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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홍귀
작가 : 연수희
작품등록일 : 2018.12.31

‘홍귀’라고 들어봤는가? 사람의 붉은 피를 거죽처럼 몸에 흠뻑 뒤집어쓰고 다닌다 하여 붙여진 어느 악귀의 이름이다.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을 이루자 붉은 악귀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사람들은 붉은 피를 흠뻑 뒤집어쓴 악귀의 모습을 두고 ‘홍귀(紅鬼, 붉은 악귀)’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그게 바로 붉은 악귀, ‘홍귀’다.

500년 만에 다시 세상 밖에 나온 홍귀, 홍귀를 쫓는 여인 연.

복수를 꿈꾸는 여자와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남자의 이야기.

 
19. 그림 속 여자의 얼굴
작성일 : 18-12-31 21:10     조회 : 236     추천 : 0     분량 : 15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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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에게도 전할 수 없는 마음을 종이에 담아 불에 태우면, 그것이 검은 연기가 되어 하늘 위로 올라가 하늘이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미신이 있다.

 

  영호는 고통스러울 때마다 종이에 마음을 담아 불에 태웠다.

 

  답장을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고통을 태울 뿐이었다.

 

  “대단하지 않니? 그 여자는 무척이나 아름답고 강했다는구나.”

 

  창백한 얼굴의 어머니가 허공을 멍하니 응시한 채 중얼거렸다.

 

  그 말은 아들인 영호에게 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 혼잣말에 가까웠다. 그때의 어머니는 이 집안의 여자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미쳐가고 있었다.

 

  “여자의 몸으로 그런 높은 지위까지 올라가 후세에까지 칭송을 받다니. 믿을 수 없어.”

 

  어머니의 팔과 다리는 부자유하게 묶여있었다. 자꾸만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기 때문이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분명 어머니는 허락도 없이 이 집안에서 자유로워지려고 할 것이다.

 

  “그 여자 이야기 또 해줘.”

 

  돌연 어머니가 영호를 응시했다. 영호는 잠시 머뭇거리다 몇 번째인지 모를 ‘그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또 시작했다.

 

  그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면 송장 같은 어머니의 얼굴에 아주 희미한 혈색이 돌았다.

 

  “아주 머나먼 옛날, 각각이 쪼개진 여러 개의 나라가 원래는 그저 단 하나의 나라인 ‘금란’이었을 때, 극악한 악귀가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이고 자기가 죽인 사람들의 피로 몸을 붉게, 붉게, 아주 붉게 치장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새빨간 피로 물든 악귀의 모습을 두고 사람들은 ‘홍귀(紅鬼)’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귀신의 이야기를 하면 귀신이 온다고 하지만 어머니와 영호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는 귀신이 아니었다.

 

  “홍귀는 마치 운명인 것처럼 사람을 죽였습니다. 홍귀 손에 자식을 잃고, 부모를 잃고, 친구를 잃었으며, 연인을 잃은 사람들의 절규가 지상에 첩첩히 쌓여가자 금란의 두 번째 황자는 무척이나 슬프고 비참했습니다.”

 

  영호의 조용한 말소리가 어머니의 귓속에 스며들어 가슴을 채웠다. 어머니는 영호의 이야기에 모든 집중을 기울였다.

 

  “금란의 두 번째 황자는 턱을 하늘 높이 쳐올린 채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벌렸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올렸습니다. ‘홍귀를 없앨 수 있는 고귀한 것을 제게 내려주신다면 다음 생에 가장 천하고 가여운 존재의 하인이 되어 살아가겠습니다.’ 그러자 두 번째 황자의 진심에 감복한 하늘이 그 고귀한 것을 지상에 내려주었습니다. 두 번째 황자는 하늘이 내려준 고귀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자였어, 그렇지?”

 

  어머니가 물었다. 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여자였습니다. 아름답고 강한 여자….”

 

  붉은 악귀를 단숨에 어둡고 깊은 땅속에 가둔 어느 여자의 이야기를, 어머니는 왜 이토록 절박하게 집착하는 것일까.

 

  “여자의 이름은 구배였으며, 구배는 붉은 악귀를 빛 한줄기 들지 않는 깊고 어두운 땅속에 가두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말에 바싹하게 메마른 어머니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 같은 미소였다.

 

  “하지만 슬프게도 홍귀를 가두는 데 모든 기력을 소진한 나머지, 구배 또한 오래 살지 못하고 다시 하늘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녀가 죽기 전 남긴 유언은… ‘내 죽음이 의미 있는 것이기를’이었다고 합니다.”

 

  의미 있는 죽음이라는 건 대체 무엇일까. 대의를 위해 싸우다 죽는 것?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는 것? 그저 내 삶을 살다가 죽는 건 의미가 없는 것일까.

 

  먼 옛날 어느 위인의 숭고한 마음 따위, 영호는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얼굴도 모르는 다수의 인간을 위해 목숨을 걸고 홍귀와 싸우다니….

 

  두렵지 않았을까.

 

  겁쟁이인 영호로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늘로 돌아간 구배를 그리워한 두 번째 황자는 훗날 황제가 되었고, 황제는 언젠가 그녀가 다시 지상에 내려올 것이라 굳게 믿으며 금란의 땅에 그녀의 이름이 새겨진 신당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유언을 기억했기 때문에 후대의 사람들이 언제나 그녀를 기억했으면 하고 바랐습니다.”

 

  영호는 눈을 살며시 감고서 읊조렸다.

 

  “‘설산의 눈보다 희고 고운 피부, 핏빛보다 붉은 입술, 가을의 밤하늘처럼 빛나는 검은 머리카락. 마치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모두 끌어안고 태어난 형상의 여자가 홍귀를 지하에 가두고 많은 사람을 살렸다.’ 황제는 그녀를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황제의 말이 세상에 퍼져 모두가 그녀를 그렇게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마친 영호는 천천히 눈을 떴다.

 

  어머니가 무척이나 고요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영호는 미쳐버린 어머니가 왠지 현명해보였다.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홍귀가 세상에 다시 나와 사람을 또 죽인다던데. 그래서 유오군 마마가 유배지에서 실종되었다가 3년 만에 겨우 살아 돌아왔다고….”

 

  “예, 그렇습니다.”

 

  영호는 잿빛머리칼의 다소 가면 같은 얼굴을 가진 소년과, 소년의 손을 꼭 잡은 채 마음이 미쳐버린 어린 노비아이를 떠올렸다.

 

  12살의 그 아이.

 

  그 아이는 지금 눈앞에 있는 어머니보다 더 아파보였다.

 

  영호는 궁금했다. 유오군이 저 아이를 대체 어디서 데려온 것일까? 그리고 왜 애지중지 여기는 것일까? 그 연갈색 아이도 홍귀에게서 살아남은 기적의 아이일까?

 

  매일 아버님에게 문안인사를 드리러 오는 유오군을 따라 그 연갈색 어린 노비아이도 이 저택에 들리고는 하였다. 하지만 불쌍하게도 말을 못하는 듯했다. 아니, 안 하는 것일지도.

 

  그 아이는 유오군을 제외한 그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았고, 유오군이 아버님의 방에 들어가 혼자 남겨지면 저택의 복도 한켠에 오도카니 서서 조용히 땅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 어린아이를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손 씨 가문의 노비들은 그 아이를 힐끗힐끗 쳐다보며 수군대었다.

 

  도저히 아이가 들을 만한 내용들이 아니었고, 아이에게 해서는 안 될 말들이었다. 그런데도 아주 거리낌 없이 해댔다.

 

  ‘기분 나쁘고 재수 없다’는 말은 그 아이에게 한 수군거림 중 가장 온순한 것이었다.

 

  그러고는 아이에게 일감을 던져주었다. 아무리 아이라도 노비면 봐주는 것이 일체 없다. 노비들 사이에서도 엄연한 서열과 차별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 어린 것은, 도무지 어린아이 같지 않은 공허한 눈으로 울지도 않고 모든 것을 외면했다. 그러자 더욱 그 아이는 불길하다고 손가락질 받게 되었고, 고립되었다.

 

  볼 때마다 안쓰러워 영호는 손 씨 가문의 특산물인 당과자를 아이에게 남몰래 건네주었지만 아이는 단 한 번도 두 손으로 공손히 받은 적이 없었다. 버릇없다고 아이를 혼내려는 복용을 뒤로 숨기고 당과자를 손수건에 감싼 뒤에 바닥에 두고 조용히 물러가주었다.

 

  「내킬 때 먹어.」

 

  다시 그 복도에 가보았을 때, 아이는 사라지고 없었고 당과자는 그 자리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영호는 괘념치 않고 그 뒤로도 종종 혼자 복도에 서 있는 아이의 발아래에 손수건으로 감싼 당과자를 놓아두었다.

 

  물론 그 애가 먹는 일은 결코 없었다.

 

  언제나 빈 복도에 손도 대지 않은 당과자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어머니가 쓰게 웃었다.

 

  “홍귀에게서 간신히 살아남은 유오군 마마는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네 아버지의 품에 안기게 되었구나. 홍귀보다 더한 악귀 품에 말이야.”

 

  “…어머니.”

 

  영호가 소리를 잔뜩 낮추고 어머니를 말렸다. 그리고 문가를 살폈다.

 

  문 앞에 다소곳이 서 있는 하녀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인 채 얌전히 시침을 떼고 있었지만 방금 전 어머니의 말을 분명 귀담아 들었을 것이다. 이제 그것을 곧이곧대로 아버님에게 전하겠지.

 

  등골에 오싹한 소름이 스쳤다. 두려움이 가슴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영호는 떨리는 목소리로 어머니의 말을 수습하려고 애썼다.

 

  “아, 아버님은 은혜를 베푸신 겁니다. 이 유국 땅에서 안전하게 정착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거라고요. 그래서 유오군의 신분과 지위를 다시 복권시켜주지 않으셨습니까?”

 

  “유오군 마마가 매일같이 이 저택에 드나들었으면 좋겠구나.”

 

  어머니는 영호의 초조한 마음을 모르는지 엉뚱한 소리를 했다.

 

  “홍귀를 보고서 살아남은 사람은 없다고 하잖니. 홍귀가 놓친 먹잇감을 그냥 놔줄 리 없어. 필시 유오군 마마를 다시 잡아먹으러 올 거란다. 그럼 유오군 마마가 있는 곳엔 반드시 죽음이 있겠지. 이 저택에 죽음이 밀려올 거야.”

 

  “어머니!”

 

  영호의 얼굴이 사색에 질렸다.

 

  “그럼 다시 지상을 불쌍하게 여긴 하늘이 구배를 우리에게 내려주실 거야. 구배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단다, 영호야. 응? 구배선관을 볼 수 있어.”

 

  “어머니, 그 여자는, 구배는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옛사람이에요.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고요. 그러니 행여나 홍귀가 이곳에 오게 된다면 우리 모두 다 죽게 되는 겁니다. 다 사라지는 거라고요.”

 

  “그것도 나쁘지 않아.”

 

  어머니가 미소 지었다. 어머니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것도 참 나쁘지 않아. 다 사라지면 아픈 것도 없을 테니까.”

 

  영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입술을 꾹 깨물다가 고개를 무심코 떨어뜨렸는데, 눈물이 그만 뚝뚝 흐르고 말았다.

 

  어머니의 마른 손이 아들의 뺨을 쓸었다. 어머니가 그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아버지가 네가 기르는 개를 죽였다고 들었다. 마음이 아팠지?”

 

  영호는 아니라고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었다. 마음이 아팠다. 무서웠다.

 

  “속상했겠구나.”

 

  “제 잘못입니다.”

 

  “아니, 아버지가 겁쟁이인 탓이란다.”

 

  “어머니, 그러지 마세요. 제발….”

 

  뒤에서 하녀들이 다 듣고 있단 말입니다. 모두 다 아버님의 귀에 들어갈 거라고요.

 

  그러나 어머니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어머니는 정말 완전히 미쳐버려 두려움을 잃은 것 같았다.

 

  “네 아버지는 자신의 이복형제들을 모두 죽이고서 이 저택의 주인이 되었어. 그중 본디 이 저택의 진정한 주인이었던 첫 번째 장남의 목을, 네 아버지가 손수 키우던 사냥개가 물어뜯었단다. 아버지는 자기도 그렇게 될까봐 두려운 거야. 네가 아버지의 목을 물어죽일 개를 키울까봐.”

 

  하인의 손에서 장작을 패는 도끼를 홱 빼앗아 영호의 개를 사정없이 내려치는 아버님의 얼굴에는 붉은 피가 낭자했고, 그 순간 공포와 광기에 얼룩진 아버님의 모습을 본 영호는 아버님이 홍귀가 아닐까 생각했다.

 

  인간이 아닌 것 같았다.

 

  “개나 고양이 대신 멍청한 것을 키우거라.”

 

  “예?”

 

  “네 아버지는 비겁하고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라서 자신보다 강하고 영리한 것을 선망하는 동시에 곁에 있는 것을 못 견디게 싫어한단다. 그러니 멍청한 것을 길러. 그래, 닭은 어떠하니?”

 

  어머니가 누구보다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어, 영호는 마음이 일렁였다.

 

  어머니는 영호를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무언가 마음을 나눌 생명이 없다면 전혀 버틸 수 없는 아들의 위태위태한 유약함을….

 

  설사 멍청한 닭일지라도 영호는 그것을 진심으로 아끼고 키울 것이 명백했다.

 

  “도련님, 시간 됐습니다. 이제 그만 수련을 하시러 가야합니다.”

 

  하녀가 조용히 아뢰자 영호는 엉망이 된 얼굴을 정리했다. 그리고 옷차림도 단정히 하는데, 그의 뜯어진 옷소매를 어머니가 보고 말았다.

 

  “여전히 옷소매를 뜯는구나. 완벽을 혐오하고 있어.”

 

  상처투성이인 어머니의 손이 아들의 옷깃을 잡았다. 이내 그의 옷에 어머니가 얼굴을 파묻고 소리죽여 울었다.

 

  “네 아버지가, 그 사람이 너를 학대했어.”

 

  그 순간 그럴 리 없는데도 어디선가 커다란 힘이 날아와 영호의 다리와 등을 분지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헉, 영호는 숨을 토했다. 식은땀이 맺히고 오한이 슬었다.

 

  “완벽해지라고, 왜 그리 모자라느냐고 고작 4살밖에 안되었던 너를 비난했어. 모질게 매질하고, 벌하고, 겁박했었어.”

 

  어머니의 숨이 힉힉 불안정해졌다. 하녀가 옆에서 자꾸만 어서 수련에 가야만 한다고 보채었다. 손을 내저어 하녀를 물리치고 어머니를 껴안았다.

 

  이 저택에서 미쳐버린 어머니를 가여워 해주는 건 왜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자신뿐이란 말인가.

 

  품속의 어머니가 울먹거리며 말했다.

 

  “어린아이가 자다가 이불에 실례를 하는 건 당연한 거야. 글을 모두 깨우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거야. 더러운 흙손으로 부모에게 안아달라고 어리광을 부리는 것도 당연한 거야. 밤에 혼자 자는 것이 무서워 눈물을 흘리는 것도 아주, 아주 당연한 거야!”

 

  “어머니, 다 지난 일이에요.”

 

  그는 어머니의 등을 토닥이며 타일렀다.

 

  “지난 일이라고?”

 

  그러자 어머니가 고개를 퍼뜩 들고 영호를 노려보았다.

 

  “그럼 왜 아직도 네 소매를 찢어 결점을 만드는 거니? 왜 애꿎은 방을 어지럽혀? 왜 그리 완벽하고 깔끔한 것을 보면 참질 못하고 망가뜨리느냔 말이야. 그리고 왜… 왜 네 그림 속엔 사람이 없는 거니?”

 

  영호는 어머니의 눈을 피했다.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네가 완벽을 증오하고 사람을 두려워하기 때문인 거야. 너는, 영호야. 지금도 전혀 괜찮지 않아.”

 

  어머니는 영호에게서 떨어져 침상에 쓰러지듯이 머리를 박았다.

 

  “이럴 거면 낳는 게 아니었어.”

 

  아, 어머니의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영호는 아버님에게 매를 맞을 때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아이만 낳으면 다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더 힘들어. 이럴 거면 그냥 아이를 낳는 게 아니었어. 고통이 배가 되었어!”

 

  그렇게 중얼거린 어머니는 몇 번이나 쿵쿵 머리를 침상 모서리에 박았다.

 

  영호가 경악하며 황급히 어머니의 몸을 붙잡았고, 어느새 달려온 하녀들이 익숙한 동작으로 어머니의 몸을 질긴 무명천으로 더욱 세게 포박했다.

 

  어머니는 울부짖었다.

 

  “놔! 이거 놔!”

 

  “어머니, 제발!”

 

  “제발 내 새끼들만이라도 여기서 나가게 해줘!”

 

  어머니의 비명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영호는 결국 아버님의 부하들에 의해 방에서 끌려나왔다.

 

  영호는 주먹을 쥐고 흐느꼈다. 그때 그의 다리를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어 아래를 보니, 8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동생이 울먹거리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오라버니, 엄마는?”

 

  영호는 억지미소를 지었다. 엄마는 괜찮아. 그런 다정한 거짓말로 여동생을 달래주었다.

 

  그러고 나서 보름 뒤, 영호는 16살에 첫 번째 혼례를 올렸다. 영호의 혼례이후 어머니의 발작적인 정신증세는 더욱 심각해졌다. 영호의 첫 번째 아내를 이 저택에서 내보내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그의 아내가 어떤 꼴을 당하는지 어머니는 미치도록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당했던 것이니 잘 알 수밖에 없었다.

 

  “영호야! 왜 보고만 있는 거니? 왜 두 눈과 두 귀를 꾹 막은 채 외면만 하고 있어?”

 

  어머니의 힐난하는 눈빛이 영호를 괴롭게 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어서 1년 뒤에 어머니는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아버님이 잠시 방심을 한 것이다.

 

  어머니가 너무나 순종적이고 현숙한 아내의 모습을 완벽하게 보여주어서 이제야 어머니가 제 구실을 한다고 아버님은 만족스러워했지만, 어머니의 연기였다.

 

  어머니는 부서진 의자다리를 하나 몸속에 숨겨두고 그 끝을 매일 날카롭게 갈았다. 그 엉성한 날을 아버님에게 날렸으나 실패했고, 다시 방안에 감금되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어머니 주위에 얼씬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때부터 여자의 울음소리가 매일 영호의 귓가에 들렸다.

 

  「살려주세요.」

 

  아버님에게 혼날 각오를 하고서 어머니의 방으로 달려갔다.

 

  몇 번을 불러보아도 어머니가 대답이 없었다. 이상하게도 어머니의 방을 감시하는 시종들도 없었다.

 

  이상하다. 기이한 차가움이 영호의 목덜미를 스쳤고 불안함이 엄습했다. 문 너머에 있을 어머니의 모습이 불현듯 그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설마. 안 돼.

 

  문 앞에 하염없이 서서 그는 소리 없이 오열했고, 이내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잡았다.

 

  밀지도 않았는데 문이 힘없이 툭 열렸다.

 

  방안을 들여다본 그는 비로소 평온한 얼굴로 허공에서 잠들어있는 어머니를 발견했다.

 

  줄 하나에 매달려있는 어머니의 얼굴 속에서 자유가 느껴져, 영호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멍하니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모른 척해서, 외면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그 이후 어머니의 조언대로 가장 멍청한 것을 키우려고 했으나 번번이 아버님의 압박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무언가를 키우고 애정을 주는 행위는 오히려 약점을 만드는 것이라고 아버님은 생각한 것이다. 행여나 그런 소중한 존재가 적에게 인질이 될 수도 있으니.

 

  마치 유오군의 그 연갈색 노비처럼 말이다.

 

  어머니의 장례가 끝나고 또 1년이 지났다. 이번에는 첫 번째 아내가 숨을 거두었다.

 

  아내의 시신의 온기가 미처 식지도 않았는데 가문과 아버님은 두 번째 혼례를 강요했다. 건강한 후계를 갖기 위해서였다. 영호가 나약한 장자였기에.

 

  영호는 무려 2년이나 거부했지만 결국 두 번째 혼례를 올리게 되었다.

 

  …아버님은 너무나 무서운 사람이었다.

 

  두 번째 혼례식 바로 전날,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모두가 근심했다.

 

  영호는 차라리 빗물이 모든 것을 휩쓸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기를 바랐다. 홍귀가 이 저택에 찾아와 모든 것을 죽여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처럼 말이다.

 

  비가 쏟아지는 그날, 여느 때와 같이 복도에 홀로 오도카니 서서 유오군을 기다리고 있는 그 연갈색 아이를, 영호는 또 보았다. 더 이상 어린아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어느새 그 애는 영호가 처음 혼례를 올렸던 그 나이가 되었으니까.

 

  습관적으로 그 복도를 지날 때면 그는 품속에 항상 당과자를 챙겼다. 그 아이는 단 한 번도 먹은 적이 없었지만 영호는 늘 그 아이 발밑에 당과자를 조용히 두었다.

 

  그날도 손수건에 감싼 당과자를 그 애 발아래에 두고 말없이 가려는데, 그 애가 이상했다.

 

  그 애의 발등에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 올려다보니, 그 연갈색 아이가 입술을 힘껏 깨물고 있었다. 입술 새로 붉은 피가 흘렀다.

 

  “…왜, 왜 그러니?”

 

  영호가 물으며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아이가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양팔로 얼굴을 감싸고 몸을 한껏 웅크렸다. 아이의 하의가 금세 젖어버렸다. 실례를 한 것이다.

 

  폭우가 사정없이 저택을 집어삼켰다. 아이가 울며 소리쳤다.

 

  “잘못,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말 들을게요. 다시는… 엄마 아빠 말을 어기지 않을게요.”

 

  영호는 아이의 목소리를 그때 처음 들었다.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겉옷을 벗어 아이의 아래를 감싸고 조심히 안아 올렸다. 복용이 펄쩍 놀라서 뛰었다.

 

  “도련님 옷이 더러워집니다!”

 

  애당초 소매가 너덜너덜해진 옷이었다. 영호는 복용의 말을 물리치고 저택에서 가장 오래 일하고 입이 무거운 웅이 할멈에게 아이의 목욕을 부탁했다.

 

  어떤 사정인지는 모르겠으나 비 오는 날, 복도에서 울면서 부모에게 사죄하는 아이의 모습이 뼈에 사무치도록 익숙했다.

 

  그 후, 땀에 젖은 유오군이 창백하게 질린 낯으로 아이를 데리러왔다.

 

  “…연아!”

 

  이름이 연이구나. 영호는 아이의 이름을 기억해두었다.

 

  유오군은 의심이 그득한 눈으로 영호를 바라보며 감사를 표했다. 그 연갈색 아이는 유오군의 품에 안겨 떠났다.

 

  다음 날, 두 번째 혼례식을 올리고, 영호는 끔찍한 죄책감 속에서 두 번째 아내를 맞았다. 붉은색 혼례복을 입은 두 번째 아내는 분명 아름다웠으나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아내임에 틀림없었다.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서 허덕였다. 하지만 자신의 고통이 과연 이 집안에서 죽은 여자들의 슬픔만 할까. 스스로 아프다 말할 자격도 없다.

 

  자신의 미약한 힘으로 두 번째 아내를 지키려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오히려 영호의 몸은 상처 입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두 다리가 부러진 적도 있었다. 그리고 영호의 저항이 커질수록 두 번째 아내는 더욱 모질게 의무를 수행해야만 갔다.

 

  저항할수록 더욱 처참히 짓밟는 것이 이 집안이다.

 

  이 집이 무섭다.

 

  이 집안은 여자를 잡아먹는다.

 

  「제발 살려주세요!」

 

  살려달라는 여자의 울음소리가 끊임없이 들리는 나날 속에서, 영호는 매일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마음을 편지에 담아 불에 태워 검은 연기를 하늘 위로 올려 보냈다.

 

  대답 없는 편지였다. 하늘이 부디 답장을 내려주기를 바랐다.

 

  어김없이 아버님께 문안인사를 올리는 유오군을 복도에 혼자 오도카니 서서 기다리고 있는 그 연갈색 아이를 또 보았다. 두 번째 혼례를 올리고 그 아이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습관대로 영호는 안녕, 하고 작게 인사한 뒤에 손수건으로 감싼 당과자를 품에서 꺼내 바닥에 두고 떠났다.

 

  그런데 다시 그 복도를 찾았을 때, 당과자가 사라져있는 것을 보았다. 머리가 멍해졌다가 이내 긴장되었다.

 

  그 애가 먹은 것일까.

 

  그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뒤돌아보니 연갈색의 그 애가 서 있었다. 영호는 다소 놀란 눈으로 연갈색 아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애가 자신을 부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애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겨우 말을 꺼냈다. 그 애의 입 주변에 하얀 설탕가루가 묻어있는 게 보여 조금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무심코 미소 지은 자신에게 놀랐다. 내가 마지막으로 웃은 게 언제였지?

 

  “저번에…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빗속에서 도와주었던 것을 말하는구나.

 

  “항상 당과자도 챙겨주셔서 고맙고, 또….”

 

  또? 그 애가 등 뒤에 숨긴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때 삐약, 하고 작게 우는 소리가 아이의 손 안에서 들렸다. 더 정확하게는 상자 안에서다.

 

  연갈색 아이의 손에 상자가 들려있었다.

 

  영호는 상자 안을 들여다보았다.

 

  숨구멍이 뚫린 상자 안은 보슬보슬한 지푸라기로 채워져 있었고, 그 속에 노란 병아리 하나가 동글동글한 눈을 깜빡이며 갸웃갸웃 영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사랑스러운 작은 생명을 보고 영호는 한순간 숨 쉬는 것을 잊어버렸다.

 

  연갈색 아이가 말했다.

 

  “계속 병아리를 키우고 싶어 하시는데 못 구하시는 것 같아서….”

 

  한참을 상자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무 반응 없는 영호에 무안한지 그 애가 상자를 도로 품안에 거둬들이려고 하자 영호는 얼른 상자를 두 손으로 받았다.

 

  그 애의 손끝과 영호의 손가락이 겹쳤다.

 

  그 순간 영호는 그 애를, 아니 그녀를 마주보았다.

 

  16세의 그녀가 올곧은 눈동자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복도에 웅크려있던 그녀는 어떤 심경의 변화를 겪은 것인지 살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것 같았다. 눈빛이 조금 변했다.

 

  그 맑고 큰 눈이 너무나 환하고 애처로워서 영호는 마음이 울컥했다. 타인의 눈이 이토록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적은 없었다.

 

  “미안, 고마워.”

 

  얼른 상자를 받아들며 고개를 숙였다. 닿은 손가락을 얼른 거둬들였다. 얼굴이 왠지 화끈거렸다.

 

  “책임지고 잘 키울게.”

 

  키우던 개가 아버지에게 죽은 이후, 무언가를 직접 손으로 키우는 건 무려 4년만이다. 노란 병아리를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쓸었다. 가볍고 따뜻하고 보드라운 그것이 까만 콩알 같은 눈을 가늘게 뜨며 영호의 손가락에 살포시 기대었다.

 

  마음이 간지러웠다.

 

  “그러면 저는 이만….”

 

  그녀가 영호에게 꾸벅 인사를 올리고 도망치듯이 몸을 돌렸다. 그때 그녀의 품에서 바스락하고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졌다.

 

  하나는 잘 밀봉된 편지였고, 다른 하나는 불에 타다만 종이조각이었는데, 불에 그슬린 종이조각이 무엇인지 알아채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영호는 얼어붙었다.

 

  자신의 고통이 쓰인 편지의 일부분인 것이다. 미처 불속에서 다 타지 못하고 남은 조각이 그녀의 손안에 있었다.

 

  왜 저게 저 아이 손에? 편지의 어느 부분이 남은 걸까? 저 애가 저택의 비밀을 알았을까? 아냐, 노비이니 글을 못 읽을 거야. 하지만 만일 저 애가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을 알아버렸다면 나는 아버님께 이 사실을 고해야….

 

  그럼 저 애는 죽을 것이다.

 

  영호는 아랫입술을 힘껏 물었다.

 

  그녀가 얼른 바닥에 떨어진 편지와 조각을 주웠다.

 

  “죄송합니다. 다 타지 않고 남아있길래…. 아무도 보여주지 않았어요. 조용히 제가 얼른 치우려고….”

 

  그녀가 잠시 눈을 세게 꾹 감았다. 그녀의 표정을 본 영호는 그녀가 글을 읽을 줄 안다고 직감했다.

 

  “…너, 내용을 읽었구나.”

 

  영호는 침착한 태도를 애써 유지하고 있었지만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영호가 화났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그녀가 말했다.

 

  “…무슨 내용을 읽었어?”

 

  그녀에게 성큼 다가가며 물었다. 그 바람에 그녀가 숨을 멈추었으나 영호를 피해 뒷걸음질 치지는 않았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문 채 침묵을 지켰다.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대답을 잘 해야 한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어머니가 보고 싶다는 글과, 누구라도 좋으니 답장을 달라는 글귀를….”

 

  “그, 그거 말고 다른 내용은?”

 

  “다른 내용은 불에 타서 잘…. 죄송합니다. 저택의 뒤편을 쓸라는 부탁을 받아서 청소하다가….”

 

  다행이다. 이 아이는 가장 중요한 내용을 읽지 못했다.

 

  안도의 숨을 내신 영호가 곧 의아한 눈길로 말끔하게 밀봉된 다른 편지를 쳐다보았다.

 

  “그건…?”

 

  그녀가 밀봉된 편지를 재빨리 허리 뒤편에 숨겼다.

 

  “이거는… 어, 제가….”

 

  당황해한다. 본인이 직접 쓴 편지인 것이다.

 

  “너 노비인데 글을 읽고 쓸 줄 아는구나.”

 

  “…죄송합니다.”

 

  그녀가 어깨를 아래로 축 늘어뜨렸다. 노비가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것이 죄는 아니었으나 불경에는 해당되었다.

 

  귀족의 영역에 함부로 더러운 발을 들인 것으로 해석되었다. 하물며 노비가.

 

  “죄송할 일이 아니야. 괜찮아. 그런데 그건 네가 쓴 거니?”

 

  그녀는 무척이나 곤혹스러운 얼굴로 천천히 등 뒤에 숨긴 편지를 앞으로 내밀었다. 편지를 쥔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영호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녀가 편지를 자신에게 건네었다.

 

  그게 그녀에게서 처음 편지를 받았을 때였다.

 

  하늘에게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쓴 편지가 아니라, 사실은 토해내는 마음으로 수치스러운 자신의 죄를 적고 불에 태운 것인데, 그것에 대한 답장을 천한 노비에게서 받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비록 그녀가 자신의 죄를 모두 알고 답장을 써준 것은 아니었으나, 그날 그녀의 편지를 읽은 영호는 난생 처음으로 사람이 무섭지 않았다. 그녀가 유일했다.

 

  편지의 내용은 평범했지만 따뜻했다.

 

  ‘저는 그냥 겁이 많은 사람입니다. 주제도 모르고 도련님이 태운 종이에 답장을 썼습니다. 고마움에 대한 보은이자 간절한 소리를 무시할 수 없는 저의 미천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비 오는 날, 아팠던 저를 구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고맙다는 말을, 태어나서 처음 들었다.

 

  그 편지를 가슴에 품었고, 그녀에게 답장을 썼다.

 

  기분이 이상했다. 하얀 종이에 글을 써 내리는 감각이 생소했다. 아아, 그렇구나.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건 처음인 거야. 읽을 사람이… 있는 거야.

 

  그날 이후로 더 이상 불에 태울 편지를 쓰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전할 수 없는 마음을 종이에 담아 불에 태우면, 그것이 검은 연기가 되어 하늘 위로 올라가 하늘이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미신이 있다.

 

  영호는 고통스러울 때마다 종이에 마음을 담아 불에 태웠다.

 

  답장을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답장이 있다. 높으신 하늘이 아니라 천한 노비에게서.

 

  그녀에게서 받은 편지는 모두 비단 속에 품어 붉은 실로 묶어두었다. 이것은 유국의 전통이었다.

 

  고통은 더 이상 불에 태우지 않기로 했다. 자신이 평생 느껴야 될 죗값인 거다. 이제 다시는 절대 털어내려고 하지 않으리라.

 

  이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다.

 

  그녀에게서 받은 편지는 6년 동안 14통에 불과했다.

 

  유오군에게 들킬까 전전긍긍한 것도 있었지만 혹시나 그녀가 부담을 느낄까 걱정스러웠다.

 

  그녀는, 모두가 이상하다고 하는 자신의 말을 비웃지 않았다. 긍정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완벽히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렇군요.’하는 마음으로 잔잔히 들어주었다.

 

  우연히 또 저택에서 마주치면 슬쩍 자신이 그린 그림도 보여주었다. 칭찬받고 싶어 하는 아이처럼 말이다.

 

  그럼 그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순수하게 감탄했다. 소질이 있으시네요, 하고.

 

  자꾸만 가슴이 간지러워 무서워졌다.

 

  그림을 그렸다고 타박 받은 적은 있어도 칭찬을 받기는 처음이었다. 그녀를 통해 처음인 것이 많았다.

 

  나눈 대화가 그리 많지는 않아도, 주고받은 편지가 적어도, 진심이 있어서 좋았다.

 

  그녀가 준 병아리는 애지중지 키워 어엿한 암탉이 되었다. 어머니는 닭이 멍청한 것이라 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적어도 키워준 주인을 정확히 알아볼 줄 알았고 몹시 잘 따랐다. 영호가 준 먹이가 아니면 먹지 않았다. 혼자 방에 두고 가면 어쩔 줄 몰라 하며 울어댔다.

 

  그러나 그 닭도, 예전에 키웠던 개와 똑같이 죽었다.

 

  아니, 더 심하게.

 

  영호의 입안에 들어갔으니까.

 

  그 이후로 닭고기는 냄새만 맡아도 토했다.

 

  다음 해에, 두 번째 아내가 시집온 지 1년 만에 숨을 거두었다. 영호의 노력에도 결국 아내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다. 지키지 못했다.

 

  영호의 몸에는 항상 무수히 많은 상처가 있었고, 그것들은 모두 아버님에게서 받은 것들이었다.

 

  계속해서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영호의 몸에 저주가 쌓이기 시작했다. 피부가 검게 썩었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연갈색의 그녀에게서 받은 편지들을 읽고 또 읽었다.

 

  6년 동안 혼례를 거부했다. 감금되고, 맞고, 협박당했다. 이상한 약도 강제로 입안에 넣어졌지만 버텼다.

 

  하지만 아버님은 역시나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였다. 한발 물러서 한미한 가문의 여식을 어디선가 데려왔다.

 

  단 한번 마주친 세 번째 신부가 될 여자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어디에서나 있을 법한.

 

  그리고 세 번째 신부가 집안에 들어온 순간부터 붉은 악귀가 저택에 나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어두운 밤, 영호는 만났다.

 

  손 씨 가문 저택 안에 갇힌 소문 속의 악귀를.

 

  아름다운 붉은 혼례복을 입고 있었다.

 

  저택 안의 붉은 악귀를 보자 단숨에 정체를 알아버렸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는가! 영호는 바들바들 떨며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무릎을 꿇고 후회와 참회의 눈물을 쏟아냈다.

 

  「살려주세요.」

 

  붉은 악귀가 말한다. 눈물로 뒤덮인 영호의 얼굴이 그러겠노라 고개를 끄덕인다.

 

  매일 늦은 밤, 별채에 달려가 세 번째 신부를 찾았다. 밤새 별채 주위를 서성이며 지켰다. 호위들은 믿을 수 없다. 쪽지를 써 세 번째 신부에게도 전했지만 결국 아버님에게 저지당했다.

 

  손끝이 떨리고, 마음이 조였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왜… 왜 네 그림 속엔 사람이 없는 거니?」

 

  그는 옷궤를 열어 가장 밑바닥에 숨겨두었던 그림 한 장을 꺼내었다.

 

  그림 속 여자가 미소 짓고 있다.

 

  그녀는 무척이나 다정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림을 그릴 때, 절대 사람을 그리지 않아.」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내가 누군가의 얼굴을 그리고 있어.」

 

  「누구요?」

 

  「…구배.」

 

  살짝 볕에 그을린 맑은 얼굴과 구슬 같이 반짝이는 동그란 연갈색 눈동자가 무척이나 인상 깊다. 그녀는 평소처럼 머릿수건을 하지 않고 탐스러운 연갈색 머리카락을 모두 아래로 길게 늘어뜨렸다.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 새로 당장이라도 고운 목소리가 흘러나올 것 같지만 그녀는 절대 말하는 법이 없었다.

 

  그저 그림 속의 여자일 뿐이니까.

 

  「500년 전 여자의 얼굴을 어떻게요?」

 

  영호는 그 그림을 넋 나간 듯이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상상해서 그리고 있어. 내 안에서 가장 아름답고 선하다는 여겨지는 여성을 근본으로 삼아…. 그 여성의 얼굴은 다정하고 따뜻하거든.」

 

  그림 속 여자는 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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