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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홍귀
작가 : 연수희
작품등록일 : 2018.12.31

‘홍귀’라고 들어봤는가? 사람의 붉은 피를 거죽처럼 몸에 흠뻑 뒤집어쓰고 다닌다 하여 붙여진 어느 악귀의 이름이다.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을 이루자 붉은 악귀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사람들은 붉은 피를 흠뻑 뒤집어쓴 악귀의 모습을 두고 ‘홍귀(紅鬼, 붉은 악귀)’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그게 바로 붉은 악귀, ‘홍귀’다.

500년 만에 다시 세상 밖에 나온 홍귀, 홍귀를 쫓는 여인 연.

복수를 꿈꾸는 여자와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남자의 이야기.

 
17. 흥미
작성일 : 18-12-31 21:09     조회 : 231     추천 : 0     분량 : 9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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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마, 제가 직접 가져가겠습니다.”

 

  “괜찮으니 염려할 것 없다.”

 

  난처해하는 하녀를 향해 유오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의 다른 손에는 작은 쟁반이 들려있었고, 그 안에는 하얀 김이 피어나는 따뜻한 사발이 있었다. 배와 꿀을 넣고 푹 달인 약이었다. 고뿔에 걸린 사람에게 좋은 것이다.

 

  “너는 가서 너의 일을 보려무나. 번거롭게 하여 미안하다.”

 

  높으신 분의 다정한 말씨와 예상 밖의 사과에 하녀는 당황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의 반듯한 얼굴을 보았다. 유국의 봄이라 칭송받는 그의 얼굴을 보니 하녀의 얼굴에 헤실헤실 미소가 떠올랐다.

 

  수줍은 미소의 하녀는 허리를 푹 숙여 그에게 인사를 올리고는 쭈뼛쭈뼛 뒷걸음질 쳐 물러갔다.

 

  하녀가 사라지자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미소를 싹 지우고 쟁반에 놓인 사발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가 사발을 들어 안의 내용물을 한 모금 마시었다. 그러고는 곧장 사발 속의 약을 그대로 정원에 뿌려 버렸다.

 

  “유치한 장난질을.”

 

  유오는 차가운 얼굴로 하녀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약에서 미묘하게 쓴 맛이 난다. 다소 둔한 사람이라면 그냥 먹었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는 혀끝을 달싹였다. 애기똥풀인가? 소량이긴 하지만 잘못 식용하면 식중독에 걸리거나 구토와 호흡곤란을 겪을 수도 있다.

 

  고뿔에 좋은 약을 준비하려는 유오에게 굳이 나서서 본인들이 대신 해준다고 할 때부터 의심쩍었다. 손 씨 가문의 노비들 중 일부는 연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이들도 있었다. 아마 자신과는 다른 노비의 인생에 조금 부러움을 느껴서 그랬으리라. 연은 겉으로 보면 고분고분해 보이지만 판에 박힌 노비들의 인생절차를 그대로 순응하지 않았다.

 

  글을 읽을 줄 아는 것이 그 첫 번째였다.

 

  그리고 그들의 질 낮은 괴롭힘을 묵인하고 승인하는 영서의 존재가 그들의 불난 감정에 더욱 부채질을 했을 것이다.

 

  유오는 부엌간에 가 따뜻한 물에 꿀을 조금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허둥지둥 당황하는 노비들 사이로 웅이 할멈이 나타나 유오의 뜻대로 해주었다. 유오가 보는 앞에서 따뜻하게 끓인 맑은 물에 꿀을 듬뿍 넣어주었다.

 

  짧게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유오는 당과자도 품속에 챙긴 뒤에 연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녀가 머무르고 있는 방 앞에 기웃거리는 놈이 보였다.

 

  웬만해서는 구겨질 일 없는 유오의 미간이 구겨졌다.

 

  “지금 예서 뭘 하는 거지?”

 

  유오의 목소리에 그의 어깨가 흠칫했다. 그다지 소리 높여 말한 것도 아니고 말투도 점잖았는데 듣는 이의 마음을 압박하는 듯했다.

 

  영호는 어깨와 등을 잔뜩 안으로 구부리고서는 황급히 유오에게서 거리를 멀찍이 두었다. 마치 유오가 그를 때려죽이기라도 할 듯이 말이다.

 

  겁먹은 강아지처럼 떠는 영호의 품에 비단보자기가 있었다.

 

  유오는 흘끔 그것을 보고서 다시 영호를 보았다. 누구에게 맞은 것인지 영호의 얼굴에 붉고 퍼런 멍이 진하게 들어있었다. 머리를 감싼 천 조각엔 빗물이 배어나와 있었다.

 

  때린 사람이 누구인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예서 무얼 하냐니까?”

 

  “그, 그, 그.”

 

  바보처럼 더듬거린다. 유오가 그에게 한 걸음 성큼 다가가자 그가 뒤로 물러서며 몸을 더욱 웅크렸다. 얼굴이 새빨개지고 말도 더 바보 같아졌다.

 

  “그, 그게, 그게, 아, 아프다고 들, 들어서.”

 

  “그것이 대관절 너랑 무슨 상관이지. 물러가.”

 

  “하, 하지만 약이랑 귤, 그리고 배를 좀 채, 챙겨왔는데.”

 

  영호가 떨리는 손으로 보자기를 앞으로 내밀었다. 유오는 그것을 말없이 쳐다보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오가 손을 내밀어 그것들을 받았다.

 

  “받았으니 이제 그만 물러가. 그리고 다시는 그 애 곁에서 서성거리지마라. 전해줄 것이 있으면 우선 나를 거쳐.”

 

  “…그 애가 진짜 마마의 노비인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영호답지 않게 다소 공격적인 말을 던졌다.

 

  그러나 유오는 그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역시 이놈은 나와 손 태부와의 거래를 알고 있군. 옅은 잿빛의 눈동자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 후 유오는 말했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면 지금 네가 자고 있는 그 애 방 앞에서 서성대는 게 얼마나 소름끼치는 일인지 잘 알 수 있을 텐데?”

 

  이번에는 유오가 영호의 정곡을 찔렀다.

 

  “바로 작년의 일이다. 정확히 따지자면 일곱 달밖에 지나지 않았어. 그런데 자신을 한밤중에 납치하려고 했던 남자가 또다시 문 앞에 서 있다고 생각하면 연이 얼마나 겁먹을지 생각 안 해봤나?”

 

  영호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그리고 너는 이제 혼례도 올리지 않나. 이제 그만해. 너랑 엮이면 연은 더욱 힘들어져. 이제 네 신부가 될 사람에게 집중해. 너의 반려는 별채에 있는 그 여자다. 집안이 정해준.”

 

  유오가 자근자근한 어조로 한 번 더 명령했다.

 

  “그만 가. 다시는 연에게 오지 마. 네가 내뱉는 숨이 연이 있는 곳이어선 안 된다.”

 

  영호는 입을 꾹 다문 채 그 명령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무언의 저항이었다.

 

  그의 그런 태도에 유오의 마음에 무시무시한 분노가 타올랐다. 그 분노를 지그시 눌러 담고 평정을 유지했다. 멀리서 보면 평소처럼 평화롭고 고고하게 서 있는 유오군의 모습일 것이다.

 

  “아버지의 말을 거역할 생각 말고 그저 주어진 대로 살아라. 이제까지 그렇게 착하게 살지 않았던가.”

 

  영호의 얼굴근육이 움찔했다. 유오의 눈도 제대로 보지 못하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 순간 전혀 다른 사람의 얼굴이 유오의 눈앞에 펼쳐졌다.

 

  핼쑥하게 마르고 아픈 그의 얼굴에서 누구를 향하는지 모를 분노가 피어났고, 그의 두 눈에 선명한 이채가 서렸다. 유약하기 짝이 없는 그의 평소 모습 때문에 사람들은 전혀 몰랐지만 유오만은 알았다.

 

  영호는 손 태부를 닮았다.

 

  유오는 살기가 가득한 영호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똑바로 응시했다.

 

  하지만 얼마 못가 영호의 시선이 아래로 톡 떨어졌다. 그는 두 손을 모아 허리를 굽혀 그에게 예를 갖춘 뒤에 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유오는 절뚝절뚝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다가 연이 있는 방안으로 들어갔다.

 

 

 

 *

 

 

 

  발간 볼과 땀에 젖은 이마를, 유오는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쌕쌕 숨을 고르는 그녀는 침상에 누워있었다. 호흡이 뜨거웠고, 다소 불규칙했다. 이따금 자는 도중 호흡이 끊어지기도 해 유오는 가슴이 철렁했다.

 

  유오는 조심스레 그녀의 이마를 눌러보았다.

 

  열이 있다.

 

  갓 세탁한 빨래를 잠시간 줄에 널었을 뿐인데도 꽁꽁 얼어버리는 매서운 추위 속에서 연속으로 비를 맞았으니, 아프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열에 지쳐 쓰러지기 전 그녀는 유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저택에 사람이 아닌 것이 있어.」

 

  항상 온화하던 유오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더 이상은 안 된다. 이곳에 계속 있다가는 연이 이 저택에 잡아먹힐 거다. 하루라도 빨리….

 

  그의 손이 연의 이마에서 뺨으로 건너갔다. 뺨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연아, 잠깐 일어나서 꿀물 좀 먹자.”

 

  타이르듯이 깨우니 연이 스르륵 눈을 떴다. 그녀는 이름을 불러주면 금방 잠에서 깨곤 한다.

 

  “유오.”

 

  다 갈라진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니 그는 마음이 메었다.

 

  “일어나서 따뜻한 꿀물 좀 마시자. 목이 좀 나아질 거야.”

 

  그가 그녀의 목에 받쳐주자 그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하지만 열 때문인지 미소가 어색하게 찌그러져있었다.

 

  “뭐 이런 걸 다 준비했어. 괜찮은데.”

 

  “괜찮기는. 코를 훌쩍거리면서.”

 

  그가 손으로 연의 코밑을 슥 닦았다. 연은 헤헤 웃으며 짐짓 과장스럽게 코를 마시는 시늉을 했다.

 

  연은 그가 내민 사발을 받아들고 한 번에 꿀물을 쭉 들이켰다. 꿀물이 따가운 목구멍을 따뜻하게 녹여주고 풀어주었다. 속이 한결 나아진다.

 

  “어으, 속이 풀어진다. 좋다. 고마워, 유오.”

 

  늙은 중년의 남자처럼 반응하는 연을 보며 유오는 말간 미소를 지었다. 연은 이따금 걱정으로 물든 유오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이런 익살맞은 몸짓으로 유오를 웃겨주고는 하였다.

 

  “내가 좋은 주인을 두었네. 노비로서 아주 만족스러운 삶이야.”

 

  연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유오의 얼굴이 조금 굳은 듯했다. 그는 금세 표정을 갈무리하고 탁상에 놓인 보자기를 풀어 배와 귤을 꺼내었다.

 

  그가 잔잔한 미소를 띤 채 말없이 귤의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연도 조용한 미소로 그런 유오를 바라보았다.

 

  깨끗하게 깐 귤을 그가 그녀의 입에 쏙 넣어주었다. 귤은 더할 나위 없이 달고 맛있었다.

 

  “귤 맛있다.”

 

  유오가 잠시 말이 없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그가 가져왔더라.”

 

  “누구?”

 

  “손 영호.”

 

  열심히 우물거리던 연의 입이 뚝 멎었다.

 

  유오는 변함없는 표정으로 과도를 쥐어 이번에는 배의 껍질을 벗기고 배를 먹기 좋게 자르고 있었다. 그릇에 정갈하게 깎인 배가 차곡차곡 쌓였다.

 

  “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어. 네가 비 맞고 앓은 것을 들은 모양이야.”

 

  “…그래?”

 

  “응. 네가 불쾌하다면 배와 귤, 그냥 치울까?”

 

  창밖의 빗줄기는 어느새 희미해져갔다. 유오가 배를 깎다말고 연을 뚫어지게 보았다. 연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연은 그런 유오의 눈을 응시하다가 이내 활짝 웃었다.

 

  “그래, 치우자. 뱃속에!”

 

  그러고는 유오가 깎은 배를 잔뜩 집어 입속에 넣는다.

 

  “후딱 먹어치워야지! 먹을 거는 무조건 뱃속에다가 버리는 거야.”

 

  유오는 피식 웃었다.

 

  “맞는 말이다. 자고로 음식은 죄가 없다 했으니. 아, 당과자도 챙겨왔어.”

 

  “진짜?”

 

  그녀의 얼굴이 환해졌다. 유오는 웃으며 품에서 종이에 싸인 당과자를 꺼내었다. 포장을 풀자 달콤하고 고소한 향이 방안에 퍼졌다.

 

  “자, 아.”

 

  당과자를 연의 입술에 대주니 이번에도 연은 잘 받아먹었다. 열기로 인해 붉어진 두 뺨이 조금씩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냠냠 씹어 먹는 소리가 잦아들 즈음, 연이 입을 열었다.

 

  “유오.”

 

  “응?”

 

  그가 부드럽게 반응한다.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무얼?”

 

  “도련님한테서 너와 태부어르신의 거래에 대해 들었어.”

 

  과일을 깎던 그의 손짓이 멈추었다.

 

  “내가 네 노비가 아닌 태부어르신의 것인 것도 들었고, 태부어르신께서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나를 너한테서 빼앗아 이 저택에 평생 가둬놓을 수 있다는 것도 들었어. 아니, 어쩌면 진짜 손 태부어르신의 인형이 될 수도 있지.”

 

  그 순간 유오의 머릿속에 그것이 떠올랐다.

 

  「왜 그거 있잖습니까, 그거.」

 

  하룻밤 신부.

 

  탁, 과도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무섭도록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단 한 번도 유오와 연 사이에 이토록 싸늘한 공기가 흐른 적이 없었다.

 

  유오는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연은 마치 아이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다정한 여인의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네가 태부어르신의 밑에서 무슨 일이든 다 하는 것도 알아. 영서 아가씨와의 혼례도 그래서라며.”

 

  “…언제 그런 얘기를 나누었어?”

 

  누군가가 유오의 목을 조르고 있는 듯한 목소리였다.

 

  “바로 어제.”

 

  연은 대답했다.

 

  “그가 그런 말을 하면서 또 네게 뭐라고 말했어?”

 

  유오는 역시 눈치가 빠르고 생각이 깊다. 영호가 구태여 손 태부와 유오의 숨겨진 거래를 말한 까닭을 알고 있었다.

 

  “도망가라고 하더라. 손 씨 집안에서, 이 저택에서, 그리고 너한테서.”

 

  유오가 고개를 들었다. 순간 연의 눈엔 그가 9살짜리 사내아이로 보였다. 그가 그의 어머니를 잃고 그 충격으로 머리칼이 온통 그의 눈동자와 같은 잿빛으로 물들었다던 그 어린 나이 말이다.

 

  이상하다. 나는 9살의 유오를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평생 동안 너는 손 태부 어르신의 손아귀 안에 있을 거래. 태부어르신이 그 거래의 약속을 지키지 않을 테니 너는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손 씨 집안에 얽매여 살 거라고. 그러니 나보고 얼른 도망가라고 하더라. 자기가 도와주겠대.”

 

  “…….”

 

  “나 말이야, 도련님의 그 제안에 대한 답을 이미 일찌감치 내렸어.”

 

  유오의 목대가 출렁였다. 그는 시선을 내려 그의 발끝만 쳐다보았다. 듣지 않아도 이미 연의 대답을 알고 있는 듯한 기색이었다. 살짝 쥔 그의 주먹에 핏대가 돋아났다.

 

  연은 말했다.

 

  “내 대답은 너랑 함께 있겠다, 야.”

 

  “…뭐?”

 

  그가 홱 고개를 올리고 연을 보았다. 놀란 것 같았다. 연은 빙그레 웃었다.

 

  “바보야, 왜 이렇게 놀래? 내가 널 설마 버리고 가겠어?”

 

  “하지만….”

 

  “그리고 만일 내가 너 버리고 간다고 하면 뭐 보내주기는 할 거야?”

 

  짐짓 장난스럽게 물어본 것인데 유오의 안색이 너무나 창백해졌다. 눈동자도 파도처럼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연은 그런 그의 볼을 양쪽으로 쭉 잡아당겼다가 놓았다. 그는 제법 귀여운 구석이 있다. 콩을 싫어하는 남자.

 

  “어린애 같아. 엄마가 버리고 갈까봐 안절부절못하는.”

 

  “…네가 언제든 날 버리고 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고 여겼어. 넌… 여기가 싫잖아.”

 

  “맞아. 죽도록 싫어.”

 

  연이 거리낌 없이 인정하자 유오의 얼굴에 또다시 푸른 기가 돌았다.

 

  “진짜 여기가 너무 싫어. 근데 여기가 싫다는 거지, 네 곁이 싫다는 게 아니야. 내가 끔찍하게 싫은 이곳에 남은 이유는 네가 있어서야. 네가 있잖아, 여기에.”

 

  유오의 호흡이 일순 멎었다.

 

  “매일 매일이 살얼음판이야. 높으신 분들 심기 안 거슬리게 내뱉는 말은 물론이거니와 걸음걸이, 손짓, 발짓, 심지어 호흡도 단정하게 해야 되는 것도 진절머리 나게 싫고, 우리에 관한 사람들의 터무니없는 뒷소문도 싫고, 다 똑같이 살기 힘든 노비들끼리 텃세와 눈치싸움 하는 것도 싫어. 그리고 하루가 멀다 하고 썰려나오는 사람들의 시체를 봐야하는 이 저택의 잔혹함도 무섭고 싫어. 근데 제일 싫은 건,”

 

  연이 숨을 가다듬고 말했다.

 

  “그 썰려 나오는 시체가 너일까 봐 매일 전전긍긍한다는 거야.”

 

  유오의 입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나온 것 같은 건 나의 착각일까.

 

  연은 유오의 손을 꼭 잡았다. 그의 거칠고 단단한 손의 큰 장점은 따뜻하다는 것이었다.

 

  “유오, 영서 아가씨의 약혼자가 너뿐이었던 건 아니잖아.”

 

  이전의 버려진 영서의 약혼자들이 어떤 최후를 걷게 되었는지는 이 나라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과장된 것도, 축소된 것도 있지만 그 이야기의 진실은 하나였다.

 

  손 태부에게 버려지면 끝이라는 것. 모든 것의 끝은 그 늙은이의 수중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살얼음판에서 발을 잘못 디디면 바로 죽어. 그게 바로 이곳이야. 네가 태부어르신을 대신해 온갖 더러운 짓과 수치스러운 일을 하고 있는 건 어림짐작하고 있었어. 하지만, 그 까닭이 나라는 걸 안 순간 이 저택에 대한 내 감정이 공포에서 분노로 바뀌었어.”

 

  사실 여전히 무섭다. 하지만 무섭지만은 않은 것이다.

 

  연은 유오의 가슴께에 있는 옷깃을 세게 잡았다. 그 바람에 아마 그는 가슴이 조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처음에는 너의 발목을 붙잡고 수렁에 끌고 가는 나만 없어지면 네가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어.”

 

  그러자 유오가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목이 메어 말을 못하는 대신 그렇게 마음을 표현했다.

 

  연은 웃는 듯 우는 듯한 얼굴로 그래, 하고 말했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런 고통을 겪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네 곁에 있어주길 바라는 거겠지, 그런 절박함이 있었던 것이겠지… 라는 생각이 들더라.”

 

  유오의 눈동자에 선한 빛이 물들었다. 연은 그게 눈물이라고 생각했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천민계집애를 친누이처럼 챙겨주고, 또 그 애를 위해 수치스러운 일도 마다하지 않는 너를, 나는 절대 못 버려. 그리고 넌 내게 남은 유일한 가족이야.”

 

  연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길게 내쉬었다. 후련하다는 표정이다.

 

  “그래! 대답은 애당초 정해져있었는데 살짝 미망에 사로잡혀있었어. 미안해, 아무래도 내가 좀 속물인가 봐.”

 

  “아니야, 너는…….”

 

  그가 잠시 연을 바라보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시간이 조금 길게 느껴질 만큼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연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연은 그런 그의 시선을 받아들였다.

 

  드디어 그가 하지 못한 말을 이었다.

 

  “너는 그냥 착한 거야.”

 

  “후, 그 말을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인 거야? 싱겁게시리.”

 

  그녀가 웃자 유오도 따라 웃었다. 하지만 웃음에 비통함이 섞여있어 맞잡고 있는 두 사람의 손이 미묘하게 떨렸던 것을, 둘 다 모른 체했다.

 

  “유오, 내가 한 말 기억해?”

 

  연이 미소를 거두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나, 어제 진짜 이상한 걸 봤어.”

 

  그녀가 유오의 뺨을 양손으로 감싸고 끌어당겨 가까이 얼굴을 마주 대었다. 둘 사이의 공간은 오로지 얇디얇은 종이만이 끼어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이는 혹시라도 둘의 대화가 밖에 새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 저택에는 솜씨 좋은 염탐꾼이 너무나 많으니 항상 창호지 너머를 의심해야한다.

 

  연이 속삭였다. 그녀의 속삭임 속 따뜻한 숨결이 그의 콧등을 간질였다.

 

  “붉은 악귀가 있어, 이 저택에.”

 

 

 

 ***

 

 

 

  남자는 물끄러미 별채가 있는 쪽을 응시했다. 별채는 쥐새끼 한 마리도 들어가지 못할 만큼 경호가 삼엄해 숨쉬기 힘들 정도로 고요하고 무서웠다.

 

  별채를 담당하는 호위들도 끔찍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 별채 안에 갇혀있는 여자의 정신이 미쳐있는 것은 당연할 일이었다. 어젯밤처럼 여자가 또 비명을 지를까 저택의 하인들이 입에 재갈을 물리고 질긴 무명천으로 입을 둥둥 싸매었다.

 

  공포와 절망에 허덕거리며 여자는 눈물을 흘렸지만 남자는 무감하기만 했다. 그런 것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저택의 음울한 분위기나 별채의 여자의 불행이나 그리고 이 저택의 생기를 앗아가는 악귀의 숨결 같은 것은, 남자의 관심을 조금도 끌지 못했다.

 

  그는 항상 무기력하고 나른했으며, 그리고 모든 것을 불신하는 경향이 강했으니까.

 

  아, 아니다.

 

  그는 간밤에 생겼던 일에 자그마한 흥미가 있었다. 변하지 않는 차가운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던 그의 감정에 미세한 떨림 같은 것이 알게 모르게 생겨났다.

 

  「우리, 만난 적 있죠?」

 

  남자는 그 질문을 받은 순간 여자의 얼굴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비에 흠뻑 젖은 그 여자는 겁에 질려있는 동시에 환희에 차있었다. 어쩌면 별채의 여자보다 더 미쳤을 수도.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여자의 얼굴 속에 남자가 찾던 것은 없었다. 빠른 속도로 흥미를 잃고 돌아서는 그를, 그녀가 붙잡고 칼날을 날렸다.

 

  제법 움직일 줄 아는군.

 

  그녀의 칼날을, 그녀의 손바닥 안에 돌려주었을 때 그녀가 짓던 표정이 조금 재미있었다.

 

  남자는 입가를 매만졌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이 기나긴 삶과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위해 여자를 한 번 더 만나볼까 하는 생각이 남자의 머리를 스쳤다.

 

  생각을 정한 그는 그의 검은 삿갓을 고쳐 쓰고 걸음을 옮겼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검은 삿갓의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새로 들어온 호위요? 나는 이 댁 아가씨의 심부름꾼이오. 아가씨께서 잠시 그쪽을 보자 하시는데 잠시 짬을 내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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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18. 각자의 계획 2018 / 12 / 31 226 0 7553   
18 17. 흥미 2018 / 12 / 31 232 0 9120   
17 16. 영서의 연서 2018 / 12 / 31 226 0 11181   
16 15. 검은 삿갓의 남자 2018 / 12 / 31 242 0 8891   
15 14. 유오의 근심 2018 / 12 / 31 238 0 10767   
14 13. 저택 속의 붉은 혼례복 2018 / 12 / 31 218 0 7479   
13 12. 도련님의 고백(2) 2018 / 12 / 31 239 0 12269   
12 11. 도련님의 고백(1) 2018 / 12 / 31 243 0 13596   
11 10. 숨겨진 본심 2018 / 12 / 31 249 0 11789   
10 9. 손 태부의 소원 2018 / 12 / 31 237 0 11149   
9 8. 유약한 도련님 2018 / 12 / 31 248 0 5968   
8 7. 영서아가씨(2) 2018 / 12 / 31 234 0 4989   
7 6. 영서아가씨(1) 2018 / 12 / 31 243 0 4957   
6 5. 빗속의 손님 2018 / 12 / 31 228 0 7150   
5 4. 그림자놀이(2) 2018 / 12 / 31 240 0 4261   
4 3. 그림자놀이(1) 2018 / 12 / 31 238 0 5406   
3 2. 그가 진심으로 웃을 때 2018 / 12 / 31 256 0 7807   
2 1. 저택의 소문 2018 / 12 / 31 247 0 15776   
1 서장 2018 / 12 / 31 402 0 1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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