제는 그 사실에 만족했다.

  “자, 친구. 잘 봐. 이게 뭔지 알겠어?”

  로제는 그의 눈앞에 작은 병 하나를 흔들어보였다.

  “특별 제작된 응고제야. 원래는 마시면 3분 안에 혈액을 굳히고 혈관을 막는 극약이지만 응용하면 이런 사용법도 가능하지.”

  로제는 조심스런 동작으로 약을 한 방울 손가락에 묻혀 남자의 볼에 난 상처에 문질렀다. 금세 벌어진 상처가 굳으며 조금씩 배어나오던 피가 멎었다.

  “내가 원하는 걸 말해주면 이걸 주겠어. 어때, 꽤 괜찮은 거래지?”

  로제가 남자의 뺨을 쓰다듬으며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나 말야,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거든. 이렇게 많은 동업자에게 갑자기 인기를 얻는다는 거. 최근에 해치운 타겟의 관계자가 냄새를 맡았나하고 생각했지만, 뭔가 석연치 않더라고.

  우리는 칼이야. 예리하게 갈려서 누군가의 손에 휘둘러지는 칼. 뼈를 부수고 심장을 찌르는 건 우리의 역할이지만 그 살의는 우리의 것이 아니지. 복수를 할 만한 머리와 능력이 있는 작자라면 칼을 부러트리려 애쓰기보다 칼을 쥔 놈을 찌르려 할 거야. 게다가 정확히 우리를 노리고 왔다는 것도 이상해. 동네 양아치한테 고용되는 어중이떠중이도 아니고, 엄연히 조직에 소속된 회원이라고. 흥신소에 좀 캐물어본다고 우리 존재를 파악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씀. 아~무래도 냄새가 난단 말이지.”

  로제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뺨을 타고 천천히 내려가던 손은 정확히 피로 물든 남자의 옷 위에서 멈췄다.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한 남자에게 로제가 속삭였다.

  “이상의 사실들로 내가 내린 결론은 조직의 윗대가리 중 누군가가 우리를 제거하려 한다는 건데…… 그런데 그게 누구인지는 짐작이 안 가네? 릴라 영감인가? 시뇨르 오로인가? 그것도 아니면 그레이 그 재수탱인가?”

  “난 아무것도…… 으아아악!”

  “그래. 물론 자기는 아무것도 모르겠지. 그래서 자기가 기억을 떠올릴 수 있게 내가 도움을 좀 주고자 해.”

  총알을 맞은 환부에 손가락을 쑤셔 넣는 획기적인 교수법이 남자의 지적 성취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그에게 협조할 마음이 들게 한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거칠게 숨을 몇 번 내쉰 남자는 땀이 송글송글한 얼굴을 잔뜩 구기며 더듬더듬 말을 뱉어냈다.

  “이런다고…… 우, 운명을…… 거역하진 못해. 하, 한 번 조직에 노려진 이상…… 너흰 두 번 다시…… 예전의 생활로는 못 돌아가.”

  로제는 사랑스러운 손길로 남자의 뺨을 쓰다듬었다.

  “어쩜…… 다 죽어가는 처지에 우리 걱정까지 해주고. 귀여워 죽겠네. 하지만 걱정 마, 자기야.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자기는 우리를 죽이라고 명령한 놈이 누군지만 알려주면 돼.”

  남자는 고통인지 연민인지 모를 눈으로 말없이 로제를 노려본 후 무겁게 입을 열었다.

  “누아르(Noir)야. 그가 우릴 보냈어.”

  여유 넘치던 로제의 표정이 한순간 굳었다. 그녀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확실해? 지금 그 말 책임질 수 있는 거야? 죽어가는 와중이라고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간 목에 청산가리를 들이 부어줄 줄 알아.”

  남자는 흐릿한 눈빛으로 침묵했다. 그와 눈을 맞추던 로제가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남자는 죽어있었다.

  “끝났어? 수확은 좀 있었나?”

  블랑코가 다가왔지만 로제는 그 자리에 선 채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블랑코가 재차 부르자 그제야 로제는 파트너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야. 그런 얼굴이 되어선?”

  로제는 블랑코와 시선을 맞추지 않고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 것도 아니야. 헛소리를 하더라고.”

  “무슨 소리를 했길래?”

  “들을 가치도 없어. 헛소리가 분명해.”

  “그래. 어지간히 대단한 헛소리인 건 알겠어. 근데 그게 어떤 내용인지 같이 좀 알자구.”

  애먼 담벼락을 철천지원수처럼 노려보던 로제가 지나가는 말처럼 툭 뱉었다.

  “누아르가 우릴 죽이려 한대.”

  이번에는 블랑코가 침묵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블랑코는 품에서 담배갑을 꺼내들고 그 속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허공을 향해 후우 하고 연기를 뱉은 블랑코는 그 연기가 모두 바람에 흩어질 때까지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헛소리네.”

  “그렇지? 헛소리야.”

  “응. 헛소리네.”

  로제와 블랑코는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담배 한 개비가 수명을 거의 다 해 갈 즈음 블랑코가 말했다.

  “있지……. 만약에 말인데. 물론 그럴 리는 없지만 세상에는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그 만에 하나라는 게 일어나서, 그러니까 만약에 그놈이 한 말이 헛소리가 아니라면…….”

  “…….”

  “……그럼 어떡하지?”

  “……아아악!”

  로제가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담벼락을 향해 돌멩이를 집어던지며 악을 질렀다.

  “왜! 대체 왜! 우리가 무슨 짓을 했다고 보스가 우릴 죽이려 하는 건데?”

  “그야 모르지. 우리 뭔가 알아선 안 될 걸 알아버렸나?”

  로제의 몸이 우뚝 경직됐다. 고장 난 로봇처럼 고개를 돌린 로제의 눈에는 자기의심적인 경악이 가득 담겨 있었다. 누구라도 뭔가 숨기는 게 있지 않냐고 추궁하고 싶어질 만한 눈빛이었고 블랑코 역시 그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너 뭔가 숨기고 있지?”

  “아, 아, 아, 아니? 전혀 아, 아, 아닌데…?”

  로제의 마지막 말은 원래의 음가를 이탈해서 무슨 억양인지도 알아듣기 어려웠다. 블랑코는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파트너의 어깨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말했다.

  “당장 말하지 못해 이년아?”

  로제는 블랑코를 잠시 원망스럽게 바라보다가 코트 안감을 뒤적이더니 그 속에서 뭔가를 꺼내들었다. 고풍스럽게 장식된 그것은 얼핏 조그마한 브로치나 핀으로 보였다. 하지만 블랑코는 그것이 뭔지 알아보았다.

  “메모리칩이잖아? 어디서 난 거야?”

  “저번 의뢰 타겟한테서.”

  블랑코와 로제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블랑코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펠먼에서? 마르티네의 보스가 가지고 있던 물건이라고?”

  로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타겟과 접촉했을 때 슬쩍했어. 뭔진 모르지만 마피아 보스가 품에 가지고 다닐 정도니 비싸게 팔 수 있을 것 같아서.”

  “허어…….”

  블랑코가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었다.

  “내용은? 확인해봤어?”

  “해봤지. 그런데 암호화 돼 있었어. 너나 나나 컴퓨터랑은 안 친하잖아?”

  블랑코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입을 닫았다. 한참 침묵을 흘리던 블랑코는 USB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누아르가 우릴 죽이려 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라고 생각해?”

  “제리코 마르티네는 편집증적인 안전주의를 가진 작자였어. 자신의 측근조차도 필요 이상으로 신용하지 않을 정도로. 그런 자가 직접 가지고 다녔던 물건이 별 의미 없는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워.

  게다가 달리 죽어야 하는 이유로 생각나는 게 없잖아. 우리, 조직에서도 제법 잘 나가는 편이니까 정리해고 같은 시답잖은 이유는 아닐 테고. 사칙 위반, 기밀 유출, 뭐 하나 짐작 가는 이유도 없어. 하지만 누아르가 별로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사실을 제리코가 알고 있었다면……. 그 입막음을 위해 우릴 보낸 거였다면 모든 게 들어맞아. 그리고 이젠 그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우리마저 제거하려는 거지.”

  “흠…… 그렇군.”

  블랑코는 모든 것이 명쾌해졌다는 듯 팔짱을 끼었다.

  “요컨대 너 혼자 벌인 일 때문이라는 거지? 그럼 네가 잡혀가면 난 무사하겠군.”

  “어……?”

  로제가 당황해서 눈을 깜빡이는 사이 블랑코가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의 번호를 눌렀다.

  “깔끔하게 널 팔아넘기고 난 이 일에서 빠지련다.”

  “야! 그렇게 나오기야!?”

  로제가 울상이 되어 블랑코의 손에 매달렸다.

  “이거 놔! 그러게 저지르기 전에 잘 생각했어야지.”

  “기, 기다려봐. 너 나한테 빚이 있잖아. 실수한 것도 몇 번 모른 척 해줬고 내가 살려준 적도 있잖아!”

  “그리고 나도 그만큼 너를 살려줬지. 이봐. 너랑 일한지는 오래됐지만 이번 일은 경우가 완전히 달라. 배후가 여느 간부급 정도였다면 나도 네 편을 들어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번에 뒤에 있는 건 누아르잖아. 그가 직접 움직이면 어떤 꼴이 나는지 너도 모르진 않을 거 아냐. 원망하지 말라고는 하지 않을게. 근데 조금만 원망해라.”

  블랑코는 손가락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제가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블랑코는 가볍게 그녀의 팔을 잡아챘다. 수준급의 움직임을 구사할 수 있는 로제였지만 육탄전은 그녀의 전공이 아니었다. 반면 그녀의 파트너인 하얀 거한은 다소 멍청이이긴 했지만 격투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멍청이였다. 로제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지금 전화를 걸면 너는 스스로를 누아르에게 갖다 바치는 꼴이 될 거야!”

  블랑코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무슨 말이야?”

  속으로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쉰 로제는 곧바로 긴장의 끈을 다잡았다. 그녀는 자신이 할 일을 잘 알고 있었다.

  “조직의 입장에서 생각해봐. 저들은 단지 메모리칩의 소유자를 죽이려는 게 아냐. 제리코 마르티네가 가지고 있던 정보를 알지도 모르는 사람을 모두 제거하고 싶은 거지. 어쩌면 그들은 메모리칩 같은 게 있는지도 모를 거야. 그들은 그저 위험 요소를 남겨두고 싶어 하지 않을 뿐이야. 네가 나와 함께 펠먼에서 일을 수행하고, 제리코와 접촉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 이상 너와 나는 그들에게 똑같은 제거 대상일걸?”

  “으음…….”

  블랑코가 고민하는 표정이 되었다. 로제는 능숙한 사냥꾼처럼 즉시 추격에 나섰다.

  “우린 진작에 한 배를 탄 거야. 펠먼에서 제리코 마르티네를 죽인 그 순간에 이미. 그렇다면 서로를 팔아넘기려고 할 게 아니라 서로 도우며 이 상황을 해결해야 하지 않겠어?”

  “누아르의 타겟이 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생각해? 어설프게 반항해서 그의 화를 돋우는 것보다 차라리 널 팔아넘겨서 내 생존확률을 조금이라도 더 높이는 게 좋지 않을까?”

  로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가장 반박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누아르는 그들의 상사이기 이전에 전설적인 암살자였다. 그들의 조직이 가진 명성은 현역 시절 누아르가 쌓아올린 시체의 높이에 비례했다. 로제가 침묵하자 블랑코가 그것 보라는 표정을 지었다.

  로제는 악에 받쳐서 소리 질렀다.

  “그럼 어디 전화해봐! 본사 고문실에서 누아르의 눈을 보고 난 그런 정보 따위 모른다, 전부 이 여자 혼자 한 짓이다 하고 주장해봐! 어쩌면 진심이 통해서 누아르가 믿어줄지도 모르겠네. 운이 좋으면 날 잡아다 바친 값으로 보너스도 좀 받고. 그래, 전화해. 전화하면 되겠네!”

  “…….”

  블랑코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변했다. 핸드폰을 쥔 손이 축 내려갔다. 기회를 포착한 로제가 빠르게 움직였다. 핸드폰을 낚아챈 로제는 그것을 품 안에 당기고 앙칼지게 블랑코를 쏘아봤다.

  “어, 야!”

  “잘 들어, 블랑코. 어차피 이대로 가면 너나 나나 얼마 안 가 죽어. 그럴 거라면 목숨 걸고 도박이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어? 죽음이 담보되어 있는데 잃어봐야 더 밑질 것도 없잖아.”

  블랑코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로제를 바라봤다. 로제도 그 못지않게 찡그린 얼굴로 되돌려 주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들은 서로를 향해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이상한 모습이 되었다.

  로제와 누가 더 과감하게 얼굴을 구길 수 있는지를 두고 경쟁하던 블랑코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도박, 승산은 있는 거야?”

  “없어. 하지만 계획은 있지.”

  블랑코는 마뜩찮다는 기색을 온몸으로 뿜어내며 머리를 긁적였다.

  “어떻게 할 생각인데?”

  “어떤 적을 상대하려고 해도 일단은 우리가 가진 것부터 알아야지. 우리가 놈들보다 앞서 있는 게 뭐라고 생각해?”

  “어…… 아직 살아있는 거?”

  “……조직에게 쫓기고 있는 걸 감안하면 고무적인 성과라고 볼 순 있겠지. 하지만 그건 최종적인 목표 같은 거고 이점이라고 할 수는 없지.”

  로제가 은밀한 동작으로 손바닥을 펴보였다. 그 위에는 예의 USB가 다소곳이 놓여있었다.

  “이거. 놈들이 그렇게 원하는 게 이거라면 역으로 우리 무기가 될 수 있을 거야. 메모리칩을 해석해서 뭐가 들었는지 알아낸다면 우리 목숨값 정돈 만들 수 있을지도 몰라. 잘하면 놈들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을지도 모르지.”

  “누아르는 협박이 통하는 상대가 아냐.”

  “그래. 하지만 거래는 통할지도 모르잖아?”

  블랑코는 세상의 고뇌를 모두 끌어안은 철학자처럼 고민하기 시작했다. 바라보던 로제가 조금만 더 있으면 과부하를 일으킨 머리에서 연기가 올라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할 무렵 블랑코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알았어. 같이 움직이지. 단, 네 계획이 맘에 안 들거나 다른 쪽으로 움직이는 게 더 가망 있어 보인다면 난 주저 없이 그쪽에 붙을 거야.”

  속으로 환호성을 지른 로제는 그것을 내색하지 않고 짐짓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훌륭한 사냥꾼은 다 잡은 사냥감에도 방심하지 않는 법이다.

  블랑코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내키지 않는 듯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로제는 이제는 공범자가 된 직장 동료에게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전 직장 동료였던 현 공범자는 그들의 기념비적인 첫 공모에 대해 신중한 태도로 제정신이냐는 질의를 개진했고 로제는 뚱한 표정으로 발언자를 째림으로써 그것을 정중하게 기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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