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13일┃
샤워를 마치고 나온 시온의 걸음이 주차장으로 향했다. 경기 내내 쨍한 햇빛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더니, 그새 먹구름이 몰려와 하늘을 가득 메웠다. 변덕이 심한 영국 날씨에 적응하려면 앞으로 몇 개월은 더 걸리지 않을까 싶다.
하-. 시온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걸었다. 모처럼 주전 경쟁에서 이겨 선발로 출전했는데,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감독의 실망만 샀다. 헛발질로 문전 앞에서 날려버린 마지막 슈팅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멍청한 실수였다.
토트넘(Tottenham Hotspur)에 입단하고 처음으로 맞는 시즌이었다. 프로 선수로서 욕심이 나는 게 당연했다. 500억, 아시아 선수로는 역대 최고의 이적료였다. 높게 책정된 몸값이 좋은 건 줄로만 알았지, 이렇듯 가슴을 옥죄는 부담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어렸을 때부터 제일 행복한 놀이였던 축구가 점점 무서워졌다.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다며 다른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던 게 아주 오래 전 일 같다. 그 시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이렇게 말해줄 것이다. 좋아하는 일이 세상에 딱 한 가지뿐이라면, 그건 반드시 취미로 남겨둬야 해. 자칫하다간 그 즐거움을 영영 잃어버릴 수도 있거든.
시온은 떨어지는 빗물을 막으려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그 모습에서 이방인 티가 났다. 이 정도 가랑비쯤은 다들 호방하게 맞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저멀리 재신 형이 타고 있을 검은 승용차가 보였다. 시온은 걸음을 멈추었다. 차 안에서 제 모습이 보일까 기둥 뒤로 슬쩍 몸을. 숨기기까지 했다. 뒤를 돌아 보니, 빨간 벽돌로 지은 건물 외벽에 경기장 이름이 걸려 있었다. Stadium of Light, 빛의 구장. 한때 유명한 탄광촌이었던 이 지역의 순결한 노동 정신을 담은 이름이었다.
“우산, 빌려줄까요?”
축 처진 어깨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던 시온에게 누군가 다가와 우산을 건넸다. 아무 무늬도 그려져 있지 않은 다홍색 우산이었다. 시온은 시선을 올려, 제게 이런 친절을 베푼 여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하얀 피부와 대조되는 검은 머리칼은 어깨를 가뿟이 넘어 팔뚝을 간질였고, 전반적으로 마른 체형에 훤칠한 키가 패션잡지에서나 보던 모델을 연상시켰다. 마스크를 끼고 있어 확신할 순 없었지만, 왠지 얼굴도 마음만큼이나 고울 것 같았다. 마스크 위로 드러난 여인의 맑은 눈동자가 그녀를 살피던 시온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호박(琥珀)을 깎아놓은 듯한 그녀의 황갈색 눈동자는 언뜻언뜻 초록빛을 띠었다. 오묘했다.
“호의는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괜찮은 거 맞아요?” 여인이 물었다. “오늘 경기에 부진해서 실의에 빠진 모양이네요. 바보같이.”
시온의 동공이 순간 커졌다. “나를 알아요?”
“알죠, 너무 잘 알죠.” 여인의 목소리에서 애수가 묻어났다. “축구 좋아하는 한국인 중에 정시온 선수를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 기대가 커요, 분명 여기서도 잘 해낼 거예요.”
“모르겠어요, 어떨지. 아직 적응이 덜 돼 그런 건지, EPL이 나랑 안 맞는 건지, 그것도 아님, 팀을 잘못 옮긴 건지……. 솔직히 오늘 포지션은 낯설기 짝이 없었어요! 윙어에게 스트라이커 자리를 맡기다니, 그것도 아직 리그 적응도 못한 선수한테!”
처음 만난 여자 앞에서 왜 이런 말을 쏟아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만난 한국인이 반가워서? 아니다, 아무래도 그녀의 신비한 눈동자에 홀린 듯싶다.
“말도 안 되는 변명이나 늘어놓고……, 프로답지 못하죠, 나.”
여인은 엷게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프로라는 이름으로 그런 완벽함을 강요 받는 건 너무 잔혹한 일이에요. 조급해하지 말아요, 다 잘 될 거니까.”
이상하게도, 그녀의 다 잘 될 거라는 말이 공허한 위로처럼 들리지 않았다. 시온은 멋쩍게 웃으며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여인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자신의 주장에 살을 붙였다. 양발을 잘 쓰고 속도전에 강한 시온은 분명 머지않아 두각을 나타낼 거라고.
“다음 주에 크리스탈 팰리스(Crystal Palace)랑 붙죠? 나랑 내기할래요? 난 당신이 거기서 프리미어리그 첫 골을 넣을 것 같거든요. 내가 촉이 좀 좋아요, 이런 걸 잘 맞히는 편이죠. 환상적인 단독 드리블 후에 주발인 왼발로 멋지게 골인!”
축구를 평소에 제법 즐겨 보는 사람인 듯했다. 시온의 장기를 속속들이 파악한 경우에만 그릴 수 있는 청사진이었다. 시온은 여인의 말처럼 됐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밝힌 뒤 다시 한 번 감사하단 뜻을 전했다. 이만 형이 기다리는 차로 돌아가려는 시온을 여인이 붙잡으며, 그의 손에 기어이 빨간 우산을 쥐어 주었다.
“쓰고 가요. 아무리 짧은 거리라지만, 비 맞아서 좋을 거 없잖아요. 머리도 안 말랐는데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해요. 운동 선수한텐 몸이 곧 재산인데. 나는 걱정하지 말아요, 우산이라면 또 있으니까.”
여인이 이렇게까지 권하는데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닌 듯싶었다. 시온은 고맙게 우산을 받아들었다.
“당신을 늘 응원할게요. 언제나, 어디서나.”
휘어진 눈매가 왠지 서글퍼 보였다. 시온은 여인과 헤어져 차 쪽으로 걸어가면서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한 손을 살짝 흔들어 보이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입고 있는 흰색 원피스의 치맛자락이 서늘한 가을 바람에 나풀거렸다.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여인의 잔상은 쉬이 지워지지 않았다.
시온을 태운 차량이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걸 지켜보며, 정원은 가만히 제 아랫배에 손을 얹었다. 다른 한 손으로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자, 그녀의 고운 얼굴이 오롯이 드러났다. 다소 생기를 잃었을진 몰라도 어여쁜 모습은 여전했다.
“반가웠어, 스물네 살의 정시온. 네 눈에 내가 보여서 정말 다행이야. 네 귓가에 내 목소리가 닿아서 기뻐.” 애틋한 목소리로 정원이 말을 이었다. “미안해, 널 잔뜩 괴롭혀 놓고 나만 이렇게 행복해해서. 내 몸은 깜박이는 불빛처럼 없어지기도 다시 나타나기도 하지만, 널 향한 내 사랑은 한 번도 꺼진 적이 없어. 사랑해, 시온아. 사랑해. 아무리 어두운 곳에 있어도, 이 빛을 길잡이 삼아 너한테 꼭 돌아갈게. 약속해.”
바람이 불자, 그녀의 손에 걸려 있던 하늘색 마스크가 커다란 원을 그리며 경기장 밖으로 떠밀려갔다. 이미 떠나버린 시온을 찾는 듯, 날개를 펄럭이며 검은 하늘을 방황한다. 정원의 약속이 담긴 편지를 발목에 건 전서구(傳書鳩)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