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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라이트노벨
우리는 저마다 시대를 잘못 만났다(부제: 난세살이)
작가 : 박은혜
작품등록일 : 2018.12.31

‘시집살이.’ 며느리들의 가슴을 철정 내려앉게 하는 말이다. 하지만 정말 며느리만 힘들까? 자신도 겪어온 며느리 시절을 잘 아는 시어머니가 왜 며느리를 괴롭힐까? 어쩌면 그 시어머니는 나름대로 잘 해보려는 게 아닐까? 언젠가 시어머니가 될 며느리는 자신의 며느리를 어떤 태도로 대할까? 어쩌면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하던 그 시어머니와 똑같은 모습이 되어 있진 않을까?

“네가 뭘 안다고 끼어들어?!” 사건 당사자들이 그 일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다. 경험해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하지만 때로는 경험했기 때문에 모를 수도 있다. 한 걸음 물러나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이해관계를 떠나 생각할 수 없다면, 그것을 날 위한 싸움에 지나지 않는다. 서로 자신만을 위해 싸우니 해결도 있을 수 없다.

만연해 있는 고부갈등을 제3자의 시각에서 본다면, 끝없이 맞물려 있는 이 복잡한 문제의 원인이 어느 한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비단 시어머니와 며느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 마찬가지다.

우리는 저마다 시대를 잘못 만났다. 나 한 사람만이 아니라 그분도, 그도, 그녀도, 그 아이도 다 잘못 만났다. 그러나 그 사실을 잘 모른다. 당사자인 만큼,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 같고 상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사람 같다.

‘힘들어봤자 나보다 더 힘들까.’
‘내 주제에 지금 누굴 위로하고 있나.’

누군가를 위로하는 게 사치가 된 세상. 하지만 위로할 수 있어야 위로받을 수 있다. 그 사람이 시대를 잘못 타고났음을 알게 된다면, 그 사람도 나처럼 난세(亂世)살이를 하고 있음을 이해한다면, 조금은 불쌍히 여기며 감싸 안을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어쩌면 상대를 시대의 피해자로 바라볼 수만 있어도 조금은 달라 보일 것이다. 그 사람도 나처럼 힘겹게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 자체만으로도 꽤 대단한 사람, 꽤 괜찮은 사람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런 소소한 소망 하나를 던져주는 것이 이 책에 나올 인물들의 역할이다.

이 소설은 올해 서른셋이 된 주인공(나)이 세 살 즈음에 가지고 있었던 어렴풋하게 남아있는, 하지만 지울 수 없는 강력했던 몇 가지 기억을 토대로 전개된다. 그리고 올해, 세 살 즈음이 된 사람들과의 이야기들을 동시에 섞어가며 그들을 지배한 각각의 시대를 조금씩이나마 마주하게 만든다.

그러고 보면, 올해 ‘세 살 즈음’이 된 등장인물들의 스펙은 저마다 찬란하게 서글프다.

- 일흔 세 살 즈음에
올해 일흔 세 살이 된 고모는 1946년에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비상한 머리를 써보지도 못한 채 국졸로 학업을 마쳐야 했다. 194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독일광부로 파견나간 아버지를 잃어야 했고 늦게나마 실현하려던 꿈도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포기해야 했으며 194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애틋한 마음 한번 품어볼 기회 없이 원치 않는 결혼을 치러버려야 했다. 그리고 여생을 딸과 손녀를 위해 헌납해야 했다.

- 예순 세 살 즈음에
올해 예순 세 살이 된 아빠는 195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아주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잃어야 했고, 독재정권과 군사정권을 거치며 우울한 대학시절을 맛보아야 했으며, 그토록 가혹했던 70년대의 군대를 경험해야 했다. 195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직장도, 집도 쉽게 구했지만 평생을 가족을 위한 ATM기계로 살아야 했고 퇴직 시기에는 첨단문명과 벗할 수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외면당하기 시작했다.

- 쉰 세 살 즈음에
올해 쉰 세 살이 된 엄마는 196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끝까지 대학에 가겠다고 고집을 피웠지만 대학을 포기해야 했으며 남편이 번 돈으로 편히 산다는 시선 속에 무시를 덤으로 받으며 살아왔다. 거기에 196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맞벌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시대에 노년기를 맞아야 했고 결국 황혼육아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 마흔 세 살 즈음에
올해 마흔 세 살이 된 외삼촌은 1976년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군대를 다녀오자마자 IMF라는 난국에 부딪혔다. 1976년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어렵게 워크맨 사업을 시작했지만 MP3의 등장으로 사업을 시원하게 말아 드셨고, 시대의 흐름을 간파하여 얼른 MP3사업으로 전향했지만 스마트폰 시대가 도래하면서 또 다시 사업을 접어야만 했다.

- 서른세 살 즈음에
올해 서른세 살이 된 나는 1986년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군대에 다녀오자마자 미국발 경제위기와 마주했다. 취업난은 극도로 심각해진 상태였고 뭐라도 좋으니 해 보자며 원치 않는 직장에 들어갔다. 1986년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미친 듯이 벌어도 내 집 마련의 꿈은 현실이 될 수 없는 이상일 뿐이다. 친구들은 “그 나이 되도록 자리도 못 잡냐?”는 핀잔에 이미 녹초가 되어 있다.

- 스물세 살 즈음에
올해 스물세 살이 된 조카(고모의 손녀) 유진이는 1996년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IMF와 함께 유아기 시절을 보냈다. 199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개천에서 용 날 수 있다는 할머니(나의 고모) 말을 믿고 열심히 공부했지만 더 이상 개천에서 용 나는 것은 어려운 시대임을 알고 꿈을 하나 둘 접고 있다.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포기하는 건데 욕심이 많아 결혼을 안 하고 있다는 핀잔까지 덤으로 들으며 살아간다.

- 열세 살 즈음에
올해 열세 살이 된 사촌동생(외삼촌의 아들) 영우는 2006년에 태어난 우등생이다. 하지만 임대아파트 스펙 덕에 친구조차 마음대로 사귈 수가 없다. 200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곧 다가올 이십대를 4차산업혁명 시대와 함께 맞이하게 되었고, 그동안 죽어라 공부한 외국어도 다 쓸데없다는 사실을 알아가고 있다. 꿈도 함부로 꿀 수 없는 그에게 어른들은 꿈이 없다며 혀를 찬다.

- 세 살 즈음에
올해 세 살이 된 나의 아들 우림이는 201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텅텅 빈 어린이집에서 7시 반까지 부모를 기다려야 한다. 201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진귀한 문명세계를 누리며 자라고 있지만 예측할 수 없는 미래는 더없이 막막하게 다가올 뿐이다.

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인생의 5대 난관인 ‘학업’, ‘결혼’, ‘군대’, ‘직업’, ‘육아’에 따라 뒤섞어볼 것이다. 누구라고 더 쉬울 것 없었던 각자의 난세살이를 잠시나마 여유롭게 구경해 보자. 이것저것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을지 모른다. 어쩌면 위로를 던질 여유까지 생길지 모른다.

 
아버지는 짜장면이 좋다고 하셨다 (1)
작성일 : 18-12-31 02:19     조회 : 158     추천 : 0     분량 : 6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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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는 짜장면이 좋다고 하셨다 (1)

 

 어린 시절, 아빠와의 추억은 별로 없다. 그래서 더욱 선명하게 떠오른다. 아침마다 아빠에게 형식적으로 인사하고 저녁이나 늦은 밤에 퇴근을 반기고 자기 전 인사하는 것. 늘 그 패턴이 반복되는 정도였다. 일시적인 마주침이 익숙해서인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적다는 것이 그다지 서운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인쇄는 그 놈의 ‘변수’란 것이 언제 나타날지 몰라 늘 회사에 매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어린 시절에도 아빠를 이해했다. 원래 그런 거구나 했다. 그래서인가, 애초부터 아빠에게 놀아달라고 조르지도 않았다. 사실 출근하는 아빠의 표정을 보면 그런 말이 안 나왔다. 아무리 어려도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그래도 아빠는 토요일에 출근할 때면 조금 다른 표정을 보이셨다. 조금 일찍 퇴근하는데다가 내일은 쉴 수 있다는 마음에 들뜨셨던 모양이다. 물론 나중에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웬만하면 굳은 표정으로 출근하던 아빠도 토요일만큼은 농담까지 하며 여유롭게 출근하셨다. 물론 아빠에게는 유쾌했던 그 농담이 엄마에게는 헛소리였을 뿐이지만. 당시 아빠의 농담 패턴은 거의 정해져 있어서 아직까지도 기억한다.

 

 “토요일이네. 우리나라도 주5일제 시작하면 진짜 좋겠는데.”

 “오호, 토요일! 미국은 벌써부터 주5일제라던데. 부럽다!”

 “드디어 토요일이구나. 이러다가 우리나라도 주5일제 되는 거 아니야?”

 

 삼십대 초반이었던 아빠는 그렇게 토요일 아침마다 주5일제 타령을 하셨다. 이십대 초반이었던 엄마는 아저씨 같은 농담 좀 그만 하라며, 아니 헛소리 좀 집어치우라며 등을 떠미셨다.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주5일제는 무슨…….”

 “아니야. 중국도 곧 주5일제 한다고 그러고. 우리나라에도 분명 그럴 때가 온다니까. 내가 마흔 살 되기 전엔 올 것 같은데?”

 “당신이 마흔 살 되기 전에 그런 날이 오면 내가 만 원을 준다. 만 원을!”

 

 그렇게 조금은 흥분된 토요일을 보내셨던 아빠는 일요일에라도 나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셨다. 교회에 다녀온 후, 남은 그 오후 시간이 아빠와 내가 보낼 수 있는 유일한 시간대였다.

 물론 매주 그 시간대를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6일 내내 일하고 일요일 오전에 교회에 가서 2시 즈음 집에 돌아오고 다시 저녁 예배를 드리러 6시 반에 다시 집에서 나가는 것이 패턴이다. 아빠에게 주어진 시간은 딱 4시간 반이었다. 하루에 쉴 수 있는 시간이 아니라, 일주일 전체에서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맘 편히 연속으로 쉴 수 있는 시간이 4시간 반이라는 말이다. 아빠는 최대한 그 시간만큼은 나와 함께하려고 하셨지만 너무 피곤한 주간에는 그 시간에도 엄마의 잔소리를 뒤로 하고 낮잠을 주무셨다. 거기에다가 어떤 주간은 내가 친구들과 노느라 아빠와 보낼 시간을 스스로 포기한 적도 있었다. 결국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아빠와 일요일 오후 시간을 함께 보냈다.

 아빠가 낮잠을 주무실 때면 보이지 않는 갈등 기류가 형성되었다. 엄마는 낮잠 자는 아빠에게 서운하셨고, 아빠는 그것을 서운해 하는 엄마가 서운하셨다. 엄마에게는 아빠가 독박육아를 시키는 못난 남편으로 보였고, 아빠에게는 엄마가 쉼 없이 일하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못난 아내로 보였다. 평소에는 서로를 이해한다지만 그 순간, 특히 일요일 오후 2시에서 6시 반 사이만큼은 서로가 불만이었다.

 아빠와 함께할 때면 단 둘이 외식할 수 있었다. 엄마에게 휴식 시간을 준다는 차원에서 마련된 시간이자, 아빠와 내가 함께할 유일한 긴 시간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 시간은 우리 가족에게 더없이 특별했다.

 

 세 살 즈음, 그렇게 시간을 내준 아빠 덕에 특별한 요리를 맛보게 되었다. 이전까지 엄마로부터 공급받던 심심한 음식치고는 꽤 훌륭한 요리였다. 어설프게 말을 하기 시작할 때라, 그 요리에 대한 정체를 물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아빠, 이게 모야?”

 “짜장면이란 건데, 어때?”

 “마시써!”

 “아빠가 회사 사람들한테 물어봤는데 이거 사주면 아이들이 정말 좋아한다더라고.”

 “마시써!”

 

 그때 나는 처음으로 면 요리를 영접하였다. 밥알과는 다른 그 식감이 세 살 아이에게도 황홀하게 다가왔다. 자극적인 짜장 특유의 양념보단 면발에 대한 매력이 특별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아마 칼국수나 라면이었어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규민아. 혹시 짜지는 않니?”

 “응?”

 “엄마가 이거 먹었다고 하면 싫어할 수도 있어. 좀 짜니까 걱정할 수도 있어. 그러니까 말하면 안 돼.”

 “응.”

 

 ‘짜다’는 말의 의미가 뭔지 그때는 잘 몰랐지만, 일단 엄마에게는 함구하기로 했다. 그 정도는 어려울 일도 아니었으니. 사실 그걸 표현할 수 있을 정도의 언어실력도 없었다. 아빠는 내 언어실력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 인지, 그렇게 괜한 걱정을 하셨다. 아무튼 아빠는 짜장면을 먹으면서도, 간이 조금 센 음식을 세 살 박이에게 먹였다고 엄마로부터 한 소리를 듣지는 않을지 염려하셨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나는 짜장면을 기대했다. 그러나 아빠가 낮잠을 주무시느라 먹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다시 일주일 후, 역시나 짜장면을 기대했지만 그때 하필 옆집 소녀 현진이가 찾아와 먹을 수 없었다. 다시 일주일 후, 드디어 짜장면을 먹을 기회가 찾아왔다. 교회에 다녀온 후 두 시간 정도 놀다가 5시 즈음 아빠가 나를 번쩍 안고 밖으로 나가셨다. 그러면서 물어보셨다.

 

 “규민아, 오늘 뭐 먹을까?”

 

 조금 당황스러웠다. 당연히 짜장면 아닌가? 짜장면 먹으러 나가는 거 아닌가? 굳이 안 물어도 되는 것을 묻는 아빠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대답을 했다. 그 나이대에는 하기 힘든 꽤 어려운 발음이라 부담도 되었지만, 그래도 말을 꺼내야 되겠다 싶었다. 아빠가 알아서 짜장면 집으로 데려갔으면 굳이 이 고생을 할 필요가 없는데. 혀를 꼬아가며 쌍지읒 발음을 하려니 이 고생을 시키는 아빠가 조금은 원망스러웠다.

 마침 저 앞에 짜장면을 파는 곳이 보였다. 그 집이었다. 그때 그 집이었다. 나는 굳이 발음을 굴려 짜장면을 먹겠다고 말할 필요 없이 손으로 그곳을 가리켰다. 아빠가 알았다는 듯 대답하셨다.

 

 “짜장면?”

 

 진작 그럴 것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짜장면 먹고 싶어? 저번에 먹은 짜장면이 맛있었구나!”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도 짜장면 정말 좋아하는데.”

 

 사실 그때 아빠의 취향은 중요하지 않았다. 일단 나는 말이 길어지지 않기만을 바랐다. 일단 안으로 들어갔으면 했다. 그런 차원에서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들어가기나 하라는 뜻이었다.

 아빠는 알겠다며 그날 짜장면을 사주셨다. 아빠는 삼 주 전에 그러셨던 것처럼 짜장면 곱빼기를 시키셨다. 물론 곱빼기의 개념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3년 후지만, 곱빼기란 용어가 독특해서 기억이 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빠가 곱빼기를 시키신 이유는 세 살 난 아들과 남기지 않고 먹기에는 그만한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가난한 형편이 아니라 한 그릇씩 시킬 수도 있었지만 그러면 짜장면이 남게 된다. 아직 짜장면 입문단계인 나는 한 그릇을 다 먹기 어려울 테니, 아빠는 차라리 곱빼기를 시켜 3분의 2 정도를 드시고 나머지 3분의 1을 내게 주려고 계산하셨던 것이다. 정말 합리적인 판단이다.

 

 그때부터 나는 격주 간격으로 짜장면을 먹었다. 아빠와 일요일을 함께할 기회가 2주에 한 번은 생겨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몇 달 후 짜장면이 완전히 질려버리기 전까지는 그렇게 매번 짜장면만 먹었다.

 

 일주일에 한 번, 혹은 이, 삼주에 한 번 찾아오는 그 추억이 나에게는 큰 의미를 부여했다. 그 의미가 아빠 때문인지 짜장면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특별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오죽했으면 세계사 시간, 양자강 문명(양쯔강 문명)이란 용어를 처음 접할 때 괜히 미소가 지어지기까지 했다. 참고로 우리 동네에 있던 그 중국집 상호가 ‘양자강’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특별했던 추억들이 초등학생이 되고부터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빠가 아니라 내가 약속을 어겼다. 아무래도 초등학생이 되고나니 주말마다 친구들과 노는 게 더 좋았다. 일요일 오후에는 교회 친구들이나 동네 친구들과 주로 시간을 보냈고, 자연스럽게 아빠와의 고정 약속도 무의미해져갔다.

 이전에는 일요일에 찾아오는 그 시간 때문에 아빠와의 관계가 짜장면 면발만큼이나 끈끈했는데, 그 시간이 사라지자 아빠와 나 사이는 멀어져갔다. 일요일에 그런 시간을 못 가진다고 평일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결국 아빠와 함께할 시간이 모두 사라진 셈이다. 저녁을 같이 먹는 기회가 일주일에 두 세 번은 있지만, 그야말로 같은 공간에 앉아 식사할 뿐, ‘함께’하는 거라고 할 순 없었다.

 거리가 멀어지니 아빠에 대한 서운함도 틈틈이 생겼다. 초등학교 4학년 즈음부터 그랬던 것 같다. 일요일 그 약속을 어긴 것은 나였지만 어찌되었든 아빠는 나와 놀아주지 않았다. 그런 아빠가 못내 원망스러웠다. 독박육아를 하던 엄마가 아빠를 원망했던 그 감정이 내게도 찾아온 것이다. 똑같은 부모인데 엄마에 대한 마음과 아빠에 대한 마음이 점점 달라졌다. 엄마에겐 왠지 고마운데 아빠는 그렇지 않았다. 어느 새 앨범에는 엄마와 찍은 사진만 가득해져갔고 아빠에게는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지게 되었다.

 

 어느 덧 나는 중학생이 되었고, 또 고등학생이 되었다. 중고등학교 때는 엄마와도 어색할 때라 아빠와의 거리감이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저마다의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고 함께할 수 있는 기회는 더욱 적어졌다.

 

 2006년 1월, 드디어 그 날이 찾아왔다. 아빠가 손꼽아 기다리던 주5일 근무제……. 2004년부터 시행된 주5일 근무제가 드디어 100명 이상 민간기업에도 적용되었다. 이말인즉슨, 아빠도 주5일 근무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마흔 즈음에 찾아올 거라고 예상하던 아빠였지만, 결국은 쉿 셋이 되어서야 찾아왔다. 아마도 아빠와 엄마는 이십여 년 전 했던 그 ‘내기’를 서로 기억하지 못하신 듯 했다. 의미 없이 주고받은 대화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행여 기억한대도 아무 의미 없다. 결과적으로는 두 분 다 틀리셨으니까. 행여 아빠가 우겨서 그 돈을 내놓으라고 해도 엄마 입장에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당시 만 원은 꽤 큰돈이었지만, 이십 년 사이 물가가 한참 올라 이제 만 원으로는 두 명이서 식사하기도 힘들 정도가 되었다.

 

 어찌되었든 주5일 근무제는 아빠에게 가족과 함께할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주5일 근무제가 100명 이상 민간기업에서 시행되던 그 날, 나는 군대에서 눈을 쓸고 있었다. 하늘이 주신 축복이라 쓰고 쓰레기라 읽는 그 눈을 아주 열심히 쓸고 있었다(참고로 그 다음 해, 50명 이상 민간기업에서 주5일제가 시행되던 그 첫날에도 나는 군대에서 눈을 쓸었다. 상병이었지만 폭설 앞에 열외는 없었다).

 

 그렇게 세상이 바뀌는 사이, 아빠와의 사이는 서먹한 것이 당연할 만큼 어색해져갔다. 어색한 것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아빠와 나 사이는 굳어졌다. 그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친구들도 다들 그렇게 산다고 했다. 그러니 이게 정상인가 싶었다. 어쩌다 아빠와 유달리 친한 친구들을 보면 그 모습이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졌다.

 아빠와의 관계에 문제의식을 못 느낀 것은 정말로 아빠와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친하게 지내지 않았으니 갈등 자체가 없었다. 기본적인 대화, 형식적인 대화, 필요시 정보를 교환하는 대화 정도를 할 정도면 꽤 잘 지내는 게 아닌가?

 그래도 나에게는 짜장면에 얽힌 깊은 추억까지 있어서 그런지, 친구들에 비해서는 아빠라는 존재가 조금은 더 의미 있게 느껴졌다. 특별한 갈등 없는 관계에 과거의 추억 한 스푼. 이 정도면 꽤 괜찮은 부자관계라 생각했다.

 

 한편 아빠 때문인지 짜장면 때문인지 모를 그 추억의 어린 시절, 짜장면에 대한 남다른 감격이 군 입대와 동시에 다시 소환되었다. 그곳에서는 대수롭지 않은 일도 감격스러운 추억들로 포장 된다지만, 짜장면에 대한 기억은 더 간절하게 찾아왔다. 아빠와의 추억 때문인지, 짜장면 자체의 맛 때문인지, 군대라는 공간 때문인지는 아직도 알 수 없다.

 그런 간절함 때문에 백일 휴가 날, 부대를 나서는 내내 짜장면을 생각했다. 엄마가 무엇을 먹고 싶냐고 물으신다면, 짜장면을 먹겠노라고 무조건 대답하려 했다. 사실 짜장면에 대한 간절함이 고조된 것은 임병장과 고병장이 담벼락에서 몰래 짜장을 시켜먹은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옛 추억의 짜장면이 간절해진 마당에 그 두 양반이 불을 지펴놓은 셈이다.

 

 부대 밖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엄마에게 공중전화를 걸었다. 대뜸 휴가 기간 첫 식사로 짜장면을 먹겠다고 했다. 엄마는 약간 당황하셨지만 군대 간 아들의 소원이니 무조건 들어주겠다고 하셨다.

 그렇게 휴가 첫 날, 첫 식사를 하려고 중국집에 갔다. 양자강이었다. 세 살 즈음에 간 이후 처음 오게 된 중국집이다. 물론 친구들과 동네에서 짜장면을 먹은 적이 몇 번 있지만, 양자강이 아닌, 다른 중국집이었다.

 

 아빠는 일 때문에 조금 늦게 도착하신다고 했다. 미리 시켜놓으면 그 사이 도착하실 수 있을 거라고 하시니, 근처에 오신 것 같았다. 엄마와 먼저 중국집 입구에 들어서는 섰다. 그러자 사장님이 엄마를 보더니 반가워하며 방에서 나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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