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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천사의 딸
작가 : 업무용계정
작품등록일 : 2017.6.30

여신 프레이즈의 성스러운 땅 오를레앙 왕국, 평범한 시골마을의 처녀 라벤더와 그 남동생 헨리는 마을을 둘러싼 산에서 기이한 아름다움을 가진 이들을 만나게 된다. 오직 거룩하게 살고 싶었던, 선으로 남고 싶었던 우리들의 소리.
영혼을 먹는 '마녀',마녀를 사냥하는 '수정회', 그리고 '무언가', 세상의 균형을 맞추는 가장 잔인한 방식에 대한 이야기.

 
00.Occursus prodigiosum
작성일 : 17-07-23 23:13     조회 : 446     추천 : 0     분량 : 2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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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하얀 세상이었다.

  눈처럼 침묵이 켜켜이 내려쌓였다. 숲도 예외는 아니었다. 차가운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땅은 깡깡하게 얼어붙었다. 하얘진 땅 위로 또다시 눈보라가 흩날렸다. 겨울에 이런 궂은 날씨는, 그것도 숲에서는, 사람 한 명의 목숨은 충분히 앗아갈 수 있는 것이었다. 폭설엔 건장한 장정이라 해도 함부로 산을 타선 안 되는 법이다.

  그러나 어차피 잃을 목숨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야기는 달랐다.

  여자는 숨을 삼키며 울음을 참았다. 울면 체온이 빠져나가고, 체력이 고갈되니, 이대로 눈 속에 파묻혀 죽고 말 거였다. 눈에 쓸려 죽을 뻔한 적은 없었으나 본능적으로 알았다. 지금의 도망은 본능적인 것이 아니었지만. 여자는 살고자 했다. 살기 위해선 차라리 이 편이 나았다. 생명을 모두 집어삼키는 거친 눈폭풍이라 할지라도, 여자만을 노린 살기등등한 시선보다는 나았다. 휘몰아치는 눈보라 안에 있는 편이 생존확률이 높았다.

  교수대에 서면 당연히 죽고 말 테니.

 

  문득 여자는 자기가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사방이 눈보라였다. 들판은 눈이 시리도록 새하얘서, 여자는 자기가 어디로 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지금껏 다리를 끌고 왔을 곳이 보이지 않았다. 이제 죽는가? 눈 때문인지 기분이 담담했다. 얼굴도 땅처럼 얼어버린 모양이지, 여자는 앉았다. 이제 죽겠지, 기억 속의 남편이 철없이 웃었다. 당신은 당신과 내가 이렇게 되리라곤 생각조차 못했겠지, 부드러운 척 하는 거친 자들이 여자의 손목을 잡고, 윽박을 지르며, 대체 언제까지 살아있을 속셈이냐? 그렇게 물었다.

  당시엔 대답하지 않았지만, 여기까진가 보았다. 그래도 그자들의 손에 생을 마감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더러운 자들. 세상의 온갖 눈을 자기가 뒤집어쓴 체를 하고선, 그림자의 심연에 영혼을 묻어버린 자들. 언제 묻었는지도 모를 그 영혼이 모두 썩어 버렸기를, 꺼내자마자 끔찍하게 꺼먼 진흙으로 손가락 사이를 날름거리기를 여자는 빌었다.

  영혼을 가질 자격이 없는 자들이야. 여자는 생각했다. 그들은 죄다 죽어 버려야지. 그런 자들은 전부 죽어 버려야 해. 눈앞이 깜깜해진다. 들려오던 눈소리가 잠잠해진다. 그런 자들은 모조리 매장시켜 버려야지.

 

  손톱이 빠지는지도 모르고 흙을 파냈다. 피가 섞여든 돌흙 아래로 창백한 남편이 보였다. 몸 안을 돌던 피가 쑥 가라앉았다.

  어지러웠다.

 

  순간 기묘한 쇳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그래, 매장시켜 버려야 해.

 

  앗!

  여자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소리가 새어나왔다. 방금까지 얼어 죽어가던 것조차 잊고, 몸은 재빠르게 반응했다. 주저앉은 채 뒤로 물러서던 여자는 손을 헛디뎠다. 쌓인 눈이 푹 꺼지며 여자를 덮쳤다. 몸은 하나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눈 따위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눈에 묻힌 채, 여자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경악으로 벌어진 눈이 보고 있는 것은 어떤 낯익은, 낯설지 않은, 기억에 차 있던.

 

  -그대를 그렇게 만들다니 전부 사라져 버려야지, 그렇지?

 

  여자는 금방 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분명 쇳소리라고 생각했던 음성이 어느새 듣기 좋은 미성으로 바뀌어 있었다.

 

  -걱정하지 마. 나는 그치들과는 달라.

 

  남편의 모습을 하고-

 

  "-악마가 씽긋, 웃었어."

 

  라벤더가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리자, 덩달아 헨리의 눈은 초롱초롱해졌다. 다음엔 무슨 말이 나올지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는 남동생이 귀여웠던지, 라벤더는 장난스럽게 웃더니 손을 번쩍 치켜들고 일어섰다.

 

  "왁!"

  "아아아악!"

 

  높고 째지는 비명소리와 함께 헨리가 자지러졌다. 뒤로 벌러덩 넘어진 헨리는 허둥지둥 이불을 찾아 머리에 덮어썼다. 누나를 보는 눈이 불안하게 떨리나 싶더니, 곧장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라벤더가 깔깔 웃음을 터트리며 헨리를 끌어안았다. 헨리도 제법 힘이 센 편이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어린애여서, 자기보다 세 살 많은 누나 품을 함부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벗어나기가 무섭기도 했다. 헨리는 계속 발버둥을 치면서도 라벤더의 옷깃을 꽉 붙잡은 채였다. 라벤더는 헨리를 안고 아기를 달래듯이 몸을 흔들었다.

 

  "쉿, 착한 아가야. 울지 마."

  "아기 아니야! 누나 싫어! 무서워, 뭐야? 진짜 진짜로 그랬어?"

 

  떼를 쓰던 헨리였지만 뒷이야기의 유혹을 뿌리치진 못했다.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않고 물어대는 헨리의 이마에 라벤더가 몇 번씩 입을 맞췄다. 저편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 마디씩 거들었다.

 

  "라벤더, 왜 얘길 해주다가 애를 울리고 그러니?"

  "얌전히 놀아라, 얘들아."

  "봐! 얌전히 놀라잖아!"

  "응응, 네가 귀여워서. 악마는 놀래키지 않았어. 그러니까 이만 뚝 하자?"

  "안 울었어! 안 울었어! 누나 말 잘 들을게, 놀리지 마. 응?"

 

  적잖이 당황해선 횡설수설하는 헨리를 보며, 라벤더는 나중엔 어떤 방법으로 헨리를 놀래켜줄지 고민했다. 하지만 일단은 이야기를 끝마치는 게 순서였다. 이미 몇 번씩 들은 이야기인데도, 헨리는 라벤더로부터 라미아 전설을 들을 때마다 눈동자를 빛냈다. 어찌나 귀여운지! 라벤더는 다시 웃었다. 참 똑같단 말이야. 라벤더 역시 이상하게 라미아 전설을 좋아했다.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 아버지에게 심심하면 그 얘길 해달라고 졸랐지.

 

  어떻게든 사람을 홀리는 괴물들이 아닌가, 라미아Lamia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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