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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변이하는
작가 : 교관
작품등록일 : 2019.9.26

주인공은 6일 동안 자신의 변이에 대해서 인지를 한다. 받아들이는 순간 모든 것이 조화와 균형이 된다

 
변이하는1
작성일 : 19-09-26 18:38     조회 : 267     추천 : 0     분량 : 24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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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까마득하게 보이는 저편 하늘에서 후피동물처럼 보이는 구름이 하늘을 덮으며 서서히 몰려오고 있었다. 구름은 자줏빛을 띠며 구름 밑으로 짙고 어두운 자주색을 발하는 거무티티한 빗줄기를 뿌리며 이곳으로 정중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애니메이션에서나 볼 법한 자줏빛을 띠는 검은 구름은 지금의 세계를 바꾸려는 듯 보였다. 장롱의 뒷면처럼 우울하고 어두운 모습을 지닌 적란운은 자각적인 영역을 확대하며 하늘을 전부 덮고 있었다. 쿠쿵 하는 천둥소리가 비현실적으로 들렸고 마른번개가 한 번씩 번쩍 거릴 때마다 기분 나쁜 자줏빛구름은 방사선 같은 일렉트로닉 전리함을 만들어냈다. 이 일렉트릭 펄스는 전리전자의 발생으로 나타나는 전자펄스와는 다른 양상을 띠었다. 그것에는 일반론에서 쉽게 느낄 수 없는 원죄적 절망이 가득했다. 마른번개가 번쩍이고 목 없는 사람들의 모습이 바다의 수면위에 올랐다가 사라졌다. 목 없는 사람들은 사념을 지닌 채 바다위에서 거친 침묵을 내뱉으며 나타났다가 사라짐을 반복했다. 그들의 수는 삽시간에 개미떼처럼 불어났다. 자줏빛구름은 짙고 어두운 해무를 가득 몰고 기분 나쁠 정도로 서서히 다가왔고 코를 막아야 할 만큼 심한 누린내를 동반했다.

  먼 바다에 떠 있던 거대한 유조선도 자줏빛 해무에 의해서 조금씩 사라졌다. 이후 유조선의 모습은 바다위에서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고요한 바다위에 사람들이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파도의 너울거림을 따라 힘겹게 들렸다가 다시 고요해졌다. 자줏빛구름에서 뿌려대는 자주색 비는 어느새 완전하게 검은 비로 바뀌었다. 멀리 보이는 거대한 자줏빛은 암흑의 조류처럼 드러나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차분하게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곧 인간이 있는 모든 세계의 하늘을 덮을 것이고 검은 비를 뿌려 댈 것이다.

  바람이 불었다. 검은 누린내가 가득한 바람이 해무가 다가오는 바다에서 불어왔다. 목 없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는 소리가 들렸다.

 

 

  [당일]

  지금은 장마기간이다. 여름밤인데 조깅코스에 사람이 너무 없다. 마동은 잘됐다고 생각하며 마음껏 달리기 시작했다. 시에서 마련한 강변의 조깅코스는 시민들이 운동하기에는 아주 안성맞춤이었다. 사람들은 겨울동안 집안에서 꽁꽁 숨어 있다가 여름이 되면 도시에서 마련한 조깅코스로 전부 몰려 나와서 자신의 집처럼 점령해버린다. 그렇지만 젊은 사람들은 여름밤, 야외의 조깅코스를 이용하는 일은 드물었다. 야외의 조깅코스를 이용하는 대부분이 무릎에 이상이 오기 시작하는 나이의 남녀들이거나 반백을 넘긴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코스의 한쪽은 자전거가 달릴 수 있도록 빨간색의 자전거도로가 있고 다른 한쪽은 조깅을 하기에 편리하도록 녹색의 코르크바닥이 잘 닦여있었다. 그래봐야 시민들이 실컷 돈을 벌어서 낸 세금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너도나도 한마디씩 했다. 우리가 낸 세금으로 만들어진 야외의 조깅코스니까 우리가 실컷 이용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사람들에게는 팽배했다. 그렇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조깅코스에 나와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나이가 든 사람들이다. 그것이 외국과 다른 점이다.

  자전거도로를 질주하는 자전거의 속력은 아주 빨랐다. 그래서 초보들이 자전거도로에서 벗어나 조깅코스로 들어와서 자전거를 이용하다가 조깅을 하는 사람과 부딪혀 사고가 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저마다 큰 소리로 자신의 입지를 우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마동은 조깅을 할 때에는 타인의 상황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장점이라고 하면 그저 달릴 수 있다는 것에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다른 것은 없다. 누구와 같이 운동을 하는 것도 마동은 썩 좋아하지 않았다. 달릴 때면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똑바로 앞을 보고 보폭을 맞춰가며 시계바늘처럼 달려갈 뿐이었다. 누군가 넘어져 있다해도 뒤에 오는 사람을 위해 그냥 지나칠 뿐이었다. 타인의 삶에 관심도 없을뿐더러 간섭도 하기 싫어하는 타입의 인간이었다. 태양이 떠있는 낮에 달릴 수 있다는 것도 즐거웠지만 어두운 밤에 달빛을 받으며 조깅코스를 달리는 것이 꽤 매력적이고 터프하며 가슴이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어떻든 달이 떠 있는 밤에 조깅을 하는 것이 현재는 마음에 들었다.

  달리면서 스치는 모든 소리를 차단했다. 무형의 파티션을 만들어서 잡음을 막는다. 오직 달리는 것에 집중을 한다. 그러려면 조깅코스로 달려야 한다. 자동차들이 다니는 도로를 달린다면 소음이 많이 존재하기에 이런저런 소리를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했다. 소리에 예민한 스타일은 아니지만 소리라는 것은 의지와는 무관하게 들리는 경우가 많다. 마치 발사기와 흡사했다. 듣고 싶은 소리만 들으며 살아갈 수 없는 시대에 와 있는 것이다. 달릴 때는 오로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을 뿐이다. 음악은 하나의 운율이 되어서 머릿속에 여러 개의 기호로 배열된다. 들리는 음악을 기호로 나열하고 나뉘어서 균형을 잡아 놓고 머릿속에 넣어두면 회사에서 작업하는데 조금은 도움이 되었다.

  그렇다고 모든 음악을 기호로 배열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또 어떠한 특정적인 음악, 요컨대 프로그레시브나 아방가르드 음악이라고 해서 반드시 기호로 배열되는 것도 아니었다. 설명하기는 애매하지만 기호화가 되는 음악이 존재했고 그렇지 않은 음악도 존재했다. 그것은 어느 날 문득 다가오는 숙명과도 비슷한 것이었다. 마동의 입장에서 그것은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쉽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음악은 듣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리듬이 흡수되는 것이다.

  여름밤의 공기는 후텁지근하지만 그만의 매력이 있고 여름밤은 깊이라든가 색채가 결여되어 있어서 꼭 다른 세계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마동만이 그런 타성에 젖어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모호한 관념의 여름밤에 마음껏 조깅을 할 수 있는 이 나라에, 그리고 이 도시에 조금은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 역시 막연한 것이다.

  여름의 기운이 한반도로 몰려올 때면 겨우내 스산하던 분위기에서 벗어난 강변의 조깅코스에는 새벽까지 걷거나 달리거나 자전거를 타는 모습이 매일매일 보였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오늘은 사람들이 너무 없다. 이상했다. 이렇게 사람들이 없다니. 밤의 기운은 강변의 조깅코스로 우르르 나와야 할 사람들의 모습이 초췌하리만치 보이지 않았다. 동물원의 동물들이 전부 우리 안으로 들어가 버린, 점심을 먹고 난 후 5월의 오후 2시처럼 조깅코스가 텅 빈 공간 같았다. 뭐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런 날도 있는 거지. 잘 된 거야. 마동은 그렇게 생각했다.

  더 편안하게 달리 수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마동이 달리면서 늘 생각하는 것은 조깅코스에 20대는 거의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이 50대 이상의 남녀들이었고 그 모습이 보기에 나쁘다거나 이상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건 하나의 어떤 의식처럼 느껴졌다. 꼭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하면 안 되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처럼. 아마도 2, 30대는 대부분 현실에서 시간을 마음 놓고 쪼개서 운동을 하지 못할 뿐 아니라 모두 실내체육관 같은 곳을 찾는 이유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젊은 사람들은 빠른 시간에 최대한 효과를 봐야 할 것이다. 시간이나 폼을 들여 꾸준하고 밀도 있게 무엇을 생산해내는 것에는 힘겨워했다. 음식도 빨리 나와야 하고,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어도 빨리 인화가 되어야 한다. 빨리되지 않는 곳은 도태되어 버리고 만다. 배달은 마땅히 십 분이 넘어가면 사람들이 화를 냈고, 약속시간을 어긴 사람에게는 어김없이 안 좋은 소리를 뱉었다.

 

  운동도 마찬가지였다. 짧은 시간 안에 원하는 것을 얻으려하기 때문에 꾸준하게 해야 하는, 시간을 들여야 하는 조깅 따위는 20대에서는 찾을 수 없는 운동처럼 되었다. 시간을 오래두고 따분하게 한두 시간씩 달릴 수 있는 사람들은 백 명 중에 고작 한두 명 정도뿐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마동의 생각이었다. 모든 20대들이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마동은 여기 조깅코스를 매일 매일 달리고 있지만 마동을 제외하고 이곳을 이용하는 사람들 대부분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었다. 50대 이상의 남자들은 퇴근을 하고 저녁을 먹고 소화를 위해 운동을 해야 한다고 병원에서 들은 이야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족들(라고 해봐야 아내정도)과 함께 강변의 조깅코스를 삼사십 분 정도 운동을 했다. 그들에게는 과하다 싶을 만큼 운동을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이 짐(gym) 같은 곳에서 땀을 있는 대로 쏟아내며 지나칠 정도로 안동을 하는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느릿느릿, 천천히 걷거나 달렸다. 마동은 자신도 나이가 들면 그렇게 될 것이라 생각을 하며 달릴 수 있을 때 마음껏 달려놓자고 늘 생각했다. 과유불급을 알고 있는 나이대의 사람들은 운동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이제 어쩔 수 없이 한다는 분위기가 강했다. 운동은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마동은 역시 타인의 일이기 때문에 조깅코스에 나와서 느릿느릿 운동을 하는 나이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럼에도 사람들이 오늘은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넓은 조깅코스에 사람들이 없으니 옷을 다 벗고 공용수영장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달리는 흐름을 끊어 버리는 방해자들이기는 하지만 늘 있어야 하는 무엇인가가 소거되어버리면 일반적이지 않는 기이함이 들어버리고 만다. 마침 저 앞에 네 명의 아주머니들이 조깅코스에서 일렬로 이야기를 하며 걸어가고 있었다. 일렬로, 서로 얼굴을 보며 이야기를 하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으면 마동은 달리는 속도를 줄여 그들을 지나쳐 빠져 나가서 다시 달려야 한다. 조깅코스에서 가끔 마주하는 일이다. 달리는 흐름이 끊어지고 아주머니 무리를 돌아서 다시 박차를 가하고 달리기까지는 묘한 불편함이 생성된다. 아주머니들은 이타적이지 않다.

  마동은 언젠가 프레젠테이션을 조용히 준비하려 오전시간에 카페에 들어갔을 때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젊은 엄마들이 온 적이 있었다. 이 나라는 점점 낮아지는 출생률에 곤란함을 드러내고 정부는 사람들에게 출산장려를 억지로 권하며 마치 그에 떠밀려 출산을 한 젊은 엄마들은 벼슬을 단 모습을 지닌 엄마들이 더러 있었다. 아이가 아무리 카페 안을 시끄럽게 떠들고 다녀도 아이엄마는 미안한 구석이 없다. 커피를 쏟으면 아이엄마는 와서 미안하다고 하지만 얼굴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다. 아이가 그런 건데 이해해 줄 수 있지? 하는 눈빛이 역력하다.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아 그곳을 떠나는데 등 뒤로 아이엄마는 같이 온 일행에게, 등을 보이고 나가는 마동을 되레 경멸하는 목소리가 먼지 낀 시골길처럼 남았다.

  조깅코스에서 한 줄로 서서 천천히 무리지어 걸어가는 아주머니들도 그런 면에서 보면 타인을 생각하지 않는 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주머니들의 평범함을 거부하는 행동들은 우리가 주위에서 많이 듣고 봐온 터였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아크로바틱한 행동에 비하면 조깅코스에 일렬로 천천히 걸어가는 아주머니들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어떤 대회의 등수에는 들지 못할 것이다. 마동에게 그런 부분은 지나치는 사소한 불편함일 뿐이다. 앞으로 과학이니 의학이니 하는 부분이 얼마나 발전을 거듭할지는 몰라도 유기체인 인간을 제대로 파악하기는 힘들 것이다. 타인의 불편함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이 어떤 건지 알려주고 싶지만 인간은 알 수 없는 존재니까, 하며 그저 넘어가는 것뿐이다. 말을 섞다보면 의도하지 않는 언어가 입 밖으로 나오기도 하고 그러면 그것대로 그만의 힘을 발휘해 상대방을 훼손시키기도 한다. 그런 모습은 현재 뉴스의 일면을 장식하거나 매일 보도될 정도로 많아졌다. 조깅코스에서 이런 종류의 불편함은 그저 마음속으로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일렬로 죽 걸어가는 아주머니들을 피해가려면 꾸준하게 달리던 행위를 어찌되었던 잠시 포기하고 그 사람들을 비켜 가야한다. 그럴 때면 무엇인가 끊어진 느낌이 드는 것이다. 만 원짜리로 된 오백만원의 뭉치를 손으로 흥겹게 세다가 이백삼십만원에서 끊어져 다시 세야하는 허탈함도 있었다. 그것은 마치 이어지는 한 세계가 끝나버리는 묘한 기분에 휩싸여서 별로였다. 아주잠깐 짜증이 나지만 그것뿐이다. 잠깐의 응어리를 참아내면 되는 것이다. 그런 아주머니 무리가 오늘은 반갑기까지 했다.

 

  ‘이렇게 사람이 없을 수가 있을까‘

  마동은 일렬의 무리를 돌아 다시 달려서 뛰어나갔다. 지금은 레인시즌, 장마가 한창이다. 밤공기는 다른 날보다 더욱 무겁고 꿉꿉하고 후텁지근했다. 조금만 움직이면 등과 어깨에 땀이 배어 나오고 땀의 맛은 정말 짤 것이다. 짠 내가 풍기지 않는 것이 다행일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달리면서 나오는 땀은 그렇게 생각처럼 짜지 않다. 여름날은 겨울의 밤보다 밝아서 시야각이 좋다. 하늘도 환하게 보이고 구름의 유영도 눈에 들어왔다. 구름은 남동풍을 따라 이쪽에서 저쪽으로 굼뜨게 가는 듯 느껴졌다.

  ‘남동풍?’

  바람이 불었다. 여름밤에 부는 바람임에도 이질적인 바람이었다. 이전의 여름에는 도저히 맡아본 적 없는 바람의 냄새와 기운이었다. 앞서 일렬로 걸어가는 아주머니 일행 때문에 잠시 속도를 줄이는 김에 멈춰 서서 바람을 느꼈다. 확실히 처음 느껴보는 바람이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때 어김없이 여름 속으로 가을의 바람이 차고 드는데 그런 기분이 들게 하는 이질적인 바람이었다. 이야기를 하면서 일렬로 걸어가는 아주머니들을 제외하고 장마기간의 조깅코스에는 사람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이 이질적인 바람은 어디에선가 불어오는 바람이다.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바람이라는 것은 소리만 기생한다. 형태도, 형체도 없다. 눈으로 볼 수도 없다.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 그저 얼굴을 약간 들어 바람을 느껴야 하는 것이다. 바람은 너무나 미미한 존재 같지만 존재감은 완전무결하여 독자성과 자체성을 분명하게 지니고 있다. 바람이 힘을 모아 강해지면 인력으로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바람을 잘 이용하면 풍력발전을 할 수 있지만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바람은 미미하기만 했다. 바람이란 불어와야 비로소 바람이다.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자동차가 만들어낸 바람은 진정한 바람이 아니다. 그건 단지 자동차 주위를 맴도는 난기류 덩어리에 불과한 것이다. 바람은 알 수 없는 곳, 마동이 상상하는 그 세계의 끝에서 눈으로 보이지 않는, 잠에서 막 깨어난 요정들이 우르르 몰려오듯 불어와야 진정한 바람이다. 마동은 조깅코스에 서서 고개를 조금 들고 이질적인 바람을 느껴보았다.

  ‘어째서 이렇게 이질적인 바람이 불어오는 것일까’

  지금 불어오는 바람은 마음속에 가라앉아 있는 무형의 앙금을 흩날리게 했다. 그리하여 마동은 앙금이 마음속에서 춤을 추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앙금은 무엇의 앙금인지 알 수 없었다. 어떤 목적에 도달하려고 하면 여지없이 막혀버리는 것이 마동이 요즘 느끼는 패턴이었다.

  앙금에 대해서 심도 있게 생각해보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앙금은 진흙바닥처럼 쌓여있었다. 앙금 속에는 마동이 느끼지 못한 또 다른 어떤 누군가의 앙금도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마동의 마음속에 자신이 아닌 누군가의 무엇이 들어와 있다는 것이 기분 나쁠 만도 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오히려 부드럽고 따뜻한 기분이었다. 소피아로렌의 머리숱처럼 강한 것이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의해서 마동이 알아채지도 못하는 사이에 두 손으로 떨 수 있을 만큼 가득 쌓여있었다. 손으로 떠 올리면 흘러내리는 앙금 속에 분명 누군가의, 마동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감정도 섞여 있었다.

  바람은 지속적이다. 계속 앙금을 흩날렸다. 게다가 바람은 그동안 마동이 맡아보지 못한 냄새를 몰고 왔다. 설명 할 수 있는 종류의 바람이 아니다 이건. 그러고 보면 마동은 자신이 꽤 많은 것을 설명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비가 오는 날을 제외하고 마동은 매일 이 도시의 강변을 따라 나 있는 조깅코스를 달렸다. 그러나 이런 알싸함이 깃든 바람은 처음이었다. 기시감이 들기도 했고 흥분을 자아내기도 했다. 봄날의 아지랑이 냄새와도 달랐고 가을의 스산함과도 다른 바람이었다. 순간 마동의 머릿속을 스치는 이름이 생각났다.

  치누크.

  치누크가 떠올랐다. 그럴 리가 없다.

  ‘치누크가 왜 이 나라의 이 도시에, 이런 밤에 불어온단 말인가’

  학창시절 공부를 그렇게 썩 잘한 기억은 없지만 그때 기억 속에 과학적 견해 따위로 보면 지금 불어오는 바람은 분명 치누크와 흡사했다. 마동이 서 있는 이곳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건조단열률로 인한 기온의 변화를 느낄만한 푄이 나타날 지역이 아니었다. 습하고 찬바람이 산을 따라 올라가는 과정의 반대편에서 나타나는 이 따뜻하고 이질적인 푄은 분명 이곳에서는 전혀 나타날 리 없었지만 불어오는 바람은 치누크에 가까웠다.

  마동은 사람들의 반응이 보고 싶었지만 이미 일렬횡대의 아주머니 무리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그 외의 사람들 모습이라고는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사람들은 지금 불어오는 바람이 어떤 바람인지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것은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세상에는 무엇이 일어난다 한들 그 무엇은 평범한 일상 속의 한부분이 된 세상이다. 사람들은 조금씩 미쳐가고 있어서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단하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곳곳(교회, 체육, 교육)에서 성범죄가 만연했고,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과 괴리가 있으면 폭주해버리는 지금시대의 이곳에서 치누크가 불어온다고 한들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마동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치누크는 지속적으로 마동의 등으로 와서 부딪혔고 기시감을 건드렸다. 여름의 지속 중에서 오늘처럼 장마 기간 속의 달리기보다 아주 무더운, 낮의 온도가 35도를 넘어가고 밤에도 숨이 턱턱 막히는 그러한 무더운 여름날에 달리는 것을 마동은 좋아했다. 그런 날은 땀도 비가 쏟아지듯 흘러내렸다. 땀이 비처럼 흘러내리는 것을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에게 그런 경험을 표현하기가 쉽진 않지만 어찌되었던 대단한경험인 것이다. 준비운동을 가열하게 하고 달리기를 시작해도 십오 분 정도까지는 달리는 행위가 몸이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준비운동은 가급적이면 신중하고 진지하게 해 줘야 한다. 다리의 근육을 풀어주고 굳어있는 근육을 전부 이완시켜야 한다. 사용하지 않는 근육을 풀어주는 과정에서 미간을 찌푸리고 고통이 잠시 찾아오기도 한다. 그러나 기분 좋은 고통이다.

  어딘가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지금 느끼는 약간의 고통은 이전의 극심한 고통을 맛보았기에 참아낼 수 있다고. 어디서 읽은 것일까. 책일까. 영화 속 대사일까

  기억이란 꺼내려고 하면 자꾸 멀어져만 간다.

  다리의 굳은 근육을 풀어주는 과정에서 얻는 고통은 다른 차원의 고통이다. 이 기분은 알고 있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역시 모르는 이에게 아무리 설명을 해봐야 우랄알타이어를 듣는 표정을 지을 뿐이다. 준비운동이 끝이 나면 천천히 달리기 시작한다. 십오 분 이상을 달리고 나면 속력을 높인다. 그대로 같은 페이스를 유지하며 달리면 되는 것이다. 다른 건 없다. 그렇게 삼십분을 넘어서면 숨이 차오르기 시작하고 숨이 가쁘다는 느낌은 살아있다고 느끼게 해준다. 공포영화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있는 것에 대해서 감사해 할 줄 모른다고 ‘쏘우’에서 말했다. 쏘우는 이후에 꽤 많은 마니아들을 거느리며 후속편이 지속적으로 나왔다. 쏘우는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대중이 바라는 바를 충족시키기 위해 후속작을 속속 탄생시켰다. 흥행이라는 것은 사고체계를 무너트렸다. 그 점이 마동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런 마음이 영화인들의 귀에 들어갈 리는 없다. 설령 들어간다고 한들 무시되기 일쑤다.

  다리의 움직임은 일정한 보폭으로 멈출 때까지 유지한다. 조깅을 하고 삼십분을 넘어가면 탄력을 받아 속력을 내며 달릴 수 있다. 그대로 두 시간을 달리면 데드포인트까지 치닫는다. 한계치에 도달해보는 것이다. 4킬로미터 가량 뻗어있는 오르막길을 달리면 심장이 파열할 것 같고 다리고 돌처럼 딱딱해지는 게 느껴지고 그대로 주저앉고 싶다. 하지만 마동은 그것을 넘어서서 달렸다. 팔을 더 움직이고 다리를 움직인다. 마동에게 달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데드포인트를 넘어가면 죽음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달리다가 사망한 사람들은 그 데드포인트 근처에서 멈추어야 했지만 그대로 넘어간 사람들이다. 그들을 어떤 힘 좋은 신적인 존재가 그 포인트 너머까지 끌어당기는 것이다, 마약처럼. 잠도 없이 계속 몸을 움직여도 전혀 피곤을 모르는 철인이 된 것 마냥 그대로 데드포인트를 넘어가버리고 만다. 아, 하는 순간 보이는 세상이 바뀌는 것이다. 그들 모두 심장이 터질 듯하고 숨이 차오르는 행위를 즐긴다. 그건 죽음의 입구까지 갔다가 오는 느낌을 맛보기에 충분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도전이라는 이름하에 그렇게 하고 있다.

  마동은 그것과는 좀 다르지만 비슷할지도 모른다. 누군가 마동에게, 왜 그런 느낌을 좋아하냐고 물어봐도, 그것은 말이죠, 하며 확실하게 대답하기는 곤란하다. 타인은 마동과 달리 확실한 대답을 내놓을 수 있겠지만 마동은 그렇지 못했다.

  또 마동 입장에서 혼자서 달리기 좋은 이유는 스코어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경기로서의 달리기는 치열하고 수치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지만 혼자서 하는 조깅은 전혀 그렇지 않다. 누군가와 경쟁을 하지 않아도 되는 운동이 조깅이다. 경쟁을 굳이 해야 한다면 자기 자신을 이기고 그 선을 넘어야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마동은 오늘도 자신을 넘어서기 위해 숨이 차오를 때까지 달리는 것이다.

  오늘처럼 낮 동안 비가 많이 내린 날은 그나마 밤에는 시원한 편이어야 하지만 오늘밤은 많이 무덥고 습한 날이며 치누크 때문에 몹시 기이한 기분이었다. 언젠가부터 마동은 혼자서 할 수 잇는 조깅이 좋았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축구를 하거나 농구를 하거나 상대가 있는 배드민턴 같은 운동을 좋아하지만 마동은 시큰둥했다. 상방교류가 있는 운동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다. 사람들은 상대방과의 교감도 되고 누군가와 같이 할 수 있는 운동을 선호하지만 마동은 그렇지 않았다. 공을 찬다거나 던진다거나 콕을 친다거나 하는 운동은 아무래도 상대방을 신경써야한다. 자기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지,라고 하겠지만 상대방과 같이 하는 운동이라면 나만 생각할 수 없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었다고 해도 마동에게는 그런 운동은 맞지 않았다. 상대방이 아프다거나 다른 일 때문에 같이 못하게 되는 경우가 두려울 수도 있지만 늘 같이 운동하던 상대방이 없을 때, 처음으로 돌아가서 혼자인 운동에 다시 집중하는 것이 마동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한 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땀을 쏟아내며 달리는 것이 마동에게 딱 맞는 운동이며 마동이 좋아하는 운동이다.

  이 시간이 하루 중에서 가장 상쾌한 시간이었다. 마동이 매일매일 조깅을 하여 체중이 불지 않는 몸매를 유지하니 사무실에서 같이 조깅을 하기를 원했던 경우가 몇 번 있었다. 조깅을 같이 한다는 것만큼 난처한 일은 없다. 특히 조깅을 전혀 하지 않았던 사람과 말이다. 달리는 행위를 같이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책을 읽는 것과도 비슷하다. 독서는 어쨌든 혼자서 하는 것이다. 부인과 한 침대에 들어도 결국에 잠은 혼자서 드는 것처럼.

  조깅도 그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마라톤을 준비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페이스메이커가 곁에서 페이스조절을 해주겠지만 조깅정도는 마라톤과는 다른 것이다.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듯 분명 달리는 속도나 자신의 신체가 감당하기에 어울리는 코스가 있을 것이다. 인간은 아직 파헤쳐지지 않는 미지의 덩어리다.

  조깅이 건강학 적으로 인체에 좋다고는 하나 조깅이 맞지 않는 사람도 분명 있다. 뇌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범죄자들의 통계를 통해서 그들의 심리를 파악할 뿐이지 그들의 뇌 속을 들여다 볼 수 없으니 비슷한 범죄에 대해서 확실한 소탕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마동은 달리면서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거나 또는 여러 가지 생각들을 열거해 놓기를 좋아한다. 후자의 경우 하나씩 줄을 세워 늘어놓는다. 그러면 그것대로 하나의 기호가 되어서 노래와 함께 정리되어 있다가 사무실에서 일을 할 때 하나씩 꺼낼 수 있다.

  주위에서 매일매일 하릴없이 보일정도로 마동이 달리는 행위의 결과가 오직 몸매를 유지하는 것만을 보고 달린다면 결과를 얻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고 마동은 생각했다. 마동은 사람들에게 좀 더 본질적으로 달리는 것에 접근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언젠가는 그렇게 말하는 날이 올 것이다. 달리는 행위를 진정 좋아하고 즐기지 않으면 그것은 또 다른 모양새의 비극적인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런 점도 모르고 회사의 직원이 같이 달리기를 바랐던 적이 있었다. 같이 달리게 되면 옆 사람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달리면서 바람을 느끼는 것도, 머릿속의 생각을 나열하는 것도, 음악을 듣고 기호화 시키는 것도 전혀 할 수 없다. 같이 달리는 사람의 속도에 맞추어서 달리다보면 마동이 유지하고 있던 자신의 패턴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달리는 의미가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무엇보다 같은 회사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 그런 부탁을 하는 것이 마동으로서는 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공동체에서 일을 하고 있기에 마동이 하는 작업이 어떤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을 텐데.

  일전에 회사에서 같이 달리고자하는 직원의 부탁을 끝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들여서 같이 달렸다가 낭패를 보았다. 아마도 그는 마동이 일을 마치고 달리기 때문이 지장이 없을 거라 생각을 했던 모양이었다. 며칠을 그 직원의 속도에 맞추어서 달리다보니 마동은 자신의 페이스를 찾을 수 없었다. 음악도, 상상도 전혀 할 수 없게 되어버려 며칠이 지난 다음부터 직원을 놔두고 혼자 달리기 시작했다. 직원은 옆에서 뒤로 쳐졌지만 뒤쳐진 대로 그 사람 나름의 패턴으로 조깅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조깅에 대해서 차근차근 알아 가면된다. 하지만 그 직원은 달리는 것을 탁구나 배트민턴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같이 달려주지 않았다고 그 다음 날부터 마동에게 버림받았다는 식으로 몰아갔다. 그 소리는 회사의 사람들에게 퍼지기 시작했다. 좋은 소식은 퍼지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나쁜 소문은 파도처럼 한순간에 사람들을 휘몰아 덮친다. 그리고 생명이 달린 눈덩이처럼 점점 부풀어 간다. 아이러니가 있다면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 소란이 싫어서 조깅을 할 때 그냥 말없이 혼자 달리는 것이다. 그 직원은 마동에 대해서 안 좋은 기억만은 간직한 채 서먹해졌지만 마동은 그런 것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다 해도 같은 사무실을 쓰는 것도 아니고 일하는 분야도 달랐고 입사해서 잠시 인사정도 하는 사이인데 급격하게 살이 쪄 버리는 자신의 몸매 때문에 마동에게 부탁을 해 온 것이다.

  요즘도 간간이 같이 달리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데 마동의 입장에서는 참 낭패가 아닐 수 없다. 달리기가 좋은 이유 중 또 하나는 몸매가 드러나는 운동복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일을 하기에 촌스러운 정장바지에 와이셔츠를 입고서 일을 하고 있다. 정장바지라고 해서 다 촌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마동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사무실 직원들은 마동에게 정장이 꽤 잘 어울린다는 말을 했다. 정장이 타인보다 잘 어울리는 이유는 조깅 때문이라고 마동은 생각했다.

  퇴근 후 조깅을 할 때에는 낯 동안의 모습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지인이 옆으로 슥 지나친다고 해도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평소의 마동의 모습을 없애고 진짜 마동의 모습을 찾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른으로 진입하면서 자신의 꿈을 잃어버려 자신의 모습을 찾고자 창업을 하거나, 세계 일주를 한다거나, 어떤 것에 도전을 하기도 한다. 변이를 꾀하는 것이다. 마동은 매일 저녁이면 변이를 한다.

  마동에게는 정장이 딱 두 벌이 있다. 여름에는 당연하지만 정장의 윗도리는 입지 않고 와이셔츠만 입고 출근을 한다. 사무실의 남자직원들은 대부분 대형마트에서 고르고 골라 거중에서 질 좋은 정장을 구입한 듯한 정장을 입고 있다. 대체로 그런 모습처럼 보인다. 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새롭게 입사한 신입직원들은 맞춤형 정장을 입고 세련미를 뽐내며 일을 한다. 하지만 신입직원이 근래에 좀체 입사하지 못하고 있고, 입사를 했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퇴사(사정이 좀 복잡하지만 자신의 알아서 나가는 경우도 있고 계약서 위반도 있다)를 하는 경우가 있어서인지 대부분 회사에서 꽤 오랫동안 일을 한 사람들이었다.

  마동이 다니는 회사의 직원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화이트컬러는 그런 정장을 입고 있었다. 정장을 입는 모습에 따라서 재능이라는 것이 나타날 리는 없지만 남자직원들이 입고 있는 정장의 세세한 부분으로 들어가면 어딘가 맞지 않아서 울이 진다거나 몸에서 분리되어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모든 정장이 리처드기어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형마트의 정장코너나 백화점 세일기간 중에 구입한 인상이 강하게 풍겼다.

  마동은 애당초 몸에 맞는 수트를 맞췄다. 가격은 꽤 비쌌지만 어차피 정장을 입을 바엔 몸에 맞는 정장을 구비해두자, 하는 주의여서 두 벌을 그렇게 입사하면서 구입했다. 그 출혈이 심해서 입사당시에는 고생을 했지만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니 생활에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정장과 자동차는 새것보다 질이 제대로 든 중고품이 훨씬 좋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 말에 새삼 고개를 끄덕였다. 정장이라는 옷은 마동과는 썩 어울리지 않는 복장이라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정장 바지는 성견이 다 되어 데리고 와서 키우는 덩치 큰 개의 모습처럼 여겨졌다. 친하게 지내면서도 경계의 끈을 놓지 않는 개처럼 말이다.

  일을 하는 동안에는 어깨의 잔 근육의 움직임도, 하체 근육의 꿈틀거림도 옷에 가려 전혀 볼 수가 없다. 자연이 준 육체는 옷이라는 인공적인 천으로 만들어진 물품 속에 숨겨놓고 있어서 자신의 진정한 육체가 어떤 모습인지 알지 못한다.

  겨울동안 육체는 두꺼운 옷 속에서 점점 불어나다가 봄이 되면 자신의 육체에 놀라서 정신을 차리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몸매나 불어난 몸에 관대해지며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순을 거친다. 마동은 그동안 매일매일 꾸준하게 조깅과 중간 근력운동을 한 덕분에 아직 군살이 붙지 않았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만 봐도 배가 나오지 않는 사람은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사원정도 뿐이다. 대부분 열량이 높은 음식, 고칼로리음식, 과한 나트륨과 음주로 살이 많이 붙는다. 단체와 조직의 구조는 그렇게 사람들을 몰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딘가에 문제가 생기면 문제를 없애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고 소비자들에게 자본을 이용해서 소비를 촉진한다. 그것이 사회가 제시하는 균형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많이 먹고 적게 움직일 수밖에 없는 구조에서 생활하게 되어 있다. 그 구조라는 것은 움직임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하는 뻔 한 기본규칙을 어겨버리라고 촉진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점점 구조에 익숙해져간다. 기본이 잘 지켜지는 것이 조화와 균형이 맞아가는 것이지만 틀어진 구조 속에서 사람들은 방향을 달리했다.

  마동이 일하는 회사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곳이라 사람들은 자기관리에 더욱 철저해야 하지만 포기를 하거나 귀찮아했다. 수많은 의식의 ‘방해’ 덕분에 사람들은 자신만의 확고한 리추얼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몇 년 동안 지치지 않고 꾸준하게 조깅을 하는 모습을 봐온 사무실 직원들은 얼마 전부터 마동에게 조깅코스라든가 조깅에 적합한 운동화에 대해서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사무실에서 벗어나는 순간 마동은 타이트한 운동복으로 갈아입는다. 조깅을 하는데 적합한 운동복은 반드시 존재한다. 그것이 인생이라 마동은 여기도 있다. 어느 곳이든, 무엇을 하든 그에 합당한 복장이 있다. 그런 트레이닝복은 가볍고 땀을 배출해내며 낮에 달린다면 태양빛을 반사시키는 역할도 해주는, 기능적으로 탁월한 복장이다. 가슴근육이 드러나는 민소매의 상의와 허벅지에 착 달라붙는 칠 부 팬츠를 입고 나이키 조깅슈즈를 신는다. 조깅슈즈는 달리는 용도로만 나온 운동화여야만 한다. 발목의 비틀림을 잡아주고 땅바닥을 잘 딛을 수 있게 만들어지고 발을 착 감싸 안아 줄 수 있는 조깅화가 좋다.

  마동은 달릴 때 허리에 작은 냅색을 차고 그 안에 보조키와 약간의 현금을 넣고 달렸다. 휴대전화는 밴드에 넣어 팔뚝에 착용하고 음악을 들었다. 달리기 전에는 준비운동을 반드시 했다. 십오 분 이상,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근육에 긴장을 가해서 근육이 놀랄 정도로 준비운동을 했다. 매일 달린다하여 준비운동을 게을리 하거나 하지 않고 달리다가는 한 시간이 넘어가면 자칫 무릎에 무리가 올 수 있다. 준비운동이라는 것이 십오 분 이상 해주지 않고 오 분 정도 한다든가, 아니면 하는 시늉만 했다가는 육체는 금새 알아채고 신호를 보낸다. 이런, 주인님께서 준비운동을 하지 않고 조깅을 시작하셨군요! 어째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신 거죠? 거참.라며 신체의 하중을 무릎에서 크게 받아 이내 뇌에 신호를 보내게 된다. 준비운동을 가급적 얼굴의 표정이 일그러질 정도로 쭉쭉 뻗어주고 풀어줘야만 한다. 근육에 텐션을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요가를 하듯이 다리에 힘을 주어 풀어주고 무릎도 천천히 돌려가며 잘 풀어준다. 양팔과 팔목, 발목도 잘 풀어준다. 이렇게 준비운동을 십오 분 이상 단단히 하면 가슴에 텐션이 가해지며 달릴 때 더욱 가슴근육과 가슴골이 두드러진다. 그렇게 해서 달리면 근육이 드러나는 잘 빠진 얼룩말이 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미국의 육상선수만큼은 아니지만 준비운동을 잘 하고 달리게 되면, 하지 않고 달렸을 때보다 단거리를 달리는 육상선수와 비슷한 근육의 움직임을 볼 수 있었다.

  마동은 달리면서 팔을 흔들면 삼두근위의 어깨근육이 갈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모습으로 강변의 조깅코스를 달리면 실제로 여자들보다 남자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는다. 여자들은 티브이 속 남자배우나 연예인들의 잘 빠지고 근육질의 몸에 관심이 있지만 야외의 조깅코스의 가슴근육이 발달한 남자에게는 관심어린 눈길을 보내지 않는다. 대부분 이제 운동으로는 근육을 만들 수 없는, 몸만들기를 포기해버린 나이가 찬 남자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게 된다. 달리고 있노라면 남자들의 시선을 꾸준하게 받는다. 맞은편에서 오는 중년의 남자는 박수를 치고 할아버지에 가까운 나이가 든 남자는 소리를 질렀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심도 있게 준비운동을 끝낸 다음 마음껏 매일 달릴 수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에 가까이 가게 했다. 낮 동안 몸을 덮고 있던 촌스러움에서 비로소 벗어나는 기분을 마동은 느끼는 것이다. 타인은 이러한 마동의 기분을 이해하지 못 할 것이다. 내 기분을 이해해달라고 남에게 말하거나 내색하지는 않는 스타일의 마동이었다. 그동안 그래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단지 타인이 마동 자신의 유일하게 즐기는 달리기를 방해만 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 작은 바람이라면 바람이다.

  달리기외의 운동이 마동과 맞지 않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마동은 조깅을 하면서 냅색에 무엇인가 넣어서 달리며 휴대전화를 늘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일 때문에라도 언제나 마동은 손을 뻗을 수 있는 곳에 스마트폰은 있어야 했다. 냅색에는 열쇠꾸러미가 있는데 집 열쇠와 사무실, 그리고 서랍열쇠가 같이 붙어있었다. 일의 특수성 때문에 사무실의 열쇠를 잊어버린다면 고작 그 일 때문에 회사의 오너가 나서야 하기 때문에 마동에게는 중요한 물품이었다. 회사 사무실의 모든 것이 오토시스템이지만 서랍과 사무실의 열쇠는 아직 아날로그를 지향하고 있었다. 열쇠는 손으로 들고 다니기에 아주 거추장스러운 물품이다. 그럼에도 열쇠는 몸에 지니고 있어야하고 열쇠는 그만큼 마동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물건이었다. 개개인에게 지갑이 중요한 것과 흡사했다. 하지만 지갑과 마동의 열쇠는 달랐다. 지갑 속의 내용물은 개인적으로는 중요할지 모르나 일일이 따리고 보면 없어져도 다시 만들거나 발급받으면 그만인 물품이지만 열쇠는 특수성 때문에 잊어버리게 되면 회사의 작동이 멈추게 된다.

  스마트폰 역시 마동에게는 소중한 물품이 되었다. 휴대전화는 요즘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다. 마치 사랑한지 일주일 된 애인처럼 대한다. 잠에서 깨어나 잠들기까지 사람들은 휴대전화 없이는 생활이 불편해졌다. 의미는 다르지만 마동에게 스마트폰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깅을 하다가 회사의 직업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휴대전화에 스케치를 하거나 메모를 해왔다. 메모는 마동이 하는 일에 관해서 여러 부분에 도움을 주었다. 메모가 없었다면 머리에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무형의 것들을 그대로 놓쳤을 것이다. 붕 떠오른 아이디어를 잡아서 스마트폰 안의 스케치 어플리케이션에 잘 스케치를 해뒀다. 일에 관해서, 작업적인 부분에 대해서 대부분을 차지할 만큼 많은 양의 메모를 기입해 놨다. 생각이 번쩍 나면 언제나 기입을 했고 조깅을 하면서도 문득 떠오르는 부분이 있으면 휴대전화의 메모장에 기입을 하고 메모를 바탕으로 회사에서 아이디어 회의나 컴퓨터 시뮬레이션 작업에 요긴하게 사용을 했다. 그래서 마동이 손을 뻗는 반경 내에 휴대전화기는 늘 있어야 했다.

  마동이 지니는 몇 개의 물품은 팔뚝의 밴드와 허리에 찬 냅색에 들어있었고 마동과 함께 조깅을 하면 따라서 이동을 했다. 누군가 듣는다면 대단히 거창한 일이라도 한다며 핀잔을 줄지도 모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마동이 하는 일은 거창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꽤 중요한 일이었다.

  조깅을 할 때면 팔뚝에 찬 밴드의 휴대전화기에 블루투스로 연결이 된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다. 매일 매일 달리지만 듣는 노래는 일정하지 않았다. 어떤 날은 지나간 팝스타들의 노래들, 그러니까 시시알, 데이빗 보위, 조니 미첼, 제네시스를 듣는다. 또 다음 날에는 클래식을, 어떤 날은 영화음악을, 또 다른 날에는 비비킹과 에릭 클랩튼이 같이 부르는 노래를 듣는다. 음악을 듣는데 가리지는 않지만 최신가요만은 피했다. 왜 그럴까. 최신가요는 들을 수록 듣는 시간을 축소시킨다고 느끼게 해주는 유일한 음악이었다. 최신가요를 좋아하는 사람이 마동에게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성의를 다해 설명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상업적으로 꽉 짜인 최신가요는 이 노래와 저 노래가 비슷한 공산품이라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하지만 전어회 맛을 모르는 이들에게 전어회의 맛을 설명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가 매일 음식을 챙겨먹지만 음식의 종류가 조금씩 다른 것처럼 마동은 매일 다른 음악을 비타민처럼 섭취하고 있었다. 지금은 폴리시달의 음악을 들으며 달리고 있다. 라이브다. 폴리시달이라는 이름의 명성에 맞게 콘서트홀에 울려 퍼지는 사람들의 여흥 또한 이어폰을 타고 흘렀다. 폴리시달은 자신의 공연에 여자가수를 초대했다. 여자가수는 신인이다. 큰 무대에는 처음 올랐다. 폴리시달이 먼저 그만의 독특한 음색과 특유의 기백으로 노래를 시작했다. 사람들의 와 하는 소리가 들린다. 인파에 비해서 청중은 자제를 한다. 그것은 아마도 신인여자가수와 폴리시달의 조화를 위해서이다. 세련된 팬 문화가 세련된 가수를 만들어낸다. 분위기가 ‘거대하다’보다는 ‘정겹다’에 가까운 공연의 느낌이다.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기 때문에 정겹게 들리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눈을 감을 필요는 없지만 노래에 심취해서 달리다보면 듣고 있는 노래가 전달해주는 떨림은 몇 배가 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폴리시달이 부르는 노래의 파트가 끝나면 여자가수가 노래를 이어받아서 불렀다. 어쩐지 여자가수는 다듬어지지 않는 원석의 기운이 가득한 목소리다. 훈련을 받지 않은, 그저 음위에 몸을 실어 노래를 부르지만 잘 부르는 기분이 들었다. 단순하게 마동이 그렇게 느끼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여자가수가 부를 땐(아마도 후렴부분) 사람들이 다 같이 따라 불러준다. 곧이어 청중의 박수소리가 가깝게 들린다. 폴리시달은 특유의 매너로 같이 노래를 부르는 여자가수를 띄워주는 음을 불어 넣어준다. 노래에 생기를 한 단계 더 이끌어 울려줌으로 청중의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중간에 색소폰의 연주가 나오는데 그 연주만으로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서 색소폰이 내는 음에 어깨를 움직이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색소폰의 연주가 끝나고 폴리시달은 마이크를 청중에게 돌린 모양이다. 모든 이들이 후렴 부분을 열창을 했다. 휘슬소리와 환호가 한데 어우러져 들렸다. 여자가수가 마지막을 장식하고 끝까지 뒤에서 폴리시달은 청중과 여자가수를 받쳐주는 것이다. 노래가 끝나고 여자가수는 벅차오르는 목소리로 고맙다며 인사를 했다. 아마도 감격에 겨워 청중에게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 폴리시달과 한 무대에 섰다는 것만으로도 신인 여가수에게는 큰 기쁨이었을 것이다. 이어폰으로 짱짱하게 노래를 듣고 땀을 듬뿍 흘리며 한 시간여 동안 달린다는 것은 흥분되는 일이며 매일 이러한 이벤트를 맛보는 것에 만족했다. 모든 것을 상상하게 된다.

  마동은 찾아서 듣는 음악 속, 그 세계에서 짜릿함을 상상했다. 그건 마치 중학생이 옆집 대학생 누나의 목욕 장면을 훔쳐보는 상상을 하는 것과 비슷했다. 음악을 들으며 땅바닥이나 앞을 조며 꾸준하게 달리는 동안에는 꽤 여러 가지 상념이 지나갔고 마동은 그 중에 몇 가지는 선택을 해서 상상하기도 했다. 보통 하루에 멍청하게 있거나 갖가지 공상이나 상상을 할 수 있는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영화처럼 햇살이 들어차는 창가에서 기지개를 켜며 눈을 비비고 일어나 거실바닥에 내려앉은 햇살을 밟고 커피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좀비처럼 일어나서 바로 화장실로 가 배설을 하고(아닌 사람도 있지만)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먹고 나와서(요즘은 굶는 사람이 더 많다) 자주 가는 카페에서 카페주인과 인사를 하고 커피를 받아서 빠르게 한잔 마신 후 대중교통이 몸을 실어 회사로 고생 끝에 출근하여 하루 종일 업무에 시달려야 한다. 중간에 시간을 내어 치과를 가야하고, 은행에도 들러야 한다. 줄을 서서 기다려 맛있는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급하게 먹고 난 다음 다시 업무로 복귀하어 대쳐진 시금치가 되어 퇴근하는, 단순하고 반복된 사이클은 언제나 복잡하고 바쁘게 흘러가 버리고 만다. 그러한 패턴이 지니는 복잡성을 사람들은 균형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 속에서 상상 따위를 하는 것은 균형이 깨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을 차지했고 그런 쓸데없는 공상은 자신을 어두운 공간에 유패 시키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동안 여유가 없는 현대인들을 마동은 많이 봐왔다. 그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라면 상상력의 부재였다. 상상하는 것을 살아있는 지렁이를 먹는 것만큼 이상하게 생각했다. 어른이 된 사람들에게서 상상력이라곤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바쁜 일상, 그 속에서 상상이니 공상이니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여유는 없다. 어쩌다 시간이 남아서 여유가 생긴다 해도 사람들은 대체로 여유를 여유롭지 못하게 사용할 뿐이었다. 여유가 생겨도 손에 들어온 모래가 빠져나가듯 종식시키고 만다. 현대인은 삶이라는 무게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지배당하며 그 속에서 주어진 ‘지배당하는 여유’를 바랄 뿐이었다.

  그런 점에서 마동은 사람들과는 좀 달랐다. 마동이 하는 일도 특수성을 띠었고 보통 멍하게 있거나 꽤 여러 가지의 세계에 대해서 상상을 하는 것을 보면 어딘가 이상해보이기도 했다. 마동에게 사람들에 비해 다른 점은 확실하게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마동은 타인 속에 교집합 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삶이라는 것은 자꾸만 인간을 쓰러트린다. 순간 잘못된 선택으로 크레바스 끝으로 내몰리기도 한다. 크레바스 끝에서 발을 잘못 디뎌 밑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다시 살아 올라오는 사람도 있다. 굴복하지 않으려면 삶의 무게에 당당해져야 한다고 어디에서건 떠들어댄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상상력이 소거되는 순간 무엇인가에 끌려가는 생활을 할 뿐이다. 24시간 중에 한 시간 이상을 달릴 수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 마동에게 주어진 여유를 행복으로 누리게 하는 것이다. 달리는 동안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달리다보면 아주머니들의 무리를 제외하고 또 하나 거슬리는 것은 조깅코스가 강변이다 보니 주위에 나무, 강 둔치에 자라는 풀이 이룬 풀숲이 강을 따라 죽 나 있는데 그 속에 살고 있는 하루살이나 날파리가 많다. 달리면서 호흡을 하다보면 입을 통해서 목구멍에 그대로 날벌레가 들어와서 불어 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조깅의 방해자들이다. 날파리 한 마리 따위 입으로 들어가는 게 뭐 큰 대수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느낌은 기이했다.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종류의 음식이 치아를 통해서 여러 갈래갈래 씹혀 분해되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만 그렇지 않고 곧바로 입안에 들어간 벌레가, 생긴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채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은 몹시 이상한 일이다. 하루살이는 그대로 목으로 들어와서 기도의 벽에 찰싹 달라 붙어버리는데 잔기침을 유발했다. 달리는 것을 멈출 수밖에 없다. 기침을 할 때에는 목구멍에 붙어 있는 날파리 날개 가루가 온 몸으로 번지는 착각이 드는 기분이었다. 이 역시 경험하지 못하면 알 수 없는 것이다.

  마동 역시 조깅을 할 때 입을 약간 벌리고 숨을 쉰다. 들숨과 날숨을 조절하면서 달리다 보면 작은 날벌레가 목구멍에 그대로 붙어 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마다 무릎에 양손을 대고 잠시 쉬면서 기침을 한다. 달리는 것은 여지없이 중지해야 한다. 그렇게 잠시 멈춰서 자세를 다듬는 동안 흘린 땀은 모기들을 불러들인다. 잠깐 동안 운동화의 끈을 묶고 있는 와중에 모기들은 사정을 봐주지 않고 몰려들어 주로 접히는 부분의 피를 빤다. 무릎의 안쪽이라든가, 목덜미 또는 팔꿈치 반대쪽 같은 곳.

  맛있게 피를 빨고 달아나는 바람에 어떤 날은 따끔하기까지 했다. 집에 있는 모기와는 다르다. 요즘은 모기를 조심해야 한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버린 것이다. 모기는 예전에 없던 무서운 균을 옮기는 이동매체가 되었다. 분명 서슬이 퍼렇고 추운 바람이 부는 겨울보다는 여름이 조깅하기 에는 더 없이 괜찮은 환경임에는 분명했다. 하지만 괜찮은 계절임에도 호러블 한 것이나 미저러블 한 것들은 끊임없이 마동을 괴롭혔다. 혹독한 추위가 세상을 뒤덮은 겨울이 되면 야외의 벌레들은 자취를 감춰버렸다.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절지류처럼 말이다. 그것을 조화라 부른다면 그것이 균형인 것이다.

  하지만 모기가 없다하여도 추위가 사람의 등을 구부리게 만드는 겨울은 마동에게는 내키지 않는 계절이었다. 두꺼운 트레이닝복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꾸준하게 뛰었다가 잠시 쉬는 동안 다시 몸이 식어버리는 것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집에 와서 뜨거운 물로 샤워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뜨거운 물이라는 것이 목욕탕처럼 바로 콸콸 나오지 않고 시간을 들여야 서서히 뜨거워지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입김이 많이 나와서 착용하는 안경에 성애가 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연은 인간에게 순수한 이치를 가르친다. 좋아하는 것 하나를 얻으면 싫어하는 것 하나를 가져와야 한다. 역시 이것을 균형이라 부른다면 균형이다.

 

  오늘은 장마라고 해도 사람이 너무 없다. 인간소멸에 가까웠다. 장마기간에 사람이 이렇게 없었는지 알 수는 없다. 작년, 재작년 여름의 장마기간에도 이랬었나하는 생각을 더듬어 보지만 생각의 끈은 누군가 올해 초에서 깔끔하게 딱 잘라 놓아서 그 생각의 끝에 마동의 기억은 도달하지 못했다. 그저 장마기간이라서 사람들이 없는 것이라는 것이 이상하지만 그렇게 단정 지었다. 기이하지만 그렇게 생각을 굳혔다. 쉽게 포기하는 것도 생활하는데 꽤 필요한 부분이었다. 드문 일이지만 항상 예외는 있는 법이다.

  마동은 평소에 쓸데없는 생각들을 많이 한다. 어찌되었던 강변으로 불어오는 단정 할 수 없는 치누크 바람을 맞으며 힘차게 달렸다. 그래봐야 빠르게 걷는 것보다 조금 더 빠른 속도로 달릴 뿐이었다. 달리는데 앞에서 천천히 걸어가는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사람은 여자라는 것을 알아차리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치마를 입고 머리가 길었다. 뒷모습만 봐도 대번에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입고 있는 옷이 긴팔에다가 치마까지 아주 길었다. 멀리서 봐도 알 수 있었다. 바닥에 질질 끌릴 정도로 치마는 길었다. 여름인데 긴팔을 입고 술이 취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비틀거릴 정도로 힘이 없어 보인다고 해야 할까.

  걸음걸이는 느릿느릿했으며 춤을 추며 걷는다고 하기에도 어딘가 모자람이 많은 걸음 걸이었다. 저렇게 걸어가는 모습의 사람은 그동안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길거리 마임을 하는 예술인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도 이상했다. 뒷모습은 마치 연극단원의 배우의 움직임 같았다. 지극히 뒷모습만 보여서 단지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마동은 여자를 지나치면서 슥 한 번 쳐다보고는 앞으로 내달려 나갔다. 마동은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는 타입이 아니기 때문에 이 무더운 여름날에 긴팔에 긴치마의 옷을 입고 조깅코스를 춤을 추듯 흐느적 걸어가고 있다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평소에 비해 오늘은 유난히 습하고 눈에 들어오는 시각적인 풍경이조금은 단조롭고 다른 날에 비해 달랐다. 바람역시 기시감을 자꾸 불러 일으켰고 묘한 기분을 자아냈다. 습한 공기를 폐에 집어넣으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치누크가 자아내는 공기가 몸 안으로 들어가서 마음속에서는 곰삭은 마음이 일어나는 기분마저 들었다. 작은 소용돌이처럼 마음이 일렁거렸다. 가슴이 뛰는 것과는 달랐다. 마동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늘 북적이던 조깅코스에 사람의 모습이 시야에 전혀 들어오지 않아서 그렇게 생각이 드는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매일 보는 환경이 기이하게 달라지거나, 개체수가 상상 이상으로 많거나 이하가 되면 복잡 미묘한 감정을 불러들인다.

  그 순간 단조로움과 권태라는 고삐가 사람들의 어깨에 올라타면서 괴기한 모습으로 바뀌며 사람들을 땅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모습이 시야에 확 드러났다. 그리고 곧 암흑이 세계를 뒤 덮어 버리는 장면까지 시야에 보였다. 무서운 광경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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