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이 뜬 밤이었다.
달은 둥글고 커다란, 어딘지 막내아이의 얼굴처럼 창백하고 서늘한 빛을 내었다.
조금 있으면 남편이 돌아올 시간이라 아이들은 벌써부터 떨었다.
큰 아이 준서는 동생들을 다독이느라 여념이 없었다.
“괜찮아! 얘들아! 괜찮을 거야! 아버지 이제 괜찮을 거야!”
본인도 다가올 공포에 몸이 떨려가면서도 동생들을 다독였다.
모두 데리고 도망치고 싶었지만 어디로 가야할지도 막막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남편과 산다고 반대를 피해 뛰쳐나온 집으로 갈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생각해보면, 그렇게 하지 않은 것에 후회도 된다.
어쨌건 또다시 창틈으로 남편이 퇴근하고 숲속에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날도 어김없이 술에 취해 비틀거렸다.
기분 탓인가, 남편 눈엔 뭔가 불그스름한 빛이 띄었다.
“야, 임마! 이 쌍노무새끼들! 이씨!”
그는 집 문을 열자마자 고래고래 소리쳤다.
술 냄새와 범벅되어 끈적끈적한 고함소리의 대부분은 상스러운 욕이었다.
남편은 눈에 보이는 것을 죄다 집어던지며 바닥에 후려갈겼고 집안 살림을 다 부수려 작정한 것 같았다.
그리고 막내에게 쌍심지를 켜며 다가갔다.
준서, 준상이 그를 막아섰지만 남편은 그들을 너무나도 손쉽게 밀쳐냈다.
“어디서 아버지 가시는 길을 막아대, 이 어린노무새끼들, 아무것도 모르면서!”
술에 취한 남편은 힘이 장사였다.
계속 떨고 있는 준성에게 그는 다시 다가갔다.
“여보, 이제 그만요! 제발! 저 어린애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래요! 제발, 이러지 말아요, 네?”
나는 남편의 다리를 있는 힘껏 붙들었다.
남편은 준성에게로 그 붉은 시선을 고정한 채, 잠시 멈춰졌었다.
“준서, 준상아, 어서 막내 데리고 도망가! 어서...”
나는 얼마 남지 않은 힘으로 소리쳤다.
“계속 뛰어! 멈추지 말고...”
준서는 막내를 안고 모두 도망쳤지만 내 힘은 거기까지였다.
곧 남편은 나를 뿌리치고 가방에서 왠 채찍을 꺼내 아이들을 쫒았다.
나도 그 뒤를 쫒으려 집 밖을 나섰지만, 난 맥없이...
“그만요! 이제 그만하셔도 되요, 어머니! 무리하지마세요!”
듣고 있던 준서가 시뻘건 얼굴이 되어 가까스로 말을 이어가는 어머니를 안아주었다.
동생 준상도 그 뒤를 이었다.
길동은 저만치에서 조용히 고개 숙여 눈물을 훔칠 뿐이었다.
그의 몸은 또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얘야, 아가, 이리 온! 엄마한테 오렴!”
그러나 길동은 선뜻 다가서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흐느낄 뿐이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란다! 그러니 괜찮아!”
어머니 혜리는 막내아들 길동, 아니 준성에게 다가가 꼬옥 안아주었다.
“다들 죄송해요. 저만 없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니, 엄마한테 그런 소리하면 못써! 그저 상황이 그랬을 뿐이야. 그저 엄마가 미안해, 널 이렇게 불편하게 나아줘서...”
“음, 음, 아니에요 그런 거. 그런 거 아니에요.”
준성은 어머니 품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동안 그렇게 울었다.
그러는 동안 준성의 떨리는 팔, 다리는 점차 다시 원래대로 잦아들었다.
“이 못난 것! 어려워졌으면 바로 다같이 이 할배, 할매 곁으로 돌아올 것이지! 가족끼리 용서 못할 일이 뭐가 있다고! 이 사단이 뭐냔 말이다! 이 할애비가 너의 그 남편 나부랭이하나 용서 못하는 소인배인줄 아는 게야?”
옆에서 듣고만 있던 고주망태영감은 손녀딸의 모습에 울분을 토해냈다.
고작, 이런 꼴을 보여주려고! 고작!
자신의 품을 떠난 손녀딸이 미웠다. 아름답고 촉망받던 도깨비여신의 힘을 소진하고, 평범한, 아니 불행하고 나약한 인간으로서 풍파를 겪은 손녀가 미웠다.
손녀를 데려갔던 인간 남자에겐 분노도 치밀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어쩌겠는가?
장성한 사내들로 자란 증손자들이 그저 대견할 뿐이었다.
독도에 봉인된 아들 푸름도 모자라 그 손녀딸까지 잃을 뻔 했던 영감이었다.
이젠 화내기도 지친 고주망태 곁을 미호가 다독이듯 지탱해주었다.
“그때의 난, 너희 아버지의 폭주를 막을 길이 없었어. 맥없이 쓰러질 뿐이었지. 가족을 꾸리느라 내 고유한 힘이 소진되는 걸 방치한 결과였단다.”
혜리는 떨리는 양 손을 보며 말했다.
“대부분의 인간들이 그렇듯, 나도 가족 안에서의 희생을 당연시 하는 명분으로 내 고유한 힘의 고갈을 알고도 외면하고 말았어!”
떨리는 두 손을 마주잡아 진정시키며 말을 이었다.
“결국 그것이 너희들에게 불행을 안겨주는 결과가 되었구나!”
혜리의 목소리는 점점 더 침울해져갔다.
“처음에 변해가는 너희 아버지를 보며 내 탓을 하기도 했어! 저 사람이 차라리 이 엄마를 만나지 않았다면 보다 평범하게 살지는 않을까 하는... 내 사나운 팔자가 그를 불행으로 끌고 간게 아닌가 싶...”
“그런 소린 하지마세요!”
어머니 혜리의 말에 준서는 울먹이며 소리쳤다.
“그래요. 그런 자책은 하지마세요!”
“네, 요즘 세상에, 팔자니, 사주니, 그딴 건. 아니, 전에도, 앞으로도 그딴 얘기들은 다 말도 안 되는 것들이에요!”
준서를 이어 준상과 준성도 거들며 어머니 혜리에게 다가와 꽉 안았다.
“어차피 그딴 건, 다 헛소리들이에요. 그딴 건...”
한동안 눈물 가득한 모자들의 상봉을 구미호와 고주망태는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 무렵, 달에서 빛줄기 하나가 혜리에게 내려왔다.
“이제, 시간이 되었어! 엄마는 이제 여기서 떠나야 해.”
빛줄기는 사라지더니, 혜리의 몸은 광채가 났지만 희미해져갔다.
삼형제와 영감 노부부는 놀라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얘들아, 이 엄마는 이미 이곳에 머무를 수가 없게 되었어! 하지만 너희 아버지는 저기 저 달 안에 갇혀있어! 아버지를 용서하고 구해주렴!”
혜리의 몸은 거의 투명에 가깝게 사라져갔다.
“혜리야. 또 어딜 가는 게냐?”
“어머니, 또 어딜 가세요?”
가족들의 물음에 혜리는 웃으며 대답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여기서 사라진다고 영영 만날 수 없는 건 아니에요! 나중에 저쪽 세상에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던 혜리는 삼형제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너희들도 너희들의 할 일을 해나가며 살고, 나중에 다시 만나자! 자기 자신을 좀 더 소중히 여기고 살아가렴. 우린 그러지 못했거든...”
혜리의 투명해진 몸은 공중으로 올라가더니 이내 사라졌다.
그 자리에서 한지 한 장이 펄럭이며 준상이 팔에 안겼다.
어? 이건? 또 그런 편진가?
한지를 받은 준상은 광화문 광장에서 얻은 한지가 생각났다.
그것처럼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할아버지, 저희 집으로 좀 데려다 주실 수 있어요? 저희 집에 있는 초로 글씨를 비쳐봐야겠어요!”
준상은 고주망태에게 물었다.
“그럴 필요 없다!”
고주망태는 손가락에 도깨비불을 켜며 말했다.
“이것으로 글씨는 비출 수 있을 것이야!”
과연, 도깨비불을 한지에 데어보니 글씨들이 펼쳐졌다.
“너희들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편지를 보내왔구나!”
글씨가 나타난 한지는 바람을 타고 공중으로 날아오르더니 혜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얘들아!
엄마가 꼭 해주어야 할 말이 있어서 이렇게 편지를 남긴다.
엄마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
엄마는 이도라는 분의 도움으로 사후지만 편안한 곳으로 갈 수가 있게 되었단다!
홍길동으로 살아온 준성이라면 이도라는 분을 잘 알지?
그분께 너의 이야기도 들었단다.
“전하께서 우릴 위해,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길동은 하늘을 한번 쳐다보았다.
그곳으로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너희들이 찾아오면 해줄 말을 이곳에 남겨!
방금 너희들이 봤던 홀로그램은 정확한 이야기를 해줄 수는 없었을 테니 말이야!
너희들의 아버지는 붉은 기운의 요괴에게 조종당했어.
우리 아버지 푸름까지 봉인시킨 존재야!
그런 요괴가 지금은 외삼촌인 달의 토끼까지 조종하며 달을 장악하고 있어!
너희들의 힘이라면 그 달의 토끼에 붙은 붉은 요괴를 처리할 수 있을 거야!
청룡백호의 힘을 얻은 소환사인 준상,
영실대감과 더불어 현무와 주작의 힘을 얻은 격투의 홍길동 준성,
그리고 황금호랑이를 얻은 약자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준서!
너희들이라면 가족들을 그리고 달을 구할 수 있을 거야! 그 봉인된 상자까지도!
“어머니가 우릴 계속 지켜보셨구나!”
길동은 계속 하늘을 바라봤다.
“그나저나, 황금호랑이는 뭘 말하는 거지?”
준서는 의아해했다.
자신은 아버지에게서 올라탔던, 지금은 빠져나간 붉은 요괴의 힘 일부분과 저승사자의 힘 빼곤 아무런 힘이 없기에...
“크흠, 흠...아아.. 아아!”
아직 떨어지지 않고 바람을 타고 있는 한지에서 또다시 무언가가 흘러나왔다.
“전하?”
길동은 이도의 목소리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녹음 잘 되고 있는 건가?”
“예, 전하, 하시옵소서!”
어라? 대감님 목소리까지?
길동은 갑자기 흘러나온 이도와 영실대감의 목소리에 새삼 반갑게 느껴졌다.
“듣거라! 삼형제여!”
이도는 어머니가 남긴 말 중에 황금호랑이에 관련해 덧붙이듯 말을 남긴 듯 했다.
달과 민족이야기, 미래이야기, 오방신 중 황금호랑이와 봉인된 상자이야기 등 긴 내용이었다.
“전하! 짧게 하시옵소서!”
“뭐 인마? 지금 전할내용 엄청 많은데 무슨 소리하고 있어? 똑바로 데고 있어, 똑바로!”
“하고 있사옵니다!”
“자꾸 말대꾸하지 말거라! 까먹잖아!”
“하시옵소서!”
중간에 영실대감과의 토닥거림으로 씩씩대는 이도의 모습도 상상할 수 있었다.
대감님이 또 고생하셨네!
길동은 킥킥댔고, 덕분에 다들 우울한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뭐, 어쨌든지 간에! 니들 어머니 말대로 달에 가려면 그대로면 안 된다! 준서의 황금호랑이의 힘을 얻어야 한다! 전에 무학대사란 분이 너희들의 시대의 서울의 호압사란 곳에 제압을 해두셨다 한다! 일단 그곳으로 가 보거라!”
그 말을 끝으로 메시지는 끝났고 공중의 그 한지는 불타 사라졌다.
삼형제에게 고주망태가 미호의 부축을 받으며 다가왔다.
“너희들이 갈 방향이 결정된 듯 하구나!”
영감은 삼형제 한명 한명에게 한마디씩 해주었다.
“길동아, 아니 준성아! 너는 너의 존재에 대한 자부심을 더욱 가질 필요가 있다. 너는 충분히, 아니 없어선 안 되는 존재다 이미! 우리 가족들뿐만 아니라 민족 전체에게도 말이다!”
준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준상이! 너도 더 이상 무신경한 태도는 아니 될 것이야! 민족 구성원들의 융합에 조금 더 힘써 주렴!”
“알겠어요! 영감님, 아 아니 할아버지!”
준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 준서야! 잠시 나쁜 마음을 먹고 폭주했었다 들었다! 이 할애비는 전부 이해한다! 얼마나 혼자 힘들고 억울했을고!”
“예!”
준서는 가만히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그래도 마음을 고쳐먹은 것! 훌륭하다! 과연 내 증손자야! 이젠 황금호랑이 힘을 얻고 동생들과 미래를 헤쳐가야 할 것이야!”
“우리 준서는 잘할 거에요!”
“그래요! 그렇겠지!”
준서 앞에서 고주망태와 미호는 말을 마쳤다.
“좋아! 얘들아! 이제 갈 시간이다! 바로 출발하라!”
영감의 말이 끝나자마자 바람이 불어왔고, 새가 날아왔다.
전에 준상이 탔던 한지로 만든 새였다.
“어서, 타라! 바로 출발해!”
삼형제는 망토를 두르고 한지 새 등에 올라탔다.
“할아버지 할머니, 다녀올게요! 잘 쉬고 계세요!”
막내가 손을 흔들어 인사하며 소리쳤다.
새는 바람을 일으키며 호압사를 향해 날아올랐다.
“저 장면은 익숙해지지 않네요. 여보, 우리 증손자들! 잘 하겠죠?”
“당연한 소리! 또 믿어보자고! 매번 어린 손자들의 떠나는 뒷모습을 보는 건 서글프구려!”
“그러게요, 우린 이제 너무 오래 살았나 봐요! 영감!”
“암튼, 잘 헤쳐 갈 거야! 그 오형제처럼 저들도 똘똘 뭉쳤으니 말이야!”
“지금쯤, 그 아이들도 잘하고 있겠죠?”
“그럼! 말이라고!”
노부부는 삼형제의 날아가는 뒷모습을 한동안 그렇게 가만히 그저 바라보며 서있었다.
“그나저나 이 녀석들, 돌아올 때가 되었는데 말야!”
“그러게요!”
삼형제를 배웅하는 노부부 뒤쪽...
그 하늘 멀리에 각기 다른 색의 불빛들 다섯이 나타나 반짝이며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