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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해에게서 소년에게
작가 : llena
작품등록일 : 2018.12.4

대한민국에서 가장 빛나는 배우 류 도진과 그의 단 하나뿐인 해에 관한 이야기.

 
18화. 인터뷰.
작성일 : 18-12-31 16:51     조회 : 237     추천 : 0     분량 : 8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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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근이 캠코더를 켜고는 햇살이 쏟아지는 거실을 배경으로 도진을 앉혀 놓았다. 셔츠 위에 입은 검은색의 흰 줄이 두 줄 그어진 니트는 네 번이나 검사받은 후 겨우 합격 소리를 들은 의상이었다.

 ​

  「 자, 큐. 」

  「 안녕하세요, 류도진입니다. 」

 

  도진은 제법 자연스러운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인터뷰 상황을 미리 준비해보는 일이었다.

 ​

  「 요즘 취미 같은 건 없으세요? 」

  「 퍼즐이요. 500피스부터 시작해서 최근에는 5000피스도 도전했는데, 진짜 재밌어요. 다음에는 10,000피스짜리도 맞춰서 벽에 액자로 걸고 싶어요. 」

  「 땡. 」

 

  냉정한 소리에 도진이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 그것도 땡. 너 웃을 때, 혀 살짝 내밀며 웃지 마. 남자 배우는 미소를 약간 머금는 느낌으로 웃어야 한다고. 씩- 몰라. 씩, 하고 웃는 거. 우수에 젖은 눈빛은 잊지 말고, 입꼬리만 끌어올리면서, 윗니만 살짝 보이게. 」

  「 그걸 어떻게 해요. 」

  「 남자 배우의 기본이야. 내가 준 파일 열어보라고. 」

 

  옆에 수북이 쌓인 파일첩에는 호근이 모아 온 이상적인 남자 배우의 표본들이 담겨 있었다. 평상시의 매너부터, 자세, 다양한 감정에서의 얼굴 표정, 제스쳐, 행동, 미소까지도.

 

  도진은 배우를 하기에 허점이 많았다. 눈치를 많이 보고 예민한 성격에 비해 하기 싫은 건 죽어도 안 하는 고집불통인 철부지 애 같은 데다 좀처럼 둘러말하지 못하는 화법까지.

 

  이왕 배우가 된 거, '배우로서의 류도진'을 만드는 쪽이 오히려 편할 것 같았다.

 

  「 취미는 승마나 수영으로 해. 둘 다 할 줄 알잖아. 」

  「 요새는 재미없는데. 」

  「 그리고 말하면서 발 까딱 거리지마. 정신없어. 」

  「 움직이는 걸 어떡해. 」

 

  애처럼 부루퉁해진 얼굴을 보고 호근이 저거 한 대 쥐어박을까, 하는 표정으로 노려보자 슬그머니 고갤 숙였다.

 

  날짜가 적힌 노트 아래쪽에는 고쳐야 할 점이 쭉쭉 적혀 있었다. 언제 다 고치려나. 호근은 잠시 노트에서 눈을 떼고 앞을 바라봤다. 도진이 제법 진지한 얼굴로 파일을 보고 있었다.

 

  폭포와 같은 햇살을 받은 도진의 얼굴은 어디 하나 흠잡을 것 없이 완벽하게 아름다웠다. 최근에 4킬로 정도 더 감량했더니 모든 선들이 짙게 살아나면서 음영을 많이 만들어 내 조각상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

 

  지금 당장 레드 카펫 위에 세워놔도 단숨에 이목을 사로잡을 만했다. 전 세계 어느 길거리에 서 있어도 발길을 멈추지 않고 못 배겼을 것이다.

 

  「 류도진씨. 」

  「 네. 」

 

  ‘-씨’라고 부르면 의문형 대신 평서형으로 대답하라는 특훈은 효과가 있었는지, 기습에도 이미 입에 배어있는 대답이 나왔다.

 

  「 어떤 배우가 되고 싶으세요? 」

  「 관객들이 믿고 보는 배우, 감독님들이 믿고 쓰는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영화를 볼 때만은 제가 연기하는 배우라는 사실을 잊고, 극 중 인물이라고 믿게 하고 싶습니다. 」

 

  도진은 연기의 기본은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캐릭터를 아예 흡수해버리거나 창조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것은 도진이 배우로서 생활하는 데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기 좋은 장점이라고 호근은 믿었다.

 

  「 배우로서의 최종 목표 같은 게 있을까요? 」

 

  도진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 네, 해를 행복하게 해주는 거요. 」

 

  ‘뭐?’라는 말이 튀어나가지 않을 정도로 도진의 웃음이 햇살을 흡수해 뿜어내기라도 하듯 눈부셨다.

 

  「 류도진, 징그러. 진짜. 」

 

  뒤에서 해가 진저리치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도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해가 들고 있는 장바구니를 곧장 들어 부엌까지 옮겨주었다.

 

  해의 곁에 선 도진이 도와줄까? 하고 기웃대고 해가 됐다며 밀어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며 이거? 이거? 하고 물건을 꺼내는 모습을 보고 호근이 픽 웃었다.

 

  배우로서의 삶을 위해, 분명 류도진의 삶도 필요할 것이다. 그 양분이 다 그녀에게서 나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해에게서 소년에게

  018

 

 

 

  “금요일 밤 톡나잇을 방문해주신 시청자 여러분들, 어서 오세요.”

 

  세월의 험준함이 얼굴에 묻어나는 중년의 진행자인 석영은 타고난 입담과 배려로 인기가 가장 좋은 진행자 중 한 명이었다. 패널도 방청객도 없이 스타와 1대 1로 만나 이야기를 끌어내고 나누는 그의 훌륭한 진행 솜씨로 호평을 받는 프로그램이었다.

 

  도심 속 캠핑이라는 콘셉트를 가지고 캠핑카를 끌고 이동하며 요리도 하고 좋은 풍경 속 어우러진 스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친숙한 진행자와 스타의 일탈 같은 느낌 때문인지 국내 유일의 단독 토크쇼로 굉장한 시청률을 이끌어냈다.

 

 “오늘 톡나잇의 손님은, 장작불 속 고구마보다 더 뜨거운 스타, 류도진씨 입니다.”

 

  옅은 회색의 맨투맨에 짙은 청바지를 입고 앞머리를 내린 모습이 평소보다 더 어리고도 차분한 느낌이었다. 긴장된 얼굴을 하고 두 손을 모은 자세가 얌전한 강아지 같아 석영은 악수를 먼저 건넸다.

 

 “도진 씨 손에 땀 좀 봐요. 어유. 그렇게 무서워할 거 없어요. 저희 나쁜 사람 아니에요. 안 잡아먹습니다.”

 

  석영의 농담 섞인 목소리에 도진이 겨우 웃었다.

 

  캠핑카 구조상 많은 사람이 탑승할 수 없어, 운전하는 사람 외에 피디와 감독 한 명을 제외하곤 곳곳에는 카메라만이 있었다. 오히려 도진은 그 편이 조금 편했다.

 

 “차가 안정적이긴 하지만, 좀 흔들려요. 그래도 가는 길에 야채는 손질을 해놔야 가서 바로 먹을 수 있어서. 우리는, 지금부터 감자를 깎아볼까요?”

 “아, 네.”

 “도진 씨는 요리 잘하세요?”

 “원래는 잘 못 하는데 요즘 이것저것 배우고 있어요. 하다 보니 재밌더라고요.”

 “어떤 요리를 가장 잘하세요?”

 

  석영과 도진은 손에 감자깎이를 들곤 감자를 깎아내며 이야기를 나눴다.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는 재주는 석영이 가진 것 중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모든 피디들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도진이 처음보다 점점 더 긴장을 푸는 데다, 언뜻 비치는 낑낑거리는 얼굴이나 음식을 소중히 다루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먹는 걸 좋아하는 편이면 체중 관리하는 게 곤욕이겠어요?”

 “그렇죠, 힘들어요. 다행인지 자라면서 먹는 거에 비해 살이 안 찌긴 한데, 그래도 방심하면 볼이 이렇게 빵빵하게 불어요. 저는 꼭 얼굴부터 찌더라고요.”

 ​

  볼에 불룩 바람을 넣는 모습이나 투정 섞인 볼멘소리는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낯선 얼굴이었다. 도진의 불만에 진행자는 푸하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깎은 감자를 받아 든 석영이 잘라서 그릇에 담아냈다. 그 위에 버터와 치즈를 잔뜩 올리곤 랩을 씌운 뒤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감자 그라탕을 향한 도진의 눈엔 작은 하트가 샘솟는 듯했다. 다른 요리를 위한 재료 손질이 다시금 시작되었다.

 

 “데뷔 6년 차에 무수한 타이틀을 갖고 있잖아요. 어떤 타이틀이 가장 부담스러운가요?”

 “타이틀은 다 부담스러운 것 같아요. 그렇지 않나요?”

 “맞아요. 사실은 다 그렇죠.”

 

  도진은 다듬고 있는 미나리로 시선을 내렸다. 아까보다 느려진 손가락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도진은 애써 다시 힘을 주어 뜯어냈다.

 

 “그래도 제일인 걸 뽑으라고 하면, 엘리제의 아들이란 이야기죠.”

 

  숨을 채 삼키지도 못하고 내뱉은 목소리는 엄마를 잃은 아이처럼 섬약하고 서글펐다. 침묵을 재촉하지 않고 석영은 그를 어루만지듯 다정한 얼굴을 했다.

 

 “제가 방송 출연이나 인터뷰를 잘 하지 않았던 데에는, 이 이유가 굉장히 컸던 것 같아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가 어려웠어요. ”

 “너무 힘든 이야기죠, 도진 씨한테는.”

 “네. 어머니가 어떤 분이셨냐는 질문에도 대답을 못 했어요.”

 ​

  영화 <타켓>으로 데뷔하고 기자와 단독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영화에 관련된 이야기만 하겠다던 기자가 기습적으로 던진 질문에 도진은 입을 떼지 못했다.

 

  갑작스러워 당황한 것도 있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어머니는 어떠한 형용사로 표현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어머니랑은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어요. 이 년이나 삼 년에 한 번 밥을 먹는 게 다였어요. 어머니도 저를 조금 어려워했고, 저도 어머니를 불편해했어요. 둘 다 낯가림이 심했거든요.”

 ​

  도진이 조금 웃으며 말했고, 석영이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고갤 끄덕였다.

 

  어머니는 질문을 하는 법이 없었고 도진도 먼저 말 거는 법이 없어 두 사람의 식탁은 늘 썰렁할 정도로 고요했다. 차라리 유모라도 있었으면-이라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도 모른다.

 

 “한 번 요리를 해주신 적이 있었는데, 진짜 맛이 없었어요. 맛있다고 거짓말해드렸는데, 나중에 보니 어머니에게 제일 잘한 일이 그거더라고요.”

 

  늦은 여름이었다. 여느 때처럼 유모가 해준 요리를 먹는 것 대신, 머리를 질끈 묶고 부엌에서 요리를 했다. 김치볶음밥이었는데 간이 하나도 맞지를 않아 맛은 없었다. 그럼에도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초조하고 긴장되면서도 기대되는 마음을 골고루 품고 있어 맛있다고 해주었다.

 ​

  하얀 얼굴 가득히 송골송골 맺힌 땀이나, 손 여기저기를 감싼 대일밴드가 그녀의 노력이자 마음같이 느껴졌다. 그녀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마지막이, 그 기억이어서 도진은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

 “저는 어머니가 영화배우라는 사실을 돌아가시고 나서 알았고, 그걸 알게 되고는 영화 자체를 아주 오랫동안 싫어하고 무서워했어요.”

 “영화를요?”

 “네.”

 “그런데 어떻게 연기를 시작하실 결심을 하신 거예요?”

 “궁금했거든요. 제게서 어머니를 빼앗아간 세계가, 어머니를 집어삼킨 일이, 어떤 것인지.”

 ​

  도진의 솔직함에 오히려 석영이 놀랄 정도였다.

 

  그때는 영화 포스터에 들끓는 마음이 운명적인 끌림처럼 여겼고, 제 안에 채워지지 않는 것이 연기에 대한 갈망이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보니 이 세계에서 품은 꿈은 어머니에 대한 이해였고, 제가 쫓는 것은 어머니의 잔상이었다.

 

 “어땠나요?”

 “엘리제를 위하여의 노래 가사를 아세요?”

 “그럼요. 엘리제여, 오 나의 엘리제여. 울지 마소서. 멈추는 것은 노래이지 인생이 아니에요.”

 

  석영에게서 흘러나오는 가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는 문장이었다. 가냘픈 음성으로 담담한 어조로 부르던 노래.

 

 “끝나는 것은 연극이지 인생이 아니에요. 사그라드는 것은 영광이지 인생이 아니에요. 라고 노래하는데, 알겠더라고요. 어머니는 인생이 끝나는 것보다 연극이 끝나는 게 더 무섭고, 사그라드는 영광이 두려웠다는걸요.”

 ​

  반짝반짝 빛나는 세계. 누군가의 박수를, 환호를, 사랑을, 빛을 받으며 살아가는 삶.

  은하수를 밟는 듯한 기분일까, 무지개를 거니는 느낌일까, 구름 위를 뛰어가는 느낌일까.

 

  아니었다. 발바닥 아래로 별들이 흩어지고, 무지개가 흐려지고, 구름 사이로 발이 빠져도 웃어야 했다. 손을 흔들고, 등을 펴고, 내디뎌야 했다.

 

 “어머니가 그렇게도 사랑한 영화를, 여자배우로서의 삶을, 알 것 같아요. 제가 아닌 또 다른 삶을 계속해서 살아보는 건, 다시 태어나는 일 같기도 해요. 잉태의 시간처럼 고통스럽지만 탄생의 순간 축복처럼 느껴지는 거죠. 이 일을 할 수 있어 감사해요.”

 ​

  그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강단 있게 들렸다.

 

  두 사람은 바깥으로 나왔고 이미 밤하늘은 어둑해져 있었다. 불을 피우고 쇠 철망을 올려놓았다.

 

  감자 그라탕을 한쪽에서 만들고 다듬은 미나리와 삼겹살을 포일에 감싸 구워냈다.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겼다. 고기와 곁들어진 무알코올의 샴페인은 달콤했다.

 

 “술은 좀 먹을 줄 알아요?”

 “아뇨. 맥주 한 캔에도 얼굴이 빨개져요.”

 “술 버릇은 있어요?”

 “네, 바닥에 잘 눕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자꾸 옆에 붙는대요.”

 “술 잘 드시는 여자분들이 혹하시겠는데요.”

 ​

  도진이 고기를 한 점 먹으며 웃었다.

 

 “요즘 도진씨에 대한 가장 큰 이슈는, 아무래도 여자친구분이 아닐까 싶은데요.”

 

  조심스러운 질문에 도진이 샴페인 잔을 꾹 쥐었다. 금빛 물결이 흔들렸다.

 

 “여자친구분은 어떤 분이세요?”

 “잠시만요.”

 ​

  손바닥을 드는 행동에 촬영 중단인가 싶어 석영이 당황하자 도진은 잔을 얼굴에 가져다 댔다.

 

 “쑥스럽네요.”

 

  도진이 떨리는 건, 질문이 아니라 ‘여자친구’라는 호칭이었나 보다. 여자친구라니, 여자친구라니. 두근두근한 마음이 폭발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음을 가다듬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제가 너무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우는 얼굴도, 웃는 얼굴도, 너무 사랑스러워서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사람.”

 ​

  해가 웃을 땐 세상이 빛나서 아름답고, 해가 울 땐 안아줄 수 있어서 행복하다.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스러움을 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또한 얼마나 행운인지 모른다.

 

  도진은, 석영의 눈길에서 걱정을 조금 읽어내렸다. 객관적으로 도진의 로맨스는 행복이라기보단 불행에 가까웠다. 범죄자의 자식으로 호의호식하며 산다는 거센 비난을 알고 있다. 해가 학교생활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의 사라진 오랜 행적에 대해서도 별별 소문이 돌고 있다.

 

  마녀사냥처럼 단두대 위에 있는 연인을, 장작을 밟고 선 연인을, 바라보아야 하는 애통함과 비참함이 도진을 고통스럽게 했다.

 

 “여자친구분의 가정사는 다 알고 있으셨나요?”

 “네.”

 “혹시 걱정돼진 않으셨어요? 언젠가 세상에 알려진다면 크게 논란이 될 거란 생각을 하셨을 것 같은데.”

 

  도진은 어렴풋 알고 있었다. 걸려오는 변호사의 전화나, 얼핏 들었던 스님들의 걱정으로 짐작했지만 파헤치진 않았다. 언젠가 그녀가 말해줄 거라고 믿었으니까. 그리고, 그녀가 말해주면 어떠한 이야기든간에 안아주자고 결심했다.

 

  애써 긴장을 무시해가며 꿋꿋이 제게 사실을 고백하던 그녀의 얼굴이 생생했다. 난 괜찮으니까 얼른 도망가, 라고 미는 것 같은 단단한 손을 어찌 잡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일로 제가 타격받을까 걱정하진 않았어요. 그 애가 그걸 걱정해서 먼저 떠날까 봐 겁이 났어요.”

 

  석영은 도진의 눈에서 열정의 소용돌이 대신 따뜻한 바다를 읽었다.

 

 “도진 씨가 로맨스 영화에 출연 안 하는 이유를 알겠어요. 평소에 이렇게 로맨스 영화를 찍고 있으니.”

 

  어유, 하고 팔에 돋은 닭살을 매만지는 장난스러운 모습에 도진이 웃었다.

 

 “어떤 부분에 그렇게 반했어요?”

 “전부 다,라고 말하면 팔불출 같나요?”

 “네.”

 

  단호한 대답에 도진이 머리를 긁적였다. 음-, 하고 흘리는 신음 소리가 신중해 보였다.

 ​

 “그 친구는요. 힘든 상황에도 투덜거리거나 원망하거나 비난하는 법 없이 늘 제 일을 해요. 이제 중학생쯤 된 나이인데도 새벽 4시 전에 일어나서 마당을 쓸고 부엌일을 도와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오후면 산에 올라가 나물을 캐오기도 하고 밭을 가꾸는 일도 하죠. 예쁜 옷도 없고, 따뜻한 집도 없고, 부모님도 안 계시는데 늘 괜찮다고만 하더라고요. 우는 법이 없었어요.”

 “대단하네요.”

 “맞아요. 꿋꿋한 모습이 대단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그 애를 많이 쫓아다녔어요. 나를 지켜주는 수호천사 같았거든요.”

 ​

  도진이 쑥스럽다는 웃고, 예상외의 단어에 석영도 덩달아 웃었다.

 

 “눈이 많이 오는 날 산을 올라가다가 둘 다 미끄러져 다친 적이 있었거든요. 핸드폰도 고장 났고 거기에 계속 앉아 있을 수만은 없으니까 다친 다리를 이끌고 걸었어요. 아프기도 하고 무섭기도 해서 울면서 걷는데 그 애가 그러더라고요. 울지 말라고, 내가 여기서 죽었어도 마냥 울고 있으면 안 된다고. 앞으로 가야 한다는 거예요. 정신 차리고 걸으라면서요.”

 “와. 정신력이 진짜, 보통이 아니네요.”

 “네. 그러니까요. 나중에 그 애가 치료받다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데 입술을 꾹 깨물더라고요. 그때 알았어요. 쟤가 무딘 성격이거나 고통을 몰라서가 아니라, 누구도 의지하지 못하고 혼자서 버텨낸다는걸.”

 ​

  발목을 삐고 얼굴과 무릎에 타박상을 입은 도진과 달리, 해는 뼈가 아예 부러져 있었다. 한쪽 발로 다른 쪽 다리를 거의 끌다 시피 해서 걸었던 것이었다. 체온이 낮은 데다가 수족냉증까지 있는 해는 여차하면 발을 잘랐을 수도 있었다.

 

  도진은 그때 알았다. 해는 수호천사가 아니라는 것을. 저보다 어리고 작은 여자아이라는 것을.

 

 “자기보다 남을 더 걱정하는 면도, 아파도 아프다고 말 못하는 미련한 면도, 다친 새를 치료해주고 자연으로 돌려보내 주는 따뜻한 면도, FM처럼 행동하는 약간 고지식한 면도, 감정 표현이 많이 없는 무뚝뚝한 면도, 그럼에도 늘 용기를 주고 믿음을 주는 면도, 다 좋아해요.”

 

  그저 길 잃은 산에서 해를 만났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해가 기가 막힌 타이밍에 운명처럼 찾아온 것이 아니다.

 

  그때가 아니고,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도진이 건축업을 했든 수리공을 했든 아니면 지금과 같은 스타였어도, 어느 때건 만났어도 분명히 반했을 것이다.

 

 “요즘 힘든 시간을 겪고 있을 여자친구한테 영상편지 한 번 보낼래요?”

 

  하루 종일 카메라보다 석영의 눈을 보는 시간이 많아 앞을 바라보는 일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붉은빛이 태양의 잔재처럼 느껴졌다.

 

 “있잖아.”

 

  차마 머금지 못하는 그녀의 이름을 속으로 되뇌었다.

 

 “미안해.”

 ​

  눈동자에는 검은 물결이 일었다. 도진은 무릎을 꼭 쥐었다. 그녀에게 주는 것이 행복이기만 하면 좋을 텐데. 자신 때문에 받지 말아야 할 상처까지 받는 것 같아 여간 미안한 게 아니었다.

 ​

 “네가 죄를 갚아야 한다면, 내가 속죄할게.”

 

  그녀 대신 단두대로 오를 수 있었다. 그녀가 살 수만 있다면, 목을 내놓을 수 있었다.

 

 “노력할게. 네가 숨어도 되지 않도록, 네가 상처받지 않도록, 네가 내 걸림돌이라고 네가 생각하지 않도록. 더욱 노력하고 더욱 잘 해낼게.”

 

  해가 온 세상에 떠오를 수 있도록.

 

 “그러니까, 지금처럼 그랬듯 앞으로도 내 곁에 있어줄래? 네가 가장 잘한 선택이 나를 사랑한 일로 만들어줄게.”

 

  도진이 응? 하고 약간 고개를 꺾으며 미소 지었다.

 

  약간 붉어진 눈을, 파르를 떨리는 입술을, 진심 어린 목소리를 어떤 여자가 외면할 수 있을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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