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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라크리모사
작가 : 마리
작품등록일 : 2017.10.30

왕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왕녀 벨리타. 그녀는 명목상의 요양을 위해 변방의 성에서 여름을 보내게 된다. 그곳의 성주는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금발의 벙어리 소녀다. 그것만으로도 이상한데, 매일 밤 자정 홀의 낡은 궤종시계가 열 두번 종을 울리면, 성의 호숫가에 새카만 머리카락의 유령이 배회한다.

 
서장. 귀향
작성일 : 17-10-30 17:19     조회 : 377     추천 : 0     분량 : 5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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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그녀는 피의 호수 속에 있었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그녀는 정말로, ‘피의 호수’ 속에 있었다. 한때 진주색이었던 그녀의 드레스는 피로 물든 호숫물을 빨아들여 허리 아래까지 온통 붉었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는 혼자였다. 살아있는 인간은 오직 그녀 혼자였다.

 어디를 보나 시체, 시체, 그리고 또 시체 뿐이다.

 피비린내에 질색해 죽을 것만 같았다. 그 언젠가 실수로 백합 향수를 바닥에 엎었을 때보다 훨씬 더 어지럽고 몽롱하다. 호수 위에 떠 있던 시체의 퉁퉁 불어터진 손이 그녀의 허벅지를 스쳤다. 그녀는 자신을 건드린 자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아는 얼굴이다. 오라비인 칼릭스가 추기경 앞에서 아스포텔의 에스테반에게 그녀의 손을 넘겼던 날, 성당의 입구까지 그녀를 호위했던 젊은 기사다. ‘오늘은 특히 더 아름다우십니다, 아가씨.’ 그가 그리 말을 건넸던 것까지 기억이 난다.

 

 오늘은 특히 더 아름다우십니다, 아가씨.

 오늘은 특히 더 아름다우십니다.

 오늘은 특히 더…….

 

 죽은 시체의 웃는 얼굴과 상냥한 말이 머릿속과 귓바퀴를 지잉지잉 울렸다.

 

 “우웩!”

 

 그녀는 구역질을 했다. 감각을 마비시키는 피비린내, 퉁퉁 불어터진 시체들, 먹다 남은 고깃덩어리처럼 굴러다니는 몸의 일부들. 몽롱했던 감각이 갑자기 되돌아오며 위장이 뒤틀렸다. 구역질은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나오는 것은 노란 위액뿐이다. 전투가 시작된 어제 오후부터 먹은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전투?

 아니, 전투가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학살에 가까웠다.

 한바탕 구역질을 하고 난 후, 그녀는 자신이 이 피로 물든 호수 안에 허리까지 담그고 있는 이유를 상기했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물에 뜬 시체들, ‘학살’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함께 웃고 떠들었던 얼굴들, 친절하고 상냥했던 성의 사람들. 그녀는 그 몸뚱아리를 팔과 다리로 이리저리 헤치고 나아갔다. 불어터진 시체들 중에 그녀와 가장 닮은 얼굴을 찾아냈다.

 

 “……칼릭스.”

 

 오라비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칼릭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두 눈을 크게 홉뜬 채였다. 이렇게 물에 뜬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늘 비열하다고 생각했던 칼릭스의 눈이 생각처럼 비열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싸우지 말걸. 그녀는 그렇게 후회했다. 그들 남매가 한창 다투고 있을 때, 기습 공격의 뿔나팔이 울렸다. 그때 칼릭스는 그녀를 향해 도자기 화병을 집어던지고, 그녀는 칼릭스의 뺨에 주먹질을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러지 말걸. 그녀는 다시 후회했다. 그런데 그들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싸웠더라? 그녀는 눈을 깜박였다.

 아아, 맞다, 기억난다. 그들은 한 남자 때문에 다투었다.

 

 “오랜만이야, 루실라.”

 

 그 남자의 이름은…….

 

 “모드레드?”

 

 왕실이 거부하고 왕국이 추방한 남자다.

 추방자이자 이름없는 자가 된 그는 오랜 시간을 떠돌았다. 그가 어떻게 해서 흑룡의 힘을 손에 넣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그는 흑룡의 인정을 받았고, 그 길로 오랜 방랑 생활을 청산하고 법황청에 달려가 고했다. ‘실로바스의 흑룡이 저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오래된 전통을 주장했다. 흑룡에게 선택된 자, 흑룡의 주인이 된 자가 실로바스의 왕좌를 계승한다는, 아주 오래된 전통이다.

 그는 단 한순간에 추방자이자 이름없는 자에서 정통한 왕이 되었다. 법황의 군대와 흑룡을 이끌고 자신을 추방한 자신의 왕국으로 귀환했다. 그리고 자신의 적들을 모조리 도륙했다. 도륙하는 중이다.

 칼릭스와 그녀는 바로 그 남자 때문에 다투었다. 칼릭스가 배신하고 그녀가 사랑했던 그 남자 때문에.

 그녀는 칼릭스의 새끼 손가락에서 얼른 반지를 빼냈다. 그것을 본 모드레드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그 속에서 대체 뭐하고 있는 거야. 어서 이리 나와.”

 

 모드레드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말라붙은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것이 누구의 피인지 그녀는 안다. 칼릭스의, 젊은 기사의, 이 호수 위에 떠 있는 사람들의, 넨시움 성 안에 죽어 쓰러진 모든 자의 피다. 그리고 그녀는 살아있는 유일한 넨시움이었으니, 모드레드의 손에 묻은 것은 그녀 자신의 피이기도 한 셈이다.

 모드레드는 여전히, 백조 무리에 낀 한 마리 흑조 같았다. 실로바스 왕실의 모두가 그를 더러운 이민족 마녀의 아들이라며 천대했지만, 왕실과 위대한 가문뿐만이 아니라 왕국의 거지조차도 그의 새카만 머리카락을 경멸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드레드는 아름다웠으며 지금도 여전히 아름답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모드레드를 보았던 때를 떠올렸다. 벌써 오 년 전이다. 지치고 상처 입은 청년은 노련한 정복자가 되어 돌아왔다. 그녀는 무심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자신이 오 년 전처럼 싱그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은 몰랐네.”

 

 그녀가 말했다.

 

 “돌아올 거라 했잖아.”

 

 그가 답했다.

 

 “돌아오리라고 믿었지. 네가 반드시 내게 돌아올 줄 알았어. 하지만 이런 식일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네게로 돌아왔어.”

 

 모드레드가 잔잔히 웃었다. 오 년 전 바로 그 청년의 눈빛이었다. 처음 만난 어린 시절부터 단 한 순간도 그녀를 바라보지 않은 적이 없었던, 바로 그 청년 말이다. 그녀는 당장 그의 품에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가 쥔 반지가, 칼릭스의 죽은 얼굴을 상기시켰다. 그녀는 물 속에서 한 발짝 더 뒤로 물러났다.

 

 “에스테반은?”

 

 모드레드의 미소가 사라졌다.

 

 “그 사람도 죽였어?”

 “아직은 아니야.”

 “살려줘.”

 

 그녀에게 내밀었던 손을, 모드레드가 거두어 들였다.

 

 “제발, 모드레드, 나의 모. 우리 사이에 아직 추억과 신의가 남아있다면 내 남편을 살려줘.”

 

 그녀는 애걸했다. 자존심을 내려놓는 것은, 막연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쉽고 간단했다.

 

 “’나의 모’라고.”

 

 모드레드가 노래하듯 중얼거렸다.

 

 “그래. 나는 너의 모였고, 너는 나의 루였지.”

 

 그러나 뒤이어 나온 말은 결코 온건하지 않았다.

 

 “그걸 망친 게 누구지? 나에게서 너를, 너에게서 나를 빼앗은 게 누구야! 저기서 죽어 나자빠져 있는 칼릭스와, 빌어먹을 에스테반이야! 나는 너만 있으면 행복했을 거야. 달리 아무 바라는 게 없었지. 내 할아버지와 내 아버지가 한때나마 가졌던 그 자리, 그 이름을 나는 원하지 않았어. 폐위당한 왕의 폐위당한 왕자, 실로바스가 넨시움에게 떠맡긴 영원한 볼모, 검은 머리 이민족 여자의 아들. 그 이름만으로 충분했어. 너만 내게 있었다면, 나는 기꺼이 치욕과 멸시 속에 남은 평생을 살았을거야.”

 

 모드레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다시금, 피비린내가 자신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키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했지?”

 

 그들은 그를 모함하고, 배신하고, 죽이려 했다. 그에게서 그녀를 떼어놓았다.

 

 “그런데 내가 자비를 베풀어야 하나?”

 “……제발.”

 

 그녀는 다시 애원했다.

 

 “너는 이제 모든 걸 되찾았잖아. 네 몫뿐만이 아니라, 네 아버지와, 네 할아버지의 몫까지 되찾았으니, 그만 너의 적들을 용서해.”

 “내 할아버지는 적을 용서했기 때문에 내 백부들의 살점을 먹었고, 내 아버지는 적에게 자비를 베풀었기 때문에 왕위 계승식이 끝나자마자 목이 잘렸어. 그래서 나는 그런 실수는 하지 않으려고.”

 

 이 남자가 원래 이렇게 냉혹한 표정을 짓는 사람이었던가. 이런 잔인한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가. 용서와 자비를 모르는 사람이었던가. 냉혹하고, 잔인하며, 용서와 자비를 모르는 자를 내가 사랑했던가.

 그녀는 속으로 자기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다. 그러나 과거의 모드레드가 어떤 남자였는지, 물안개처럼 희미하다. 아름답고, 또 자신을 사랑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 이외의 것은 전부 모호했다. 그 때문에 그녀는 깔깔대며 웃고 싶어졌다. 옛사랑이란 다 그런 것이지. 물안개처럼 희미하고 모호한 것.

 

 “내 왕국 안에서 넨시움과 아스포델의 핏줄은 모두 사라질 거다. 단 한 명, 너만 제외하고.”

 

 모드레드가 다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나와, 루.”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 안에 계속 있다가는 네 속살까지 모두 핏물로 물들어버릴텐데?”

 “싫어.”

 “고집 부리지 마.”

 “싫다고 했어.”

 

 모드레드가 입술을 짓씹으며 화를 참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그녀의 눈에는 한 편의 소극(farce)처럼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왜 사랑했는지 이제는 그 이유도 기억나지 않는 지난 사랑 때문에, 남자는 되돌아왔고, 피의 왕좌에 올랐고, 사랑하는 여자의 가족과 집을 무너뜨린다. 어찌 우스꽝스럽지 않을까.

 

 “그냥 끌고 가. 전리품처럼 취해. 연인처럼 굴지마. 그 시절은 이미 끝났으니까. 그게 맞지, 국왕 폐하. 내게서 동의와 인정을 구하지 말고, 그냥 그렇게 해. 그 옛날 나는 모드레드의 루였지만, 지금 나는 네가 증오하는 넨시움의 딸이고 아스포델의 안주인이야.”

 

 그녀는 왼손 주먹을 단단히 말아쥐었다. 그 속에는 칼릭스가 끼고 있던 반지가 있다. 넨시움의 인장이다. 그녀의 아버지와 삼촌들, 오라비, 열 두 살 먹은 조카까지, 넨시움의 이름을 달고 있는 사내란 사내는 모조리 죽었으니, 이제는 그녀가 넨시움 변경백이었다.

 

 “……그래?”

 

 모드레드가 낮게 되물었다. 그리고 그가 크게 소리쳐 휘하 기사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녀는 자신 역시 이 우스꽝스러운 연극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이!”

 

 그녀는 발작하듯 소리쳤다. 더 이상 우습지 않았다.

 모드레드가 기사의 손에서 네 살 난 아이를 받아드는 것이 마임 동작처럼 느리고 과장되게 보였다.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토록 빠져나가기를 거부했던 피의 호수에서, 그녀는 정신 없이 달려나왔다. 젖은 드레스 자락이 몇 번이나 다리에 엉켰다. 그녀는 결국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았다.

 

 “쓰레기 통에 넣어 유모와 함께 뒷문으로 도망시킨 건 기발한 생각이었어. 하지만 도망치는 일이라면 너보다는 내가 한 수 위잖아?”

 

 모드레드가 아이의 뒷덜미를 잡아채 허공에 대롱대롱 늘어뜨렸다. 아이가 자지러지게 울부짖었다. 그는 아이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너를 닮았네. 다행이야. 에스테반의 낯짝과 비슷했다면 보자마자 돌로 머리를 깨버렸을텐데.”

 “그만해! 그 애를 놔줘!”

 “정말 뜻밖이야, 루. 나는 네가 자식 때문에 울부짖는 여자가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거든. 그래서 조금 실망스럽기도 해.”

 

 모드레드가 아이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녀는 차라리 졸도하고 싶었다.

 

 “넨시움과 아스포델의 씨를 말리겠다고, 내가 방금 전에 얘기했었지?”

 

 모드레드는 몸을 낮춰 그녀와 눈을 맞췄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잔혹한 것을 말하는데, 그의 눈빛은 사랑을 속삭일 때처럼 아주 부드러웠다. 그의 눈을 보자,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고백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네 애야.”

 

 정말? 그렇게 묻듯 모드레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스포델의 씨가 아니라, 실로바스의 씨라고.”

 

 다시 한 번 똑똑히 말해주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부드득 이를 갈아붙였다. 그 소리가 필시 모드레드의 귀에도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모드레드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활짝 웃었다.

 

 “그렇군.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그 옛날 모드레드의 무엇을 사랑했는지 기억해냈다.

 모드레드의 지금과 같은 모습을 사랑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네가 한낮을 새벽이라고 하면 새벽인 거고, 저 태양을 달이라고 한다면 달인 거지.'

 '네가 나를 마녀의 아들이라 부른다면 나는 마녀의 아들이 되고, 네가 나를 왕자라고 부른다면 왕자가 되지.'

 

 모드레드가 그녀의 아이를 고쳐 안았다. 뒷덜미를 잡아올리던 아까의 손길과는 다르게, 새끼 고양이를 어르듯 조심스러웠다.

 

 “너와 내 아이라고?”

 

 아이의 부드러운 금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모드레드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잠시 긴장했으나, 모드레드가 다른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끌어당겼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잊었다. 그녀는 그의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어쨌거나 그녀의 연인은 그녀에게 되돌아왔다.

 이 짧은 순간만큼은, 그것에 기뻐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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