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이거 밖에 안돼? 내가 이걸 얼마나 힘들게 들고 왔는데!”
“저기 영감님. 보시면 아시겠지만…”
웅성거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춥다. 낡은 컨테이너 벽으로는 초겨울의 차가운 공기를 다 막지 못하는 듯 하다. 작년엔 난로가 있었는데 봄에 처분해 버린 것이 아쉬웠다.
“늙었다고 눈이 없는 줄 아나? 나도 다 보고 있다고! 뼈빠지게 들고 온 유리를 이렇게 헐값으로 후려치면 어떡하나? 늙은이 등처먹고 그러면 부모님이 아주 좋아하시겠어?”
밖에서 들려오는 고함소리에 조금씩 정신이 돌아온다.
아, 또 시작이군. 새벽부터 이게 무슨 난리람. 김씨 아저씨는 언제나처럼 쩔쩔매고 있다. 내가 또 나가야 하나. 하아.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컨테이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김씨 아저씨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 대던 영감이 득의양양한 기세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원하시던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하시나 본데…
“사장이야? 이 직원 교육을 잘못 시켰어! 이거 봐! 왜 이 할망구는 3만원을 주고 난 2만원이야!? 내 짐이 훨씬 무거운데! 이 놈이 삥땅치려던 거 아냐!”
하하 삥땅이라. 김씨 아저씨가 대금을 빼돌릴 만큼 유도리가 있는 사람이었다면 내가 이 새벽부터 여기에 있지는 않을 거다. 저 사람은 그냥 마냥 좋은 사람일 뿐이야.
나는 기세등등한 노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하며 두 사람의 짐을 살펴봤다. 영감님 것은 비닐이 섞인 폐지뭉치에 잡병 두 자루, 문제의 할머니 것은 신문지 뭉치에 공병 한 자루.
“이야. 마산 할머니 대박인데요. 어디서 공병을 이만큼 구하셨대요? 요즘 이만큼 구하기도 쉽지 않은데.”
마산 할머니는 내 말을 듣더니 쑥스러운 듯 고개를 긁적이며 눈을 돌렸다. 그리고 나는 영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 할망구가 3만원이면 나는 4만원은 받아야지!”
“저기 영감님. 우리업장 처음이시죠?”
“그, 그런데? 텃세라도 부리려는 거야!?”
“여기 잘 보세요. 영감님께서 가져오신 병들은 잡병이라는 건데요. 이건 재활용이 안되고 다 파쇄해서 다시 만드는 거에요. 여기 할머니 꺼는 소주병, 맥주병이거든요. 이건 그대로 재활용을 해요. 그래서 가격이 3-4배 차이가 납니다. 그리고 폐지도 할머니는 신문지잖아요. 영감님 꺼는… 이거. 이거 봐요. 광고지들이 대부분이죠? 딴 데는 이건 아예 다 빼요. 이건 안 받아줘요. 오히려 처리비용을 우리가 받아야 하거든요.”
영감님의 기세가 팍 죽어버렸다. 생각보다는 순한 양반이었네. 아무래도 이 쪽 일을 처음 해보시는 게 아닌가 싶다. 그나저나 내가 왜 이런 걸 일일히 설명해주고 있는지 모르겠다. 김씨 아저씨를 뽑은 건 이런걸 담당하라는 거였는데.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김씨 아저씨는 머쓱한지 싱거운 웃음만 짓고 있다. 에휴 내가 바보지.
“처음 하시는 경우에는 업계사정을 알기 힘드니까 이런 문제가 좀 발생합니다. 오늘은 제가 손해보고 3만원 쳐드릴게요. 대신 여기 직원에게 좀 배워가세요. 우리 업장 아닌 곳에 이렇게 가져가시면 그 땐 돈은커녕 욕만 바가지 먹고 나옵니다. 아버지 같아서 말씀드리는 거에요.”
만원 더 얹어준다는 말에 시무룩해 있던 영감의 어깨가 다시 들썩거렸다. 만원 이만원이 중요한게 아니라 다음에는 제대로 된 물건을 들고와야 할텐데. 뭐 김씨 아저씨가 저런건 잘 챙기니까 알아서 잘 하겠지.
나는 차례를 기다리는 노인들의 폐품들을 흘낏 쳐다보곤 다시 컨테이너 사무실로 들어왔다. 아침 6시. 이제는 아침밥을 먹어야 할 시간이다.
남들이 보기엔 쓰레기장 한가운데 놓인 창고 같이 보일지 몰라도 이 컨테이너에는 생활에 필요한 것은 거의 다 있다. 왜? 내가 사는 곳이니까.
집 없이 컨테이너에서 생활하는 삶도 익숙해진지 3년, 뭐 그렇다고 노숙자 인 것은 아니다. 그 뭐랄까 좋은 말로 하자면 도시금광? 그린에코 산업? 뭐 그런 직종에 종사하는 거다. 이게 유망할 거라는 말도 안되는 착각에 빠져서.
할 수만 있다면 3년 전으로 돌아가서 내 선택을 뒤집어 버리고 싶지만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아니 뭐 그렇게 간절한 것도 아니다. 전에 다니던 회사보다는 수입이 좋은건 사실이니까. 다만 문제는 명함에 씌여진 내용이지. 재활용품 처리업 성한실업 대표 김성한. 나쁘게 말하자면 고물상 주인. 그래. 나는 고물상 주인이다.
-
여자는 화려한 왕좌에 앉아 있다. 그리고 일곱가지 색 보석으로 치장된 빛의 왕좌는 아무런 지탱할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허공에 고정되어 있다. 완전한 칠흑의 공간. 지구인이라면 우주 라고 부를 공간이다.
-있잖아. 넬.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여자의 나른하게 풀린 목소리에서 짜증스러움이 가득 묻어나온다. 넬이라 불린 남자는 충정과 긴장으로 가득찬 표정을 짓고 그녀의 발밑에 무릎을 꿇었다.
-에스락시아의 피조물들이 우주 개척지를 열었대. 카르다쇼프 1급 문명 말이야. 에스락시아 알지? 내가 9급신이었을 때 에스락시아는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어. 그런데 이제는 나보다 고위신이 되게 생겼어. 후후.
여자의 말투는 여전히 나른했지만 그 속에 가득한 분노의 감정이 조금씩 새어나와 넬을 공포에 휩싸이게 했다. 넬은 무슨 말이라도 꺼내려고 했지만 두려움에 마비된 입은 혀를 꺼내놓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말이야. 나도 좀 써보려고. 자존심 때문에 지금껏 남들이 쓰는 걸 참고 있었는데 이젠 안되겠어.
"무슨 말씀이신지?"
-나도 치트키 라는 걸 해보려고.
말을 끝마친 여자는 왕좌에 몸을 깊숙히 묻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이 그녀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알 라쇼프 문명의 창조주 7급신 엘라의 뜻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