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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라이트노벨
우리는 저마다 시대를 잘못 만났다(부제: 난세살이)
작가 : 박은혜
작품등록일 : 2018.12.31

‘시집살이.’ 며느리들의 가슴을 철정 내려앉게 하는 말이다. 하지만 정말 며느리만 힘들까? 자신도 겪어온 며느리 시절을 잘 아는 시어머니가 왜 며느리를 괴롭힐까? 어쩌면 그 시어머니는 나름대로 잘 해보려는 게 아닐까? 언젠가 시어머니가 될 며느리는 자신의 며느리를 어떤 태도로 대할까? 어쩌면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하던 그 시어머니와 똑같은 모습이 되어 있진 않을까?

“네가 뭘 안다고 끼어들어?!” 사건 당사자들이 그 일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다. 경험해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하지만 때로는 경험했기 때문에 모를 수도 있다. 한 걸음 물러나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이해관계를 떠나 생각할 수 없다면, 그것을 날 위한 싸움에 지나지 않는다. 서로 자신만을 위해 싸우니 해결도 있을 수 없다.

만연해 있는 고부갈등을 제3자의 시각에서 본다면, 끝없이 맞물려 있는 이 복잡한 문제의 원인이 어느 한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비단 시어머니와 며느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 마찬가지다.

우리는 저마다 시대를 잘못 만났다. 나 한 사람만이 아니라 그분도, 그도, 그녀도, 그 아이도 다 잘못 만났다. 그러나 그 사실을 잘 모른다. 당사자인 만큼,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 같고 상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사람 같다.

‘힘들어봤자 나보다 더 힘들까.’
‘내 주제에 지금 누굴 위로하고 있나.’

누군가를 위로하는 게 사치가 된 세상. 하지만 위로할 수 있어야 위로받을 수 있다. 그 사람이 시대를 잘못 타고났음을 알게 된다면, 그 사람도 나처럼 난세(亂世)살이를 하고 있음을 이해한다면, 조금은 불쌍히 여기며 감싸 안을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어쩌면 상대를 시대의 피해자로 바라볼 수만 있어도 조금은 달라 보일 것이다. 그 사람도 나처럼 힘겹게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 자체만으로도 꽤 대단한 사람, 꽤 괜찮은 사람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런 소소한 소망 하나를 던져주는 것이 이 책에 나올 인물들의 역할이다.

이 소설은 올해 서른셋이 된 주인공(나)이 세 살 즈음에 가지고 있었던 어렴풋하게 남아있는, 하지만 지울 수 없는 강력했던 몇 가지 기억을 토대로 전개된다. 그리고 올해, 세 살 즈음이 된 사람들과의 이야기들을 동시에 섞어가며 그들을 지배한 각각의 시대를 조금씩이나마 마주하게 만든다.

그러고 보면, 올해 ‘세 살 즈음’이 된 등장인물들의 스펙은 저마다 찬란하게 서글프다.

- 일흔 세 살 즈음에
올해 일흔 세 살이 된 고모는 1946년에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비상한 머리를 써보지도 못한 채 국졸로 학업을 마쳐야 했다. 194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독일광부로 파견나간 아버지를 잃어야 했고 늦게나마 실현하려던 꿈도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포기해야 했으며 194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애틋한 마음 한번 품어볼 기회 없이 원치 않는 결혼을 치러버려야 했다. 그리고 여생을 딸과 손녀를 위해 헌납해야 했다.

- 예순 세 살 즈음에
올해 예순 세 살이 된 아빠는 195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아주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잃어야 했고, 독재정권과 군사정권을 거치며 우울한 대학시절을 맛보아야 했으며, 그토록 가혹했던 70년대의 군대를 경험해야 했다. 195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직장도, 집도 쉽게 구했지만 평생을 가족을 위한 ATM기계로 살아야 했고 퇴직 시기에는 첨단문명과 벗할 수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외면당하기 시작했다.

- 쉰 세 살 즈음에
올해 쉰 세 살이 된 엄마는 196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끝까지 대학에 가겠다고 고집을 피웠지만 대학을 포기해야 했으며 남편이 번 돈으로 편히 산다는 시선 속에 무시를 덤으로 받으며 살아왔다. 거기에 196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맞벌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시대에 노년기를 맞아야 했고 결국 황혼육아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 마흔 세 살 즈음에
올해 마흔 세 살이 된 외삼촌은 1976년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군대를 다녀오자마자 IMF라는 난국에 부딪혔다. 1976년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어렵게 워크맨 사업을 시작했지만 MP3의 등장으로 사업을 시원하게 말아 드셨고, 시대의 흐름을 간파하여 얼른 MP3사업으로 전향했지만 스마트폰 시대가 도래하면서 또 다시 사업을 접어야만 했다.

- 서른세 살 즈음에
올해 서른세 살이 된 나는 1986년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군대에 다녀오자마자 미국발 경제위기와 마주했다. 취업난은 극도로 심각해진 상태였고 뭐라도 좋으니 해 보자며 원치 않는 직장에 들어갔다. 1986년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미친 듯이 벌어도 내 집 마련의 꿈은 현실이 될 수 없는 이상일 뿐이다. 친구들은 “그 나이 되도록 자리도 못 잡냐?”는 핀잔에 이미 녹초가 되어 있다.

- 스물세 살 즈음에
올해 스물세 살이 된 조카(고모의 손녀) 유진이는 1996년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IMF와 함께 유아기 시절을 보냈다. 199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개천에서 용 날 수 있다는 할머니(나의 고모) 말을 믿고 열심히 공부했지만 더 이상 개천에서 용 나는 것은 어려운 시대임을 알고 꿈을 하나 둘 접고 있다.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포기하는 건데 욕심이 많아 결혼을 안 하고 있다는 핀잔까지 덤으로 들으며 살아간다.

- 열세 살 즈음에
올해 열세 살이 된 사촌동생(외삼촌의 아들) 영우는 2006년에 태어난 우등생이다. 하지만 임대아파트 스펙 덕에 친구조차 마음대로 사귈 수가 없다. 200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곧 다가올 이십대를 4차산업혁명 시대와 함께 맞이하게 되었고, 그동안 죽어라 공부한 외국어도 다 쓸데없다는 사실을 알아가고 있다. 꿈도 함부로 꿀 수 없는 그에게 어른들은 꿈이 없다며 혀를 찬다.

- 세 살 즈음에
올해 세 살이 된 나의 아들 우림이는 201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텅텅 빈 어린이집에서 7시 반까지 부모를 기다려야 한다. 2016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진귀한 문명세계를 누리며 자라고 있지만 예측할 수 없는 미래는 더없이 막막하게 다가올 뿐이다.

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인생의 5대 난관인 ‘학업’, ‘결혼’, ‘군대’, ‘직업’, ‘육아’에 따라 뒤섞어볼 것이다. 누구라고 더 쉬울 것 없었던 각자의 난세살이를 잠시나마 여유롭게 구경해 보자. 이것저것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을지 모른다. 어쩌면 위로를 던질 여유까지 생길지 모른다.

 
세 살 박이의 영어실력이 누군가에겐 지독한 부러움이었다
작성일 : 18-12-31 01:43     조회 : 241     추천 : 0     분량 : 6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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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번째 관문. 우리가 그 시대에 만났던 학업

 

 # 세 살 박이의 영어실력이 누군가에겐 지독한 부러움이었다

 

 “사자? 으음……. 라이언! 아거……. 어, 어…. 크로커……다……일. 토끼는……. 레, 레……. 레비이잇?”

 

 아는 영단어 세 개를 힘겹게 남발하고 나서 고모를 향해 씨익 웃어드렸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5,800여일 앞둔 아이치고는 꽤 출중한 영어 실력이었다.

 

 “우리 규민이가 언제 이렇게 컸어? 이젠 영어도 할 줄 알아?”

 

 당연하리만치 익숙하게 고모는 나를 냉큼 안아주셨다.

 

 1986년 1월에 태어나 세 살이지만 네 살이나 다름없던 나는, 세 살 즈음의 기억을 아주 조금 남겨두고 있다. 비록 몇 가지되지 않는 장면들이지만 나에게는 꽤 강력했던 탓인지 어렴풋이나마 선명하게 남아있다.

 

 세 살 즈음 나는 아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고모와 노는 것을 좋아했다. 물론 그때는 고모가 고모인 줄 몰랐다. 고모를 고모로 분명하게 인식했던 것은 문민정부가 막 들어선 시기였으니까……. 그 전까지만 해도 고모는 나에게 할머니 같은 존재로 다가왔다. 소소하게 야단을 칠 줄 알던 아빠나 엄마와는 달리 고모는 할머니마냥 무조건적인 사랑을 남발하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고모 앞에서는 어떤 잘못을 해도 면죄부가 부여되었다.

 그래서인가, <파리의 연인>이 인기리에 방영되었을 동안에는 아주 잠깐 의심도 했다. 알고 보니 누나가 엄마였더라는, 한기주의 숨겨진 가족사를 보면서 ‘고모가 아빠의 누나가 아니라, 아빠의 엄마였을 수도 있다.’는 나름의 소설까지 쓸 정도였으니까. 아무쪼록 고모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고모의 이미지와는 달랐다.

 

 고모가 할머니로 인식되었던 데에는 외모도 한 몫 했다. 이웃 할머니들과 견주어도 손색없을 만큼 패션도 비슷했고 머리도 희끗했다. 머리 빛깔은 아이보리까지는 아니더라도 베이지 빛이 전반적으로 강했다. 거기에 늘 똑같은 의상을 고수하곤 하셨는데, 몸빼 바지가 매번 머금고 있던 보랏빛은 아직까지도 고모를 상징하는 색상으로 남아있을 정도다. 심지어 몸빼 바지에선 뭔가 특유의 냄새가 배어있었다. 뭐, 보랏빛 향기라고 생각해 두자.

 

 고모는 내가 무엇인가를 하기만 해도 좋아라 하셨다. 말을 막 하기 시작할 때만 해도 연신 뽀뽀를 해대며 냄새가 밴 보랏빛 몸빼 바지 위에 앉혀주셨고 아는 영어 단어 서너 개를 처음으로 읊조리던 그날에도 보랏빛 몸빼 바지 위에 냉큼 앉혀주셨다,

 해가 지나고 나의 지식이 늘어갈수록 고모는 더 없이 대견스러워하셨다. 그런 내가 고모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비대해지는 지식을 과감 없이 뽐내는 것이었다. 한 단어라도 더 배워보려고 안간 힘을 썼고 어쩌다 아는 영어 단어가 하나라도 더 생기면 그 길로 고모에게 달려가 자랑했다. 그만큼 고모의 리액션이 아빠, 엄마의 리액션보다 오버스러웠다. 그때만 해도 겸손의 미덕이 무엇인지 모르던 나였기에 고모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직 자랑질 밖에 없었다. 그게 고모에게는 기쁨을 주는 거라 믿었다. 아니, 실제로 그랬다.

 

 내가 세 살 즈음에 마흔 셋이던 고모는 내가 서른세 살이 되던 올해, 일흔 셋이 되셨다. 고모가 태어날 1940년대만 해도 공부를 계속 할 수 있는 계층은 따로 있었다. 하필 고모는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계층에 속해 있었다. 부에 따라 인류를 두 등급으로 나누고 성별에 따라 다시 두 등급으로 나누면, ‘부유한 남성’, ‘부유한 여성’, ‘가난한 남성’, ‘가난한 여성’ 총 네 가지 부류의 인간 형태가 나타난다. 애석하게도 고모는 ‘가난한 여성’에 포함되어 있었다. 성별이나 집안 중 한 가지 조건만 달성되어도 학교에 계속 다닐 수 있는데 의지와 상관없는 운명의 장난으로 공부를 계속 하면 안 되는 신분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이 없었고 능력과는 더더욱 상관없었다. 제 아무리 똑똑하다 한들 그 부류에 속한 이상, 자연스럽게 학교에 다니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 물론 의무교육인 국민학교까지는 다닐 수 있었다. 그 계층에 속한 이들은 그마저도 다행이라며 서로를 위로했다고 한다.

 

 고모는 유일하게 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던 국민학교 시절, 전교 1등을 해 본적은 없지만 전교 3등 밑으로 내려가 본 적도 없었다. 전교 2등, 아니면 전교 3등이라는 지루할 정도로 일관된 성적을 늘 달고 살았다.

 그러나 성적은 중요하지 않았다. 열네 살이 되면서 이제 고모는 학생 신분을 박탈당했다. 그 시절, 가난한 집안의 여성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어서 고모는 그리 원망스러워할 것도, 서러워할 것도 없었다. 그냥 서글플 뿐이었다.

 고모가 할 일은 이제 막 네 살이 된 남동생(우리 아빠)을 잘 보필하는 것밖에 없었다. 국민학교 교육과정을 밟은 것도 남동생 공부를 도와줘야 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고모는 눈물을 머금고 6년이라는 짧디 짧은 학업을 마감해야 했다. 그토록 배우고 싶었던 영어의 세계에는 입문조차 못했다. 고모는 유달리 한글도 빨리 땔 만큼 언어에 소질이 있어서 중학교 과정부터 배운다는 영어에 대해서도 유독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열 살 즈음, 자신은 중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신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난 이후 영어에 대한 짝사랑도 애써 접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고모의 소원 중 하나는 중고등학교의 의무교육화였다고 한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꿈을 꾸는 것처럼 시간 낭비도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고모는 그런 환상이 엄습할 때마다 고개를 내젖으며 밭일, 집안일에 몰두했다. 쓰잘데기 없는 환상을 깨는 데는 물리적 노동이 제격이었다.

 물론 그 꿈이 환상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내가 태어나기 한 해 전, 그러니까 1985년이 되어서야 도서, 벽지 중학교 1학년에 한해 중학교 의무교육이 실시되었으니까. 하지만 그런다 한들 고모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 이미 고모의 나이는 마흔인 것을. 2002년부터는 도심지역까지 중학교 의무교육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고모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 고모는 이미 쉰일곱인데……. 고모의 손녀딸 유진이는 그 의무교육의 해택을 받게 되었으니 그마저도 감사하실 런지는 모르겠다.

 

 사실 고모가 완전히 공부에 대한 의지를 접었던 것은 아니었다. 열여덟이 되었을 때, 그러니까 스무 살을 2년 정도 앞둔 그때에는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꿈을 하나 꾸기 시작했다. 스무 살이 되면 도시에 가서 열심히 일하고 밤에는 야학을 하면서 못다 한 공부를 해야겠다는, 나름 현실성 있는 꿈이었다.

 지난 세월이 아까워서인지 고모는 결혼도 생각하지 않았다. 최대한 남동생 뒷바라지는 하되, 남는 자금이 있다면 이제는 자신의 장학금으로 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결혼을 포기하고 일을 해서 경제력을 갖춘다면 이 모든 것은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음에 틀림없다. 사실 고모가 공부를 할 수 없었던 것은 ‘가난한 여성’의 신분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고모는 여성이라는 신분은 바꿀 수 없지만 ‘가난’이란 타이틀은 충분히 걷어찰 수 있다고 믿었다. 이제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면 공부를 다시 할 수 있는 신분으로 전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하루하루가 버텨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모가 열여덟이 되던 그해는 하필 1963년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하던 이 나라를 살리려는 대안으로,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한 것이 바로 고모가 열여덟이 되던 그 해였다. 고모의 아버지, 그러니까 우리 아빠의 아버지인 할아버지 역시 독일에 파견할 광부를 뽑는다는 말에 솔깃하셨다.

 

 당시 우리나라 대통령은 어떻게 해서든 나라를 살려보겠다고 우방 나라를 쫓아다니며 돈을 빌리러 다녔다. 미국에게도 손을 벌리며 발품을 팔아보았지만 미국 대통령은 좀처럼 돈을 빌려주려고 하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바로 그 유명한 케네디였다. 다음 타깃 서독이었는데, 서독에서는 돈을 빌려주는 대신 독일인들이 기피하는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해달라고 했다. 좀 어이없는 제안 같아 보이기도 했지만 알고 보면 꽤 괜찮은 제안이었다. 그렇게 되면 당장 돈도 빌릴 수 있는 것은 물론, 일하러 간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송금한 월급 덕에 외화벌이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그런 데를 갈까 생각할지 모르나, 경쟁률은 엄청났다. 우리나라 월급의 7배 이상이어서 그런지, 마다할 이유가 없었고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대졸자들도 대거 몰렸다. 그렇게 10:1이라는 그 높은 경쟁률을 뚫고 7936명의 파견 광부 명단에 우리 고모의 아버지이자 우리 아빠의 아버지, 곧 할아버지의 성함이 올랐다.

 독일로 간 할아버지는 송금은 물론, 매달 사탕을 사서 소포로 보내주었다. 할아버지 덕에 늘 구겨져있었던 집안 형편도 슬슬 펴지기 시작했고, 고모와 아빠는 매달 오는 소포를 받을 때마다 환호했다. 그 순간만큼은 아빠에 대한 그리움보다 사탕에 대한 반가움이 더 컸다. 무엇보다 고모는 나아지는 집안 형편과 비례하여 자신의 미래도 조금씩 나아지리라 믿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고모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 정도면 남동생(우리 아빠) 대학등록금 정도는 마련할 수 있으니, 적어도 스무 살부터는 내 길을 찾아 나설 수 있을 거라 확신했던 것이다.

 그러나 열네 번째로 도착한 우편에 들어있었던 것은 사탕이 아닌 사망통지서였다. 고모가 남몰래 꿈꾸던 것들도 가족의 손에 구겨진 사망통지서처럼 완벽하게 구겨졌다. 이제는 완벽하게 기울어진 가세로, 고모가 경제를 완전히 책임져야 했고 그 이유로 열아홉의 나이에 공순이가 되었다.

 그러다가 스무 살에는 그나마 좀 잘 산다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 그것이 동생과 어머니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다. 물론 고모가 생각한 대안은 아니며 할머니가 제안한, 선택의 여지가 없는 대안이었다. 그렇게 고모 자신을 위한 인생은 완전히 끝나버렸다. 이미 끝난지 오래지만, 이제는 일말의 가능성조차 사라졌다. 이제 더 이상 공부할 기회는 주어질 수 없었고 특별한 이변 없이 고모는 멈춰버린 지식과 함께 일흔 셋의 나이에 도달했다.

 

 가끔 고모는 이런 아쉬움을 내비쳤다. 케네디가 못된 심보를 고쳐먹고 돈을 빌려주었으면 어떠했을까……. 아니 그때 대통령이 2년만 늦게 서독과 합의했으면 어떠했을까……. 자신이 스무 살이 되어 도시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공부도 다시 시작했을 때 합의가 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과거지만 고모는 대통령의 섣부른 결정에 못내 아쉬워했다. 그렇게라도 누군가에게 탓을 돌려야 서러움이 덜할 것 같았다. 그랬다면, 몇 달만이라도 죽어라 공부할 수 있었을 테니까.

 

 서른셋이 되고 보니 알 수 있었다. 세 살 박이였던 내가 영어 단어를 말하며 자랑을 할 때 고모가 무의식중에 가졌을 남모를 슬픔을……. 마치 아주 친한 친구가 자신이 짝사랑하는 사람과 연결되었을 때 느끼는 그런 감정이 아니었을까. 고모 자신은 영어를 그토록 짝사랑했는데 정작 그 영어란 놈은 조카와만 만나겠다고 하니, 얼마나 씁쓸하고 배신감을 느꼈을까. 둘의 만남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면서도 완전히 지울 수는 없는 그 허전함을 고모는 과연 어떻게 견디셨을까.

 

 요즘도 고모는 중학교 입학을 앞둔 나의 외사촌 영우와 동네에서 가끔 마주친다(참고로 영우는 엄마 쪽 가족이고 고모는 아빠 쪽 가족이지만 서로 잘 알고 마주친 적도 많다).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온갖 인상은 다 쓰며 영어 학원을 왔다 갔다 하는 영우의 모습이 고모에게는 그리 딱한 모습은 아니었을 것 같다.

 

 며칠 전, 일흔 셋의 고모가 간만에 우리 집에 놀러오셨다. 세 살 즈음부터 지금까지, 고모는 늘 할머니처럼 반가운 존재다. 내 아들 녀석도 그것을 아는지 나와 동시다발적으로 반긴다.

 그날따라 반갑게 인사를 한 아들 우림이는 다시 거실 저만치에 가서 혼자 놀기 시작했다. 장난감을 이리저리 만지다 어린이집에서 배운 영문장을 툭툭 내뱉는다. 짧은 문장이기는 하지만 발음 하나는 나보다 낫다. 분명 혀 구조는 나보다 둔화된 상태이련만, 어떻게 저런 발음이 나올까 싶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어린이집에서부터 원어민 영어 교사에게 수업을 받으니, 중학교 1학년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영어에 입문한 나와는 상대가 될 수 없다.

 우림이가 거실 끝에 앉아있어서 다행이었다. 왠지 오늘은 고모가 부디 그쪽으로 가지 않기를 바랐다. 마침 아내는 고모에게 과일이나 깎아먹자며 고모를 식탁 쪽으로 불렀다.

 그러나 과도를 찾는 그 시간차가 다소 길었는지, 이미 고모는 거실 저만치에 가 있었다. 이미 우림이 앞에 앉아서 늘 그랬다는 듯 익숙하게 웃고 있었다. 고모에게도 손녀가 있다지만 이미 스물 셋이 되어 클 만큼 큰지라, 요새 어린 아이를 보면 거의 환장을 하실 정도로 좋아라 하신다. 그걸 내가 막을 도리는 없다.

 고모를 본 우림이는 눈치 없이 어린이집에서 배운 영문장 몇 가지를 읊어댄다. 평소 같으면 기특하다며 칭찬도 해 주고 평소에 금하던 사탕이라도 답례로 주고 싶지만, 지금 마음 같아선 얼른 사탕을 재갈 삼아 물려버리고 싶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고모는 우림이의 놀라운 영어 발음을 듣고 박수를 치신다. 눈도 이미 반달 모양으로 한껏 구부러진 상태다. 특히 세 살 박이 나의 영어 실력을 보며 칭찬을 해 주던 것과는 조금 차원이 달랐다. 그 아이의 발음에 진심으로 놀란 눈치였다.

 눈치 없이 계속 영어를 나불대는 아들이 오늘따라 원망스러웠다. 그렇다고 뭐라고 할 수도 없다. 나의 전적을 생각해 보면 우림이를 원망할 자격도 없다. 물론 그 아이도 언젠가는 알아채겠지. 고모의 반달 웃음 뒤에 있는 눈물샘이 마르기에는 한참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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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천에서 용 나던 시대는 끝난 지 오래다 2018 / 12 / 31 167 0 5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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