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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저수지의 개들
작가 : Hotsan
작품등록일 : 2019.11.9

복학한 장무영이 이협이라는 사람을 만나고 벌어지는 일들.

 
우연은 의외로 많다.
작성일 : 19-11-09 23:30     조회 : 300     추천 : 0     분량 : 1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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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영아 오늘은 빨리 끝내자. 손님들도 없고. “

 무영은 행주로 테이블을 닦았다. 테이블뿐만 아니라 의자, 바닥에도 앙상한 닭 뼈들이 떨어져 있었다. 그는 올해 3월에 전역을 하고, 바로 복학했다. 하지만 사회는 항상 쓴 뒷맛과 함께 돈이 필요했다. 그렇게 입대 전에 일했던 미성 치킨을 다시 찾은 것도 3월이었다.

 “ 가 보겠습니다. 사장님 “

 시간은 8시 반이었다. 그는 빠른 손놀림으로 마무리를 짓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긴 성북천은 상가들로 둘려 있었다. 일요일이었지만 술 마시는 소리로 가득했다. 그는 휴대전화로 시간을 계속 확인하며 서둘러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

 

 “ 야 장무영 언제 올 건데 “

 무영은 전화를 한 손으로 받으며 시청역에서 빠져나왔다.

 “ 나 레포트 때문에 오늘 미술관 꼭 가야 해. 미안 먼저 마시고 있어. “

 그는 동기 김정욱의 칭얼거림을 사과로 얼버무리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두리번거리며 입구를 찾았다. 오늘 밤 그는 같은 과 사람들과 약속이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먼저 가야 할 곳이 있었다. 길을 올라가자 좁은 광장이 나타났다. 그 중앙에는 세 개의 아치형 입구가 조명으로 빛나고 있었다. 시립 미술관이었다. 등허리에 땀이 흐르는 듯 무영은 옷을 손으로 펄럭이며 거대한 유리문을 열고 들어갔다.

 “ 네 들어가세요 “

 무료한 얼굴을 한 직원은 표를 확인하고 무영을 전시관으로 들여 보냈다. 무영은 어두운 조명 밑을 서성였다. 관람 순서가 대충 정해져 있었지만, 지그재그로 신속히 몸을 움직이며 그림들을 보고 지나갔다. 모든 작품은 유화였다. 아주 거칠고 굵은 붓질로 그려진 산, 꽃, 과일, 사람의 얼굴들이 무작위 하게 걸려 있었다.

 “ 야수파. 블라맹크 전展 “

 무영은 야수파라는 단어도, 블라맹크라는 사람도 처음 들었다. 그는 생소한 몇 개의 그림을 보기 위해 만오천 원을 지급했다는 사실이 슬펐다. 하지만 돈도 관람 태도를 경건히 만들진 못했다. 그는 전시관을 자유롭게 거닐며 오늘 술자리에 누가 올지 생각을 했다. 그림들은 스쳐 지나갔고 무영도 아쉬워하지 않으며 그들을 보냈다. 10분 동안 그러길 반복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건지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귀환-

 어두운 바다에 작은 돛단배가 떠 있는 그림이었다. 거친 붓 터치와 명도 낮은 색들로 하늘과 바다는 어두웠다. 작은 배는 위태하게 흔들렸고, 파도는 거칠게 몰아쳤다. 과감한 붓의 진행으로 비바람 부는 바다는 야성적인 몸을 위협적으로 드러냈다.

 무영은 시선을 고정한 채 서 있었다. 몸은 비스듬히 앞으로 기울어졌는데, 멀리서 보았을 때 꼭 정신과 몸이 따로 노는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방자한 관람객의 침잠과 함께 실내에는 고요가 찾아왔다.

 “혹시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강의 들으시나요?”

 무영은 고개를 돌렸다. 인기척을 못 느꼈지만 어떤 여자가 그를 보고 있었다. 웃을 때 초승달처럼 변하는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녀는 따뜻한 조명 아래 서 있었는데, 아까 지나쳐 온 그림이 그를 따라온 것만 같았다.

 “아. 네. 듣고 있습니다.”

 그는 갑자기 나온 문예사 언급에 여자의 얼굴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명확히 얼굴이 떠오르진 않았지만 같은 교양 수업을 듣는 사람인 것 같았다.

 “ 과제 때문에 오셨죠?”

 무영은 어색하게 여자를 향해 말을 건넸다. 하지만 어느새 그녀는 묵묵히 그림을 보고 있었다. 무언가에 집중하는 사람에게 말을 건넨 것처럼, 방향을 잃은 자신의 말이 멋쩍어 무영은 그림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그때 조용히 여자가 말했다.

 “ 제가 원래 모르는 사람한테는 말을 안 걸거든요. 근데 신기해서요. 강의에서 온 사람 그쪽이 처음이에요. 다들 대학로나 예술의 전당으로 가지 여기로 오겠어요”

 

 무영은 같이 복학한 정욱과 시간표를 거의 다 같이 맞췄다. 하지만 딱 하나, 1학년 때 듣지 않았던 교양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어쩔 수 없이 독강으로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라는 강의를 신청했다. 첫 강의를 듣고 나서, 그는 그나마 있는 문학, 예술, 사회에 대한 흥미가 사라질 것 같았다.

 깜짝 레포트는 2주 전에 발표되었다. 개강한 지 1달이 지나고, 꽃눈이 갈라질 때였다. 문예사 교수는 갑자기 하나의 과제를 추가했다. 날씨가 좋아지니, 예술을 만나고 세 장의 레포트를 써오라는 것이었다.

 “ 친구들이랑 좋은 시간 보내고 오세요”

 그는 그 말을 잊지 못했다. 복학하고 나서 첫 독강으로 인해 아는 사람은 없었고, 어떤 예술을 만나야 할지도 명확히 답을 못 냈다. 그렇게 미루다 마감 기간까지 이틀을 남기고 오게 된 곳이 시립미술관이었다.

 

 “ 특별히 오고 싶어서 온 건 아니에요. 그림 잘 몰라요. 그리고 그림들이 다 이상하네요. 이게 인상파인가 봐요”

 무영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여자는 조용히 그에게 말을 건넸다.

 “ 그런데 왜 여기 멈춰 계셨어요?”

 그제야 그녀는 그를 제대로 바라보고 있었다. 둘은 눈이 마주쳤다. 여자의 목소리는 부드럽게 그를 짓눌렀다. 기분 나쁘진 않은 진중함이었다. 무영은 그녀의 말을 듣고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어두운 바닷가와 새빨갛게 태양이 지는 지평선. 흔들리는 돛단배. 단지 그것들이 이유가 되진 않았다.

 “ 이상해요. 단순해 보이지만 웅장하고, 조악한데, 마음을 할퀴어요. 저도 이곳에 많이 서 있었어요”

 고민으로 인해 찡그려져 있던 무영의 미간은, 그녀의 말을 듣고 풀어졌다. 둘은 입을 닫고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그들은 침묵을 사이에 두고 귀환을 편안히 지켜보았다. 오랜만에 보거나 처음 보는 사람과의 대담을 생각해 본다면 신기한 일이었다. 말과 말 사이, 시선과 시선의 짧은 간극은 상상 이상으로 광활했다. 그 참을 수 없는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온갖 쓸데없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서로의 간극을 인정하고 조용히 큰 바다에 몸을 뉘일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드는지는 모두 알고 있으리라. 그런데 이 둘은 그 짧은 대화에 그림과 그림 사이를 자유롭게 유영하고 있었다.

 둘은 비슷한 페이스로 그림들을 관람했다. 여자가 조금 더 앞에 나아가면서 그림을 보면 무영이 그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총 3개의 전시관으로 구성된 블라맹크전은 마지막 공간까지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하품을 참아가며 서 있는 아르바이트생들을 제외하고는 커플 한 쌍, 가족 한 무리뿐이었다. 아버지는 도슨트를 듣고 어머니는 아이에게 그림 하단에 붙어 있는 조그마한 설명을 읽어주고 있었다. 한없이 권태로운 곳이었지만 무영은 그걸 느끼지도 못한 채 그녀와 함께 조용히 그림들을 보았다. 블라맹크 특유의 투박하고 구불구불한 붓 터치와 유화의 깊이 있는 질감은 그의 대범함을 마음껏 드러내었다.

 전시의 마지막까지 왔을 때, 여자는 한 그림에서 유난히 움직이지 않았다. 눈을 그린 마을 정경이었다. 사실 무영은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다. 시골이나 작은 도시의 풍경을 소재로 한 그림들이 반복되면서 조금씩 흥미를 잃어갔다. 이 그림도 지나왔던 작품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여자는 집요하게 그 그림을 놓지 않았다.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는 듯 액자의 한 부분까지 눈 속에 넣고 있었다.

 “ 그림을 보는 거에요. 아니면 그림을 보는 절 보는 거에요?”

 여자는 그림을 보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꼭 그를 꾸짖는 듯했다. 격조 높은 아가씨를 몰래 쳐다보는 파렴치한이 된 것 같은 생각에 무영은 허우적거리며 말을 했다.

 “ 아니. 저 그림 보고 있었는데요”

 “ 하하하. 농담이에요. 미안해요. 그림 잘 보셨어요?”

 여자는 웃으며 무영을 흘깃 쳐다봤다. 그때 처음 무영은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다. 무쌍의 눈은 매끈하게 아치형을 그리고 있었고, 깨끗한 얼굴 뒤로 바짝 묶여 있는 머리가 달랑거렸다. 두꺼운 무채색의 셔츠는 그녀를 넉넉히 덮고 있었다.

 “ 네 대충요. 뒤로 갈수록 비슷한 주제가 많아서 더 보기가 지루하네요.”

 여자는 빙긋이 웃으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 대충 보면 아쉬우실 텐데요. 그럼 같이 나가실래요? 저는 이협. 경영학과 17학번이에요. 그쪽도 경영학과죠? ”

 “ 네? “

 무영은 곰곰이 생각했다. 어디서 들은 듯한 이름이었다. 흔한 이름이 아니었다.

 “ 마케팅의 이해. 마케팅의 이해 맞으시죠? “

 협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영은 그녀의 뜬금없는 자기소개에 다시금 현실로 돌아온 것 같았다. 머나먼 외지에서 아는 사람을 만난 듯, 같은 과라는 말은 무영에게 호의의 미소를 짓게 하였다.

 “ 역시 맞구나. 전공 수업에서 못 본 것 같은데. 전 16학번이에요”

 “ 그래서 이름은요? ”

 “ 아. 무영. 장무영입니다. ”

 둘은 출구로 향해 걸어갔다. 커다란 암막 커튼이 외부에서 들어오는 공기에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조명이 이제는 닿지 않는 커튼 바로 앞까지 왔을 때 이협은 발을 멈췄다. 갑자기 멈춘 그녀를 향해 그는 얼굴을 돌렸지만, 아주 짧은 어둠에 먹혀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 이 미술관에 귀신이 있다네요. 마지막 출구에 있는 암막 커튼을 걷으려 할 때 말을 건넨대요. ”

 무영은 진지한 목소리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 커튼만 열면 환한 공간인데 어떻게 귀신이 있어요. 출구를 나가려 할 때 귀신이 나오기에는 그 순간이 너무 짧은데요 ”

 “ 끝까지 들어봐요. 그러니깐 짧은 순간에 누군가가 나와서 물어본다는 거에요. 그리고 그 물음에 답하지 못하면, 환한 로비가 아니라 어두운 입구가 다시 펼쳐진대요. 강제로 한 번 더 관람하게 되는 거죠. ”

 “ 웃기지 않는..”

 “ 어떤 작품이 제일 좋았어? ”

 순간 무영은 이곳에 자신 외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어둠에 적응하지 못한 눈은 아직도 그녀의 윤곽만을 쫓고 있을 뿐이었다. 몇 초의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마지막 질문의 분위기만 묘하게 달라, 그녀의 말이 무례한 건지, 장난인 건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 귀환, 귀환이요”

 “ 그래요? 알겠어요. ”

 그녀는 암막 커튼을 홱 하니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 들어오는 빛으로 그녀의 옅은 미소가 보였다. 무영은 짓궂은 장난에 놀림당한 것 같았다. 밖으로는 완연한 밤이 내려앉아 있었다. 카운터에 앉은 직원은 고개를 올려 둘을 보고는 다시금 피곤한 눈을 내려놓았다. 무영은 조금 앞을 걷는 그녀를 따라 로비를 나갔다. 전체적으로 마른 걸음걸이는 경쾌하게 앞을 향해 걷고 있었다.

 “ 담배 피우시죠? 여기 흡연장은 뒤로 가야 해요. ”

 무영은 자기를 쿡쿡 찌르는 듯한 그녀의 말에 장단을 못 따라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하는 말 들은 정확히 들어 맞았다. 그게 더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익숙한 듯한 걸음으로 그녀는 흡연 장소로 나갔고, 도착하자마자 성급히 담배를 꺼냈다. 무영은 조용히 앞에 섰다.

 “ 담배 안 피우세요? 아까 냄새 나던데. ”

 “ 핍니다. 그런데 몇 살이세요? ”

 “ 무영 씨랑 비슷할 걸요. 제가 07학번이 아니라 17학번이라서요. ”

 협은 연기를 내뿜으며 빙긋이 웃었다. 지독한 무쌍은 정확히 뒤집어진 초승달을 만들어냈다. 무영은 미적대며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찾았다. 라이터가 손에 잡히지 않는 듯이 그는 계속 주머니를 뒤졌다. 협은 조용히 라이터를 그에게 건넸다.

 “ 화나지 않으셨죠? 미안해요. 제가 가끔 선을 넘으면서 장난칠 때가 있는데.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랬네요. 너그럽게 봐줘요. ”

 무영은 그녀의 작은 손에 흔들리는 불길을 향해 목만 밀어 담배를 댔다. 둘은 조용히 시간을 태웠다.

 “ 레포트 잘 쓰셨으면 좋겠네요. 아. 참고로 그 교수님은 개인의 감정과 느낌을 중요시해요. 책에서 배웠던 사조나 주요 비평 내용 말고요. ”

 협은 시계를 보며 말했다. 저걸로 시간을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작은 손목시계였다. 낡은 가죽끈이 위태롭게 시계를 잡고 있었다.

 “ 전 바빠서 그만 가볼게요. 천천히 태우고 가세요. 아 그리고 23살입니다. ”

 그녀는 어깨에 작은 크로스 백을 메고 사라졌다. 무영은 협의 서두르는 걸음을 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라이터를 찾아 새로 한 대를 다시 피웠다.

 

 *

 

 고기에서 기름이 떨어지고 있었다. 밖은 아직 쌀쌀했지만 가게 안은 열기로 가득했다.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정욱은 고개를 돌렸다. 무영은 손을 흔들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아 이 새끼 이제 왔네. “

 정욱은 반갑게 그를 향해 소리쳤다. 김정욱은 장무영과 함께 같은 시기에 입대한 16학번 동기였다. 정욱은 2주 일찍 전역하여 이리저리 쏘다니고 있었다. 아직 포마드가 서툰 그의 머리는 어설프게 결이 나 있었다. 무영은 안쪽에 앉아 있는 인동을 보고 인사하며 들어가서 앉았다.

 “ 야 혼자 미술관은 무슨.. 청승 열심히 떨었네? “

 정욱은 소주잔을 꺼내며 킬킬댔다. 이미 테이블엔 빈 병들이 놓여 있었다. 그들의 몸에선 희미한 술 냄새가 풍겼다. 인동은 검은색 가죽 자켓을 벗으며 무영에게 말했다.

 “ 무영아 너가 보내 준 파일 같이 봤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거 슬로건을 좀 더 확실히 잡아야 해 “

 인동은 찢어진 눈으로 그를 치켜 봤다. 눈썹은 짙었지만, 살짝 올라간 눈꼬리는 날카로운 인상을 줬다.

 “ 있잖아. 너무 안일해. 안 그래도 얘네 지금 저가 항공사인데, 이렇게 고객 친화적으로 가면 평생 국내선만 서비스해야 한다니까. “

 무영은 그의 말을 듣고 끄덕였다. 그는 정욱, 인동과 함께 기성항공 사업 공모전을 준비 중이었다. 복학하자 말자 정욱은 무영에게 같이 준비하자는 말을 했고, 무영은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마음에 덥석 수락했다. 그리고 공모전의 중심엔 인동이 있었다. 김인동. 무영과 정욱보다 3살 많은 그는 이제 졸업반이었다. 항상 옆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고, 무슨 일을 해도 군더더기 없이 처리했다. 야구점퍼보다는 가죽 자켓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정욱이 연결해 주지 않았다면, 무영은 친해질 기회도 없을 사람이었다.

 아직 한 달 반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처음은 자기를 불러 끼워준 정욱이 마냥 고마웠으나 시간이 흐르며 공모전 준비가 쉽지 않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4학년 인동은 꽤 많은 조언을 주었고, 무영은 그의 말을 묵묵히 따랐다. 감으로나 경력으로나 인동은 탁월한 선배처럼 느껴졌다.

 “ 아니 형 저번 광고 공모전도 수상 했다면서요. 저희 잘 좀 도와주세요. 저 형 한 마디 믿고 놀고 싶은 거 딱 접고 집에 붙어 있다니까요. “

 정욱은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 결국, 중요한 건 실행력이야. 기업 이미지랑 대상 좁히는 게 힘들지, 그것만 하면 다음은 쭉쭉 나가는 거라고.“

 인동은 소주를 입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그는 1년 전에 했던 한호 기업 공모전을 수상한 경험을 말하기 시작했다. 인동의 흰색 셔츠는 살짝 넉넉해 보였는데, 그의 덩치를 더 크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정욱은 그의 경험을 끄덕이며 들었다. 무영은 자동으로 돌아가지 않는 꼬치를 조금씩 돌렸다. 몇 안 되는 테이블은 만석이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 아 이제야 왔네. 혜인아 이쪽이야 이쪽. “

 인동이 소리쳤다. 무영은 입구 쪽을 봤다. 한 여자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딱 붙는 빨간 가디건 위로 긴 생머리가 찰랑거렸다. 인동은 벗어 두었던 자켓을 치우며 재빠르게 자리를 만들었다.

 “ 오빠 잘 있었어요?”

 그녀는 정욱과 인동에게 살가운 인사를 건네며 자리에 앉았다. 무영은 눈썹을 살짝 움직이는 눈인사에 어중간한 묵례로 답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 혜인아 왜 이리 늦었어. 오빠 오랜만에 곤암 왔는데 너 못 보고 갈 뻔했잖아.”

 인동은 짐짓 눈을 흘기며 잔과 수저를 챙겼다.

 “ 미안해요 오빠. 오늘 영상 찍는 게 늦게 끝나서요. ”

 “ 어 너 바빠 보인다. 그런데 혜인아 영상은 무슨 영상?”

 정욱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 이번에 학교 홍보대사 신청했는데 붙었거든요. 그래서 소개 영상 찍고 왔어요.”

 여자는 부끄럽듯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 여자의 시선은 무영에게 도착했다. 무영은 조용히 남은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그는 정욱이 떨어댔던 호들갑을 기억해냈다. 혜인은 확실히 미인이었다. 무영은 그녀를 전공 수업에서 몇 번 본 걸 기억했다. 하지만 수업에서 정욱은 그녀에게 아는 체를 하지 않았었다. 언제 그녀와 친해졌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 아. 맞네. 이야기하는 건 처음이지. 여기는 장무영. 내 동기야. 얘도 전역한 지 한 달도 안 됐다”

 신났는지 정욱은 무영을 보며 연신 웃음을 흘렸다.

 “ 안녕하세요. 장무영입니다. ”

 무영은 어색하게 그녀를 향해 말했다.

 “ 야 안녕하세요. 장무영입니다? 얘가 이렇다니까.”

 인동은 무영을 따라 했다.

 “ 안녕하세요. 박혜인이에요. ”

 혜인은 웃으며 무영을 바라보았다.

 “ 아니 그러니깐 처음이잖아요. 그러면 정식으로 인사해야죠. ”

 무영은 멋쩍게 웃었다. 혜인의 등장으로 많은 술잔이 돌았다. 투명한 물에 빨간색 물감이 떨어졌다. 혜인은 자리에 농도를 짙게 만들었다. 무영은 그녀가 빛이 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아슬아슬하게 즐기고 있었다. 전역 전 꿈꿨던, 새로운 관계에 대한 기대감이 설렘으로 피어올랐다. 그렇게 술병이 점차 늘어가기 시작했을 때, 인동은 사람들을 주욱 둘러보며 말을 꺼냈다.

 “ 얘들아 혜인이도 이제 2학년이고, 같이 공모전 준비하면 좋을 것 같은데. 어떠냐? “

 혜인은 처음 듣는 말인 듯 그를 봤다.

 “ 아니 선배. 아직 멤버도 안 짰고, 아무것도 안 한 상태라면서요? 이미 선배들이랑 하고 계셨던 거에요? “

 “ 진짜 한 거 별로 없어. 지금 들어와도 돼. 너 혹시라도 내가 편의 봐준다는 생각 하려면 하지 마라. 나 그런 거 딱 싫어해. “

 인동은 어깨를 들썩이며 혜인을 봤다.

 “ 잘됐네. 혜인아 너 포토샵 좀 한다며. 좀 수월하겠다. “

 정욱은 혜인이 들어올 줄 예상했다는 듯이 환영을 했다. 옆 테이블에서는 동아리의 회식인 듯 소리를 지르고 박수를 쳐대고 있었다. 갑자기 시끄러워진 주위로 넷은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하지만 무영만 고개를 숙인 채 화덕의 불을 보고 있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 무영아 혜인이 들어오는 거 별로야? “

 “ 아니요. 저야 좋죠. 후배가 태워주는 버스 타고 싶네요. 허허”

 무영은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허허. 짧게 내뱉으며 크게 웃어 보였다. 벌써 한 달 째 그가 낸 기획만 두 개였다. 아무것도 안 했다 하기엔 그가 들인 노력이 꽤 컸다. 그 노력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 또 다른 핀잔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정욱이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구호를 지르며 술을 따르는 시끄러운 환경 속에서 무영의 테이블만 점점 조용해졌다.

 “ 오늘 미술관은 왜 갔냐? “

 정욱은 급하게 생각난 듯 무영에게 말했다. 무영은 화덕의 불에서 눈을 떼고 말했다.

 “ 아.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과제 때문에. “

 “ 오 선배 그거 들으시는구나. 저는 작년에 들었어요. 이승환 교수님 거에요? “

 혜인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말에 반응했다.

 “아니요, 저는 이본 교수님이요. “

 무영은 밝은 목소리에 흠칫 놀라 그녀를 보았다.

 “ 뭐 보고 오셨는데요? “

 “ 블라맹크라고 처음 듣는 화가였어요. 느낌이 굉장히 강렬했는데요….“

 혜인은 무영이 말하는 걸 꼼꼼히 보았다. 그녀에게 꼬박꼬박 하는 존댓말이 어색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놓게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주제에 쉽게 몰입하는 점도 그러했다. 엄마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두서없지만 신나게 하는 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그녀의 작은 입은 드디어 긴장이 풀린 듯 기분 좋은 반원을 그렸다.

 “ 선배 혼자 다녀오셨어요? “

 혜인은 귀환이라는 작품을 설명하고 있는 그의 말을 듣다 물었다.

 “ 아. 독강이라서 혼자 갔지. 그런데 독강 아니더라. “

 “ 누구 있었어요? “

 “ 경영 한 명 있었어. 17이면 너 동기니깐 알겠다. 혹시 이협이라고 들어 봤어? “

 무영은 양꼬치를 우물거리며 혜인에게 물었다. 그는 아까 이협의 모습이 떠오른 듯 주머니의 라이터를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바로 오지 않는 반응에 그는 혜인을 보았다.

 “ 아. 이협 언니요. 알죠. 저랑 동기인 걸요. “

 혜인은 소주를 넘기며 살짝 눈을 깔았다.

 “ 근데 유명해요. 수업만 듣고 뿅하고 매일 사라져서. 굉장히 매력 있게 생겼는데. 애들이 얼음공주라고 부를걸요. 같이 갔어요?

 “ 아니 갔는데. 거기 있길래. 경영학과인 거 알고 서로 통성명 정도 가볍게 했지. “

 “ 이협 걔 마케팅의 이해도 들어요. “

 살짝 가라앉은 그녀의 목소리에 무영은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지만, 그새 오오 하는 정욱의 야유로 손사래를 치기 바빴다.

 “ 야 장무영. 이 새끼 진짜. 얌전한 고양이가 이래서 무서워."

 인동도 무영을 흘깃거리며 봤다.

 “ 내가 너 소개 하나 시켜주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벌써 이렇게 나가 버린다고? 진짜 미치겠다. “

 인동의 말에 정욱이 자기도 해달라는 식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진짜 나도 해달라고’ 하는 그의 외침이 옆에 앉은 사람들의 구호보다 더 크게 들려 모두 웃음을 쏟아냈다. 무영이 앉은 테이블은 주방과 붙어 있는 곳이라 옆에서 기름 볶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여기저기서 잔을 부딪치고 있었고, 동아리 회식이 으레 그렇듯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고소한 기름 냄새와 사람들의 땀 냄새는 묘하게 섞여서 그들을 감싸 안았다. 무영은 인동과 조금 더 가까워진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인동과 정욱, 무영은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갔다. 좁은 곤암 시장 골목은 어느새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컴컴해져 있었고, 술집들에서만 불빛이 새어 나왔다. 작은 소쿠리와 대야를 파는 만물상 옆에 세 명은 섰다. 무영은 아직도 대학 근처에 있는 재래시장이 어색했다.

 “ 형 혜인이랑 친해요?”

 정욱은 인동을 보며 말했다.

 “ 야 내가 오늘 오랜만에 곤암동 온 이유잖아. 혜인이 만한 애 없다 진짜. ”

 인동은 살짝 헐거운 듯이 시계를 계속 매 만지며 이야기했다. 정교하게 새겨진 문양과 복잡한 초시계가 움직이는 은색 메탈 시계는 은은히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 야 장무영. 넌 괜찮은 애들 못 찾았냐? 동기끼리 돕고 살자. ”

 정욱은 연기를 옆으로 뿜으며 그를 향해 말했다.

 “ 잘 모르겠네. 왜 이리 예쁘고 멋진 애들이 많냐.”

 무영은 피식하고 웃으며 말했다. 어느새 담배를 다 핀 인동은 향수를 찾았다.

 “ 무영아. 형이 말했잖아. 실행력이라고. 그리고 옷 좀 잘 빼입고. 술 한 번 시원하게 먹고. 그리고 사람 찾으려면 사람 있는 곳으로 가야지 인마. ”

 인동은 금세 추워지는 어둠을 보고선 등을 돌렸다.

 “ 대신 사람 가려서 만나고 “

 그는 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무영은 쌀쌀한 밤바람이 좋았다. 공모전 준비를 하는 내내 인동의 조언은 항상 날카로웠다. 무영은 자신이 밉보인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하지만 오늘은 몽롱한 술 때문인지, 인동이 자기를 좋게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따라 들어가는 정욱을 보며 담뱃불을 천천히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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