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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라이트노벨
우리는 저마다 시대를 잘못 만났다(부제: 난세살이)
작가 : 박은혜
작품등록일 : 2018.12.31

‘시집살이.’ 며느리들의 가슴을 철정 내려앉게 하는 말이다. 하지만 정말 며느리만 힘들까? 자신도 겪어온 며느리 시절을 잘 아는 시어머니가 왜 며느리를 괴롭힐까? 어쩌면 그 시어머니는 나름대로 잘 해보려는 게 아닐까? 언젠가 시어머니가 될 며느리는 자신의 며느리를 어떤 태도로 대할까? 어쩌면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하던 그 시어머니와 똑같은 모습이 되어 있진 않을까?

“네가 뭘 안다고 끼어들어?!” 사건 당사자들이 그 일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다. 경험해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하지만 때로는 경험했기 때문에 모를 수도 있다. 한 걸음 물러나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이해관계를 떠나 생각할 수 없다면, 그것을 날 위한 싸움에 지나지 않는다. 서로 자신만을 위해 싸우니 해결도 있을 수 없다.

만연해 있는 고부갈등을 제3자의 시각에서 본다면, 끝없이 맞물려 있는 이 복잡한 문제의 원인이 어느 한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비단 시어머니와 며느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 마찬가지다.

우리는 저마다 시대를 잘못 만났다. 나 한 사람만이 아니라 그분도, 그도, 그녀도, 그 아이도 다 잘못 만났다. 그러나 그 사실을 잘 모른다. 당사자인 만큼,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 같고 상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사람 같다.

‘힘들어봤자 나보다 더 힘들까.’
‘내 주제에 지금 누굴 위로하고 있나.’

누군가를 위로하는 게 사치가 된 세상. 하지만 위로할 수 있어야 위로받을 수 있다. 그 사람이 시대를 잘못 타고났음을 알게 된다면, 그 사람도 나처럼 난세(亂世)살이를 하고 있음을 이해한다면, 조금은 불쌍히 여기며 감싸 안을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어쩌면 상대를 시대의 피해자로 바라볼 수만 있어도 조금은 달라 보일 것이다. 그 사람도 나처럼 힘겹게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 자체만으로도 꽤 대단한 사람, 꽤 괜찮은 사람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런 소소한 소망 하나를 던져주는 것이 이 책에 나올 인물들의 역할이다.

이 소설은 올해 서른셋이 된 주인공(나)이 세 살 즈음에 가지고 있었던 어렴풋하게 남아있는, 하지만 지울 수 없는 강력했던 몇 가지 기억을 토대로 전개된다. 그리고 올해, 세 살 즈음이 된 사람들과의 이야기들을 동시에 섞어가며 그들을 지배한 각각의 시대를 조금씩이나마 마주하게 만든다.

그러고 보면, 올해 ‘세 살 즈음’이 된 등장인물들의 스펙은 저마다 찬란하게 서글프다.

- 일흔 세 살 즈음에
올해 일흔 세 살이 된 고모는 1946년에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비상한 머리를 써보지도 못한 채 국졸로 학업을 마쳐야 했다. 194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독일광부로 파견나간 아버지를 잃어야 했고 늦게나마 실현하려던 꿈도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포기해야 했으며 194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애틋한 마음 한번 품어볼 기회 없이 원치 않는 결혼을 치러버려야 했다. 그리고 여생을 딸과 손녀를 위해 헌납해야 했다.

- 예순 세 살 즈음에
올해 예순 세 살이 된 아빠는 195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아주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잃어야 했고, 독재정권과 군사정권을 거치며 우울한 대학시절을 맛보아야 했으며, 그토록 가혹했던 70년대의 군대를 경험해야 했다. 195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직장도, 집도 쉽게 구했지만 평생을 가족을 위한 ATM기계로 살아야 했고 퇴직 시기에는 첨단문명과 벗할 수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외면당하기 시작했다.

- 쉰 세 살 즈음에
올해 쉰 세 살이 된 엄마는 196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끝까지 대학에 가겠다고 고집을 피웠지만 대학을 포기해야 했으며 남편이 번 돈으로 편히 산다는 시선 속에 무시를 덤으로 받으며 살아왔다. 거기에 196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맞벌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시대에 노년기를 맞아야 했고 결국 황혼육아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 마흔 세 살 즈음에
올해 마흔 세 살이 된 외삼촌은 1976년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군대를 다녀오자마자 IMF라는 난국에 부딪혔다. 1976년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어렵게 워크맨 사업을 시작했지만 MP3의 등장으로 사업을 시원하게 말아 드셨고, 시대의 흐름을 간파하여 얼른 MP3사업으로 전향했지만 스마트폰 시대가 도래하면서 또 다시 사업을 접어야만 했다.

- 서른세 살 즈음에
올해 서른세 살이 된 나는 1986년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군대에 다녀오자마자 미국발 경제위기와 마주했다. 취업난은 극도로 심각해진 상태였고 뭐라도 좋으니 해 보자며 원치 않는 직장에 들어갔다. 1986년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미친 듯이 벌어도 내 집 마련의 꿈은 현실이 될 수 없는 이상일 뿐이다. 친구들은 “그 나이 되도록 자리도 못 잡냐?”는 핀잔에 이미 녹초가 되어 있다.

- 스물세 살 즈음에
올해 스물세 살이 된 조카(고모의 손녀) 유진이는 1996년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IMF와 함께 유아기 시절을 보냈다. 199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개천에서 용 날 수 있다는 할머니(나의 고모) 말을 믿고 열심히 공부했지만 더 이상 개천에서 용 나는 것은 어려운 시대임을 알고 꿈을 하나 둘 접고 있다.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포기하는 건데 욕심이 많아 결혼을 안 하고 있다는 핀잔까지 덤으로 들으며 살아간다.

- 열세 살 즈음에
올해 열세 살이 된 사촌동생(외삼촌의 아들) 영우는 2006년에 태어난 우등생이다. 하지만 임대아파트 스펙 덕에 친구조차 마음대로 사귈 수가 없다. 200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곧 다가올 이십대를 4차산업혁명 시대와 함께 맞이하게 되었고, 그동안 죽어라 공부한 외국어도 다 쓸데없다는 사실을 알아가고 있다. 꿈도 함부로 꿀 수 없는 그에게 어른들은 꿈이 없다며 혀를 찬다.

- 세 살 즈음에
올해 세 살이 된 나의 아들 우림이는 201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텅텅 빈 어린이집에서 7시 반까지 부모를 기다려야 한다. 201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진귀한 문명세계를 누리며 자라고 있지만 예측할 수 없는 미래는 더없이 막막하게 다가올 뿐이다.

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인생의 5대 난관인 ‘학업’, ‘결혼’, ‘군대’, ‘직업’, ‘육아’에 따라 뒤섞어볼 것이다. 누구라고 더 쉬울 것 없었던 각자의 난세살이를 잠시나마 여유롭게 구경해 보자. 이것저것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을지 모른다. 어쩌면 위로를 던질 여유까지 생길지 모른다.

 
MP3 시대가 올 줄도 몰랐고, 스마트폰 시대가 올 줄은 더더욱 몰랐다
작성일 : 18-12-31 02:14     조회 : 163     추천 : 0     분량 : 6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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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P3 시대가 올 줄도 몰랐고, 스마트폰 시대가 올 줄은 더더욱 몰랐다

 

 세 살 즈음에, 엄마는 스무 살, 외삼촌은 열 세 살이셨다. 외삼촌은 외할머니로부터 성적에 대한 꾸지람을 꽤 받으셨던 것 같다. 세월이 좀 더 흐른 뒤에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엄마라면 투자 대비 더 큰 성과를 거두셨을 텐데 왜 외할머니는 외삼촌에게 투자를 하셨는지……. 이해가 안 되었고 납득도 되지 않았다. 물론 부모 자녀 간에는 손익을 넘어 베푸는 게 당연한 도리인지라 이해가 되기도 했다. 그래도 손익을 초월한 가족의 사랑이 누군가에게는 차별로 돌아간다면, 차라리 학교나 직장처럼 손익을 계산해서 베푸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고 보면 부모의 사랑이 아무리 숭고하다 한 들, 때로는 사회에서 베풀어지는 손익관계보다도 못할 때가 있는 것 같다.

 

 외삼촌은 95학번으로 명문대 지방 캠퍼스에 간신히 붙었다. 외삼촌은 애초부터 직장에 입사하기보다는 사업을 하고 싶어 하셨다. 하지만 군대 간 사이에 IMF가 터져버렸고, 1999년도에 복학했을 때는 안정적인 공무원 시험에 도전해야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하지만 진득하게 앉아 공부할 스타일이 아닌 것을 외할머니도 잘 아셨던 터인지, 재산의 80%를 털은 뒤 대출을 더하여 운영할 수 있는 작은 대리점 하나를 마련해 주셨다. 그러면서도 ‘있어 보이게’ 공부는 계속 해야 한다며 대학원도 보내주셨다. 돈만 내면 쉽게 학위를 딸 수 있는 대학원이긴 하지만 그래도 외할머니는 꽤 뿌듯해 하셨다. 그렇게 석사과정 2년, 박사과정 3년을 사업과 병행하셨다.

 

 외삼촌이 운영하던 대리점은 마이마이라고도 불리는 소형 카세트, 일반 카세트, CD플레이어 등을 판매하는 전자제품 대리점이었다. 물론 카세트에 CD플레이어가 함께 붙어있는 매우 진귀한 물품도 모셔져 있었다. 그때만 해도 최소 십오만 원 이상 하는 소형 카세트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 많았던 터라 외삼촌의 사업은 나름 장밋빛 미래를 예견하는 듯 했다. 아니, 실제로도 잘 풀렸다. 게다가 1년 정도 지나면서 CD플레이어에 이어폰을 꽂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카세트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보다 늘어나자 수익도 비례해서 올라갔다.

 이십대 중반에 사장 직함을 달았던 외삼촌으로서는 더 없는 행운이었다. 대리점을 운영하는 외삼촌 덕분에 내 생일 역시 풍요로워졌다. 고등학교 1학년 때도, 2학년 때도, 3학년 때도 내 생일선물은 마이마이였다. 특히 2학년 때 받은 마이마이에는 녹음 기능이 있었고, 3학년 때 받은 마이마이에는 라디오 기능까지 탑재되어 있었다.

 매해 내 생일이면 외삼촌은 종이가방에 담긴 마이마이를 건네면서 온갖 생색은 다 내셨다. 그러나 외삼촌이 운영하는 대리점이 외할머니의 피와 땀으로 세워졌다는 사실을 잘 알았던 나는 선물이 반갑기는 해도 외삼촌이 위대해보이지는 않았다. 왠지 그 자리는 엄마의 자리였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 1년에 한 번 선물로 받는 게 아니라, 매번 내가 원하는 최신형 마이마이를 가질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당시 나는 어엿한 고등학생이었다. 고등학교 물을 먹어 조금 성숙해졌는지, 그마저도 감사하리라 마음먹었다. 아무래도 중2병이 도졌을 때 그 선물을 받았다면 “이게 최신형 맞느냐?”는 둥, “엄마가 사장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둥, “CD플레이어를 갖고 다니는 친구들도 있는데 나는 고작 이거냐?”는 둥 쓸데없어 보이지만 통쾌한 소리를 던져줄 기백이 있었을 텐데. 고등학교 교복을 걸칠 즈음이 되고 나니 그런 용기가 다 사라졌다. 그것도 나이라고……. 세월의 흔적이 나를 어른스럽게 만들어 준 게 틀림없었다.

 

 나는 마이마이를 늘 가지고 다녔다. 학교에서는 마이마이가 없는 내 짝꿍과 한쪽씩 나눠 듣곤 했다. 누군가에겐 내 마이마이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는 소리다.

 

 어찌되었든, 공짜는 무조건 좋다. 외삼촌의 사업이 쭉 번창하여 나의 문화 생활에 큰 기여를 해 주길 바랐다. 그러나 그마저도 평범한 소원은 아니었었나 보다. 나의 작은 기대는 시대 앞에 완전히 굴복해 버렸다.

 

 낌새를 느낀 것은 2005년, 내 생일 즈음이다. 정확히 말하면 생일 다음 날이었다. 생일날만 해도 눈치 채지 못했다. 적어도 외삼촌이 생일 선물로 CD플레이어를 주신 그날까지만 해도…….

 생일날, 외삼촌은 더없이 뿌듯한 얼굴로 나를 찾아오셨다. 선물이 담긴 종이가방은 이전보다 컸다. 대학생이 된 이후에 받는 첫 생일선물이라 고딩 때와는 뭔가 달라 보였다.

 역시나 CD플레이어였다. CDP라고 불리던 그 물건이 드디어 내 품에 왔다. 사실 고등학생 때도 종이가방에 담긴 선물이 마이마이가 아닌 CDP였으면 했다. 그것을 늦게나마 선물로 받았으니, 외삼촌께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얼마나 좋았는지 그 길로 음반 가게에 가서 CD도 몇 장 샀다. 품격 있어 보이기 위해 빈 소년 합창단 정기 공연 음반도 한 장 사고, 몇 달 전 대한민국을 강타했던 파리의 연인 ost 음반도 한 장 샀다. 영어 공부도 할 겸 올드 팝송 음반도 한 장 샀다.

 

 다음 날, CDP에 이어폰을 끼우고 학교로 갔다. 지하철에서 꺼내 듣고 있는데 왠지 민망했다. 시골 동네에서 벤츠 몰면 괜히 미안함과 민망함이 교차하는 것 마냥 쑥스러웠다. 아직 CDP를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이 나를 보면 시샘할 것 같기도 하고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자랑하고 싶었다. 나도 이제 CDP가 있다는 사실을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최대한 알려주고 싶었다.

 힐끗거리며 사람들의 시선을 탐지했다. 부러워하는 표정이 과연 어떤 것일지 궁금했다. 그런데 약간 입꼬리가 올라간 채 던지는 웃음들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부러움보다는 비웃음에 가까웠다. 아까까지만 해도 나의 민망함은 ‘겸손을 가장한 민망함’이었는데 어느 새 그 민망함이 ‘못나고 모자랄 때 느껴지는 민망함’으로 바뀌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상황 파악이 안 됐다. 혹시 파리의 연인 ost 음반 때문에 그런가 싶기도 했다. 드라마가 종영한 지 몇 달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걸 듣냐며 비웃는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굳이 이런 게 비웃을 일인가 싶었다. 아니면 CD를 끼우기 전에 함께 만지작거리던 올드 팝송 음반을 비웃은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젊은이라고 해서 올드 팝을 못 들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건 웃음거리가 아니었다. 대체 왜지? 슬슬 화가 났다.

 

 때마침 나의 오해를 풀어주기라도 하듯 이런 소리가 들렸다.

 

 “어머, 요새도 CDP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있나봐.”

 “엄청 무겁겠다. 크크.”

 

 시대가 바뀌었다. 시대가 빨리 변했는지, 내가 도태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되었든 서로 속도가 안 맞았던 것만은 분명했다. 같은 시대를 살고 있지만 그들이 사는 시대와 내가 사는 시대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시나 지하철 안에는 이어폰을 귀에 꽂은 사람들로 수두룩했다. 그런데 CDP를 들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마이마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분명 이어폰은 끼고 있는데 줄만 보일 뿐 기계는 보이지 않았다.

 

 MP3플레이어! 사람들은 저마다 MP3를 들고 있었다. 간혹 주머니에서 꺼내는 것을 보면 모양도 꽤 다양했다. 동그란 통 모양도 있었고 직사각형 모양도 있었다. CDP의 4분의 1, 아니 5분의 1 정도 되는 작은 크기였다. 생각해 보니, 학교 내에서 동기들이 꽤 많이 들고 다녔던 것 같다. 어디 동기들뿐이랴. 선배들도 꽤 많이 들고 다녔다. 심지어 복학생들도 들고 다녔다는 사실이 이제야 떠올랐다.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중에 MP3는 우리의 삶에 꽤 널리 퍼져있었다. 그런데 보면서도 나는 몰랐다. 시대가 바뀌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과거에 머물러 CDP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분명 몇 달 전부터인가, CDP를 들고 다니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민망함을 뒤로 하고 지하철을 빠져나오는데 문득 외삼촌에 대한 걱정이 밀려왔다. 혹시나 했다. 설마 했다. 하지만 괜찮으리라 믿었다.

 허무한 바람이었을까. 두 달 후, 외삼촌은 대리점을 정리했다. 몇 달 만에 판매량은 급격히 감소했다. 아니, 바닥을 쳤다.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었기에 더 참담했다. 다시 CDP나 마이마이를 찾는 사람들이 생겨날 가능성은 없었다. 2018년을 사는 우리가 스마트폰 대신 비싼 돈 주고 카폰을 굳이 사지 않는 것처럼, 그때도 반전을 기대할 수 없었다.

 

 모두 기운이 없을 때, 기죽지 않았던 유일한 분은 외할머니셨다. 한 번 정도는 망해도 된다고 하셨다. 그게 다 경험이고 재산이라고 하셨다. 빚을 조금 더 내어 MP3를 판매하는 대리점으로 업종을 변경하셨다. 이미 어느 정도 구색은 갖추어져 있으니 품목만 카세트, 소형 카세트, CDP에서 MP3로 바꾸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 인고의 몇 달을 보낸 후, 나와 엄마는 또다시 개업축하용 화분을 두 손 무겁게 들고 대리점을 찾았다. 외삼촌은 기념이라며, 생일도 아닌데 MP3를 선물로 주셨다. 이 녀석은 꽤 신기한 물건이었다. CD를 살 필요도 없이 음악을 감상할 수 있었다.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었다. 그때가 2005년 늦은 봄이었다. 봄의 기운만큼이나 외삼촌의 인생도 다시 필 것 같았다.

 

 좋은 일은 한 번에 몰아친다고 했던가, 외삼촌은 그 해 결혼에 골인하고 이듬해에 아들도 낳았다. 그 녀석이 바로 영우다. MP3는 대중들에게 더 많은 사랑을 받았고 이제 영우를 키우는 데 별 문제가 없을 거라 여겼다. 정말로 영우는 꽤 유복하게 유아기를 보냈다. 다섯 살, 어린이집을 다닐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다 가질 수 있었다. 뽀로로에 한번 꽂히면 뽀로로가 새겨진 온갖 장난감을 연이어 살 수 있었고, 뿡뿡이에 꽂히면 뿡뿡이 장난감도 얼마든지 살 수 있었다.

 

 어느 새 영우는 여섯 살이 되었고 영어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다섯 살까지는 외숙모(영우의 엄마)가 근무하던 어린이집에 다녔지만, 여섯 살이 되면서부터는 아무나 다니기 어려운 영어 유치원에 비싼 교육비를 내고 다니기 시작했다. 외삼촌에게 있어서는 별 무리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 시기부터 영우는 뽀로로 같은 어린 시절에나 가지고 놀던 장난감에서 벗어나 조금 더 수준 있는 장난감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2009년 즈음 출시되었다는 정체 모를 괴상한 로봇, 또봇이었다. 로봇이면 로봇이어야지, 로봇이 차로 변했다가 차가 다시 또 로봇으로 변하는 게 참으로 신기했다. 적어도 삼촌입장에서는 그랬다. 그런데 이전에 영우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 가격 역시 만만치 않았지만, 이놈의 또봇은 조금 다른 차원의 가격대를 선보였다. 변신 수준 자체가 이전에 알던 로봇과 다르니 비쌀 만 하다고 하면서도 가격표를 볼 때마다 삼촌을 딸꾹질을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영우는 원하는 또봇 시리즈를 가질 수 없었다. 유치원도 더 다닐 수 없었다. 하필 그 시기가 대중들에게 스마트폰이 급속이 전파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전 해(2010)까지만 해도 스마트폰을 가진 사람이 드물었지만, 1년 사이에 너도나도 스마트폰을 다 갖게 되었다. 내가 중 3때인가, 허리춤에 차던 삐삐가 갑자기 사라지고 휴대폰이 금세 주머니를 장악했던 것과 비슷한 속도였다. 아니 그 속도보다 더 빨랐다. 사람들은 이제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MP3 성능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굳이 두 가지를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기에 하나를 포기한 것이다.

 저마다 가지고 있던 MP3는 어느 새 각자의 책상 서랍 끝 쪽에 방치되기 시작했고, 몇 달이 지나서는 서랍에서도 밀려나 장롱 위에나 두는 골동품 상자 속의 유물로 보관되었다. 그래도 추억이라고 모셔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냥 남에게 주거나 버린 사람도 꽤 있다. 그렇게 MP3가 사람들의 호주머니와 가방에서 서랍으로 밀려나고 서랍에서 골동품 박스 내지는 휴지통으로 밀려날 때, 외삼촌도 서서히 대리점을 접어야 했다. 그나마 2년 정도는 더 버티신 것 같아 그것만으로도 위로를 받으신 듯 했다.

 원하는 장난감을 원하는 대로 가질 수 있었던 영우는 난생 처음 원하는 장난감을 왜 안 사주냐며 울기 시작했고, 체념하는 법을 배우며 철이 들어갔다. 영우라면 뭐라도 다 해줄 것만 같았던 외할머니조차 그런 모습을 지켜보실 수밖에 없었다. 스마트폰 시대가 2년 정도만 더 늦게 왔어도, 아마 영우는 완벽하게 풍요로운 영유아기를 보냈을지 모른다. 또봇을 종류별로 다 가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 이후 외삼촌은 더 이상 사업은 하지 않으셨다. 급변하는 세상 앞에 완전히 항복하셨다. 스마트폰 대리점 개업을 권유하는 외할머니에게 난생 처음으로 반항하셨다. 심지어 화도 냈다. 물론 외삼촌은 효도 차원에서 그런 것이었다. 외할머니가 더 이상은 해 줄 수 없음을 알기에, 먼저 거절하는 것이 그 상황에서는 최선의 효도였다.

 문득 스마트폰 네비게이션 기능을 보며 “이럴 줄 알았으면 네비게이션 괜히 샀다.”고 투덜거리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몇 십만 원 날렸다며 엄청난 손해를 봤다고 하소연했던 건, 외삼촌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며칠 전, 아들 우림이가 마트에서 또봇을 만지작거렸다. 비슷하게 생긴 카봇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여전히 비싼 가격이었다. 다행이 우림이는 아직 필요 없다는 듯 이내 자리를 옮겼고 뽀로로 얼굴이 박힌 삼천 원짜리 고무공을 사달라고 아우성쳤다. 내심 다행이라고 마음을 쓸어내리며 계산대를 향하는데, 그 시절 용돈이라도 모아 영우에게 또봇 하나 사줄 걸 하는 아쉬움과 미안함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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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천에서 용 나던 시대는 끝난 지 오래다 2018 / 12 / 31 167 0 5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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