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1만년

　 거대한 은빛 도시.

　 도시의 안쪽에는 엄청난 높이의 특색 있는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고, 그 사이사이로 각종 나무와 깔끔한 느낌의 풀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따로 놓고 생각하면 분명히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정작 같이 있는 모습을 보면 그것은 너무도 조화롭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바닥에 깔린 도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반듯했으며 거리에는 그 흔한 낙엽조차 하나도 없었다. 모든 물체에서는 은은한 빛이 나와 사방을 밝히고 있었고, 먼지가 쌓인 것이 하나도 없었다. 특이한 것은 거리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는데 거리에는 사람 대신 작고 동그란 은색 물체들이 빠르지만 안정적인 속도로 건물 사이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또 도시중심에서 바깥쪽으로 나올수록 높은 건물보다는 낮은 건물들이 많았으며 도시의 가장 바깥쪽에는 도시를 보호하려는 듯, 투명한 은빛의 구가 도시 전체를 투명하게 감싸고 있었는데 신기한 것은 은빛 구를 기준으로 바깥의 날씨와 안쪽의 날씨가 전혀 다르다는 것이었다. 현재 구의 바깥쪽은 짙은 구름과 천둥이 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쪽은 구름 한 점 없이 선선하고 날씨가 맑았다.

　 그런 도시의 중심지에서 가장 외곽에 있는 집 앞으로 은색 물체 하나가 이동해왔다.

　 “주인님, 다녀오셨습니까?”

　 날렵하고 탄탄한 몸매에 반듯한 얼굴을 가진 남자가 공중에 떠 있는 타원형의 은색 물체를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스~”

　 그러자 은색 물체에 구멍이 생기더니 그 안에서 작은 키에 커다란 머리를 가진 남자가 물체 밖으로 나왔다.

　 “아, 짜증나. 망할 꼰대 같으니! 시대가 어느 시댄데 모임을 실제로 하려는 거야? 가상 통신으로 하면 시간도 절약되고 좋을 것을 왜 자꾸 모이자고 난리인지 모르겠네!”

　 “하하, 어르신께서 주인님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그런 것 아닐까요?”

　 “뭐?”

　 “?”

　 “너 방금 뭐라고 그랬냐?”

　 “네?”

　 “방금 네가 한 말 다시 해보라고.”

　 “네? 어르신...”

　 “이 자식이!”

　 키 작은 남자가 반듯한 남자를 보며 허공에 주먹질을 했다.

　 “쾅!”

　 “컥!?”

　 그러자 키 작은 남자의 뒤에 있던 은색 물체가 갑자기 요동치더니 물체에서 물방울 모양의 구가 늘어나며 튀어나와 반듯한 남자를 저 멀리 날려버렸다. 남자는 5미터 정도를 날아가 뒤에 있던 벽과 부딪히고 바닥에 쓰러졌다.

　 “아, 이 네이처 새x, 내가 어르신이라고 하지 말라했지? 몇 번을 말해줘야 돼? 뇌가 없나? 아무리 네이처 놈들이 몸뚱이 하나 말고는 쓸게 없다지만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솔직히 동물원에서 기르는 개, 돼지랑 네놈들이 다를 게 뭐야?”

　 “크윽... 죄송... 합니다.”

　 반듯한 남자가 비틀대며 일어났다.

　 “어? 일어났어? 이야~ 너 맷집 좋은데? 보통은 이거 한 방에 온 몸의 뼈가 부서지고 죽는데 말이야.”

　 “치, 칭찬... 감사... 합니다. 케헥!”

　 키 작은 남자가 은색 물체에서 뻗어 나와 있는 구를 쳐다봤다. 그러자 구에서 방금 전, 남자를 날려버린 영상이 나오며 여러 가지 정보가 표시됐다.

　 “보자. 무게 2톤에 속도 50km. 이야, 충격량이 어마어마한데 이걸 맞고도 살다니 진짜 사람 맞아? 그냥 모습만 비슷한 거지 사실은 짐승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랑 같은 조상을 가졌다는 게 말이 안 돼. 하하, 뭐 어쨌든 좋아, 이 정도면 친구 놈들한테 자랑할 수 있겠어.”

　 “쿨럭!”

　 반듯한 남자가 피를 한 움큼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어어? 야, 죽는 거 아니지? 너 절대 죽으면 안 돼. 죽으면 나한테 진짜 죽는다? 버텨, 나 친구들한테 이미 연락했다고.”

　 키 작은 남자가 은색 물체를 다시 쳐다봤다. 그러자 은색 물체에서 뻗어 나왔던 구의 모양이 두 개로 나누어지더니 그와 비슷한 체형의 남자 두 명의 모습으로 변했다.

　 “갑자기 뭐야?”

　 “어이~ 친구들!”

　 “야, 제노! 갑자기 웬 통화야?”

　 “얘들아, 이거 봐봐.”

　 “보긴 뭘 봐? 바빠 죽겠는데 연락 막 할래?”

　 “아, 알겠으니까 우선 이거나 보라고.”

　 “뭘?”

　 “쟤는 상태가 왜 저래? 죽기 직전인데?”

　 “아, 쟤 말고 이 영상이나 보라고.”

　 “응? 웬 영상?”

　 제노의 앞에 아까 반듯한 남자가 맞고 날아가던 영상이 다시 재생되었다.

　 “쾅!”

　 “오?”

　 “이거, 방금 전이야?”

　 “그래. 방금 전이라고!”

　 “저걸 맞고 일어났어? 이야~ 너 이번에 장난감 제대로 골랐나보다?”

　 “그렇지? 봤냐? 내 안목이 이 정도야!”

　 제노가 가슴을 치며 허세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계속 허약한 놈들만 데리고 있길래 똥 눈인 줄 알았더니 제법인데? 야, 이번 모임에 걔 데리고 와봐. 우리 애랑 붙으면 재미있겠다.”

　 “좋지! 너도 이번에는 긴장 좀 해야 될 걸? 쟤 맷집 봤지? 저번이랑은 다를 거다.”

　 “참나, 제발 좀 그래라. 저번에는 네가 데리고 있던 애가 1라운드도 못 버티고 죽어서 놀러온 사람들이 다 욕했었다고.”

　 “그때는 잊어. 이번이 진짜니까!”

　 “야, 근데 쟤 괜찮은 거 맞아? 일어나지도 못하는 게 금세 죽을 것 같은데?”

　 “무슨 소리야! 지금은 내가 쉬고 있으라고 해서 잠깐 쉬고 있는 거라고.”

　 “그래? 그럼 일어나라고 해봐.”

　 “알았어. 기다려 봐. 야, 일어나 봐.”

　 “네, 알겠... 습니다.”

　 반듯한 남자가 일어나려고 애썼지만 일어나지 못하고 계속해서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뭐야 못 일어나잖아.”

　 “그러게. 조금 있으면 죽겠네. 에이, 괜히 기대했네. 야, 나 바쁘니까 끊는다.”

　 “어? 야! 야! 잠깐만! 기다려 봐!”

　 제노가 일어나지 못하는 반듯한 남자를 보며 말했다.

　 “야, 너 만약에 지금 일어나면 내가 이름 지어준다! 그러니까 빨리 일어나.”

　 “올~ 이름까지? 야, 아무리 그래도 안 되던 게 되겠냐? 포기해.”

　 반듯한 남자가 이름이란 말에 눈을 부릅떴다.

　 ‘이름...!! 이름만 부여받으면 우리 가족들이 편하게 살 수 있어.’

　 “크으으...”

　 반듯한 남자가 입에 묻은 입술을 닦아내며 이를 악 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네이처들에게 이름이란 일종의 계급으로서 ‘이름 없는 네이처’가 짐승취급을 당한다면 ‘이름 있는 네이처’는 ‘준 인간’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오? 일어난다. 일어나! 이야!!”

　 “좋았어! 잘한다! 힘내라!”

　 “크윽!”

　 “털썩!”

　 천천히 일어나던 남자가 기어코 일어나지 못하고 제자리에 쓰러졌다.

　 “에이, 뭐야. 역시 안 되네. 네가 그러면 그렇지. 야, 나도 끊는다. 수고.”

　 “어? 어? 아니. 야! 야!!”

　 사람의 형태였던 은색의 물체가 다시 구체로 돌아갔다.

　 “아아악!! 야, 너 어쩔거야? 너 때문에 나만 바보 됐잖아!”

　 “크윽... 죄송합니다.”

　 “하아...”

　 “죄송...”

　 “아니, 그럴 필요 없어. 꺼x.”

　 제노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반듯한 남자를 보며 허공에 손바닥을 내려치는 모션을 취했다.

　 “아... 아... 살려...”

　 제노의 뒤에 있던 은색물체가 넓은 판 모양으로 변하더니 반듯한 남자의 머리 위를 향해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그 때였다.

　 “슈욱~ 펑!”

　 “지이잉!!”

　 은빛 물체의 위로 자그마한 무언가가 날아오더니 공중에서 폭발했다. 그리고 그것이 터지며 은빛 물체의 사방 10미터정도가 충격파에 휩싸였다.

　 넓은 판 모양으로 변했던 은빛 물체가 순식간에 네모난 방패로 변하여 제노를 보호했다.

　 “큭!”

　 제노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잠시 후, 제노가 손을 치우며 정면을 쳐다봤다.

　 “뭐야!?”

　 제노가 정면을 쳐다보자, 반듯한 남자의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제노가 그 남자를 유심히 쳐다봤다.

　 “넌 뭐야? 덩치를 보니 네이처 같은데 여기는 어떻게 온 거야? 주인은 어디 있고? 방금 저건 네가 한 거냐?”

　 제노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는데? 하하, 뭐야 탈주 네이처인가? 잘 됐군. 안 그래도 저놈 폐기하면 새로 사야했는데 다른 게 공짜로 생겼네. 야, 근데 그 우스꽝스런 녹색 갑옷은 뭐냐? 어디 전쟁이라도 가? 얼씨구? 나름 보석도 박혀있네? 캬~ 네이처에 보석이라니, 꿩 먹고 알 먹기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제노가 그들을 보며 두 손을 감싸는 모션을 취했다. 반듯한 남자가 그 모습을 보고 경기를 일으켰다.

　 “히익!”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이번에는 은빛 물체가 방패에서 더 이상 다른 모양으로 변하지 않았다.

　 “뭐야? 고장인가? 설마, 얍! 얍!”

　 제노가 은빛 물체를 보며 손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뭐야? 진짜 고장인가? 에이, 짜증나. 나중에 항의 전화 좀 해야겠네. 이게 돈이 얼마짜린데 이렇게 만들어? 에이, 할 수 없지. 비상통신.”

　 제노가 은빛 물체로 다가가 은빛 물체를 만졌다. 하지만 은빛 물체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제노가 인상을 찌푸리며 반듯한 남자에게 명령 했다.

　 “하, 스트레스... 오늘 진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야, 너 가서 사람 좀 불러 와.”

　 제노가 그러거나 말거나, 녹색 갑옷을 입은 남자는 자신의 어깨에 박혀있는 녹색 보석을 뽑아 반듯한 남자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걸 들고 있게. 상처가 더 빨리 회복될 걸세.”

　 반듯한 남자가 녹색 보석을 손에 들자 보석에서 녹색 빛이 흘러나와 그의 몸을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잠시 후, 녹색 빛이 그의 온몸, 특히 상처 부위에 위주로 스며들며 남자의 표정이 편안하게 변했다.

　 “모, 몸이 괜찮아졌어. 어떻게 이런 일이...”

　 방금까지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만졌다.

　 그 모습을 본 녹색갑옷 남자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일족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자네 이름이 뭔가?”

　 “이, 이름은 없습니다.”

　 “그런가?”

　 녹색갑옷 남자가 아무렇지 않은 듯, 평온한 표정으로 반듯한 남자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하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그가 지금 매우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그 보석을 잘 관리하게. 자네는 그것을 사용할 자격이 누구보다 있어.”

　 “이, 이것을요?”

　 “그렇다네.”

　 녹색갑옷 남자가 반듯한 남자를 보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야! 내말 듣고 있냐? 가서 사람 좀 불러오라고!”

　 제노가 계속해서 자신을 무시하는 그들을 보며 소리를 꽥 질렀다. 녹색갑옷 남자가 뒤돌아서 무표정한 얼굴로 제노를 쳐다봤다.

　 “뭘 봐? 야, 너 오늘 운 좋다? 지금 이것만 됐어도 바로 교육 들어가는 건데. 쩝... 지금은 놔줄 테니까 얼른 꺼져라. 하아~ 내가 그러면 그렇지. 운이 좋기는 개뿔!”

　 제노가 녹색갑옷 남자를 보며 진심 아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곧장 반듯한 남자를 보며 불같이 화를 냈다.

　 “야, 너 이 개 자식! 내 말을 몇 번이나 무시했지!? 그리고 아까는 일어나지도 못하는 척 하더니.. 감히 나에게 사기를 쳐? 너 나 친구들한테 물 먹으라고 일부러 그런 거지? 어? 잘 알았어. 너 조금 있다가 두고 보자!”

　 “아, 아닙니다. 주인님, 오해십니다.”

　 “오해는 무슨 오해. 딱 기다리고 있어! 이게 누굴 바보로 아나?”

　 제노의 으름장에 반듯한 남자의 눈이 공포로 물들었다.

　 “네놈은 상종할 가치도 없는 쓰레기다.”

　 녹색갑옷 남자가 제노를 보며 나직이 말했다.

　 “뭐!? 쓰레기? 내가 잘 못 들었나? 이 노예 놈이 뭐라는 거야? 야, 너 미x어? 너 지금 내가 저거 못 쓴다고 이러는 거냐? 하, 나 참! 돈도 아낄 겸, 생포하려고 했더니 안 되겠네. 그냥 죽여주마.”

　 제노가 자신의 뒷목을 몇 번 누르더니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녹색갑옷 남자에게 손을 뻗었다.

　 “죽어라!”

　 “......”

　 하지만 이번 역시 제노에게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제노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그리고는 다시 자신의 뒷목을 눌렀다.

　 “응? 뭐야? 왜 안 나와? 설마 생체무기도 고장 났다고? 갑자기? 이게 말이 돼?”

　 “쓰레기.”

　 “어? 너 또 쓰레기라고 했어? 넌 진짜 편하게는 못 죽을 줄 알아라!”

　 녹색갑옷 남자가 제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어? 어? 야, 잠깐만!”

　 제노가 손으로 자신의 뒷목을 툭툭 쳤다. 녹색갑옷 남자와 제노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야! 너 나한테 손대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 네이처가 펙터한테 손대면 네이처들 다 죽는 거야!”

　 “그런 건 네놈이 신경써주지 않아도 된다. 오늘부로 너희 펙터는 모두 우리에게 죽을 테니 말이야.”

　 “뭐, 뭐라고?”

　 눈을 동그랗게 뜬 제노의 머리 위로 아까 은빛 물체의 위에서 터졌던 것과 비슷하지만 크기는 몇 십 배나 큰 물체가 도시의 중앙으로 올라가더니 폭발했다.

　 “콰아아앙!!”

　 “으윽!”

　 제노가 충격파에 괴로워하며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그런 제노의 앞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너! 너! 이 미x놈! 도대체 무슨 짓...”

　 “퍼석!”

　 “털썩!”

　 “헉!”

　 제노는 끝내 자신의 말을 마치지 못했다. 왜냐하면 녹색갑옷 남자의 손이 제노의 머리를 두부 으깨듯이 으깨버렸기 때문이었다.

　 “저, 저기 도와주신 건 감사합니다. 하지만 어쩌시려고...”

　 녹색갑옷 남자가, 걱정 가득 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반듯한 남자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말게. 오늘부터 모든 게 달라질 테니.”

　 “뭐가 말입니... 헉!!”

　 녹색갑옷 남자가 그 말을 끝으로 도시의 중심을 향해 이동했다. 분명히 천천히 걸어가는 것 같이 보이건만 남자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그의 모습이 순식간에 작아졌다. 반듯한 남자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소리쳤다.

　 “저, 저기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성함을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성현이네.”

　 분명히 녹색갑옷 남자의 모습은 저 멀리 사라졌지만 그의 목소리는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1초도 지나지 않아, 그의 뒤로 녹색 갑옷을 찬 수백의 사람들이 나타나 그가 갔던 방향으로 사라졌다.

　 “투둑!”

　 “비?”

　 반듯한 남자가 얼굴에 떨어지는 빗줄기에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에는 어느 샌가 은빛의 구가 사라지고 바깥에서 치고 있던 천둥, 번개가 도시 중심지를 향해 몰아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