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연산군 12년(서기 1506년) 9월 초하루 자정*
1. 꽃님이 (1) - ①
꽃님은 강녕전(임금의 침전이 있는 전각)이 처음이다. 아니 생각시가 강녕전에 든 것은 꽃님이 처음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꽃님은 자꾸만 작아지는 마음에 앞에 받쳐 든 쟁반 위로 얼굴을 파묻는다. 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쟁반을 덮은 하얀 보자기가 숨죽여 하늘거린다. 보자기와 쟁반사이로 새어나오는 수정과의 알싸한 향이 코를 간질인다. 부엉이 울음소리가 꽃님이 지나치는 기둥마다 휘감으며 똬리를 틀었다가 아지랑이처럼 사라진다.
모퉁이를 돌던 꽃님은 멈칫했다. 저만치 앞에서부터 뻗어 나온 사람의 그림자가 꽃님의 발에 머리를 밟힌 채 흐늘거리고 있었다. 꽃님은 눈을 힐끗 치떠서 앞을 살폈다. 상선과 나인 둘이 침전 문 앞에서 숙직을 서고 있었다. 꽃님이 밟고 있던 건 침전 안의 촛불이 만들어낸 그들의 그림자였다. 꽃님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
그리고 다시 마룻바닥에서 삐걱거리는 소리라도 날 새라 조심조심 발을 내딛었다.
침전 앞에 다다른 꽃님은 쟁반을 받쳐 온 자세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숨죽여 기다렸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록 임금에게 고하는 상선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꽃님은 슬그머니 눈알을 굴려 좌우를 흘끔거렸다. 나인들은 마치 꽃님이 온 것을 전혀 모르는 양 시치미를 뚝 잡아떼고 있었다.
꽃님은 다시 눈을 위로 힐끗 치떠서 정면을 살폈다. 하지만 바로 흠칫 놀라며 얼굴을 도로 보자기 위에 파묻었다. 상선이 장승처럼 서서 꽃님을 향해 눈을 부라리고 있었던 것이다. 꽃님은 손이 떨려 하마터면 쟁반을 놓칠 뻔 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얼른 자신이 뭘 잘못한 건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상, 상선 나리, 고해주십시오. 수정과를 가지고 왔사옵니다.”
상선은 그제야 성에 차 하며 입 꼬리가 히쭉 올라갔다.
“전하, 수정과를 가지고 왔사옵니다.”
그러자 안에 있던 임금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꾸했다.
“오, 그래? 어서 들이거라.”
꽃님은 귀가 쫑긋 세워졌다. 임금의 목소리는 낮고 엄숙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은근히 높으면서도 가늘었다.
이윽고 미닫이문이 나인들의 손에 의해 양쪽으로 천천히 잡아끌리며 열렸다. 방안의 밝은 기운이 점차 그 본모습을 드러냈다. 꽃님은 왠지 모를 낯설음과 두려움에 고개가 더 수그러들었다. 그 모습을 본 상선은 곧장 다시 눈을 무섭게 부라리며 꽃님을 쏘아붙였다.
“뭣 하느냐? 어서 들이지 않고?”
상선의 호통에 찔끔한 꽃님은 저도 모르게 눈이 질끈 감겼다. 그러자 임금은 인자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꽃님을 달랬다.
“허허허, 어려워 할 것 없느니라. 어서 이리 가지고 오너라.”
임금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꽃님은 마치 혼내는 어미를 피해 할미의 품으로 달아나는 아이처럼 저도 모르게 후다닥 방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 자신이 방안으로 들어와 있음을 깨달았을 땐 이미 나인들이 방문을 닫기 시작한 뒤였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에 지레 움찔해버린 꽃님은 발뒤꿈치가 저절로 살짝 들렸다. 얼른 발을 앞으로 내딛지 않으면 곧 중심을 잃고 엎어질 것만 같았다. 이에 어쩔 수 없이 냉큼 아뢰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저, 전하. 수정과를 올리겠나이다.”
“그래, 어서 가져 오너라.”
임금은 그러면서 마른 침을 한차례 꿀꺽 삼켰다. 그 모습을 슬쩍 보게 된 꽃님은 속으로 ‘전하께서 목이 많이 타셨나보다’라고 생각했다.
꽃님은 임금 지근거리에 꿇어앉으며 쟁반을 옆으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쟁반을 덮고 있던 보자기를 조심조심 걷어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조심스럽게 걷어낸다는 것이 너무 느렸던 탓인지, 그만 보자기 한 귀퉁이가 수정과에 닿고 말았다. 보자기 귀퉁이 전체가 손 쓸 틈도 없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어 번졌다. 기겁한 꽃님은 바로 임금 앞에 납죽 엎드리며 빌었다.
“저, 전하, 살려주시옵소서. 다, 당장 다시 가지고 오겠나이다.”
하지만 꽃님은 다시 일어나지 못한 채 벌벌 떨기만 했다. 임금의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 잘못 고개를 들었다간 자칫 무슨 경을 치게 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임금의 목소리는 변함없이 인자했다.
“괜찮다. 그냥 이리 다오.”
“하오나…….”
“괜찮대도 그러는구나. 어서 다오.”
결국 망설이던 꽃님은 하는 수 없이 다시 쟁반을 들어 수정과를 임금 앞에 올렸다. 임금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사발을 덥석 집어 들고는 심한 갈증에 시달렸던 사람인 양 수정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 시원하다.”
단숨에 수정과 한 사발을 뚝딱 비워버린 임금은 마치 술을 한 동이나 비운 사람처럼 호들갑을 떨며 소매 깃으로 입술과 수염에 묻은 수정과를 닦아 냈다. 하얀 소매 깃이 수정과의 붉은 빛깔로 엷게 물들어 번졌다. 수정과를 훔쳐내는 임금의 소매 뒤로 보일 듯 말듯 입 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한편 이대로 죽게 되는 건 아닐까 잔뜩 겁을 집어먹었던 꽃님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빈 사발을 받아 다시 쟁반에 올려 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소녀는 이만 물러나겠나이다.”
그런데 그 순간 임금의 팔이 앞으로 쭉 뻗어 나오더니 꽃님의 손목을 덥석 붙들었다. 꽃님은 하얗게 질려 도로 방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저, 전하!”
임금은 여전히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더 있다 가려무나. 이름이 무엇인고?”
“꽃, 꽃님이라 하옵니다.”
“그래? 고운 이름이구나. 올해 나이는 몇이더냐?”
“여, 여덟 이옵니다. …… 전하, 손을…….”
“신경 쓰지 말거라. 내 너를 어여삐 봐서 그런 것이니.”
그렇게 말하는 임금의 다른 쪽 손은 어느 새 꽃님의 손등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러면서 눈은 엎드려 있는 꽃님의 자태를 찬찬히 훑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갈래진 생머리는 비단결 같이 윤이 났고, 저고리 틈으로 드러난 목덜미에선 눈처럼 은은한 광이 났다. 마침내 시선이 치맛자락에 이르자, 임금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가 싶더니 갑자기 꽃님의 손을 홱 끌어당겼다.
꽃님은 순간 팔이 빠지는 것 같은 고통에 눈이 질끈 감겼다. 하지만 티를 냈다간 자칫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입 밖으로 나오려던 비명을 얼른 속으로 삼켰다. 그러고는 당겨지는 그대로 끌려가 임금의 품안으로 풀썩 안겼다.
임금은 꽃님을 덥석 끌어안았다. 그리고 손으로 꽃님의 허리며 엉덩이며 몸 여기저기를 정신없이 더듬기 시작했다. 어깨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엉덩이로, 임금의 손놀림은 거침이 없었다. 그러다 어느 새 숨소리마저 거칠어진 그때, 임금은 별안간 꽃님을 다시 콱 움켜 안으며 꽃님의 귀에다 대고 싸늘하게 속삭였다.
“지금부터 네 목소리가 조금이라도 문 밖으로 새어나간다면, 네년은 이 방에서 살아나갈 수 없다. 알겠느냐?”
꽃님은 온몸에 소름이 좍 끼쳤다.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또 임금이 왜 이러는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거친 손과 섬뜩한 목소리가 한없이 두렵기만 할 뿐이었다. 도망치고 싶은데 도망치지 못해 엄습해오는 조바심과 두려움이 눈시울에 아롱져 배어나왔다.
임금은 이태 전 궁궐 담벼락 근처에서 시커먼 구렁이가 하얀 새끼 쥐를 잡아먹는 것을 본 일이 있었다. 발견되었을 때 이미 허리까지 삼켜져있던 그 쥐는 앞다리를 버둥거리며 구렁이의 아가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을힘을 다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원래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곧 닥칠 죽음에 대한 공포로 충혈이라도 되어 있었던 것인지 모를 새빨간 쥐의 눈이 임금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그러다 일순간 쥐의 눈이 임금의 시선과 마주쳤다. 좁쌀만한 눈망울이 마치 사람의 그것인 양 애절하게 흔들렸다. 쥐는 도와 달라 애원이라도 하는 것처럼 임금을 향해 찍찍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눈가에 눈물까지 스며 나왔다.
이런 미물에게도 눈물이 있다니!
임금은 신기한 마음에 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잠시 후 돌연 발버둥을 멈춘 쥐가 눈을 끔뻑 감았다가 떴다. 그러자 잔에서 술이 넘치듯 눈시울에 눈물이 고여 들었다가 이내 주르륵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더니 끝내는 모든 걸 체념한 듯 몸을 축 늘어뜨렸다.
꾸울꺽 꾸울꺽.
쥐는 구렁이의 목구멍 속으로 순순히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구렁이의 뱃속으로 완전히 삼켜졌다.
임금은 그때의 흰쥐의 얼굴이 지금 눈앞에서 눈물이 그렁그렁해져 있는 꽃님의 얼굴 위로 겹쳐져 보였다. 그러자 저도 모르게 입가로 음흉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의 혀가 꽃님의 눈두덩을 날름 핥았다. 흠칫 놀란 꽃님은 눈이 질끈 감겼다. 그 순간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뺨 위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러다 임금의 혀로 올라타서 목구멍 속으로 꿀꺽 넘어갔다. 혀끝에서 느껴지는 눈물의 짭조름한 맛이 아직 입안에 남아 있던 알싸한 수정과의 향과 섞여 묘하게 시큼 거렸다.
쩝쩝쩝.
그 맛은 여느 여인네들에게서 느껴왔던 향취와 비슷하면서도 색달랐다.
이런 아이에게도 여인의 맛이 있다니!
순간 주체할 수 없는 욕정에 휩싸여버린 임금은 꽃님의 옷고름을 단숨에 풀어 헤쳤다. 옷고름 사이로 뽀얀 살결이 드러났다. 하지만 앙가슴 따윈 찾아볼 수 없는 여덟 살 난 아이의 가슴팍만으로는 임금의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엔 아예 저고리를 확 벗겨 옆에다 던져버리고는 곧바로 치마, 속치마, 버선 등 손에 잡히는 대로 쉼 없이 벗겨대기 시작했다.
꽃님은 눈 깜짝할 사이에 완전히 발가벗겨졌다. 하지만 여덟 살 여자 아이는 사내 앞에서 벗겨진 몸의 어디를 가려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아니 가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꽃님은 문득 조금 전 보자기를 수정과에 적신 것에 대한 벌을 지금 받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꽃님은 매를 맞을 때 손으로 막거나 피하려 들면 더 크게 혼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벌은 처음이었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려면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대답하는 것이 상책이다, 꽃님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면서 어서 이 순간이 지나가기만을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임금은 알몸이 된 꽃님을 천천히 이불 위로 눕혔다. 그리고 방금 전 느꼈던 여인네의 향취를 마저 더 찾아내기 위해 꽃님의 살결에 코를 파묻고 목덜미에서부터 정신없이 훑어 내리기 시작했다.
꽃님은 간지러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임금의 콧김이 간지를 때마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혹여 떠는 게 들키면 더 혼이라도 날까 싶어 눈을 질끈 감고 몸에 잔뜩 힘을 주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무리 힘을 주어도 임금의 콧김이 닿을 때마다 몸이 부르르 떨리며 힘도 같이 스르륵 빠져나가 버렸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을까? 순간 꽃님은 몸통 아래, 아니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강한 떨림이 등골을 타고 머리끝까지 치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한번 온 떨림은 이전과는 달리 다시 멈춰지지가 않았다. 이후로도 꽃님의 몸은 마치 오한이 든 것처럼 계속 파르르 파르르 떨렸다.
꽃님은 그제야 지금 이것이 벌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점점 또렷해질수록 꽃님의 눈동자는 차츰 더 커져갔고 초점은 흐려졌다.
꽃님의 고개가 힘없이 옆으로 돌아갔다. 하얀 보자기에 졌던 수정과의 붉은 얼룩이 꽃님의 텅 빈 눈동자 위에서 야금야금 전체로 번져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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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력 9월 1일 새벽 0시. 조선 시대의 하루는 子시 정각(밤11시)에 시작되기 때문에, ‘9월 1일 자시(밤11시~새벽1시의 2시간)의 한가운데인 자정(子正)’은 현대의 음력 시간 계산법으로 ‘9월 1일이 끝나는 밤 12시’가 아닌 ‘9월 1일이 시작되는 새벽 0시’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