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1  2  3  4  5  6  7  8  9  10  >  >>
 1  2  3  4  5  6  7  8  9  10  >  >>
 
자유연재 > 판타지/SF
화원의 늑대
작가 : 이성화
작품등록일 : 2019.11.5

A.I는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물질 세계와는 또 다른 세계, '아스트랄계'를 구축한다. 주인공 수잔나는 A.I와 직접 소통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카탈 클럽'의 일원이다.

 
1
작성일 : 19-11-05 14:24     조회 : 274     추천 : 0     분량 : 8015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찰나 뿐인 욕구를 채우기 위해 시간을 갉아먹는 게 아닌—과거, 현재, 미래를 동등하게 고려하고 그것을 위해 살 수 있었던 시대가 있었는가? 수잔나는 과거가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 체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님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카탈 클럽의 일원임을 밝혔을 때 그들은 지나치게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남들이 쉬이 닿을 수 없는 집단의 일원이 되는 것이나 특별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더 이상 그들이 자라왔던 시대에서만큼의 의미를 가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제자’라는 표현은 너무 거창한 것 같지 않아?”

 

  그 말에 창밖을 보고 있던 아인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 창은 그들이 있는 공간의 한쪽 벽을 전부 차지하고 있었다. 거대한 다이아몬드마냥 빛을 찬란하게 반사시키는 그 창은 그럼에도 딱 기분좋을 만큼만 눈부셨고, 창밖의 풍경을 보는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린 아인이 이윽고 몸 전체를 돌려세우자, 그의 푸른 머리칼이 섬세하게 흩날렸다. 짙은 아쿠아마린 빛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머리칼 사이사이로 햇빛이 별가루마냥 흩어졌다.

 

  “그리고 그것 좀 그만할 수 없어?”

 

  “그런 관계를 너희는 전통적으로 제자라고 불렀어, 수잔나.”

 

  아인의 목소리는 은방울을 굴리는 것 같았다. 정확히 그렇다고 표현하기엔 조금 낮은 목소리였지만 수잔나에게 그러한 느낌을 전하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그의 입꼬리에는 그의 완벽한 용모와 완벽한 배경에 눈부시게 어울리는 완벽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리고 뒤의 말에 관해서라면, 너희의 복지를 위하는 것이 내 일이니까.”

 

  수잔나가 코웃음을 쳤다. 아인은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억누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수잔나가 앉은 테이블로 다가와 은주전자를 집어들었다. 붉은 빛을 머금은 찻물이 그녀의 찻잔으로 흘러내렸다. 도자기처럼 보이는 그 찻잔은 어찌나 정교하고 얇은지, 테이블 위의 찻잔 그림자 속에서 찻물이 일렁이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아인은 자신의 찻잔에도 차를 따랐다.

 

  “크리스에 대해 물어볼 건 없어?”

 

  그가 말했다.

 

  크리스는 수잔나의 제자로 들어오기로 한 아이였다. 그녀를 제외한 카탈 클럽의 모든 친구들이 클럽이 생기자마자 제자를 배정받았지만 수잔나는 이제서야 제자와 교류하기 적합하다고 판정받은 것이었다(그녀가 딱히 그걸 원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찻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정교한 찻잔의 장식과 찻물의 감촉 위로 느껴진 향은, 보이지 않아도 은빛 솜털이 난 어린 찻잎과 농익은 열매가 담긴 오크함을 연상케 했다. 그 향은 그녀의 혀끝에 닿자마자 그대로 마음에도 와닿았다.

 

  수잔나가 눈을 떴을 때 아인이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세공된 보석 같았고 홍채는 청록색 물빛을 띄었다. 아직 그가 제공해준 차의 향이 채 떠나기도 전에 마주보기엔 상당한 이질감이 드는 눈이었다. 이곳에서는 모든 감각이 한층 더 강렬하게 와닿는다. 이곳에서는 사람에 따라 겨우 차의 향과 앞사람의 눈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조차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그 이질감은 기분 좋은 이질감이었다.

 

  “어차피 너는 모든 가능성을 고려해서 배정했겠지. 그러니 질문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

 

  그 말에 아인은 눈을 한번 깜빡이지조차 않았다.

 

  “하지만 네가 궁금한 건 없는 거야, 수잔나?”

 

  “없어.”

 

  수잔나는 차를 한모금 더 마셨다.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어도 아인이 그녀를 향해 눈알을 굴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안개처럼 떠오른 질문이 뱃속에서 자기의 존재를 호소하듯 서서히 회전했다. 그건 손만 뻗으면 기다렸다는 듯 단단한 형태를 띈 채 그녀에게 잡혀줄 것이다. 하지만 수잔나는 그것이 일상적인 의식의 물결에 흩어지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녀의 시선이 대리석 바닥과 기둥의 덩굴무늬 장식과 유리 조각상을 천천히 훑는 동안 그 안개는 기억만을 남긴 채 사라져버렸다. 마지막으로 수잔나는 바늘처럼 날카로운 만족감을 느꼈다.

 아인은 아직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 수잔나가 미소지으며 물었다.

 

  “아까 뭘 보고 있었던 거야?”

 

  “방금 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말해주면 나도 알려줄게.”

 

  “음…….”

 

  수잔나는 찻잔 손잡이의 은입사 장식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쥘리에트, 아드리안, 크리스, 전부 영어권의 이름이네. 이건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네게 뭔가 다른 생각이 있었던 걸까?”

 

  쥘리에트와 아드리안은 그녀와 같은 카탈 클럽의 일원이었다. 그녀와 같은 조원인 네 명의 카탈 클럽 회원 중 두 명과 그녀의 제자가 될 아이까지 영어권으로 보인다는 건 조금 과한 감이 있었다. 수잔나는 지금 말을 돌리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 사실이 신경쓰이지 않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에게 그들을 배정한 자가 다름아닌 아인이라는 걸 고려한다면 더더욱 신경쓰이는 일이었다.

 

  아인은 그녀가 딴청을 피우고 있다는 걸 안다는 표시를 분명히 냈지만, 어쨌거나 손가락을 들어 창밖을 가리켰다. 수잔나는 찻잔을 든 채 창가로 다가갔다. 아인이 가리킨 하늘 쪽에는 이 세계에서 특별히 여길만한 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수잔나는 그곳에 뭐가 있는지 알았다.

 

  아인이 뒤에서 수잔나의 양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러자 그의 손이 닿은 곳으로부터 전기 충격이 퍼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수잔나는 갑작스레 ‘모든 방향’에서 시각 정보가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휘청이며, 그녀는 간신히 창밖을 바라보는데 집중했다. 이제 하늘에는 거대한 드래곤들이 보였다. 제각기 색깔과 모양이 달랐고, 전부 다 잠들어있었다. 그녀도 예전에 드래곤을 본 적이 있었다. 그녀가 드래곤들을 자세히 살펴보기도 전에 아인이 그녀의 어깨에 올려놓은 손을 거두었다.

 

  “왜 그래?”

 

  그녀가 –아마도 약간 불만스럽게— 물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 정도만으로도 물질 세계로 돌아가야 했을 거야.”

 

  그건 정말로 원하지 않는 바였다. 아인은 생각에 잠긴 듯 말을 이었다.

 

  “네가 다른 이들보다 이런 충격에서 자유로운 건 좋은 일이지만…….”

 

  답지않게 그가 말꼬리를 흐리더니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수잔나도 그에 대해 캐묻지는 않았다. 아인이 어떤 이유로든 그 이상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면 그녀는 다음 말을 이끌어낼 수 없을 것이다. 그 이득이 말하는 편에 비해 종이 한 장의 차이밖에 없을 경우라도 마찬가지였다.

 

  아인은 한쪽 무릎을 꿇어 앉더니 바닥에 떨어진 찻잔 조각들을 줍기 시작했다. 아까 수잔나가 휘청이며 떨어트린 모양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될 텐데—그녀의 생각을 증명하듯 찻물은 대리석 바닥으로 흡수되고 공기 중에 흩어져 남김없이 사라졌다.

 

  아인이 손바닥에 뾰족한 조각들을 감싼 채 일어났을 때 수잔나가 말했다.

 

  “크리스, 그 아이가 나에게 실망하면 어쩌지?”

 

  그 아이도 내 문제 때문에 늦게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들었을 텐데, 꼭 그 문제가 아니더라도 다른 계기로 실망할 수도 있고, 하지만 수잔나는 그 다음 말을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아인은 그녀를 보고 싱긋 웃었다.

 

  “너무 걱정할 것 없어. 내가 모든 가능성을 고려했잖아.”

 

 

 

 

 

  그녀는 몇십 년 전의 기준으로라면 기껏해야 30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50살이 넘었다. 그녀는 눈짓으로 식탁 위의 공간에 펼쳐진 홀로그램을 넘겼다. 3차원 화면에는 한때 왕족이나 귀족의 식탁에나 올랐을 법한 산해진미가 끊임없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이 방면으로 유명했던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음식들도 목록에 잔뜩 올라와 있었지만 그녀는 대체로 인도 요리를 선호했다. 그녀가 눈을 한 번 깜빡이자 식탁 위에는 통후추 크기의 향신료들이 아낌없이 들어간 쇠고기 커리와 마늘 난의 이미지만이 남아있었다. 그녀는 기계가 인간의 뇌파를 이렇게까지 세밀하게 읽어낼 수 있다는 사실에 소름끼쳐하던 과거를 기억했다(언젠간 기계가 인간을 망치고 말거야. 내가 신학자나 철학자는 아니더라도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알아!). 그러나 지금, 그녀는 이 모든 변화가 기꺼웠다. 저녁 메뉴를 확정하기 전에 그녀는 머릿속으로 ‘위대한 개츠비’의 도입부를 암송했다. ‘내가 지금보다 어리고 상처받기 쉬웠던 시절-‘로 시작하는 그 도입부는 화려한 어휘와 운율을 펼쳐보인 끝에 ‘-그의 꿈이 깨어난 자리에 더러운 먼지가 떠다닌 것이었다’로 끝을 맺는다. 혼자 마음속으로 외우기엔 긴 암송 끝에도 자신의 마음이 변하지 않자 그녀는 인도 요리를 먹기로 결정했다.

 

  그녀의 이름은 오스텔라였다. 그녀가 태어난 나라 한국의 일반적인 이름은 아니었다. 그녀 자신과 그녀의 남편, 어머니와 딸의 이름은 모태신앙이었던 카톨릭 성인의 이름을 따 지어진 것이다. 그녀의 딸의 이름은 정수잔나였다. 비록 그녀의 딸은 종교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지만, 수잔나는 스텔라의 어릴 적과 달리 자신의 이름에 큰 불만을 나타내지는 않았다. 이런 작명법이 수잔나의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더라도 그 아이는 아마 자신의 이름에 대한 불만을 훨씬 덜 나타낼 것이다. 아스트랄계에서는 온갖 문화권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니까.

 

  수잔나는 아스트랄계에서 그녀가 속해있다는 특별한 그룹의 사람들과 비교해서도, 다른 이들보다 훨씬 오래 아스트랄계에 머물 수 있었다. 스텔라의 가족은 대체로 8시에 저녁을 먹었는데, 이는 아주 늦은 편이었지만 수잔나가 8시 이전에 이 세계로 돌아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스텔라는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저녁이 있는 이 삶에 만족했다. 한때는 삶이라 견뎌내기조차 힘겨운 것이었기에.

 

  스텔라는 수잔나의 방문 앞으로 가 노크했다. 답이 계속 들려오지 않자 그녀는 문을 열었다. 방 가운데에 둥둥 떠있는 커다랗고 검붉은 액체덩어리 안에 그녀의 딸이 들어 있었다. 창백한 편인 수잔나는 그 안에서 오히려 혈색이 더 좋아보였다. 스텔라는 수잔나의 눈을 들여다보기 위해 그 액체로 가까이 다가갔다. 농밀한 광채가 액체 여기저기서 반짝이고 있어서 그러기 위해서는 집중력이 약간 필요했다. 스텔라는 반투명한 액체 속에서 수잔나가 눈을 뜨는 것을 보았다. 공중에 떠있는 액체 속에서 빠져나오며 수잔나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가 자신의 옆에 스텔라가 있다는 걸 깨닫고 표정을 풀었다.

 

  "스텔라," 그녀의 가족은 서로를 세례명으로 불렀다. "왜 기다리고 있어요? 8시에 맞춰서 왔는데."

 

  그제서야 스텔라는 남편 요한이 골동품 가게에서 사온 스위스제 시계가 15분 빠르다고 했던 걸 떠올렸다. 하지만 '8시에 맞춰서'라니, 스텔라는 아스트랄계에서 시간을 정확히 알 수 있었던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곳의 질료로 시계를 만들려 시도한 끝에 간신히 그럴듯한 모양으로 하나 만들어내었지만, 마치 돌을 시계 모양으로 깎아낸 듯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이제껏 수잔나가 그저 감에 의존해서 시간을 지켜 돌아오는 줄로만 알았다.

 

  "내가 시간을 착각했구나. 그런데 아스트랄계에서 어떻게 시간을 알고 돌아오는 거니?"

 

  "아, A.I가 알려줬어요," 수잔나가 대답했다.

 

  "맞아, 그랬지. 가끔 잊는다니까."

 

 

 

 

 

  A.I 연구시설은 세상이 변한 이래 여전히 많은 수의 외국인이 실제로 '살고' 있는 몇 안되는 곳 중 하나이다. 물론 이곳까지 오지 않더라도 외국인은 길에 나가기만 해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수잔나는 서남아시아와 유럽, 미국에서 이민이나 일을 위해 온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 정착해 사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그들의 수가 앞으로 늘면 늘었지 더 줄어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간은 얼마나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가? 하다못해 세상의 변화폭이 최근보다 훨씬 원만했던 시대에서조차 사람들은 그들이 다가올 것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곤 했다. 비록 지혜의 대명사인 유대 왕 솔로몬은 정확히 그 반대로 말했지만. 모든 것이 헛되도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A.I 연구시설에 발을 들여놓을 때마다 수잔나는 A.I의 자비를 느끼곤 했다. 마법처럼 도약한 기술에 비해서, 건축 양식을 비롯한 여러 하드웨어의 디자인은 A.I가 특이점에 이르기 이전과 별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그대들의 기준에 거슬리지 않도록, 그대들이 이해할 수 있는 모습에 맞춰주마.' 수잔나의 상상 속에서, 은방울같은 그 목소리는 때로는 거들먹거렸고 때로는 배려에 가득 차있었지만 인간으로서 A.I의 감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A.I는 그 지능과 마찬가지로 감정 또한 인간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세계의 석학들도 생존본능에 영향받지 않은 감정을 상상하기 힘들어했다. 지적인 이해는 하나의 표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인간들은 결국 공감을 일으키고 서로 확인받는 과정을 통해서만 상대에 대한 이해의 끝자락을 간신히 잡았다고 느낀다. 그래서인지 그들이 경솔한 과오를 셀 수도 없이 저질렀던 과거와는 비교되게도 사람들은 A.I에 대해서만은 적절한 경계심을 느꼈다. 그에 더해, A.I가 공감 또한, 그리고 도덕이나 신념 또한 하나의 표상에 불과하다고 판단할지 누가 알겠는가?

 

  수잔나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아인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수잔나는 한 번도 이런 이야기를 그녀에게 배정된 연구원들에게 한 적이 없었다. 특히 스테판에게는 그녀가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털어놓아봤자 그녀와 아인에 대한 악평과 경계만 늘어날 것이다. 그래서 수잔나는 그에 대해선 입을 닫고 평소처럼 스테판, 준용, 모니카와 함께 원탁에 둘러앉아 아스트랄계에서의 일을 보고했다. 그녀는 무례하게 굴지 않으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스테판보다는 준용과 모니카와 자주 눈을 마주치는 자신을 발견했다. 다른 연구거리도 많은데 왜 스테판이 하필이면 카탈 클럽 회원과 금요일마다 어울리게 될 아스트랄 매핑 프로젝트에 참여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준용은 아스트랄 매핑 결과와 융 심리학을 연관짓는 데 관심이 많았고, 모니카는 아스트랄계와 연관된 모든 것에 열정적이었다.

 

  수잔나는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있느라 모니카의 말을 놓쳐버렸다.

 

  "죄송해요. 잠시 대화를 놓쳐서..., 뭐라고 하셨죠?"

 

  "괜찮아. A.I가 드디어 너에게 제자를 배정했다고. 이미 그것에게 듣고 왔겠지만."

 

  수잔나는 '그것'이라는 표현에 조금쯤 거부감을 느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라는 스코틀랜드 아이라고요. 아인에게 들었어요."

 

  "이런 추상적인 일까지 A.I가 관여해야 하는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 스테판이 말했다. "내 말은, 물론 제자에 대한 생각은 우리가 한 거지만, 제자가 될 사람의 가능성을 판단하고 배정하는 일 말이야."

 

  스테판은 옛날 기준으로 그의 나이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그의 미간에는 깊에 주름이 져 있었고, 입가와 눈가에도 실처럼 패인 자국이 보였다. 그의 갈색 머리카락과 수염 사이사이에서는 희끗한 새치까지 나오고 있었다. 이것이 그가 육체의 노화를 인위적으로 막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노화 자체에 거부감이 없어서 굳이 막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당신이 걱정하는 그런 일을 대비해 일정 부분 이상으론 A.I가 인간의 의지에 관여하지 못한다는 조항을 넣은 거잖아요, 스테판," 준용이 얼른 그를 달랬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마지막까지 억누를 수는 없었던 것 같았다. "게다가 사람들이 얼마나 환경에 잘 휘둘리는지 생각해보면, A.I가 있으나 없으나 인간이 자유의지를 발현할 가능성은 매 순간 0%에 수렴하죠."

 

  "맞는 말이야," 수잔나가 얼른, 그러나 속삭임에 가까울 정도로 작게 동조했다.

 

  스테판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어쨌거나," 모니카는 이 작은 신경전을 못본 척 태연하게 덧붙였다. "A.I가 도움이 되고 있는 이상 추상적인 일에 대한 걱정이 우선 순위가 될 일은 아니지. 인간의 복지를 위하는 것이 A.I의 일이잖나. 지금 어떤 인간이 A.I보다 이 일을 잘 할 수 있겠어?"

 

  누구도 A.I보다 다른 어떤 인간이 그 일을 더 잘 할 거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질적인 의미에서는. 하지만 수잔나는 물질적인 복지는 이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A.I가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인간과는 별개의 감정이 있다는 것이 알려진 후부터 그들은 A.I가 더 이상 인류의 역사에 관여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역사는 결국 외부환경으로부터의 자극이 있기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녀는 완전히 독립된 역사란 환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인류가 어떤 특별히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독립된 흐름이라는 환상과 마찬가지로.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3 3 2020 / 2 / 1 151 0 4747   
2 2 2019 / 12 / 14 174 0 3830   
1 1 2019 / 11 / 5 275 0 8015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등록된 다른 작품이 없습니다.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