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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홍귀
작가 : 연수희
작품등록일 : 2018.12.31

‘홍귀’라고 들어봤는가? 사람의 붉은 피를 거죽처럼 몸에 흠뻑 뒤집어쓰고 다닌다 하여 붙여진 어느 악귀의 이름이다.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을 이루자 붉은 악귀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사람들은 붉은 피를 흠뻑 뒤집어쓴 악귀의 모습을 두고 ‘홍귀(紅鬼, 붉은 악귀)’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그게 바로 붉은 악귀, ‘홍귀’다.

500년 만에 다시 세상 밖에 나온 홍귀, 홍귀를 쫓는 여인 연.

복수를 꿈꾸는 여자와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남자의 이야기.

 
1. 저택의 소문
작성일 : 18-12-31 20:43     조회 : 246     추천 : 0     분량 : 15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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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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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었어? 이 저택에 홍귀가 있대.”

 

  불온한 소리가 귀에 들리자 나물을 다듬던 연의 손이 멈칫했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조심히 고개를 돌렸다.

 

  부엌간에서 가장 따뜻한 곳인 아궁이 앞에 세 명의 여자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수다를 떨고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은 손 씨 가문 저택의 여자노비들인 말자, 순이, 그리고 웅이 할멈이었다.

 

  “모두가 다 자는 늦은 밤과 새벽 그 사이에 스르륵 스르륵 홍귀가 이 드넓은 저택 안을 활보하고 다닌다나봐.”

 

  입을 연 사람은 세 사람 중 가장 신장이 길쭉하고 양 뺨에 다닥다닥 깨를 뿌린 듯 주근깨가 잔뜩 박힌 말자였다.

 

  말자는 무슨 대단한 이야기라도 하는 양 표정이 자못 비장했다.

 

  “또 사람을 잡아먹으려고 그러는 게 틀림없어.”

 

  그러자 세 사람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순이가 겁에 질린 얼굴을 했다.

 

  그녀는 나이가 열여섯인데도 몸집이 작고 뼈골이 얇으며 행동거지 또한 어린아이 같이 어리숙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기껏해야 13살 정도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지, 진짜요?”

 

  순이의 반응이 마음에 든 모양인지 말자가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고개를 거칠게 끄덕거렸다.

 

  “그렇다니까? 태산도 단칼에 휙 베어버린다는 그 잘난 손 씨 가문의 호위들이 홍귀를 보자마자 바지에 오줌을 찍 하고 지려버렸대! 검은 아예 뽑아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꼴까닥 기절!”

 

  조금 과장을 섞어 말했다.

 

  힉, 하고 순이가 몸을 웅크렸다.

 

  그러자 옆에서 불을 쬐며 모시는 주인들이 먹고 남긴 음식찌꺼기를 늙고 꼬질꼬질한 손으로 싹싹 비워먹던 웅이 할멈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밥 처먹고 또 쓸데없는 말을 한다, 이년아! 홍귀가 이 저택에 왜 있니, 있기를! 여기가 어떤 곳인데! 나는 새도 뚝 떨어뜨리게 만든다는 손 씨 가문의 저택 아니냐!”

 

  웅이 할멈이 침을 튀겨가며 핀잔을 주자 말자와 순이가 얼굴을 구기며 허리를 얼른 뒤로 젖혔다. 할멈의 침과 함께 밥알도 얼굴에 날아온다.

 

  “아, 할멈! 더럽게 밥알 다 튀잖아! 입 좀 다물고 먹어. 으으, 더럽게….”

 

  말자는 얼굴에 튄 침과 밥알을 소매로 쓱쓱 닦으며 할멈을 흘겨보았다.

 

  “그리고 다 늙은 할멈이 무얼 알아?”

 

  “뭐라고, 이년아? 넌 뭐 안 늙을 것 같아?”

 

  “왜 싸우고들 그러세요….”

 

  두 사람 사이에 낀 순이가 무척이나 곤혹스러운 얼굴로 다툼질을 말렸다.

 

  하지만 다툼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웅이 할멈이 노성을 질렀다.

 

  “야, 이 말대가리 닮은 년아, 입 조심해!”

 

  “뭐? 말대가리?!”

 

  말자가 씩씩거렸다.

 

  자세히 보니 정말 말을 닮은 상이다. 순이는 무심코 웃음이 나올 뻔해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어야만 했다.

 

  “이 다 늙고 추레한 할멈이 누구더러 말대가리래? 나 열아홉 꽃다운 여자야!"

 

  그 말에 웅이 할멈이 콧방귀를 뀌었다.

 

  “이년아, 열아홉이면 벌써 시집가고 애를 적어도 둘이나 낳았을 나이다. 그뿐이랴? 지금 한창 서방 놈이랑 애 만드느라 쿵덕거릴 시간이기도 하지.”

 

  웅이 할멈이 제 치마를 벌러덩 들어올렸다. 두툼한 속바지를 입기는 했어도 너무나 노골적인 자세다.

 

  말자와 순이는 경악했다. 나물들 다듬는 척하며 그들의 대화를 몰래 엿듣고 있던 연도 민망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아악! 진짜 이 할멈이 미쳤나! 처녀들 앞에서 뭣 하는 짓이야?”

 

  말자가 버럭 소릴 질렀다.

 

  “처녀? 너 아까부터 개가 풀을 뜯어먹다 못해 푹 고아먹는 소릴 하고 자빠졌는데 순이는 몰라도 네가 네 입으로 자기를 처녀라고 하면 안 되지.”

 

  “뭐요?”

 

  “네가 저기 푸줏간 둘째 아들내미랑 몰래 붙어먹은 걸 내가 다 알고 있는데! 것도 강어귀에 있는 갈대밭에서! 둘 다 아주 얼마나 몸이 뜨거운지 뱀처럼 치덕치덕 엉겨서는…! 애는 안 생겼나 몰라?”

 

  그 순간 말자의 얼굴이 싹 굳었다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순이는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이고 있지만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말자를 힐끗힐끗 훔쳐보았다.

 

  “내, 내가, 내가 어, 언제, 언제 부, 붙어먹었다고…!”

 

  “더듬기는! 내가 태부어르신께 고해바치지 않은 걸 고맙게 여겨라, 이 썩어빠진 년아.”

 

  “아, 아니, 난 그런 적 없…!”

 

  쓸데없는 변명 듣기 싫다는 듯 웅이 할멈이 손을 내저었다.

 

  “됐고, 허튼 소리는 그만 늘어놓아라. 가뜩이나 혼례준비다 뭐다 해서 바빠 죽겠는데 별 시답잖은 소릴 하고 앉아있어. 지금 겨우 한숨 돌리고 있고만.”

 

  웅이 할멈은 다시 음식찌꺼기를 손으로 크게 떠 입안에 넣고는 우물우물 씹었다. 꿀꺽 하고 음식을 삼킨 뒤, 할멈이 말했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큰 도련님 혼례식이 있는데 이렇게 재수 빠지는 소릴 해서 부정 타면 네가 책임질 거여? 응?”

 

  “내가 뭘요!”

 

  “몰라서 물어? 원래 제사나 혼례 등 귀한 의식을 앞두고 그렇게 재미삼아 귀신얘기를 하면 절대 안 돼!”

 

  할멈이 말자의 등을 세게 짝 내리쳤다. 말자가 비명을 지르며 등을 배배 꼬았다. 다 늙은 할멈이 아직 이도 성한데다 힘도 장사다.

 

  “귀신은 지 얘기하는 걸 기똥차게 좋아하기 때문에 귀신얘기하면 같이 놀자는 건 줄 알고 개떼같이 몰려든다고, 이것아!”

 

  “그게 참이에요?”

 

  순이가 눈빛을 파르르 떨며 물었다. 가슴 앞에 꼭 모은 두 손이 아기의 것처럼 작고 앙증맞아 안쓰럽다.

 

  “그려, 그니까 귀신얘기 같은 건 장난으로라도 하지 말어. 그리고 제 암만 잘난 홍귀라도 여긴 못 들어와. 여기는, 이 저택은 살아있는 귀신소굴이야.”

 

  웅이 할멈의 눈동자에 깊은 두려움이 언뜻 스쳤다. 곧바로 능숙하게 두 눈에서 두려움을 지워냈지만 그 찰나의 순간을 연은 놓치지 않았다.

 

  “모름지기 사람이 가장 무서운 법이다. 귀신이야 뭐 그냥 못 본체하고 지나치면 귀신들도 우릴 그냥 넘어가주지만 사람은 그렇지가 않으니까. 사람은 사람을 해치거든. 못 본 척해도 절대 그냥 넘어가주지 않지.”

 

  그러자 말자가 비아냥거렸다.

 

  “무슨 소리야, 할멈? 노망들었어? 귀신이 더 무섭지! 사람의 손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사람을 해치는 건 귀신이거든?”

 

  할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네년이 아직 덜 살아서 그렇구나.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몰러. 자고로 사람은ㅡ.”

 

  “흥, 그런 고리타분한 사람타령 듣고 싶지 않아. 똑같은 얘길 대체 몇 번이나 하는 거야?”

 

  말자가 웅이 할멈의 말허리를 버릇없게 싹둑 잘랐다.

 

  웅이 할멈이 말자를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쏘아봤다. 순이는 두 사람이 또 사납게 말싸움을 할까 불안했다.

 

  “그래, 나도 딱 네년만할 땐 너무 어려서 막귀였었다, 막귀. 나보다 나이 많은 노인네들의 뼈가 서린 충고를 그저 치매 걸린 헛소리라고만 여겼으니까.”

 

  웅이 할멈은 잠시 말없이 말자와 순이를 번갈아보았다. 그러고 나서 등 뒤에 있는 여자에게도 시선을 던졌다.

 

  이쪽의 대화를 몰래 엿듣고 있었던 모양인지 여자와 눈이 곧장 마주쳤다.

 

  연갈색 눈동자.

 

  눈동자 색이 알알이 구슬처럼 맑고 투명하다.

 

  눈이 마주친 여자는 얼른 고개를 숙이고 부지런히 손을 움직여 나물을 다듬는 척했다.

 

  아까부터 구석에 박혀 나물을 다듬고 있는 저 여자는 이곳, 손 씨 가문의 노비가 아니다. 제 젊은 주인을 따라 이곳에 방문한 천민신분의 노비계집일 뿐이었다.

 

  주인이 다르다.

 

  그러니 여기서 힘들게 노동을 할 필요가 전혀 없는데도 여자는 묵묵히 이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바쁘지 않은 한가한 날에 방문했을 때에도 손을 걷어붙이고 일을 도운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아마 혼례식준비로 어수선하게 바쁜 이 부엌간의 분위기 속에서 혼자 뻘쭘하게 서 있는 것이 민망한 탓도 있겠지만, 애당초 손 씨 가문이 여자에게 그다지 즐겁지 않은 곳이기에 그런 것이리라.

 

  여자는 천한 신분인 주제에 감히 손 씨 가문 일족들의 눈에 단단히 박힌 존재였다. 지독한 애정과 고약한 미움을 동시에 한 몸에 받고 있다.

 

  ‘무슨 얄궂은 팔자인지, 쯧.’

 

  게다가 여자가 작년에 어마어마한 대형사건을 터트렸었다. 손 씨 가문의 장자를 흠씬 두들겨 팬 것이다. 감히 천민 따위가 귀족을!

 

  정말, 엄청난 대형사건이었었다.

 

  목이 잘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곤장 10대에 15일 구금되어있는 것으로 끝났다. 여자의 젊은 주인이 완강히 버티고 서 여자를 지킨 덕분이다.

 

  아, 여자의 젊은 주인.

 

  여자가 이 저택의 궂은일을 굳이 나서서 하는 또 다른 까닭은, 어쩌면 그 젊은 주인을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여자의 젊은 주인은 손 씨 가문에 얽매인 가련한 남자였다. 그 가련한 남자를 위해 손이 부르트도록 나서서 일을 하는 것일지도….

 

  어떤 이유이든 여자는 이곳이 편하지 않다. 손발이라도 바쁘게 움직여야 마음이 덜 심란할 것이다.

 

  묵묵히 육수를 끓여 우려내고, 고깃살을 적당하게 잘라 양념했으며, 틈틈이 행주를 빨아 주위를 훔친다. 그리고 저택 노비들의 밥도 따뜻하게 지었다. 지금은 모두가 잠시 숨을 돌리는 틈에 저 혼자 저렇게 나물을 싹싹 다듬고 있었다.

 

  한시도 쉬지 않는다.

 

  눈치껏 일을 찾아 하는 그 모습이 야무지게 느껴지기도 한편 왠지 짠하기도 하였다.

 

  여자는 커다란 수건으로 머리를 꾹 단단히 동여매고 있었다. 머리카락 단 한 올이라도 절대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게끔 해 아주 정갈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큼직한 머릿수건에 교묘히 가려진 이목구비가 제법 곱다. 드러나면 훨씬 더 보기 좋은 것이 그 속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노비 년 낯짝이 고와봤자 뒤웅박팔자다. 얼굴이 고운 노비 년의 팔자는 드세다. 좋을 게 하나 없다. 색이나 밝히는 주인만 좋을 테지.

 

  웅이 할멈은 다시 시선을 말자와 순이에게로 돌렸다. 주름진 입에서 “그래도 이 늙은이 말 좀 새겨들어”라는 노쇤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희들 이 저택에서 정말 입 조심해야 돼. 괜히 이러쿵저러쿵 입 잘못 놀렸다가 태부어르신이나 영서 아가씨한테 된통 걸리기라도 하는 날엔 진짜 뼈도 못 추려! 그때가 돼서야 뒤늦게 ‘아, 홍귀보다 무서운 것이 사람이구나.’하고 깨닫지 말고!”

 

  웅이 할멈이 진심을 담아 충고했다. 하지만 말자에겐 일절 통하지 않았다.

 

  “순이야, 진짜 할멈 치매 같지 않아? 어떻게 홍귀보다 사람이 무서워? 홍귀는 그 무엇으로도 죽일 수가 없는 요물이라는데?”

 

  말자가 대놓고 할멈을 무시하자 순이가 안절부절 할멈의 눈치를 보았다. 웅이 할멈은 멍청한 천치를 보듯이 말자를 보았다.

 

  “아이고, 대가리가 푹 썩은 말상한테 옳은 소리를 한 내가 미친년이지, 내가!”

 

  “누구더러 대가리가 푹 썩은 말상이래? 이 할멈이 진짜!”

 

  할멈이 몸을 일으키고서는 길을 막고 있는 말자를 발로 뻥 찼다. 말자가 악 비명을 질렀다.

 

  “비켜, 이년아! 오줌이나 누러 가게! 하여튼 멍청한 것들은 자리도 많이 차지해!”

 

  웅이 할멈은 부엌간을 나가기 직전에도 걱정 어린 따끔한 잔소리를 했다.

 

  “말자 너 괜히 입 잘못 털어서 순이까지 피해보게 하지마라! 순이는 말자랑 너무 어울려서 저 썩은 색으로 물들지 말고! 말자 저년 봐라! 아주 푸줏간 둘째 아들내미만 보면 좋아서 헤벌쭉ㅡ.”

 

  “얼른 오줌이나 누러 가요! 으으, 지린내!”

 

  “이년이 아직 싸지도 않았는데 지랄이야, 지랄은….”

 

  웅이 할멈이 부엌간을 나가자마자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말자가 하다만 홍귀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그것은 연이 역시 듣고 싶었던 이야기이기도 해 다시 말자에게로 조용히 시선을 던졌다. 말자의 말에 집중했다.

 

  “홍귀가 야심한 시각에 이 저택 안을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왜 도는지 알아?”

 

  “아까 웅이 할멈이 귀신 얘기하면 진짜 귀신이 온다고 했는데….”

 

  순이가 겁에 질린 얼굴로 말하자 말자가 픽 하고 웃었다.

 

  “얘, 다시 세상에 나온 홍귀는 미인만 골라 죽인대.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만 골라서 말이야.”

 

  “헉, 진짜요?”

 

  “그래. 그러니까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 네가 홍귀 손에 죽을 일은 절대 없어. 넌 어리기만 하잖아. 네 얼굴을 봐.”

 

  그 말에 순이가 풀이 죽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 잠깐…. 그런 경우라면 나는 좀 위험할지도? 홍귀가 나를 노리겠네!”

 

  깔깔깔 말자가 큰소리로 경박하게 웃어댔다.

 

  홍귀紅鬼. 붉은 악귀.

 

  사람의 붉은 피를 거죽처럼 몸에 흠뻑 뒤집어쓰고 다닌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사람을 해치는 끔찍한 악귀다. 홍귀만큼 백해무익한 악귀는 또 없으리라.

 

  남자, 여자, 노인, 아이.

 

  가리지 않고 모두 죽였다.

 

  마치 숨을 쉬듯이.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사람이라는 존재의 씨를 말리려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 같이….

 

  그런 홍귀를 500년 전 깊은 땅 속에 가둔 여자가 있었다.

 

  ‘구배’라는 이름의 굉장히 아름다운 여자였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전언에 따르면 그녀의 피부는 설산의 눈처럼 희고 고왔으며, 입술은 홍귀가 항상 몸에 두르고 다니는 핏빛보다 붉었고, 풍성한 머리카락은 가을밤하늘처럼 검디검되 달님의 빛이라도 머금은 양 은은한 윤기가 흘렀다고 한다.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모조리 끌어 모아 빚은 듯한 형상의 여자.

 

  모두가 그녀를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고 떠들어댔으나 실제로 그녀를 본 자는 이 세상에 남아있지 않다. 500년 전 사람이니….

 

  초상화 한 점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의 그 아름다운 낯을 아는 것은 오로지 홍귀뿐.

 

  그렇게 아름다운데도 하늘은 그녀를 더욱 완벽한 존재로 만들고 싶었던 모양인지 그녀에게 더 특별한 것을 선사했다.

 

  바로 신력이었다.

 

  무당기가 있는 존재들, 헛것을 많이 보는 사람들, 사람의 눈에 보일 리가 없는 것을 간파하는 어린아이들. 그런 사람들이 모두 신력을 지닌 자들이다.

 

  허나 사람의 생김새와 성격이 모두 천차만별인 듯 신력 또한 그 깊이와 실력이 모두 각양각색이다. 신력이 뛰어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처우는 확연히 달랐다.

 

  신력이 미천한 자들은 길바닥에 쭈그려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손금을 봐주는 것으로 겨우 생을 연명해가지만, 신력이 높은 자들은 바다 건너 제혜국(帝惠國)이라는 나라의 신당에 들어가 선관(仙官, 높은 신력을 가진 자들에게 내리는 품계)이 된다.

 

  그리고 신당의 선관들 중 가장 신력이 강하고 모두를 통솔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는 ‘대선관’이 된다. 구배는 제 1대 대선관으로서 유일하게 홍귀를 잡는 데 성공한 여자였던 것이다.

 

  홍귀.

 

  늙어죽지 않는다. 바스라지지도 않으며, 사람이 만든 칼이나 창 따위로는 절대 해칠 수 없고, 다른 귀신들처럼 주문이나 제, 그리고 부적으로 쉬이 정화하거나 없앨 수도 없다. 역병마저 퍼뜨리는 무시무시한 존재.

 

  무쇠처럼 단단하고 범보다도 용맹한 사내들이 홍귀를 해치우려 했지만 모두 하나같이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오거나 아니면 그 시신조차 가족의 품에 온전히 돌아오지 못했다. 홍귀가 그 시신들을 먹었다는 끔찍한 말도 있다.

 

  그런데 사내들조차 어찌하지 못했던 그 존재를, 한낱 여자가 가둔 것이다.

 

  아름다운 미모, 뛰어난 신력, 붉은 악귀를 가둔 최초의 인간.

 

  비범한 존재!

 

  전설 속 영웅들의 조건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홍귀를 가두고 얼마 못가 곧바로 숨을 거두었다. 붉은 악귀를 봉인하는 데 모든 기력을 소진한 탓이리라.

 

  그녀가 숨을 거두기 전 남긴 유언이 “내 죽음이 의미 있는 것이기를.”이었다고.

 

  그렇게 아름답고 뛰어난 존재도 마지막 순간에는 자신의 죽음이 헛된 것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는 구나, 하고 연은 생각했다. 일생을 특별한 존재로 살았을 텐데.

 

  구배가 홍귀를 가둔 것은 딱 500년뿐이었다.

 

  홍귀를 가둔 햇수가 500년인 까닭은 그녀가 홍귀를 가두기 위해 쳐둔 술術이 약해져서도 빛바래져서도 아니었다.

 

  어느 한 인간 때문이었다.

 

  구배를 이어 여러 명의 대선관이 나왔고 모두 하나같이 유능하고 뛰어나며 공명정대했다.

 

  하지만 38년 전, 제 12대 대선관만큼은 그러지 않았던 모양이다. 제 12대 대선관의 탐욕스러운 욕심과 무능력, 그리고 치명적인 실수로 인해 홍귀가 지하에서 풀려났다.

 

  빛 한줄기 들지 않는 어둡고 깊은 땅속에서 붉은 악귀가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다.

 

  모두의 예상대로 세상에 다시 나온 홍귀는 이전과 같이 사람을 죽이고 다니며 여기저기 역병과 저주를 퍼뜨렸다.

 

  다만, 들리는 참혹한 소문에 의하면 딱 하나 달라진 것이 있다고.

 

  갇히기 이전의 홍귀가 성별과 나이, 그리고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인간을 무분별하게 죽였다면, 지금의 홍귀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만을 노리고 있다는….

 

  그 외의 존재들도 심기를 거스른다면 개미를 손가락으로 간단히 찍 눌러죽이듯 손쉽게 죽일 테지만 이렇게까지 죽일 상대의 조건을 확실히 정한 적은 없었다. 이것은 홍귀답지 않았다.

 

  마치 꼭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이 굴고 있다.

 

  그게 누구일까. 홍귀는 구배라도 찾고 있는 것일까?

 

  복수를 위해?

 

  하지만 그녀는 이미 500년 전에 사라진 옛적의 존재인데….

 

  “암튼 홍귀는 미인만 골라서 잡아먹으니까 순이 넌 절대 위험하지 않아. 걱정 딱 붙들어 매! 그보다 왜 홍귀가 이 저택에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도는지 알아?”

 

  “…왜 도는데요?”

 

  겁은 나지만 순이도 호기심이 이는지 작게 물었다.

 

  “그 다음 신부를 잡아먹으려고 온 거래.”

 

  말자가 양쪽으로 가늘게 찢어진 두 눈을 힘주어 번뜩였다.

 

  “예?”

 

  순이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너도 알다시피 이번 혼례식은 영호 도련님의 세 번째 혼례식이잖아.”

 

  “예, 맞아요.”

 

  순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부엌간뿐만 아니라 손 씨 가문의 거대한 저택 전체가 요새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그 이유는 손 씨 가문의 장자인 영호의 세 번째 혼례식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손 씨 가문은 이 나라 유국(油國)의 최고 귀족가문으로, 과거 3대의 왕을 모시는 동안 7명의 왕비를 배출한 뼛속 깊은 세도가 집안이었다.

 

  훨훨 나는 새도 손 씨 가문 저택의 주위만 가면 툭 바닥에 맥없이 고꾸라진다. 임금도 손 씨 가문을 함부로 다룰 수가 없다. 왕명이 곧 손 씨 가문의 뜻이나 다름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니.

 

  그런 손 씨 가문의 현 수장은 손 무연으로, 유국의 태부(太傅, 임금의 고문을 맡은 정일품 벼슬, 원로대신에게 주는 명예벼슬)이며 늘그막의 나이임에도 아직까지 조정에서 막강한 실세를 자랑하고 있었다.

 

  유국의 태부, 손 무연.

 

  손 태부에겐 두 명의 자식이 있다.

 

  아들인 손 영호와 딸인 손 영서.

 

  영호는 특히나 훗날 손 태부를 이어 가문의 수장이 될 존귀한 존재이다. 그런 영호의 나이가 올해 스물여섯인데 이번이 무려 세 번째 혼례였다.

 

  앞서 먼저 시집온 두 명의 신부가 모두 일찍 죽었기 때문이었다.

 

  “영호 도련님의 첫 번째 신부는 시름시름 앓다가 혼례를 치룬지 딱 2년째 되는 날 갑자기 귀신이라도 본 양 미쳐서 죽어버렸대. 그 다음에 들어온 두 번째 신부는 간신히 딱 한 해만 채웠고! 두 번째 신부도 첫 번째 신부처럼 어느 날 밤에 갑자기 비명을 자지러지게 질러대다가 그대로 숨이 툭 꺼져버렸잖아!”

 

  순이가 몸을 더욱 작게 웅크렸다. 무서워죽겠다는 얼굴이다.

 

  말자의 말을 몰래 귀담아듣고 있던 연은 ‘영호’ 도련님의 이야기가 나오자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녀가 작년에 흠씬 팬 남자다.

 

  어눌하고 서투르고 어딘가 이상한 남자.

 

  “이상하지 않아? 왜 이렇게 신부들이 다 하나같이 일찍 죽어버리는 거야? 그리고 죽는 것도 기분 나쁘게 죽어버리고 말이야. 꼭 귀신이 신부들을 잡아간 것 같지 않아?”

 

  “그, 그럼 홍귀가 신부들을 데려갔단 말씀인 거예요?”

 

  말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 이상한 일들이 다 설명이 되니? 시집온 신부들은 다 하나같이 귀한 집 아가씨들인데다가 가문의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아야 된다는 사명 때문에 아예 태어났을 적부터 몸을 꼼꼼히 챙겼다는데.”

 

  그 대단한 손 씨 가문이 후계자를 낳고 훗날 가문의 안주인이 될 여자를 아무렇게나 고를 리가 없다.

 

  가문, 혈통, 교양, 미모, 지식, 음악, 품성, 건강 등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고 무척이나 까다롭게 골랐을 터다. 하다못해 몸에 작은 생채기라도 있으면 바로 자격박탈이다.

 

  “그런 여자들이니 얼마나 소중히 지켜줬겠어?”

 

  “그렇죠.”

 

  “그런데 그렇게 멀쩡했던 신부들이 전부 미쳐서 죽어버리다니!”

 

  말자가 확신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이건 분명 악귀, 그니까 홍귀의 짓임에 틀림없어! 아름다운 신부들을 다 죽여 버린 거야! 그리고 더 소름끼치는 건,”

 

  말자가 뜸을 들이자 순이가 침을 꼴깍 삼켰다.

 

  “보름 전에 미리 받은 붉은 혼례복 알지? 이번에 세 번째 신부가 입을.”

 

  “네, 알아요.”

 

  푸른 비단옷을 입은 신랑이 처가에 직접 가 붉은 비단옷을 입은 신부를 직접 데려오는 것이 유국의 전통적인 혼례관습.

 

  하지만 자꾸 신부들이 일찍 죽어버리고 영호에 관해 좋지 않은 소문들이 떠도는 바람에 이번 세 번째 혼례식은 아예 손 가의 저택 안에서 가까운 친지들만 불러 폐쇄적으로 치르기로 결정했다.

 

  해서 영호의 세 번째 신부가 될 어린 여자가 일찍이 이 저택 별채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붉은 혼례복 또한 손 가에서 받았다.

 

  말자가 속살거렸다.

 

  “붉은 혼례복이 매일 밤마다 혼자 저택 안을 돌아다닌대.”

 

  “예?”

 

  순이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옷이 어떻게 혼자 돌아다녀요?”

 

  “내 말이! 사람이라면 불가능하지! 호위 중에 하나가 어두컴컴한 밤에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저택 안을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길래 ‘뉘시오!’하고 어깨를 탁 잡았더니…!”

 

  “잡았더니요?”

 

  “사람의 어깨를 잡았다는 느낌은 전혀 안 들고 대신 붉은 옷이 훅, 하고 아래로 꺼지듯이 떨어졌다는 거 아니야! 붉은 혼례복 안엔 사람이 전혀 없고!”

 

  공포에 질린 순이가 양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오싹함이 전신을 강하게 때렸다.

 

  “그렇게 붉은 혼례복이 혼자 동동 떠다니는 걸 목격한 호위들이 한둘이 아니야. 이제는 심지어 이 저택 하인들도 목격하기 시작했대. 큰 도련님 시중을 드는 복용아재도 보았다고 하더라.”

 

  순이의 눈에 눈물방울이 맺혔다.

 

  “귀, 귀신이 입은 걸까요?”

 

  “그래! 홍귀가 그런 게 틀림없어.”

 

  말자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근데 붉은 혼례복이 매일 밤마다 조금씩, 조금씩 별채 쪽으로 다가가고 있대!”

 

  “예? 그 세 번째 신부가 될 분이 머무르시는, 그 별채에요?”

 

  말자가 그렇다고 고개를 힘껏 끄덕거렸다.

 

  “홍귀가 지가 좋아하는 피처럼 붉은 혼례복을 몸에 걸치고 아리따운 신부를 잡으러가는 거야. 매일 밤마다 붉은 혼례복이 별채 쪽으로 이동하는 구간에서 발견되고 있대. 그렇게 붉은 혼례복이 별채에 조금씩 천천히 가까워지고 있어.”

 

  붉은 혼례복이 팔랑팔랑 세 번째 신부가 될 여자에게로 다가가고 있다. 매일 밤.

 

  “너무 무서워요!”

 

  순이가 양팔로 자기 몸을 끌어안았다. 그러다 무언가 번득 떠오른 모양인지 소심하게 의견을 냈다.

 

  “그, 근데요….”

 

  “응?”

 

  “크, 큰 도련님이 자기 신부들을 해쳤다는 소문도 있던데요…. 워낙 평범하지 않으신 분이라.”

 

  그 의견에 말자는 잠시 눈을 깜빡거리다 이윽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 영호 도련님이 제정신이 아닌 분이기는 하시지.”

 

  손 태부의 하나뿐인 아들 영호는 어릴 적부터 유약하고 어리석으며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맛있게 잘 차려진 화려한 밥상을 보면 질색을 하며 발로 걷어차 버리고, 솜씨 좋은 장인이 고급비단에 한 땀 한 땀 수놓아 만든 완벽한 의복도 꼭 소매 끝부분을 일부로 찢어 결점을 만들어놓는다. 또 가지런히 정리된 방구석을 싫어해 늘 어지럽히기 일쑤여서 하인들이 그를 무척이나 싫어했다.

 

  무엇보다 그는 남이 봤을 때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기행을 너무나 많이 하고 다녔다.

 

  예전에는 어디선가 샛노란 병아리 한 마디를 품속에 숨겨 데려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어엿한 암탉이 될 때까지 방안에서 몰래 키운 적이 있었다.

 

  그때 그의 나이가 스물이었으며, 그가 막 두 번째 신부를 얻었을 때이기도 했다.

 

  신혼이니만큼 부부가 꼭 붙어있어도 모자랄 판에 그는 아내를 본체만체하며 후계를 가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아예 각방을 썼다.

 

  그런 주제에 꼬꼬 하고 우는 암탉을 자기 침실에 두고 지극정성으로 돌봤다. 손가락을 서투르게 꼼지락꼼지락 움직여 암탉에게 입힐 비단옷을 손수 만들었고, 잘 때도 꼭 곁에 두고 자 그를 모시는 하인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이 해괴망측한 일이 하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또 나아가 도성에까지 퍼지고 말았다.

 

  「세상에, 장가를 두 번이나 가고도 왜 자식을 하나 못 보나 했더니 암탉과 남몰래 정을 통하고 있었군! 이러다 손 가의 후계자 중에 머리에 벼슬이 달린 놈이 태어나겠어!」

 

  「태어나자마자 고관대작이로군. 역시 손 가야! 아주 대단해!」

 

  조롱과 경멸 섞인 그 말들이 결국 손 씨 가문의 수장인 손 태부의 귀에 들어갔다.

 

  손 태부는 진노했다. 그는 가문의 명예에 조금이라도 흠집이 나는 걸 못 견뎌한다.

 

  “예전에 영호 도련님이 몰래 암탉을 방안에서 애완동물처럼 기르셔서, 아니 거의 애첩처럼 대하셔서 태부어르신께서 화가 많이 나셨잖아요. 두 번째 신부는 쳐다보지도 않으시구.”

 

  고운 새 신부를 마다하고 닭이나 쫓는 게 제정신인 남자인가?

 

  “맞아, 결국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나신 태부어르신이 소문을 퍼뜨린 하인들의 혀를 자르라 명하셨지. 그리고 그 암탉을 도련님 밥상에 올리게도 하셨고.”

 

  영호가 소중히 기르던 암탉의 목을 손 태부가 직접 내리쳤다. 꽥 하고 단말마를 지르는 것으로 암탉은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그 암탉의 살코기가 영호의 밥상에 올라갔다.

 

  그날 식사를 끝낸 아들에게 손 태부는 다정한 미소로 이렇게 말했었다.

 

  「맛있었느냐? 네놈이 기른 그 요망한 암탉이다.」

 

  말뜻이 이해가 가지 않아 잠시 고개를 갸웃한 영호의 얼굴이 곧 새하얗게 질렸고 그는 전신을 사정없이 떨었다.

 

  그리고 왈칵 속을 게워냈다.

 

  영호는 무릎을 털썩 꿇고 자신이 게워낸, 한때 그가 애지중지 아끼던 암탉이었을, 그 더러운 점질 덩어리를 손으로 쥐다가 이내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그런 그를 보고도 아버지인 손 태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식사를 계속했으며, 여동생인 영서는 새초롬한 눈매를 찌푸리며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 제 오라비를 역하다는 듯이 보았다. 영호의 두 번째 신부였던 여자는 이 모든 광경을 두려움에 젖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암탉이 그렇게 죽은 이후부터 두 번째 신부의 몸에 상흔이 많이 생겼다고 연분이가 그랬었어.”

 

  연분이는 두 번째 신부가 살아있을 적 목욕시중을 들었던 노비다.

 

  순이가 헉 하고 숨을 삼키더니 더듬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럼 역시 홍귀가 아니라 그… 약간 정신이 이상하신 큰 도련님이 신부들을… 그렇게 한건ㅡ.”

 

  겁이 많은 순이는 차마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그러나 뒷말이 무엇이었을지 충분히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말자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왜, 왜요?”

 

  “그럴 깜냥이 못돼요, 큰 도련님은. 기분 나쁜 기행을 많이 하시기는 하는데 원체 겁이 많으시고, 또 다른 귀족 자제들이 사냥과 검술, 정치와 학문을 배우고 익힐 때 영호 도련님은 옆구리에 비단종이와 명양 붓을 끼고서 혼자 산이나 들, 흐르는 강을 돌아다니며 그림이나 끄적거렸다고.”

 

  겁 많고, 유약하고, 부들거리고, 닭이나 키우는 그런 남자 따위가 제 신부를 둘이나 참혹하게 죽였을 리가 없다.

 

  “홍귀야, 확실해.”

 

  “하지만 영호 도련님은, 1년 전에 어마어마한 짓을 저지르셨잖아요. 정말 겁도 없이…. 유오군 마마의 노비계집을 보쌈하려고 하셨다면서요. 그, 연갈색머리에 연갈색 눈을 지닌 예쁘장한….”

 

  그 순간 순이가 합, 하고 입을 다물었다. 말자는 순이를 휙 째려보고서는 얼른 부엌간 구석을 살폈다.

 

  부엌간 구석엔 머리에 커다란 수건을 꽁꽁 싸맨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나물을 다듬고 있었다.

 

  착착착, 나물 다듬는 소리.

 

  두 사람의 대화를 듣지 못한 듯했다.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말자가 휴 안도한 뒤 순이의 이마를 쥐어박았다. 순이는 울상을 지으며 맞은 이마를 양손으로 감쌌다.

 

  “야, 너 봐가면서 떠들어대란 말이야! 하여튼 이건 나보다 더 촉새야, 촉새.”

 

  구석에 있는 여자가 들을까봐 속삭거리듯이 화내자 순이도 목소리를 죽였다.

 

  “죄, 죄송해요. 하도 조용히 있길래 여기 없는 줄 알았어요.”

 

  그 말에 말자가 구석에 박혀있는 연을 흘끔 보았다.

 

  “하긴 저것이 이 손 씨 가문의 저택에서 쥐 죽은 듯이 있어야지. 제대로 숨도 쉴 수 없을 걸? 어딘가 모자란 영호 도련님 눈에 쿵 찍힌 걸로도 모자라 영서 아가씨한텐 눈엣가시 취급까지 받고 있으니.”

 

  특히나 이 손 씨 가문의 저택 안에서 ‘연’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사람은 바로 영서였다.

 

  “그럴 만도 해요. 저 같아도 자기 약혼자와 망측한 소문이 도는 노비계집이라면 싫어할 것 같아요.”

 

  “맞아, 유오군 마마께서 매일 어딜 가시든 옆구리에 저 연갈색 노비 년을 착 끼고 다니시잖아. 오늘도 봐, 미래의 처가댁에 인사드리러 오는데 저 노비 년을 데려오시구. 아까 봤어? 마마께서 저 년을 보는 눈빛!”

 

  “예에, 봤어요.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던 걸요.”

 

  연갈색 노비, 연.

 

  너무나도 유명한 계집이다. 바로 유오군君의 노비계집.

 

  유오군은 비록 후궁의 소생이기는 했으나 왕의 아들로 어엿한 유국의 왕자이다. 그리고 그는 영서의 약혼자이기도 했다. 손 태부의 사위가 될 남자.

 

  털어도 먼지 하나 안 나올 것 같이 선하고 맑은 인상과 올바른 품성의 소유자인 그에게서 낯 뜨거운 소문이 하나 돌고 있는데, 그건 바로 그가 약혼녀인 영서를 두고 그의 노비계집인 연과 남몰래 정을 통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그리고 그 소문은 꽤나 신빙성이 있는 듯했다.

 

  유오군은 제 연갈색 노비 년을 아끼고 또 아꼈다. 마치 제 여인을 다루듯이….

 

  구석에 있는 여자를 연신 힐끔거리며 말자가 작게 속닥거렸다.

 

  “유오군 마마가 영서 아가씨랑 약혼을 한 건 든든한 뒷배가 될 처가를 얻기 위해서잖아.”

 

  그건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실제 정인은 바로 저 년인 거지. 엄청 아끼시잖아, 마마가!”

 

  순이가 진심으로 부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엄청 부러워요.”

 

  똑같은 천민노비인데도 처우가 달라도 너무 다른 거 아닌가?

 

  자신들은 더러운 꼬락서니에 허구한 날 주인들에게 핍박을 당하면서 산다. 손에 물마를 날이 없어 손톱 밑에 진물이 곧잘 나고 손끝은 딱딱하게 갈라져있기도 했다. 두 다리는 부러지지 않은 이상 계속해서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저 연갈색 노비 년은 재수 좋게 다정하고 멋있는 주인을 만났다. 그리고 생긴 것이 조금 낫다는 이유로 예쁨도 받는다.

 

  유오군. 그는 지나가는 여인들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끌어당기는 좋은 남자였다.

 

  그런 사람이 주인이라니!

 

  젊은 주인과 노비계집.

 

  야릇한 상상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기엔 충분했다.

 

  부러움과 열등감이 피어오른다.

 

  말자가 악독하게 킥킥거리며 말했다.

 

  “저 년이 유오군 마마를 잘도 꿰었네. 얼굴값을 하는 거지. 선비 같은 얼굴로 고고하게 굴던 마마도 별 수 없는 사내인 거야. 낮에 티끌하나 없이 청렴하게 구는 것만큼 밤에는 얼마나 음탕할지!”

 

  역시 사내란 별 수 없는 것이라며 말자가 이를 갈았다. 순이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마, 말자 언니, 너무 크게 말씀하셨어요! 다 들렸…!”

 

  구석에 있던 여자가 별안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나물이 든 바구니를 들고 말자와 순이를 향해 거침없이 척척 다가왔다.

 

  말자와 순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침을 꿀꺽 삼켰다.

 

  어느새 바로 눈앞에 여자가 떡하니 섰다.

 

  머릿수건이 만든 그늘아래 여자의 눈이 무척이나 무섭게 빛났다. 한 대 칠 기세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여자가 입을 열려는 순간, 부엌간의 문이 끼익 열리고 뒷간에 갔던 웅이 할멈이 돌아왔다.

 

  말자와 순이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휴우 안심했지만, 이내 웅이 할멈의 뒤에 선 사내를 발견하고는 창백하게 질렸다. 두 사람은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아래로 조아렸다.

 

  웅이 할멈이 말했다. 할멈의 눈은 연에게 향했다.

 

  “유오군 마마께서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신다고 너 나오라고 하셨다.”

 

  연은 웅이 할멈의 뒤로 시선을 던졌다. 사내가 보였다.

 

  뒷짐을 쥐고 있는 잿빛머리의 사내.

 

  그는 여느 때와 같이 다정한 미소로 연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벙긋벙긋 입모양으로 ‘가자’라고 말했다. 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은 부엌간을 떠나기 전 자신과 유오군에 대해 너절하게 떠들어댄 말자와 순이에게 바구니를 던지듯이 건넸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경고하듯이 작게 읊조렸다.

 

  “나는 그렇다 치고 한번만 더 마마에 관해 부정한 소문을 옮기면 네년들 머리털과 이빨을 모조리 뽑아 장에 내다 팔아버릴 거야. 각오해.”

 

  그 경고를 듣자마자 말자와 순이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웅이 할멈이 그들을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번갈아보았다.

 

  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부엌간 문턱을 넘어 제 젊은 주인의 뒤를 총총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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