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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홍귀
작가 : 연수희
작품등록일 : 2018.12.31

‘홍귀’라고 들어봤는가? 사람의 붉은 피를 거죽처럼 몸에 흠뻑 뒤집어쓰고 다닌다 하여 붙여진 어느 악귀의 이름이다.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을 이루자 붉은 악귀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사람들은 붉은 피를 흠뻑 뒤집어쓴 악귀의 모습을 두고 ‘홍귀(紅鬼, 붉은 악귀)’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그게 바로 붉은 악귀, ‘홍귀’다.

500년 만에 다시 세상 밖에 나온 홍귀, 홍귀를 쫓는 여인 연.

복수를 꿈꾸는 여자와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남자의 이야기.

 
16. 영서의 연서
작성일 : 18-12-31 21:08     조회 : 226     추천 : 0     분량 : 11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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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에게서 편지를 받은 적은 딱 세 번뿐이다.

 

  ‘당신이 좋으면 좋은 거고, 당신이 싫으면 싫은 겁니다.’

 

  그의 글씨가 좋다. 마치 글에서 향이 나는 것만 같아.

 

  ‘마찬가지로 당신이 힘들다고 생각되면 힘든 것이고요. 힘들면 무리하지 말고 그대로 포근히 누워 잠시 쉬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했으면 합니다.’

 

  반듯한 문체 속에서 그의 다정한 인품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 사람은 진심으로 나를 존중해준다.

 

  ‘영서,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그 문장을 읽은 순간 영서는 또다시 견딜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울컥해졌다. 참지 못하고 분별력 없는 어린아이처럼 꺼이꺼이 대성통곡을 할 뻔했다.

 

  이 편지를 읽은 것이 거의 수백 번이 넘어가는데도 영서는 항상 마음의 상자 속에 자신의 감정을 오롯이 담기가 버거웠다.

 

  그녀는 어느새 두 뺨에 흐른 눈물을 손수건으로 훔쳤다. 그런 뒤에 붉게 그을린 두 눈으로 다시 그의 글을 읽어 내려갔다. 울어서 가슴이 위아래로 조금 빠르게 오르락내리락했다.

 

  ‘몇 백번이고 몇 천 번이고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그 일에 관해서 당신의 잘못은 손톱만큼도 없습니다. 당신이 고개 숙여 사과할 일이 아니며, 당신이 수치스러워 해야 할 일은 더더욱 아닙니다.’

 

  맞아. 내 잘못 아니야. 내가 한 게 아니라구. 내가 한 게 아닌데 왜 내가 머릴 숙이고 사과를 해야 하지?

 

  ‘당신은 결백하고 당당합니다.’

 

  그 단정한 글자가 적힌 부분을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손가락 끝에서 느껴졌다. 그가 이 문장을 썼을 때, 무척이나 고뇌하고 걱정했다는 것을.

 

  그도 분명 지금의 자신처럼 이 종이를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글씨체만큼이나 단정한 그 얼굴로 무척이나 진중하게.

 

  붓을 들고 보드라운 종이 위에 그 크고 곧은 손으로 사근사근 글을 써내려갔겠지.

 

  참지 못하고 그녀는 사부작거리는 종이에 얼굴을 묻었다. 그대로 숨을 크게 쭉 들이켰다. 깊이 들이키는 숨과 함께 종이에 밴 기분 좋은 향이 콧속에 스며들어와 공허한 가슴을 가득 메웠다.

 

  잘 말린 비단종이의 냄새, 그리고 까만 먹과 은은한 품의 향.

 

  마음이 안정된다.

 

  버틸 수 있어. 나는 이 편지만 있다면, 이 편지를 써준 이 사람만 있다면 얼마든지 버틸 수 있어. 얼마든지.

 

  영서는 편지서 얼굴을 떼고,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로 마지막 문단을 읽었다.

 

  ‘살아줬으면 합니다. 당신이 살았으면 해요.’

 

  종이 맨 아래 오른쪽 끝에 글을 적어 보낸 분의 함자가 쓰여 있다.

 

  유오(柳塢).

 

  영서는 그의 이름을 끊임없이 바라보았다. 그것이 마치 그의 다정한 잿빛 눈동자인 것처럼.

 

  그의 눈을 실제로 마주보지 못하니 이렇게나마 그를 바라볼 수 있어 기쁘기도 한편 스스로가 너무 작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유국의 여자이고 손 씨 가문의 하나뿐인 딸이니까.

 

  “당신 같은 남자가 내 낭군이 된다니….”

 

  다른 여자들은 다 영서를 부러워한다. 포악하지 않고 다정하며 늘 공손히 대해주는 그가 영서의 약혼자이기에.

 

  노비로 치자면, 좋은 주인을 만난 것이나 다름없음이라.

 

 

 

 ***

 

 

 

  “아가씨, 기침하셨습니까?”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아침은 너무 어두웠고 부슬부슬 비까지 내리고 있어 저택의 휑한 분위기가 한층 더 춥고 쓸쓸해졌다. 비가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내린지 벌써 나흘째다. 꼭 하늘이 저택의 더러움을 모조리 씻겨내려는 듯 작정한 것 같았다.

 

  명멸하는 촛불 속에서 편지를 읽고 있던 영서는 문 밖에서 하녀의 목소리가 들려와 얼른 편지를 선을 따라 곱게 접었다. 그리고 그것을 비단으로 감싸고 붉은 실로 매듭지어 묶었다.

 

  “일어났어.”

 

  가다듬은 목소리로 말하자 하녀가 “그럼 세숫물을 곧 가져오겠습니다.”라고 답하였다. 하녀의 걸음이 총총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더 이상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자 영서는 숨을 후우 내쉬었다. 시선을 내려 두 손에 쥐어진 것을 바라본다.

 

  편지, 비단, 붉은 실.

 

  이건 유국 귀족 남녀들의 전통풍습이었다.

 

  비단에 붉은 실을 묶어 주고받은 연서를 보관하는 것.

 

  폐쇄적인 혼례풍습을 따르는 유국 귀족남녀들이 부부의 연을 맺기 전 유일하게 서로를 알 수 있는 기회는 바로 편지를 나누는 일뿐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대필을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종이 속의 이 지적이고 풍부한 감성의 소유자가 실제로 혼례를 올린 후 나의 남편이 또는 나의 아내가 아닌 경우가 많아 풍습대로 편지를 나누기는 하여도 그 값비싼 비단종이 속엔 신뢰와 애정이 조금도 담겨있지 않았다.

 

  ‘하지만 내 편지만은 달라. 이 안에는 진심이 들어있다구.’

 

  영서는 붉은 실로 묶인 비단묶음을 품에 꼭 껴안았다.

 

  ‘편지….’

 

  편지를 가슴에 껴안고 있으니 문득 불쾌한 것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그 둘도 편지를 주고받았었지.

 

  “영호 오라버니와 그 연갈색 계집년….”

 

  다시 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여러 명이다.

 

  영서는 붉은 실의 비단묶음을 서둘러 서랍 안에 넣어놓은 뒤에 열쇠로 서랍을 꼭 잠가두었다. 열쇠는 면경이 있는 탁상 아래, 가장 좁은 틈에 숨겨두었다.

 

  “아가씨, 세숫물입니다.”

 

  “들어와.”

 

  하녀 여럿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따뜻한 세숫물과 향유, 그리고 깨끗한 수건을 여러 장 가지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익숙한 동작으로 영서의 옷을 벗기고 몸을 씻겼다.

 

  양손, 두 다리, 목선과 가슴께, 그리고 고양이처럼 나른하면서도 새침한 그녀의 얼굴.

 

  영서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그들의 시중을 받아들였다.

 

  따뜻한 물에 불려 부드러워진 수건에 향유를 더해 그것으로 피부를 부드럽게 문지르고, 화려한 세공이 들어간 빗으로 검은 융단과도 같은 긴 머리카락을 쓱쓱 곱게 빗겨주었다. 영서는 그저 인형처럼 가만히 있었다.

 

  그저 아름답고 반짝이는 것들만 취할 줄 알면 되는 것이 귀족아가씨다.

 

  그녀는 조금 지친 얼굴로 의자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하녀들을 쭉 둘러보았다. 그러다 언뜻 눈에 띄는 아이가 있어 그 애에게 말을 걸었다.

 

  “너.”

 

  “네?”

 

  무릎을 꿇고 영서의 발을 정성껏 닦던 어린 하녀, 순이가 부름을 받고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영서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얼굴을 숙였다.

 

  “어제 마마께서 야참을 받고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다시 말해줘.”

 

  영서가 명령했다.

 

  아무리 약혼한 사이라도 정식으로 혼례를 치르기도 전에 남녀가 정담을 나누는 모습을 보이면 여기저기서 신부가 얌전하지 못하고 방정맞다고 수군댄다. 그런 소문은 또 바람보다 빠르고 넓게 퍼져 온 세상을 뒤덮는다.

 

  소문이 세상을 뒤덮으면 신부는 죽는다.

 

  왜냐하면 소문을 들은 신랑의 가문에서 혼담을 무 자르듯 썩둑 끊어버리기 때문이었다. 여자가 정숙하지 못하다고.

 

  사실 그것을 구실삼아 신랑의 가문이 저잣거리에서 생선 값을 흥정하듯이 혼례를 다루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더 많은 예물과 상대 집안의 권력을 원한다.

 

  혼례는 즉 거래, 장사인 셈이다.

 

  그래서 혼례가 정해지면 여자의 집안에선 신부를 방안에 꽁꽁 싸두었다. 이 과정을 견디지 못하고 도중에 고통과 수치심에 짓이겨져 자결하는 신부들이 무수히 많았다.

 

  유오군이 그럴 남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녀 자신을 정숙하지 못하다고 수군대는 사람들의 입방아에 그의 심기가 조금이라도 불편해질까 영서는 늘 두려웠다. 그러한 까닭으로 그녀는 아버님의 명으로 이 저택에 머무르고 있는 유오군을 만날 수가 없었다.

 

  비록 손 가의 저택이 궁궐 다음으로 넓다지만 그래도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는 건데….

 

  그와 한집에 있다는 사실이 긴장되고 설레어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비가 쏟아지는 어두운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동시에 그가 걱정되었다.

 

  아버님의 힘이라면 무엇 하나 이루지 못할 것이 없지만, 그래도 군 마마는 괜찮으실까? 홍귀가 군 마마도 잡아먹으면 어쩌지?

 

  그가 없어지면 나는 어떻게 될까?

 

  약혼자가 또 바뀔까? 그럼 그 다음 약혼자는 대체 누구지?

 

  ‘그가 죽어 사라질 수도 있다. 남편감이 바뀐다.’

 

  심장이 철렁했다. 영서는 고개를 거세게 저었다.

 

  아니야. 모든 게 다 괜찮을 거야. 마마는 유일하게 그 붉은 악귀에게서 살아 돌아온 인간이니까. 그래서 아버님도 마마를 믿고 부탁…….

 

  「홍귀의 피와 살은 영생을 준다죠.」

 

  돌연 어둠과 빗속에서 아버님의 말씨가 들렸다.

 

  「나는, 나는… 이대로는 죽을 수 없습니다. 조금 더 살고 싶습니다.」

 

  결국 어젯밤 영서는 참지 못하고 하녀를 부려 유오군에게 야참을 전했다.

 

  「어떻다 하시든?」

 

  야참을 전하고 돌아온 순이에게 물었다. 어린 하녀가 약간 상기된 얼굴로 답했다.

 

  「…감사히 잘 먹으시겠다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영서는 강한 충동에 휩싸였다.

 

  모든 것을 뒤로하고 그저 만나러 가고 싶어. 그냥, 그냥 가서 차라도 한잔 함께 마시고 싶어.

 

  하지만 그랬다가 아랫것들의 눈에 찍혀 이상한 소문이라도 돌면?

 

  그러고 보니 군 마마가 이 저택에 들어오자마자 손 가의 특산 차와 당과자를 들고 그 연갈색 계집노비에게 갔었다는 것을 하인들의 입을 통해 안 순간 영서는 마음이 아팠었다.

 

  나는 무서워서 내 약혼자에게 다가가는 것조차 못하는데, 너는…….

 

  소문에 더럽혀진 여자는 ‘그런 여자’라는 낙인이 찍혀 다시는 좋은 혼처를 얻을 수 없다. 살아갈 목적을 잃게 되는 것이다. 가족에게도 멸시를 당하고 모든 사람들의 시선에 몸과 마음이 사정없이 너덜너덜해진다.

 

  ‘그런 여자.’

 

  그 말만큼 무서운 말은 없다.

 

  얌전하게, 다감하게, 그리고 현명하게.

 

  낭군의 뜻에 반하는 말과 행동은 금기시되며, 허락 없이 눈을 마주하지 않고, 반드시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아 그 아들 역시 하늘과도 같은 존귀한 존재로 길러야만 하는 것이 유국여자의 숙명이다.

 

  여자의 명성은 그 과정 속에서 탄생한다.

 

  어머니. 어머니라는 이름이 여성에게 있어 최고의 칭호일 것이다.

 

  영서는 평생 그리 배우고 자랐다. 그 배움을 생명줄처럼 여겼다. 모두가 그렇다고 하여서.

 

  그래, 이렇게 살지 않는 여자가 어디 있어? 이렇게 살지 않는 여자는 신분이 천한 것들뿐이야.

 

  예의와 법도를 전혀 배우지 않고, 세상의 이치를 무시하며, 수치를 모르는 그런 여자들.

 

  그런 여자들은 대개 몸을 파는 창녀, 아니면 날 때부터 천한 노비다.

 

  ‘그 연갈색 년처럼 말이지.’

 

  그 연갈색의 여자는 둘 중 무엇일까? 창녀? 노비?

 

  아니, 둘 다야. 둘 다인 거야.

 

  ‘그러니까 마마를 그렇게….’

 

  아득, 영서는 입안을 세게 물었다. 보드라웠던 눈길이 금세 사나운 살쾡이처럼 매서워졌다.

 

  “얼른 마마께서 뭐라고 하셨는지 다시 말해줘!”

 

  영서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재촉하자 어린 하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고했다.

 

  “예, 예…. 그, 그러니까 군 마마께서 다소 놀라신 얼굴로 야참을 받으시더니 무척이나 다정한 목소리로 ‘아가씨께서 나 때문에 고생하셨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초조하고 불안했던 영서의 얼굴이 다시 기분 좋게 변해간다.

 

  “그리고 또?”

 

  “그리고 또… 아가씨께 감사히 잘 먹겠다 전해달라고…. 어제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아가씨.”

 

  “그거 말고 또 마마께서 다른 말씀은 안 하셨어?”

 

  영서가 뭔가 더 특별한 것을 바라는 눈빛으로 물었다. 순이는 순간 속이 떨렸다. 어젯밤 그가 베푼 다정한 호의가 떠올랐기 때문에.

 

  그가 준 도롱이는 단출한 하녀들의 방, 한 모퉁이에 고이 모셔두었다. 그리고 그가 불러준 제 천한 이름도 가슴 한 켠에 고스란히 놓아두었다. 그렇게 고귀한 신분의 잘생긴 남자가 자신에게 따듯한 친절을 베푼 것은 난생 처음이었기에 아직 나이가 어린 하녀는 그것들을 노련하게 쉬이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것들을 이 아가씨에게 말했다간 어떤 무서운 일이 벌어질지는 불 보듯 훤했다. 그 연갈색 계집노비의 신세가 자신의 것이 될 것이 너무나 뻔했다.

 

  “아, 그, 따로 특별한 것은 없었….”

 

  “그러고 보니 순이 너 방에 들어올 때 웬 사내의 큼지막한 도롱이를 걸치고 들어오지 않았었어?”

 

  같은 방을 쓰는 하녀, 말자가 아가씨의 머리를 빗다 말고 생각 없이 불쑥 내뱉었다.

 

  영서의 고개가 말자에게로 돌아갔다가 다시 순이에게 향했다.

 

  아가씨와 눈이 정면으로 마주친 순이는 숨이 멎었다. 순간의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사내의 도롱이?”

 

  아가씨가 물었다.

 

  “아, 그게… 아가씨, 그게요….”

 

  “아아.”

 

  영서가 눈알을 빙글 과장되게 굴렸다. 그런 그녀의 눈동자가 창가에 꽂혔다. 잠시간 말없이 창밖의 비를 본다.

 

  “어제도 비가 많이 왔었어, 그치?”

 

  그렇게 말하며, 아가씨의 눈동자가 다시 어린 하녀에게로 슥 향했다. 마치 다리 없는 뱀의 배때기가 소리 없이 땅바닥을 스산하게 기는 것과 같은 움직임으로.

 

  순이는 뱀이 제 목을 꽉 감싼 듯한 착각에 빠져 호흡이 불규칙해졌다.

 

  “다정하신 군 마마께서 비를 피할 옷을 네게 주셨구나.”

 

  “그게….”

 

  “며칠 내내 비가 계속 내리네. 가뜩이나 날씨도 너무 추운데 말이야. 이러다가 모두 지독한 고뿔에라도 걸리겠어. 근데 다행히도 넌 이제 도롱이가 있으니 문제가 없겠네?”

 

  순이는 그 순간 너무 무서워 잡고 있던 영서의 발을 놓치고 말았다. 고운 아가씨의 발이 물이 가득 담긴 대야 안에 풍덩 떨어졌다. 그 여파로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방안은 싸늘하게 식었다. 하녀들이 모두 기겁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가 곧장 허리와 고개를 바짝 숙였다. 발을 닦던 더러운 물이 영서의 옷과 얼굴에 튀었다.

 

  순이는 황급히 이마를 땅에 대고 사죄했다.

 

  “자, 잘못했습니다! 자, 잘못…!”

 

  순이는 허겁지겁 손수건을 꺼내어 영서의 얼굴을 닦아주려고 했지만 물을 뒤집어쓴 영서의 얼굴 속 두 눈동자가 너무나 차갑게 식어있어 그 무엇도 할 수가 없었다.

 

  영서가 손을 뻗어 머뭇거리는 순이에게서 손수건을 빼앗았다. 그리고 그것으로 얼굴을 닦으며 말했다.

 

  “주인 된 도리로서 심부름을 시켰으면 따뜻한 옷이라도 하나 내가 걸쳐줬어야 했는데, 그치?”

 

  “아, 아뇨…. 아닙니다.”

 

  순이의 입에서 간신히 목소리가 나왔다.

 

  “아니긴? 그래서 네가 마마께 웃옷을 받았잖아. 근데 말이야. 왜 그 사실은 내게 말하지 않았어?”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닌 것 같아서….”

 

  “그걸 왜 네가 판단해?”

 

  영서가 다 쓴 손수건을 쓰레기 버리듯 그대로 톡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얼굴을 쭉 내밀어 순이에게 시선을 가까이 맞추었다. 순이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을 느꼈다.

 

  “왜 말을 안 했어? 마마께서 도롱이도 직접 걸쳐주셨지, 응?”

 

  뒤늦게야 제 말실수를 깨달은 말자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이미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이었다. 입 잘못 놀려서 순이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는 웅이할멈의 노성이 머리를 때렸다. 아! 내 입이 방정이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내가 속 좁은 인간으로 보이니? 왜? 내가 고작 하녀 따위에게 투기를 느끼고 분노라도 쏟아낼까 봐서? 내가 패악질이나 부리는 여자로 보여? 너그러워 보이지 못해?”

 

  “아뇨, 아뇨! 절대!”

 

  “근데 왜 말을 안 했느냐고!”

 

  영서가 대야를 발로 걷어찼다. 대야는 순이의 얼굴을 때렸고 이와 동시에 그 속에 담긴 물이 순이의 얼굴과 몸을 흠뻑 적시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대야가 바닥을 굴렀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세우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지금 화가 난 건, 마마께서 네게 친절을 베풀어서가 아니야. 네가 내게 사실을 숨겨서야. 왜 숨겨? 어제 고할 땐 그런 얘긴 일언반구도 없었잖아. 숨기는 건 거짓말을 한 거나 다름없어.”

 

  “잘못했습니다, 아가씨. 저는 정말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결국 참지 못하고 순이가 훌쩍였지만, 그게 더욱 영서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어린 하녀가 자신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영서는 생각했다.

 

  “나를 군 마마의 깊은 마음씨도 품지 못하고 투기나 부리는 속 좁은 여자라고 생각한 게 틀림없어. 그러니 말을 하지 않은 것이지!”

 

  영서가 다른 하녀들을 향해 명령했다.

 

  “저것을 치워.”

 

  치워. 그것은 숨넘어가기 직전까지 매질을 하라는 뜻이었다.

 

  “아가씨! 제발!”

 

  순이가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는 두 손을 가슴에 모아 사정했지만 영서의 표정은 단호했다. 그 얼굴이 그녀의 아버지인 손 태부의 것과 소름끼치도록 똑같았다. 그녀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아버지의 잔인한 얼굴 말이다.

 

  서로를 힐끗거리며 쭈뼛거리던 하녀들은 곧 아가씨의 명령에 따라 순이의 양팔을 부여잡고 방에서 끌어내려고 하였다. 엉엉 우는 순이의 비명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말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애간장만 끓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말자의 머릿속에 좋은 수가 번뜩 떠올랐다.

 

  “아가씨, 잠시만요!”

 

  말자가 떨리는 맘을 부여잡고 영서를 불렀다. 영서가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넌 뭐야? 왜 나서?”

 

  “아가씨, 저기… 저것을 엄히 다스려야 하는 것은 마땅하나 만일 이 일이 군 마마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마마께서 아가씨를 오해하시지 않을까요?”

 

  “오해라니?”

 

  영서의 얼굴에 두려움이 깔렸다.

 

  “그것이… 아가씨께서 투기를 부려 어린 하녀를 벌하였다고.”

 

  그 순간 영서가 말자의 뺨을 세게 갈겼다. 순이를 끌어내리던 하녀들이 모두 일제히 행동을 멈추었다. 순이도 깜짝 놀라 울음을 멈추고 말았다.

 

  이윽고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영서가 방안에 있는 하녀들의 얼굴들을 전부 하나하나 쭉 노려보았다.

 

  “그래, 이 방안에 있는 천한 하녀들의 입이 또 나에 대해 아무렇게나 떠들어대겠지.”

 

  하녀들이 영서의 시선을 피했다.

 

  지금 어린 하녀를 향한 영서의 분노를 다른 곳에 돌리기 위해 말자는 영서가 더욱 크게 분노할 법한 일에 대해 간사하게 속삭였다.

 

  말자의 혓바닥은 깃털보다 가볍다. 혀는 가벼운 만큼 뾰족해져 듣는 이의 귓속을 사정없이 후벼 판다. 그리고 마음을 교란시킨다.

 

  “사실 군 마마의 고아한 품위를 가장 더럽히는 것이 그 연갈색 계집년 아니겠습니까? 마마와의 안 좋은 염문을 보란 듯 대놓고 뿌리고 다니고요. 제가 들은 것이 있습니다. 글쎄 그년이….”

 

  영서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느새 어린 하녀를 향한 영서의 분노는 저만치 사라지고 오로지 그 연갈색 계집노비에 대한 집착만이 영서의 내면에서 거칠게 꿈틀거렸다.

 

  “그년이 왜?”

 

  말자는 영서의 호기심을 극대화하기 위해 말을 잠시 멈추었다가 조금 더 본론을 뒤로 감추었다.

 

  “간밤에 별채의 신부께서 비명을 지르는 것을 아가씨도 들으셨지요? 하도 크게 질러대서 이 넓은 저택이 뒤숭숭해졌잖아요.”

 

  “그게 뭐 어쨌다고? 이번에 새로 들어온 오라버니의 신부가 유약하고 한심해서 매일 질질 짜고 울어대는 게 뭐 대수로운 일이야? 그보다 그년이 뭘 어쨌는데!”

 

  예상대로 뜸을 들이니 영서가 몹시 속을 태우며 말자를 볶아쳐댔다. 험담꾼으로서의 말자의 능력은 가히 손 태부의 정치질만큼이나 앙큼하고 음험하기 짝이 없다.

 

  “그날 그 시간, 그 별채에 그년도 있었대요. 웬 사내랑.”

 

  영서가 경악했다.

 

  “정말?”

 

  “그 연갈색 계집애가 그 야심한 밤에 자지 않고 침의차림으로 저택 안을 누비더니 이번에 새로 들어온 호위를 꼬드겨 정을 나누었다지 않습니까?”

 

  영서는 품위를 잃고 그만 하녀들 앞에서 입을 크게 쩍 벌리고 말았다.

 

  “지난밤에 왜 또 신부께서 비명을 질렀을까 궁금해서 제가 살짝 오늘 아침에 별채 주위를 기웃거렸는데 얼굴에 수염이 난 호위 하나가 그리 쑥덕대는 걸 제가 똑똑히 들었습니다. 계집애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속살이 다 비치는 얇은 침의차림으로 비를 홀딱 맞아서는 저택에 새로 들어온 사내 몸에 매달렸다고요. 이미 저택 안 사내들이 다 그 사실을 알아요. 다음 차례는 자기라며 난리, 난리 개난리랍니다.”

 

  “저런!”

 

  영서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새빨개진 얼굴로 벌새처럼 방안을 빙글빙글 빠르게 돌아다녔다.

 

  “내 이럴 줄 알았어! 마마 앞에서만 얌전한 척 굴지, 내 앞에선 건방지게 굴고! 근데 뒤에선 그런 짓을!”

 

  영서가 걸음을 딱 멈추고 무엇에 쓰인 것처럼 중얼거렸다.

 

  “그년 때문에 마마의 명성이 또 바닥에 떨어지겠어. 이를 어쩌면 좋지? 불쌍해서 거둬주었더니 마마는 물론이거니와 저택 안의 사내를 죄 꼬시려 들어! 그것 때문에 괜히 마마께 안 좋은 일이 생겨서 아버님의 분노라도 산다면 나는 어떻게 되고?”

 

  말자는 멈추지 않았다. 쐐기를 박았다.

 

  “제가 그간 겁이 나서 진즉 말씀은 못 드렸지만 그년 평소 하는 행동으로 봐서는 훗날 마마의 첩이라도 되려는 듯해 보였습니다.”

 

  거짓말이다. 하지만 앞선 진실에 작은 거짓 하나를 보태게 된다면 그것은 이미 기정사실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 말이 말자의 입밖에서 나온 것과 동시에 영서의 숨이 뚝 끊어지는 것을 모두가 느꼈다. 영서의 얼굴에 더 이상의 변화가 없었다. 멀거니 말자를 바라만 보았다.

 

  일순 영서의 그런 기이한 반응에 말자는 뒷골이 오싹해졌다.

 

  영서가 말했다.

 

  “마마께서 내 남편이 되시고 그년을 그러겠다, 하시면 나는 어쩔 수 없어.”

 

  영서의 두 눈이 바닥에 향해졌다. 그녀가 그대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 아가씨?”

 

  “그년이 간밤에 몰래 뒤에서 저택의 사내와 그런 몹쓸 짓을 했다는 것을, 마마께서도 아시니?”

 

  “그, 글쎄요. 그건 저도 잘…. 하지만 저택의 모두가 다 아니 마마께서도 아시지 않을까요? 더욱이 밤새 번을 서시기도 하셨으니 어쩌면 아시고 그년에게 크게 실망하셨을 수도….”

 

  “절대 니들 입으로 직접 마마께 말하지 마라. 특히나 내 밑에 있는 하녀들은 모두 함구해.”

 

  “예?”

 

  연적을 해치우고 싶다면 도리어 얼른 가서 고해바쳐야 되는 것 아닌가?

 

  “대신, 그 새로 온 호위가 어디를 담당하는지 좀 알아내. 이름이나 얼굴, 그리고 어디 출신인지도.”

 

  “그것은 왜요?”

 

  “왜긴?”

 

  영서가 고개를 올려 씩 웃었다.

 

  “그년에게 어울리는 짝을 주려고 하는 거지.”

 

  “그냥 마마께 가서 알리시는 편이 더 수월하지 않을까요?”

 

  “멍청하긴. 이래서 천것들은 안 돼.”

 

  영서가 말자를 하찮게 바라보았다.

 

  “그것을 내 입으로 말한 순간 마마의 눈에 나는 투기에 미쳐 이간질이나 하는 속 좁은 여인네로 비춰질 거야. 내 하녀가 말하면 내가 말한 것이나 다름없고. 그러니….”

 

  찰나였지만 순간 영서의 눈동자에서 절박함이 드러났다.

 

  “저절로 운명처럼 아시게 해드려야지.”

 

  후우 하고 숨을 내쉬는 영서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띠었다. 분위기가 급작스럽게 돌아가자 방안의 하녀들은 이제 어떻게 행동해야 될지를 모르고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기만 하였다.

 

  그런 그들을 뒤늦게 눈치 챈 영서가 하녀들, 그리고 하녀들이 붙잡고 있는 순이에게로 툭 시선을 던졌다. 모두 움찔했다. 하지만 아까와는 달리 영서의 눈길은 꼭 길가의 떨어진 돌멩이를 무심코 스쳐보는 것과 같이 단조롭게 변해있었다.

 

  “아, 저거.”

 

  영서가 순이를 두고 말했다.

 

  “어찌됐든 사실을 숨긴 건 여전하니 그냥 나흘 정도 굶겨.”

 

  말자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순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훨씬 더 자비로운 벌을 받게 되었으니.

 

  며칠 굶는 것 정도야 맞아죽는 거에 비하면 몇 배는 더 낫지 않은가. 그리고 몰래몰래 음식을 훔쳐 먹으면 고만일 것이다.

 

  역시 자존심만 센 저 고운 아가씨를 다루는 일에 있어선 그 연갈색 계집애만한 것이 없다.

 

  과연 저 독니 같은 아가씨가 그 연갈색 년을 어떻게 처리하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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