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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라스트 위스퍼(Last Whisper)
작가 : PamC
작품등록일 : 2018.12.12

공연을 위해 들른 마을에서 수수께끼의 소년과 만난 유랑악단의 소녀 레나. 그 둘의 만남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01. 프롤로그
작성일 : 18-12-12 17:10     조회 : 339     추천 : 0     분량 : 7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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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늦가을 밤의 싸늘한 공기 속으로 소년의 숨결이 퍼져나갔다. 뛰어온 것일까, 가쁘게 숨을 내쉬면서도 소리를 내지 않으려는 듯 코와 입을 막은 소년은 슬그머니 낮은 돌담을 등지고 앉았다. 마을 광장에 피워진 불이 뱉는 주홍빛이 돌담 그림자 너머로 일렁거렸다.

  조금 먼 거리에서는 한껏 술에 취한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그리고 그 위를 덮는 음악 소리. 소년이 코 아래까지 덮고 있는 옷깃을 내리고 숨을 골랐다. 싸늘한 밤을 소년의 하얀 숨이 조금 덮었다가, 이내 사라지길 여러 번. 조금 숨이 가라앉자 소년은 발치에 굴러다니는 돌 몇 개를 담 아래에 겹쳐 깔았다. 그 위로 까치발을 들고는 돌담 위로 고개를 빼꼼 내민 소년의 눈동자가 이내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너머의 불 때문에 검은 실루엣으로만 보이는 사람들, 그리고 나름 공들여 준비한 듯한 나무 무대 위에 서 있는 악단이 보였다.

  자기 몸만한 북과 쨍-하는 소리를 내는 접시같은 무언가를 치는 사람이 있었고, 콧소리 비슷한 소리를 내는 악기를 어깨에 얹어놓고 활같이 생긴 물건을 움직이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도. 깜짝 놀라 몸을 움츠린 소년의 까치발을 힘겹게 버티고 있던 돌무더기가 무너져 내렸고, 소년도 같이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아야야...”

 

  얼얼한 엉덩이를 문지르는 소년의 눈에 자그마한 손 하나가 보였다. 멀뚱히 보고 있으려니, 빨리 잡고 일어나라는 듯 손을 흔들어 보인다.

 

 “미안. 그렇게 놀랄 줄 몰랐어.”

 

  웃음기 섞인 목소리. 여자아이. 웃음말고는 담아본 게 없는 것처럼, 목소리가 맑고도 밝았다. 이 마을에선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였다. 소년은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살폈다. 빛이 부족해 잘 볼 수 없었다.

 

 “나 손 부끄럽거든? 빨리 일어나줄래?”

 

  장난스레 구박을 주는 말투가 신기했다. 처음 들어보기 때문에. 마을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도 손을 머뭇거리는 건 그래서였다.

  소년의 손에 밤공기와 비슷하게 차갑고, 그러면서도 보드라운 것이 와닿은 건 그 때였다. 소년의 앞에 서 있던 소녀의 손이었다. 소년이 머뭇거리는 모양이 퍽 답답했던 모양이다. 몸을 일으키자, 소년을 일으켜주고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소녀의 얼굴이 멀리서 날아온 주홍색 불빛에 말갛게 드러나 있었다.

 

 “밝은 데로 와서 보지, 왜 이런 데서 몰래 보니? 죄 지은 것처럼.”

 

  소년을 일으켜준 손의 주인은, 밝게 미소 짓고 있었다. 소년은 아마도 불빛이 소녀의 얼굴에서 나오고 있다고 해도 크게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가운데로 가르마를 탄 머리카락이 불빛을 받아 주홍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아래로 마찬가지로 주홍빛으로 물든 피부와, 짙은 쌍커풀이 진 서글서글한 눈매, 그 안에서 빛나는 (아마도 초록색일)눈동자와, 옅은 미소를 띈 입매 덕에 봉긋 솟아오른 볼. 목소리와 마찬가지로, 태어나서 웃음밖에는 지어본 적이 없었을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미소가 맞춤옷처럼 어울리는 얼굴이라고 해야 할까.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바가지를 긁는 엄마, 그 바가지에 욕지거리로 대답하며 매일같이 술냄새를 풍기는 아빠, 그게 익숙한 아이들로 가득한 이 마을에서는 아마 세상이 끝날 때까지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고, 표정일 것이었다. 그랬기에 자신을 향해 밝은 미소를 지어 보이는 아름답고도 신비한 여자아이 앞에서, 소년은 얼이 빠진 듯 멍해졌다.

 

 “...보세요? 여보세요?”

 

  잠시 넋을 잃었던 소년의 눈 앞에 뭔가가 어른거렸다. 손바닥이었다. 정신을 차린 듯 손바닥을 잠시 좇는 소년의 시선을 보고는 여자아이가 안심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나는 또 넘어지면서 어디에 머리를 잘못 부딪힌 거 아닌가 싶었지 뭐야.”

 

 “…….”

 

 “응?”

 

  소년은 말이 없었다. 소녀는 걱정스러운 듯 살짝 무릎을 굽혀 소년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소년의 커다란 눈망울 안에 담긴 눈동자는 까맸다. 밤처럼 맑고 까맸다. 깜짝 놀랄 정도로 창백한 얼굴 위로 드리운 머리카락도 그랬다. 옷깃이 앙증맞은 콧망울 언저리까지 덮고 있어 얼굴을 다 보지는 못하지만, 드러난 부분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매우 귀여운 아이라는 것쯤은. 이런 남동생이 있었으면. 엄청 귀여운데다, 엄청 착하고, 엄청 말 잘 들을 것 같아.

  아니, 이게 아니지.

 

 “며, 몇 살이니? 이름은? 왜 마을 사람들하고 같이 안 있고 여기 혼자 있는거야? 부모님은? 아, 혹시 잃어버렸니? 누나랑 같이 찾아볼까?”

 

  잠깐 소년의 눈매에 팔렸던 시간이 무안해서, 소녀는 연거푸 질문을 쏟아낸다. 얼굴이 달아오른 걸 가려주는 불빛이 고맙다. 그런 여자아이를 보는 소년의 표정은 옷깃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다만, 소년은 자기 입 언저리를 가리키고는, 양 손의 검지를 교차시켜 보일 뿐이었다.

 

 ‘말을 못하는구나.’

 

  소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영리한 편이었다, 그랬기에, 지금까지 소년이 보여주었던 행동만으로 머릿속에 이야기 하나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자신과 다른 것에 굉장한 적대감을 보여주곤 하는 동네 아이들은 말을 못하는데다 몸도 병약해 보이는 소년에게도 그러했을 것이고, 장애를 ‘신이 내린 벌’로 여기길 좋아하는 동네 어른들도 소년을 곱게 보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한창 놀기 좋아할 나이의 소년이, 일년에 한 번 있는 마을의 추수 기념 축제일에도 이렇게 먼발치에서 보고만 있었던 이유였을 것이다. 아들이 괜히 해코지를 당할까 부모님은 소년의 외출을 허락하지 않았고, 축제가 너무 보고 싶었던 소년은 몰래 빠져나왔기에 근처에 부모님이 안 계셨던 것이리라.

  소녀가 만들어낸 이야기는, 만약 소년이 정말 말을 못 하는, 마을에서 사람들에게 구박받으며 살아가는 보통 소년이었다면 꽤 정확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년은 그렇지 않았고, 마을 사람들은 소년의 존재조차 몰랐다. 그리고 소녀는 그 사실을 몰랐기에, 보는 사람이 더 미안해지는 표정을 띄우고는 소년의 볼을 어루만졌다.

 

 “…우리 저기서 같이 볼까?”

 

  소녀는 아까 소년이 돌을 밟고 서 있던 장소를 가리켰다. 소년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아이의 표정이 다시 짐짓 밝아진다.

  어느새 소녀가 솜씨 좋게 쌓아올린 돌 위에 올라선 둘은, 담벽 위에 턱을 괴고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축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분위기에 덩달아 들뜬 것일까, 아니면 대화가 고팠던 것일까. 소녀가 쉴 새 없이 말을 했다. 그러나 소년은 싫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이렇게 많이 들어보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그래서 신기했다. 어느샌가 소년은 소녀를 보고 있었다. 축제보다 소녀의 단정한 옆모습에 더 눈이 갔다. 그런 소년을 발견하고, 소녀는 미소 지으며 괴고 있던 팔에 얼굴을 묻었다.

 

 “난 레나야.”

 

  레나. 지금까지 소년이 봤던 사람 중에서, 그리고 앞으로 볼 사람 중에서 가장 예쁠 게 분명한 소녀의 이름이었다. 그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소년은 괜시리 가슴이 뛰었다.

 

 “손바닥 줘볼래?”

 

  말은 그렇게 하면서 어느새 소년의 손바닥을 가져와 제 앞에 반듯이 펴놓는 레나였다. 소년은 영문을 모른 채 고개를 갸우뚱거리고만 있었다. 레나가 그런 소년을 보고 웃어보이고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소년의 손바닥에 뭔가를 그렸다.

 

 “L.”

 

  레나의 손가락이 곧게 내려오더니, 어느새 오른쪽으로 꺾어 짧은 거리를 흝었다. 이게 ‘엘’이라는 걸까. 신기하다.

 

 “E.”

 

  이번엔 오른쪽 모서리가 없는 네모를 그리고는, 가운데에 가로로 선 하나를 그었다. 이건 ‘이’란다.

 

 “N.”

 

  레나의 손가락이 아래에서 위로, 거기서 오른쪽 아래 방향으로 사선을 긋고, 다시 거기서 위로 올라온다. 이번엔 ‘엔.’

 

 “A”

 

  마을 방앗간의 지붕처럼 뾰족한 모양을 그리고, 중간에 가로선을 그어 작은 세모꼴을 만들었다. ‘에이’라는 것을 끝으로, 레나는 손가락을 거두었다. 소년과 눈이 마주치자, 왠지 자랑스러운 듯 웃는다.

 

 “이게 ‘글자’래. 내 이름을 이렇게 쓴대.”

 

  글자. 나이가 어린 소년도 지체 높으신 분들이 쓰는 것이라고는 알고 있었다. 다만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다. 아마도 이 마을에서 글자를 쓸 줄 아는 사람은 한 줌도 안 될 것이다. 그건 다른 마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걸 배우면 글도 읽을 수 있고, 내가 글을 쓸 수도 있는 거야. 굉장하지?”

 

  그렇게 말하는 레나의 눈동자 속에서 불꽃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소년은 그게 얼마나 굉장한지 잘 알지 못하면서도, 그 불꽃이 눈부셔 고개를 끄덕였다. 레나는 싱긋 웃고는 소년의 손바닥에 ‘글자’를 그렸던 손가락으로,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마을 광장의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저-어기, 저 사람 보여? 저기 큰 마차 있잖아, 저게 우리 마차인데, 어쨌든, 저기에 기대 서 있는 무섭게 생긴 아저씨.”

 

  정말 있었다. 광장 한 가운데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에 비쳐보이는, 혼자 외따로 서 있는 남자였다. 멀리서 봐도 꽤 거구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아마 동네 누나들 보라는 듯 날이면 날마다 근육 자랑을 하고 다니는 마을의 나무꾼보다도 더 클 것 같다.

  …그런데 ‘우리’ 마차?

 

 “저 분이 ‘폴’이라고, 우리 단장님이거든. 아, 이 얘기를 안 했구나. 저기서 연주하고 있는 사람들은 ‘트라키아 유랑악단’이야. 그리고 나도 그 악단 단원이고.”

 

  한 순간에 많은 정보가 들어온 탓에, 소년은 고개를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더 많은 정보를 말해야 하는 레나는 한껏 들떠 이 사람 저 사람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나간다.

 

 “저기 북 치는 아저씨 보이지? 엄청 큰 사람 있잖아. 저 아저씨는 대니. 북 치는 아저씨야. 보면 알겠지만 엄청 많이 드셔. 그리고 옆에서 바이올린 켜는 사람도 보이지? 키 작고 빼빼 마른 아저씨.”

 

  바이올린이라는 물건은 모르겠지만, 그런 사람이 있긴 했다. 한손에 긴 막대가 삐져나온 나뭇덩이같은 것을 들어서 턱 아래 받치고는, 다른 손에 든 막대로 연신 문지르고 있었다. 막대가 왔다갔다 할 때마다 흥겨운 소리가 났다.

 

 “저 아저씨는 조니. 엄청 입이 걸고 화도 툭하면 내시는데, 사람은 착해. 아, 그리고 요리를 엄청 잘한다? 그래서 우리가 먹을 밥은 전부 다 저 조니 아저씨가 만드셔.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옆에서 춤 추면서 탬버린 치는 누나는 파티마. 피부색이 우리랑 다르지? 우리 태어나기도 전에 했던 전쟁 때 우리나라로 들어와서 살게 됐대. 근데 엄청 착하고, 엄청 이쁘다? 춤도 엄청 잘 추고. 옛날 이야기도 많이 알아. 그래서 맨날 잘 때 나한테 하나씩 얘기해 주는데, 너무 재밌어서 잠이 안 와.”

 

  멋쩍게 헤헤 웃으며 말을 마친 레나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난 레나. 아, 이건 이미 알지? 저 악단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있어. 들어온 지 2년이 좀 안 됐거든. 아직은 다룰 줄 아는 악기도 없고, 어려서 무대에도 못 올라가. 하지만, 언젠가는 나도 저 분들이랑 같이 무대에 서고 싶어. 박수도 받아보고 싶고, 칭찬도 받아보고 싶고. 그리고…”

 

  광장을 바라보고 있는 레나의 눈시울이 촉촉한 건 눈이 부셔서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소년도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광장의 무대를 눈에 담았다. 누가 누군지 알아서일까, 아까와는 보이는 모습이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그런데 무슨 얘기하다 이 얘기까지 하게 됐더라? 아, 맞아. 글자. 어쨌든 저 폴이라는 아저씨가 글자를 아시더라구. 그래서 배웠어. 배워두면 다 쓸 데가 있다고 하셨어.”

 

  레나의 이름을 어떻게 쓰는지를 알게 됐으니, 적어도 레나와 소년에게는 확실히 쓸 데가 있었던 셈이다.

 소년은 받침돌에서 내려가더니, 근처에 떨어져있던 나뭇가지를 집었다. 그리고 레나가 가르쳐준 대로, 기억나는 대로 나뭇가지를 움직여 글자를 그려나갔다.

  L,E,N,A. 이런 글자였을지는 모르겠다. 다 그린 소년이 확인해달라는 듯 레나를 올려보았다. 삐뚤빼뚤한 글자를 정성들여 써낸 모습이 퍽 귀여워서인지, 레나는 함박웃음을 짓고는 소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소년의 숱 많은 머리카락 사이로 가을 저녁에 차게 식은 레나의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우와, 너 머리 진짜 좋구나? 나도 세 번은 써보고서야 알았는데.”

 

  레나는 나뭇가지를 들고 있던 소년의 손을 잡고는, 소년이 쓴대로 다시 한 번 써보았다. 엘, 이, 엔, 에이. 한 글자씩 소리를 내면서.

 

 “좋아, 머리가 좋은 우리 꼬마 친구를 위해서 이 누나가 특별히 글자를 알려주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레나가 불빛이 드는 곳으로 가 앉고는 자기 옆을 두드려보인다. 소년이 따라가 앉자, 레나의 특별 수업이 시작됐다.

 

 “이 글자들을 알파벳이라고 부른대. 먼저, A부터…”

 

  레나의 이름 마지막 글자였다. 이번엔 이게 시작이었다. 레나가 쓰면, 그 옆에 소년이 따라 쓰기를 스물여섯 번. 레나의 이름 세 번째 글자인 N을 가로로 눕혀놓은 것처럼 생긴 ‘제트’라는 글자를 마지막으로, 레나는 수업을 마쳤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열심히 즐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만나요!”

 

  때마침 저 멀리서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무대 위에서 춤을 추던 파티마라는 여자일 것이다. 그 소리를 듣고는, 레나도, 그리고 소년도 동시에 일어섰다. 막 공연을 끝낸 단원들은 시킬 거리가 많다. 레나는 일찍 가서 준비를 해놓아야 한다. 소년은, 축제를 한껏 즐긴 사람들이 돌아오다가 자신을 보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공연의 끝은 둘이 함께 앉아있을 수 있는 시간도 끝났음을 의미했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그럼에도, 둘은 누가 먼저 걸음을 옮기지는 않았다. 낯선 곳에서 만난 친구에게, 안녕이라고 말하고 뒤돌아 걸음을 옮기기가 어려웠기에. 자기보다 한참 어른들과 유랑하며 사는 레나와, 마을에서 늘 겉도는 소년 모두 자기 또래의 친구가 없었던 것이다. 이대로 돌아서면 간만에 사귄 또래 친구의 얼굴을 까먹고 말까봐서, 둘은 밍기적대는 서로의 발끝만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에, 축제가 끝난 후 돌아오는 사람들의 인기척이 조금 더 가까워진 것을 알아챈 레나가 먼저 입을 뗐다. 그리고는 레나는 조금 매몰차다 싶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꺼져가는 불빛이 마지막으로 발악을 해서일까, 레나의 눈시울이 유난히 더 붉어보였다.

 

 “내 이름, 기억하지?”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나는 한 번 웃어주고는, 말을 이었다.

 

 “누나가 글자 가르쳐줬으니까, 다음에 올 때는 네 이름도 알려주는 거야. 알았지? 누나도 다음에 올 때는 저 무대에 서서 노래 부를 수 있게 열심히 할 테니까. 응?”

 

  자기가 글자를 다 기억할 수 있을지도, 기억하더라도 자기 이름을 어떻게 쓰는지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르면서, ‘다음’이 언제가 될지도 몰랐지만, 소년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자, 누나랑 약속.”

 

  레나가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내밀어보이며 수줍게 미소지었다. 소년이 머뭇거리며 내민 새끼손가락이 거기에 감겼고, 둘의 엄지손가락은 꽤 오랫동안 볼을 부볐다. 그게 적잖이 미더웠던 것일까, 레나는 새끼손가락을 푼 후, 입꼬리를 살짝 올려보이고는 손을 흔들어 주었다. 소년의 손바닥에 이름을 새겨주었던, 레나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손을 따라 흔들린다.

 

 “또 봐. 안녕.”

 

  그게 마지막이었다. 레나는 등을 돌렸고, 걸어갔다. 자기 가족들인 단원들에게로. 그녀의 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그녀의 등을 바라보던 소년은, 이내 등을 돌리고 레나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언제 다시 보게 될지 모를 그녀에게 알려주지 못했던 말을 그제서야 입 밖으로 되뇌이며.

 

 “…카일.”

 

  어느새 산새의 울음소리조차 그친 가을 저녁의 어둠을 헤치고, 검은 머리의 소년 카일이 조금은 재게 걸어 집으로 돌아갔다. 자고 일어나서도 레나의 얼굴이 지금처럼 선명하게 떠오르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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