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 나는 보폭이 다른 태엽같다고, 생각한 적이, 적지 않았다는 그러한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TV, 휴대폰, 컴퓨터.. 혹은 일과 중에서도 내 시선에 항상 그녀가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었으므로 그녀를 생각하지 않은 적이 오히려 드물다고 나는 자부할 수 있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아마 이렇게 비참하게 깨진 것도 그 때문이리라고 어림짐작, 아니 사실 확신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정말로 비참해야하고 또 비참할 사람은 방금 내게 헤어지자고 말한, 한 시간 전까지 연인이었던 그녀일 테지만 나 또한 그렇다고 느끼는 것은 변심한 연인을 붙잡아야한다는 절박함이나 구차함보다, 앞에서 담담한 척 끊어져가는 말을 이어가는 그녀의 요동치는 어깨를 감싸지 못하는, 용서를 구하며 잘못을 빌고 영원할 사랑을 속삭일 수 없는, 다른 사람의 얼굴을 나의 행복 속에 그녀보다 더 짙게 그리고 있었던 내 처지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내 지랄맞은 상황 때문일 것이다.
어줍잖은 동기들의 위로나 선배의 충고는, 애초에 받을 자격조차 없다는 것을 알고있는 까닭일까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사람들안에서 혼자 있는 느낌, 공허함 아니면... 어떤 말로 표현해야할지 모르는 멜랑꼴리한 감정이 설켜있는 듯 했다. 넘기는 술 한잔마다 성냥 한 개비마다 환상을 보았다던 성냥팔이 소녀마냥, 청승맞게 이별을 고하던 그녀의 마지막 표정, 숨소리, 눈빛,말들을 되새김질하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만 둘 수는 없었다.
"...그만해"
"...놔요"
팔을 잡아채는 손을 뿌리쳤다. 내 흐릿한 시선에도 그는 어딘가 성나있어 보였다.
"...미안해요.."
형은 아무 말없이 나를 가만히, 마치 먼 곳을 쳐다보는 것처럼 쳐다보았다. 내가 한 잔씩 삼킬때마다 그도 뭔가를 진득히 삼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을까 서서히 주변의 사람들은 자리를 떴고 형과 나만이 자리에 박혀있듯이 머물러있었다.
"여기 소주 한 병만.."
"그만해"
똑같았다. 내 팔을 처음 잡았을 때부터 가만히 수많은 생각을, 어떤 말을 해야할 지를 생각하고 있었을 거란 내 추측이 빗나간듯했다.
"형 유정이 좋아했..."
"닥쳐"
눈앞이 요동쳤다. 아릿한 느낌이 뺨에 남아있지만 무디다. 술이 많이 됬나 뺨을 매만지는 감각도 무디다.
또각거리는 소리가 내 앞에서 그쳤다.
"가자 계산했다"
"형..."
"제발 닥치고 있어"
그는 바닥으로 굴러떨어져 엉거주춤 몸을 가누지 못하고 앉아있던 나를 걸쳐 업고는 덤덤하게 걸어갔다. 쿨하다라고 할 정도가 아니였다.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겨울 바다같이 차분히 가라앉아있는 듯 했다.
"...나 싫지않..아?"
우뚝
순간 모든게 멈춘듯했다. 그는 걸음을 재촉하던 자세 그대로 얼었다.
고개를 돌려 눈을 맞췄다.
"...군대나 갔다와 이 새끼야 "
그때 어렴풋이 느낀 것 같았다.
속으로는 매서운 칼바람에 온전히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그렇기에 잔잔해 보이는 겨울 바다는 무섭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