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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버닝러브
작가 : 에이슈
작품등록일 : 2017.11.17

사랑에 관한 것. 사랑은 세상 모든 일이다. 어떤 사람이든 어떤 사랑이든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다는 것을 잘 모르고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인연은 랜덤이지만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끝까지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삶의 가치를 이야기 한다. 삶이 험하고 각박할수록 사랑을 더 많이 이야기하고 해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처음
작성일 : 17-11-17 12:43     조회 : 444     추천 : 0     분량 : 1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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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꿈에서 깨어나기를, 깨지 않기를

 

  단조롭게 비추고 있는 외로운 태양을 뒤로 하고 구름 사이를 뚫고 하강하니 부산한 소리를 내며 비가 나타났다. 꿈에서 깨어난 듯 괴리감 느껴지는 현실을 맞이해야만 했다. 가볍게 비워낸 줄 알았으나 또다시 무게감을 느끼게 하는 비였다.

  유난히 회색빛이 감도는 풍경이다. 알록달록해야 할 이 한가을에 국제공항은 유독 계절을 무시하듯 늘 그렇다. 언제나 무채색의 사람들의 웅성거림만 그 느낌을 더할 뿐. 여기 나를 둘러싼 배경과 소리, 그 냄새마저 나를 회색으로 만들어 버린다. 다시 난 그렇게 그 배경에 스며야 한다.

  떠날 때보다 싸늘해진 기온과 가을비에 축축이 젖은 공기가 익숙한 낯설음에 당황하고 있는 나의 가슴을 한 대 툭 때리는 듯 했다. 혼자임에도 편치 않은 발걸음으로 짐을 찾은 나는 공항 밖으로 나왔다. 밖은 또 다른 회색이었다. 물감보다 물이 더 많아 질펀한 느낌의. 큰 한숨으로 빗줄기 사이에 회색 입김을 내뿜었다.

  ‘이 곳을 벗어나는 순간, 과연 난 여행의 효과를 경험하게 될까.’ 살짝 긴장되고 두렵기도 했다. 여행은 충분히 좋았다고 느꼈기 때문에. 취리히 공항에 첫 발을 디딜 때와 비슷한 강도와 속도로 뛰고 있는 심장을 한 번의 심호흡으로 달래며 공항을 빠져 나오고 있었다.

 

  “어이~도강호! 여기, 여기!”

  상스러운 어투의 익숙한 목소리에 흠칫 놀라 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영꽝이라 불리는 불알친구 영태였다. 이십년을 가까이 알아 왔지만 정말 어디로 튈지 모르는 녀석이다. 소름 돋는 녀석의 출현이다.

  “어.......네가 여긴 어떻게.......”

  내가 말했다. 커다란 덩치가 우산의 사이즈를 벗어나 외투와 바지를 짙은 회색으로 물들이고 녀석은 힘겹게 내게 달려왔다.

  “야..... 씨! 안 들리냐? 몇 번을 불렀는데......”

  숨을 헐떡거리며 내게 말한다.

  “뭘 그렇게 오래 있어? 입이 근질거려 죽는 줄 알았네. 너 인마, 너 실컷 노는 동안 난 인마 얼마나 애쓰고 있었는 줄 아냐?”

  한 달간의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내게 한 마디 인사는커녕, 입을 귀에 걸고 눈동자를 느끼하게 반짝거리며 속사포를 쏘아대고 있었다. 최근 두 달여간 연락이 뜸했었는데 여행 중이었던 내게 뜬금없이 두어 번의 안부 전화를 했었다. 어쩐지 무언가 불길했다.

 

  “한참 일하고 있을 시간에 여긴 왜 왔어?”

  “만사 재껴 두고 달려온 친구한테 할 소리냐? 오늘은 별 일 없지? 뭐, 짐도 많지 않은 것 같고........”

  잠시 원상태로 돌아왔던 이 녀석의 표정은 이내 좀 전의 구린 표정으로 바뀌며 나를 관찰하듯 쳐다보았다.

  “피곤도 풀고 이 형님이랑 회포도 풀 겸 가볍게 한 잔 어때? 오랜만에.”

 

  사실 이 녀석, 귀찮을 만큼 가족보다도 더 자주 나를 찾았던 놈이다. 늘 퇴근시간을 알려 주는 건 이 녀석의 전화였고 늘 그 시간이후의 우리 둘의 동선은 태엽을 감아 놓은 병정 인형마냥 자동 반사적이었다. 벌써 5년째이다. 태엽을 감는 쪽은 이 녀석, 인형은 물론 나였지만.

  그러던 영꽝이 3개월 만에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여행을 다녀온 나를 마중하러....

 연락도 없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했지만 난 묻지 않았다. 여행후의 고단함이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은 욕망을 이겼기 때문에 난 또 병정 인형처럼 끌려가고 있었다.

  일 년 전 새로 뽑은 녀석의 애마 은색 2012년형 BMW X1은 빗속에서도 반짝거림을 잃지 않고 후광을 내뿜고 있었다. 셀러브리티를 에스코트 하듯 커다란 우산을 받쳐 들고 낮은 자세로 내 짐을 받아 트렁크에 실은 녀석은 조수석의 문을 열고 아주 젠틀한 손짓으로 내게 타라 신호했다.

  차에 올라 좌석에 몸을 맞췄다. 역시 이 녀석의 감각이 돋보이는 좌석이다. 이것이 내 몸을 잘 받쳐 들었고 머리를 기대면서 온 몸에 힘을 풀었다. 비로소 난 편안함을 느꼈다. 그제야 입을 열고 성대를 울릴 수 있는 힘이 생겨났다.

  “어디 가는데? 피곤하다. 술은 담에 하자.”

  “편안히 모시겠습니다. 맘껏 쉬기만 하십쇼!”

 또다시 이 녀석의 능청에 대꾸할, 아니 거부할 기력이 사라지는 듯 했다. 그래도 마지막 반격 아닌 반격은 해야 했다.

  “미친 놈....... 잘 다녀왔냐 묻지도 않고 이게 뭔 행패야?”

  “어허! 행패라니! 그러는 네 놈도 백 년 만에 보는 형님한테 반색은커녕 죽을 상이냐? 것도 공기 좋은데서 실컷 힐링하고 왔다는 놈이.”

  본색을 드러내는 영태 녀석이다.

  “피로회복 제대로 하게 해 줄 테니 넌 그냥 따라만 와.”

 

  아무리 급해도 영태는 호들갑을 떠는 스타일이 아니다. 20년을 넘게 이 녀석을 알았어도 단 한번 누굴 기다리고 반기는 놈이 아니었다. 녀석은 심지어 자신의 아내에게도 그랬으니까.

  나와는 다르게 영태는 착한 놈이다. 아니, 순수한 놈이랄까. 지금은 아무도 찾지 않는 한 관광지에 세워진 오래된 조각상처럼 그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이 그를 보며 추억의 사진을 촬영하고 쓰다듬고 그 느낌을 기억하려 애쓴다. 흔한 존재가 아니기에 한 때 그는 사람들의 관심을 사기도 했다. 또 그는 그것을 받아들일 줄도 알았다. 뻑대지 않고 그냥 가만히, 질투 나도록 자연스럽게. 떠나가는 사람도, 짓궂은 사람도 태연히 받아 칠 줄 아는 순수한 놈이었다. 부러울 만큼.

  그런 생각도 했다. 늘 그 자리에 있으니까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고, 눈보라와 폭풍우도 겪었을 그다. 겉으로 보이는 크고 작은 스크래치들은 그를 아프게 했을지도 모르고 차갑고 어둔 밤이 그를 외롭게 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녀석은 늘 같은 표정과 몸짓으로 또 다른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난 의아했다. 이십년의 시간이 남다를 거라 여겨 지다기도 문득 그 조각상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혹은 그 속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지, 얼마나 더 관심을 받고 풍파에 끄떡 없을지 물어본들 소용없는 그런 친구였다. 이런 생각을 하니 조금 슬펐다.

 

  영태는 2년 전 결혼을 했다. 이 자식을 만나면 세월이 무색했다. 결혼을 했어도 똑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은 녀석의 결혼은 충격적이었다. 오래간다 싶었던 1년여의 연애가 결혼이란 마무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녀석이 결혼을 해서가 아니라,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생각지 못했던 그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재수씨는?”

  내가 물었다.

  “오....... 웬 관심? 황송하네. 바깥바람 좀 쐬고 오니까 정신이 돌아 온 거야? 하긴, 개나 소나 하는 실연 좀 했다고 그 유난을 떨었으니 달라져야지. 안 그럼 양심이 없는 거지....... 새끼....... 이제 좀 낫냐? 유난 좀 그만 떨어 새꺄....... 너 인마, 한 달씩이나 쳐 나갔다가 와서는 또 혼자 귀신처럼 굴면 아주 조져 버릴 거니까!”

  너스레를 떨며 영태가 말했다.

  “쳇.......”

  난 쓴 미소로 답했다.

  조수석은 열선으로 데워져 있었다. 빗소리가 차단되고 좌석에 앉는 순간 잊혀졌던 현실감이 주사약처럼 온몸의 핏줄을 타고 흐르는 듯했다. 몸에 딱 맞는 착석감과 열선의 온기는 한 달간 스위스의 시골에서 느꼈던 소똥냄새와 건초냄새 섞인 햇살의 온화함과는 상반되는 느낌이었다. 공항에 내리면서 느꼈던 회색의 느낌을 입체화시키는 듯한 한기 같은 온기였다. 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친구 녀석의 느끼한 콧노래가 그 느낌을 가중시켰다. 나도 모르게 등받이에 머릴 떨구었다. 이 녀석에 진 건지 잠에 진 건지 헷갈렸지만 계기판의 시계가 5시 30분을 지나는 순간을 목격한 후, 난 눈을 감았다.

  “자식....... 피곤한 척은....... 끝은 끝인 거고 다시 시작하는 거야. 바로 오늘부터. 알았냐? 거 언제까지 사춘기 소녀마냥 살랑 바람에 그렇게 날아만 다닐래?”

  영태가 말했다. 눈을 감고 있어도 날 바라보는 녀석의 표정이 보이는 듯했다. 그의 너스레는 나를 불안하게 했다.

  “뭐야.......뭔데 이래? 너야말로 정신 나간 생쥐마냥 호들갑떨지 말고 말해. 하긴, 말해도 오늘은 안 될 테지만. 오늘까지만 나 좀 냅둬줘. 난 안가.”

  내가 말했다.

  “하하....... 넌 이 차에 탔고 탔으면 가는 거야. 멍청한 새끼......”

  그가 말했다.

  “미친 놈....... 오늘은 아니잖냐, 진짜. 좋은 말 할 때 집으로 가라.”

  난 겨우 말했다. 맘속으론 이미 쉬기를 포기했지만 녀석이 집을 향할 거라 믿고 싶었다. 나의 말을 가볍게 집어 삼킨 영태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불렀다. 난 애써 녀석의 콧노래를 귀에서 지우고 빗소리에 집중하려 애를 썼다.

 

  아주 잠깐이었다. 열을 세고 난 후 깨어난 것 같았다. 눈을 뜨기 하늘은 어두워져 있었고 차 밖은 밝은 빛에 둘러 싸여 있었다. 비도 어느새 잦아들어 가루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다 왔습니다. 무사귀환을 환영한다. 친구야!”

 영태는 핸들을 왼쪽으로 꺾으며 말했다. 예전에도 숱한 경험들이 존재했지만 오늘은 낯설고 어색했다. 밝은 불빛들을 뒤로 하고 좁고 오래된 골목에 차를 멈춘 그는 손수 조수석 문까지 열어 주었다. 몸이 무거웠다. 녀석이 원격으로 날 조정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생각이 멈춰버린 나는 어느새 홍대 앞 어느 좁은 골목에 발을 딛고 서 있었다.

 2. 너의 첫인상

 

  “나 열장만 더 줘봐.”

 은복이가 인상을 쓰며 얼굴에 부채질을 해댔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장 남았어.”

  내가 말했다.

  “뭐야, 겨우 이것뿐이야? 참 나....... 그렇게 잔소리를 해 싸더니....... 아줌마 갱년기네, 갱년기야.......”

  은복이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어디 관객 수가 이 종이 쪼가리 숫자에 비례하더냐? 욕심을 버리자.”

  내가 말했다.

  “아, 그건 그거고. 기타....... 언제까지 기타 없이 버티라고? 지는 나이나 많아서 힘든 티라도 내지. 이기적인 노친네! 하긴 뭐, 그것도 제 업보야. 공연도 주목을 못 끄는 판에 요기 구석탱이에 깨알만하게 써 놓은 걸 누가 보겠어? 진짜 감 떨어지지 않냐?”

 은복이는 속사포를 쏘아댔다.

  “솔직히 깨알은 아니지......... 그래도 천재잖아.”

  내가 말했다.

  “천재는 개뿔!”

  그녀는 나를 노려보았다.

 

  말자언니는 ‘버닝러브’를 혼자서 10년째 이끌어 왔다. 꽉사장님 말로는 90년대 중반부터 존재해 왔다고는 하나 증거가 될 만한 흔적들은 아직 찾아보지 못했다. 지금은 이곳이 그 어느 동네보다 생기 넘치는 곳이 되어 버렸지만 그 한 가운데 이런 오래된 클럽이 여태껏 존재한다는 건 이제 신기한 일이 되고 있었다.

  말자언니는 이곳 ‘버닝러브’ 곽사장님의 소울 메이트라고 했다. 세상에 이런 남녀관계가 가능하구나...를 보여주는. 그냥 그저 곰 같은 곽사장님에 또 그저 곰 같은 말자언니지만 서로 기생하며 공생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사람들이다. ‘버닝 러브’가 ‘버닝 러브’가 된 것도 이곳 꽉 사장님의 가게가 ‘버닝 러브’이기 때문이었다. 그냥 그렇게 그들은 다른 이유가 없었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식 날 처음 이곳을 찾아 왔다. 졸업은 했지만 딱히 갈 곳이 없었던 난 친구 같은 베이스 기타 하나가 전부였다. 학교는 다니는 내내 지루하기만 했다. 그래서 난 졸업 하던 그 날, 내게 가장 재미있는 곳을 찾아가기로 했었다. 거기가 바로 여기, ‘버닝 러브’.

  4년 전 이미 말자언니는 밴드 ‘버닝 러브’를 이끌고 있었지만 늘 남자 멤버들과 성격과 의견이 충돌했다고 했다. 그렇게 멤버들이 언니와 싸우고 나가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그랬겠지....... 겪어 보니 이 곰 같은 여자를 어떤 남자가 감당했겠나 싶었다. 꽉사장님 말고는.

 

  “아, 씨발....... 우리 진짜 이래도 되는 거야?”

 찜통더위에 홍보전단 붙이는 일이 짜증이 났을 것이다. 은복이는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볼멘소리를 씹어 뱉었다.

  “맨날 이렇게 해 왔는데 뭘 그렇게 걱정해? 공연이 안 되는 것도 아니고....... 기타 구할 때까지만 버티면 되지 않아?”

  나는 말자언니와 은복이의 눈치를 동시에 살피며 말했다. 말자언니는 듣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언니, 점심 뭐 먹어요? 우리 좀 힘들었는데?”

  은복이는 안면을 바꾸었다.

  “맨날 일이천원짜리 국수나 백반 같은 거 말고 딴 것 좀 먹어요! 삼복더위에 아침부터 부려먹었잖아! 열사병에 영양실조까지 걸려 쓰러져 죽으면 언니가 장례 치러 줄 거야? 아니, 감옥가요, 언니....... 노동법에 다 걸려. 이런 거!”

  은복이가 말했다. 나 같으면 말자언니에게 감히 하지 못할 말이다. 은복이는 거침없이 의견을 피력하는 스타일이다. 하지만 말자언니 앞에선 이나마도 자제하는 편이다.

  “미친년....... 뭐가 쳐 드시고 싶으세요? 정확히 말을 하든가, 네가 사든가!”

 꿈쩍도 않고 기타만 만지고 있던 언니가 은복이를 치켜 보았다.

  “음....... 에잇, 그래, 뭐....... 까짓, 내가 쏠게요! 뭐, 맨날 국수 아님 순두부지만 그래도 언니한테 얻어먹은 게 있는데 나도 양심이 있지. 갈 거죠? 그럼? 응?”

  은복이가 말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자언니는 만지작대던 기타를 퉁! 하고 내려놓고 자동 반사적으로 일어났다. 나도 언니를 따라 무의식적으로 일어섰다.

  “아, 뭐해?”

  말자언니가 은복이에게 고갯짓을 하며 말했다.

  “아이 씨......”

  은복이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점심 한 끼에 자존심을 걸 수는 없는 일이니까. 앞장섰던 말자언니를 은복이는 얼른 따라 잡고는 앞장서 갔다. 조금 전까지 그녀를 짜증나게 했던 더위에도 불구하고 날아가듯 앞장서더니 큰 골목에 새로 생긴 식당 앞에서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3층짜리 새 건물인데 외관은 족히 백년은 되었을 법한 빈티지한 비주얼이었다. 앞서 간 은복이는 그 앞에서 가게 안을 힐끗거리며 보고 있었다. 말자언니와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언니....... 내가 사요. 내가 언제 한 입으로 두 말하는 거 봤어? 내가 살 건데....... 여긴 좀....... 맛 없을 거 같지 않아요? 냄새부터가 벌써 낯설어....... 괜히 돈 주고 검증 안 된 음식 맛없게 먹고 쌍욕 나오는 것만큼 기분 나쁜 일이 어딨어....... 그치?”

  은복이가 다시 안면을 바꾸자, 말자언니는 그녀의 머리를 한 대 치며 말했다.

  “짜장면이나 사! 미친년아....... 저 냄새 맡으니까 짜장면 땡긴다.”

  우리 셋은 잠시 잊었던 더위를 다시 느끼며 가게로 돌아왔다.

 

  “누구세요?”

  “............”

  가게에 다시 도착했을 때 누군가 그 앞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은복이가 물었지만 그는 대답이 없었다. 보통 키에 손등까지 내려오는 블랙 긴 소매셔츠가 마른 몸을 더 말라보이게 했고 한 쪽 눈을 가린 단발 컷의 헤어가 무척 답답해 보였다. 그나마 오래입어 헤진 느낌의 너덜너덜 찢어진 청바지와 하얀 컨버스 스니커즈가 때가 탔을지언정 그 답답함을 조금은 중화시켜 주었다. 등엔 거북이 등껍질만한 백팩과 어깨엔 낡은 가죽 기타 케이스를 매고 있었다.

  우리 셋은 말없이 서 있는 그를 아래위로 한 번 훑었다.

  “저....... 기타 구하신다고......”

  그가 입을 열었다. 뜻하지 않은 손님에 당황한 우리는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하고 계속 그를 바라보았다.

  “아.......아닌가요?”

  그는 한 발 앞으로 물러 나와 뒤돌아 간판을 확인하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짜장면 먹을래요?”

  말자언니는 어리버리한 그에게 한 마디 던지고는 앞장서 가게로 들어갔다.

  “아, 일단 들어오세요. 맞아요, 맞아. 우리 기타 구해요.”

  은복이가 수습을 하며 그를 안으로 안내했다.

 

  “짜장 네 개, 맞죠?”

  “네! 감사합니다.”

  개성각 사장님의 말에 말자언니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은복이에게 재빨리 돈을 내라는 눈짓을 보냈다.

  “예? 아, 네....... 언니도 참....... 처음 보는 분한테 메뉴도 안 물어보고 막 시켜도 돼요?”

  가방에서 주섬주섬 지갑을 꺼내며 은복이가 말했다.

  “짜장면은 국민메뉴야. 안 그래요, 사장님?”

  말자언니가 그릇 포장을 벗기며 말했다.

  “암요, 암요.”

  개성각 사장님이 대답했다.

  “설마 못 먹는 건 아니지? 보아하니, 배고파 보이기도 하고....... 얘가 사는 거예요. 부담 갖지 말고 먹어요.”

  언니는 짜장을 비비며 그에게 말했다. 이것이 말자언니가 차릴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였다. 식사가 오는 동안 통성명을 겨우 마쳤던 우리는 각자의 짜장을 다 비비고서야 그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김이건이라고 했지?

  급하게 면을 비비고는 한 젓가락 크게 집어 들어 입에 밀어 넣기 직전 말자언니가 그에게 물었다. 의외로 낯선 곳에서 낯선 이들과 식사하는 모양새가 그리 어색하지 않았던 그는 “네.” 라고 답하며 먹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말을 꺼낸 건 그였다.

  “저........ 여기서 연주 할 수 있는 거죠? 음....... 이거 먹고 한 번 해볼까요?”

  허기에도 불구하고 평소보다 먹는 속도를 반도 내지 못하고 있는 나와 은복이는 잠시 젓가락질을 멈추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래요. 어서 먹어요.”

  말자언니가 말했다. 쿨하게 대답한 말자 언니와 우리 셋은 어색할 것 같았지만 그리 어색하지 않았던 그와의 첫 만남과 첫 식사를 동시에 마쳤다.

 

  말자언니, 은복이, 나는 약 십 초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연주는 우리를 그렇게 얼어 붙게 만들었다. 무슨 곡을 연주한 건지 몰랐지만 현란하지 않고 절제되고 무거운 듯 했다. 어둡고 슬픈 듯도 했다. 쉽지 않은 연주인 것은 분명했다. 오래전부터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친근함과 신선한 충격이 동시에 느껴졌다. 정신이 들자 말자언니를 쳐다보았다. 표정이 없었다.

  “어허.......와우!”

  정적을 깨고 은복이가 박수를 쳐댔다.

  “언니, 언니....... 우리 힘들게 일한 보람이 있네. 그쵸? 와우!”

  은복이는 박수를 이어갔다.

  “포스터 봤지? 공연 날짜. 잠자는 시간 빼고는 연습이야. 너는 특히, 곡도 익혀야 하고 노래도 좀 해야 돼.”

  말자언니는 그에게 바로 말을 놓았다.

  “최대한 빨리 익혀 볼게요. 누나들보다 체력은 좋을 테니까 걱정 마세요.”

  그가 말했다. 앞뒤 잘라먹고 가운데만 쏙 빼먹는 화법이 마치 친남매마냥 척척 맞았다.

  “어? 아니....... 누나들.......이라니? 누가 누나들이래? 며....... 몇 살이세요? 참 나....... 우리 스물셋밖에 안 먹었는데?”

  은복이가 정색했다.

  “누나들 맞네요.”

  그가 씩 웃었다. 웃는 모습이 예뻤다. 두 시간 전 가게 앞에서 마주쳤던 그와, 두 시간 후의 그는 다른 사람 같았다. 방금 연주했던 그의 기타소리가 그의 몸에, 그의 얼굴과 미소에 뿌려진 듯했다. 아름다웠다. 냉방도 제대로 켜지 않은 이 지하 연습실의 습한 열기가 왠지 따뜻하게 느껴졌다.

 

 3. 널 따라오지 말았어야 했어

 

  조금은 이른 시간인 듯 했지만 홍대거리는 반짝이고 있었다. 곳곳에 흐르는 음악소리와 오가는 사람들이 내게 현실감을 깨닫게 했고 조금은 귀찮게도 느껴졌다. 비에 젖어서인지 더욱.

  차가 진입하기 어려운 골목이었다. 살짝 상기된 분위기의 영태는 아무 말 없이 나를 그 골목으로 안내했다.

  “야....... 나 피곤해......”

  그를 따라가며 난 말했다.

  “그러니까, 인마!”

  녀석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밖에서는 쉬이 눈에 띄지 않는 곳이었다. 음악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녀석을 따라 열 개 남짓의 지하 계단을 내려갔다. 크지 않게 밴드의 연주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아무도 없었고 작은 스포트라이트 몇 개만이 빈 무대를 밝히고 있었다. 조명 빛 아래 흩날리는 먼지들과 지하의 쾌쾌함, 뭔지 모를 단내가 섞인 냄새는 익숙한 듯 하면서도 낯선 이국적인 작은 도시의 거리를 떠올리게 했다.

  “여기 앉자. 잠깐만.”

  영태가 내게 말했다. 스무 평 남짓한 홀은 그 반이 무대를 차지하고 있었고 오른 쪽으로는 좁은 복도가 있었는데 그 쪽으로 주방이나 바가 있는 것 같았다. 흐릿한 조명만이 그것을 알아 볼 수 있게 해 주었고 영태는 그 복도를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영태는 그 곳에서 맥주 두 병을 가지고 나왔다. 작은 홀 왼쪽으로는 출입문 근처까지 긴 테이블이 연결되어 있었다. 무대와 긴 테이블 사이에 서너 개 정도의 작은 테이블이 더 있었다. 우리는 맨 오른쪽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내가 피곤함에 맥주 한 병을 들이키는 동안 우리 둘 외의 손님은 없었고 밴드도 주인도 보이지 않았다. 영태가 맥주를 가지러 그 복도 안쪽으로 들어가면 녀석과 누군가가 대화하는 소리가 잠깐씩 들릴 뿐이었다.

  “여기 분위기 어때? 죽이지?”

  맥주를 건네주며 영태가 물었다.

  “그러네.......”

  난 대충 대답했다.

  “여기 아니면 너 굳이 끌고 오지도 않았어. 시차적응하기 딱 이거든. 흐흐.......”

  음흉하게 미소를 흘리며 녀석은 맥주를 입에 가져갔다. 난 그의 의도가 궁금했지만 물어보는 일조차 귀찮아 맥주만 마셔댔다.

  “잠깐만........”

  그는 내 등을 툭 한 번 치고는 다시 그 복도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맥주를 다 비우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일이 분 정도 지났을까, 무념무상 상태였던 난 처음으로 그 노래를 듣게 되었다. 영태 녀석이 들어간 그 복도 너머 어딘가에서. 마취약이 몸에 퍼지는 느낌이었다. 쾌쾌한, 어둡고 축축한 이 낯선 공간에 나를 녹아들게 했다. 아련했다. 아름다웠고 이 찬 공간의 습기가 날 따뜻하게 감쌌다. 난 눈을 감았다.

  노래가 끝나고 나서도 눈을 뜰 수 없었다. 눈을 뜨면 뜨거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애써 목구멍으로 삼키고 또 삼켰다. 다시 조용해진 그 때, 출입문을 여는 소리가 내 눈을 뜨게 했다. 그 복도 너머에선 밴드의 연주 소리가 다시 희미하게 들려왔고 출입문을 들어선 한 여자는 나를 힐끗 한 번 보고는 영태가 들어갔던 그 좁은 복도 안으로 직진했다. 이내 대화소리가 잠시 들리더니 영태가 나왔다. 방금 그 여자와 함께.

  “내가 말했던 친구, 도강호.......”

  두 사람은 내게 다가왔다. 녀석이 쑥스러운 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나를 소개했다.

  “아....... 안녕하세요. 이수연이예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난 아직 목구멍에서 맥주가 넘어가지 않은 상태여서 바로 대꾸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아....... 이 친구가 긴 여행에서 조금 전에 도착했어. 시차적응도 안되고 피곤할 텐데 내가 강제로 끌고 왔거든.”

  하며 영태는 웃었다. 난 그제야 어젯밤 잠결에 받았던 녀석의 전화를 기억해 냈다. 맥주가 여전히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그럼, 두 분 말씀 나누세요. 저는 일할 시간이라......”

  그녀는 수줍게 인사하며 그 복도를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영태는 그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고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야, 이 미친놈아! 네가 미쳤구나, 아주! 어쩐지....... 미친 새끼......”

  난 목에 걸린 맥주를 억지로 넘기고 녀석에게 말했다.

  “뭘? 어제 얘기했잖아, 내가....... 흐흐흐.......”

  녀석은 넋이 나가 있었다.

  “아....... 이 새끼! 어쩌려고 그래? 휴....... 난 괴롭히지 마라. 나 이제 네 걱정 못 해줘. 안 해줘!”

  난 말했다. 모른 척 하려고 하지만 녀석의 뒤통수를 세게 한 대 쳐주고 싶긴 했다.

  “맥주나 더 가져와, 이 양심 없는 새끼야!”

  내가 말했다.

  “이힛........”

  히죽거리며 일어서는 녀석이 안쓰러워 보였다.

 

  무대에 조명이 켜졌다. 밴드 멤버로 보이는 남녀가 악기를 세팅했다. 조용한 가운데 손님이라고는 나뿐이어서인지 그들은 어두운 구석 테이블에 앉아 있는 나를 알아채지 못하고 다정히 이야기를 나누며 무대를 채우고 있었다. 그 때 수연씨가 영태와 함께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맥주와 안주접시를 들고 있었다.

  “내가 한다니까.”

  영태가 그녀에게 말했다.

  “오빠, 저 지금 알바하는 거예요. 앉아 있어요. 친구 분 혼자 계시는데....... 곧 공연 시작해요....... 그럼 공연 보세요. 음악 좋아요!”

  그녀는 영태에게 눈치를 주고는 내게 수줍은 목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잠깐 사이에 관객들이 늘어 있었다. 세 병째 맥주를 손에 들었다. 무대 위의 밴드가 기타 조율과 드럼을 맞추었다. 맥주 한 모금을 크게 들이켰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차가운 맥주가 느껴지면서 알콜 기운이 혈관을 타고 온 몸에 퍼졌다.

  곡의 도입부는 드럼 비트 두 박자였고 엇박으로 기타 솔로가 들어오면서 공연이 시작되었다. 무대를 바라보았다. 취기가 돌아서 인지 피가 뜨겁게 흐르는 것 같았다. 이곳에 처음 들어왔을 때 얼핏 들렸던 그 음율이었다. 눈앞이 아련해졌다. 눈을 감지 않고 무대를 응시했고, 차마 넘기지 못했던 뜨거운 눈물이 다시 치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아........ 이 망할 무거움, 축축함, 쾌쾌함........’

  이 모든 게 그녀를 잊기 위한 노력이라 믿었었다. 그 때는. 그녀를 탓하는 이유는 충분했다. 온 마음으로 그녀를 사랑했고, 결국 모두 빼앗기고 남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여겼었기에. 다시 평심을 되찾으려 죽도록 애쓰고 있었기에. 지친 나를 일으키는 노력을 온전히 나 혼자 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 누구의 도움도 무색하다 생각했었다. 그 때, 그 공간에서 그 음율을 들으면서도 난 눈치 채지 못했다. 내가 그렇게 멍청했다. 자신이 미웠다.

  그 날, 끝내 영태 녀석을 따라가지 않았더라면....... 좀 더 귀찮음을 핑계 삼아 발길을 뿌리쳤더라면........ 후회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지금도 난 여전히 멍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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