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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N의 밤
작가 : MrNerd
작품등록일 : 2016.8.22

격리된 구역, 생존자, 그리고 좀비

 
<1부 : 낙조> - 1장 : 용서받지 못한 자
작성일 : 16-08-22 14:05     조회 : 1,135     추천 : 4     분량 : 7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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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남자의 찢어진 반팔 티셔츠 위에는 검붉은 얼룩이 꽃처럼 피어 있었고, 백태가 낀 듯한 흐릿한 눈자위 주위로 새파란 핏줄이 기계처럼 서 있었다. 먼지 얹힌 기름진 머리칼, 간신히 매달려 있는 왼팔, 뱃가죽 사이로 비어져 나오려는 내장……. 모든 것이 남자가 시체라는 걸 증명했다.

 

 그러나 시체는 움직이고 있었다. 무서운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에 와서는 지극히 평범한 광경이었다. 운석이 떨어지면서 동시에 그가 잃어버린 일상처럼.

 

 그 날 이후 걸어 다니는 시체는 더 이상 영화 속 존재가 아니었다. 시체는 조준경 너머에서 쉬지 않고 움직였다. 저 자도 그 날 이전의 일을 기억하고 있을까?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 그런 생각이 지나갔다. 곧 날아갈 총알보다도 더 빠르게 든 생각이었다.

 

 그리고 총성이 울렸다. 시체는 썩어 터진 과일처럼 검붉은 피와 뇌수를 쏟아내다가 힘없이 쓰러졌다. 조준경에서 눈을 뗀 뒤 방금 전까지 방아쇠를 눌렀던 검지를 문질러보았다.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방아쇠를 당긴 일이 없었던 것 같았다. 아니 사실 아무 일도 없었다. 시체는 원래 죽어있었으니까. 시체를 죽였다니 무슨 헛소린가.

 

 건호는 다시 조준경으로 시선을 옮겼다. 다음 표적은 팔 두 쪽이 사라진 노인으로 정했다. 처음 시체를 죽였을 때의 감각이 자꾸만 떠오르는 걸, 그는 애써 지워내며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이 울렸고 시체가 바닥에 쓰러졌다.

 

 ***

 

 교차로에 들어섰을 때 시계 알람이 울렸다. 이제 슬슬 잘 곳을 찾아야 한다는 신호였다. 하늘은 잿빛 도시 위에서 여전히 푸른빛을 띠고 있었지만 그것이 그저 한순간의 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시간은 어떤 것보다도 교활하다. 천진한 푸른색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도시보다도 더 새카매져 금세 온 세상을 집어 삼킬 것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그에게 허용된 시간은 해가 떠 있을 때뿐이다.

 

 그런데 어디서 잔다? 그의 기억대로라면 교차로 근처는 좋은 지역이 아니었다.

 

 그의 왼편은 공장 지대로 1층이나 지하가 많아 어둠을 좋아하는 시체가 많이 숨어 있었다. 대낮이라면 사냥하기 좋은 곳이었겠지만, 곧 있음 해가 사라지는 지금은 걸어 다니는 사냥감이 되는 것 말고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오른쪽은 상가로 대형마트나 술집, 음식점 등이 가득한 곳이었다. 예전에 들려서 먹을 걸 챙겨간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어림없는 소리다. 그 날 이후 2년 정도 지난 지금은 약탈자들이 죽치고 있을 게 뻔했다. 더군다나 그에게 필요한 건 침대지 음식이 아니었다.

 

 그리고 맞은편은……. 맞은편은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물론 의뢰가 들어왔으니 언젠가는 가야할 곳이라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자꾸만 미루게 되었다. 그 역시 갈팡질팡하는 자신이 싫었다. 신속하게 처리하지도 못할 부탁을 들어주다니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평소에 하지도 않은 일을 받은 건지 그 자신도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부른 것일까?

 

 어쨌건 아직 시간은 남아 있었다. 문득 오는 길에 잠깐 보였던 건물이 떠올랐다. 멀긴 해도 서두르면 충분히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건물로 서둘러 뛰기 위해 총기 끈을 바싹 조일 때였다.

 

 “아저씨, 뭐에요?”

 

 입에 솜을 문 듯한 부정확한 발음이 들려왔다.

 

 젠장, 망했군. 지금껏 한 번도 안 마주치고 잘 버텼는데.

 

 속으로 욕을 하며 뒤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흰 방호복의 연구원이 보였다. 얼굴은 방독면 때문에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로 남자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상황이 아주 좋지 않은 건 아니었다. 연구원은 혼자였다. 항상 주변에서 경호하던 솟대 놈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 금지구역인 거 몰라요? 대체 여기서 뭐하는 거에요?”

 

 풋내기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총을 보고 겁먹은 건가.

 

 “사냥.”

 

 푸석해진 입술 사이로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여기서 사냥할 게 있어요?”

 

 “널린 게 놈들인데?”

 

 그 말에 연구원의 방독면이 살짝 흐릿해진 것 같았다. 공포와 동요로. 어쩌면 분노도.

 

 “아저씨, 미쳤어요? 그거 살인이에요! 다들 병에 걸리긴 했어도 엄연히 사람들이에요.”

 

 계속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좀 전보다는 나아졌다.

 

 “그래서 잘못됐다는 거냐?”

 

 건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시체는 원래 죽어 있어야 한다. 그는 시체를 죽인 게 아니라 원래대로 만든 것뿐이다.

 

 “말이 안 통하네요. 거기 꼼짝 말고 있어요.”

 

 연구원은 그를 가리키며 나머지 손을 귀쪽에 댔다. 그 역시 본능적으로 허리춤에 찬 권총을 꺼내들었다. 연구원이 무전으로 도움을 청한다는 걸 알고 했다기 보단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연구원의 손이 허공에 매달린 듯 그 자리에서 멈췄다.

 

 “손 내려놔.”

 

 그가 여봐란듯이 안전장치를 풀었다.

 

 “내려놓으라고. 총 맞기 싫으면.”

 

 연구원은 순순히 그 말에 따랐다.

 

 “좋아, 그래도 말귀는 알아먹어서 다행이네. 나쁘게 생각 하지마. 이렇게 하는 게 서로 좋은 거야. 넌 총 안 맞고 끝나는 거고, 난 쓸데없이 골치 아픈 일 없이 끝나는 거고.”

 

 “저는 아저씨를 해치려는 게 아니에요. 제가 도와드릴께요. 여기 오래 있으면-”

 

 “위험하다고? 감염되서?”

 

 그의 말에 방호복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개소리야, 꼬마. 이미 다 늦었어. 격리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야. 전 세계가 이미 다 감염됐거든. 너도 마찬가지고. 네가 입고 있는 장난감만 있으면 괜찮을 것 같지? 너도 이미 늦었어. 네 명줄 끊기면 너도 저 새끼들이랑 똑같이 변해.”

 

 “아니요, 꼭 그렇지 않아요.”

 

 “밖에서 살던 녀석이라도 죽으면 다시 되살아나. 이건 벌써 모두 알아. 왜 사태가 이렇게까지 됐는데도 너희 정부에서는 거짓말하는지 모르겠구나.”

 

 “거짓말이 아니라-”

 

 “너 여기 온 지 얼마나 됐냐?”

 

 “예?”

 

 “온 지 얼마나 됐냐고?”

 

 엉뚱한 질문이라고 생각한 건지 방호복이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저, 저번 주요.”

 

 “난 그 날 이후로 계속 여기 있었다. 그 날 이전에도 여기서 살았고. 뭔 말인지 알겠냐?”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는 글로 보고 얘기하는 거겠지만, 난 직접 눈으로 본 걸 얘기하는 거야. 너도 죽으면 녀석들처럼 바뀔 거야.”

 

 “그래서 뭐요? 그 총으로 죽이려구요?”

 

 연구원이 발악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공포는 불확실한 발음 속에서 그대로 묻어나왔다.

 

 “걱정 마. 사람은 안 죽여.”

 

 “죽였잖아요?”

 

 “그만해라. 그 문제는 여기서 끝내자.”

 

 그가 지겹다는 듯 총구를 흔들었다. 바보 같은 승강이를 하는 동안 하늘은 벌써 핏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서두른다 해도 이래가지곤 제 시간 안에 도착할 순 없었다. 싫었지만 건너편 주택가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떨 필요 없어. 내 말대로만 하면 총 맞을 일 없으니까. 이제 뒤돌아.”

 

 태엽 달린 구식 장난감처럼 연구원이 뒤뚱거리며 몸을 돌리자 주홍빛으로 젖어가는 방호복의 실루엣이 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뚜렷하지만 어딘가 모호해 보이는 것이 비현실적인 느낌을 줬다.

 

 “자 됐어요? 다음엔 뭐 할까요? 계속 이런 식으로 있을 거에요? 일단 저도 동료들한테 연락을-”

 

 “정신 사나우니까 좀 닥치고 있어라.”

 

 그가 신경질적으로 총기를 방호복에 대고 누르자 남자는 잠시 움찔거리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어차피 여기선 연락 안 돼. 좀 더 외곽으로 나가야 간신히 될까 말까 할 거다. 아니, 것보다 이런 것도 모르고 혼자서 여길 싸돌아다닌 거냐?”

 

 “그 정도는 알고 있었어요. 근데 어디서부터 안 되는지는 몰라서…….”

 

 “개소리. 제대로 못 써먹는 정보는 모르는 거나 마찬가지야.”

 

 “알았어요.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려고요?”

 

 “걱정 마, 다칠 일 없으니까. 별일 없으면-”

 

 그 때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굉장히 시끄러워 어디서부터 난 건진 알 수 없었지만 뭔가 넓적한 게 어딘가에 부딪힐 때 난 소리인 듯싶었다. 아마 문 같은 종류의 것이 말이다.

 

 “이런, 별일이구나.”

 

 그는 시계를 보았다. 슬슬 녀석들이 활동할 시간이다. 방호복 역시 눈치 챘는지 몸이 떨리고 있었다. 처음으로 두 사람의 머릿속에 정확히 같은 장면이 펼쳐졌다.

 

 지옥문이 열렸다.

 

 “좀 도와줘야겠다.”

 

 “네?”

 

 “정말 미-”

 

 갑자기 울린 총성 탓에 연구원은 그의 말을 끝까지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게 무슨 말이었는지에 대한 호기심은 종아리를 타고 드는 통증으로 인해 금세 사라졌다.

 

 “내 다리! 씨발 내 다리!”

 

 통증 때문에 다리를 붙잡고 싶어 하면서도 다시 통증 때문에 잡지 못해서였다. 그는 총을 도로 집어넣고 울부짖는 방독면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냥 선물이라 생각해라.”

 

 눈물로 붉게 젖은 눈이 그를 노려봤다.

 

 “그런 식으로 보지 마. 애초에 집단에서 이탈해서 이렇게 된 거잖아.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이러면 안 된다는, 그런 교훈으로 생각하자고.”

 

 “무슨 교훈이야, 이 씹할 미친 새끼야!”

 

 남자의 절규에 건호는 손가락을 꼽았다.

 

 “첫째, B구역에서는 절대 혼자 다니지 말 것. 특히 너 같은 꼬맹이라면. 둘째, 빈손으로 다니지 말 것. 나니까 이 정도지 시체라도 만나면 어쩌려고. 다음부턴 딱총이라도 하나 들고 다녀. 셋째는 음…….”

 

 그는 잠시 턱을 쓰다듬다가 마지막으로 손가락을 꼽았다.

 

 “셋째는 마주치는 게 동료가 아니라면 누가됐든 도망칠 것. 그게 뒈지다 만 시체든, 약탈자든, 나 같은 사냥꾼이든. 도망치는 게 싫으면 차라리 먼저 공격하는 것도 괜찮고.”

 

 그가 몸을 일으켰다.

 

 “봐, 세 가지나 되지. 앞으로 다리에 난 흉터 보면서 잘 기억해. 나중에 후배들도 가르치고 해야지.”

 

 “미친 새끼.”

 

 연구원이 표독스레 이를 갈았다.

 

 하늘에는 핏빛이 물러나고 그 자리를 어둠이 갉아먹기 시작했다. 시체들의 비명이 더욱 높아졌다. 더 이상 머무를 시간이 없었다.

 

 “총소리가 들렸으니까 조만간 네 동료들이 올 거야. 너무 걱정 하지 마. 그럼 난 간다.”

 

 연구원의 욕지거리를 뒤로 한 채 그는 맞은편 거리를 뛰어갔다.

 

 처음에는, 괜찮았다. 그 동안의 거북함을 비웃듯 다리는 자연스레 움직였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거리로 파고들 수 있었다. 욕지거리 소리가 점점 줄어들고 도시가 제 색을 잃어갔다. 그저 자연스러워보였다. 간판을 보기 전까지는.

 그곳이 목적지였다는 듯 간판을 본 순간 다리가 저도 모르게 멈췄다.

 

 어둠 속에서 색을 구분할 수 없게 된 간판에는 ‘행복 문방구’라고 적혀 있었다.

 

 저 로봇이랑 이게 합체하는 거에요.

 

 고사리 같던 손이 가리키던 방향에는, 이제 장난감 대신 깨진 유리조각만이 남아 있었다.

 

 그림자가 된 도시의 윤곽선이 하늘 위로 선명하게 드러났다.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그제야 볼 수 있었다. 상처 입은 추억들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작은 놀이터, 태권도장, 피아노 학원. 그러나 그 중 성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태권도장과 피아노 학원의 깨진 창문에는 핏자국이 굳어 있었고, 군데군데에 그림자처럼 그슬린 자국이 묻어 있었다. 놀이터의 미끄럼틀 또한 곰보 자국 같은 총알자국이 비스듬히 아로 새겨져 있었다.

 

 “저기서 미끄럼틀 타면 엉덩이 아프겠지?”

 

 나지막이 농담해 보아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웃는 사람도 없었다. 그 자신조차도.

 

 낮게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린 건 그 때였다. 그는 잽싸게 배낭에서 장도리를 꺼냈다. 이제 놈들의 시간이다. 총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

 

 곧 어둠 속에서 머리가 벗겨진 시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해지긴 했어도 양복까지 빼입은 녀석으로, 눈 하나가 사라진 걸 제외하면 제법 멀쩡하게 생긴 놈이었다. 어기적리며 걸어 나오던 녀석은 걸음을 멈추더니 나머지 성한 눈으로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내심 감사하며 장도리를 휘둘렀다. 총을 쏘아 죽인다는 건, 그것도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죽일 때면 항상 잡념이 들곤 했다. 방아쇠를 당기는 그 쉽고도 짧은 순간에 약간의 망설임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장도리는, 굳이 장도리가 아니더라도 이런 류의 무기는 달랐다. 그저 내리치지기 위해 힘을 들이는 순간엔 어떤 것도 들어올 수 없었다. 도덕과 시간에서 벗어난, 순수함 그 자체.

 

 장도리가 시체의 머리를 파고들었다. 수박을 쪼개듯 쩍 하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그걸 신호로 사방에서 낮은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도저히 인간의 몸에서 나온다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불쾌한 소리. 그것들이 한 때 자신과 같은 인간들이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겨지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긁어대는 소리가 울리자 그는 주위를 살폈다. 이 근처 건물 중 제대로 숨을만한 장소가 별로 없었던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 몰려오는 녀석들을 일일이 상대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서둘러야 한다.

 

 그 때였다. 자신이 등지고 있던 조그만 아파트 건물 창가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재빨리 뒤돌아보니, 이미 지나간 환상처럼 무언가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나 그는 보았다. 환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조그만, 정말이지 조그만 소녀였다.

 

 시간이 멈춘다는 건 이런 것일까.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왜 서둘렀는지 순간 기억나지 않았다. 모든 사고가 정지된 채 그는 멍하니 창가를 지켜봤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그의 몸이 그리로 달려가고 있었다.

 

 B구역에 연구원이나 솟대, 약탈자가 아닌 순수한 생존자가 남아 있다는 충격도, 왜 그 생존자가 남아있냐는 호기심도 그를 움직인 동력원은 아니었다. 사실 그런 것들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저 알 수 없는, 어떤 불가사의한 힘이 그를 움직였다. 아기가 어머니를 보고 울음을 그치는, 그런 힘과 같았다.

 

 시체 몇 놈을 해치우고 아파트 현관에 도착하자 다시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제야 비로소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딘지 깨달았다. 의뢰인이 찾던, 가족이 있는 곳이다.

 

 바보가 된 기분이 들었다. 꼭 무슨 어린애 장난에 제대로 한 방 먹은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마치 누군가가 잘 짜놓은 대본인 것처럼 느껴졌다. 아내였다면 모두 신의 뜻이라고 넘겼을 테지만 그는 쉽게 그러지 못했다. 뿌옇게 바랜 문이 아무 저항 없이 움직였다. 생존자가 남아 있기엔 너무 허술해보였다.

 

 그렇다면 그 소녀는 대체 뭘까? 역시 단순한 환영이었던 건가. 그는 고개를 들어 이젠 잘 보이지도 않는 건물 층수를 헤아렸다. 잘 못 본 게 아니라면 소녀가 있었던 곳은 의뢰인의 가족이 살았다던 곳이었다. 환영이 우연찮게 거기 있었단 건 신의 뜻으로 넘겨도 납득이 되질 않는다. 그럼 시체일까? 아니 그건 분명 아니었다. 시체가 움직이는 것과 비교했을 때 소녀의 움직임은 자연스러웠다. 정말 살아있는 것 같았다.

 

 등 뒤 어둠 저편에서 또 다시 낮은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 번째 알람이다. 좀 더 지체하면 경고가 되겠지만. 그는 길게 숨을 내쉬고 유리문을 밀었다.

 

 랜턴을 켜자 흩날리는 먼지 사이로 음침한 건물 내부가 드러났다. 1층에 두 가구가 있는 판상형 아파트였다. 좁다란 계단이 아슬아슬하게 각 층면을 이어줬고, 난간 대부분이 연체동물처럼 마구 휘어져 있었다. 곰팡내 나는 벽에는 피인지 페인트인지 알기 힘든 붉은 글자가 한가득했다. 주로 십자가와 종말, 구원에 대한 글귀였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그가 도착한 곳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글귀 아래에는 각각 303과 304라고 적혀 있는 문짝이 사이좋게 서로를 바라보며 서있었다. 그는 303호 쪽의 문고리를 돌렸다. 예상대로 문은 잠겨 있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체념하며 (그도 우습다는 건 알았지만) 노크를 했다.

 

 한 번, 노크 소리가 기괴하게 건물 내부로 퍼지고, 이어 뭔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장도리를 힘주어 잡고서 나머지 손으로 다시 노크했다.

 

 누군가가 현관 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문 바로 앞까지 다가오더니 거기서 침묵했다. 상대 역시 신중을 기하는 듯했다.

 

 다시 한 번 노크. 이번에는 ‘괜찮아요, 사람입니다’라고 덧붙여 말했다. 긴장한 탓인지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 것이 효과가 있던 건지 자물쇠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약간 뜸을 들인 뒤 신경질적인 금속음과 함께 문이 열렸고 은은한 빛에 싸여 세 형상이 드러났다. 식칼을 든 앳돼 보이는 청년, 몸빼바지를 입고 있는 노파, 그리고 노파의 다리에 쑥스럽다는 듯이 숨어 있는 소녀. 기이한 조합. 그러나 그 탓에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생존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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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객 16-08-29 17:13
 
* 비밀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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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Nerd 16-08-29 18:44
 
* 비밀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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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우 16-08-31 18:30
 
멋진 시작이네요. 묘사가 세밀하셔서 현장감이 좋았습니다. 계속 연배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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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Nerd 16-08-31 19:06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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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33 16-09-07 17:30
 
재미있네요.
한가지...
'그'라고 지칭한 사람이 너무 많이 나와요.
누가 누군지 인물을 특정하기 힘든 면이 있습니다.
가급적 대명사를 많이 안 쓰는 게 가독성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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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Nerd 16-09-07 18:01
 
조언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수정을 다시 해봐야겠네요.
아무쪼록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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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사랑 16-10-27 23:47
 
시간은 교활하다, 마음에 와 닿네요.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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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Nerd 16-10-31 15:00
 
열심히 할께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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