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들 앞에서 폐위된 황제 아멜리아 프렌시스를 처형하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전부 믿기는 힘들겠지만, 이 모든 일은 아멜리아 프렌시스에게 실제로 벌어진 마법 같고도 저주 같은 일이다. 방금 그 말은 단두대 앞에 끌려 나온 아멜리아가 마지막으로 들은 것이었다. 바로 어제까지 명예의 국가 이스트의 황제이던 아멜리아가 폐위된 황제라니. 더욱 어이가 없는 건 반란으로 그를 몰아내고 황제를 처형하라 당당하게 말하고 있는 사람이 아멜리아의 하나뿐인 동생이자 신뢰하던 기사단장, 엘라라는 사실이다. 그 옆에 국서의 왕관을 쓰고 웃고 있는 건 아멜리아가 가장 아끼던 후궁인 셰인. 그 순간이 되어서야 아멜리아는 비로소 직감했다.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나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이 개운하게 비워지는 기분이었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신의 마지막 은총을 내려주신 것처럼. 욕심이 많은 셰인은 늘 국서의 자리를 원하고 있었다는 것. 엘라는 처음부터 황제의 자리에 욕심이 없었지만 최근 후궁들이 머무는 ‘리브라’에 출입이 잦았다고 보고되었던 것.

　착하고 순수한 엘라가 감히 언니인 아멜리아를 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겠다는 야망을 품을 리 없었다. 생각해보니 답은 하나다. 귀엽고 순진하게 굴지만 영악하고 속물적인 셰인이 엘라를 꾀어 반란을 계획한 것이 분명했다. 아멜리아의 처형을 명하는 엘라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가여운 엘라는 아멜리아를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나의 엘라, 귀여운 나의 하나뿐인 천사. 단두대 안에 강제로 목을 집어넣어지면서 아멜리아는 셰인을 저주하며 하늘에 빌었다. 나, 이스트의 황제 아멜리아는 맹세한다고. 혹여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기필코 순진하고 귀여웠던 엘라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지켜주겠노라고. 내가 죽은 후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셰인와 귀족들에게 넘어가 망하게 될 위대한 명예의 국가인 이스트를 다시 바로 세우겠노라고. 붉은 깃발이 하늘을 향한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가린다. 밧줄이 놓아진다. 칼날이 바람을 가르는 매서운 소리와 함께, 아멜리아는 눈을 감았다.

　 ……아, 무거운 몸이 어두운 심연 속으로 무겁게 가라앉는다. 캄캄하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고, 이 어둠이 두렵기보다는 아름다웠다. 황제가 된 후에 이렇게 고요하고 편안하던 순간이 있었나? 5년 전, 선황제셨던 아버지가 일찍 그 자리를 물려주신 후 대대로 황제 가문이었던 ‘프렌시스 가문’의 장녀였던 아멜리아는 황제가 되어 이스트 제국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기반을 잘 마련해놓으셨고 그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 공정하고 평등하게 제국을 통치한 덕분에 제국의 국민들은 늘 편안하였다. 그렇기에 그들을 돌보는 아멜리아 또한 무척이나 뿌듯하고 행복했다. 국서였던 요하임은 권력에 욕심이 없고 대대로 황실에 충성하던 가문의 막내이자 오랜 동갑내기 친구였기에 믿고 의지할 수 있었다. 비록 아멜리아는 요하임을 이성적으로 사랑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우정을 진심으로 소중하게 여겼고, 요하임은 그런 아멜리아의 곁을 조용히 지켜주며 백성들에게는 두 사람은 한 쌍의 카나리아 같은 천생연분이라고 칭송받았다.

　귀족들은 서로 자신의 자식을 후궁으로 보내지 못해 안달이었고 한 자리씩 꿰차고 이스트를 조금씩 좀먹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모든 것은 냉정하고 총명한 아멜리아에게 어림도 없는 헛수작이었기 때문에 이스트는 흔들림 없이 언제나 평화로웠다. 아멜리아는 늘 자신의 몸이나 감정보다는 이스트를 최우선으로 생각했으며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인 자신의 동생, 엘라를 기사단장으로 세워 ‘프렌시스 가문’의 차녀이자 무능한 공주라는 꼬리표가 붙지 못하게 막았고 엘라에게 딱 어울리지만 성격과 외모, 가문, 지식…… 기타 등등! 부족함 없는 짝을 지어주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고 있었다. 물론 그런 완벽한 사람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한다고 해도, 사막에서 바늘을 찾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고 해도 아멜리아는 그렇게 해야만 했다. 물론, 애초에 아멜리아는 엘라의 짝으로 그 어떤 완벽함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손톱만큼 작은 흠을 찾으며 반대했겠지만. 신이 자신의 신부로 내어달라며 내려와도 성에 차지 않을 만큼 엘라는 아멜리아에게 귀엽고 사랑스러우며 예쁜 동생이었다. 그런 자신의 성격을 알기에 고민만 깊어지던 시기였고, 설상가상으로 부의 제국 웨스트와 지식의 제국 사우스가 무역 논쟁 끝에 국경 지역에서 소규모의 전쟁을 벌이고 있어 외교적으로도 예민한 시기였다.

　 그래서 엘라와 셰인의 관계에 대해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겠지. 두 제국의 싸움이 이스트에 번질까 두려웠던 국민들은 술렁였고, 외교적으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방향에서 최소한으로 이스트를 방어하기 위한 방법으로 마법의 제국 노스와 손을 잡고 노스의 황제를 만나기 위해 잠시 황궁을 비운 일주일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고작 그 일주일이! 협상을 잘 마치고 돌아왔더니 황궁은 쑥대밭이 되어있고 황제의 자리에는 엘라가, 국서의 자리에는 셰인이 당당하게 앉아있는 꼴을 본 아멜리아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이건 무슨 종류의 서프라이즈야? 아멜리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날아든 화살이 뺨을 스쳐 바로 옆 기둥에 꽂혔다. 그때 셰인이 그랬던가? ‘반란이라는 서프라이즈’라고.

　다시 생각하니 속이 거북했다. 반란을 일으킨 사람이 엘라라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아멜리아는 반항 한 번 하지 않은 채 힘없이 끌려 나가야만 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작정한 듯 처형까지는 일사천리였다. 대외적으로는 ‘황제 아멜리아가 전쟁에 대한 지원을 핑계로 노스에게 이스트를 팔아넘기려고 했다, 아멜리아는 무능한 폭군이다’라는 헛소리를 퍼트렸고 내부적으로는 장녀의 무지한 통치를 지켜볼 수밖에 없던 세상에 둘도 없이 착한 막내 –물론 엘라가 착한 것은 사실이다.- 의 반란이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만들었다.

　물론 아멜리아가 무능하지 않다는 것은 황궁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었기에 모두 믿지 않았지만 반발하던 몇은 아멜리아보다 먼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그들의 죽음을 지켜본 다수는 입을 다무는 쪽을 선택했다. 아무도 옳고 그름을 따지고 들지 않으니 그것이 사실인 듯 번져 결국에는 정의롭고 온화했던 황제 ‘아멜리아 프렌시스’가 천하의 폭군이자 쓰레기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물론 그들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사람 셋이 모이면 없는 늑대도 있는 것처럼 꾸밀 수 있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자신의 삶을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들은 ‘침묵의 삶’과 ‘죽음의 정의’ 중에 더 타당한 것을 고른 것뿐이다.

　 그런데도 가슴이 따끔거리는 건 그래도 아멜리아의 인생에서 가장 총애했던 후궁에게 배신당한 충격일까? 셰인을 진심으로 사랑했다기에는 일을 우선시하고 이성 관계에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아멜리아였으니 셰인의 입장에서는 서운하고 두려웠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애정이 없는 관계’는 금세 끊어지고 말 것이라 생각하던 셰인이었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아멜리아도 했다.

　그러나 사랑의 형태에는 여러 가지가 있고, 비록 아멜리아는 셰인을 이성적으로 아끼지 않았지만 영악하고 잔망스러운 셰인과 대화를 나눌 때면 알아서 눈치껏 분위기를 맞추고 편안하게 만들어주었으니까, 아멜리아는 진심으로 그를 신뢰하고 애정했다. 하지만 그 분위기와 안락함을 사랑했던 아멜리아와는 달리 허영심이 많고 늘 높은 지위를 원하던 셰인이 권력과 명예, 그 모든 것에 따라올 부를 마다할 리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조금 걸리는 것은 셰인이 그런 계략을 세울 정도로 총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영악하다고 해서 지식이 많고 똑똑하며 전략적이라는 뜻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늘 평등하고 정의로웠던 아멜리아를 싫어하는 머리 좋은 귀족들 몇이 셰인을 부추겼다면? 그들의 더러운 전략과 셰인의 영악한 잔머리가 만났다면…… 뭐, 셰인의 계략은 체계적이고 완벽했을 터였다.

　 순진한 엘라가 외모 준수하고 뱀처럼 영악한 셰인의 꾀에 넘어가는 일은 문제도 아니었겠지. 다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니 아멜리아는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애지중지 키운 사랑스러운 내 동생을 본인이 뭐라고 쥐락펴락해? 감히 내 동생을? 사랑스럽고 천사 같은 엘라의 손에 피를 묻혀? 이스트를 위해 뼈를 갈다가 어이없게 폭군이라는 명칭을 뒤집어쓰고 죽었다는 사실보다 그따위 짜증 나는 인간이 내 동생을 건드렸다는 게 제일 찝찝하고 기분 더러워서 아멜리아는 참을 수가 없다. 한 번이라도 더 살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곤죽을 만들어놓고 싶은데, 그건 무리겠지. 끝없는 어둠 속으로 가라앉으며 아멜리아는 셰인을 향해 온갖 욕을 퍼부었다. 그 후에는 신을 향해 건방지고 당돌하게 빌었다.

　‘그딴 놈은 살려놓고 저만 죽게 만드는 아주 상냥하고 공평한 신이시여, 명예의 국가 이스트의 황제 자리는 이미 쫓겨나 내려놓았으니 그저 불쌍한 인간 아멜리아 프렌시스의 말로 들어주시고 이스트와 제 동생 엘라에게 벌을 내리지는 말아주세요. 다음 생에 제가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면 셰인, 그 개자식을 제 침실 마룻바닥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 매일매일 밟고 다녀도 기분이 풀릴 것 같지 않으니까요. 제 사랑스러운 동생에게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하고 이런 더러운 꼴을 보지 않아도 되는 사람으로 태어나게 해주시고…….’

　그 다음은… 아, 몰라! 어차피 죽었는데 뭐 어쩌라고. 이런 소소한 소원을 전부 들어주면 신도 귀찮아서 과로사로 죽겠지. 아멜리아는 덧붙였다. 마음씨 착한 제가 그냥 이해하고 넘어가는 걸로 하기는 열받으니 그냥 문지방에 엄지발가락 한 번 박아주세요. 아무리 신이라지만 인간이 느끼는 소소한 고통 한 번씩 느껴보고 그러시죠, 네!

　“그거면 충분하겠니?”

　엄마야, 깜짝이야. 심장마비로 두 번 죽일 생각이세요? 심연 깊은 곳에서 울리는 상냥한 목소리에 아멜리아는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아무도 없는데 어디서 말하는 거야. 일단 좀 나오실래요?

　“나는 어디에나 있단다. 나의 아가야, 너는 너무나도 일찍 내게로 돌아왔구나. 너의 부재로 인해 명예로운 국가인 이스트는 그 명망을 잃고 웨스트 제국에 흡수되어 역사의 한 페이지로 사라지고 말 거야. 그 미래가 다가오기까지는 네 생각처럼 채 10년도 걸리지 않겠지.”

　“맙소사! 하필이면 웨스트 제국일 게 뭐람. 그 제국은 대대로 황제들이 아주 밥맛이라 제발 망했으면 했는데 왜 하필 웨스트야. 웨스트는 부의 제국답게 돈이면 뭐든지 되는지 아는 개자식들만 모인 국가라고요. 차라리 노스로 해주시지. 마법의 제국이라서 그런지 아주 대대로 센스 넘치고 아름다운 사람들만 모인 곳이거든요. 거기에 루이스라는 황제가 있었는데 저랑도 꽤 친해서…… 에라이! 이제 와서 이딴 얘기 해봤자 뭐해.”

　“그 성격은 여전하구나. 그래, 아멜리아. 다시 한번 살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 모든 걸 바로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럴 자신이 있니?”

　아멜리아는 눈을 깜빡였다. 무감정한 눈빛이었다. 두려움도 고민도 없는 듯한 투명한 에메랄드빛 눈동자. 후우,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한 후에 아멜리아는 무엇인지,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그 존재를 향해 당차게 답했다.

　“그래요! 어디 한 번 부딪히기나 해봅시다. 뭘 해도 이번 생보다는 낫지 않겠어요?”

　상냥한 목소리는 조용히 웃음을 터트린다. 내 대답이 너무 당돌했나? 아멜리아는 괜히 창피한 마음이 들어 작게 헛기침을 했다.

　“네 마음은 잘 알았어. 아멜리아, 나의 아가. 부디 다시 주어지는 너의 삶에 축복만이 가득하기를 바라. 어떤 선택을 하든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가렴. 너는 이스트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황제였어.”

　어둠 속을 울리는 다정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아멜리아는 무서운 속도로 아래로, 더 깊이 아래로 추락해갔다. 그래. 까짓것 한 번 해보는 거지, 뭐. 신이든 누구든 똑똑히 지켜보세요. 데니오 프렌시스와 로에르 프렌시스의 딸, 프렌시스 가문의 장녀 나 ‘아멜리아 프렌시스’가 얼마나 당당하게 엘라와 이스트 제국을 지키는지. 지금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기필코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