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녹 자신은 브리티아에 사는 국민이 아닌 외국인인데 자국민도 올까말까 한 건물에 들어와 있었다. 자신을 도와준 고마움 마음 반과 명령을 내리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얼떨결에 휩쓸린 마음 반으로 자신은 이곳에 서 있었다. 브리티아 수도의 치안과 안전을 담당하는 보안부 본부의 건물 안에. 그것도 이 건물이 세워진 목적과 같은 이유로 온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명령 때문에 이곳에 발을 디딜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에녹은 명령 이라는 단호하고 격해 보이는 단어로 표현하고 싶지 않았다. 상대방에게 부탁을 했지만 그 상대방이 받아들일 것인지 뜻을 묻지 않은 것은 틀림없는 명령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명령을 내린 그 누군가는 에녹이 태어나 처음 얼굴을 맞댄 사이였다. 마찬가지로 리안 경이란 사람도 에녹에겐 생소했다.
그는 에녹에게 칼을 보안부에 있는 리안 경에게 전달해 달라고 했다. 정확히는 리안 경에게 갖다 주면 문제를 해결해줄 거라고 했지만 문제가 해결된 지금 이 칼을 갖다 줘야 하는 건 에녹의 몫이었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인지 자신의 미련함에 기가 막혀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벌어진 매듭 짓고 가야했다. 그리고 이 칼은 꽤나 좋아보였다. 혹시 성과 이름이 적혀 있을 지도 몰라 잠시 칼을 뽑았었는데 아르덴의 유명한 무기 공방의 장인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아르덴의 유명한 공방에서 만드는 물건들은 평민의 평균 한 달치 생활비를 훌쩍 넘는 가격이다.
겉으로 보기엔 일반 칼과 다름이 없어 보이지만 칼집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칼과 칼집의 내부가 닫지 않은 거리를 유지하며 제작되어 있었고, 칼도 마모나 파손 없이 날이 서 있었다. 즉, 이 칼의 주인이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이런 걸 가져가봐야 괜히 나중에 문제가 생길 게 뻔했다. 막말로 이렇게 이름 있는 물건은 팔 수도 없다.
그리고 칼에는 자신이 찾고자 하는 주인의 성이라던가 이름은 찾지 못했지만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펼쳐진 책 위에 꽃과 흰 깃털 문양이었다. 이런 경우에는 귀족일 가능성이 높았다. 모든 문양이 귀족 가문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문양을 귀족 가문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에녹은 빨리 이 불길하고 불편한 물건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근데 이거 설마 훔친 물건 아니야? 주인한테 전해줬다가 내가 대신 도둑으로 오해받아 여기서 못 나가는 거 아니야? 이거 나한테 명령 내린 놈이 도둑놈 아니야?’
에녹은 그런 불길한 생각이 들자 층별 안내 표지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가야돼? 말아야 돼? 갔다가 오해 받아서 내가 아까 받았던 햇빛이 내 인생에서 마지막이면 어떡하지? 그럼 그냥 돌아가자.’
에녹은 표지판에서 등을 돌려 몇 발자국 걸어갔다가 다시 멈췄다.
‘아니야, 아니야… 이런 건 갖고 있어도 문제고 어디 팔아도 문제야. 가만 있어봐.’
에녹은 곰곰이 생각하다 중요한 사실에 눈에 별이 팡 하고 보였다 살아지는 것 같았다.
‘그래! 이거 시킨 놈도 주인 놈도 둘 다 모르는 놈이고, 그 두 놈도 나를 모르고. 그럼 내가 이 칼을 수도 어딘가에 떨어뜨리면 누군가 주워 가서 주인 놈한테 가져다주던지 아니면 재주껏 팔 던지 알아서 하겠지! 왜 내가 그 생각을 못했지?’
에녹은 그렇게 결론을 내리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때였다.
“어이, 이봐. 여기서 계속 왔다갔다 거리는데 어디 누굴 찾으시는 겁니까?”
에녹은 누군가 등을 두드리며 말을 걸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이 건물을 훤히 꿰뚫고 있는 사람이었다. 남색 제복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아, 아닙니다. 잘못 들어왔습니다.”
“아닌 거 같은데? 뭐야? 친절하게 알려줄 테니까 말해보쇼.”
에녹은 그의 친절에 괴리감이 느껴졌다. 말은 친절하게 라고 했지만 그의 표정과 몸짓이 친절과는 거리가 멀어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전체적으로 근육으로 울퉁불퉁 했고, 성인 여자 허리 만 한 팔뚝은 친절과 상냥함과 거리가 멀어보였다.
“아닙니다. 정말 잘못 들어왔습니다.”
에녹은 괜히 의심받고 싶지 않아 그 말만 하고 그를 지나치려고 했다. 그런 모습이 그에겐 허둥지둥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에녹의 앞을 막아섰습니다.
“여기서 뭔가 고민하는 듯 왔다 갔다 하시다가 갑자기 가시는 건 무슨 경우랍니까?”
“죄, 죄송합니다.”
에녹은 이런 상황에 대해 대처해 본 적 없어서 자신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사과의 말이 먼저 나갔다.
“아니, 정말 도와드리려고 하는 겁니다.”
그는 당황스러워 더듬은 말을 그가 무서워서 그런 줄 알고 상냥하게 말하는 것 같았다.
“괘, 괜찮습니다.”
“거, 참. 제가 도와드린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꾸 멀어지는 에녹을 잡으려고 했다. 그가 에녹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에녹은 재빠르게 피했고, 그의 손은 허공에 뜨게 되었다.
“…”
그는 에녹을 보며 약간 놀란 표정이었다. 에녹은 자신의 거부가 너무도 격렬해서 인지 아니면 그의 생각보다 잽싼 행동에 놀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제가 생긴 게 우락부락해서 그렇지, 무서운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그는 에녹을 또 다시 잡으려고 뻗었다. 에녹은 잽싸게 그의 손길을 피했다.
“?”
그는 에녹을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보기와 달리 자신이 너무도 재빨라 그가 놀란 것 같다고 에녹은 생각했다. 그는 다시 에녹을 잡으려고 했다. 이번에는 한 번의 시도 정도가 아니었다. 오른손으로 잡으려 했다가 안 잡히니 왼손을 뻗었고 다시 잡히지 않으니 오른손을 또 다시 뻗었다. 오른손‧왼손 번갈아 쓰며 연속적으로 에녹을 잡으려고 했다. 에녹은 속으로 ‘히익’ 외치면서 요리조리 그의 손길을 피했다.
“허어… 보통이 아니십니다?”
에녹은 이제 와서야 피하지 말고 잡혔어야 했나 싶었다. 그의 얼굴은 마치 ‘호오, 뭐 이런 재밌는 게 다 있나.’ 라는 만족감이 있는 듯했다. 그냥 뭐라 말하기 전에 얼른 도망갔어야 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여자는 날카로운 목소리만큼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눈매가 위로 올라가서 더 그렇게 보이기도 하는 것 같았다.
“아… 이 분이 이 건물에서 길을 잃으신 거 같아서 도와 드리려고 하고 있었지. 근데 너는 여기 웬일이야? 너 그만 두지 않았어? 그렇게 들었던 거 같은데…”
“맞아. 그만 뒀어. 남한테 피해 줘 놓고 죄책감 일도 없는 놈들 보는 것도 진절머리 나고 레테나퀴스랑 매번 부딪치는 것도 짜증나서.”
“그럼 여기 더 이상 볼 일 없는데 왜 온 거야?”
“리안 경께 뭐 좀 물어보려고.”
“?”
“아침부터 뭐 일이 좀 있었어. 신원이 좀 불확실한 사람들이 있어서 확인 차… 뭐, 아무튼. 급해서 먼저 가볼게. 근데 저 분 그냥 가시는데?”
여자의 말에 그는 거의 뛰다시피 건물을 나가려는 에녹을 보았다. 그가 보기엔 참 저 소년이 특이했다.
여자는 달아나는 에녹의 달리는 모습을 보다가 눈에 익은 물건이 보였다. 그가 움직이면서 펄럭이는 후드 사이로 익숙한 칼집이 보였다.
여자의 시선은 에녹에게 고정한 채 남자에게 말했다.
“야야, 저거 잠깐 잡아봐.”
“응? 왜?”
“저거 좀 이상한데? 리안 경의 칼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그 말에 남자는 에녹에게 뛰어갔다. 덩치가 커서 둔한 느낌 때문에 달리기가 빠르지 않을 것 같은데 그는 금세 에녹을 따라잡았다.
“헉, 왜 그러십니까?”
에녹은 갑자기 따라온 남자 때문에 저도 모르게 숨이 컥 막혀 당황한 소리를 냈다.
“이보시오, 잠시 좀 멈춰보시오.”
“왜, 왜 그러십니까?”
에녹은 자신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말을 왜 더듬나 자기 스스로에게 묻고 싶었다.
“아, 일단 잠시 멈춰보시오. 확인할 게 있어서 그럽니다.”
그는 갑작스럽게 폭발적인 속력을 내서 힘들어서 그런건지 에녹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지 아까와 다르게 인상을 계속 쓰고 있었다. 에녹은 그가 인상까지 쓰자 그가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을 잡는 직업이 천직처럼 보였다.
“급한 일 아니면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아까 도움 주시려 던 거 너무 감사합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잠깐이면 됩니다.”
에녹은 멈춰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괜히 복잡한 문제에 얽히고 싶지 않았다. 외국인인 자신이 여기서 무슨 일이 생기면 여러모로 피곤하다. 특히나 자신은 라키아의 보호 아래 있을 수밖에 없어서 라키아까지 같이 얽힌다.
게다가 라키아와 자신은 그냥 다른 나라에서 태어난 외국인이 아니라 브리티아에서 이민을 갔다고 할 수 있는 외국인이었다. 일이 커져서 우리가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누군가가 들추고, 과거에 얽힌 사람들이 자신들을 찾기 시작하면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아팠다.
하지만 사실 에녹이 제일 싫은 것은 무슨 일이 생겨서 라키아에게 의지해야하는 상황이다. 분명 라키아는 자신에게 빚을 졌다며 셈을 정확히 해야 한다고 할 것이다. 해야 하지만 라키아 본인이 귀찮아하거나 아님 하기 싫은 일은 분명히 자신에게 빚진 걸 들먹이며 책임을 전가할 것이다.
에녹이 고민하고 있을 때, 그는 에녹의 후드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에녹은 그 순간 몸을 낮추며 달리던 방향과는 반대로 돌았다. 남자는 후드를 잡지 못하고 에녹보다 앞으로 더 나아갔다가 멈췄다.
에녹은 자신의 이런 행동에 혀를 깨물고 싶었다. 진심으로 일부러 그를 피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몸에 뵌 습관이었다.
그는 에녹을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에녹은 그가 화를 내거나 기분 나빠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또 저 시선은 저것 나름대로 불편했다.
“아까도 느꼈지만 참으로 날렵하십니다?”
“아… 체력 훈련이라던가 검술을 조금 배워서 그렇습니다. 배운 게 아까워 틈틈이 연습하고 있어서 그게 몸에 배서 그렇습니다. 일부러 피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에녹의 누그러진 모습에 자신이 너무 몰아붙였나 싶어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자신의 인상이 선하고 착한 느낌이 아닌 것을 알기 때문에 에녹이 오해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죠. 뭐 그런 것보다 재능이 있으신 거 같습니다. 그 나이 대 친구들을 많이 봐 왔는데 그 친구들보다 눈에 띄셔서… 그렇게 반짝거리는 걸 보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흥미가 생겨서…”
“예에… 근데 뭣 때문에 저를 그렇게 찾으셨는지…?”
그는 에녹의 허리춤에 있는 칼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다름이 아니라 그 칼 좀 보여주십시오.”
에녹은 덜컥 겁이 났으나 들키지 않기 위해 무표정을 유지했다. 기다란 여행자 후드 때문에 보이지 않았을 텐데 언제 또 보고 쫓아왔는지 참 눈도 좋다고 생각했다.
“칼은 왜 그러십니까?”
“도난당한 물건인 것 같아서 확인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그는 에녹의 앞에 떡 버티고 있었다. 에녹은 자신이 염려하던 일이 실제로 벌어질 것 같은 불안함이 들었다. 항상 불길한 예상과 나쁜 일은 그를 비껴간 적이 없었다. 늘 신은 그에게 가혹했으니.
에녹은 할 수 없이 칼을 그에게 건넸다. 여길 빠져나간다고 해도 이 보안부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거나 마찬가지이니 에녹은 이 상황그거 악화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는 칼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에녹이 봤던 문양에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펼쳐진 책 위에 꽃과 흰 깃털 문양에서.
“이거 어디서 나셨습니까?”
에녹도 그 과제를 준 파렴치한에게 묻고 싶었다.
“…”
에녹은 그냥 아까 생각한 대로 어디서 주웠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솔직하게 얘기해야 하나 고민했다. 주었다고 하면 어디서 어떻게 주웠나 물을 것 같은데 그건 그거대로 거짓말해야하고 또 그가 이것저것 물어보면 또 거짓말을 해야 하니 언젠간 들킬 거 그 시간만 늘릴 뿐이었다. 그렇다고 누군가가 부탁을 들고 여기까지 왔는데 라고 말하기엔 이 일을 시킨 누군가가 자신도 누군지 모른다. 자신이 봐도 우스웠고, 안 믿을 것 같았다.
“그게…”
그는 아까와 달리 무겁고 엄격하게 말했다.
“절도죄가 될 수도 있으니 사실대로 말씀하시는 게 좋으실 겁니다.”
에녹은 그냥 사실대로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더 꾸미고 싶어도 꾸밀 것도 없고 거짓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거짓말을 하려고 해도 정보가 있어야 할 수 있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하면 괜히 발각되어 죄만 늘릴 뿐이었다.
“그게… 제가 거리에서 어떤 분과 마찰이 생겼는데… 그 분이 이 칼을 보안부의 리안 경께 전해드리면 문제를 해결해주실 거라고 했습니다… 근데 다행히 문제는 해결이 쉽게 돼서 이 칼을 돌려드리려고… 그래서 이 건물까지 오게 됐는데… 그 문양을 보고 저도 덜컥 겁이 나서…”
“그 분이 누굽니까?”
“그게…”
“?”
“저도 모릅니다…”
에녹은 자신이 말하고도 어이가 없었다. 물론 그도 자신이 예상했던 답과 다르게 나오니 당황스러운건 알겠지만 자신은 정말 진실만을 말하고 있음을 알아줬으면 했다.
“지금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꽤나 진지하게 에녹에게 되물었다.
“아니요…”
에녹은 조그맣게 답했다. 근데 자신은 뭐 이렇다 할 정보를 더 줄 수가 없었다. 알아야 협조를 할 것 아닌가.
“이거 안 되겠습니다. 저와 동행하셔야겠습니다.”
“…”
에녹은 그냥 칼을 주고 집으로 가고 싶었지만 그의 요구를 거부하면 문제가 더 커질까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도둑이라 얽힌 것 자체가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진 것이 틀림없다.
“함께 가시죠.”
“네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