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구역 신전에 균열이 열렸다.
신전에? 여기? 이 곳?
하위 관찰자들로부터 보고를 받은 7대 아이어는 얼굴을 찌푸렸었다. 그럴리가 없잖아. 하고 말하며.
신력의 근원인. 그것도 이 세계의 가장 강력한 신전인 제 1구역의 대신전에서 마력의 균열이 일어났다고?
하지만 곧 그 균열은 강하고 빠르게 진해지기 시작했고 7대 아이어는 급하게 긴급상황을 선포 했다. 현재 전투 가능한 전사들은 모두 소집했다. 하지만 균열은 그 어떤 균열들보다 빠르게 열렸다. 관측한 지 1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이다. 난리가 난 관찰원들 사이 그들이 발견한 유일한 희망은 균열의 규모가 매우 작다는 사실이었다.
"회색인가?"
가장 약하고 작은 마물을 지칭하는 용어.
균열의 크기로 봤을땐 회색이 아닐 가능성은 매우매우 희박했다.
하지만 단언할 수 없는 이유는 역시 그 균열이 다른곳도 아닌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 신력의 농도가 거의 100에 수렴하는 이 곳에서 정말로 균열이 일어난 것이 'Noone'(노원)이 아닌 어떤 한 마물의 짓이라면 상상도 하기 싫다. 그렇다면 그 마물은 붉은색일지도 모른다.
"현재 정확한 위치가 어디야?! 그린!"
"....본,"
자신 앞의 화면을 보이며 몸을 돌린 부하의 몸짓에 아이어는 바로 달려갔다.
"........"
화면에 뜬 글자를 읽은 아이어는 묵묵히 그대로를 통신기에 써내려간 후 보냄 버튼을 눌렀다. 옆에서 자신의 부하는 보기 드문 겁먹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뭔가 불길한 느낌이야 본”
“...아냐. 그렇지 않아. 괜찮을거야”
하지만 그도 그의 부하의 말에 속으로는 동조하고 있었다. 그는 무언가 알 수 없는 불안과 긴장에 주먹을 꾹 쥐었다.
ㅡ{LOCATION}-CODE.207944}
화면에 떠있는 위치는 신전의 좌측 지하에 위치한 장소. ㅡ‘선조들의 방’. 죽은 전사들의 시체가 안치되어있는, S급 전사들을 제외한 모든 이들의 접근이 금지된 곳이었다.
.
.
본은 선조들의 방으로 달려가던 중이었다. 가봤자 너가 뭘 할 것이냐며 빨리 대피나 하자고 자신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던 -평소에는 죽여버리고 싶지만 어쨌든- 소중한 부하는 겨우겨우 떨쳐냈다. 그녀의 말이 맞다. 자신이 가봤자 비능력인인 자신이 전투에 무슨 도움이 되겠냐겠나마는 그는 대체 그 균열에서 무엇이 나타난것인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제 2차 세계멸망 이후 4년만에 열린 성전 내 균열이다. 그나마 베타가 아니라 알파균열이라는 점을 감사하게 여겨야하는 것인지.
신전을 울리는 대피 경고들이 엄청난 소리로 울린다. 그 소리가 더욱 자신의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심장을 뛰게 해 어지러웠다. 그는 눈을 꾹 감았고 그 때문에 그 순간 방향을 틀다 자신의 바로 앞까지 달려온 사람과 부딪힐 뻔 한다. 부딪히기 바로 직전 자신의 앞 사람의 양 어깨를 겨우 잡아챘다.
흰 가운을 걸친 남성이 크게 놀라며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식은땀이 흐르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베르딕 선생님?”
“본”
“여긴 왜! 왜 아직까지 남아계세요? 대피하셔야해요!”
자꾸 뛰쳐나가려 하는 남자의 양 어깨를 꾹 눌렀다. 남자는 창백한 얼굴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아니, 아니 저는 남겠어요. 그런데 길을 잃어서...!”
“안됩니다 베르딕 선생님 위험합니다! 당신같은 분은 본인이 다치지 않는게 저희를 돕는 일이라는 것 잘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 제가 아니라 본이 빨리 대피해야하는게 더 맞는 것 아니에요? B급 이상 비전투원들의 제 1원칙은 전투지에서 벗어나는 것 아닌가요?”
“가시죠”
황당한 표정의 베르딕의 시선은 모른 척 피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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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했다. 중간중간 합류하는 전사들과 함께 도착한 곳은 고요했다. S급만 접근 가능한 곳인 선조의 방은 본, 자신은 들어와본 적이 없는 곳이다. 게다가 지하쪽은 주로 창고나 능력자들의 훈련소로 쓰이기 때문에 자신의 주된 동선과는 매우 동떨어져 잘 올 기회가 없는 곳이다. 강당같이 넓은 곳에 시체들이 안치되어있는 곳이라는 설명만 한번 들었다.
굳게 닫힌, 에메랄드와 백금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커다란 문은 어쩌다 지나갈 때 눈길을 끌었었다.
그 굳게 닫혀있던 문이 현재 활짝 열려있다. 문고리쪽이 너덜너덜하고 그을린 자국으로 봐선 능력자들 중 어떤 이가 폭발시켜 잠긴 문을 연것같다. 문 앞쪽에서부터 전사들로 막혀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인파를 베르딕은 망설임없이 뚫고 지나가기 시작했다. 베르딕 선생님의 긴 밀빛 포니테일이 흔들린다.
밀쳐진 전사들은 그의 얼굴을 확인하곤 길을 터주었다. 화가 잔뜩 난듯한 얼굴로 돌아보는 전사들까지도 마찬가지였다. 베르딕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표정을 싹 지우고 바로 뒤로 한발자국 물러난다. 본은 조금 망설이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고요하다. 아직 마물이 등장하지 않은건가? 하지만 균열은 다 열린 상태였는데.
기묘한 침묵과 긴장감이 심장을 누른다.
분명 많지 않을 전사들의 수에도 불구하고 입구쪽에서부터 막혀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앞의 무언가와 멀리 거리를 두고 대치하고 있었다.
앞서나간 선생님이 걸음을 뚝 멈추었다. 본은 그 옆에 서며 저 멀리 보이는 인영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균열은 이미 사라진 후인것같다. 흰 대리석 바닥과 벽이 폭발한것처럼 부서지고 파여 있었지만 무너질정도의 규모는 일어나지 않은 것같다. 그리고 그 먼지가 자욱하게 날리고 있는 공간 위 서 있는 것은
“...ㅡ사람?”
여기저기 긁히고 찢어진 검은 넝마같은 것들로 온 몸을 감싸고 있는 남자. 천 위론 마르고 변색된 핏자국들이 가득했으며 어느 부분들은 아직도 선명한 붉은 색의 피들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지치고 다친 기색이 역력했다. 거칠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멀리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생했다. 서 있다기보단 겨우겨우 지탱해 있다라는 것이 맞는 말같다.
검은천들 사이로는 검고 긴 구불구불한 머리칼들이 삐져나와있다. 그리고 그 아래 형형히 빛나는 붉은 눈.
그는 숨을 들이켰다.
그의 오른쪽 눈은 검은 천으로 가려진 채였다. 왼쪽 하나의 안구만이 그 색을 번뜩이고 있었고 그눈은,
ㅡ마물과 똑같은 눈이다.
인외의, 다이아몬드 모양의 동공과 붉은 색. 마물과 똑같은 눈.
그렇다면 저건 사람이 아니란 것인가? 하지만 지금까지 사람 모양을 한 마물은 역사상 단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붉은 눈은 이쪽을 향한 적대심과 살기로 가득했다. 마치 들짐승같은 눈이. 피가 뚝뚝 떨어져야 할 것만같은 형형한 빨간색. 마주치는 것만으로 자신의 몸 위 모든 털들이 삐죽 서는 감촉이 생생하다.
그러다 본은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혼자인 줄 알았던 남성의 품 안에 무언가가 있다. 검은 천들로 가리어져 잘 보이지 않지만 그는 분명 무언가를 한 팔로 끌어안은 채였다. 검은 긴 생머리칼이 보였다.
본은 고개를 살짝 빼내며 그 무언가를 자세히 보기 위해 집중했다. 언뜻 언뜻 보였다.
무척, 비쩍 마른, 뼈밖에 보이지 않는 새햐얀 목덜미가...
그 순간 옆의 선생님으로부터 조용한 중얼거림이 새어나왔다.
“수라?”
경계태세를 취하는 전사들 사이 긴장된 공기 속에서 나직하게 내뱉어진 단어가 선명히 울렸다.
웅성.
그리고 그 작은 중얼거림이 놀라울 정도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뭐?
저게?
누군가가 기함을 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했던 분위기가 갑자기 요란스런 웅성거림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검은 남자의 눈매가 매섭게 일그러진다.
마치 소중한 인형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아이의 행위처럼. 그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이들의 시선으로부터 그것을 차단시키려는 듯 무언가를 더욱 안으로 끌어안았다. 일그러진 입가 사이 뾰족한 어금니가 드러난다. 짐승이 그르렁거리는 것과 같은 형태로 남자는 허리를 더 낮추고 이를 보였다.
전사들은 의문의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다가 앞을 보기를 반복했다. 한편 본은 다른 이들과 달리 방금 베르딕이 중얼거린 것이 무엇인지 인식하기까지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웅성거림이 그에겐 아득했다.
매우 짧은, 두 글자뿐인 단어였지만 그의 이성은 그 단어를 제대로 인식할 수가 없었다.
수라.
그러니까 그 ‘수라’라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그 사람을 뜻하는 말이 맞던가? 자신은 단 한번도 만나본 적 없는,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했던- 그 여자를 뜻하는 것이.
“아- 아-”
“선생님?!”
베르딕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놀라며 그를 부축하려 했지만 무릎을 꿇은 그는 자신의 힘에도 꼼짝하지 않았다.
“선생님, 선생님. 정신차리세요 선생님?!”
“아- 하아- 아- 으-”
실성한 사람같다. 동공이 요동치고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바닥을 짚은 두 팔과 다리가 미친듯 떨리고 있었다. 벌린 입 사이 알아들을 수 없는 신음같은 것이 쉴새없이 흘러나온다.
인자하고 침착한 성품으로 유명한 선생님의 이런 모습은 너무 당황스러웠다. 베르딕은 늘 조용했고 크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작게 미소짓거나 찌푸리는 것이 다인 사람이었다.
베르딕의 두 눈에서 눈물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앞의 그들에게 고정된 채로.
현직 전사들 중 그 누구보다 오래된 경험과 따라올 수 없는 숙련된 치유능력으로 많은 전사들의 멘토 역할을 하던 그다. 그런 그가 이성을 잃고 울고 있었다.
당황해 어찌해야할지를 모르겠는 본은 그 한 순간 기분 나쁜 감촉이 온 몸을 타고 오르는 것을 느낀다. 뜬금없이 언젠가 친한 능력계 전투원에게 들었던 말이 뇌를 스쳤다. 마물을 마주했을때 느껴지는 기분을 설명해주던 그 말이. 비전투원인 자신은 절대 공감할 수 없어 그저 신기하게 여기며 듣기만 하던 그 때의 말이.
본능이 시키는 반응. 본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마주했다.
숨이 막힐 정도의 깊은 증오와 살의로 범벅이 된 붉는 눈을.
그 눈은 자신 옆의 베르딕에 고정되어 있었다.
자기 자신은 절대 헤아릴 수 없을 것만 같은 아주 짙은 살기였다. 붉은 다이아몬드 동공이 쌜쭉 수축했다. 그 이면에 기묘한 만족감이 보여 등줄기에 소름이 쫙 타고 올랐다. 마치 찾았다는 듯 보이지 않는 웃음이 지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머릿속에서 경보가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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