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기막힌 아이디어 덕분에 아빠는 쉬게 되었다
아빠는 누구나 알만한 인쇄회사에 다니신다. 중소기업이지만 IMF 한파를 비껴나갈 만큼 잘 버텨온 그런 회사다. 그런 탄탄한 회사에서 아빠에게 남은 정년은 고작 2년이다. 고작이라는 말이 꽤 숭고해 보일 정도로 아빠는 잘 버티셨다. 부장이라는 직함이 잘 어울릴 만큼 회사에서 인정받고 계신다. 점심 때 아빠와 식사하려는 직원이 갈수록 줄어드는 것은 아빠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를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부장으로 승진한 12년 전부터 회사 사람들이 자신을 불편해한다고 느껴졌을 때 아빠는 역으로 그것을 즐기셨다. 사람들의 태도가 자신의 힘을 여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니까. 아빠는 모두가 불편해 할 만큼 높은 위치에 올랐다.
그 아버지의 아들은, 그러니까 나 한규민은 지금 벤처회사에 다닌다. 짐작했겠지만 작은 회사다. 물론 처음부터 여기에 오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큰 꿈을 안고 대학에 들어갔고 그 큰 꿈을 실현하기 위해 2학년을 마치자마자 입대했다.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고……. 후딱 다녀와야 남은 기간, 그 꿈을 위해 전력 질주할 수 있었다.
자랑스럽게 제대를 할 때 즈음, 나는 조금이나마 청년실업률이 낮아졌기를 기대했다. IMF가 몇 년 사이에 극복되었으니 청년실업률은 금방 회복될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제대하고 돌아왔을 무렵, 경제가 나아지기는커녕 미국발 금융위기로 더 휘청거렸다. 그때부턴 꿈이고 뭐고 없었다. 하고 싶은 일, 하기 싫은 일 가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일단 취직시켜준다면 무조건 들어가야 했다. 대학원에서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만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준비하는 여유는 부릴 수 없었다. 그나마 요즈음 청년들의 사정보다는 나아서인지, 당시 나는 몇 개월 간 알바 후 작은 회사에 취직할 수 있었다. 사실, 그마저도 아는 선배 덕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새로운 직장, 그러니까 큰 직장을 찾을 때까지 용돈 벌이나 할 계산이었다.
그렇게 해서 들어온 곳이 바로 이 회사다. 작은 회사이긴 하지만 전도유망한 회사다. 상장도 앞두고 있다. 두 칸짜리 사무실에서 출발한 회사가 여기까지 온 것은 앞으로도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현재 우리가 담당하는 일은 애플리케이션 개발이다. 서른 세 살의 나이에 팀장 직함을 달고, 오늘도 아이디어만이 살 길이라는 식상한 문구를 뇌 한 켠에 새긴 채로 일하고 있다. 팀장이라고 해도 팀원은 달랑 두 명뿐이지만 가능성을 믿고 열심히 달린다.
다시, 그 아들의 아버지, 그러니까 한의태 부장님은 교육기관에서 보급되는 인쇄물 업무를 관할하신다. 대표적인 것이 수첩 형태의 알림장이나 교사 다이어리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책 관련 인쇄 파트를 담당했지만, 그 파트에서는 엑셀을 잘해야 하는 것은 물론 엑셀을 잘 해석할 줄도 알아야 했기에 아빠로서는 무리였다. 그런 사연 끝에 아버지는 부장 직함만 유지하며 다른 부서로 이동되었다. 조금 쉽게 표현하자면, ‘좌천’되셨다. 다른 회사는 어떨지 모르지만, 이 인쇄회사에서는 책 인쇄 파트가 핵심이다. 거기서 밀려났다는 것은 아빠가 회사에 기여할 수 있는 바가 줄어들었음을 의미한다. 사실 처음 아빠가 들어갔을 때만 해도 수기로 자료를 정리했다. 명필에다, 문서 정리에도 능통하신 아빠에게 회사 사람들은 찬사를 보냈다. 그것이 아빠가 단시간에 인정받은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 쓸모없다. 젊은 직원들에게 아빠는 엑셀을 다룰 줄 모르는 한물 간 부장님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그 아버지의 아들, 그러니까 나 한규민 팀장은 몇 달 전 제대로 한 건 했다. 조금 더 편리한 교육기관용 알림장 애플리케이션을 기획한 것이다. 몇 년 전부터, 교육기관, 특히 보육기관에서는 학부모와 교사가 소통하기 위해 애플리케이션 알림장을 활용하곤 했다. 하지만 익숙함 때문인지 종이로 된 알림장 수첩을 선호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즉시 소통할 수 있는 점뿐만 아니라 편리함까지 더해진 알림장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했다.
아니나 다를까, 여러 보육기관에서 본격적으로 내가 개발한 애플리케이션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중대박을 쳤다. 대박이라고 하기에는 부끄럽고 중박이라고 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하는 수준이라고나 할까. 매우 좋았던 반응 앞에 괜히 머쓱해졌다. 반응이 좋길 바라긴 했지만 이 정도로 좋을 줄은 몰랐다. 겸손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정말로 의외였다. 그 틈을 타, 기존의 모바일 카드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앱들이 우리 회사 내에서 몇 건 더 개발되었다.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나에게 그 일은 직업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게 한 사건이었다. 신기하게도 그런 결과를 맞이했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난 분이 아빠였다. 아들 녀석도, 아내도, 엄마도 아니었다. 아플 땐 엄마가 떠오르고 좋은 곳에 가면 아내가 떠오르고 맛있는 걸 먹으면 아들이 떠오르는데, 웬일로 이번에는 아빠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뭔가 나도 아빠처럼 탄탄하게 자리를 잡아갈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늘 아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아빠에게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여들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그 일이 있고 난 후 아빠에게 한껏 자랑을 했을 때, 무뚝뚝한 아빠는 정말로 환하게 웃어주셨다.
한편 나의 아버지, 곧 한의태 부장님은 며칠 전, 정년을 2년 앞두고 일을 그만 두셨다. 명예퇴직이나 다름없었다. 정년퇴직의 예우를 다 받는다는 조건으로, 아주 명예롭게 퇴직하셨다. 20여 년 전 IMF 때도, 10여 년 전 미국발 경제위기 때도 자리를 지키셨던 분인데 예상치 못한 순간에 명예퇴직을 하게 되셨다. 사실 크게 손해날 일은 아니었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랬다. 그만큼 예우를 받는다고 하니……. 하지만 아빠에겐 아니었다. 아무리 정년퇴직의 예우를 다해 준대도, 아빠에게는 헛헛한 일이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자존심 때문에 아빠는 그저 아쉽다고 에둘러서 표현하셨다.
아빠의 퇴직 사유는 누구도 몰랐다. 요 1년 사이 교육기관용 알림장 애플리케이션이 호황을 이루면서 종이 알림장 인쇄량이 급격히 줄었기 때문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다. 나도 몰랐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정말 몰랐다.
그렇게 인쇄 분야의 매출 감소로 아빠의 부서 자체가 다른 부서와 병합되었고, 아빠는 그 틈에 그런 결정을 내리셨다. 회삿밥을 오래 드셔서, 어느 정도 눈치가 있으셨던 모양이다.
그동안 나는 아빠가 교육기관에 보급할 인쇄물 담당부서에서 일하는지도 몰랐다. 그냥 예전처럼 책 파트였을 거라고만 생각했다. 12년 전에 부서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나는 몰랐다. 물론 알았다고 해서 내 일을 포기할 수는 있는 건 아니다. 내가 안 해도 변하는 시대를 막을 순 없으니까. 노력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닭 못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그럼에도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복잡한 마음 때문에 요 며칠 간 이런 말만 되풀이했다.
“나 때문이 아닐 거야. 당연히 아닐 거야.”
“아닌가? 나 때문인가?”
“나 때문이라도 괜찮아. 평생 일만 하던 아빠가 나 때문에 쉴 수 있게 되었으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