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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홍귀
작가 : 연수희
작품등록일 : 2018.12.31

‘홍귀’라고 들어봤는가? 사람의 붉은 피를 거죽처럼 몸에 흠뻑 뒤집어쓰고 다닌다 하여 붙여진 어느 악귀의 이름이다.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을 이루자 붉은 악귀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사람들은 붉은 피를 흠뻑 뒤집어쓴 악귀의 모습을 두고 ‘홍귀(紅鬼, 붉은 악귀)’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그게 바로 붉은 악귀, ‘홍귀’다.

500년 만에 다시 세상 밖에 나온 홍귀, 홍귀를 쫓는 여인 연.

복수를 꿈꾸는 여자와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남자의 이야기.

 
11. 도련님의 고백(1)
작성일 : 18-12-31 21:03     조회 : 243     추천 : 0     분량 : 13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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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거대한 저택에서는 항상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단 한 순간도 끊긴 적이 없어.

 

  「살려주세요.」

 

  처절한 그 목소리가 영호의 마음을 항상 짓눌렀다. 영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두 손으로 힘껏 귀를 막아도 봤지만 소용없었다. 목소리는 더욱 선명해졌다.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피가 덕지덕지 묻은 여자의 부서진 손톱이 고막을 잡고 뜯는 것 같았다.

 

  영호는 숨을 헐떡였다.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처음 그 목소리가 들렸던 것은 그가 17세였을 때다. 그때 그의 어머니가 대들보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발견되어 저택이 발칵 뒤집혔었다. 어머니를 맨 처음 발견한 것은, 다름 아닌 아들인 영호였다.

 

  살려달라는 여자의 목소리를 따라 어머니의 방에 갔더니, 어머니가 그렇게… 그렇게 되어있었다. 그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멍하니 서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토록 평온해 보이는 어머니의 모습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때 영서는 고작 9살에 불과했다. 여동생이 너무 어려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다행인 일이다.

 

  그 목소리가 또 들렸던 것은 바로 그 다음해였다. 첫 번째 아내가 숨을 거두었던 때였다.

 

  모든 귀족가문이 그러하듯 그녀와의 혼례는 정략혼이었다. 영호가 16세일 때 맞이한 첫 번째 아내였다.

 

  첫 번째 아내는 전형적인 양갓집의 규수로, 조금 오만하고 깐깐한 구석이 있었지만 우아하고 강인한 여성이었다. 스스로에게 긍지가 대단히 높은 여성이었다.

 

  도저히 자신 같은 것의 아내가 되기엔 너무나 아까운 여성이라 영호는 늘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대단했던 첫 번째 아내도 이 저택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울고, 웃고, 소리 지르고, 굶고, 아프고….

 

  총기가 넘치던 아내의 두 눈이 어느 순간부터 푹 어둡게 꺼져있었다. 그녀의 모든 것이 무기력해졌다. 그 어떤 희망도 아내에게서 느낄 수 없었다.

 

  아내는 생기를 모조리 잃었다.

 

  「살려주세요.」

 

  목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영호는 두려워서 그 소리를 외면했다.

 

  혼례를 올린 지 두 해가 되던 날의 밤, 첫 번째 아내는 자지러지게 비명을 지르고는 그대로 숨이 툭 끊어졌다. 그 비명을 잠결에 스쳐들은 하인들이 몇날며칠을 악몽에 시달릴 정도로 아내는 고통스러워했다.

 

  죄책감이 영호의 심장을 갉아먹었다.

 

  2년 후에 결혼한 두 번째 아내는 단정하고 수더분한 사람이었다. 심성이 곧고 상냥하며, 바느질보다는 공놀이가 사실 더 좋다고 작게 고백한 사람이었다.

 

  조신하지 못하죠? 하고 묻는 그녀에게 영호는 전혀 그렇지 않노라고 답했다. 건강한 것이니 오히려 좋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두 번째 아내가 활짝 웃었다. 웃음이 잘 어울리는 여자였다.

 

  이윽고 또 그 목소리가 들렸다.

 

  「살려주세요.」

 

  이번에도 영호는 눈과 귀를 꾹 막은 채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 뿐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도 첫 번째 아내처럼 이 집안에 잡아먹혔다. 영호가 애지중지 기르던 암탉이 아버님의 손에 의해 죽은 것처럼.

 

  영호는 밤마다 숨죽여 울었다.

 

  스스로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였나? 몸에 저주가 쌓인 것이….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어머니처럼 되려고 했던 순간이 숱하게 많았지만 모두 저지당했다. 이 집안의 일원인 이상 삶도 죽음도 모두 스스로의 것이 아닌 것이다.

 

  이 집이 무섭다.

 

  이 집안은 여자들을 잡아먹는다.

 

  그리고 잡아먹은 여자들을 양분으로 삼아 몸집을 비대하게 부풀리고 탐욕스럽게 또다시 먹잇감을 찾아 헤맨다.

 

  다음은 누구일까. 다음은…

 

  올해, 또다시 혼례가 잡혔다. 후계가 없기 때문이었다.

 

  추운 겨울의 사나운 눈바람 속에서 세 번째 신부가 될 여자가 찾아왔다. 집안이 물색한 그 여자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혼례를 보름 앞두고 벌써부터 저택의 별채에서 끔찍한 고통의 소리가 들려왔다. 새로 온 그녀는 앞서 죽은 아내들과 똑같은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여자의 울음소리가 핏빛처럼 선명하게 들려온다.

 

  「살려주세요.」

 

  손끝이 떨리고, 마음이 조였다.

 

  영호는 두 눈과 두 귀를 막았다.

 

  이 거대한 저택에서는 항상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단 한 순간도 끊긴 적이 없어.

 

  하지만 여느 때와는 다르게 그는 귀를 막던 손을 풀고 천천히 눈을 떠 앞을 똑바로 응시했다.

 

  연갈색의 여자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유오군의 노비.

 

  모두가 광인의 흰소리라 여기는 영호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고, 이해할 수 없는 영호의 기행을 힐난하지 않으며, 영호의 그림을 보고 순수하게 감탄해주던, 유오군의 노비.

 

  영호의 소중한 것을 비웃지 않았던 유일한 사람….

 

  그 애에게서도 조금씩, 조금씩 아주 희미하게 그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살려주세요.」

 

  울음소리….

 

  어쩌면 이번에 저택이 잡아먹으려고 하는 여자는 그녀일지도 모르겠다.

 

 

 

 ***

 

 

 

  화로에 올린 차 주전자가 삐 소리를 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뜻한 김이 얼굴을 감싼다.

 

  내뿜는 김이 얼굴을 포근히 감싸자 계속되는 폭우와 불면에 시달린 신경이 느슨하게 녹는 듯했다. 차에 대해 잘 모르는 우인(愚人)이라도 눈앞의 차가 무척이나 귀한 것이라는 사실쯤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차는 유오가 방에 들어올 때 당과자와 함께 가지고 온 것이었다. 손 씨 가문이 천민 따위에게 이런 차를 덥석 내어줄 리가 없다.

 

  ‘내 불면을 위해 유오가 고집을 부려 가져온 것이겠지.’

 

  다 끓인 차를 쪼르륵 두 개의 잔에 따르고 영호가 가져온 보자기를 풀어 당과자를 그릇에 가지런히 내어놓았다.

 

  유오가 가져온 당과자는 남은 것들을 모아 천으로 꽁꽁 감싼 뒤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그걸 본 영호의 얼굴이 묘하게 기분 좋아보였던 건 기분 탓이겠지.

 

  다과상을 차린 뒤, 연은 영호에게 허락을 구하고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맞은편에 있는 겁쟁이 남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는 구부정한 자세로 연이 타준 차만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간 침묵만 이어지자 창밖의 빗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려 작은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연은 황급히 먼저 입을 열었다.

 

  “우산이랑 옷, 감사했습니다, 도련님.”

 

  그제야 영호가 얼굴을 들었다. 커다란 그림자가 그의 눈 밑에 그늘져있다. 이틀 내내 내린 폭우로 악몽과 불면에 시달린 연보다 더한 몰골이었다.

 

  그는 얼른 다시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신경 쓰지 마. 그보다는 과자 먹어. 당과자.”

 

  그가 더듬더듬 손을 뻗어 과자를 집었다. 연에게 과자를 건네주는 그 야윈 손이 무척이나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소매가 너덜너덜하게 뜯겨져있는 것도 보였다.

 

  일부러 잡아 뜯은 흔적. 그는 여전히 ‘완벽’을 두려워하고 혐오하고 있는 모양이다.

 

  “…감사합니다.”

 

  그가 건넨 과자를 받은 찰나, 손끝이 닿았다.

 

  그가 황급히 손을 움츠렸다.

 

  연도 멈칫했다. 그의 손이 불처럼 뜨겁다.

 

  열이 있어. 아픈 거야.

 

  “도련님.”

 

  다급한 맘에 그를 불렀지만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가 ‘왜?’라는 눈빛을 보냈다.

 

  ‘당신은 아파요.’

 

  하지만 그 말이 도저히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아픈 사람에게 아프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영호는 여태껏 병자취급을 받으며 살아왔다. 조금만 콜록대도 수십 명의 인간들이 그에게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를 방에 감금당하다시피 가두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호라는 명목 하에 감시하고 옥죄었다. 그의 숨소리 하나조차도 놓치지 않으려했다.

 

  그는 새장에 갇힌 새처럼 부러진 날개를 퍼덕거렸다.

 

  연도 어릴 적에 많이 아팠던 적이 있었다. 두 발로 똑바로 서지도 못할 정도로 병약해 어머니와 아버지의 걱정을 많이 샀었다. 흐릿한 기억 속의 누군가에게 일생동안 외로운 팔자란 말도 얼핏 들은 것 같다.

 

  그렇기에 그가 느끼고 있을 무기력한 비참함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 스스로도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열이 나는데도 힘겹게 연을 찾아온 이유. 그게 지금 가장 중요했다.

 

  그는 내게 할 말이 있다. 아주 중요한 말.

 

  “…왜?”

 

  불러놓고서 빤히 바라만 보자 그가 머쓱한 표정으로 물었다.

 

  연은 그가 건네준 당과자를 한입 베어 물었다. 아삭하게 씹히는 소리가 나고, 고소하고 달달한 과자 맛이 입안에 싹 퍼졌다.

 

  “저 이 당과자 진짜 좋아해요. 너무 맛있어요.”

 

  그렇게 말하자 그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입매가 쑥스러운 듯 꿈틀대고 있다. 하지만 곧바로 표정을 정리했다. 자신이 여기에 왜 왔는지를 되새긴 듯했다.

 

  그는 천천히 턱을 들고 자세를 꼿꼿이 고쳤다. 어깨도 넓게 폈다. 그러자 푹 꺼진 눈에서 미약하게나마 형형한 빛이 새어났다.

 

  당당하게 펼쳐진 그 모습 그대로, 그가 연을 똑바로 응시했다.

 

  병색이 완연한 그는 자세를 바르게 고친 것만으로도 품위가 공기처럼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역시, 겁쟁이 괴짜라고 해도 대귀족의 후계자다.

 

  “시간 뺏어서 미안해.”

 

  노비인 연에게 그가 정중히 사과했다.

 

  “괜찮습니다.”

 

  연도 예를 갖추어 답했다.

 

  “너는 늘 괜찮다고만 하는구나.”

 

  그 읊조림에 연은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오래 얘기하지는 않을 거야. 아주 잠깐 감시를 피해 온 거라.”

 

  “감시요?”

 

  “응, 아버님이 나를… 걱정하셔서.”

 

  손 태부가 병약한 그를 가두고 엄격한 훈육을 시킨다는 말은 흘러들었다. 그는 그림이나 음악, 명상을 즐겨하는데 그것들은 손 태부가 모두 질색하는 것들이었다. 사내로서의 힘을 유약하게 한다는 것이 그 까닭이었다.

 

  산책조차 손 태부가 허락해줘야 그는 햇빛아래에 서 있을 수 있었다.

 

  그가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다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숨을 크게 들이켰다.

 

  “실은… 너한테 작년의 그 일로 사과를 하고 싶었어.”

 

  토하는 숨에 그가 그렇게 말했다.

 

  예상대로 화제는 작년의 그 사건이었다.

 

  모두가 잠든 어두운 밤중에 손 가의 장자가 유오군의 연갈색 노비를 훔치려고 한 그 사건.

 

  연은 대꾸 없이 그의 말을 경청했다.

 

  “정말 미안해. 정말, 정말 미안해…. 너를 겁먹게 했어, 내가. 적어도 너의 의중을 한 번 더 물었어야 했는데.”

 

  그가 얼굴을 고통스럽게 일그러뜨리고 양손으로 자신의 무릎을 세게 쥐었다. 그의 양어깨가 바르르 떨리고 있다.

 

  그에게서 진심어린 참회가 느껴지지만 쉽사리 그날의 일을 용서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도 안 된다.

 

  연은 감정의 동요가 전혀 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말을 이어나갔다.

 

  “바로 너에게 사과하고 싶었어. 의도는 그게 아니었지만, 과정이 결국 강압적이고 폭력적이었던 거야. 네 의사를 짓밟았어. 내 맘대로 너를 생각하고 판단했어.”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그는 마치 자기 자신이 울 자격도 없다는 듯 입술을 꾹 깨물고 안간힘을 다해 눈물이 흐르는 것을 막으려 애썼다.

 

  “미안하다는 말이 계속 입안에서 소용돌이쳤지만 너를 만날 수가 없었어. 네가… 네가 나를 혐오스럽게 볼까봐서. 그게 무서워서….”

 

  그는 그렇게 말하고서 스스로가 창피한지 얼굴을 홱 붉혔다. 그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감시가 더 심해졌었어. 또 분노한 유오군이 너와 나를 만나게 해주지도 않았고.”

 

  당연한 일이다. 연의 안전을 위해.

 

  “사과하고 싶으니 얼굴만이라도 보게 해달라고, 군 마마도 함께여도 좋다고 했지만, 유오군이 냉담한 얼굴로 모두 거절했어. 당장이라도 내 목을 분지르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어. 그럴 만도 했지. 그때 유오군은 정말 화가 났고, 슬펐고, 또… 아팠으니까.”

 

  유오….

 

  작년의 그 일로 유오의 얼굴이 공포로 새하얗게 질린 게 다시금 생각났다. 겁에 질린 유오의 그 얼굴이 연의 머릿속에 깊게 각인되었다.

 

  내가 사라지면 유오는 저렇게 무너지는구나.

 

  유오는 공포에 질리면 분노하는구나….

 

  유오는 혼자가 되는 것을 끔찍이 여긴다. 어린 나이에 정쟁에 휘둘려 처참하게 홀로 살아남은 운명을 겪어서 그런 것이리라.

 

  어린 나이에 잿빛으로 새어버린 그의 머리카락이 차마 말로 다 설명하기 힘든 그의 고통어린 인생을 단번에 이해시켜준다.

 

  그리고 그건 연도 마찬가지였다. 부모를 끔찍하게 잃은 고통이 있다.

 

  붉은 피로 범벅이 된 숲속의 작은 집….

 

  연은 입안을 지그시 물었다.

 

  유오와 연, 두 사람 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악몽이 있다.

 

  하지만 유오가 ‘떠나간 사람’을 잊지 못한다면, 연은 ‘앗아간 사람’을 잊지 못한다.

 

  “아니, 사실 네게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은 건, 내가 나약해서지.”

 

  그는 스스로가 무의식적으로 변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솔직하게 자신의 비겁함을 인정했다.

 

  그가 잠시 숨으로 고른다. 다시 자세를 바로 고친 그는 턱을 들고 연을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마주친 그의 눈동자가 두려움에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

 

  “미안해.”

 

  용서해줘.

 

  “아프게 해서. 겁먹게 해서.”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

 

  “원한다면 날 얼마든지 미워해도 좋아….”

 

  날 미워하지 말아줘.

 

  그의 말속에 숨겨진 절박한 본심이 들렸다.

 

  그는 다시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그러자 애써 참았던 눈물이 아래로 뚝뚝 떨어져 그의 손등을 적셨다.

 

  그가 흐느꼈다.

 

  울음 섞인 호흡소리와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만이 있는 적막 속에서 연은 그를 달래지도, 어르지도, 하다못해 손수건 한 장을 건네지도 않았다. 그저 울고 있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그의 울음이 잦아질 즈음에 연은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가장 중요한 걸 말씀 안 하시네요.”

 

  하얀 도화지에 색감이 사륵 퍼지듯, 방안에 나긋이 퍼지는 연의 음색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왜 그러셨어요?”

 

  연이 그 질문을 던지자 그가 당혹스런 얼굴을 했다. 대답을 못한다.

 

  연은 차분한 어조로 다시 물었다.

 

  “대체 왜 그러셨어요, 도련님?”

 

  “나는…….”

 

  “사과에 가장 중요한 것이 빠졌습니다. 도련님이 그때 왜 그러셨는지도 말씀해주셔야죠.”

 

  연의 표정은 다정했지만 목소리는 한없이 차가웠다.

 

  “무작정 울면서 사과만 하시면, 저는 이유도 모른 채 그 사과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난처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하물며 천민계집애 따위가 어디 감히 귀족나리의 사과를 거절할 수가 있겠습니까? 애당초 귀족도련님이시니 제게 딱히 사과를 하실 필요도 없으실 텐데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 태도는 당당하고 거침없다.

 

  하지만 도저히 이 사과를 마냥 받아들일 수만은 없었다. 그때의 그 공포는 자신의 심장을 집어삼키고도 남았다. 충격 또한 아직도 몸과 마음에 깊숙이 배여 있었다.

 

  잠결에 팔다리가 허공에서 흔들렸다. 몸이 붕 떠있는 느낌.

 

  눈을 두어 번 끔뻑거린 연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안고 달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장이 덜컹했다. 단숨에 정신이 들었지만 공포로 손발이 마비되었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생명의 위험을 느꼈다.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할 여유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그런 것을 확인하는 게 중요한가? 그런 급박한 순간에?

 

  그 순간에는 자신의 안위를 지키는 게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했다.

 

  아둔하게 얼어버린 몸에 강하게 명령을 내렸다. 움직여!

 

  그 명령에 다리가 움직였고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상대가 명치를 맞고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연도 함께 바닥에 쿵 넘어졌다.

 

  고통에 찬 남자의 신음이 들렸다. 연은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벌떡 일어나 도망치려했지만 어둠 속에서 팔목이 덥석 붙잡혔다.

 

  등골에 소름이 번지고, 그 순간 환청이 들렸다.

 

  「…살려줄까.」

 

  아!

 

  머릿속에 있는 가느다란 실이 뚝 끊어졌다.

 

  연은 홱 몸을 돌려 자신의 팔목을 붙잡은 상대에게 덤벼들었다. 그리고 마치 귀신에 쓰인 것처럼 상대를 때리고 짓밟고, 또 뭉갰다. 몸에 익힌 호신술을 모조리 쏟아냈다.

 

  누군가를 그토록 무지막지하게 때린 건 태어나서 그때가 처음이었다.

 

  으득, 하고 뼈가 어긋나는 느낌이 피부를 통해 연에게까지 생생히 전해졌다. 자신이 때리고 있는 것이지만 그 감촉이 섬뜩하리만치 무서웠다. 그럼에도 연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연을 훔치려했던 남자는 몸을 한껏 안으로 웅크린 채 가만히 연의 공격을 맞고만 있었다. 반격은 전혀 없었다. 그런 주제에 끝까지 연의 손목을 놓지 않으려했다. 바들바들 떨면서 말이다.

 

  영호의 시중을 드는 복용아재가 허둥지둥 나타나 연을 뜯어말리지 않았더라면 영호는 그날 맞아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연도 죽었을 것이다.

 

  그게 그날, 그 사건의 결말이었다.

 

  “네게 내 사과를 받으라고 강요할, 그,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

 

  그가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의 의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하나도.”

 

  단호함이 심폐를 찌르자 영호는 몸을 움츠렸다.

 

  “중요한 건 도련님의 행위와 내 마음이죠. 도련님의 행위에 상처받은 내 마음이요.”

 

  연은 더없이 냉정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말씀해주세요. 작년 겨울, 유오군 마마가 서쪽 변방에 가 자리를 비운 그날, 왜 나를 밤중에 훔쳐 달아나려고 했는지.”

 

  유오가 자리를 비우고 여느 때처럼 손 태부의 호위들이 유오의 집을 지킨 그날 밤, 손 가의 장자인 그는 연을 데리고 달아나려했었다.

 

  그날 집을 대신 지켜주던 호위들도 실은 사전에 영호가 미리 심어놓은 심복들이었다.

 

  미리 짜놓은 계획인 듯했다. 그답지 않은 짓이었다.

 

  “왜 그러셨죠?”

 

  영호가 혼돈에 잠긴 얼굴로 연을 응시했다.

 

  “세간의 말대로 제게 흑심이 있으셨나요?”

 

  그러자 그가 눈빛을 붉혔다.

 

  “아냐, 나는! 나는 정말 그게 너를 위한 일이라 생각해서 그런 거였어!”

 

  그가 몸을 크게 들썩였다. 그러다 사레가 덜컥 걸린 것인지 상체를 앞으로 크게 숙이며 요란하게 기침했다.

 

  “차 드세요.”

 

  연의 말에 그가 부들부들 떨며 따뜻한 차를 몇 모금 마셨다. 기침이 누그러진다.

 

  “편지….”

 

  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편지?

 

  “내가 예, 예전부터 네게 여러 번 말했었잖아. 노비신분을 버리고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내가, 내가 도와주겠다고.”

 

  “네, 그러셨죠. 하지만 제가 전부 거절했잖아요.”

 

  “근데 네가 내, 내 편지에, 마지막 답장을, 답장을 보냈었잖아. 떠나고, 떠나고 싶다고…. 너무 괴롭다고….”

 

  연의 눈살이 구겨졌다.

 

  “답장이라뇨?”

 

  그의 얼굴이 무너져 내렸다.

 

  그는 불시에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잠시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곧 붕어처럼 입을 뻐끔대더니 두 손을 바들거리며 허둥지둥 품속을 뒤적거렸다.

 

  비단으로 된 두툼한 묶음이 그의 품속에 나왔다. 붉은 실로 꽁꽁 싸맨 그 비단묶음은 무척이나 영호에게 귀해보였다.

 

  붉은 실이 풀리고 그 속에 있는 것이 드러나자 연의 호흡이 잠시 흐트러졌다.

 

  곱게 접힌 종이더미가 비단묶음 속에서 흘러나왔다. 연이 그동안 영호에게 주었던 편지들이다.

 

  “자, 잠깐만, 잠깐만.”

 

  그가 콜록대며 떨리는 두 손으로 바스락바스락 편지들을 들추었다. 그러고는 제일 밑에 있는 것을 꺼내어 펼쳤다.

 

  그 편지를 조심히 연에게 건네었다. 연은 편지를 받아 읽었다.

 

  편지의 내용을 읽은 연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은 이리 살고 싶지 않아요. 새처럼 훨훨 자유롭게 날고 싶습니다.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 도련님! 기회는 유오군 마마가 서쪽 변방에 보름동안 가 있는 순간뿐입니다. 부디,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 당신 밖에 없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연은 충격에 휩싸인 눈으로 편지의 내용을 읽고 또 읽었다. 그런 뒤에 얼른 고개를 들고 영호를 응시했다.

 

  “제가 쓴 게 아니에요.”

 

  “뭐?”

 

  “제가 쓴 게 아니라구요.”

 

  필체가 연의 것과 너무나도 똑같다. 하지만 연은 이런 내용을 영호에게 보낸 적이 없었다.

 

  “도련님, 이 편지는 제가 쓴 게 아닙니다. 저는 이런 내용을 도련님께 보낸 적이 없어요.”

 

  하물며 유오를 버리고 떠나겠다는 말을 이렇게 쉽게 할 리가 없다.

 

  영호도 연과 똑같이 충격에 젖은 얼굴이 되었다. 연은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쿵쿵 뛰는 마음을 차분하게 진정시켰다.

 

  잠시 생각에 잠긴 그녀는 이윽고 다시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도중에 누가 편지를 가로챘군요. 그리고 이런 내용을 꾸며서 보낸 거예요. 필체까지 똑같이 흉내 내어….”

 

  영호도 이에 동의했다.

 

  “그래, 정말 이 편지가 네가 보낸 게 아니라면….”

 

  “전 보내지 않았습니다.”

 

  연은 확고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말했다. 영호의 시선이 바닥에 힘없이 떨어졌다.

 

  “저희가 편지를 주고받은 걸, 다른 이가 혹시 아나요?”

 

  영호가 곧바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없어.”

 

  “정말요?”

 

  “응, 없어! 편지를 나르는 심부름을 한 복용을 빼고는 단 한 명도 없어! 복용은 어릴 때부터 내 시중을 들던, 온전한 내 사람이야. 절대 내게 반하는 행동은 하지 않아!”

 

  그건 연도 잘 알고 있었다.

 

  복용은 영호에게 충실한 사람이었다. 아비인 손 태부보다 영호를 더 살뜰히 챙기고 염려하는 따뜻한 존재였다.

 

  “그럼 누구일까요….”

 

  연과 영호가 편지를 주고받은 걸 눈치 챈 약삭빠른 인간. 이런 내용의 편지를 꾸며 보내 영호가 연을 한밤중에 안고 달아나게 만든 장본인.

 

  연이 이곳에서 사라지길 바라는 사람.

 

  “…아.”

 

  연과 영호, 두 사람은 동시에 같은 소리를 냈다. 조각이 맞춰지자 누구 짓인지 단박에 깨달았다.

 

  그렇구나. 그렇게 된 거였어.

 

  왜 이제서야 눈치 챈 걸까…?

 

  영호의 얼굴이 고통과 수치에 일그러졌다.

 

  “미, 미안해….”

 

  그가 사과했다. 그날의 까닭이 이렇게 밝혀져 연은 허무해졌다.

 

  증거는 없지만, 그 사람이 확실하다. 그 사람 말고는 이런 짓을 꾸며낼 이가 없다.

 

  추궁한다 해도 안 했다고 평소처럼 발뺌하면 그만이겠지.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우거나.

 

  “…됐습니다.”

 

  연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낮게 읊조렸다. 가뜩이나 비 때문에 예민해진 신경이 더욱 뾰족하게 변모했다.

 

  “이 일은 여기서 마무리 짓기로 하죠. 그날의 일을 이 이상 들추어봤자… 속만 더 쓰릴 뿐입니다.”

 

  “하지만….”

 

  “도련님께서 그날 밤 저를 몰래 안고 가시려고 한 것도, 제가 그것을 원하는 줄 알고 계셔서 그런 것이니 더는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원망하지 않겠다는 말이 꼭 더 이상 당신을 생각하지 않겠노라는 선언처럼 들렸다.

 

  “이제 더 하실 말씀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잠깐만!”

 

  영호가 간절한 얼굴로 외쳤다.

 

  “그럼… 너 정말….”

 

  띄엄띄엄 형편없이 떨어지는 말씨.

 

  “너 정말… 노비신분을 벗어나 자유롭게 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는 거야?”

 

  파르르 떨리는 그의 눈을 보며, 연은 표정을 관리하기 위해 노력했다.

 

  “제가 보낸 편지가 아니란 걸 이제 아셨잖아요.”

 

  “내가 지금 그걸 묻고 있는 게 아니잖아. 내가 묻고 있는 건, 너 정말 이대로 계속 살고 싶어?”

 

  “저 사는 게 뭐가 어때서요?”

 

  연은 순간 눈에 힘을 주었다.

 

  “다른 노비들은 다 저를 부러워합니다. 깔끔한 옷에, 밥도 든든하게 잘 챙겨먹고, 일은 고되지만 그건 원래 굶어죽지 않길 바란다면 누군들 그렇게 일할 거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연은 빠르게 내뱉은 말씨로 인해 거칠어진 숨을 잠시 정리했다.

 

  “좋은 주인을 만났잖아요, 저는.”

 

  연은 웃었다.

 

  “제법 괜찮은 인생입니다.”

 

  “그래, 제법 괜찮은 인생이야.”

 

  왜 영호의 표정이 비참해지는 걸까.

 

  “노비치고는.”

 

  뼈가 서린 그의 말에 연은 멈칫했다.

 

  쏴아아 빗소리가 다시금 방안을 장악했다. 빗속의 침묵이 싫어 어떻게든 허공을 메우려고 했지만 연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땐, 그저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 낫다.

 

  이번에는 반대로 그가 침묵을 깨트렸다.

 

  “네가 실은 멀리 떠나고 싶어 한다는 걸, 나는 알아. 자유로워지기를 바란다는 걸, 나는 잘 안다고. 많지는 않아도 우린 그동안 편지로 대화를 나누었으니까. 비록 네가 마음을 전부 털어놓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녹이 슨 목소리가 회색 빗물처럼 아래로 한없이 추락했다.

 

  “이곳에 있는 넌 한없이 불행해보여. 그리고 너는 여기가 끔찍하게 싫잖아.”

 

  연은 다문 입술에 더 꽉 힘을 주었다.

 

  “너는, 너는 호, 귀….”

 

  갑자기 그가 심하게 말을 버벅거렸다. 연은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재촉하면 할수록 그의 마음은 겁에 질려 더욱 다급해진다.

 

  연의 배려를 안 것인지 그가 마음을 다잡고 천천히 정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넌 홍귀를 만나러 가고 싶잖아.”

 

  그 순간 연의 심장이 멎었다. 쾅 하고 벼락이 몸에 내리꽂히는 듯한 충격이 전신을 장악했다.

 

  숨을 쉴 수가 없다. 영호에게 한밤중에 안겨 사라지는 그때보다도 지금이 더 두려웠다.

 

  간신히 숨을 삼킨 연은 그의 말을 부정하는 말도, 그렇다고 긍정하는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죄인의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우연히 너와 유오군의 대화를 들었어. 미안해, 훔쳐들을 생각은 없었어. 나는 그저 네가 왜 비를 무서워하는지만 알고 싶었는데, 네가 편지로는 끝까지 알려주지 않으니까…. 네가 비를 싫어하는 이유가 실은… 비 오는 날 홍귀에게 양친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심장이 뜨거워졌다. 그리고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까만 숲, 쏟아지는 굵은 비, 흐르는 피, 움직이지 않는 몸.

 

  그리고 그의 목소리. 그 낮고 음산한 목소리.

 

  연은 주먹을 꽉 쥐었다.

 

  영호가 다급하게 말했다.

 

  “걱정 마! 이 사실을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 나만 알고 있어.”

 

  그가 잠깐 입을 굳게 다물고는 뜯어진 소매의 부분을 만지작거렸다. 값비싼 천이 더욱 엉망이 되어간다.

 

  “…넌 절대 이곳을 못 떠날 거야.”

 

  병색이 짙은 얼굴의 영호가 낮게 중얼거렸다.

 

  “유오군이 널 잡아두고 있으니까.”

 

  연은 딱딱하게 얼어있는 상태로 그를 무연히 바라보았다.

 

  “유오군은,”

 

  그가 탁상 위에 놓인 당과자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 다정함으로 널 천천히 죽게 해. 왜냐면 그는 아주 이기적인 인간이거든.”

 

  “아니에요.”

 

  그렇게 말한 순간 속이 메스껍고 아팠다.

 

  “너는… 아니라고 말하지만 나는 들려. 네 울음 섞인 비명소리가. 유오군도 네 고통이 분명히 들리겠지만, 그는 줄곧 모른 척해왔어.”

 

  “저는 운 적 없어요.”

 

  “아니야, 넌 울어. 지금도 울고 있잖아.”

 

  연의 뺨은 보송보송하게 말라있었다. 두 눈도 멀쩡했다. 어딜 보아도 운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물며 영호 앞에서 눈물을 흘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전 지금 눈물 한 방울도 안 흘리고 있는데. 하물며 도련님 앞에서 눈물을 흘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내가 말하는 ‘눈물’은 그런 게 아니야.”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가 두 번째 손가락으로 연의 심장 한가운데를 정확히 가리켰다.

 

  “여기서 나는 눈물이 네게서 들리는 울음소리야.”

 

  그러고서 그는 손가락을 돌려 자신의 심장도 가리켰다.

 

  “나도 그렇게 울 거든. 그래서 네 울음소리가 들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모르겠어요. 전 울지 않았어요.”

 

  영호는 고집스런 그녀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뜸을 들인 뒤, 그가 말했다.

 

  “괜한 고집으로 네 시간을 잡아먹지 마. 시간은 항상 네 곁에 있어주는 듯하지만, 실은 누구보다도 네 곁에서 빨리 사라지고 있는 존재야. 시간이란 이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고 가장 냉정한 존재니까. 덜하지도, 더하지도 않지. 네가 심하게 넘어져 길바닥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어도 널 결코 기다려주지 않아.”

 

  그가 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순간 그의 눈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공허함이 넘쳐났다.

 

  연은 뒷목이 오싹해졌다.

 

  핏기가 없는 그의 입술에서 고요한 말씨가 흘러나왔다. 너무나 조용한 말이라 연은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나 얼마 못 살 거야.”

 

  갑작스러운 고백에 연은 당황했다.

 

  네? 하고 물으니 그가 한쪽 손을 들었다. 그대로 뜯어진 소매를 천천히 걷어 자신의 피부를 보여주었다.

 

  끔찍한 장면이 시야를 지배했다.

 

  그의 팔뚝 피부가 얼룩덜룩한 검은 반점으로 죄 덮여있었다. 썩은 고기를 눈앞에서 보는 듯했다.

 

  그가 소매를 내리며 무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그나마 팔은 나은 정도야. 몸의 중심, 심장 쪽으로 갈수록 증상은 더 심각해.”

 

  “도, 도련님!”

 

  “난 죽어가. 그리고 더 이상 시간이 없어.”

 

  영호가 고개를 꺾어 창밖의 풍경을 보았다.

 

  어둠과 비에 뒤덮인 저택. 저택은 화려하고 웅장했지만 왠지 모르게 보잘 것 없이 메마르고 스산해보였다.

 

  여기가 과연 사람이 사는 곳일까?

 

  잠시간 창밖의 살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구배라고 알아? 500년 전에 살았던 몹시 아름다운 선관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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