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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홍귀
작가 : 연수희
작품등록일 : 2018.12.31

‘홍귀’라고 들어봤는가? 사람의 붉은 피를 거죽처럼 몸에 흠뻑 뒤집어쓰고 다닌다 하여 붙여진 어느 악귀의 이름이다.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을 이루자 붉은 악귀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사람들은 붉은 피를 흠뻑 뒤집어쓴 악귀의 모습을 두고 ‘홍귀(紅鬼, 붉은 악귀)’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그게 바로 붉은 악귀, ‘홍귀’다.

500년 만에 다시 세상 밖에 나온 홍귀, 홍귀를 쫓는 여인 연.

복수를 꿈꾸는 여자와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남자의 이야기.

 
15. 검은 삿갓의 남자
작성일 : 18-12-31 21:07     조회 : 243     추천 : 0     분량 : 8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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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만난 적 있죠?”

 

  나는 그의 목소리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어.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

 

  그때도 그랬었어.

 

  나는 움직일 수 없었고, 당신은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꼼짝도 못하는 나를 굽어보고 있었어. 그리고 그 낮고 음산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었지. 비 역시 그때와 똑같이 내리고 있잖아.

 

  마치… 마치 그 순간을 재현하는 것처럼 말이야.

 

  쏴아아 검은 비가 모든 것을 잠식한 가운데, 검은 삿갓의 남자는 침묵했다.

 

  그의 고요한 숨결만이 느껴졌다.

 

  검은 삿갓 속에서 기묘하게 빛나는 두 눈동자가 무언가를 확인하는 것처럼 연의 얼굴을 면밀히 살폈다.

 

  스르륵. 스르륵.

 

  검은 동공이 아주 느릿하게 움직이며 연의 얼굴을 구석구석 관찰한다. 손을 대지 않아도 얼굴을 어루만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그는 연을 깊이 바라보았다.

 

  ‘…숨이 안 쉬어져.’

 

  처음에는 이마를 보았다가 그 다음에는 두 뺨과 콧방울을, 그러고는 입술로 시선이 옮겨갔다. 이윽고 스르륵 굴러가는 그의 눈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연의 눈동자였다.

 

  시선이 맞닿았다.

 

  그는 이상할 정도로 오랫동안 빤히 연의 연갈색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꼭 속을 샅샅이 파헤치듯이.

 

  영원과도 같은 순간이라고 연은 느꼈다. 내쉬고 마시는 숨이 이토록 버거운 적은 처음이었다.

 

  단지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 검은색과 연갈색, 두 사람의 눈동자색이 뒤범벅하게 섞이는 것만 같았다.

 

  이 순간에 빨려들어 빗소리가 들리지 않아….

 

  그 숨 막히도록 긴장된 시간은 남자가 연에게서 시선을 거두는 것으로 끝났다.

 

  툭, 그의 눈길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의 입술에서도 숨이 들릴락 말락 아주 옅게 떨어졌다.

 

  ‘…한숨을 쉬었어?’

 

  검은 삿갓의 남자가 등을 뒤로 젖히며 물러나더니 다시 무릎을 세우고 몸을 일으켰다.

 

  “처음 봐.”

 

  그가 무감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한 번 서늘한 익숙함이 등골을 훅 스쳤다.

 

  그가 몸을 돌려 이곳을 떠나려 해 연은 무심코 그의 옷깃을 덥석 움켜잡았다. 자신의 행동에 깜짝 놀랐지만 그렇다고 그의 옷깃을 쥔 손을 풀지는 않았다. 오히려 미약하게나마 더 힘을 주어 그를 붙잡았다. 그를 붙잡은 손끝이 한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를 놓칠 수 없다.

 

  “…자, 잠깐!”

 

  “놔.”

 

  그의 차가운 말을 듣자 손가락 끝이 아팠다. 손톱이 부서지고 그 부서진 틈에서 피가 쏟아지는 환각에 일순 빠졌다.

 

  다시 빗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도망가 안전한 곳에 숨어버리고 싶다는 갈망이 심장을 강하게 때렸다.

 

  무서워. 그냥 숨어버려. 도망쳐. 위험해!

 

  하지만,

 

  “잠깐!”

 

  연은 품속에 끌어당기듯이 그의 옷깃을 잡았다.

 

  파들거리는 작은 손이 옷깃을 꾹 잡고 놓아주지 않자 검은 삿갓의 그가 살짝 고개를 연에게로 비튼다. 그것만으로도 소름이 쫙 끼쳤다.

 

  연은 그를 붙잡은 채 나머지 한쪽 손을 허리 뒤편으로 옮겼다. 덜덜 떨리는 손가락 끝을 허리끈 속에 넣었다.

 

  침의차림에 간단하게 얇은 겉옷만 챙겨 입은 터라 보잘 것 없지만, 언제 어느 곳에 있든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자그마한 수호부를 몸에 꼭 챙기는 것이 연의 끈질긴 습관이었다.

 

  신발과 소매, 머릿수건 속과 허리끈, 그리고 밤에 잘 땐 베개 밑에.

 

  수호부는 날카롭게 벼려진 작은 쇠붙이, 칼날이었다. 단숨에 누군가의 목을 관통할 수 있는.

 

  “당신, 당신…!”

 

  그가 조금 더 가까워진다면,

 

  “분명히 예전에 날 본 적 있죠?”

 

  그의 목소리를 한 번만 더 듣는다면,

 

  “왜냐면 다, 당신은…!”

 

  지체 없이 이 칼로!

 

  “꺄아아아악!!!”

 

  그때 갑자기 무지막지한 여자의 비명소리가 빗소리를 찢어발기고 저택을 통째로 뒤흔들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연은 그만 손에 쥔 것을 놓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쇠붙이가 카랑 바닥에 떨어졌다.

 

  “…헉.”

 

  숨을 삼킨다. 다시 그 차가운 향이 폐부를 모조리 장악했다.

 

  바닥에 넘어질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사락거리는 차가운 천이 얼굴을 덮었다.

 

  앞으로 고꾸라진 연을, 그가 품안에 붙잡았다.

 

  비에 축축하게 젖은 자신의 몸이 그에게 안겨있다. 커다란 그의 손이 등허리를 감싸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살짝 빈틈이 생긴 의복사이로, 한계까지 벌어진 연갈색 동공이 그의 손 하나가 바닥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안 돼, 라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연이 그의 목을 관통하려고 했던 칼날을 손안에 쥐었다.

 

  연의 심장이 공포로 멎었다.

 

  “이걸 나에게 쓰려고?”

 

  그가 연에 귀에 입술을 바짝 대고 속삭였다. 조소가 섞여있다.

 

  소스라치며 발버둥치자, 연을 안은 그의 손에 더욱 꽉 힘이 들어갔다.

 

  연이 그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

 

 

 

  “이게 무슨 소리지?”

 

  유오는 흠칫 고개를 돌렸다.

 

  별채 쪽에서 여자의 비명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렸다. 이곳에서 별채가 멀리 떨어져있기도 하거니와 사나운 빗줄기 때문에 소리가 많이 묻혔지만, 그것은 분명히 여자의 비명소리였다.

 

  산채로 심장이 뜯겨져나가는 듯한 고통의 소리.

 

  듣자마자 마음이 크게 일렁였다.

 

  “자네들도 들었는가?”

 

  유오의 하문에 사당집에서 번을 서던 호위들이 일제히 창백해진 얼굴로 그렇다고 답하였다.

 

  “별채에 있는 신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유오의 두 눈이 어두운 빗속을 뚫고 별채가 있는 쪽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는 이내 결심한 듯 호위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중 넷은 나를 따라 별채에 가고 나머지는 예서 손 가의 사당을 지키게.”

 

  그러자 호위들이 대경실색한 얼굴로 유오를 만류했다.

 

  “안됩니다, 마마! 오늘 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손 가의 선조들이 잠드신 이 사당집을 꼭 지키라 태부어르신께서 그리 명을 내리지 않으셨습니까? 허락 없이 자리를 옮겼다가는 큰 화를 입게 될 것입니다.”

 

  “허나 자네도 들었지 아니한가? 별채 쪽에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어. 소문대로 진짜 홍귀가 나타난 것일 수도ㅡ.”

 

  그 순간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은 유오는 사당집을 지키는 호위들을 빠르게 살폈다. 그들의 눈. 모두 공포에 까무룩 질려있는 것이다.

 

  그렇군. 두려운 거야.

 

  ‘더욱이 동료하나가 오늘같이 비가 오는 밤에 죽었으니….’

 

  유오는 깊은 한숨과 함께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의 그는 모두가 다정하다 칭송하는 유오군이 아니었다.

 

  “알았다. 나 혼자 다녀올 테니 자네들은 여기 모두 있게.”

 

  호위들이 몸을 움츠리며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유오군의 억센 손이 칼집을 세게 쥐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몸에서 맹렬하게 뜨거운 푸른 결의가 돋아나있었다.

 

  “하, 하지만 군 마마!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혼자 가셨다가 혹 마마께 무슨 변이라도 생겼다가는…!”

 

  “허면 나를 따를 텐가?”

 

  유오가 웃으며 묻자 그들은 입을 얼른 다물고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종잇장보다 가볍고 찢어지기 쉬운 그런 걱정은 품속에 소중히 넣어두게. 하물며 지금은 비가 억수같이 내리고 있지 않은가? 빗줄기에 그 종이가 갈기갈기 찢겨져 진창 속으로 흘러가버릴 걸세.”

 

  호위들은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딱딱하게 얼어있었다. 다정하게 농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피부를 따갑게 채찍질하는 듯한 꾸지람이 그의 말속에 깊숙이 담겨져 있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금방 확인하고 올 테니 예서 맡은 바 임무를 다하고 있게. 알겠나?”

 

  “…예, 예! 군 마마!”

 

  유오는 벽에 걸린 제등을 쥐고 빗속에 들어갔다.

 

  차가운 빗줄기가 그의 머리를 타고 내려와 어깨와 등허리를 모두 적시었다. 그러자 이제는 전혀 아플 리 없는 전신의 흉터에서 사납게 날뛰는 통증이 느껴졌다.

 

  어금니를 꽉 물어 그 통증을 물리쳐본다.

 

  ‘이건 그냥 기억 속에 맺힌 통증일 뿐이야. 지금은 그 어떤 통증도 남아있지 않는, 그저 살갗에 새겨진 오래된 흔적에 지나지 않아.’

 

  흙바닥이 엉망으로 물러져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철퍽철퍽 기분 나쁜 감촉이 발을 휘감았다. 꼭 별채 쪽으로 가지 말라고 붙잡는 것 같았다.

 

  유오의 머릿속에 불길한 그림이 그려졌다.

 

  붉은 악귀. 홍귀….

 

  그것이 정말 이곳에 있는 걸까?

 

  대체 이 저택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비에 얼굴도 젖었다. 눈이, 무겁고 어둡다.

 

 

 

 *

 

 

 

  “이걸 나에게 쓰려고?”

 

  그의 품안에서 연은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겨우 턱을 들어 자신을 놔주지 않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는데, 벽에 붙은 제등의 흐릿한 불빛만으로는 그의 안면을 모두 속속히 꿰뚫어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소름끼치도록 말끔한 인상의 남자라는 사실쯤은 알 수가 있었다.

 

  깊은 음영이 진 그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갑고 무섭다.

 

  사람 같지 않은 모습이기에 연은 더욱 그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봐, 묻잖아.”

 

  대답이 없자 그가 연의 팔을 비틀어 잡는다.

 

  윽, 하고 연은 인상을 찡그렸다.

 

  통증이 피부를 뚫고 뼈와 근을 압박하자 연은 반사적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왼손을 힘껏 말아 쥔 뒤에 그 주먹을 그의 명치로 날렸다.

 

  보통은 여자가 반격을 못할 것이라고 쉽게 방심하기 때문에 이런 공격쯤은 열에 여섯 정도에게 통했다. 그 여섯은 상대를 너무 만만히 얕잡아보는 한심한 칠푼이들이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그런 칠푼이가 아닌 모양이다.

 

  공격이 턱 잡혔다. 둥글게 말려진 연의 주먹이 그의 손아귀에 오롯이 담겼다.

 

  “대담하네.”

 

  그가 말한다. 또 조소 섞인 음성.

 

  연은 즉시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그것을 눈치 챈 남자가 제 손아귀에 놓인 연의 주먹을 꼬옥 그러잡았다.

 

  그 순간 연의 전신에 어마어마한 식은땀이 맺혔다.

 

  싫어. 그렇게 날 잡지 마.

 

  무릎에 강한 힘을 실어 그의 턱이라도 가격하려던 찰나 남자의 등 뒤편에서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봐, 어디 있어! 지금 별채에서 난리가 났는데!”

 

  이윽고 요란한 목소리와 함께 모퉁이에서 등장한 사람은 손 씨 가문의 호위복을 입고 있는 웬 사내였다. 턱과 양 볼에 복슬복슬한 수염이 달린 자다.

 

  “거기 있었구만! 감히 신참 주제에 농땡이를 부리고 있…… 뭐야? 왜 여자를 품에 끼고 있어?”

 

  수염호위가 씩씩거리며 다가왔다.

 

  “이 새끼가! 일하는 첫날부터 저택의 하녀를 부둥켜안고 있어?! 뒈지고 싶어 환장했나!”

 

  수염호위가 팔을 쭉 뻗었다. 수염호위가 야만스럽게 잡아챈 것은 검은 삿갓의 남자가 아닌, 연의 연갈색 머리칼이었다.

 

  “윽!”

 

  엄청난 악력으로 연의 머리칼을 세게 잡아당긴다. 수염호위는 그대로 연의 머리를 자신 쪽으로 거칠게 꺾어 그 얼굴을 가까이서 확인했다. 너무 포악한 손길이라 순간 목이라도 부러지는 줄 알았다.

 

  “응?”

 

  연의 면상을 확인한 호위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뭐야, 넌. 유오군 마마의 연갈색 계집노비잖아.”

 

  왜 이 시간에 이 노비 년이 이곳에 있는 걸까.

 

  그런 표정으로 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호위는 이윽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비에 홀딱 젖은, 연의 얇은 침의차림에 한 번 놀라고, 이어서 그녀의 몸이 검은 삿갓의 남자의 품안에 꼭 안겨있는 것에 두 번 놀랐다.

 

  허, 하고 비웃음이 호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네 주인이 너를 작은 마누라쯤으로 여기며 애지중지하는 게 다 소용이 없구만. 이래서 천것들이란.”

 

  호위가 홱 연의 머리를 바닥에 던지듯이 놓았다. 그러자 연의 몸이 검은 삿갓의 남자에게서 완전히 떨어져나갔다.

 

  연은 황급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들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경계어린 표정으로 검은 삿갓의 남자를 주시했다. 그도 자리에서 일어나 똑바로 섰다. 그뿐인 동작인데도 밤하늘이 어깨에 쿵 떨어진 듯했다.

 

  수염호위도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그에게서 두 발자국 뒤로 물러난 뒤에 흠흠 괜한 헛기침을 내뱉었다.

 

  “흠흠. 이봐, 또 별채에서 난리가 났어. 신부가 또 발작을 일으켰다고.”

 

  신부가 발작을? 그리고 또? 연의 시선이 수염호위에게로 옮겨갔다.

 

  그보다 왜 저 수염난 호위가 이 남자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일까.

 

  연은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 동그래진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비바람이 세게 몰아쳐 뼛속까지 한기가 스며들었지만 검은 삿갓의 남자의 시선이 묘하게 자신 쪽에 향해있어 그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마음이 써늘해져 몸이 뜨겁다고 느껴졌다.

 

  “입에 거품 물고 맨발로 뛰쳐나왔다고. 아주 난리야. 그 소란에 하인들이 죄 몰려들려고 하는 걸 막느라 고생했어. 너는 얼른 별채 뒷문 쪽에 가서 괜한 똥파리가 꼬이지 않게 해. 그 누구도 이 상황을 보지 못하게!”

 

  심지어 명령까지 내린다. 연은 그의 모든 것을 샅샅이 쳐다보았고, 이내 이성을 잃은 자신이 미처 보지 못한 것을 보았다.

 

  검은 삿갓의 남자가 입고 있는 의복이 손 씨 가문의 호위복이다!

 

  이럴 수가! 어두운 청록색 의복과 허리띠와 소매에 깊이 박힌 이무기의 문양은 분명 손 가의 것이었다.

 

  “빌어먹을, 비도 오고 쌀쌀한데 어린 계집애 단속하는 일이나 해야 되다니.”

 

  수염호위가 칵 하고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러고서는 연에게로 힐끗 시선을 던졌다. 그 눈길이 연의 몸을 훑고 있었다.

 

  그는 잠시 멍한 표정이 되어선 비에 젖은 연의 살결을 구석구석 보았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지저분한 표정을 짓고 있다.

 

  연은 더러운 오물통에 빠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특히나 영호 도련님이 못 오게 해. 귀찮아지니까.”

 

  수염호위는 그 말만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본래 자신이 있던 곳으로 갔다. 떠나는 그 순간까지 연의 몸을 훑어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다시 둘만 남게 되자 다시 무시무시한 공포와 적막이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검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줄기가 더욱 크게 들릴 정도였다.

 

  검은 삿갓의 남자가 연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고, 연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봐요. 그쪽, 손 씨 가문의 호위인가요?”

 

  연이 물었다.

 

  “그래. 지금은 그렇지.”

 

  예상 외로 그가 순순히 답했다.

 

  “대체 왜요?”

 

  “이상한 질문이군.”

 

  이상한 건 당신이야. 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비가 오는 밤에 목이 말라 부엌간에 향하다 피처럼 붉은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신부가 입을 붉은 혼례복이었고, 연에게 말을 걸었다. 수상하여 붉은 혼례복을 벗기었더니, 그 속엔 아무것도 없었다.

 

  대경실색하여 도망치다 부딪힌 것이 이 남자다. 검은 삿갓을 쓴 그.

 

  너무나도 기묘한 일을 겪은 뒤에 만난 사람이 이 남자란 말이다.

 

  목소리가 너무나도 똑같은….

 

  “언제부터 여기서 일했죠? 그쪽 대체 누구예요?”

 

  손 씨 가문이다. 왕족에 버금가는 가문.

 

  ‘신분이 불분명한 자를 함부로 저택에 들일 리는 없어.’

 

  심지어 이제는 얼마 안 있어 중요한 혼례식이 있지 않은가? 홍귀가 손 씨 가문에 들렸다는 소문도 도는 마당에….

 

  하지만 이따금 손 태부가 변덕을 부려 희귀한 것들을 저택 안에 들이기도 한다. 그것은 아름다운 여염집 아낙일 수도 있고, 다리 없이 태어난 어린아이일 수도, 때로는 이 나라에서 천하다 여겨지는 무당일 수도 있었다. 예전에는 흉하게 생긴 웬 노파를 끌어와 웃음거리로 만든 적도 있었다.

 

  재물이라면 이미 곳간에 차고 넘치니 흥미와 쾌락을 위해 그러는 것이리라. 고약한 취미다.

 

  “대체 그쪽은 어디서 왔죠?”

 

  그가 입을 다문 채 연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연은 초조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드디어 그의 입술이 열리려던 순간,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연이? 여기서 뭐하는 거야.”

 

  빗속에 서 있는 유오가 보였다.

 

  유오가 무척이나 놀란 얼굴로 연을 보고선 검은 삿갓의 남자도 바라보았다. 잠시 당혹스런 표정으로 그 두 사람을 빠르게 번갈아보았다.

 

  “이 시간에 대체 왜….”

 

  그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고, 곧장 연이 있는 곳으로 성큼 걸어와 그와 연의 사이를 멀찍이 떨어뜨려 놓았다. 등 뒤에 연을 숨긴 채로 검은 삿갓의 남자를 응시했다. 하지만 질문은 연에게 향했다.

 

  “너 왜 여기 있는 거야?”

 

  놀라움과 걱정, 그리고 분노가 섞인 말투다.

 

  “그, 그게….”

 

  “너… 지금 침의차림이야?”

 

  살짝 고개를 틀어 연을 본 유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황급히 손에 든 제등을 바닥에 내려놓고 자신의 겉옷을 벗어 연의 몸에 입혀주었다. 찬바람이라도 새어들어 갈까 그 커다란 의복을 연의 몸에 빙빙 몇 번이나 감았다.

 

  “이 추운 겨울날씨에 비를 다 맞다니! 그렇게 얇은 차림으로!”

 

  잔뜩 목소리를 죽였지만 그래도 성난 어조는 감출 수가 없었다.

 

  “미안, 그게… 목이 말라서 잠깐 나왔다가 저택이 너무 넓어서 길을 잃었는데… 이상한 걸 봐서.”

 

  “이상한 거?”

 

  유오가 연의 말을 끊고 황급히 등 뒤에 서 있는 검은 삿갓의 남자를 보았다.

 

  유오는 연의 손목을 힘껏 움켜잡은 채로 그를 노려보았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보면 모르나?”

 

  그가 왕자군에게 무례한 언행으로 맞받아쳤다. 존대는커녕 허리 숙여 인사조차 올리지 않는다.

 

  “번을 서고 있잖아. 별채에서.”

 

  “헌데 왜 이 아이와 있어?”

 

  추궁하듯이 묻자 그의 고개가 비뚜름해졌다. 유오의 등 뒤에 숨겨진 연을 보기라도 하려는 듯한 자세라 유오는 더욱 깊숙이 연을 자신의 등 뒤에 숨겼다.

 

  “그건 저 아이에게 물어보지 그래? 가만히 있는 내게 불쑥 다가와 몸을 부딪치더니 다짜고짜 이상한 물음을 지껄여댔으니까.”

 

  “뭐?”

 

  “나는 이만 가봐야겠어. 할 일이 있거든.”

 

  그가 더 이상 볼일 없다는 듯이 등을 돌렸다가 그대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아.”

 

  그가 다시 몸을 돌려 유오가 있는 쪽을 보았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연에게로 향했다.

 

  그가 점점 가까워지자 유오의 손이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고, 연은 만전의 태세를 취했다. 하지만 그런 연을 유오가 뒤로 물러나게 했다.

 

  “자.”

 

  그가 한쪽 손을 내밀었다. 무언가를 꾹 쥐고 있었다.

 

  유오가 의아한 얼굴로 그의 손을 바라보다가 그것을 받으려 손을 내밀었지만, 그러자 그가 손을 거두었다.

 

  “네 것이 아니야.”

 

  그가 유오의 등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는 연에게로 시선을 고정시킨 채 말했다.

 

  “저 애 것이지.”

 

  그가 다시 주먹 쥔 손을 내민다.

 

  “자, 떨어뜨린 네 것.”

 

  잠깐 유오의 안색을 살핀 뒤, 연은 유오의 허리와 팔 사이로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떨리는 작은 손 위에 살포시 얹어진 그것을 본 유오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져버렸다.

 

  칼날.

 

  검은 삿갓의 남자는 발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비가 내리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귀신이라도 본 듯한 느낌이라 연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연은 손 안에 놓인 것을 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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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21. 가짜신부 2019 / 1 / 14 252 0 10817   
21 20. 소중하다는 것 2018 / 12 / 31 249 0 9264   
20 19. 그림 속 여자의 얼굴 2018 / 12 / 31 237 0 15181   
19 18. 각자의 계획 2018 / 12 / 31 226 0 7553   
18 17. 흥미 2018 / 12 / 31 235 0 9120   
17 16. 영서의 연서 2018 / 12 / 31 229 0 11181   
16 15. 검은 삿갓의 남자 2018 / 12 / 31 244 0 8891   
15 14. 유오의 근심 2018 / 12 / 31 240 0 10767   
14 13. 저택 속의 붉은 혼례복 2018 / 12 / 31 220 0 7479   
13 12. 도련님의 고백(2) 2018 / 12 / 31 243 0 12269   
12 11. 도련님의 고백(1) 2018 / 12 / 31 247 0 13596   
11 10. 숨겨진 본심 2018 / 12 / 31 251 0 11789   
10 9. 손 태부의 소원 2018 / 12 / 31 239 0 11149   
9 8. 유약한 도련님 2018 / 12 / 31 251 0 5968   
8 7. 영서아가씨(2) 2018 / 12 / 31 236 0 4989   
7 6. 영서아가씨(1) 2018 / 12 / 31 246 0 4957   
6 5. 빗속의 손님 2018 / 12 / 31 230 0 7150   
5 4. 그림자놀이(2) 2018 / 12 / 31 245 0 4261   
4 3. 그림자놀이(1) 2018 / 12 / 31 239 0 5406   
3 2. 그가 진심으로 웃을 때 2018 / 12 / 31 257 0 7807   
2 1. 저택의 소문 2018 / 12 / 31 250 0 15776   
1 서장 2018 / 12 / 31 408 0 1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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