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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기타
열다섯
작가 : 라한
작품등록일 : 2016.9.24

공모전작을 쓰며 한국에서 잠깐 했던 대학생활 중 느꼈던 바를 한 친구로부터 모티브를 얻어 구성해봤습니다.

 
일기 나머지
작성일 : 16-09-24 11:21     조회 : 308     추천 : 1     분량 : 19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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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11월 22일 월요일

  안녕, 일기야!

  벌써 3일째야! 작심삼일이라고 했으니까는 오늘이 마지막 일기인가? 아, 아, 농담이야. 화내지마. 내가 생각해봤는데 너한테 내 소개를 안 해줬지 뭐야! 이렇게 내 얘기만 털어놓는데 ‘얘 뭐하는 애니?’하고 생각했지? 미안 미안~.

  자, 오늘은 내 소개를 하지. 내 이름은 최민영이야. 고향은 여기 서울이고 지금 난 중학교 2학년이야. 학교는 서울 사대부여중이야. 집이 혜화동이냐고? 아니 도곡동이야. 도곡역 4번 출구 바로 앞 아파트. 그리고 가족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아빠랑 그냥 엄마랑 이렇게 셋이야. 그리고 제일 친한 친구는 예쁜 민서.

  니가 보일지 안 보일지 모르니까 내 외모도 말해주지. 음, 난 살면서 예쁘다는 말은 거의 못 들어본거 같아. 물론 아빠한테만 빼고말야! 눈은 아빠 닮아서 작아. 내가 그렇게 예쁘지는 않아도 아빠처럼 코도 오뚝하고 얼굴도 무지 작은편이다. 거기다 키는 엄청 커. 이것도 아빠 닮았나봐. 저번 주에 병원에서 쟀을 때 벌써 174센티가 넘었다니까. 중학교 들어와서부터는 많이 자라진 않았어. 1년에 고작해야 2센티 정도? 그래도 이렇게 자라면 나중에 농구나 배구선수 해도 되지 않을까? 아…, 아냐, 나 운동 싫어. 모델은 어떨까? 운동만큼 공부도 싫으니까는, 히힛!

  그럼 우리 엄마랑 아빠도 소개해줄게. 우선 아빠부터! 우리 아빠 이름은 최연길이야. 나이는 53살이야. 너무 많지? 사실 내 친구들 중에 우리 아빠보다 나이 많은 아빠는 아직까진 못 본거 같아. 음, 그리고 우리 아빠 직업은 의사면서 교수야. 치과의사. 우리 아빠 거기다 서울대 나왔다. 대단하지? 매일 아빠가 병원 출근하면서 나 데려다 줘. 사실 내가 초등학교는 우리 동네에서 다녔었거든 그런데 아빠 병원에 갔다가 근처에 중학교가 있길래 아빠한테 거기로 가겠다고 무지 졸라서 그 근처에 다니는거야. 그렇게 해달라고 했을 때 엄마가 내 뺨까지 때리려고 했다니까. 너 때문에 쓸데없는 시간 소모하게 됐다고. 물론 내가 도를 넘어서 징징거리긴 했지. 아빠가 자기가 처리하겠다고 안 말렸으면 나 그 날 무지 맞았을걸?

  아 참, 이게 중요한게 아니지. 자, 자 이제 다시 우리 아빠 소개! 우리 아빠는 서울사람이 아냐. 말투만 들어도 딱 알아챌 수 있는 부산사람이야. 아빠는 형이 하나 있어. 그 분도 의사라는데 딱히 한 번도 본 적은 없는거 같아. 치과의사는 아니라고 했었던거 같은데. 그리고 할아버지도 의사셔. 부산에서 종합병원 하신대. 예전에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잠깐 뵌거 같은데 너무 어릴 때라서 잘 기억 안 나. 아, 그 때 아빠 형도 만났을 수도 있었겠구나!

  어쨌든, 그리고 우리 아빠 외모는 말야, 정말 남자다워! 눈은 작은데 푹 들어가 있어서 얼마나 멋있는지 몰라. 선글라스 쓰면 눈썹까지 다 가려진다. 그래서 난 아빠가 선글라스 쓰면 장동건보다 멋있어. 키도 엄청 크고 말야.

  음, 이젠 우리 엄마, 송채화씨. 엄마도 아빠처럼 다른 엄마들 보다 나이가 되게 많아. 여름에 벌써 50번째 생일이랬어. 우리 엄마 직업은 예전엔 판사였고 지금은 변호사야. 우리 엄마도 서울대 나왔어. 사법고시 출신에 무려 법대나 나오셨대. 엄만 고향이 서울이야. 대학 졸업할 때까지 관악산 근처에 살았대. 그리곤 아빠랑 결혼했고. 우리 엄마랑 아빠 둘 다 공부 무지 잘했지? 근데 난 못 해, 뭐지? 돌연변이인가? 아빠랑 닮은거 보니까 주워온 애는 아닐거야. 설마… 다른 엄마가 있는거 아냐? 아, 물론 농담. 엄마는 자기 성격 같잖게 완전 미인이다. 눈도 무지 크고 쌍꺼풀도 진해. 거기에 피부도 보얗고 턱도 완전 V라인이다. 키는 한… 나보다 10센티 쯤? 그 정도 작은거 같다. 엄마랑 눈높이가 민서 정도는 한 거 같으니까. 아직까지도 마른데다가 피부까지 좋아. 과장 좀 해서 한 20년은 젊어보이는거 같아. 물론 관리가 엄청나긴 해. 화장대에 보면 화장품이 화장대에서 쏟아질 정도로 꽉 차있다니까. 거기다 거의 매일 피부관리실에도 간다고 했어. 내가 아들이었다면 모르겠지만 정말 외모는 엄마를 닮았어야하는데 말야, 진짜로!

  아, 근데 엄마 성격은 최악이야. 매일 무슨 일만 있으면 화낸단 말이지. 별로 볼 일도 없는데 좀 만났을 때만이라도 좀 착하게 굴면 안 되나? 얼마 전엔 나보고 키도 무식하게 크고 얼굴도 못생겼으면 공부나 잘하라는 말까지 하는거 있지? 진짜 내가 아빠한테 다른 엄마 있냐고 물어보고싶을 정도였다니까. 뭐 나도 큰소리 칠만한 중간고사 성적표를 들고 온건 아니었긴하지. 그래도 그 날 너무 억울해서 방에 들어가서 펑펑 울었어. 우리 아빤 엄마가 나한테 무슨 소리 하기만 하면 방에 들어가버려. 그래서 더 억울해!

  아, 그래도 우리 엄마 나쁜 사람은 아냐. 가난한 사람들한텐 무료로 변호해주기도 하고 그래. 나한테도 매일 아침은 챙겨먹고 나가라고 하고 저녁도 꼭 챙겨먹으라고 문자도 보내니까.

  여기까지 우리 가족이야. 참, 그리고 저기 곰인형. 저건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빠가 사주신 거야. 그거 주면서 테디베어라는 영어의 유래가 시어도어 루즈벨트 전 미국 대통령이라고 가르쳐주셨어. 그래서 쟤 이름을 완이라고 지었다. 루즈벨트랑 완이란 이름이 무슨 관계냐고? 몰라 그냥. 친구들한테 아직도 곰인형한테 이름 붙여주고 같이 껴안고 잔다고 하면 한소리 듣겠지만 너는 말을 못하니까 말해주는거다. 고마워해라, 응? 그래! 너도 이름 지어줘야겠구나! 음………, 생각 안 난다. 좋은 이름 떠오를 때까지 넌 그냥 일기야! 서운해 하진 마!

  오, 오늘도 무지무지 길게 썼다. 기력을 다 써버린거 같아……. 장난이야. 내일 또 보자. 잘 자~. 꿈에 좋은 이름 떠오르면 붙여줄게, 안녕~!

 

  일기장을 덮고 스탠드를 끈다. 30초 정도 눈을 감는다. 어둠속에서 사물들이 창백한 빛의 그림자로 보이기 시작한다. 침대로 가 몸을 누인다. 그리곤 오른 쪽 벽으로 몸을 돌린다. 눈앞에 갈색 곰의 배가 어둠속에 하얗게 쳐다보고 있다. 곰을 품으로 끌어안는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올린다. 품에 안은 곰인형의 팔이 이불을 받친다. 답답하진 않다.

 

 

 

 

 

 

 

 

 

 

 

 

 

 

 

 민영이가 일기장을 덮은 지 일주일이 지났다. 날씨는 더 쌀쌀해졌다. 올해는 유난히 더 춥다. 간밤에 서울에 첫눈이 내렸다. 아침 지하철역을 빠져나오고 들어가는 사람들 모두 옷차림이 그들의 일상만큼이나 무거워졌다. 아침 충무로역은 복잡했다. 일터로 흘러가는 사람들. 아침 일찍 학교에 오르는 학생들. 충무로역은 환승역이다. 주황색과 파란색의 충무로역은 그랬다. 환승역이다.

  그 시간. 그 장소. 모든 이들이 빠르게 움직인다. 목적지가 있다. 그 와중에 한 볼품없는 조그만 덩어리가 느릿느릿 굴러가고 있다. 목적지가 없다. 덩어리가 충무로역 1번 출구 신한은행 앞에 멈춘다. 앞에서 구워지는 토스트. 아침을 거른 바쁜 이들의 손에 들려지고 있다. 이 한심한 덩어리에게 돌아갈 몫은 없다. 그냥 넋을 놓고 바라볼 뿐. 그렇게 2시간이나 멍하니 덩어리는 서있다. 이 한심스런 존재에게 연민을 느낀다. 그럴 수밖에 없는 몰골이다. 덩어리는 결국 토스트 한 조각을 수탈한다. 노획품을 안고 대한극장 앞으로 간다. 극장 측에서 놓았는지 극장 1층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놓았는지 모르는 철재 의자와 테이블. 싸늘한 오늘의 은빛 날씨를 담은 날카로운 자리들. 그 중 옆 롯데리아와 가까운 골목 쪽에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는다. 네 녀석이 앉을 자리가 아니다. 눈치가 보인다. 덩어리가 일어난다. 롯데리아 쪽으로 상영예고작의 포스터들이 붙어있는 곳. 그 곳 옆 돌판에 가 앉는다. 그 곳에 앉으면 롯데리아 2층에 앉은 사람들도 훤히 보인다. 전 날 술기운에 아직도 쓰러져있는 여자가 보인다. 노트북을 두드리는 남자도 보인다. 청소를 하는 직원도 보인다. 그러나 그들에게 이 덩어리는 없다.

 

 

 

 

 

 

 

 

 

 

 

 

 

 

 

 

 

 

 

 

 

 

 

 2010년 11월 29일 월요일

  안녕, 일기야!

  진짜 진짜 오랜만이야~. 미안해. 어젯밤부터 너무 신나서 누구한테라도 말하지 않으면 미쳐버릴거 같았어. 그거 알아? 어제 첫눈 내렸어. 사실 첫눈이 대단하게 특별한건 아냐. 그래도 뭔가 기분이 좋아. 뭐랄까, 음……, 이런 날은 말야, 그래! 백마를 탄 왕자님이 나한테 ‘공주님!’ 하면서 와서 키스해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뭐? 너무 애기 같다고? 아냐, 아냐, 분명히 내 친구들도 같은 기분일걸? 아마 나이 많은 여자들도 다 같은 생각일 거야, 엄마까지도. 그냥 그놈의 체면이니 나잇값이니 하는 것들 때문에 사람들한테 말 안 하는거야. 뭐, 물론 나도 너 말고는 아무한테도 못 말했긴 했구나. 오늘 하루 종일 민서랑 첫눈 얘기 했어도 이 말은 도저히 못 하겠더라구, 히~.

  오늘 학교 끝나고 민서랑 명동에 갔었어. 아침에 아빠랑 집에서 같이 저녁먹자고 약속했었는데 점심시간에 아빠가 문자로 늦게 들어온다고 하는거야. 그래서 내가 아빠 저녁 차릴 필요가 없었어. 그래서 민서한테 내가 같이 저녁 먹고 들어가자고 했지. 어젯밤부터 생일날 먹은 뉴욕스트립이 생각나서 견딜 수가 없었어. 슬프지만 내가 우리 집 식모거든. 그래서 집에서 스테이크도 많이 해봤는데, 역시 스테이크는 식당에서 먹어야해.

  아, 어쨌든. 그래서 학교 끝나자마자 혜화역으로 갔어. 그런데 시간이 아직 좀 이른거야. 그래서 롯데리아에서 아이스크림이나 하나 먹고 좀 걸어서 가려고 명동역 10번 출구 말고 충무로역에 내려서 1번 출구로 나갔어. 그 대한극장 쪽 입구 말야. 그리곤 바로 롯데리아로 갔지. 정말 진짜루 처음엔 아이스크림만 시켜갖고 나가려고 했었단 말이야. 근데 막상 와서 막 주변 사람들 먹는 거 보고 냄새도 맡으니까 도저히 햄버거 하나 안 먹고는 못 배기겠더라고. 그래서 간단하게 치킨버거 세트 하나 더 시켰어. 민서가 나보고 “넌 비쩍 마른 애가 뭘 그렇게 먹어대니? 무슨 병이라도 걸린 애니?”하면서 막 웃는거야. 그래서 내가 “야, 내가 잘 먹으니까 너보다 한참 위에서 공기 마시고 있거든!”하고 했더니 이번엔 “그래 키만 커서 좋겠다.”하면서 히죽대! 아우 이거 얘가 워낙 예쁘니까 뭔 말도 못 하구, 정말!

  내 햄버거랑 민서 아이스크림이랑 받아들고 2층 창가에 앉았어. 대한극장 쪽 창가 말이야. 월요일인데도 저녁시간이라 그 시간부터 대한극장에 영화 보러 오는 사람들이 있더라. 쌀쌀한데도 야외에서 커피 마시는 사람도 많고.

  민서랑 이제 막 올해도 한 달밖에 안 남았다고 하면서 한탄했어. 벌써 또 한 살 더 먹고 이젠 중3이라고. 그러다가 내가 민서한테 이제 넌 뭐하고 싶냐고 물어봤어. 그러니까 민서는 배우가 되고 싶대. 나는 그런 미래의 구체적인 직업을 물어본 게 아니고 고등학교 어디로 가고 학원은 어디 다닐 거냐고 물어본 거였는데. 여튼, 민서 정도 얼굴이면 충분하겠지.

  내가 그건 나중에 생각해도 되는 거 아니냐고 했어. 그니까 민서가 이렇게 말하더라. “야, 요즘 티비 틀어봐라. 나오는 가수들만 봐도 우리랑 나이차이가 별로 안나. 심하면, 우리보다 어린 애들도 있어.”하고. 맞아, 요즘에 나오는 애들 보면 그렇지. 생각해보면 우리를 봐도 그렇게 어려 보이지는 않잖아? 안 그래, 일기야? 사실 우리나 대학생들이나 겉모습으로는 별 차이 없잖아. 화장만 언니들이 더 잘하지. 물론 지적으로도 우린 이제 대학생들만큼 다 컸고.

  어쨌든 난 그냥 고개만 끄덕였어. 민서가 난 계획이 뭐냐고 물어보더라. 사실 난 딱히 그런 거 없었어. 민서가 가겠다는 고등학교나 학원에 따라서 갈 생각이었거든. 그래도 사실대로 얘기 할 수는 없었고 그냥 농담으로 “글쎄, 난 모델?”이랬지. 그러니까 별안간에 걔가 그럼 같이 오디션 보러 다니자는 거야. 그래서 내가 “아유! 됐네요! 그냥 이거나 먹고 얼른 명동 가서 밥 먹고 쇼핑이나 좀 하자. 나 겨울 옷 맞는 게 별로 없어.”하고 타박 줬지. 민서가 웃으면서 창가로 허리 틀어서 아이스크림 한 입 먹더라. 그러다가 갑자기 “민영아, 저 밖에 있는 사람 불쌍하지 않아?” 이래. 그래서 옆에 봤는데 어떤 사람이 창문 아래 돌판 위에 앉아있는거야. 근데 그 사람 생김새가 좀 이상했어. 이마랑 입도 튀어나와있고…, 약간 뭐랄까…, 원숭이? 뭐 그렇게 생겼더라. 그 때 또 생각났지 다운증후군. 그거 내가 분명 얼마 전에 학원에서 배웠거든. 무슨 몇 번 염색체에 뭐 결실인지 손상인지. 어쨌든, 그래서 내가 민서한테 “아, 저 사람 다운증후군일거야. 내가 학원에서 배웠어.”라고 아는 척 좀 했어. 그러니까 민서가 “그건 뭐야? 병이야?”물어보더라. 잘 모른다고 할 수 없어서 그냥 막 뱉었어. “아, 그게 사람 유전자에서 49번 염색체가 손상이 된 건데 그러면 뭐 말도 잘 못하고 지능도 떨어지고. 태어날 때부터 그래서 고치지도 못한데. 완전 불쌍한 사람이야. 나중에 저런 사람들 도와주는 사람이나 돼야하는데.” 민서는 “그래? 난 그냥 춥게 입고있길래 불쌍해보였는데. 생각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었구나.” 이러면서 고개를 돌려버리더라.

  우리가 다 먹고 일어서서 나갈 때까지도 그 사람이 안 움직이고 앉아있는거야. 내 입으로 저런 사람들을 도와줘야 한다고 했는데 그냥 갈 수 없겠더라. 그래서 불고기버거 세트 하나 포장해서 갖고 나가서 그 사람한테 내밀었어. 사실 조금 무서웠어. 갑자기 날 잡아채거나 공격이라도 할까봐서. 근데 다행히 그냥 날 쳐다보더니 베시시 웃으면서 받더라. 받자마자 민서한테로 달려가서 민서한테 팔짱 끼고 명동 쪽으로 갔어. 근데 사건이 터졌어. 탐앤탐스 앞에서 대학생 언니 오빠들이 대포만한 카메라 들고 뭘 막 찍고 있는거야. 우리는 그냥 그 앞을 지나가고 있었고. 근데 갑자기 어떤 오빠가 우리, 아니 정확히 말하면 민서한테 온 다음에, 자기네는 여기 대학에 영상미디어학과였나? 무슨 그런 학과 학생들이다. 졸업 과제로 영화를 찍고 있는데 주제가 학창시절이다. 그런데 출연할 여학생이 더 필요하다. 외부인을 한두 명은 써도 되는데, 시간 되시면 좀 출연 가능하시냐. 뭐 이렇게 물어보더라. 그리고는 민서한테 연락처 남겨도 되냐고 하고는 민서 핸드폰에 연락처 찍어주더라. 우린, 아니 민서는 그냥 “아, 예, 예.”만 하고는 얼른 다시 갈 길 갔어. 밥 먹는 동안 민서가 어찌나 들떠서 이 얘기 계속 하던지, 원.

  밥 먹고, 해도 다 졌는데 명동을 몇 바퀴나 돈지 몰라. 나도 새 옷 산다고 들뜨고 민서도 민서대로 낮에 일 때문에 들떴고 말이야. 결국 10시는 다 돼서야 양손에 종이가방 잔뜩 들고 집에 들어갔어. 학원이 없는 날이어서 다행이었지 하마터면 학원에 가는 것도 잊고 놀 뻔 했다니까. 그랬으면 엄마한테 뭔 소릴 들었을까?

 

  펜을 놓았다. 일기를 덮는다. 일기에게 작별을 안 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다시 펜이 꽂혀있는 페이지를 핀다. 얇고 가는 손을 흔들며 “안녕.”이라고 한다. 다시 일기를 덮는다. 스탠드의 불을 끈다. 방은 칠흑이다.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눈을 꼭 감고 기지개를 한 번 켠다. 멍하니 앉아있다. 몇 분간. 눈이 이 어둠에 적응했다. 주변을 둘러본다. 막 벗어놓은 옷과 들고 온 종이가방들이 무질서하게 널려있다. 단 한 번도 무질서하게 잠들지 않았던 아이. 이 날은 그냥 잠들고 싶다. 늘 항상 있던 침대로 가서 쓰러진다. 오늘은 이불을 덮지 않는다. 충분히 답답하다. 상쾌하다.

  인간에게 마흔 아홉 번째 유전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2010년 12월 5일 일요일

  일기, 안녕~!

  우~ 이제 정말 올해도 한 달이 채 안 남았구나. 기말고사는 더 며칠 안 남은 게 문제야! 하긴 이번에도 뭐 걱정을 하건말건 내 성적은 변함이 없이 안 좋을테니, 그냥 걱정 안 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겠지? 히히. 이젠 내가 성적표 받아와도 엄마가 뭐라고 크게 하지는 않아. 뭐 성적이 좋아본 적이 있어야 성적 가지고 뭐라고 하는 거 아니겠어? 이젠 완전 포기했나봐. 뭐 그런 의미에서 정신건강이나 챙기려고 오늘 아침에 독서실에서 민서랑 만나서 그 대학생 오빠한테 전화했어, 출연 하겠다고. 어디로 가면 되냐고 물어봤어. 그러니까 자기네 대학으로 찾아올 수 있겠냐는거야. 그래서 그렇다고 하고, 민서랑 지하철 타고 동대입구역으로 향했지. 그런데 생각해보니 뭔가 민망한거야. 내가 같이 가는 게 말이야. 그래서 민서한테 나 충무로에서 내려서 볼 일이 있으니까 가서 네 일 다보고 연락하라고 했어.

  막상 혼자 내리니까 엄청 서글프더라. 진짜로 눈물 나려고 했어. 그냥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 잔 테이크아웃 해서 대한극장 앞 야외의자에 앉았어. 주말 늦은 오전이라 그런지 영화 보러 오는 커플들도 많고 엄마아빠 손잡고 오는 애기들도 많았어. 난 지금까지 엄마아빠랑 나들이도 제대로 못 가본 거 같아. 학교 운동회 때도 친구들이랑 밥 먹으라고 돈이나 줬지, 같이 뛰어준 적도 없어. 가뜩이나 남자친구도 없어서 커플들 보니까 짜증났는데 그런 애들 봐서 더 짜증났어. 아, 아, 일기야, 그렇다고 나 성격 이상한 애 아냐! 히힛.

  그냥 스마트폰이나 만지작거리면서 앉아있었어. 날씨가 좀 춥기는 했는데 그래도 아직은 밖에 못 앉아있을 정도는 아니더라. 내가 또 엄청 따뜻하게 입고 나오기도 했고.

  커피 하나 놓고 바보처럼 있었는데 민서한테 전화 오더라. 자기 늦게 끝날 거 같다고. 그리고선 하는 말이, “야, 너 그냥 민망해서 거기 내린거지?” 이러는거야. 속으로 뜨끔했지. 그래도 아니라고 했어. 그러니까 “아니긴 뭐가 아냐? 거기 저번에 그 불쌍한 사람 있으면 그 사람이나 도와주고 있어라.”이러고 그냥 끊어버려! 뭐 장난인건 알겠지만 좀 그랬어. 나한테 장난친 것보다 그런 사람을 갖고 농담을 하다니. 어쨌든 아닌 게 아니라 저번에 그 사람 봤던 자리에 그 사람이 같은 옷 입고 나를 등지고 앉아있더라. 그래서 조심조심 가까이 갔어. “저…, 저기요. 안 추워요?” 물어봤어. 그러니까 날 뚫어지게 보더라. 속으로 ‘이 사람 말 못하나?’ 생각했어. 그런데 갑자기 한 글자씩 또박또박 “…추!어!”이러더라. 대충 말은 조금 알아듣는 거 같았어. 그리고 얼굴을 보니까 뭐 별로 위험해보이지도 않았어. 나이도 어려보이고. 게다가 덩치도 무지 작아서 덤벼들어도 나한테 한주먹감도 아니겠더라고. 그래서 또 물어봤지. “몇 살이야?” 그랬더니 손으로 막 세더니 “열다섯.”이래. 그래서 “정말? 너 나랑 동갑이네. 너 왜 밖에서 계속 이러고 있어? 집 없어?”하고 물어봤는데 대답이 없더라. 그러다가 좀 있다 또 하는 말이 “추어.”였어. 역시 간단한 질문만 통하는 거 같아. 마치 어린 애처럼 나이나 이름 뭐 이런 것만. 그래서 이번엔 이름이 뭐냐고 물어봤어. “미…, 미누~.”이러더라. 그래서 내가 “아, 민우?”하고 물어보니까 그냥 막 고개를 끄덕이더라고. “그래, 민우야, 너 보아하니까 따뜻한 옷도 없는 거 같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다니는 거 같은데, 기분이다! 내가 오늘 너 밥이랑 옷 사줄게 가자!”이러고는 민우 손을 잡아끌고 일어났어. 그리곤 걔 데리고 명동에 갔어. 일어나니까 진짜 걔 키 작더라. 진짜 내 반토막인거 같애. 손은 또 어찌나 차가운지 내가 걔 손 잡고 내 주머니에 넣어줬어. 걸음도 천천히 걸어주고.

  일단 명동 쪽으로 가다가 점심부터 먹을 생각으로 도미노피자 앞에 있는 아웃백에서 간단하게 스테이크만 2개 시켰어. 물론 뉴욕스트립으로! 빵 나오자마자 민우가 통째로 들고 가서 입으로 뜯더라. 스프도 그냥 후루룩 마셔버리고. 엄청 배고팠었나봐. 스테이크가 나오니까 직원한테 두 접시 다 나한테 달라고 했어. 그냥 민우 앞에 두면 고기도 손으로 잡고 먹을 거 같았거든. 다행히 민우가 얼른 달라고 조르거나 하지는 않았어. 그래서 차근차근 한 조각씩 잘게 잘라서 민우 앞에 놓고 민우 손에 포크도 직접 들려줬지. 빵이랑 스프가 들어가서 허기는 좀 가셨는지 고기는 천천히 먹더라. 나랑 비슷하게 식사를 끝냈거든.

  주말 명동 오후엔 정말 사람으로 미어터지더라. 어떻게 이렇게 사람이 많은지! 새삼스레 왜 그러냐고? 항상 올 때마다 느끼는 거거든. 정말 주말 명동에서 양팔을 휘저으면서 마구 뛰어다녀 보는 게 소원이야! 뭐, 여튼간에 막상 명동에 갔는데 민우한테 뭘 입혀줘야 할지가 문젠거야. 덩치로 봐서는 아동복을 입혀줘도 맞을 거 같았거든. 그래도 명색의 15살 남자앤데 아동복 입혀놓으면 되겠어? 그래서 손 잡아끌고 밀리오레에서부터 을지로 쪽으로 가면서 매장이란 매장은 거의 다 들어가봤어. 응? 왜 다 들어가 봤냐고? 그냥 뭐 내 쇼핑도 할 겸…? 그래도 내 옷들은 하나두 안 샀어! 민우한테는 정말 뭘 입혀야 할지 고민했어. 스무디킹 옆에 유니클로도 가봤구 지오지아, 코데즈콤바인같은 데도 데려가 봤는데 영 아니더라. 내 옷이랑 액세서리도 볼 겸 코데즈콤바인 앞에 에이랜드도 갔었는데 거기서도 민우한테 입힐 만 한 게 없었어. 아… 에이랜드에선 어쩌다보니 내 목걸이나 하나 추가했네? 힛!

  옷 고민하다가 문득 민우 머리도 너무 막 기른거 같은거야. 그래서 옷 사기 전에 던킨도넛 사거리쯤에 있는 프랑크프로보에 데려가서 머리도 좀 깔끔하게 잘라줬어. 정말 다행인건 내가 데리고 다니는 내내, 심지어 미용실에서도 조용히 시키는대로 다 했다는거야. 난 민우가 다운증후군이라 방송에서 가끔 보는 그런 사람들처럼 막 울고 주변 사람 때리고 할까봐 많이 걱정했었거든.

  여튼, 착한 민우 머리까지 다 손질하고 근처에 던킨도넛 바로 앞에 있는 아디다스 매장에 가서 스포츠 의류로 사 입혔어. 남성의류나 캐쥬얼은 전혀 안 어울렸는데 스포츠 의류는 좀 낫더라. 그래도 나름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새로 하니까 좀 괜찮아 보였어.

  막 돌아다니다 보니까 밥 먹을 시간도 다 된거야. 마침 민서한테서도 다 끝났다는 연락도 오구. 그래서 민서한테 명동에 있을테니까 그리로 오라고 했어. 그리고는 민우랑 난 민서 오는 동안 근처 프리스비에서 애플 제품들이나 구경했어. 이미 아이팟터치 4세대에 맥북에 아이폰까지 필요한 건 다 있어도 막상 가면 또 뭔가 사고 싶다니까. 요샌 아이패드도 나왔고 아이팟 나노랑 셔플이 어찌나 예쁜지! 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뭐 사도 사용할 데가 더 이상은 전혀 없을 거 같아서 참았지.

  프리스비 좀 돌다가 민서한테 던킨도넛으로 오라고 했어. 민서가 멀리서 달려오는데 완전 뒤로 넘어갈 뻔 했다니까. 얼굴에 화장을 좀 했는데 안 그래도 예쁜 얼굴이 정말 연예인 바로 해도 될 정도로 예뻐진거야! 그래서 내가 “야, 너만 그렇게 예쁘게 하고 다니면 어떡하냐? 너 정말 계속 그러면 나 너랑 같이 안 다닌다!”하고 농담 좀 했어. 그러니까 또 얘가 “원판이 죽여주는 걸 나보고 어떡하란 말이야? 히히! 기분이다! 내가 저녁 살게! 가자!”이러는 거야. 그래서 내가 “됐어! 바라지도 않거든요. 여기 옆에서 부대찌개나 먹고 들어가자.”말하고 민우 손 끌고 빕스 쪽으로 가버렸어.

  최씨 부대찌개 2층에 올라가서 제일 구석자리에다 민우 넣어놓고 나도 옆에 앉았어. 그랬더니 민서가 “아까 내가 농담으로 한 말인데 너 진짜 이 사람 데리고 다니는구나. 보아하니 정상은 아닌 거 같은데…. 설마 내 말 알아듣는 건 아니겠지?”라고 하더라구. 그래서 내가 “응, 오늘도 그 자리에서 춥게 앉아있더라고. 어쩌겠어? 불쌍한 사람 도와줘야지. 아까 밥도 사주고 옷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사입혔어. 머리도 해줬구. 어때? 이정도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현 아니냐?”라고 했지.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 아빠랑 뉴스 보면서 알았는데 이 때 써먹었어! 나 멋지지, 일기야? 아…, 미안, 히~.

  어쨌든 민서가 내 말 듣고 노블레스 오블리주 뜻 물어 볼 줄 알고 준비했는데 갑자기 눈 동그랗게 뜨고는 “야, 너 진짜 멍청한거냐? 착한거냐? 알지도 못하는 장애인같은 애 데려다 놓고는…. 그나저나 얘 부모님 없어?”하는거야. 당황해서 “나도 모르지 근데 좀 불쌍한 애 도와주면 뭐가 어떠냐? 그리고 아무리 얘가 말 못 알아듣는다고 해도 그런 말 하지마라.”하고 말했어. 그랬더니 민서가 조용해지더라. 이후엔 셋이서 말없이 조용히 밥만 먹었어. 내가 민우 앞에 그냥 수저 놔주고 접시에 음식 떠주니까 다행히 혼자서도 잘 먹더라. 그러다가 내가 그 싫은 분위기 깨보려고 민우한테 “민우야, 오늘 몇 끼 먹어? 아니, 밥 몇 번 먹었어?”하고 물어봤어. 그러니까 “…두!번!”이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민서한테 “봐. 얘 불쌍한 애 맞잖아. 내가 밥 사준게 오늘 끼니 끝이래.”하고 말했지. 민서는 대답도 안 하더라.

  밥 다 먹고 나와서 민우 손에 도넛 한 상자 들려줬어. 왠지 계속 굶을 거 같았거든. 그런데 도넛가게에서 나오자마자 상자 들고 갑자기 막 뛰어가버리는거야, 민우가. 그래도 나랑 민서랑은 걔를 잡진 않았고, 집 정도는 잘 찾아들어가겠거니 하고는 우리도 그냥 각자 집으로 가버렸어.

  일기야, 요즘 내가 자주 너 안 만나는 대신에 한 번에 왕창 쓰고 간다! 그러니까 자주 못 봐도 삐치면 안 돼! 그럼 나 이제 잘게~! 안녕!

 

  방바닥엔 내일 입고 갈 교복이 정갈하다. 가방도 다 챙겨져있다. 펜을 들기 전에 해두었다. 스탠드를 끄고 무엇도 보이지 않는 방에서 익숙하게 자신의 자리를 찾아 눕는다. 오늘 있었던 일은 떠오르지 않는다. 시험. 어머니 잔소리. 그런 것들이 떠오른다. 마음 썼다고 나아질 바 없는 그런 것들만.

  덩어리는 없다.

 

 

 

 

 

 

 

 

 

 

 

 

 

 

 

 

 

 2010년 12월 14일 화요일

  잘 있었어, 일기?

  어제부터 금요일까지 쭈욱~ 기말고사 기간이야. 중간고사는 3일이면 끝나는데 기말고사는 5일이나 돼! 그래도 오전에만 시험 보구, 오후엔 보내준다!

  그래서 가끔은 시험기간이 평소보다 좋을 때도 있냐고? 음…, 그런 거 같지는 않아. 평소엔 학교 끝나면, 학원 안 가는 날엔 놀 수 있잖아. 그런데 시험기간엔 맘 놓고 놀지는 못하지. 아무리 내가 공부를 그만두다시피 했어도말야! 일찍 끝나도 학원 자습실에 가있어. 독서실은 요즘 잘 안 가. 민서가 시험기간인데도 자꾸 다른 곳으로 새는 바람에 나도 덩달아 갈 맛이 안 나거든.

  뭐? 내가 학원 자습실엔 왜 있냐고? 맞다! 내가 말 안 했구나! 요즘 내가 완전 푹 빠져버린 사람이 생겼어! 학원에 말이야, 저번 주 월요일부터 다니는 오빠가 있거든. 나이는 나보다 한 살 많아. 이제 고등학교에 올라갈 오빠야. 키도 나랑 딱 맞아! 내가 키가 하도 크다보니까 나보다 10센티 이상 큰 남자애들 찾아보기가 무지 힘들거든, 그런데 그 오빠가 키가 188이나 된대! 우리 아빠만 하다구! 얼굴도 우리 아빠처럼 눈이 푹 들어가있어. 선글라스 쓰면 완전 다 쓰러질거야! 게다가 몸매도 얼마나 좋은지 교복인데도 완전 멋있어.

  저번 주에 학원 휴게실에서 지민이랑 해윤이랑 과자 먹으면서 수다 떨고 있는데 그 오빠가 친구들이랑 같이 들어온거야. 그래서 내가 애들한테 “저 애 누구야? 알아?”하고 물어봤지. 그랬더니 해윤이가 “아, 민수오빠? 저 오빠 나 초등학교 다닐 때 축구부였고 작년까지도 우리 중학교에서 축구했었어. 그러다가 이번에 그만두고 공부하기 시작했대. 왜? 관심있냐?”하더라. 나는 당연히 “야, 완전 내 이상형! 우리 아빠 닮았어! 저 오빠랑 아는 사이야?”하고 물어봤지. 그러니까 갑자기 해윤이가 벌떡 일어나서 “오빠! 안녕하세요! 이 학원 다니세요?”하는거야! 그랬더니 민수오빠가 우리 보고 “어, 해윤이구나. 이 학원 다니나보네? 나도 어제부터 친구들이랑 같이 다니기로 했어. 옆엔 친구들이야? 우와! 다들 예쁘네! 역시 해윤이같이 예쁜 애들은 예쁜 애들끼리 다니는구나.”하는거야! 완전!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어! 나도 예쁘게 봐주다니!

  오빠랑 친구들 나가고 계속 그 오빠 생각만 나는거야. 수다 떠는 와중에도 내가 계속 중간에 민수오빠 얘기로 돌리니까 지민이가 “야, 우리도 그냥 자습실 가서 공부나 하자. 민영이 때문에 뭔 말을 못하겠네! 히힛, 농담이고, 나중에 해윤이한테 소개시켜달라고 해.”라고 할 정도로 말이야. 그래서 그냥 셋이 각자 자습실 자리 찾아 들어가서 앉았어.

  와~ 근데 정말 자습실에 앉아서도 공부가 안 돼! 막 갑자기 몸이 추워지고 심장 뛰는 소리 귀까지 막 들리고 이런 기분 처음이었어! 정말 나 그 오빠한테 첫눈에 반했나봐. 저번 주 부터 지금 이 때까지도 계속 그 오빠만 생각난단 말이야. 안 그래도 공부 못하는 나 망칠려구 왔는지말야~ 앙! 그래도 너무 좋아. 상상만 해도. 막 요즘 그 오빠랑 데이트하는 상상도 하고그래. 아! 심장 뛰어서 밤에 잠도 잘 못 자겠어. 해윤이한테는 계속 소개라도 시켜달라고 하는데 이 망할 것이 자꾸 시험 끝나고 생각해보자는거야! 그래도 다행인건 내가 자습실에 있으면 오빠도 들어와서 공부해, 밤 11시까지. 그래서 나도 요즘 정말 태어나서 처음으로 밤까지 학원에 있어! 덕분에 오늘은 엄마한테 정말 태어나서 처음으로 칭찬도 받았어! 내가 자습실에서 딴 생각이나 하고 앉아있는 것도 모르고 말야. 학원에도 어제부터는 엄마가 데리러 오기 시작했어.

  정말로 빨리 시험 끝났음 좋겠어. 그럼 해윤이 핑계로 말이라도 걸텐데 말이야. 정말 정말 정말 나한테도 첫사랑이 시작되나봐! 반드시 이번 크리스마스에 명동에서 민수오빠랑 팔짱끼고 활보해주겠어! 아~ 생각만 해도 심장이 터질 거 같아. 심장에서부터 뒷목을 타고 머리까지 뭔가 쭉 퍼지는 느낌이야!

  그럼 일기야! 안녕! 시험 끝나고 오빠랑 어떻게 되어가는지 꼭 말해줄게~! 궁금해도 참고 있어라!

 

  일기를 덮지 않는다. 바로 스탠드를 꺼버렸다. 어둠 속에선 그 어떤 것도 내 마음대로 본다.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 손을 잡는다. 걷는다. 어느 한 모퉁이에서 입을 맞춘다.

  덩어리는 없다.

 

 

 

 

 

 

 

 

 

 

 

 

 

 

 

 

 

 

 

 

 

 

 

 

 

 

 

 

 

 

 

 

 

 2010년 12월 17일 금요일

  일기야~ 일기야~!

  오늘 어떤 일이 있었는 줄 알아? 드디어 내가 민수오빠랑 말을 했어! 대단하지? 오늘 우리학교 기말고사가 다 끝났어. 민수오빠가 다니는 학교도 그렇고 서울에 있는 중학교는 시험이 다 끝났대. 그래서 오늘부터 크리스마스까지 학원에 중학생 강의는 전부 휴강이야. 그래도 난 혹시나 하고 시험 끝나자마자 교대역으로 날아갔지! 뭐 정말 날아간건 아니고 그만큼 급하게 달려갔어. 자습실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문이 확 열리면서 민수오빠가 나오는거야. 그 때 내가 오빠 가슴팍에 ‘퍽!’ 하고 얼굴을 박아버린거야! 그랬더니 오빠가 “어, 괜찮아? 해윤이 친구구나?”하는거야. 날 기억해! 그 때 내가 “아, 오빠 죄송해요. 제가 워낙 덜렁대서요. 시험도 끝났는데 학원에 계시네요?”하고 말해버렸어! 말 한마디 못 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말이 튀어나왔어. 덕분에 대화가 이어졌지! “응, 책들 좀 갖고 가려고. 일주일 휴강이잖아. 그러는 너야말로 어쩐 일이야? 시험도 끝났는데 애들이랑 놀러 안 갔어?”이러고 물어보더라. 그래서 “아, 저도 학원에 뭐 두고 가서요. 오빠는 약속 없으세요? 저는 있다 저녁에 애들 볼 거라서요.”라고 했어. 물론 난 따로 약속 없었지. 그냥 아무 때나 애들 있는 곳으로 가면 되니까. 여튼 그러니까 오빠가 “나도 있다 보기로 했어. 그럼 시간 좀 남는데 어디 가서 우리끼리 시간이나 좀 때울까?”라고 했어! 진짜 심장 터질 거 같았어. 나는 물론 바로 미친 애처럼 고개를 막 끄덕였지. 오빠가 웃으면서 “그럼 가자.” 이러는데, 정말 머리가 비어버리는 줄 알았어.

  오빠랑 교대역 스타벅스에서 2시간은 떠들었어. 이름도 물어보고 사는 곳, 뭐, 취미랑 이런 것들 있잖아. 정말 내가 무슨 말들 했는지도 기억이 안 나. 막 얘기 하는데 이젠 무슨 말 할까 고민 될 때가 오더라구. 그래서 그냥 내가 먼저 이제 약속시간 다 돼서 가야겠다고 말해버렸어. 괜히 어색하게 앉아있기는 싫었거든. 그런데 갑자기 오빠가 “그래, 그럼 우리 전화번호 정도는 알아두자. 앞으로 학원에서도 자주 볼 사이고 말이야.” 하는거야! 전화번호 물어보고 싶어서 정말 미치는 줄 알았는데 오빠가 먼저 물어봤어! 나는 당연히 두 말 없이 오빠가 내민 전화기에 내 번호 찍어서 통화버튼 눌렀지. 잘못 누를 까봐 손가락 하나하나 조심조심하면서 말야! 그러곤 오빠는 다시 학원 쪽으로 걸어갔고 난 무작정 지하철역으로 내려갔어. 그리고는 그냥 바로 집으로 가버렸어. 즐거운데 놀 기분은 아닌 그런 느낌 알겠어? 너무너무 좋아서 계속 오빠 생각만 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었어. 집에 와서도 막 오빠한테 연락해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고 차마 그러지는 못하겠고 정말 정신이 없었어. 그냥 핸드폰 카카오톡에 새로 뜬 오빠 프로필 사진만 계속 보고 있고 대화 눌러놓고 한 글자도 못 쓰고 몸은 계속 거실만 빙빙 돌고 있고.

  오빠도 나한테 반한건가? 정말? 그렇겠지? 그렇지 않으면 같이 커피도 안 마셨고 전화번호도 안 물어봤겠지? 이제 정말 내 아름다운 첫사랑, 책에서만 보던 그런 연애 시작되는 거 맞겠지? 그렇지, 일기야?

  뭐? 그렇다고? 고마워~ 역시 너밖에 없어! 아 또 어디 가서 이 많은 얘기들 쏟아내지? 막 다 말하고 싶어 누군가한테.

  그럼 안녕 일기야~. 오늘은 일찍 이불 덮어쓰고 있어야겠어.

 

 오후 8시. 아직 민서를 빼고는 아무도 없다. 집안의 불은 모두 꺼져있다. 켜져 있다. 침대 속, 민서가 든 휴대전화 액정의 불빛. 민서 두 눈의 불빛. 가슴속의 불빛. 아름다운 떨림의 불빛. 그 무엇도 용서할 수 있는 불빛. 그 누구에게도 용서되는 불빛. 어린 설렘의 불빛.

  덩어리는 없다.

 

 

 

 

 

 

 

 

 

 

 

 

 

 

 

 

 

 

 

 

 

 

 

 

 

 

 

 

 

 

 

 

 

 

 

 

 

 

 

 

 2010년 12월 23일 목요일

  일기~, 잘 있었어?

  일기야, 드디어 니 이름을 생각해냈어. 바로… 민우! 왜 민우냐고? 그건 말이야. 너도 민우처럼 내 말을 다 들어주거든. 그리고 어디 가서 소문 낼 일도 전혀 없고 말이야. 맘에 들어?

  이번 주 내내 민우랑 만났어. 이제 곧 학교가 방학이고 학교 진도도 다 마무리가 돼서 학교가 일찍 끝나거든. 그렇다고 집에 일찍 가면 민수오빠 생각 때문에 손에 잡히는 일도 없고 애들이랑 놀러 다녀도 계속 멍하니 있고 그러는거야. 그래서 누구한테 말을 계속 하고 털어놔야겠는데 친구들한테 하기는 조금 민망하기도 하잖아. 그래서 혹시나하고 월요일에 학교 끝나고 대한극장 앞에 가봤어. 민우가 있을까봐. 아니나 다를까 또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더라. 내가 사준 옷이랑 모자랑 다 하고 말이야. 기뻐서 민우한테 달려갔지. “민우야! 오늘도 여기 있네? 밥은 먹었어? 어디 가서 밥부터 먹자!”하고 민우 데리고 바로 옆 파스타가게에 데려갔어. 데려가서 밥 먹는 내내 민수오빠 얘기 쏟아냈지. 밥 먹고는 또 옆에 탐앤탐스 커피숍 데리고 가서 커피에 갈릭버터브레드랑 프레츨같은거 잔뜩 시켜놓고 한참을 떠들었어. 민우는 그냥 눈만 멀뚱멀뚱 뜨고 쳐다보더라. 그 때 민우한테 말했어. “내가 이런 말들을 다 털어놓는 사람, 아니 뭔가가 또 있어! 바로 내 일기야. 뭔가 막 말하고 싶어질 때는 일기를 쓰거든. 근데 내가 아직 내 일기에 이름을 못 붙여줬어. 아직 고민하고 있어.” 그러니까 민우가 갑자기 “미!누!”이러는거야. 그 때는 생각 안 했는데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까 일기 너한테 민우라는 이름 붙여주면 딱인거야! 여튼, 그래서 일기 얘기 하고 나서도 민수오빠 얘기만 다시 끝도 없이 했어. 막 털어놓고 보니까 너무 기분 좋은거야. 막 후련해! 그래서 민우 데리고 대한극장도 갔어. 민우는 소란 안 피우니까 영화 한 편 봐도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영화 ‘소셜네트워크’도 보고, 나와서 동대 후문 삼통치킨에서 치킨도 사주고 그랬어. 월요일부터 오늘 낮에도 그런 식으로 계속말이야. 미리 개봉한 영화는 다 봐뒀다가 나중에 민수오빠한테는 안 봤던 척 하면서 제일 재밌는 영화로 같이 봐야겠어.

  아, 그것도 그렇고 아까 집에 와서 드디어 용기를 내서 민수오빠한테 연락했어! 카카오톡으로 크리스마스에 바쁘시냐고 말이야. 정말 그 한 줄 써놓고 얼마나 심장 떨렸는지! 오빠가 읽었다는 표시가 뜰 때까지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그러다가 내 글 읽고 10분인가 지나서야 오빠가 답장이 온거야! 자긴 약속 없는데 나보고 혹시 시간 되냐고 말이야! 그래서 당연히 나도 약속 없댔지. 그 다음엔 이상하게 서로 안부 물으면서 삼천포로 빠지긴 했지만 결국엔 크리스마스 12시에 삼성역에서 만나기로 했어! 정말 날아갈 것 같아. 이 기쁜 소식을 내일도 민우한테 제일 먼저 알려줘야지!

  그럼 일기야. 아니, 민우야, 안녕~!!!

 

  불이 꺼진 방은 어둡다. 설렌다. 기쁘다.

  덩어리는 없다.

 

 

 

 

 

 

 2010년 12월 24일 금요일 크리스마스이브

 

  오전 11시 23분 충무로 대한극장. 뼛속까지 시린 날씨. 상쾌하다. 거리엔 상점들의 유쾌한 캐럴. 점포마다의 각기 다른 음악이 하나의 기쁨의 선율이 되어 이 거리를 따뜻하게 채우고 있다. 화장품 가게의 달콤한 향수향기. 패스트푸드점의 고소한 기름향기. 카페의 감미로운 커피향기. 빵집의 부드러운 화덕향기. 각기 다른 향기들이 하나의 조화의 향수가 되어 이 거리를 화사하게 감싸고있다. 거리에 폭신하게 내려앉은 눈. 그 위에 다시 떨어지는 눈송이들. 혼자인 이들은 없다. 혼자일 거라면 나오지도 않았다. 밖으로 나온 이는 모두 함께이다. 따뜻하다. 아름답다.

  덩어리다. 아름답지 않다. 언젠가부터 항상 그곳에 앉아있다. 2010년 11월 29일 월요일부터. 올해의 첫눈이 내리고 나서부터. 누군가를 기다리니까.

  “어, 민우야! 오늘도 여기 있구나! 이제 우리 방학이야. 오늘 방학식 해서 좀 더 일찍 끝났

  어.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고 눈도 살살 오네. 기분도 상쾌한데 우리 좀 걸어다닐까? 그래!

  청계천 한 번 가보자. 동대문 지나가면서 구경도 좀 하구!”

  민서가 민욱의 손을 잡고 일어난다. 민욱의 손이 얼음장이다. 민서는 민욱의 손을 자신의 빨간 코트 주머니에 함께 넣는다. 롯데리아, 신한은행을 지난다. 애완동물 가게들을 지난다. 오토바이거리를 지난다. 퇴계로 5가 우체국을 지난다. 신호등을 기다린다. 건넌다. 퇴계로를 따라 둘은 동쪽으로 걷는다. 광희동사거리에 닿았다. SK텔레콤 대리점 앞의 신호등 앞에 섰다. 둘은 말이 없다. 아니 생각을 하고 있다. 각기 다른 생각. 민욱의 얼굴은 민서와 있을 때면 늘 짓던 멍청한 표정. 민서의 얼굴은 누군가를 생각하며 그리고 그 사람과 함께 걷는 생각을 하며 짓는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행복한 표정. 신호가 녹색 불을 비춘다. 다시 걷는다. APM을 지나친다. 길거리의 수많은 사람들을 뚫고 더 나아간다. 밀리오레를 지나간다. 희한한 옷을 두른 여자들 한 무리가 건물에 걸터앉고 기대서서 담배를 물고 둘을 쳐다본다. 그들을 지나친다. 두타를 지난다. 신평화시장 건물 앞까지 닿았다. 청계천이 보인다. 단단하게 얼었다. 뾰족하게 얼었다.

  “우와! 청계천 얼었네? 뭔가 신기한데?”

  민서는 언제나처럼 민욱의 손을 잡아끌고있다. 민욱의 손을 잡고 무작정 청계천을 따라 동쪽으로 달렸다. ‘동평화패션타운’이란 흰 글씨와 ‘SINCE1976’이란 노란 글씨가 적힌 커다란 붉은 간판 아래에 닿았다.

  “나 여기서 청계천 보는 건 처음이야. 저기 다리로 가보자.”

  두 갈래로 갈린 다리 중에 좌측의 다리로 민욱의 손을 잡고 간다. 한 가운데서 민서는 고개를 숙이고 아래를 본다.

  “음…, 어디 내려가는 곳이 이 근처에 있을텐데말야.”

  민욱이 난간에 배를 깔고 아래로 상체를 다 숙인다. 청계천 바닥을 응시한다. 물은 물방울 그대로 얼어있다. 단단하다. 뾰족하다. 얼었다.

  “어, 민우야, 위험해! 그러다 떨어지면 어쩌려구?”

  청계천이 얼었다. 뾰족하고 단단하게 얼었다. 그 위로 덩어리가 쏟아진다. 볼품없는 머리통이 가장 먼저 얼어버린 청계천에 닿는다. 얼음의 결 사이사이로 축축하고 붉은 연기가 퍼진다.

 

  이제 덩어리는 없다. 원래부터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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