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방인 영철이 운전을 하고 손위처남인 수리는 옆 좌석에 앉아 이런저런 잡다한 얘기를 하면서 산꼭대기에 있는 가격 싼 골프장으로 가고 있다. 운전은 영철이가 하고 옆 좌석에 앉은 수리는 가끔씩 고개를 창 밖으로 돌려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멀뚱히 쳐다보다가 들릴 듯 말 듯한 한숨을 내쉬기도 한다.
그땐 둘 다 잠시 침묵한다. 이럴 땐 누구던 먼저 말을 꺼내도 대응하지 않을 때가 다반사다. 귀찮다는 의미가 항상 내포되어 있다. 이럴 땐 긴장, 고요, 정적, 적막, 어느 것 하나 뺄 수 없는, 이 분위기에 딱 어울리는 적합한 어휘들이다. 아주 간단히, 단순하게 말하자면 서로의 숨통을 틀어막는 차 안이다. 이 놈들은 이런 분위기를 점잖은 짓으로 여긴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더 삭막한 기류가 흐르지만 박서방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둘이 만나기 전에 수리는 최근에 자주 도움을 요청하는 똑 같은 사람의 똑 같은 내용의 전화 한 통을 받았고 냉정하게 또 이렇게 거절했다.
거절을 하고 잠시 어릴 때도 좋아했고 지금도 그때와 다른 감정으로 친구로서만 좋아하는 그 친구가 떠올렸다. 맏딸인 그 친구는 어릴 때부터 다른 친구들보다 어른스러웠고 온화하고 이해심이 많은 친구였다. 어느 겨울이었다. 그때가 대충 10살 정도로 기억한다. 그 친구는 개울가 돌멩이 위에 쪼그려 앉아 꽁꽁 얼어붙는 얼음을 깨고 빨래를 하고 있었다. 그때는 지금 같은 그런 감정이 아니었다. 얼른 가서 옆에 앉아 같이 빨래를 하고 손 잡고 집으로 가고 싶은 그런 마음이었다.
한마디로 그때는 안쓰러웠고 지금은 단지 애틋한 추억 속의 여인이었는데 지금 심장이 분노로 격하게 요동치고 있다. 여동생 친구인 해숙이만 생각하면 울화가 치밀고 주먹으로 머리통을 한대 ‘쾅’ 쥐어박고 싶어진다. 지금이 딱 그런 심정이다.
“은희야! 내 친구에게 피해를 줘가면서까지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해숙이를 왜 도와줘야 해? 나는 절대 그렇게 못해. 제발 부탁하자. 이제는 내 삶에 아무런 연관 없는 사람들 일에 끼어들지 않고 싶다. 도움을 받으면 나도 도움을 줘야 하잖아. 내가 왜 그 소중한 도움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헛되이 버려야 해. 절대 안돼”
그 똑 같은 부탁을 하는 똑 같은 사람이 이 놈! 영철의 아내다. 수리는 그 전화를 받고 난 뒤에 사람 뇌의 기능에 대해 굉장히 놀랬다. 뇌는 컴퓨터에 저장된 파일 속의 한 제목을 검색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회전해서 찾아내고 그 속의 내용들도 너무 쉽게 끌어내 뇌 속에 다시 복구시킨다는 사실에 놀랬다. 놀라자마자 수리가 행한 일은 또 깔끔한 삭제였다. 지금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내용들이기에 다시는 꺼내지지 않게 불을 싸질러 없애듯이 삭제 해 버렸다. 그렇게 애를 써서 삭제한 파일을 다시 복구하려고 애쓰려는 여 동생과 그녀의 신랑이자, 친구인 박서방 탓 때문인지 차 안은 숨이 막힐 것 같이 갑갑하기만 했다. 한 놈은 삭제하려고 애를 쓰고 다른 한 놈은 자기 마누라 부탁으로 복구시키려고 애를 쓰는 사이 차가 벌써 산비탈 오르막으로 진입했다.
울긋불긋한 단풍은 사라지고 거무스레하게 탈색한 잎사귀 몇 개만 노란 색을 약간 잃지 않고 안쓰럽게 나무 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이마저도 곧 돌고 도는 새로운 계절에 실려 온 찬 바람에, 가지라는 연줄에서 떨어져나가 숲 속이나 도로 어딘가에서 나뒹굴다가 땅 속까지는 아니더라도 산이던 길가던, 어찌됐던 어딘가에 콕 쳐 박혀 동물 세계의 어미 젖처럼, 나무나 풀이나, 등등 산에서 자라는 식물의 자양분이 될 것이 분명하다.
누가 자연의 섭리를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그게 자연의 섭리를 행하는 잎사귀의 역할이니 어쩔 수는 없다고 단정짓고 어설픈 동정심에서 유발된 관심을 끊어버린다. 단지 안타깝다. 다른 한편으로는 식물들은 배려심이 참 많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대롱대롱 가지에 매달려 뿌리서 올라온 영양분을 모조리 빨아 먹으려, 떨어지지 않고 매달려 있으면 내년엔 이런 나무들은 생명을 잃은 고목이 되거나 어느 찜질 방의 장작이 된다. 즉 생명을 잃는다. 찜질 방 주인만 불법을 저지르지 않고도 횡재를 하는 셈이고, 그래서 적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이란 말이 탄생한 것 같기도 하다.
식물들은 아옹다옹 싸우고 뺏고 뺏기다 모조리 다 잃는 동물과 다르게 미래를 항상 생각하는 것 같다. 이런 위인? 식물은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위 식? 이런 위 식님들이 한 해 밖에 살지 못하고 가는 모습이 안타깝기만 하다.
수리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본인이 저 세상 문턱에서 쫓겨나면서부터 생기게 되었다. 이런걸 감성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다. 사람들은 정신 나간 놈으로 단정지어 버린다. 아무튼 이런 엉뚱한 상상도 하는 감성이 풍부한 사람으로 변해 버렸다. 푸르름으로 인간을 포함한 동물들에게 찌들고 시든 마음을 치유해주지만 정작 자신들은 일 년밖에 살지 못하는 운명. 물론 그들이 매 계절에 사라진다고 그 식물의 수명이 다 한 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그런데 가을에 떠나는 낙엽을 인간이라고 하자. 안쓰러운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수리는 자기에게 질문을 하고 서글퍼한다. 죄지은 놈은 오래 살고 착한 사람은 일찍 세상을 떠나는 현실에 이런 어쭙잖은 연민으로 연결을 시키려 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현 시대의 인간들처럼 눈감고 아웅하는 식으로, 오지랖 넓게 떨어지는 낙엽을 다시 주워 본드로 가지에 붙여 줄 수도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설상 눈가림으로 본드로 붙여 연결을 해줘도 여기, 이 숲 속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오히려 해롭다는 사실도, 내년에 다시 올라 올 새순의 숨통을 틀어막는 짓이란 것도, 새순이 나올 자리를 막는다는 건, 이 나무의 미래를 앗아가는 짓과 같다는 말을 하고 싶어하기 보다는 젊은이들이 꿈을 향해 직진할 수 있게 도움은 주지 못하더라도 앞 길은 막지 말을 한 바퀴 빙 둘려 하는 말이다. 이 말은 동생 친구인 해숙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해숙도 이 나라도 수리에게 땅 위로 올라 오지도 못한 이름 모를 식물을 호미로 파헤쳐 염분으로 가득 찬 바다에 던진 거나 다름없는 짓을 했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이런 상상을 해보면 간단하다. 무더운 한 여름에 자기 몸에 소금물로 떡 칠을 하고 아스팔트 위에 서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너무 쉽다. 해숙이가 애들을 이렇게 가르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