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에서 더 이상 술병을 놓을 공간이 없어졌을 때야 회식이 끝났다.
"김 과장, 2차 가야지."
"과장님, 아직 시간도 얼마 안 됐는데 2차 가셔야죠."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놔둘 사람들이 아니다. 전생에 술에 원한이라도 져서 전부 먹어 없애기라도 할 모양인가. 희미해져 가는 몸의 감각과 메슥거리는 속이 더 이상의 술은 안된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 과장은 거절 할 수가 없었다. 조만간 있을 승진심사에 박 부장님이 관여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언제까지 과장으로 있을 거야?"
맞벌이를 하여 자신보다 늦게 퇴근하는 마누라도 김 과장보다 여섯 살이나 어린 최 차장도 했던 소리였다. 물론 그라고 그러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입사 동기들은 저만치 앞으로 나가 있고 자신만 이 자리에 있다는 것에 자괴감을 느낄 때도 많았다. 하지만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 자식들을 떠올리며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나갔다. 이번에야 말로 김 과장은 김 차장으로 승진을 하고야 말겠다고 다시 마음을 잡았다.
3차에 이르러서는 이제 정신을 붙잡고 있기조차 힘들었다. 다행인지 박 부장님은 이미 나가떨어져 식탁 위에 엎드려 있었지만 김 과장 자신도 버티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자신보다 윗급의 사람들은 이미 정신이 가물가물해 보였고 마침 얼마 전에 들어온 신입사원이 마이크를 잡았을 때 전화가 온 척을 하고선 조용히 밖으로 빠져나왔다.
을씨년스러운 늦가을 바람이 차갑게 뺨을 때리니 조금은 정신이 돌아오는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미 들어간 술이 도로 빠져나올리는 없었기에 비틀거리며 거리를 걸었다.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간판들과 할로겐등이 비틀거렸다. 물론 빛이 아닌 김 과장 자신이 비틀거리는 것이었지만 이미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본능 외에는 이치에 맞지 않는 생각들이 이리저리 나돌았다. 곧 다가올 딸의 생일에는 명품 가방이라도 사줘야겠다던지 앞에 보이는 전봇대는 또 왜 이리 커진 것인지 고생하는 마누라에게 뽀뽀 한 번 쪽 해주고 싶다던지.
대로변으로 나오니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여 차들은 쌩쌩 저마다의 행선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김 과장은 택시를 타기 위해 이리저리 손을 흔들었지만 그날따라 왠지 택시가 서지를 않았다. 제대로 일어 서있지도 못한 채 비틀거리며 손을 흔들어서 그런가. 그래서 콜택시라도 부를 요량으로 휴대폰을 꺼내 들려는 순간 그의 앞에 택시 한 대가 멈춰 섰다.
"아이씨, 모범이네."
하지만 이것 외에는 멈추는 택시가 없었기에 하는 수 없이 타고 말았다. 그는 뒷좌석에 앉자마자 술기운에 못 이겨 눈을 감은채 행선지를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직행으로 가는 길이 막혀서 그런데 좀 돌아서 가도 괜찮을까요?"
"아 예. 뭐 그러면 좋죠."
이미 택시를 탄 이상 될 대로 돼라.
그는 자리에 앉은 지 1분도 되지 않아 결국 잠에 들고 말았다.
"돌아서 가도록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