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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라이트노벨
우리는 저마다 시대를 잘못 만났다(부제: 난세살이)
작가 : 박은혜
작품등록일 : 2018.12.31

‘시집살이.’ 며느리들의 가슴을 철정 내려앉게 하는 말이다. 하지만 정말 며느리만 힘들까? 자신도 겪어온 며느리 시절을 잘 아는 시어머니가 왜 며느리를 괴롭힐까? 어쩌면 그 시어머니는 나름대로 잘 해보려는 게 아닐까? 언젠가 시어머니가 될 며느리는 자신의 며느리를 어떤 태도로 대할까? 어쩌면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하던 그 시어머니와 똑같은 모습이 되어 있진 않을까?

“네가 뭘 안다고 끼어들어?!” 사건 당사자들이 그 일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다. 경험해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하지만 때로는 경험했기 때문에 모를 수도 있다. 한 걸음 물러나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이해관계를 떠나 생각할 수 없다면, 그것을 날 위한 싸움에 지나지 않는다. 서로 자신만을 위해 싸우니 해결도 있을 수 없다.

만연해 있는 고부갈등을 제3자의 시각에서 본다면, 끝없이 맞물려 있는 이 복잡한 문제의 원인이 어느 한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비단 시어머니와 며느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 마찬가지다.

우리는 저마다 시대를 잘못 만났다. 나 한 사람만이 아니라 그분도, 그도, 그녀도, 그 아이도 다 잘못 만났다. 그러나 그 사실을 잘 모른다. 당사자인 만큼,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 같고 상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사람 같다.

‘힘들어봤자 나보다 더 힘들까.’
‘내 주제에 지금 누굴 위로하고 있나.’

누군가를 위로하는 게 사치가 된 세상. 하지만 위로할 수 있어야 위로받을 수 있다. 그 사람이 시대를 잘못 타고났음을 알게 된다면, 그 사람도 나처럼 난세(亂世)살이를 하고 있음을 이해한다면, 조금은 불쌍히 여기며 감싸 안을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어쩌면 상대를 시대의 피해자로 바라볼 수만 있어도 조금은 달라 보일 것이다. 그 사람도 나처럼 힘겹게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 자체만으로도 꽤 대단한 사람, 꽤 괜찮은 사람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런 소소한 소망 하나를 던져주는 것이 이 책에 나올 인물들의 역할이다.

이 소설은 올해 서른셋이 된 주인공(나)이 세 살 즈음에 가지고 있었던 어렴풋하게 남아있는, 하지만 지울 수 없는 강력했던 몇 가지 기억을 토대로 전개된다. 그리고 올해, 세 살 즈음이 된 사람들과의 이야기들을 동시에 섞어가며 그들을 지배한 각각의 시대를 조금씩이나마 마주하게 만든다.

그러고 보면, 올해 ‘세 살 즈음’이 된 등장인물들의 스펙은 저마다 찬란하게 서글프다.

- 일흔 세 살 즈음에
올해 일흔 세 살이 된 고모는 1946년에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비상한 머리를 써보지도 못한 채 국졸로 학업을 마쳐야 했다. 194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독일광부로 파견나간 아버지를 잃어야 했고 늦게나마 실현하려던 꿈도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포기해야 했으며 194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애틋한 마음 한번 품어볼 기회 없이 원치 않는 결혼을 치러버려야 했다. 그리고 여생을 딸과 손녀를 위해 헌납해야 했다.

- 예순 세 살 즈음에
올해 예순 세 살이 된 아빠는 195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아주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잃어야 했고, 독재정권과 군사정권을 거치며 우울한 대학시절을 맛보아야 했으며, 그토록 가혹했던 70년대의 군대를 경험해야 했다. 195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직장도, 집도 쉽게 구했지만 평생을 가족을 위한 ATM기계로 살아야 했고 퇴직 시기에는 첨단문명과 벗할 수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외면당하기 시작했다.

- 쉰 세 살 즈음에
올해 쉰 세 살이 된 엄마는 196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끝까지 대학에 가겠다고 고집을 피웠지만 대학을 포기해야 했으며 남편이 번 돈으로 편히 산다는 시선 속에 무시를 덤으로 받으며 살아왔다. 거기에 196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맞벌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시대에 노년기를 맞아야 했고 결국 황혼육아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 마흔 세 살 즈음에
올해 마흔 세 살이 된 외삼촌은 1976년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군대를 다녀오자마자 IMF라는 난국에 부딪혔다. 1976년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어렵게 워크맨 사업을 시작했지만 MP3의 등장으로 사업을 시원하게 말아 드셨고, 시대의 흐름을 간파하여 얼른 MP3사업으로 전향했지만 스마트폰 시대가 도래하면서 또 다시 사업을 접어야만 했다.

- 서른세 살 즈음에
올해 서른세 살이 된 나는 1986년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군대에 다녀오자마자 미국발 경제위기와 마주했다. 취업난은 극도로 심각해진 상태였고 뭐라도 좋으니 해 보자며 원치 않는 직장에 들어갔다. 1986년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미친 듯이 벌어도 내 집 마련의 꿈은 현실이 될 수 없는 이상일 뿐이다. 친구들은 “그 나이 되도록 자리도 못 잡냐?”는 핀잔에 이미 녹초가 되어 있다.

- 스물세 살 즈음에
올해 스물세 살이 된 조카(고모의 손녀) 유진이는 1996년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IMF와 함께 유아기 시절을 보냈다. 199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개천에서 용 날 수 있다는 할머니(나의 고모) 말을 믿고 열심히 공부했지만 더 이상 개천에서 용 나는 것은 어려운 시대임을 알고 꿈을 하나 둘 접고 있다.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포기하는 건데 욕심이 많아 결혼을 안 하고 있다는 핀잔까지 덤으로 들으며 살아간다.

- 열세 살 즈음에
올해 열세 살이 된 사촌동생(외삼촌의 아들) 영우는 2006년에 태어난 우등생이다. 하지만 임대아파트 스펙 덕에 친구조차 마음대로 사귈 수가 없다. 200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곧 다가올 이십대를 4차산업혁명 시대와 함께 맞이하게 되었고, 그동안 죽어라 공부한 외국어도 다 쓸데없다는 사실을 알아가고 있다. 꿈도 함부로 꿀 수 없는 그에게 어른들은 꿈이 없다며 혀를 찬다.

- 세 살 즈음에
올해 세 살이 된 나의 아들 우림이는 201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텅텅 빈 어린이집에서 7시 반까지 부모를 기다려야 한다. 201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진귀한 문명세계를 누리며 자라고 있지만 예측할 수 없는 미래는 더없이 막막하게 다가올 뿐이다.

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인생의 5대 난관인 ‘학업’, ‘결혼’, ‘군대’, ‘직업’, ‘육아’에 따라 뒤섞어볼 것이다. 누구라고 더 쉬울 것 없었던 각자의 난세살이를 잠시나마 여유롭게 구경해 보자. 이것저것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을지 모른다. 어쩌면 위로를 던질 여유까지 생길지 모른다.

 
둘리와 크롱에겐 무엇보다 내 집이 필요했다 (1)
작성일 : 18-12-31 02:17     조회 : 158     추천 : 0     분량 : 8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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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섯 번째 관문. 우리가 그 시대에 만났던 육아

 

 # 둘리와 크롱에겐 무엇보다 내 집이 필요했다 (1)

 

 ‘830422-1185600’

 

 둘리의 주민등록번호다. 2003년에 부천시가 둘리의 생일을 기념하여 부여했다는 그 번호다. 처음 소식을 듣고 황당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동안 둘리가 우리에게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명예시민이 될 만하다.

 

 세 살 즈음, 이제 막 만화에 입문하던 나에게 둘리는 꽤 멋진 친구였다. 나보다 연배가 한참 위라(3년 위) ‘친구’라고 하기에는 미안한 감도 있지만, 둘리는 같은 사나이로서 매력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아직 세상이 두렵기만 한 나에게 당당하기 그지없었던 둘리는 이유 없이 멋있어보였다. 귀엽기만 한 얼굴과 달리 그의 당찬 기백은 실로 놀라웠다. 매번 고길동에게 대항하려고 달려드는 포부가 유아기인 나를 설레게 만들었다. 괜히 공룡인 게 아니었다.

 

 하지만 둘리에 대한 동경은 기억의 오류일 수도 있다. 동경했기 때문이 아니라, 동정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린 나에게 고길동에게 얹혀사는 세입자 둘리는 못내 아쉬웠다. 세입자라는 용어를 알 턱이 없지만, 그럼에도 남의 집에서 눈치 보며 산다는 게 처량해 보였다. 내 집을 갖지 못하는 것만큼 비참한 게 또 있을까. 내 집, 정확히 말하면 아빠 집에서 당당하게 주인으로 살아가는 입장에서 둘리가 그저 딱했다. 어쩌면 그런 동정의 마음이 있었기에 둘리의 행동이 대부분 무용담으로 승화되었던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로부터 삽 십 년이 지난 지금, 세 살이 된 아들 우림이는 유아 캐릭터계의 절대강자인 뽀로로에 심취해있다. 10년이 넘게 독재체제를 지켜온 뽀로로에 항거하는 캐릭터가 많이 등장했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뽀로로의 위상은 여전하다. 저런 걸 왜 보나 싶으면서도 어느 새 나 역시 그 늪에 빨려가는 게 현실이다. 무난한 듯 귀엽고, 뻔한 듯 다양해 보이는 캐릭터들이 꽤 끌릴만 했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밟히는 캐릭터가 있다. 그는 둘리와 흡사해 보였다. 실제로 같은 종이었다. 처음엔 악어인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공룡이었다. 바로 크롱이다. 그런데 둘리와 크롱은 공룡이라는 사실 외에도 공통점이 하나 더 있었다. 크롱 역시 세입자 신분이라는 점이다. 크롱 역시 둘리처럼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지 못한 안타까운 캐릭터였다.

 크롱은 뽀로로 집에 얹혀산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 때면 늘 우선권은 뽀로로에게 빼앗긴다. 집 주인 앞에서는 별 수 없는 노릇이다. 물론 평등하게 지내는 듯 하지만 집 주인의 권한 앞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미묘한 상황이 가끔씩은 드러난다. 물론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둘리와 크롱의 신세를 안타까워하다 보면 아차 싶다. 내가 지금 누굴 걱정하고 있나. 나 역시 세입자의 신분이다. 둘리를 볼 때만 해도 아빠가 마련한 집에서 주인으로 살 수 있었지만, 결혼과 더불어 새로운 삶이 시작되면서 나는 세입자 신분으로 전락했다. 분명 둘리처럼 살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어느 새 나는 둘리, 크롱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었다. 사실 세입자라고 해서 자존심 상할 건 없다. 정말 그런 것에는 개의치 않는다. 다만 매달 나가는 월세는 몹시도 두렵다. 그렇다고 해서 전세의 꿈을 함부로 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찾는 것도 어렵고 찾았다고 해도 보증금을 보면 여전히 멈칫한다.

 

 어떤 시민단체에서 알아본 결과, 1988년 노동자 평균 임금은 월 36만 원이었고, 2016년에는 월 241만 원이었다. 30년간 6배, 월 205만원(연 2,465만 원) 상승했다. 그러나 같은 기간 강남아파트는 11억 원, 강북은 5억 원 상승했다. 노동자 임금이 7배 오르는 동안 아파트값은 강남 264배, 강북 126배 오른 셈이다. 이게 현실이다.

 이런 현실이 가져다 준 최고의 비극은 육아 문제다. 이전에는 아빠만 벌어도, 혹은 둘 중 하나만 벌어도 최소한 발 디딜 곳을 마련하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둘 다 나가야 한다. 아이를 낳은 여성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다. 더 이상 자아실현을 위해 아이를 두고 일하러 나가는 엄마는 없다. 의식주라는 기본을 위해, 그중에서도 ‘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마다 일터를 향한다. 가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에 아이는 부모와 떨어져 있게 되었고, 아이를 위해 나간다지만 정작 그 부모들은 죄인이 되어 버렸다.

 

 이런 위기가 본격적으로 나타난 시기에 태어난 아이가 사촌 영우다. 영우가 태어날 당시만 해도 괜찮았다. 외삼촌 사업이 잘 풀릴 때라, 대리점 윗 층에 마련한 방 세 칸짜리 집에서 유복하게 자랐다. 물론 그 유복이란 것은 상대적이지만, 어찌되었든 서울 한 복판에 내 집이 있다는 것은 잘 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스마트폰 시대의 개막과 함께 외삼촌의 사업은 무너졌고 그 집도 어느 새 사라졌다. 물론 건물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외삼촌과는 상관없는 남의 집이 되었다.

 방 두 칸짜리 빌라에서 월세 생활을 시작할 즈음 영우는 6살이었다. 영어 유치원 비용이 부담스러워 외삼촌과 외숙모는 일단 유치원을 그만 두기로 했다. 이제라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싶었지만 유치원 자리가 그리 쉽게 날 리 없었다.

 

 마침 작은 직장에 들어가게 된 외삼촌, 그리고 유치원을 그만두게 된 영우. 이제 남은 건 외숙모다. 외숙모의 결정만 남았다.

 본래 외숙모는 어린이집 보육교사였다. 유아교육과를 수석으로 들어가 수석으로 졸업한 외숙모는 유아교육학을 더 공부해서 교수가 되고 싶었다. 사실 그 때문에 보육교사를 시작한 것이기도 하다. 교수가 되려면 의무적으로 몇 년 간 보육교사 경력을 쌓아야 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근무하던 어린이집에 영우가 다섯 살 때까지 다닐 수 있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일도 하고 아이도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유치원에 못 다니게 된 영우를 다른 데 맡기고 계속 근무하긴 어려웠다. 시댁이나 친정에 맡기고 일을 더 하고 싶긴 했지만, 외숙모는 중대한 결심을 했다. 영우를 돌보는 게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그것이 엄마의 도리라고 여겼다. 외삼촌도 동의했다. 외삼촌의 적은 월급이 아쉽긴 하지만, 세 식구가 꾸역꾸역 사는 데는 지장 없었기 때문에 최대한 알뜰하게 잘 살아보자고 결심했다. 지혜롭고 알뜰한 외숙모였기에 조금만 노력하면 문제없이 지낼 수 있다고 믿었다. 무엇보다 이것이 영우를 위한 일이라 믿었다. 누구도 외숙모의 결정에 반대하지 않았고 진심을 담아 격려해 주었다.

 

 외숙모는 영우에게 장난감을 많이 사줄 수도 없었고, 입장료가 비싼 테마파크에 데리고 다닐 수도 없었다. 하지만 보육교사 출신답게 알찬 하루하루를 보냈다. 성심껏 놀아주고 돌봐주며 가르쳐 주었다. 완벽한 어머니의 모습 그 이상이었다. 영우는 공부에도 재능을 보였다. 그 시기에 판별할 수 없는 영역이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지식을 습득하는 속도도 빨랐다. 책을 많이 읽어서 인지 상식도 많았다. 모르긴 몰라도 학교에 들어가면 충분히 우등생이 될 법한 상황이었다.

 영우의 성장을 보며 외숙모는 안도했다. 돈으로 뭔가를 해 주지는 못하지만 열심히 돌보고 가르친 게 효과를 보는 구나 싶었다. 비록 유치원은 못 다녔지만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낼 거라 믿었다. 외숙모는 보육교사로서 아이들을 많이 지켜봐왔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었다. 단순히 자기 아들이라는 이유로 과대평가한 건 아니란 말이다.

 

 어느덧 영우가 8살이 되었다. 영우가 배정된 초등학교에는 다양한 아이들이 모였다. 다양한 성격, 다양한 재능을 가진 아이들이 아니라, 다양한 주거형태에 사는 아이들이 모였다. 비싼 아파트, 비싸지 않은 아파트, 임대 아파트, 빌라, 주택 등 다양한 집에 사는 아이들이 모이는 곳이 학교였다.

 그 때문인지 외숙모도 걱정하셨다. 사는 곳에 따라 차별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외숙모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영우를 두고 이런 저런 말을 했다. 요새는 좋은 아파트에 안 살면 아이들이 왕따 당하고 차별 받을 수도 있다고. 외숙모는 괴담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정도 일리 있는 말이라고 인정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영우의 실력을 잘 알기 때문이다. 공부만 잘하면 만사형통하리라는 믿음이 외숙모를 충분히 안심시켜주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외숙모는 그렇게 살아왔다. 좋은 집에서 살지 않았고 비교적 가난한 형편이었지만 학창시절 인기가 꽤 좋았다.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아이들 사이에서도 환영을 받는 그런 아이였다. 우등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것이 가능했다. 한 번도 친구들과의 놀이에서 배제된 적이 없었고, 편을 짜서 놀 일이 있으면 우선순위로 불려졌다. 시험 때면 엄마들이 초대해서 공부 좀 도와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간식도 잔뜩 챙겨주었고 나갈 때면 아쉬운 눈빛으로 다음에도 또 놀러오라고 사정할 정도였다. 그 어머니들은 자기 아이가 공부 잘하는 아이랑 놀아야 안심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외숙모가 월세집에서 사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문제 삼지 않았다. 일단 자기 아이가 우등생과 다니는 게 더 중요했다.

 그러니 외숙모 입장에서 영우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주변 엄마들이 집 때문에 차별 당할 수 있다고 할 때마다 외숙모는 속으로 비웃었다.

 

 ‘꼭 공부 못하는 애들이 그런 거 내세우지.’

 

 그런 생각을 할 때면, 집은 부자인데 공부를 못해 아이들로부터 무시당하던 정선이가 떠올렸다. 공부에 취미가 없던 정선이는 매번 학교에서 선생님들로부터 무시당했고 외숙모와 비교를 당해야 했다. 형편이 좋은 데도 공부를 못하는 것은 머리가 정말 나쁘거나 노력을 안 하는 것이라며 혼난 적도 많았다. 아이들도 그런 정선이를 우습게 보았다. 심지어 정선이는 부모로부터도 비교를 당했다. 그 덕에 외숙모는 정선이 집에도 자주 불려다녔다. 제발 정선이랑 친하게 지내달라는 하소연까지 할 정도였고, 갈 때마다 무슨 고액 과외선생 오신 양 좋은 음식을 이리 저리 내놓곤 했다.

 

 하지만 외숙모의 기대와 달리, 영우는 입학 때부터 예상치 못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말이 맞았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그들의 말이 현실이었고 실제였다. 이미 학교에서는 공부보다 중요한 게 집의 종류였고 집안 평수였다. 80점을 못 넘는다고 해도 괜찮은 아파트 84m2(실평수 30평대)에 살면 그 친구는 어느 정도 대우를 받았다. 물론 임대아파트가 아니라는 조건으로.

 외숙모의 예상대로 영우는 공부를 잘했지만, 주변 사람들의 예상대로 보이지 않는 차별도 받아야했다.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이 어울릴 땐 자연스럽게 배제되었고 그만큼 자유롭게 친구를 사귀기 어려웠다. 그래도 외숙모의 탁월한 교육 덕에 자존감이 높았던 영우는 이상한 시선 속에도 휘둘리지는 않았다. 자신이 왜 이런 대우를 받는지 어느 정도 알았지만 외숙모에게 티를 내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자신도 언젠가는 아파트에 살게 될 거라 믿었기 때문에 그때까지만 잘 견디자고 생각했다.

 

 한편, 외숙모는 영우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후에도 일을 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밤새 야근해도 견딜 수 있을 만큼 일이 하고 싶었지만, 여전히 영우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저학년이라 일찍 하교하다 보니 영우를 봐줄 사람이 필요했고, 그 역할은 자신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부모처럼 퇴근 때까지 이런 저런 학원에 보내면서 방과후 보육과 교육을 동시에 해결하고 싶진 않았다. 무엇보다 그렇게 돈을 쓰느니 그냥 자신이 돌보며 가르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외삼촌 가정에 복이 굴러 들어왔다. 그때는 2015년, 내가 신혼집 준비로 골머리를 앓았을 때였다. 어느 날, 외숙모로부터 전화가 왔다. 웬만해선 전화하지 않는 외숙모의 전화라 나는 이유를 직감했다.

 

 “규민아, 미안해. 우리는 붙었어.”

 “괜찮아요, 외숙모. 외숙모라도 된 게 어디예요. 저는 다른 데 더 알아보면 되죠.”

 “미안해서 전화하기도 좀 그렇더라. 그런데 언젠가는 알게 될 것 같아서. 그렇다고 영우 아빠가 미리 너에게 전화할 것 같진 않고. 그래서 나라도 이렇게 연락하게 되었어.”

 “아휴, 정말 전 괜찮다닌까요. 진짜 축하드려요.”

 

 누가 들으면 동시에 입사지원했는데, 한 명만 붙고 한 명은 떨어진 상황인 줄 알 것이다. 사실 이 통화는 나를 재끼고 홀로 LH국민임대아파트에 담청된 것을 미안해하는 숙모와의 통화였다. 솔직한 심정으로 외숙모의 전화를 받고 서운했다. 외숙모에 대한 감정은 아니지만, 어쩌면 내가 들어갈 수도 있을 자리에 경쟁자인 외숙모, 아니 외삼촌네 가족이 붙은 것 같아 조금은 섭섭했던 것 같다. 말로는 괜찮다고 하면서도 죄 없는 외숙모가 연신 미안해 할 정도면, 이미 내 목소리에 그 감정이 어느 정도는 섞여있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신혼집 마련을 위해 LH 입주자 모집 공고가 날 때마다 지원했다. 특히 매월 내는 비용이 현저하게 적은 국민임대에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국민임대면 30년까지 연장이 가능하다. 10년밖에 안 되고 매월 더 비싼 비용을 내야 하는 공공임대에 비해서는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친구들은 로또보다 어려운 게 국민임대아파트라며, 내가 지원서를 낼 때마다 절대 안 될 거라며 비웃었다. 심지어 주호조차 비웃을 때가 있었는데, 공무원 시험에 낙방한 설움을 나에게 퍼붓나 싶을 정도로 불쾌했다. 하지만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건 악담이 아니라 그저 현실을 직시하게 도와준 것이었음을.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던 국민임대아파트에 떨어지자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나는 이 나라 국민인데, 나를 위한 국민임대 자리 하나가 없다는 게 서러웠다. 외삼촌네는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니 상실감은 더 컸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하나도 틀릴 게 없었다.

 

 외숙모는 미안한 마음에 우리 가족을 초대해 식사를 대접했다. 국민임대아파트에 들어간 상황에서는 그렇게 해야만 했다. 한우 정도는 내 놓아도 아깝지 않을 상황이었다. 물론 축하 자리라고 하기보다는 나에 대한 위로에 더 가까웠다.

 결혼을 앞둔 아내 역시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나만큼이나 외삼촌네가 부러웠는지, 축하한다는 말도 두 번 이상 하지 못했다. 새로 들어갈 집에 대해 묻기보다는 그냥 영우 학교생활 같은 주변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겉도는 대화만 오고가다 보니 분위기도 썰렁했다. 혼과 동시에 아빠 집을 떠나야 하는 막막한 심정을 안고 있다 보니 이 자리가 편할 리 없었다. 분위기가 조금 어색한 것을 알아채셨는지 엄마는 외삼촌에게 굳이 안 해도 되는 질문을 하셨다.

 

 “야, 국민임대면 매달 들어가는 돈이 얼마지?”

 “한 이십만 원?”

 “정말? 거저네, 거저야. 진짜 축하한다.”

 

 분위기 전환용으로 물은 것인데 생각보다 낮은 임대료를 듣고 나니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마음의 소리가 입에서 나온 것이다. 엄마 역시 나의 집 문제로 함께 고민하던 터라 상당히 적은 액수에 부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셨던 모양이다. 아무리 다 같은 가족이라지만 동생보다는 아들에게 더 기울어져있는 엄마로서는 그러실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는 정말 부러우신지, 더 이상 집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셨다.

 

 몇 달이 지난 2016년 1월, 외삼촌 가족은 나라가 마련해 준 대궐 같은 새 집에 안착했다. 임대아파트라 뭔가 어설플 거라는 생각도 잠시, 인테리어부터가 고급 아파트와 다를 게 없었다. 고급 아파트에 안 살아봐서 잘은 모르지만, 비슷하게 느껴질 정도로 우아하고 세련되었다. 내가 어릴 적부터 살던 아빠의 오래된 아파트와는 차원이 달랐다.

 처음으로 임대아파트에 들어간 날 가장 행복했던 것은 영우였다. 말을 안해서 그렇지 영우는 작은 빌라에 살면서 남몰래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보이지 않는 차별을 잘 견디긴 했지만, 좋은 집에 사는 그들이 부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우연히 누군가의 집에 조별 숙제를 위해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자신의 집과는 전혀 다른 그 느낌이 괜히 좋았다고 한다.

 

 그런 영우가 드디어 아파트라는 곳에 오게 되었다. 상상만 하던 화이트톤의 아파트에 살게 된 게 믿겨지지 않았는지 연신 방방 뛰었다.

 영우는 새학기를 맞자마자 친구를 초대했다. 진환이었다. 이제 자신도 아파트에 살게 되었으니,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과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마침 새학기 시작과 더불어 새로 전학 온 친구가 있어 그 친구, 곧 진환이를 초대하기로 했다. 기존에 알던 친구들은(물론 친구라고 하기도 어렵지만) 이미 형성되어 있던 보이지 않는 장벽 때문에 선뜻 다가가지 못했지만, 전학 온 친구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이제 아파트로 이사도 왔겠다, 과거의 자기 신분을 모르는 아이도 전학왔겠다, 그 친구와 친하게 지내려고 마음먹었다.

 

 영우는 진환이에게 여전히 빛나는 자신의 방을 구경시켜주었고, 베란다도 구석까지 다 보여주었다. 새 집이라 다 좋아보였고 그것을 괜히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청소를 한 적이 없던 영우는 이사 간 후로는 열심히 자기 방을 청소했다. 영우는 그날 저녁 외숙모에게 물어보았다.

 

 “엄마, 다음에 또 불러도 돼? 진환이?”

 

 사실 영우는 엄마가 깔끔한 분인 것을 잘 알아서인지, 조금은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그날 놀러온 진환이와 신나게 놀다 보니 이전과는 다르게 집이 금방 어질러졌었다. 내심 영우는 그게 눈치가 보였었나 보다.

 외숙모는 간만에 어지러진 집 때문에 조금 힘들긴 했지만, 본래 아이들을 좋아했던 분이라 기꺼이 승낙했다. 더없이 행복해 하는 영우 모습에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허락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다음에는 간식도 잘 준비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당연히 괜찮지.”

 “진짜? 고마워. 엄마.”

 “다른 친구들도 불러도 돼.”

 “참, 나도 다음 주에 진환이네 놀러가기로 했는데 괜찮지? 수요일 오후에. 학교 끝나고 바로.”

 “응. 그럼.”

 

 다음 주 수요일 저녁이 되었다. 예정대로 진환이네에 다녀온 영우를 보자 외숙모는 무언가가 떠올랐다. 곧 놀러올 진환이를 위한 음식을 사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든 것이다. 저번에 불시에 찾아온 진환이에게 밥도 못 먹이고 보낸 게 이내 마음에 걸렸었다.

 

 “영우야, 진환이 데려온다며? 언제 올 거니?”

 “아, 아직 몰라. 엄마.”

 “그래? 오게 되면 미리 말해줘. 장 봐두게.”

 “응.”

 “꼭 말해줘. 저번처럼 불쑥 오게 하지 말고. 싫어서 그런 게 아니고 맛있는 거 해주려고 그런 거야. 알지?”

 “응. 근데 엄마.”“응?”

 “엄마, 휴거가 뭐야?”

 “휴거? 음……. 어떻게 설명해야 되지? 우리 다음 주에 교회학교 선생님한테 물어볼까? 아니면 목사님한테?”

 “뭐야? 빨리 알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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