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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히드레아 향기가 풍기는 섬
작가 : 광선
작품등록일 : 2019.9.12

식물학자 은제린이 새로운 향수 개발을 위해 꼭 필요한 꽃, 히드레아가 피는 섬으로 가서 그 나라 왕과 펼치는 사랑이야기.

 
1화
작성일 : 19-09-18 12:33     조회 : 333     추천 : 0     분량 : 17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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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잔잔히 들려오는 빗소리에 눈을 떴다.

 아침해가 고개를 든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잠에서 깨어나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둡게 쳐져있던 커튼으로 다가가 힘껏 젖히자, 투명한 물방울로 촉촉이 적셔진 창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답답하게 닫혀진 창을 여는 순간 차가운 공기가 얼굴에 부딪히며 몽롱한 머릿속을 시원하게 만들어주었다.

 

 빗줄기는 힘을 한껏 발휘한 뒤라 한 풀 꺾여 있었다. 찐득찐득한 습기가 미소를 머금게 할 정도의 반가운 손님은 아니었지만, 살을 애는 뜨거운 태양이 모습을 감춘 것에는 다소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발길을 옮겨 화이트 톤으로 장식된 침실을 벗어나 포만감을 안겨줄 부엌으로 걸어갔다. 어제 사 놓은 씨리얼에 한번 눈길을 보내고서, 해바라기와 포도 넝쿨그림으로 짜여진 식탁보로 시선을 옮겼다.

 

 부유한 것을 그리 즐기는 편이 아니었지만, 3년째 사귀고 있는 연인이 사주었기 때문에 쓰레기통 안으로 들어감을 모면하고 있는 아주 운이 좋은 고급 식탁보였다. 그 식탁보 위에 올려진 빵을 집어들었다. 자취경력 5년째의 베테랑인 나는 밥과 반찬을 만드는 것은 굉장히 까다로운 노동인 것을 간파해 언제나 아침식사는 간단한 빵이나 씨리얼등으로 해결한다. 가끔씩 나의 동창친구이며 남자친구인 고지식한 김최율이 으레 들를 때면 거한 밥상이 차려지는 순간도 있었다. 결국 식탁보는 그 순간 밥을 더욱 돋보이기 위한 사치스런 도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따르릉! 따르릉”

 

  갑자기 울린 전화벨에 정적이 흘렀던 아파트 안이 시끄러운 소음으로 넘쳐나고, 그 소리로 인해 안정을 취했던 심신이 화들짝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마음의 한구석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평화를 깨뜨린 것에 대한 울분이 조금씩 고개를 내밀었지만, 받지 않으면 소음에 미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인하여 바로 거실로 내달려 수화기를 움켜잡았다.

 

  “여보세요?”

 

  “아, 일어났네? 나야, 최율이. 오늘 외근 있지? 그러면”

 

  “언제 스토커가 되셨나? 내가 아침에는 저조압이라고 말하지 않았어? 게다가 외근하는 건 또 어떻게 안 거야?”

 

  “뭐야, 그것 때문에 기분이 안 좋은 거야? 난 또, 그 날인 줄 알았네”

 

  “할 말 없으면 그만 끊을게.”

 

  “앗, 잠깐. 농담인 것 알잖아! 외근 나가면 나랑 같이 가자고 전화한 거야. 너의 그 가엾은 장롱면허를 뒤로 너 또 택시 타려고 한 것 아냐?”

 

  “택시가 더 편하고 좋잖아. 어차피 외근 나가는 것도 다 회사비용으로 처리되니까.”

 

  “그래도 일단은 택시 잡는 것도 그렇고, 차가 있으면 좀 편하지 않아? 그냥 고맙습니다, 잘 타겠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라고. 잔말 늘어놓지 말고, 8시 30분에 아파트 앞으로 나와! 기다릴게. ”

 

  “글쎄 봐서 계속 비가 내리면 너의 그 살신성인을 마음껏 이용해 주지.”

 

  최율은 능구렁이가 꽈리를 틀어놓았을 만한 특유한 웃음소리를 내더니 이내 전화 저편에서 사라져 갔다. 작게 내리는 비를 보면, 외근 나갈 때 버스를 타거나 지하철을 타며 옮겨 다니는 벅찬 근무가 되풀이 될 것을 알고 있어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일이라는 것이 원래 대중없고, 윗사람이 원하면 어디에 어떤 일이든지 하지 않으면 안되었기에 비온다는 것만으로 오늘의 악전고투를 느낄 수 있다해도 외근을 나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시계를 보고 머리로 8시 30분을 계산하고 있었다. 말로는 불확실한 약속의 여운을 남겼지만, 나가지 않을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내게 헌신적인 최율을 외면할 수 없었고, 두 번째 이유는 게으름 중증인 나에게 딱 좋은 권유였기 때문이다. 천천히 여유를 즐기며 아침을 시작하고 싶었지만, 얄미운 시계는 외근준비에 맞춰진 계획을 훌쩍 넘겨 8시 43분으로 바늘을 옮겨가고 있어, 촉박한 심정으로 서둘러야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나의 아파트 초인종을 연시 눌러댔다. 아파트 현관 앞에서 나를 기다리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최율이가 온 것을 알고 있는 터라 서슴없이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열어 주었다.

 

 

  “뭐해? 빨리 나오지 않고.”

 

  “준비 다했으니까, 잠깐만 기다려.”

 

 최율은 나를 따라 들어오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부엌으로 가서 나를 핀잔줄 꺼리를 유심히 살피고 있는 눈치였다. 나는 아무 말도 없이 그의 잔소리를 어떻게 피해갈까 이리저리 궁리를 하며 서류뭉치들을 가방에 넣었다.

 

  “너, 또 빵으로 때운 거야?”

 

  “별로 식욕도 없고, 밥 해먹을 시간도 없으니까. 시어머니, 그만 가시지요”

 

  “은제린. 그것 다 핑계야! 30분만 더 일찍 일어나 봐라. 밥은 밥통이 하지, 반찬도 마트에 가면 다 싸게 팔아. 밥 씻을 1분이 없어서, 빵 살 때 반찬 살 2분이 없어서 밥 해먹을 시간이 없다는 것이 말이 돼? ”

 

 

  오늘도 최율은 옆집에 내 삶의 실태를 여실히 보고하였고, 그의 바른 말들에 나의 게으름이 들통나는 것과 동시에, 수많은 잔소리가 돌이 되어 날아왔다. 그리고는 익숙하게 그 돌들은 나의 마음에서 잘게 부셔지고 빻아져 가루가 되어 살짝 부는 바람과 함께 어디론 가로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나의 두 팔은 질긴 시어머니를 나의 공간에서 빼내느라 고생하고 있었다. 겨우 집밖으로 최율을 끌어내는데 성공했지만, 차에 오르면서까지 그는 아낌없이 나를 질타했고, 매우 익숙한 광경인지라 오히려 재미있게 생각되어 키득거렸다.

 

  “하여튼, 이 아줌마야. 사람이 말을 하면 들으세요! 들으라고 귀가 있는 거야? 엉?”

 

  “하하. 알았어. 그만 하시죠? ”

 

 말해봐야 입맛 아프다며 최율은 차의 시동을 걸었고, 힘없이 눈물을 떨구는 하늘을 살짝 올려다보고 양이 적어 와이퍼는 키지 않기로 결심한 듯 했다. 그리고 서서히 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가 적게 내려도 이미 많은 양이 내려서 차들은 거북이 걸음을 하고 있었고, 또한 아침이라는 불리한 상황이라 더욱 그 체증은 심해져만 갔다. 이러다가는 제 시간에 맞춰 매장을 돌아보지 못할 것 같아 마음이 조마조마 했다. 조바심을 내며 애타고 있는데, 가방 속에 얌전히 들어 있던 핸드폰이 무정하게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누구지?”

 

  나의 말에 흘낏 옆에서 운전하던 최율도 내가 꺼내는 핸드폰으로 시선을 옮겼다가 다시 앞을 주시했다

 

  “여보세요?”

  “지금 어디야?”

 

 우리 회사 내에서도 목소리 크기로 유명한 장부장이었다. 얼마나 목소리가 큰지 귀가 따가워 멀리 두어도 또박또박 잘 들릴 정도다.

 

  “예, 안녕하세요 장부장님. 지금 매장에 돌려고 가고 있어요. 비가 와서 차가 좀 막히는데요.”

  “막히긴 뭐가 막혀! 또 늦게 나온 거 아냐? 그리고 또 택시 탔어?”

 

 별명이 도살장에서도 거절하는 불독인 만큼 그의 악설은 나의 심기를 건드리기에 충분했지만, 한 두 번 겪은 것이 아니어서 이제는 최율의 잔소리처럼 가볍게 흘겨 들을 수가 있어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웃으면서 어떻게 변명할까 한참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장부장의 입은 러닝머신처럼 다시 내달리기 시작했다.

 

  “변명할 생각 말아. 지금 명동지점에서 문제가 생겼나봐. 어떤 VIP고객인데, 향수가 이상하다고 해! 매장에서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니까, 연구원인 자네가 가봐!”

 

  내가 조금은 비상식적인 사고를 타고난 자라도 생물학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여자라 불리는 존재인데, 장부장의 악설은 가히 성별조차 뛰어넘고도 남는 수준의 것이었다. 성별과 나이와 직급을 전부 무시한 채 모두 ‘자네’라는 명칭을 쓰시는 것이 장부장의 노하우라면 노하우일 것이다. 매번 새롭게 들어오는 신입의 이름을 외우지 않아도 되고 따로 명칭을 정할 수고마저 덜어주기 때문이다.

 

  “어떤 제품인데요?”

  “이번에 나온 신제품 줄리아 화인이라고 하더군. ”

 

 미국에 본사가 있는 우리 향수 회사 G&B에서 지금껏 하자가 있었던 경우는 극히 드물었는데, 문제가 생긴 것에 장부장도 심기가 편찮은 듯 보였다. 그리고 더욱 신제품이라서 첫 소문이 안 좋게 나오면 대중의 신뢰도나 판매량도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에 황급히 명동지점으로 차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장부장은 잘 부탁하고, 아무문제 없이 다 해결하라고 무거운 짐을 떠넘기고는 이내 전화를 끊어버렸다.

 

  “줄리아 화인은 미국본사와 우리나라에서 합작으로 만든 제품 아니었어?”

 

 최율도 G&B의 농을 먹는 자로 나와는 동기이다. 그는 영업부담당이라 일하는 곳은 틀리지만, 이렇게 연구원인 내가 외근을 나가 시장조사를 할 경우에는 그와 함께 일을 하게 된다. 어쨌든 이번 일을 잘 마무리지으려면, 윤기가 흐르는 검은머리와 하얀 피부를 소유한 최율의 진정한 아부와 살인적인 미소가 필수요소임은 확실하다.

 

  “앗, 저기다. 저기 매장 앞에서 세워. 내가 먼저 들어가 볼 테니까, 넌 주차하고 와”

 

 차가 세워지고 황급히 매장 안으로 꽂혀진 나의 신세를 조금은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매장 안의 사람들이 갑자기 침범한 이 낯선 여인의 자취를 묘하게 훑고 있었으므로.

 

  “어서 오세요”

 

 당황한 기색을 감추고 노련하게 말을 건네는 담당자가 나에게 걸어왔다. 이상한 사람이 아닌 G&B의 연구원이라고 하며 조그마한 명함을 지갑에서 꺼내어 조심히 내밀었다. 그러자, 갑자기 어둡던 얼굴에 활기가 돌며 안심한 듯한 표정으로 나를 어느 뚱뚱하고 짙은 연극 분장을 한 무서운 보석덩어리에게 데려갔다. 두툼한 손가락엔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온갖 보석들이 그 자태를 잃어간 채 어디까지가 손가락인지를 안내해주는 표시판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화려한 반짝이 의상은 거추장스럽고,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VIP고객의 기준을 모조리 갖춘 모습을 뚫어지게 보는 나의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보석을 뒤집어 쓴 고객이 톡 쏘기 시작했다.

 

  “당신이 이 향수 만든 사람이야? 어떻게 된 것이 신제품이라면서 색이 변하고 냄새가 쾌쾌한거야? 사람에게 팔려면 제대로 된 걸 팔아야지! 물론 이런 것 사는 건 개 껌값도 안되지만, 그래도 소파에 뿌리려고 샀는데, 이게 뭐야!”

 

  줄리아 화인은 반년을 들여 연구한 끝에 발명한 한미합작 향수이고 보통 사람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의 가격인데, 그 향수를 소파에 뿌릴 정도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다니? 여러 가지로 마음이 상해 이날의 일을 인생에 있어서 가장 비참한 사건으로 기록하려 하였지만, 이런 사람에게 상처받으면 나의 성품도 깎아지는 것이라고 판단하여, 웃으며 나타난 최율에 의해 다시 안정을 취하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사모님. 줄리아 화인의 색이 변색되고 향이 변했0ㅣ습니까? 정말 죄송합니다. 저의 회사에서 수십 번이나 시험을 해서 만들었는데, 그런 문제가 발생될 것이라고는 예상 못했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는지 파악하고 곧바로 보상해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잠깐 그 향수 좀 볼 수 있을까요?”

 

 임기응변이 뛰어나고 혀 둘리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은 최율에게는 영업직이 천직이라고 생각하며 그가 들고 있는 향수로 시선을 옮겼다.

 

  “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에메랄드빛의 줄리아 화인이 어째서 짙은 보라로 바뀌었지? 이럴 리가 없는데.”

 

  변모된 줄리아 화인을 보자 놀라서 얼른 최율의 손아귀에서 낚아채어 자세히 살펴보았다. 킁킁거리며 냄새도 맡아보는데, 역해서 으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여름에 먹다 남은 과일찌꺼기를 한데 모아놓고, 그 존재를 잊어 버려 나중에 다시 그 과일찌꺼기를 확인했을 때 풍기는 악취와 같아서 놀람을 금치 못했다.

 

  원래의 줄리아 화인이라면 푸른 바다를 헤엄치는 고래가 떠오를 정도로 산뜻하고 신선한 향으로 가득해야 하는데, 지금 고객이 갖고 온 향수는 도저히 향수라고 볼 수도 없었다. 향수병의 모양이나 상표를 확인해 보았는데, 우리 회사 것은 확실했다. 줄리아 화인을 만들면서 문제가 몇 가지 생긴 적은 있었지만, 그것은 아직 유통시키기 전의 실험단계였고, 그 문제를 보안하고 시판한 것이어서 전혀 문제가 발생되지 않을 것을 확신했는데, 어떤 이유로 이런 변화가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더욱이 이렇게 색이 보라색으로 변하고 과일 썩은 내가 났던 적도 없었다.

 

  “이럴 리가 없다니? 지금 이렇게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지 않아? 아가씨도 여자라면 알 꺼야. 어디 이런 걸 향수라고 하겠어.”

 

 최율의 힘은 대단한 것이었다. 크르릉 컹컹 짖어대는 볼 테리어 고객이 왈왈 거리는 퍼그로 변하여 좀 전까지와는 사뭇 다른 조용한 음성이었다.

 

  “예. 문제가 생겼으니, 보상을 해드리겠습니다. 저, 그런데 이 향수는 언제 구입 하셨는지 알 수 있을 까요?”

 

  “구입한지도 얼마 안 돼. 저번 주에 구입했다고. 그런데 어제 보니까, 갑자기 색이 변하고 냄새까지 이렇다니까.”

 

  “혹시 향수에 다른 걸 접촉시키신 적은 없었나요?”

 

  “없지. 향수케이스가 워낙에 열기 힘든 모양이라 열려고 했는데, 잘 안 열리던 걸. 겨우 열었어.”

 

 보상을 책임지겠다고 말하자, 웃으며 더욱 나긋해진 음성이 자존심이라는 굳건한 벽을 갈아먹고 있었다. 6개월 동안의 피땀으로 만들어진 것을 다 회수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향수병 열기 쉽지 않죠? 저도 예전에 미국본사로 갔을 때 독특하고 멋진 향수병만 따로 파는 가게를 갔었는데, 제가 가지고 있던 향수병이 잘 안 열려서 고생 좀 했어요”

 

  신제품의 문제발생으로 회사의 크나큰 차질이 생긴 시점에서 살살 꼬리를 흔들며 고객과 이야기를 나누는 최율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다. 더욱이 고객의 말에 맞장구까지 쳐주고 있다니.

 

  “맞아. 어쩜 얼굴도 고운 총각이 내 마음도 어찌 그리 잘 알아. 맞아. 진짜 안 열렸어. 그것 열고 향을 맡으니까, 머리가 너무 아파서 옆집여편네가 그 안에 스킨을 넣으면 향이 좀 은은하게 된다고 하길래 넣어 봤지. 읍”

 

  갑자기 자신의 입을 막아 주변에 울린 고해성사를 주워담으려 했지만, 말은 한번 뱉으면 그걸로 모든 사람들 귀에 순식간으로 빨려 들어가기 때문에 뒤늦은 제어였다. VIP고객을 뒤로 환한 미소를 입가에 띄었다.

 

  가끔 손님들 중에 향수를 더 많이 쓰려고 조금 남은 향수병에 스킨을 부운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우리가 출시한 줄리아 화인은 지금까지의 향수와는 달리 그 고유한 향기를 유지하되 머리가 아플 정도로 독한 향을 없애기 위해 다방면으로 연구하고 각종 액체를 혼합하여 창조한 것이라서 만일 이 곳에 다른 액체를 붓는 일이 생긴다면 그 끝은 알 수가 없다.

 

 그 사실을 향수병 겉에 주의사항으로 적어놨음에도 불구하고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던 고객은 130만원 짜리 향수를 값싼 방향제와 같이 취급하여 갑자기 변하는 색에 절규를 잇다가 이렇게 어이없는 거짓을 고하고 말았다. 물론 보상을 해드린다고 해도 향수에 전혀 문제가 없이, 고객에 의해 변하게 된 것을 알게 되면 책임은 고객에게 돌아가 변상도 불가능하다. 다행인 것은 이 향수의 전 제품 리콜과 신뢰도의 하락과 문제의 해결을 연구하는 동안 받을 고충과 피해가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얼마나 큰 손실이 될 뻔했는지 과연 고객은 알고 있을까?

 

  “고객 님의 잘못이 있어서 향수는 변모하게 되었지만, 구입하신 지 일주일 밖에 지나지 않아 다시 새로운 제품으로 바꿔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이 제품은 다른 향수제품과는 달리 비싼 원료로 만들어진 것으로 100%의 본 제품으로 바꿔드릴 수는 없습니다. 주의 사항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지 못한 저의 쪽 책임과 향수를 구입하시고 주의 사항을 읽어보지 않고 다른 것을 첨가한 고객 님의 잘못을 감안해서 서로가 50%의 책임을 지고 반 가격에 팔고 있는 조금 작은 향수로 보상해 드리겠습니다. 소파에 잘 뿌리세요. ”

 

  미소지으며 고객에게 70만원 짜리 향수를 건네었다. 원래 다른 회사라면 아주머니의 잘못을 주점으로 변모된 향수만을 갖고 돌아가게 했을 테지만, 우리회사는 미국에 본사를 두어 경제면으로나 신뢰도로 우수하고 튼튼해서 이렇게 문제가 발생하면 고객에 입장에서 대처하도록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다. 더욱이 이번 고객은 VIP라서 특 대우가 내려진 것이다. 일이 잘 해결 된 것을 장부장님에게 이야기하는 동안 최율이 다음 매장으로 갈 채비를 했다.

 

  “그럼, 스킨을 부었단 건가? 그렇게 완벽한 향수에 또 뭘 바라는 건지. 욕심이 끝이 없군. 그 고객은.”

 

  “완벽한 향수는 아니죠. 분명 다른 사람에게는 그 향기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제가 원하는 완벽한 향수는요 모든 사람이 맡아도 필이 오고, 질리지 않는 향기를 내는 거예요.”

 

  “그런 향수가 줄리아 화인이 아니었나? 아무튼, 꿈같은 소리는 그만하고 일이나 해!”

 

 식은땀을 흘리며 최율의 놀라운 화법에 의해 일이 잘 해결되었으니, 칭찬은커녕 좋아하는 내색을 보여야 하는데, 결국은 일이나 하라고 고함을 치는 장부장을 보며 사람도 개혁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겨우겨우 오후 9시 13분이 되어서야 오늘 일을 전부 해치울 수가 있었다. 하지만, 아침에 당한 일 때문인지 온몸이 더욱 지쳐 있었다. 어느 작은 밥집으로 들어가 육개장에 밥을 말아먹으면서 피곤함에 시들어진 몸에 보양식을 공급해주었다. 대한남아라고 최율은 그래도 씩씩하게 육개장을 국물까지 들어 마시며 만족스런 빛을 띄고 있었다.

 

  “아, 개운하다! 이 곳 육개장이 내가 먹은 것 중에서 최고야”

 

 그리고 최율은 항상 식사하러 가는 곳마다 그곳 아주머니가 귀를 쫑긋 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아는지 언제나 그 식당이 제일이라는 둥 이야기한다. 벌써 육개장이 최고라는 집은 열 군데도 넘어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고 난 뒤의 또 들르게 되면 두 번째 먹는 육개장의 양은 두 배로 늘어나 있었고, 고기도 큼직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 보였다. 한 때 내가 다닌 대학교 선배가 최율과 사귀는 것을 알면서 그렇게 감언이 뛰어난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사막에 가도 굶어죽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말라는 말까지 한 것 같다.

 

  “오늘 시간 있어?”

  “음. 잠깐 생각 좀 하고.”

 

 이제 외근은 다 돌아서 다른 멤버가 다른 매장을 도니까, 더 이상 준비할 것도 없고, 신제품도 나와서 조금은 일도 여유가 있으니, 마음껏 비디오를 빌려서 볼까? 아니면 밀린 빨래를 하면서 보고 싶었던 인기드라마에 심취해 볼까?

 

  “별달리 할 건 없는데. 왜?”

  “그럼, 나랑 2차 가자!”

  “나, 술 못하는 것 알잖아. 그냥 영화나 볼까?”

  “아니, 술 마시러 가자. 그냥 가볍게 칵테일 한잔씩 하자! ”

 

 언제나 나의 뜻을 들어주던 그였는데, 이상하게 오늘따라 반동이 커서 힘 딸린 나는 오늘 일도 알고 보면 최율의 덕분이므로 그의 뜻에 맡기기로 했다. 그는 나와 달리 말도 많고, 임기응변도 좋고, 다른 사람과의 교류도 좋은 편이라 주변동료에게 인기가 많다. 그리고 어머니가 연극배우라서 이 녀석도 의외로 문화인에 속하여 나같이 막자란 사람에게 불쾌한 고급에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오늘도 최율을 따라 낯선 회원전용 카페에 오게 되었다. 어머니의 파워로 이런 곳의 카드도 금방 얻은 것을 보면 큰어머니와 큰아버지에게 길러진 고아인 내 처지가 처량하게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부유한 것을 즐기는 편도 아니고, 그들 속에 속하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는 것은 진리고 사실이기에 지금의 나로써도 매우 만족하고 있고, 나를 길러주신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께 깊이 감사하고 있다.

 

  회원 전용 카페에 들어가자, 음모를 짜는 사람을 위한 곳인지 동굴처럼 어둡고 불쾌한 기분을 자아냈다. 그래서 어둡게 깔려진 빛 때문에 하마터면 앞의 화단과 부딪힐 뻔했고, 익숙지 않은 재즈라는 음악에 서서히 잠결로 들 뻔했으니, 나에게는 가시방석을 깔고 앉은 듯 했다. 하지만, 최율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편안 표정으로 메뉴를 살펴보고 있었다.

 

  “어떤 거 마실래?”

  “그냥 아무거나.”

 

 그렇듯 낯선 곳에 오면 나의 대답은 한결 같아진다. ‘아무거나’ 잘 모르거나 어색한 공간으로 나를 침투시키며 안전선을 유지하는 대답이다. 기껏 무장해제하고 열심히 살펴 정한 메뉴는 어긋난 곳에 가서 꽂히기 일쑤다. 경험이 너무 풍부한 것도 흠이라면 흠인 것 같다.

 

  “우리 만난지도 벌써 5년이네.”

 

 생각해 보니, 김최율을 만난 것은 5년 전 대학 캠퍼스 안에서였다.

 

 

 어떤 멍청이가 나무아래에서 자고 있기에 송충이라도 떨어질까 싶어 구경하다, 마침 하품하며 일어나려는 순간 그의 입안으로 야들야들하고 울긋불긋한 귀여운 그것이 알맞게 착륙한 소동에 의해 나는 그를 기억할 수 있었다.

 

  “으악..이게 뭐야, 퉤퉤”

 

  털이 부슬한 정체 모를 것이 입안에서 나온 것을 확인한 그는 기겁하여 깡충깡충 뛰며 도망갔는데, 그 모습이 매우 귀여워 보였다. 생긴 모습도 여자들에게 모성애를 자극시키는 뽀얀 피부와 윤기나는 검은머리를 지녀서 흔히들 말하는 꽃미남의 원조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다시 재회하게된 장소는 다름이 아니라 특강에서였다. 우리 대학교는 일반 대학교와 달리 생물대로 유명한 곳이어서 생물에 관한 다양한 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식물학과를 선택하게 되었고, 당시의 나이는 21살이었다.

 

 그리고 우연히 미국의 저명한 식물학자가 초빙되어 온다는 소식에 내심 기쁨의 함성을 외치며 즐겁게 특강의 무리 속으로 뛰어 들었던 날이었다. 그 날도 열심히 특강을 듣고 있었는데, 무언가 발 밑에 걸리는 것이 있어 누가 장난치나 싶어 눈을 밑으로 하는 순간, 꺄약하고 괴성이 터져 나왔다. 바로 내 옆에 앉아 있던 여학생의 입에서. 나는 너무 놀라 목소리도 나오지 않은 채 발 밑을 지켜보며 이 무시무시한 것이 내 발을 어찌할 까 긴장한 채 진땀이 등줄에 흐르는 것만을 느낄 뿐이었다.

 

  “자, 진정해요. 학생들. 뱀을 자극하지 맙시다. 여학생도 가만히 있어요. 그건 맹독을 가진 코브라지만, 자극하지만 않으면 물러갈 겁니다.”

 

  특강하러 온 학자도 놀라 눈을 부릅뜨고 있었고, 통역하던 교수님이 긴장한 채 말을 하셨지만, 강의실 안의 사람들은 놀라서 허겁지겁 공포로 뒤덮인 이곳을 이미 빠져나가느라 아수라장이 되어 자극은 고사하고 나의 몸마저 건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강의실 의자가 붙어있던 것이라 학생들이 하나둘 소리치며 나갈 때마다 무정하게 나의 몸은 들썩이고 있었다. 분명 이 뱀은 생물연구소에 잘 가둬두었던 녀석임이 분명하다. 어찌하여 이곳까지 자신의 모습을 당당히 드러내며 나를 위협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보다 나의 발목을 돌돌 감으며 서서히 내려 깔리는 두려움이라는 사신에 온통 신경이 곤두서고 있었다.

 

 어느 정도 조용해진 강의실 안을 천천히 둘러보자, 당연한 일이고,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아무도 없었다. 교수님도 더 이상 강의를 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시고 미국의 저명한 식물학자, 비싼 몸과 함께 피신한 뒤였다. 맹독이라고 설명까지 하셨으니 피하는 것이 당연지사겠고, 나는 뱀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대학원을 찾으러 간 친구를 기다리며 오돌오돌 떨며 홀로 공포를 이겨내야 했다. 속으로는 제발 물지 말아 달라고 눈물로 호소하면서.

 

  “잠시만요. 울지 마세요. 제가 어떻게 해드릴게요”

 

 어디서 구원의 손길이 빛을 발하여 음성이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놀랍게도 바로 그 송충이를 입으로 받았던 그 사람이었다.

 

  “송충이씨?”

 

  “옛? 설마, 그 장면을 보신 거예요? 으악. 제발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아주세요. 일생일대의 고통이었다고요. ”

 

  “그렇군요. 저도 지금 일생일대의 고통과 맞서고 있답니다. 다른 사람에게 말할 기운도 없고, 어떻게 될지도 몰라요. 이 뱀은 물리면 1시간 안에 죽는 맹독을 가진 코브라에요”

 

  “그래도 뱀이라서 백반은 싫어할 거예요”

 

 시골에서나 듣던 백반. 그래서 봉숭아물을 들이면 뱀이 쫓아오지 않는다는 이야기에 비롯하여 많이 하곤 했었다. 그렇지만, 그건 그냥 하는 이야기가 아니었었나? 갑자기 송충이 씨는 주머니에서 백반을 꺼내어 그걸 가방 속에 있던 콜라 캔으로 열심히 깼다. 깨질 턱이 없다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균열이 많이 생긴 불량스런 백반이었는지 몇 번 박치기하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몸을 분열시켜 버렸다.

 

 그리고 조심히 백반을 나의 발안 쪽으로 조심히 뿌렸다. 우리나라 뱀이 아닌데, 백반을 무서워할지도 궁금했는데, 갑자기 뱀이 나의 발목의 족쇄를 풀더니 스르륵 움직여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다행히 강의실 밖으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한국전통에 조예가 깊은 뱀이어서 안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뱀이 나간 곳에서 꺄악하는 소리가 연달라 들리고,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이네요.”

 

 이 일이 바로 최율과 정식으로 만나된 계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만난 지 2년 뒤에 연인으로 승격되어 나에게도 꽃미남 남자친구가 떡 하니 옆구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의 진실되고 정직한 모습을 보며 나도 많이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했고, 품행이 곧고 꾸밈없는 표정에 당연히 내 옆에 있는 존재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지금 현재 최율은 의심스럽고 수상한 카페에서 칵테일을 몇 잔 째 들이마시고 있다. 좀 전에 말한 우리 만난 지 벌써 5년이라는 단 한마디만 남겨 놓고.

 

  “그만 마셔. 안 그럼 내가 운전해야 하니까.”

  “쿡쿡. 장롱면허로?”

  “그렇게 예쁜 말만 할 꺼야? 술주정뱅이 김최율!”

 

 이미 취했는지 몸이 흐느적거리기 시작해 술을 못 마시게 제압하자 완강히 거부해서 약간 움찔거렸다. 예전과는 다른 모습에 혹시 뭔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심히 걱정도 되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은제린! 나와 결혼해 줘!”

 

 비틀거리는 몸을 하고 왼쪽 바지 주머니의 손을 넣어 뭔가를 빼서 내 앞으로 내밀었다. 언제 준비한 것인지 아담하고 섬세한 장미모양의 상자가 고운 얼굴을 내게 내밀고 있었다. 그리고 난 주저 없이 그 상자를 받아 들였다. 아직 결혼하기에는 이르고 고아라서 결혼에 대해서 조금 주저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좋은 남자를 만났다는 사실에 기쁘다.

 

  하지만, 다른 친구들은 장미 100송이의 꽃을 받으며 멋지게 무릎을 꿇고 프로프즈를 받았다고 했는데, 나는 기껏해야 보슬비가 내리는 어느 저녁에 회원제용의 그것도 앞사람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어두운 카페 안에서 더욱이 술에 취해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술주정뱅이에게 프로프즈를 받다니, 기가 막힐 뿐이었다. 맨 정신에 또박또박 멋진 시도 읊으면 어디가 큰일이 나는 걸까? 하지만, 거부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서 자연스레 그 상자를 열어 보았다.

 

 둥그런 쿠션 속에 하얗게 반짝이는 반지가 나를 보며 환하게 미소짓는 듯 보였다. 프로포즈를 받고 손에 쥔 반지는 언제나 이렇게 방긋 미소를 보이는 것인지, 이제서야 그 정체를 알고 즐거워했다. 결국 26살의 나이에 커다란 족쇄, 누구누구의 피앙세라는 엄청난 명찰을 달고야 말았다. 김최율이라는 조금은 나약하지만, 밝은 새장도 함께. 그의 어머니의 뜻에 따라 약혼이라는 거부감이 가득한 행사를 치러 내야했고, 결혼은 아직은 보류라는 예비 덫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래도 한시름은 놓았다. 바로 누군가와 가정을 만들기에 나는 역부족이라고 판단하였고, 나를 길러주신 큰어머니와 큰아버지는 기쁨의 미소를 보여 주셨지만, 그분들도 한편으로는 고아라서 걱정스레 바라보셨다. 물론 나는 극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혀야만 했다. 과연 잘 해낼 수가 있을까? 내가 갖지도 못한 완벽한 가정인데, 과연 잘 이끌어 갈 수 있을지 모든 것이 두려웠다. 그래도 최율은 걱정 말라며 모두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지만, 사실은 믿을 수가 없다. 술에 취한 채 프로포즈한 주정뱅이의 말을 어찌 신뢰할 수 있겠는가.

 

  “축하해! 은제린! 이제 너도 토끼같은 남편과 여우같은 아기를 가진 화목한 가정을 꾸리겠구나”

 

  동료연구원 언니의 말을 들으며 축하한다는 말이 그 반대의 말처럼 들려 조금은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결혼이나 가정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나의 심경을 토로한 다는 것은 애초에 생각도 말았다. 그런 언니에게는 당연히 토끼같은 남편과 여우같은 아기로 비춰지겠지만, 사실은 여우같은 아내와 토끼 같은 자식이 아니었던가.

 

  “은제린! 이일 똑바로 못해? 얼마나 중요한데 이따위로 하는 거야?”

  “예, 죄송해요. ”

  ‘먼저 결혼하게 되어서…’

 

 앙갚음을 갖고 행하는 일에는 절대로 맞서지 말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라는 옛 성인의 말을 듣고 원래 악의가 있어서가 아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것을 알고 있기에 며칠동안은 고개를 숙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독한 마음을 먹고 덤비는 늙은 구렁이에게 당해낼 사람은 여간해서는 없는 듯 보인다.

 

  편안한 하루를, 무사한 하루를 빌며 회사로 들어서는데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게시판에 몰려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나도 벌떼들 근처로 발길을 옮겼을 때, 축복의 신들이 내려준 선물에 깊이 감사를 올릴 뿐이었다. 감사패라도 줄려는지 하얀 종이에 3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그곳에 나의 이름, 은제린이 커다랗게 새겨 있었던 것이다. 지금껏 회사를 다니면서 이토록 기쁜 일은 전대미문이었는데, 도대체 어떤 일일까 두근거리며 시선을 천천히 위로 올려 글을 읽었다.

 

  “좋겠다. 미국 본사에 가서 3개월간 본사 팀과 합류해서 줄리아 화인에 이은 새 프로젝트에 돌입하잖아. 공짜로 미국을 간다니. ”

 

  “어디 놀러 가는 건가? 일하러 가는 거지. 게다가 본사 팀들은 우리회사보다 더 장난 아니게 힘들다고 하던데, 어떻게 해!”

 

  3명의 이름 밖으로 밀려난 여직원들의 말이 바다의 조수간만의 썰물처럼 밀려왔다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귀에 담겨진 단어는 ‘미국’, ‘3개월’, ‘장난 아니게 힘듬‘ 바로 이 세 개였다. 커다란 개미왕국의 가엾고 미천한 일개미들은 위의 여왕개미가 하라는 대로 죽도록 일해야 하는 팔자인가 보다. 이 소식을 어느새 들었는지, 최율이 바로 내 일터로 달려 왔다.

 

  “어떻게 된 거야? 너, 혹시 나 몰래 신청했었어?”

 

 허겁지겁 온 최율의 얼굴보다도 손에 들어가 알맞게 자리를 잡은 약혼반지가 제일 먼저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니. 없었지. 앗, 잠깐. 설마 그건가?”

 

 생각해보니 내가 입사하고 1년 정도 지났을 때였다. 미국본사에서 바이어들이 방문하면서 미국본사의 상황도 검토할 수 있도록 우리 회사의 연구원중 선발해서 데리고 간다는 소문이 돈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지원자를 모집한다는 문구에 공짜로 미국 여행하게 생겼다고 기뻐서 덥석 지원했지만, 떨어지고 몇몇 베테랑 연구원들에게 행복한 일탈이 주워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존재도 잊고 있었는데, 혹시 그 지원이 이제서야 먹힌 건 아닐는지. 애처로운 고용자의 심정을 뼈 사무치게 느끼며 아파트에서 열심히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소문대로 해외근무 지원했던 그 당시의 서류를 비통하게도 잘 간직해 두었던 모양인지 그것을 토대로 이번 프로젝트 팀을 결정했다고 장부장이 자백했다. 그리고 갑자기 생긴 미국 행은 채 4일도 되지 않아 급격히 파견되어 드디어 낼 인천공항으로 향하기만 하면 되었다. 최율은 울구불구 난리를 쳤지만, 겨우 3개월 후인데, 은제린이 배신하겠냐고 걱정 말라고 장부장님은 그를 설득했다. 미국사람들도 눈은 있다고 하면서.

 

  “그래. 난 예쁘게 생기지도 않았어. 검고 틱틱한 피부에 촌스럽고 불편한 안경을 쓴 돼지털 머리의 소유자인걸. 그래도 공짜로 미국이다. 기뻐하자!”

 

 나의 성격상 비관적인 일상은 순식간에 낙천적인 즐거운 여행으로 바뀌어 놀랍게도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짐을 싸고 있었고, 어느 샌가 콧노래마저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약혼자 곁을 떠나는데, 그렇게 좋아?”

  “어? 언제 왔어?”

 

 어느새 최율은 현관 벽에 기대어 일보다 더 열심히 짐을 정리하는 나를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행복의 따뜻한 공기로 가득 채워진 나의 주변은 어둡고 차가운 기운으로 가득한 최율에 서서히 물들어가고 있었다.

 

  “참, 어떻게 집안으로 들어 왔어? 너 스토커야?”

  “또, 무슨 헛소리야. 네가 키 줬잖아. 벌써 꽤 됐구먼. ”

 

 약혼해도 우리사이는 예전과 똑같은 평행선을 유지한 채라 조금 심드렁해진 최율의 어머니가 그를 내 아파트로 쫓아낸 사건이 있었는데, 그 당시 난 일이 바빠 계속 문을 열어 줄 수 없어, 열쇠를 만들어 주었는데, 잊고 있었다. 그 뒤에 꾀병이 극도로 심해진 어머니를 위해 최율은 다시 집으로 쓸쓸히 발길을 옮겼고, 아파트에는 항상 나와 함께 왔기 때문에 그 열쇠의 존재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럼, 3개월 뒤에 오는 거야?”

  “응. 그러네.”

  “보고 싶어서 어쩌냐?”

  “쿡. 겨우 3개월인데, 못 참아!”

  “그래. 난 못 참아. 널 하루라도 못 보면 은제린 금단현상에 의해 죽을지도 몰라.”

  “그래 그래. 그럼 다시 내가 와서 부활시킬 테니까, 걱정 말아.”

 

 갑자기 최율은 슬픈 눈으로 차마 거부 못할 얼굴로 나를 힘껏 안아, 나의 어정쩡히 놓여진 팔과 어깨가 들썩였다. 그다지 스킨 쉽을 하지 않던 최율인데, 헤어지는 건 매우 슬픈 장면임을 알고 있는 듯 했다. 심지어 같이 살았던 며칠동안에도 난 침대에서 최율은 소파에 머물렀기에 극도의 대인기피증이 있는 건 아닐까 모두들 의심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미국으로 떠나는 나를 이렇게 애타게 찾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한 일이다.

 

 부드럽게 나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두 손은 이내 나의 양쪽 볼에 안착하고 살며시 작은 동물처럼 사랑스런 표정으로 나의 입술위로 가볍게 자신의 촉촉한 앵두를 갖다 대었다.

 

  나보다 더욱 부드러운 감촉에 뜨거운 열에 대인 것처럼 온 몸이 타올라 스스로도 놀랐다. 편안 친구처럼 항상 곁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마음 속 깊이 이 친구를 사랑하고 있었을 줄은 나도 몰랐었던 것이다. 따뜻하고 미끈거리는 혀의 감촉이 느껴질 때는 나의 고동이 밖으로 뿜어져 온 사방에 퍼질까 두려울 정도였다.

 

  머리는 서서히 옅은 안개로 뒤덮이며 꿈속으로 안내하는 작은 배에 올라서게 되었고, 뱃사공이 살며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이 아늑하고 고요하며 황홀한 자태를 뽐내기에 바빴다. 다시 눈을 떠 현실로 이끌어졌을 때 사랑이 가득 담긴 눈동자로 나를 지그시 보는 최율에 애정의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지금껏 많은 향수를 다뤄 최율과 나의 몸에는 항상 향이 난다고들 했는데, 그것이 더욱 우리 두 사람 사이를 밀접하게 만든 촉매제 역할을 해주었다. 그리고 그날 밤에 나의 순백의 비밀스런 공간 안으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포용력으로 가득한 낯선 남자가 슬며시 들어왔다. 포근하고 넓은 남자의 품이라는 것이 이토록 행복감을 맛보게 해주는 건지, 처음으로 느꼈다. 외로이 길을 걸어가 고독이라는 추위에 떨고 있을 때, 따뜻한 오두막으로 초대되어 포근한 차를 마신 순간처럼 마음이 사랑이라는 뜨거운 감촉으로 타 들어가는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 9시 30분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새벽에 잠든 우리들은 속도위반이라는 단어를 높이 꺼내들어야만 했다. 그리고 겨우 9시10분에 도착하여 다른 연구원들은 이미 입국절차를 끝낸 뒤라 부랴부랴 안으로 들어가 줄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을 벅차고 황급히 비행기에 올라탔다. 너무 늦었기에 최율과의 작별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나를 꼭 움켜잡은 손이 스르르 빠져나가며 마지막의 여운을 심어준 채, 슬픈 곡조에 맞추어 가늘게 흔들거렸다.

 

 “잘 갔다와! 도착하면 전화하고! 건강하게 돌아와야 해! 사랑해. 제린아!”

 

 원래 눈물이 많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꼭 무슨 이산가족 헤어지듯 울어대는 모습에 주변 이목이 신경 쓰였지만, 최율이 군대갈 때 자기가 헤어진 것 빼고 내가 떠나간 적 없어서 더욱 슬픔을 내보인 다고 생각하며 억지로 미소를 잃지 않으며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별할 때의 모습을 생각하며 좌석에 앉아 창가를 바라보았다.

 

 모든 사람이 분주히 움직이며 비행기를 이륙시키기 위한 준비가 끝났는지, 숨을 제대로 돌리지도 않았는데, 벌써 비행기는 움직이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저 하늘 위로 날아오를 것이고 나는 3개월 뒤에 다시 최율의 품으로 돌아 올 수 있겠지?

 

 낯선 경험이 기다리는 미국을 향해 비행기는 힘차게 날개 짓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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