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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홍귀
작가 : 연수희
작품등록일 : 2018.12.31

‘홍귀’라고 들어봤는가? 사람의 붉은 피를 거죽처럼 몸에 흠뻑 뒤집어쓰고 다닌다 하여 붙여진 어느 악귀의 이름이다.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을 이루자 붉은 악귀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사람들은 붉은 피를 흠뻑 뒤집어쓴 악귀의 모습을 두고 ‘홍귀(紅鬼, 붉은 악귀)’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그게 바로 붉은 악귀, ‘홍귀’다.

500년 만에 다시 세상 밖에 나온 홍귀, 홍귀를 쫓는 여인 연.

복수를 꿈꾸는 여자와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남자의 이야기.

 
14. 유오의 근심
작성일 : 18-12-31 21:06     조회 : 238     추천 : 0     분량 : 10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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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온 세상을 뒤덮을 듯이 내리고 있군.

 

  유오는 처마 밑에서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곧바로 그의 입술 새로 뽀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연이는 괜찮을까.’

 

  혁갑을 두른 유오는 옆구리에 칼을 찬 채 별채가 아닌 다른 곳을 호위하고 있었다. 어제는 별채를 지켰다면, 오늘은 손 씨 가문의 사당에서 번을 서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 신부를 지킬 요량이라면 별채 앞을 계속 지키는 것이 마땅할 텐데도 손 태부는 유오에게 오늘은 조상들의 넋을 기리는 사당집을 지켜 달라 부탁했다. 사당집은 별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며느리가 될 여자보다 이미 죽은 조상들의 위패가 더 귀한 모양이다.

 

  더욱이 손 태부는 어리석게도 홍귀를 노리고 있었다.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생각이다.

 

  「홍귀의 피와 살은 영생을 준다죠.」

 

  손 태부는 노화와 죽음을 극렬히 거부하고 있다. 사람을 잡아먹는 붉은 악귀의 영생을 탐구하고 있어.

 

  “…탐욕스럽기 짝이 없는.”

 

  무심코 중얼거린 서늘한 혼잣말에 옆에 있던 호위 하나가 깜짝 놀라 유오를 쳐다보았다.

 

  “예?”

 

  “아니다.”

 

  유오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때 저 멀리서 비를 맞으며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여자가 보였다. 눈을 가늘게 여미고 자세히 보니 이 저택의 어린 하녀였다.

 

  하녀는 품에 커다란 보자기를 꼭 안고 있었다. 행여나 보자기가 비에 젖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비에 홀딱 젖은 어린 하녀가 유오 앞에 섰다.

 

  어린 하녀는 덩치 큰 수십의 남정네들이 옆구리에 무시무시한 칼을 찬 채 일제히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자 그만 덜컥 겁을 먹고 말았다. 왕자군에게 응당 보여야 할 예를 모두 잊고 그대로 꽁꽁 얼어버렸다.

 

  어린 하녀의 고개가 빳빳이 서 있는 것을 본 호위 중 하나가 엄한 목소리로 하녀를 꾸짖었다.

 

  “어허, 무슨 일이기에 이 늦은 시각까지 왔다 갔다 움직여? 그리고 뭐해? 어서 군 마마께 예를 갖추지 않고!”

 

  “아, 아, 저어….”

 

  하녀가 어쩔 줄 몰라 하자 유오가 호통을 친 호위를 슬쩍 제 등 뒤로 숨기고는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다정한 저음에 어린 하녀의 눈이 유오에게로 향했다. 하녀는 잠시 멍하니 유오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내 그 잔잔한 미소에 넋이 나갔다.

 

  “아, 저는… 저는 영서 아가씨의 하녀입니다. 저기, 저어….”

 

  “천천히 말하렴. 재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단다.”

 

  우는 아이를 달래는 듯한 말투라 하녀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실은… 다름이 아니라 밤새 번을 서느라 고생하시는 군 마마를 위해 아가씨께서 손수 야참을 만드셨습니다.”

 

  하녀가 가슴에 품은 보자기를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수줍음과 겁에 질린 두 손이 조금 붉게 물들어있었고, 옅게 떨리고 있었다.

 

  “야참?”

 

  유오가 더 깊숙이 바라보며 묻자 하녀의 목소리가 콩알벌레만큼 작아졌다.

 

  “예, 예에…. 한번 잡수어보소서.”

 

  사실 야참을 만든 이는 영서가 아니었다. 영서는 만들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영서는 그저 아름답고 반짝이는 것들을 취할 줄만 아는 사람이었고, 또 그런 것들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존귀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굳이 그녀가 무언가를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러니 야참은 영서가 부리는 하녀들 중에서 가장 손이 야무지고 나이가 어린 하녀가 만든 것이었다.

 

  “아가씨께서 나 때문에 고생하셨구나.”

 

  유오의 그 말을 듣고 하녀는 조금 속이 상했다. 이 야밤에 고생하여 만든 것은 나인데….

 

  커다란 두 손이 하녀에게로 뻗어왔다. 깜짝 놀란 나머지 하녀의 두 눈이 휘둥그렇게 되었지만, 곧 그 두 손이 자신이 아닌 도시락에게 향했음을 깨닫고는 스스로의 착각에 민망해졌다.

 

  “그래, 여기까지 가져오느라 수고했구나. 비도 오고 날도 깜깜해서 많이 무서웠을 텐데.”

 

  “아, 아닙니다.”

 

  “아가씨께 감사히 잘 먹겠다고 전해주려무나.”

 

  “예.”

 

  하녀는 이번에는 예를 올리는 것을 잊지 않고 두 손을 모아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그런 뒤에 다시 서둘러 빗속으로 뛰어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얘야.”하고 불렸다.

 

  뒤돌아보니, 그가 손짓으로 이리오라고 부르고 있었다.

 

  하녀는 쭈뼛쭈뼛 다시 그에게 다가갔다.

 

  “부르셨습니까?”

 

  “날도 추운데 비 맞고 가려고?”

 

  예상치 못한 염려에 하녀는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이런 걱정을 높으신 분께 받은 것은 노비로서 난생 처음이었다. 어떻게 반응을 해야 될지 전혀 모르겠다.

 

  “괘, 괜찮습니다. 어차피 다 젖었는걸요.”

 

  “그래도.”

 

  유오는 두리번거리고는 벽 한쪽에 세운 우산 하나를 어린 하녀에게 건네주었다. 하녀는 화들짝 놀라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앞으로 크게 숙였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막아주는 우산을 쓸 수 있는 것은 오직 높으신 귀족님들뿐이시다. 그 외의 존재가 우산을 쓰는 것은 불경이나 마찬가지였다.

 

  “아, 아, 아닙니다. 제가 이런 우산을 어떻게….”

 

  “그냥 우산일 뿐이란다. 어서 쓰렴.”

 

  “아닙니다, 아닙니다.”

 

  하녀가 창백해진 낯으로 뒷걸음질을 치자 유오는 짧은 한숨과 함께 우산을 거두었다. 그리고 다시 주위를 살펴 적정한 것을 찾아냈다.

 

  “이거는 괜찮겠지?”

 

  하녀가 빼꼼 고개를 들고 유오가 다시 건넨 것을 보았다.

 

  짚으로 촘촘히 엮어 만든 도롱이(雨備, 우비)였다.

 

  “자, 이거라도 걸치고 가렴. 추위도 막아줄 거란다.”

 

  유오가 어린 하녀의 몸에 도롱이를 걸쳐주었다. 사내의 것이라 하녀의 몸에 너무나 커 무거웠지만 폭포처럼 쏟아지는 비와 살을 에는 추위를 막아주기엔 충분했다.

 

  “…가, 감사합니다, 군 마마.”

 

  “그래, 너도 수고했다. 아, 잠깐. 너 이름이 뭐지?”

 

  “저, 저요?”

 

  아랫것의 이름을 묻는 귀한 님도 처음 보았다.

 

  “어, 어… 저는 순이라고 합니다.”

 

  “그래, 순이.”

 

  그가 나직이 그 이름을 부르고는 다시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순이를 응시했다.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순이는 속이 찌릿하고 아팠다.

 

  “고맙다, 순이야. 이제 그만 돌아가렴.”

 

  “예, 예! 군 마마.”

 

  왠지 모르게 설레는 마음을 안고 순이는 빗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

 

 

 

  유오는 한숨과 함께 손에 들린 도시락을 보았다. 그리고 함께 번을 서고 있는 호위들에게 물었다.

 

  “자네들, 괜찮으면 같이 먹지.”

 

  그러자 내심 부러운 눈길로 유오의 도시락을 훔쳐보던 호위들이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저희들도요?”

 

  “하지만 아가씨께서 손수 만드신 걸 저희 같은 것들이 함부로 먹으면…….”

 

  유오가 빙긋 웃었다.

 

  “괜찮네. 자네들도 밤새 번을 서느라 고생이지 않은가? 함께 먹는 편이 좋아.”

 

  호위들은 머뭇거리다가 유오가 보자기를 풀고 도시락의 뚜껑을 열자 잽싸게 달려왔다. 그들의 입에서 와아아 감탄이 흘러나왔다. 보들보들하게 푹 익혀진 만두가 한가득 들어있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뜻한 김이 찬바람에 꽁꽁 언 얼굴을 녹여주고, 훅 풍겨져 오는 맛난 향은 바싹 마른 입안에 군침이 돌게 했다.

 

  유오가 망설이는 호위들을 위해 먼저 하나를 집어 입속에 넣었다. 따뜻한 육즙이 터져 나와 혀를 오롯이 감쌌다. 거기에 더해 얇은 피 속에 가득 채워진 속이 씹는 즐거움까지 선사했다.

 

  만두 속이 푸짐한 야채와 부드러운 닭고기로 이루어져있었다. 늦은 밤이기에 너무 속을 무겁지 않게 하는 재료를 쓴 모양이다.

 

  “자, 자네들도 먹게.”

 

  유오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호위들의 손이 도시락에 쏟아졌다. 그들은 뜨거운 만두를 양손으로 집고서는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는 영서 아가씨가 손수 만든 음식이라니! 이게 생시인가?

 

  “우어, 진짜 맛있습니다!”

 

  “아주 쫄깃쫄깃하고 속에서 육즙이 파하~ 하고 나옵니다!”

 

  다들 뜨거운 만두를 호호 불어가며 맛있게 먹어댔다. 유오는 그들을 흐뭇한 얼굴로 한번 바라본 뒤 자리에서 일어나 번을 서는 것을 계속했다.

 

  호위가 물었다.

 

  “마마, 왜 더 드시지 않고요?”

 

  자신들은 편하게 앉아 야참이나 먹고 있는데 왕족인 그가 더 이상 먹지 않고 일을 하니 굉장히 불편한 모양이었다. 심지어 이 야참의 주인은 유오였다.

 

  “나는 그 정도 먹었으면 됐네.”

 

  “하지만….”

 

  “야참의 양이 꽤 많은 것으로 보아 영서가 내 것뿐만 아니라 함께 고생하는 호위들의 것도 챙긴 게 틀림없어. 자네들 몫도 있는 것이니 괘념치 말고 편히 먹게. 그리고 나는 번을 서는 게 더 편해. 밤늦게 뭔가를 먹으면 속이 불편하거든.”

 

  “아, 그러십니까?”

 

  유오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호위들은 눈치를 안 보고 맘껏 편히 먹을 수 있었다.

 

  그들이 야참을 먹는 동안 유오는 다시 비가 내리는 처마 밑에 서서 저택의 곳곳을 빠짐없이 살폈다.

 

  홍귀가 매일 밤마다 나타나는 저택이라….

 

  ‘소문이 사실이라면 대체 왜 그 붉은 악귀는 혼례복을 입고 세 번째 신부에게 다가가는 것일까?’

 

  대체 왜?

 

  「신부가 자꾸 이상한 말을 한대.」

 

  「무슨 말?」

 

  「이럴 바엔 차라리 귀신에게 잡혀가는 게 나아… 라고.」

 

  서걱하게 베이는 듯한 추위가 유오의 등허리를 훅 쓸었다. 마치 방금 귀신이 등에 기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 게걸스럽게 만두를 먹던 호위가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말입니다, 마마.”

 

  유오는 그를 보았다.

 

  “새로 온 호위 말입니다. 왠지 으스스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녀석들도 옳다구나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그 호위 진짜 기분 나쁘게 생겼습니다.”

 

  손 태부가 직접 뽑은 그 호위를 말하는 것이다. 검은 삿갓을 쓴 남자.

 

  “뭐랄까, 기괴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 무슨 사람이 그렇게 겨울바람보다 더 쌩쌩 찬바람이 분대?”

 

  “고놈 참 싸가지가 없더라. 내가 아까 ‘처음 왔냐? 잘 지내보자’라고 손을 내밀었는데도 본체만체하고는 휙 지나치는 거 아니겠냐? 아이고, 주먹 날아갈 뻔했다!”

 

  “매운 맛 좀 보여주지 그랬어?”

 

  “그럴까?”

 

  호위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모두 하나같이 새로 온 그 호위를 흠잡고 있었다.

 

  유오의 눈빛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그 남자. 검은 삿갓을 쓴 남자.

 

  그를 본 순간 유오는 전신이 굳어버렸다. 일면식도 없는 처음 본 남자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반갑고 그리운 사람이 아닌, 두 번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은 무서운 사람과 조우하게 된 듯한….

 

  호위들의 말대로 그는 사람답지 않게 묘한 냉기를 쏟아내며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무심히 관조하고 있었다.

 

  끝없는 낭떠러지처럼 새까만 그 두 눈동자가 느릿하게 사람들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좇으며 눈여겨보고 있는 것이다. 소스라치게 싫은 눈빛이었다.

 

  그런 자가 저택의 호위라니. 누군가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의 낯이 아니었다. 오히려….

 

  “…응?”

 

  불쑥 시야에 무언가가 잡혔다. 유오의 턱이 그리로 향했다.

 

  어둠과 비 때문에 명확히 보이지 않아 미간에 힘을 주어야만 했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기에?”

 

  저택의 부엌간을 책임지고 있는 웅이 할멈이 보였다. 그녀는 이 야심한 시각에 자지 않고 저택의 복도를 총총 걷고 있었다. 왠지 서두르는 기색이다.

 

  “저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거지?”

 

  유오가 손가락으로 할멈을 가리키며 호위들에게 묻자, 유오의 곁에 가장 가까이 있던 호위가 먹던 것을 멈추고 유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답하였다.

 

  “아아, 할멈이로군요. 아마 태부어르신의 야참 때문에 저리 급하게 걷는 것일 겁니다.”

 

  “태부께서 이 시간에 야참을?”

 

  “왜 그거 있잖습니까, 그거.”

 

  그거?

 

  “태부어르신께선 원래 곧잘 몸에 좋다는 것을 많이 챙겨 드시기는 하지만, 요새 들어 특히나 더욱 그러신다고 합니다. 장어나 굴, 그리고 생강 뭐 그런 것들을….”

 

  “아아, 연로하셔서 그렇군.”

 

  생에 집착하는 늙은이이니.

 

  “아니, 그게 아니라….”

 

  호위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유오는 경악했다. 설마.

 

  “이따금 적적하실 때마다 저택의 예쁘장한 하녀들을 데려다 하룻밤 신부로 삼는다고 하더라구요.”

 

  늙은이가 생에 대한 집착만 있는 줄 알았더니 색도 강하게 품고 있었다.

 

  “이야, 대단하십니다, 진짜. 천하대장부가 따로 없어요, 태부어르신은!”

 

  만두를 입안에 가득 품은 다른 호위 녀석이 감탄했다. 그 덕분에 입안에 있던 음식물이 밖으로 마구 튀었다.

 

  유오는 다시 고개를 꺾어 빠르게 걸어가고 있는 웅이 할멈을 응시했다. 그녀의 품속에 작은 반상이 들려있었다. 저것이 늙은 손 태부의 속을 채워줄, 건강에 좋은 야참들인 것이다.

 

  역함이 유오의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언제부터 그러셨는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묻자 다시 호위가 대답했다.

 

  “그러신지 꽤 오래되셨죠. 저택의 하녀들 중 가장 얼굴이 곱고 조용하며 처리가 쉬운 계집애들을 종종 데려다 시중들게 하고 있습니다. 뭐, 도련님 대신 후계를 만들려고 그러시나 봅니다.”

 

  “…가엾군.”

 

  웅이 할멈의 반상에 눈길을 떼지 않은 채 유오가 중얼거렸다.

 

  “가엾어도 어쩌겠습니까? 그게 천한 계집노비신세인데.”

 

  유오의 속눈썹이 보일 듯 말 듯 떨렸다. 천한 계집노비신세….

 

  “이 저택 안에 있는 노비는 모두 태부어르신의 것이니까요. 그래도 하룻밤 신부로 지내서 태부어르신의 서자라도 덜컥 가진다면, 뭐 그건 그거대로 천한 년 팔자에 좋은 횡재 아니겠습니까?”

 

  만일 천민노비인 연도 하룻밤 신부신세로 전락해버린다면, 모두가 방금 떠들어댔듯이 연의 팔자가 횡재한 것이라 수군댈까.

 

  빠득, 칼의 손잡이를 쥔 유오의 손등에 굵은 힘줄이 돋아났다.

 

  “헌데 왜 별채가 있는 쪽으로 가는 거지?”

 

  웅이 할멈의 두 발이 세 번째 신부가 있는 별채 쪽으로 향해있어 유오는 의아해졌다.

 

  “뭐, 할멈이 세 번째 신부가 될 분의 식사도 챙긴다고 하니 그래서 그런 것이겠죠. 아, 그러고 보니 신부가 요새 발작을 일으키며 울고불고 난리라던데. 꼭 붉은 악귀를 본 것처럼….”

 

  “입 조심해!”

 

  무심코 붉은 악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호위를 다른 녀석이 일갈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냉각되었다. 다들 만두를 먹다 말고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유오는 시선을 그들에게로 돌렸다.

 

  “귀신얘기하면 진짜 귀신 오는 거 몰라? 입 조심하란 말이야! 얼마 전에 죽은 그 녀석도 죽기 전에 홍귀얘기를 했다가 그만ㅡ.”

 

  “홍귀얘기?”

 

  유오가 불쑥 묻자 말을 꺼낸 자가 입을 황급히 다물었다.

 

  “죽은 녀석이라면 혹 얼마 전에 홍귀를 보고 죽었다던 그 호위 말하는 건가?”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모두 미리 짜기라도 한 듯 입술을 굳게 다물고 눈동자를 휙휙 어색하게 굴리기만 할 뿐이었다. 어떤 이는 행여나 유오와 눈이 마주칠까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왕자군의 하문에 응하지 않는 것이 큰 불경인 것은 잘 아나 혹시라도 귀신의 이야기를 했다가 귀신의 눈에 띌까 두려워 다들 입을 열 수가 없는 것이었다.

 

  홍귀에게 걸리느니 차라리 왕족의 눈 밖에 나는 것이 더 낫다.

 

  그들 모두 두려움에 질린 것을 안 유오는 더 이상 깊이 캐묻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이 이상 추궁해도 더더욱 입을 굳게 채울 것이 자명했다.

 

  잠시 빗소리가 침묵을 잡아먹었다. 유오는 화제를 교묘히 돌렸다.

 

  “…태부께서 아무래도 후계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아 저리도 건강을 챙기시는 게 아니실까 싶어. 워낙 책임감이 출중한 분이시니 쉬이 떠나실 수 없는 것이겠지. 자네들 생각은 어떠한가?”

 

  가슴을 압박하던 화제에서 벗어나자 다들 안도의 숨을 작게 내쉬었다.

 

  “영호 도련님께선 이미 혼례를 두 번이나 치루셨는데도 여적 후계를 하나도 가지지 못했다는 거 아닙니까? 지금 나이가 벌써 스물여섯이신데.”

 

  경솔한 자가 먼저 반응했다. 이어 하나둘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아예 계집에게 관심이 없으시니 후계가 생길 리가 있겠나? 하늘을 봐야 별도 따지!”

 

  “다른 귀족가문의 도련님들은 본부인에 첩이 열둘이나 된다던데. 하물며 허구한 날 기생들을 옆구리에 끼고 살고.”

 

  “남자라면 응당 그리 살아야지! 재물과 여자! 그리고 명예!”

 

  호위들이 낄낄거리며 웃는다. 다들 상상만으로도 좋은 모양이다.

 

  “그래도 그 연갈색 계집노비에겐 관심이 꽤 있으신 것 같던데. 왜 작년에 데리고 도망치려고 했었잖아. 그 이름이 ‘연’이라고…… 아.”

 

  말한 녀석은 눈이 쟁반만큼 커져서는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리고 홱 유오를 쳐다보았다. 다른 호위들도 겁먹은 표정으로 유오를 살폈다.

 

  하지만 정작 유오는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다정다감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 어, 군 마마께서도 호방한 사내이시니 당연 그러시겠죠? 그, 그러니까 재물과 여자, 그리고 명예!”

 

  당황한 나머지 아무렇게나 말을 쏟아낸다.

 

  “하물며 마마의 안(顔)은 순식간에 이 나라 여자들의 맘을 단숨에 훔치지 않으십니까?”

 

  “인마, 이 나라 여자들만 그렇겠냐?”

 

  하나둘 유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알랑거렸다. 듣는 유오의 표정은 빙그레 웃고 있어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당최 어떤 속인지 가늠키가 어려웠다.

 

  하하하 어색한 웃음이 감도는 가운데, 다시 화제가 영호에게로 돌아갔다.

 

  “아, 아무튼 큰일입니다. 이러다가 손 씨 가문의 대가 끊길까 태부어르신께서 전전긍긍하고 계십니다.”

 

  “차라리 태부어르신께서 후계를 새로 낳는 게 더 빠르겠습니다. 영호 도련님께선 이번에 새로 오신 세 번째 신부에게도 아예 관심이 없으신 것 같은데.”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응? 아니야. 몇 번 별채를 왔다 갔다 하셨대.”

 

  “뭐, 진짜?”

 

  그 말을 내뱉은 호위를 향해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유오도 그를 응시했다.

 

  놀라운 말이 아닐 수가 없다. 그가?

 

  “세 번째 신부 별채를 담당하는 길쌈이가 그러던데, 큰 도련님이 몇 번 별채에 찾아오셨다는데? 그것도 늦은 밤만 골라서. 꽤 오랫동안 별채 주위를 서성이다가 가셨다 하더라.”

 

  “아아, 맞아. 그래서 원래 별채를 삼엄하게 지키던 이유가 붉은 악귀 때문이 아니라 영호 도련님 때문이었잖아. 자꾸 밤중에 귀신처럼 신부에게 은밀히 찾아오니까. 그러다가 나중에 붉은 악귀가 뭐 혼례복을 걸치고 신부를 찾아온다고 난리난리가 났었지.”

 

  유오의 눈빛이 첨예해졌다. 맨 처음은 영호를 막기 위해 별채의 호위를 섰다….

 

  “웬일이야? 이전 신부들에겐 눈곱만큼의 관심을 주지 않으셨던 양반이. 드디어 얼른 후계라도 갖고 싶으신 건가?”

 

  “근데 약간 이상했대. 이게 사내가 계집을 찾는 눈빛이 아니라… 좀… 공포에 질린 눈빛이랄까? 잔뜩 겁을 먹고 오셔서는 잠깐이라도 신부의 얼굴을 볼 수는 없느냐고 호위들과 하인들에게 졸랐다는 거 아니야.”

 

  괴이한 이야기가 시작되자 만두를 먹는 그들의 손동작이 느려졌다.

 

  “거참 이상한 일이구만. 그래서? 그래서 신부 얼굴을 보여줬대?”

 

  “당연히 안 되지! 혼례를 올리기 전에 서로 얼굴을 보지 않고 얌전하게 있는 것이 유국 귀족혼례의 전통이잖아.”

 

  오직 혼례식 당일에만 신랑과 신부는 서로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가 있다.

 

  “태부어르신의 명으로 도련님을 별채에서 멀리 떨어뜨려놓긴 했는데…, 도련님이 워낙에 간절하게 비셔서 나중에 몰래 편지를 신부께 보내드리긴 했어. 근데 이상하게 그 편지도 태부어르신께서 도중에 낚아채시고는 갈기갈기 찢어버리시더라.”

 

  “정말 이상하네! 아들이 그동안 생전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가 이제야 겨우 신부에게 관심이 생기려고 하는데, 그걸 막아? 나 같으면 혼례식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고 애가 생길 때까지 한방에 가두겠다!”

 

  옳소, 옳소 하고 호위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의 품위 그런 거 때문 아니겠냐?”

 

  “아니 귀족의 품위가 애를 낳아 주냐? 나참… 귀족나리들 속은 원체 알다가도 모르겠단 말이야. 군 마마, 군 마마께선 이해가 가십니까?”

 

  호위가 유오에게 물었다.

 

  유오는 가만 눈동자를 아래로 굴리고는 다시 그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단지 그뿐인 동작인데도 보는 이에게 묘한 아름다움과 덧없음을 선사해주었다. 연한 회색빛의 머리칼이 유오의 모습을 더욱 특별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여자였다면 필시 경국지색이리라. 아니, 지금도 그러한가?

 

  호위들은 꿀꺽 침을 삼켰다.

 

  “후계문제가 급하다고는 하나 신부의 명예를 위해 제대로 된 격식을 차려주고 싶은 태부의 다정한 마음씨겠지….”

 

  “아….”

 

  타이르는 듯한 그 조용한 어조에 아무렇게나 말을 떠들어대던 호위들은 괜스레 자신들이 부끄러워졌다. 그들은 묵묵히 다시 만두를 먹었고, 다 먹은 후엔 도시락을 깨끗이 정리해 통을 유오에게 건네었다.

 

  유오는 흘러내리는 빗물 속에서 몇 번이고 저 멀리 별채가 있는 방향을 응시했다.

 

  붉은 악귀, 손 태부, 영호, 세 번째 신부, 그리고… 연.

 

  이상하게 모든 일들이 한 번에 맞물려 벌어지는 듯해, 속이 떨리고 불안했다.

 

  이 거대한 저택은 마치 모두를 끌어당기고 죽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유오는 한손으로 가슴을 쓸어 불안한 마음을 달래었다.

 

  연이는… 지금쯤 방에 있겠지. 비가 와서 불면에 시달리고 있겠지만, 적어도 방에 얌전히 잘 있을 거야.

 

  ‘그렇지, 연아?’

 

 

 

 ***

 

 

 

  “너 뭐야.”

 

  모든 것이 혼미했다. 머릿속 생각이 모두 꼬여버렸다. 연은 미친 사람처럼 동공이 크게 벌어진 채 눈앞의 남자를 보고 또 보았다.

 

  남자의 물음에 답할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했다.

 

  오로지 남자의 얼굴만을 쳐다보았다. 생각과 함께 숨도 멎어버린 듯했다.

 

  그는 검은 삿갓을 쓰고 있었다. 검은 삿갓의 어두운 그늘 아래 선명한 빛을 띠고 있는 두 눈동자가 무척이나 서슬 퍼랬다.

 

  검은 비와 검은 삿갓.

 

  모든 것이 칠흑 같은 남자가 다시 한 번 더 연에게 물었다.

 

  “너 뭐야?”

 

  남자가 한 발작 가까이 다가온다. 연은 여전히 바닥에 굳어있다.

 

  이상해. 남자가 다가올수록 몸속의 피가 뜨겁게 들끓는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모조리 꽁꽁 차갑게 얼어버리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 정반대의 일이 동시에 몸속에서 일어나는 것만 같아.

 

  속이 미쳐버릴 것만 같아. 답답해서 모조리 꺼내고 싶어!

 

  저벅저벅, 어느새 남자는 지척에까지 다가왔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여 쓰러져있는 연을 향해 눈을 맞추었다.

 

  아, 형언할 수 없는 차가운 향이 콧속에 다가와 폐부를 장악했다. 그의 삿갓 속에 연의 얼굴도 들어갔다. 세상을 뒤덮는 빗소리 속에서 그와 호흡을 나눌 만큼 아주 가까이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이다.

 

  참지 못하고 속에 있는 것을 꺼냈다.

 

  목소리는 떨렸지만 뜻은 확실히 전해졌다.

 

  “우리, 만난 적 있죠?”

 

  나는 그의 목소리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어.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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