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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추리/스릴러
아이돌x아이
작가 : LEEEUL
작품등록일 : 2018.12.30

최정상의 인기를 구가하던 아이돌 배우 원태인의 죽음! 그것도 연극 공연 중에 벌어진 공개적 죽음이었다.
자살인가, 타살인가? 사고인가, 사건인가?
연예계와 매스컴은 태인의 죽음을 앞 다투어 재구성 하려한다. 삼류 연예지 ‘진실과 상상’의 기자 주채성도 그 중 하나. 채성은 태인의 평전을 써서 지긋지긋한 생활을 끝내고자 한다. 그러나 태인의 죽음을 파헤쳐나가면서 자신도 연관이 되어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진실은 점점 미궁으로 빠져드는데...

 
아이돌x아이_지옥에서 보낸 한 철 3
작성일 : 18-12-30 19:08     조회 : 224     추천 : 0     분량 : 8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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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얀 방. 눈 뜨면 언제나 같은 곳. 13년. 멀쩡한 사람도 미쳐버리고 말 공간과 시간. 하얀 모래처럼 흩어지는 기억들.

 

 

 어떻게…… 어떻게 그 빛바랜 하얀 방에서 웅크린 채 그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어? 그 안에서 뭘 꿈꾸고 뭘 잃었어? 그 텅 빈 눈에 비친 건 뭐였어? ……누군가 그랬지. 천국은 온통 새하얀 빛으로 가득한 곳이라고. 그럼 난 천국 따위엔 안 갈래. 그런데 이 하얀 곳은 도대체 어디지?

 

 

 

 제 5일. I의 감정이 뒤틀려가는 걸 본다. 뭔가를 생각하다 실소하고 그러다 비명을 지른다. 숨이 가쁜 듯 헐떡이다 옷을 찢어발기고 머리를 쥐어뜯는다. 미친 사람처럼 술을 마신다. 그 꼴이 우습다.

 

 

 

 서린은 감시카메라 영상을 보며 히죽거렸다. 태인의 이 피폐한 모습을 팬들에게 보여줄 생각에 희열이 차올랐다.

 

 

 

  ‘여긴 내게 끝없는 쾌락의 낙원이야. 넌 그저 추락해주기만 하면 돼.’

 

 

 

 

 세상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비가 쏟아진다. 창문에 맺힌 빗방울들, 그 속에서 바깥세상이 번져간다. 손가락으로 짚으며 막아보려 해도 소용없어. 힘없이 흘러내리며 무너져. 비는 오로지 부서지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거야. ....그럼 나는? 도대체 난 무엇을 위해서 그 많은 헛된 노력을 하며 숨을 내쉬어 온 거지? 지나온 모든 순간들이 무의미해…… 살아있다는 건 좋은 일일지도 몰라. 하지만 살아간다는 건 확실히 괴로운 거야.

 

 

 

 제 13일. I는 창밖만 바라보고 있다. 며칠 째 비가 계속되고 있다. 온 세상이 무채색의 바다 속에 잠긴 것만 같다. 그 어떤 허우적거림도 무용하게 만드는 심해 속에.

 

 

 

 불이 켜지면 우린 연기를 해. 준비된 대사를 읊고 준비된 동작을 하며 준비된 감정을 꺼내. 이미 다 예정된 이야기, 예정된 결말. 다른 행동은 허락되지 않아. 하나부터 열까지 정해진 세계 안에서 지시된 대로만 살아가는 거야. 때론 기쁘고, 때론 슬프지. 하지만 이 삶은? 왜 계속 고통 뿐 인데? 왜 난 아무 것도 알지 못했지?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은 거야? 이 삶엔 컷이 없어, 삶은 계속되는 연기야, 끊임없이 연기하라고, 네 자신을 숨기고 네가 내보이고 싶은 삶만을 사람들에게 꺼내들라고 강요해, 도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이 장면을 컷해줘, 여기서 날 꺼내줘!

 

 

 

 ‘더 괴로워해! 더 울부짖어! 그래봤자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제 18일. I가 미쳐가는 게 확실하다. 온 종일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 안의 누군가를 불러내 대화를 나누듯, 누구라도 들어주길 바란다는 듯. 듣지 않으면서 듣는다.

 

 

 

 

 “내, 내가 지금…… 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 모, 몰라? 수없이, 바, 반복해왔던 건데... 모르겠어. 생각, 단 하나의 생각인데…… 한 번도, 뭐,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내 자신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생각. ……이게 시작일까? 그, 그래? 할매도, 아버지도 그랬다면…… 당연하잖아, 나도 그렇게 되는 건. 이, 이미 그렇게 정해져 있던 거잖아? 아, 안 돼, 그렇게 끝나고 싶지 않아, 제, 제발 날 좀 도와줘, 제발…….”

 

 

 

 제 20일. 참다못한 I는 정신상담을 받으러 다니기로 했다.

 

 

 

 “음, 그러셨군요. 잘 알겠습니다. 정신질환이 유전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분명 어느 정도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제가 반드시 도와드리죠. 아, 진료 기록은 절대 공개되지 않으니 걱정하실 필요가 없으시고요. 자, 그럼 시작해볼까요?”

 

 

 

  ...제 삶은 분노와 폭력으로만 채워져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때리거나 부수지 않은 날은 잠도 오지 않을 지경이었어요...

 

 

 

 “나, 나한테 왜, 왜 이러는 거야?”

 

 

 

 덫에 걸려든 놈들은 겁에 질려 항상 그렇게 묻지. 이유? 그딴 건 갖다 붙이기 나름이야. 돈이 있어보여서, 생긴 게 재수 없어서, 나대는 꼴이 짜증나서, 뭐 그런 게 아니라면 그냥? 그래, 그냥이야. 난 지금 그냥 누군가를 신나게 패주고 싶고, 하필 네가 눈에 띈 것뿐이야.

 

 

 

 “아아, 제, 제발 그만. 요, 용서해줘…… 나, 나 같은 게 태어나서, 나 따위를 만든, 그, 그러니까 다 내 부모 탓이야.”

 

 

 흐흐흐, 이 새끼 진짜 압권인데? 올해 들은 변명 중에 최고야. 그래, 이 모든 게 다 부모들 탓일지도 모르지. 근데 너한텐 그렇게 탓할 수 있는 부모가 있다는 것도 짜증나는데 어쩌지? 주먹에 닿는 살과 뼈의 감촉, 찢어지고 으스러지는 감각, 기괴한 비명과 흩날리는 핏자국. 그래, 이거야! 좀 더, 더 소리 질러봐!

 

 

 

 “아아악, 이 새끼야 진짜 죽고 싶어? 그만해, 그만하라구!”

 

 

 여자애 하나가 갈구 녀석의 몸에 짓눌린 채 비명을 지른다. 오늘은 유난히 발정이 심한가보네. 여자애는 악을 쓰며 끝까지 저항한다. 결국 갈구 놈이 나이프까지 꺼내들게 만든다. 치맛단이 찢어지고, 앞섶이 파헤쳐진다. 어유, 한심한 새끼. 저러다 뭔 일내겠네. 달려가서 녀석의 팔을 냅다 걷어 차버렸지.

 

 

 

 “으, 으어…… 태, 태인아…… 내, 내 눈, 눈이…….”

 

 

 갈구의 얼굴이 검붉은 피로 범벅이 되어버렸다.

 

 

 

 “그러게 새끼야, 함부로 연장 꺼내들지 말랬지.”

 

 

 

 바람, 모든 우울과 분노를 날려버리고 숨통마저 끊어놓을 듯한 바람. 도로는 나를 집어삼킬 것처럼 튀어 올라, 바이크는 터져버릴 듯 달아올라. 빨리, 더 빨리 달려야 해! 누구도 쫓아오지 못하게.

 

 

 뒷자리에 앉은 여자애가 뭐라고 소리를 지른다.

 

 

 “야, 난 차희라고해, 장차희! 너 진짜 맘에 든다! 우리 사귈래? 비록 첫 만남은 엉망이었지만 새롭게 시작해보자구! 응? 내 말 들려?”

 

 

 

 ‘새로운 시작? 나 따위한테 새롭게 살 기회란 없어. 그냥 이렇게 살다 죽으면 되는 거야. 그거면 돼.’

 

 

 ……그런 날들의 반복, 끝없는 반복이었습니다.....

 

 

 

 “음... 태인 씨는 왜 그래야만 했을까요? 조금만 더 옛날로 가볼까요? 떠올려보세요.”

 

 

 

 몰라, 모르겠어요…… 싸우다 보니 악마가 된 건지, 내가 원래 악마여서 싸우게 된 건지 이젠 정말 모르겠어요……

 

 

 

 “넌 왜 매일 같은 옷만 입고 다녀? 넌 왜 매일 준비물도 안 챙겨와?”

 

 

 

 “고아라서 그렇대. 쟤는 엄마, 아빠도 없대. 주워 온 아이래.”

 

 

 

 “태인이네 할머니는 마귀래요, 마귀래요. 며느리랑 아들을 잡아 죽여 먹었대요, 먹었대요.”

 

 

 

 순수하게 잔인했던 아이들. 뜻도 모른 채 나를 놀려대던 그 아이들.

 

 

 

 “오늘은 무슨 반찬 먹었니? 아빠 눈알? 엄마 혀? 너희 할머니가 너도 잡아먹을 거래. 그래서 키우고 있는 거래.”

 

 

 

 “아냐, 아냐! 우리 할무니 욕 하지마, 이 나뿐 놈들아!”

 

 

 

 “이 에미 애비도 없는 자식이 어디서 우리 애를 건드려? 하여튼 후레자식들이란!”

 

 

 

 내 뺨을 후려갈기는 무지막지하게 두꺼운 손바닥들.

 

 

 

  아파, 아파…… 할무니, 나 너무 아파…….

 

 

 

 “이눔 새끼, 이 나쁜 눔의 새끼! 쥐방울만한 게 벌써부터 쌈질이여? 왜 친구를 때리고 그랴, 엉? 니가 깡패새끼여 이눔아! 차라리 내랑 같이 죽자, 죽어!”

 

 

 

 할매…… 할매까지 나한테 그러면 안 되잖아요. 그 자식들이 먼저 날 놀렸다고요, 남들 다 있는 부모도 없다고, 고아라고, 거지라고, 악마라고…… 두고 봐, 다 복수할 거야. 근데 나 아파, 너무 아파요, 이제 더는 못 하겠어……

 

 

 

 “아직, 아직이에요! 자, 더 옛날로 가봅시다. 태인 씨가 온전하게 행복했던 때로요.”

 

 

 

 엄마, 아빠? 엄마 앞에서 짝짜꿍 아빠 앞에서 짝짜꿍…… 엄마 아빠가 웃는다……

 

 

 

 “왕자님, 우리 태인 왕자님. 어쩜 이렇게 아름다울까? 어쩜 이렇게 끼도 넘칠까?”

 

 

 

 왕자님의 아빠는 나라의 제일가는 멋쟁이 광대였고, 엄마는 하늘을 새처럼 나는 공중곡예사였습니다. 왕자님의 가족은 매일 매일 세상 곳곳을 누비며 그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만나 멋진 묘기와 환상적인 마술을 보여주었습니다. 기쁨에 들뜬 아이들, 흥에 겨운 어른들 모두가 왕자님의 가족을 사랑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행복해졌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아니, 아니야! 그렇게 끝나지 않았어, 싫어, 싫어요! 그 때로는 정말 돌아가고 싶지 않아, 난 아무 것도 못 봤어, 아무 것도……

 

 

 

 “고통을 외면하지마세요! 부정하지 마! 똑바로 쳐다 봐!”

 

 

 

 위태로운 줄타기.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지켜보지. 한 발 앞으로, 한 발 뒤로. 망설이는 발걸음이 반복되자 사람들은 이내 따분해해. 색색의 현란한 조명도, 심장을 울리는 북소리도 소용없어. “더 멋진 걸 보여줘, 더 숨 막히는 걸!” 안 돼, 엄마! 그러지 마요. 저들이 원하는 건 엄마의 목숨이에요....

 

 

 

 “아들아, 잘 봐 두렴. 오늘 네 엄마는 하늘로 날아오를 거야.”

 

 

 아빠, 엄마를 말려줘요. 수 백 번이나 연습했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잖아요. 지금은 그물망도 없잖아요. 결코 성공한 적 없던 연기, 결국은 실패로 끝나고만 연기……

 

 

 

 사람들은 폭소를 터트려, 광기 어린 탄성과 침 튀기는 삿대질이 멈출 줄 몰라. 그, 그런데 저 이상한 형상은 뭐지? 다리가 어깨를 감고 목이 가슴 밑으로 꺾인, 저 괴물 같은 모습은? ...어, 엄마? 곡예사의 헐떡이는 숨소리와 뒤집어진 흰자위가 조명에 번뜩일 때까지, 광대가 비명을 지르며 무대에 뛰어들 때까지 사람들은 웃고 떠들고 난리를 피워. 이 모든 건 쇼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들은 즐기기 위해 여기 온 것 뿐이니까.

 

 

 

  그런데, 난 아무 것도 보지 못 했어, 정말로 난 아무 것도……

 

 

 

  그녀는 우아한 한 마리 새처럼 날아다녔네. 그러다 종이로 만든 인형처럼 구겨져버렸네. 광대는 울고 사람들은 웃었네. 사람들을 웃겨주는 게 광대의 일이었지만 그날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네. 모든 슬픔을 웃음으로 승화시키고 싶었던 광대였지만, 그날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네. 마침내 진실을 깨달은 사람들이 하나 둘 울기 시작했을 때, 광대는 힘없이 웃었다네. 그것이 광대의 운명. 운명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지.

 

 

 

 이미 다 정해져 있는 이야기, 이 모든 건 나의 영원한 추락을 위한 전주곡.

 

 

 

 

  ……그래, 이젠 다들 만족해?

 

 

 

 “좋아요, 아주 좋습니다. 과거라는 건 물 속에 잠겨버린 고대도시 같은 거죠. 누군가는 실재했었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아니라고 하지만, 중요한 건 이젠 확인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픈 거구요. 이 약들을 드세요. 그럼 다 잊혀 질 겁니다. 인간은 망각하는 존재, 무언가를 잊어버릴 수 있다는 것만큼 행복한 게 없어요.”

 

 

 

 잊어, 잊으라고? 다 잊어버리면 된다고? 좋아, 그럼 얼마든지 먹을 게, 남김없이 먹을게!

 

 

 

 

 ‘그렇다고 해서 네가 한 짓들이 용납되진 않아. 넌 다른 방법을 찾았어야 했어.’

 

 

 

 서린은 태인의 옷 속에 감추어뒀던 녹음기의 내용을 들으며 몇 번이나 그렇게 되뇌었지만, 그 생각의 날이 자신을 향해 드리워지자 섬뜩함을 느껴야 했다.

 

 

 

  “넌 패배자야. 우리 집안의 수치야! 다신 눈에 띄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아빠, 엄마…… 제 잘못이 아니었잖아요. 저한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실 수도 있었잖아요. 그래야 했잖아요…….’

 

 

 

 서린은 입술을 깨물며 녹음 내용을 다이어리에 옮겨 적었다. 받아쓰는 것으로 이 모든 기억을 다 지워버릴 수 있다는 듯,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가며.

 

 

 

 ‘그래, 어쩌면 우린 같은 늪에 빠져있는 건지도…… 우리? 우리라니?’

 

 

 

 서린은 밀려드는 당혹감을 지울 수 없었다.

 원트인에 자료를 올리는 것에도 점점 무력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서린이 그렸던 그림은 팬들이 태인을 혐오하고 내팽개치는 모습이었지만, 오히려 그들은 태인의 사실적인 모습에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심지어 서린을 치켜세우며 더욱 부추겼다.

 

 

 

 

 수 십 억의 세포들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혈관이 요동치며 불거져 나와,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처럼, 뜨거워, 너무 뜨거워, 동공은 동굴처럼 커져, 모든 기억들이 한데 뒤엉켜 눈앞에 펼쳐져, 잊혀진다며, 이 약만 먹으면! 속이 쓰려, 모든 내장이 뒤틀리는 것처럼! 그럴땐초콜릿을드시면기분이나아지실텐데요그건초콜릿이도파민을분비시켜사랑에빠지는것과같은효과를주기때문이랍니다, 그래, 난 사랑을 원했어, 모두가 나를 사랑했었어! 식후30분매회1정씩,복용양을반드시준수해주세요, 한 알에 하나의 기억이 잊혀진다면, 몇 알에 모든 기억이 사라질까? 구토구토끝도없이계속되는구토,내안이밖으로튀어나올것같은구토! 기억이 아니라 내가 지워져 버릴 것 같아, 이거 보여? 목덜미에 눈두덩에 돋아난 수포가? 끈적거리는 허물처럼 벗겨지는 피부가? 이게 나야? 아니야, 이건 내가 아니야, 아니라고!

 

 

 

 화장실 거울이, 입식 거울이, 창문이 내 주먹 끝에서 부서진다. 지금 내 추악한 몰골을 반사시켜 보여주는 건 뭐든지 박살난다. 산산조각 난 파편들과 손에 맺힌 핏방울을 보고 나서야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리곤 실신하듯 잠에 빠져버린다.

 

 

 

 

 제 30일. I는 하루 종일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다. I가 먹는 거라곤 병원에서 지어준 약과 초콜릿, 술 뿐이다. I는 점점 야위어 간다. 죽어간다. 그러면서도 발악한다.

 

 

 

 

 서린은 화장실에 쓰러져 있는 태인을 보았다. 입 주위가 초콜릿과 토사물로 범벅이 된 태인의 모습은 몰락한 피에로를 연상시켰다. 서린은 어떤 감정의 결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채로 태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자신도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곤 머릿속에서 울리는 당장 그만두라는 경고를 무시한 채 태인의 입가를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그때 태인이 살짝 몸을 뒤척였고 당황한 서린은 뒷걸음질을 쳤다. 그 순간 격렬한 통증이 서린의 전신을 뒤덮었다.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양 손으로 겨우 틀어막았다. 유리조각들이 박힌 발바닥이 새빨간 핏물을 줄줄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 그만... 이제 그만... 이제 알아, 아무도 없다는 거…… 어차피 나 혼자라는 거, 원래부터 나 혼자였다는 거…… 이젠 다 알았으니까……”

 

 

 

 태인의 울먹임 섞인 웅얼거림이 서린의 상처를 더욱 욱신거리게 만드는 것 같았다.

 

 

 

 제 36일. 똑같은 매일의 반복.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시간, 시간, 시간…… 너무도 어지럽게 널려있으면서 어디에도 없는 시간. 오늘이 도대체 언제지? 어제는 오늘이었고 내일은 이미 지나갔으니까.

 

 

 

 

 제 38일. 똑같은…… 반복, 반복, 반복, 반복!

 

 

 

 ...누군가가 여기 있는 건 아닐까? 깨진 유리와 핏자국들이 말끔하게 치워져 있는데. 아니, 깨진 것도 상처도 애초부터 없었던 건지도 모르지. 어쩌면 그냥 누군가가 있어주기를 바라는 것일지도 모르고. 그래도 혹시 누군가 날 보고 있다면 부디 좋은 평을 해주었으면……

 

 

 

 ‘이건 술래가 없는 술래잡기 같아. 우린 깨진 거울을 통해 서로를 망상으로 느낄 뿐이야. 진짜 자신의 모습을 마주할 수가 없으니까.’

 

 

 

 제 40일. I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정말 아무 것도...

 

 

 

 

 머릿속에 점액질으로 만들어진 검붉은 구멍이 생긴 것 같아. 모든 기억이, 기분이, 생각이, 느낌이 소용돌이치며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아,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그저 이렇게 누운 채로, 꿈속에서 눈을 뜨고 눈을 뜬 채 꿈을 꿀 뿐.

 

 

 

 제 42일. I는 식물인간처럼 누워있다.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어쩌면 영영. 나는…… 질식할 것만 같다.

 

 

 언젠가부터 서린의 다이어리에는 그녀의 의도가 아닌 문장들이 적혀가고 있었다. 마치 다른 누군가가 서린의 몸을 빌려 글을 쓰는 것처럼. 그렇게 적힌 문장들은 다시금 서린의 의도가 아닌 행동을 유도하고 있었다.

 

 

 ‘더 이상 이렇게는 안 돼. 이제…… 끝내야 해, 끝내고 싶어.’

 

 

 

 제 44일. I는 잠들어 있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그리고 오늘, 나도 그 옆에서 잠에 들 것이다. 영원처럼 깊은 밤, 다시는 깰 수 없을 깊은 잠에.

 

 

 

 서린은 품속의 칼을 꺼내들고 거실로 나섰다. 머릿속은 고요했고 가슴은 평온했다. 절뚝이는 발걸음을 옮겨 태인의 곁에 가까워질수록 굳건한 확신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은 아주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고, 두 사람 모두가 이 순간을 간절히 기다려왔다는 확신이.

 

 

 

 ‘너도 알고 있지? 우리한테 다른 길은 없다는 거.’

 

 

 

 서린은 태인의 옆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서늘한 달빛이 칼날에 스며들었다. 칼날에 반사된 빛이 백지처럼 창백한 태인의 얼굴을 비추었다. 순간 서린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았다. 깊디깊은 새카만 눈,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텅 빈 우물 같은 태인의 눈이었다. 그 곳에서 가느다란 눈물이 흘러나왔다. 달빛에 길어 올려 진 것 같은 투명한 눈물이.

 

 

 

 ...이제 날 데리러 온 거야? 너였구나. 그래, 알고 있었어.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분명히 느낄 수 있었어. 엄마가 죽어갈 때 사람들이 환호로 아우성칠 때 난 널 느꼈어. 메스꺼우면서도 두근거리는 감각이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는 걸. 내 안의 악마. 난 그것을 보고 있다. 상상했던 것보다 끔찍한 모습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보기 좋았다. 예쁜 여자아이의 모습이었다.

 

 

 

 서린은 어떤 주문에 걸린 것 마냥 태인의 눈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태인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눈물 속에 미세한 입자 같은 것이 섞여 나왔다. 서린은 그 속에서 자신의 얼어붙은 얼굴의 파편을 보았다. 끝도 없이 펼쳐진 새하얀 설원. 서린은 그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서 온몸이 얼어붙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 나는 언제나 혼자였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네가 있잖아. 나와 함께 끝을 맺어줄. 네 눈 속의 나. 내 눈 속의 너. 이미 정해져 있던 일. 자, 내 손을 잡아. 망설이지 마.’

 

 

 

 서린은 이것이 태인의 목소리인지, 자신의 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태인은 서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서린은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떨리는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때 태인의 입술이 아주 살짝 달싹거렸다. 거의 알아듣기 힘든 소리였다. 서린은 눈물이 고인 눈으로 태인의 입술을 읽었다.

 

 

 

  “이제…… 끝내.”

 

 

 

 이제 끝내줘.... 이제 그만하게 해줘....

 

 

 

 서린을 결국 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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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이돌x아이_오프닝나이트 1 (1) 2018 / 12 / 30 236 1 6257   
1 아이돌x아이_프롤로그 2018 / 12 / 30 338 0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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