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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사리아
작가 : 희망실종
작품등록일 : 2020.11.3

 
1
작성일 : 20-11-03 23:12     조회 : 397     추천 : 0     분량 : 9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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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피로 얼룩진 계곡 사이로 앤은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검은 머리카락과 옷이 피에 완전히 절여 본래의 색감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싸웠건만, 그녀는 조금의 피로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전투를 향한 더 강한 욕망을 참기 위해 자신과의 끝없는 싸움을 해나가야만 했다. 지금 발걸음이 무거운 것은 순전히 자신의 오른손에 잡혀 질질 끌려오는 사체 때문일 뿐. 그렇게 자갈길을 걸어가던 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체를 거칠게 앞으로 던져버렸다. 이상하리만치 짧은 팔과 긴 손톱이 역겹게 흔들리며 땅으로 쓰러졌다. 앤은 바닥에 나뒹구는 사체를 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모든 것을 잃었던 20년 전의 비극 이후 복수를 다짐했건만, 자신은 과거의 족쇄에 묶여 몇 년째 무의미한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문뜩 생각이 이쪽으로 흐르니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자신을 보던 그란츠 장군의 눈빛이 떠올랐다. 자신의 아들을 잃게 만든 원흉을 보던 그 매서운 눈빛은 그녀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 어떤 대가가 따르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지만, 앤은 차마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 모든 증오와 분노, 복수심을 그녀는 껴안고 갈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흐르는 시간과 쏟아지는 복수 속에서 점점 지치는 몸과 마음은 어쩔 도리가 없는 듯했다. 앤은 불어오는 밤의 찬 공기를 가득 머금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밝은 달빛의 사이로 지지 않고 별들이 자신의 빛을 뽐내는 광경. 언제부터 자신이 이 광경을 마음 놓고 바라보지 못하게 되었는지 스스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렇게 잠시 하늘을 바라보던 그녀에게 병사들의 웃음소리가 바람에 실려 들려왔다. 잊고 있었던 일명 ’동료‘ 들이 일을 마치고 진영으로 돌아가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들려오는 즐거움 속에서 떠오르는 이상한 강정을 억누르며 앤은 사체 쪽으로 걸어갔다. 잠깐 쉬어볼까 했지만, 이래서는 쉴 시간도 없었다. 만약에 복귀가 늦어지면 가뜩이나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사령관은 자신이 시체를 끌고 왔든 아니든, 그녀를 아님- 그녀와 같이 나왔던 병사들 전부에게 분노를 표할 것이 뻔했다. 앤은 다시금 나오는 한숨을 참고는 바닥에 팽개친 사체를 다시 들어 올렸다. 썩은 시체를 긁어먹고 사는 구울답게 올리자마자 다시 썩은내가 몰려왔다. 앤은 잔뜩 인상을 쓰고 앞으로 나아갔지만, 유감스럽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체를 다시 내려놓아야 했다. 죽은 동료들의 복수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여자 혼자 돌아다니는 것이 만만해 보였는지 곳곳에서 살기가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존재들이 느껴졌다.

 “오늘은 정말 재수가 없는 날인가 보네.”

 시간이 많지 않음을 알고 있는 앤은 그것들이 달려들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가뜩이나 자신을 보는 시선이 좋지 못한 것을 자진하여 더 나쁘게 만들 생각은 조금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녀는 곧바로 사체에서 손을 놓고 검을 빼 들어 옆에 있던 수풀로 달려들었다. 고맙게도 그녀의 움직임에 녀석들도 달려들기 시작했다. 앤은 앞에서 튀어나오는 녀석의 팔을 재빠르게 피하고는 검을 휘둘러 녀석의 몸을 두 동강 내었다. 그리고 곧바로 뒤로 돌아 들어오는 손을 잘라낸 후 빠르게 옆으로 굴러 다른 녀석의 공격을 피했다. 재빠른 움직임에 위기감을 느낀 건지 2녀석이 더 합세해 오기 시작했다. 둘러싸이면 아무리 자신이라도 위험하다는 것을 아는 앤은 망설임 없이 검을 던져 아까 팔을 잘라낸 녀석이 머리를 뚫어 버리고 달려나갔다. 괴물은 앤이 자신의 동료의 머리에서 다시 검을 빼내는 순간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손을 내질렀다. 곧 그 손이 앤의 왼쪽 팔을 감싼 검은 망토를 찢고 내부를 휘저었지만, 이미 그녀의 왼팔은 존재하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공허한 공간에 당황한 듯 잠시 멈춰선 녀석을 앤의 검이 배어내렸다. 다시 따뜻한 피가 몸을 적시자 겨우 가라앉혔던 욕망이 터져 나왔다. 정신없이 싸우고 피를 뒤집어쓸 때만 그녀는 그나마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과거의 모든 고통과 죄의식이 사라지는 순간은 구원과 같은 느낌이었지만, 그녀는 결단코 쉬운 길로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 절재하고 참아내고 죗갚을 치르며 복수를 해야만 한다. 그렇게 앤이 다시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현실의 절망에 다시금 마음을 안착시켰을 때에는 이미 어마어마한 살육전이 벌어진 후였다. 자신의 손에 조각난 사체들을 보니 점점 마음 깊이 두려움이 쏟아 올랐다. 전부터 인간이 아닌 소수종들을 상대할 때는 딱히 이성에 신경 쓰지 않았지만, 점점 심해지는 광증에 이제는 사람을 상대할 때 절재를 할 수 있을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자신을 그토록 증오하는 사령관은 이걸 원하는지도 몰랐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람을 죽일 만큼 미쳐버린 자신을 합법적이고 보기 좋게 처단하는 그림. 그것은 확실히 본인이 스스로 생각해 봐도 꽤나 괜찮은 복수법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니 픽 하고 웃음이 나왔고 곧 자신이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빈틈을 보였음을 깨달았다. 갑자기 몽롱해지는 눈앞의 풍경에 그녀는 곧바로 괴물이 더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녀석은 고함을 지르거나 거칠게 달려드는 것이 아닌 틈을 봐 그녀를 잠들게 하는 방법을 시도했고 앤은 보기 좋게 걸려들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를 처치할 영광은 녀석의 것이 아니었다. 앤은 잠에 빠져드는 몸으로 빠르게 몸을 돌리며 검을 휘둘렀다. 곧 피가 터져 나오고 괴물이 자신의 배를 움켜 지다 이내 앤과 같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망할 것.”

 괴물이 더는 움직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앤은 몸을 욕을 내뱉고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녀석의 마법에 너무 확실하게 걸려든 탓인지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다. ’이대로 죽는 걸까?‘ 어림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서서히 눈을 감던 앤은 저 멀리서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괴물인가 싶었지만, 갑옷을 입은 기사였다. 분명 잠들어가는 눈인데도 앤은 그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곧 슬픔과 비통함, 그리고 그리움이 그녀의 마음을 채웠고 앤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슴 깊숙한 곳에 간직한 이름을 기억해 내었다.

 “드레이크.”

 앤은 힘겹게 그 이름을 내뱉었다. 이제는 죽고 없는 얼굴이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 보았고 이내 앤은 완전히 잠에 빠져들었다.

 =

 “저기 렌....님? 슬슬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만?”

 통일성 없이 난잡하고 제각기 다른 무기들을 지닌 용병들에게서 눈을 때지 못하는 회색 머리 소년에게 배른은 어떤 호칭으로 불러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님이라...‘ 말하고 나서 느낀 것이지만, 역시 남들의 앞에서 부르기는 조금 민망한 표현 같았다. 뭐 하얀 로브를 입고 있어 이 소년이 성역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대충 눈치는 채겠지만, 그래봤자 견습생 정도로만 생각할 것이 뻔했다. 애당초 12살이 겨우 되어 보이는 꼬마한테 ’님‘ 자를 붙이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만.... 배른은 유감스럽게도 자신의 말에도 꿈쩍하지 않는 이 소년에게 다시 존칭을 붙여서 불러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에 빠졌다. 자신에게 내려온 의뢰를 가장한 명령의 1차 목적지가 그리 멀리 있지는 않았지만, 원하지 않은 일을 맡은 그로서는 최대한 이 일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 한참 고민한 끝에 배른은 손을 뻗었지만, 이 소년은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이 몸을 휙 돌려 손을 피하고는 마을의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허... 거 참 알 수가 없네.”

 절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소년의 태도보다는 소년이 보여주는 행동들이 그로서는 솔직히 말하면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몇 일전 성역의 남문 근처에서 만나 동행하는 동안 소년은 몇 번이고 마치 앞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안다는 듯이 크고 작은 위험들을 피해갔다. 꼭 일이 일어나기 직전에 피해 어찌 보면 감이 좋아 보인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아무런 전조도 없이 일어나는 일- 가령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에 혼자서 릴 비를 알아차리고 가림막 밑으로 들어가거나 지나가던 행인이 실수로 떨어뜨리는 물건을 그 자리에서 바로 태연하게 잡아서 돌려주는 것을 보아 이 꼬맹이는 절대 단순한 감이 좋다 정도가 아님을 느낄 수가 있었다. ‘미래를 본다라...’ 그러고 보니 저 멀리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는 미래를 보는 마법이 있다고 하는 데 그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른. 저 용병들은 같은 깃발 아래에 서 있는데 뭔지 알아요?”

 혼자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배른은 갑자기 들어오는 렌의 질문에 흠칫 놀라며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자 이번에는 누가 우리 꼬마의 관심을 샀을까나.’

 그는 렌이 듣지 못할 만큼 작은 한숨을 쉬고는 그가 가리킨 용병들을 보았고 곧 인상을 쓰고 말았다. 저들의 ‘오메가’ 문양은 참으로 알기 쉬워 좋았다.

 “음- 딱히 이름은 없지만, 사람들은 ‘시체 제조기’ 정도로 부릅니다. 되도록 가까이하지 마세요.”

 그다지 자세하게 말하기 싫어 최대한 안 좋은 느낌으로 말했건만, 이 아이는 눈치가 없는 건지 얼굴에 호기심을 잔뜩 올리고는 빛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요? 나쁜 사람인가요? 아니면 아이들을 납치한다거나?”

 ‘아니 이걸 말해줘야 해?!’ 곧바로 난감함에 그는 헛웃음으로 시간을 벌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최대한 덜 자극적으로!’

 “으- 저들은 주로 이단들이나 싸우는 것을 엄청 좋아하는 친구들이 주로 모이는 집단인데....그.... 뭐랄까...... 피 보는 것을 좋아한다? 정도로 알면 좋을 듯 싶네요.”

 “음... 그러니깐 학살을 좋아한다는 거죠?”

 풉-------

 순수한 눈동자에 앳된 얼굴에서 나온 말은 배른의 정신을 아득히 날리는 것에 탁월한 듯 싶었다. 게다가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한데 이 꼬마는 말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주변 시민들의 표정을 보니 민간인도 안 가리는 것 같네요. 흠- 근데 이단이라..... 제가 가서 해결해 볼까요?”

 대체 이 당당함은 뭐라 말인가?! 말문이 막힌 배른은 멍하니 소년을 바라볼 뿐이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곧 소년이 살짝 웃으며 다시 걸어나갔다.

 “놈담이예요. 지금 비밀 임무 중인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어요.”

 안도와 함께 짜증이 섞여 나왔다. 위험한 것은 질색인데 어쩌다 이렇게 됬는지...

 “그... 사제가 그런 농담을 하면 대게 사람들은 웃어 넘기지 못해요.”

 렌은 그의 고통스러운 목소리에 반응하지 않았다.

 ‘사제’ 이 땅의 신성을 책임지는,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의 말 한마디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저 아이는 잘 모르는 듯했다. 권력의 무게를 모르는 순진무구한 존재라니- 정말이지 귀찮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다시 침묵 속에 나아가던 그들은 어느새 마을의 중앙에 있는 시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배른은 자신이 평소에 알던 우중충한 분위기가 아닌 너무나 활기 넘치는 시장에 모습에 순간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국가 대로 위에 세워진 마을의 시장은 간간히 지나가는 군인이나 상인을 상대로 그럭저럭 벌어먹고 사는 작은 시장에 불과했는데 지금은대 무역도시 베니스와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와... 이렇게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모인 것은 처음봐요!”

 렌이 감탄을 내뱉으며 주위를 둘러보는 동안 배른도 이 특이한 광경을 둘러보았다.

 비록 아이들은 보이지 않지만, 마을 게시판의 앞에서 의뢰를 찾는 사냥꾼들이나 식료품을 구매하는 용병 내지는 군인들이 내는 활기 넘치는 목소리들은 정말이지 축제 못지않았다.

 “이것이 전쟁 특수라는 건가?”

 평소에는 루마니아의 북쪽 국경 쪽에서만 박혀저 살아 잘 몰랐는데 정말이지 이 전쟁은 크고 기나긴 전쟁이 분명해 보였다. 루마니아 제국과 프랑크 왕국의 5년째 이어지는 전쟁은 듣기만 해서는 무의미하고 피만 보는 일이 분명해 보였으나, 그 속에서 큰 이익을 보고 활기가 돋아나는 것을 보니 실로 묘한 감정이 쏟아 올랐다. 그가 느낀 감각을 렌도 느낀 것인지 그는 시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렇게 보니 역시 애는 애였다. 배른은 픽 웃고는 주머니에서 동전 몇 닢을 꺼내었다. 비록 시장에는 신나게 돌아다니는 아이들이 없기는 했지만, 사제직을 딴 만큼 배운 렌이라면은 잠시동안은 혼자 돌아다니게 놔두어도 될 터였다.

 배른은 조심히 그의 옆으로 가 어께를 살짝 흔들며 그의 관심을 산 다음 동전을 쥔 손을 내밀었다.

 “잠시 볼 일이 있으니 멀리 가시지 말고 구경하고 계세요.”

 잠시 렌은 이해가 안된다는 표정으로 배른을 바라보았지만, 이내 그의 말뜻을 알고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렌을 데려온 금발의 아가씨가 배른에게 부디 애를 혼자 놔두지 말라고 강조한 것 같기는 하지만, 지금이야 별 시답지 않은 이야기니 무시하기로 했다.

 뭐 본인이 먼저 제안하기는 했지만, 저 미소를 보면 누구라도 자신과 같이 말했을 거라 배른은 확신했다.

 “절대 멀리 가지 않을게요.”

 “네네- 부디 좋은 시간 되시길.”

 굳은 결의가 담긴 얼굴로 말하는 렌에게 배른의 웃음과 함께 눈짓을 하고는 먼저 렌에게서 떨어졌다. 그가 떨어지자마자 렌은 자신의 발길이 끌리는 곳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배른은 그가 멀어지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돌리고 가장 사람이 많고 냄새가 심한 식료품 구역으로 걸어갔다. 다시 길바닥으로 나아가기 전에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음식도 사야 하고 망가진 식기 도구도 고치면서 근근히 구미가 당기는 마법 용품도 사두어야 했다. 후자의 경우는 지극히 개인적인 물건이지만, 모처럼의 외출이 아닌가? 이런 기회를 그냥 놓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빠르게 음식을 사기 위해 배른은 사람들 사이를 해집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아예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생각보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구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가계들을 둘러보니 신선한 고기나 야채등은 이미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거기에 평소에는 파리만 날리는 말린 식재료에도 사람들이 몰려있어 벌써부터 그의 속을 태웠다.

 “아- 이러면 곤란한데..”

 아무도 듣지 못하는 탄식이 속에서 배른은 조금이라도 들어가보려 했지만, 고작 사무실에서 서류나 뒤적거리는 사람은 결코 끼어들 수 없는 용병들의 벽에 포기하고야 말았다.

 ‘빌어먹을 용병놈들’ 차마 큰 소리로 말하지는 못하고 속으로 분을 삭히며 배른은 인파를 빠져나와 시장의 구석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느 시장이나 자리에 밀려 구석으로 쫒겨나는 사람은 있기 마련- 그런 틈새시장이 아니면 결코 음식을 구하지 못할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배른은 얼마 안 있어 구석에 한가하게 차려진 허름한 가계를 찾을 수 있었다.

 “저- 장사하시나요?”

 너덜너덜한 천을 걷고 들어간 그를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노인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물론이지. 어서오시게.”

 노인이 혼자서 관리하는 것 같은 이 가계는 곳곳에 말린 고기들이 매달려 있었으며, 노인이 작업을 하는 도마 앞에는 말린 야채와 향신료들이 나무통 안에서 묘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배른은 안을 한번 쓱 둘러보고는 노인의 앞으로 걸어갔다.

 “말린 돼지고기하고 야채를 조금 사려고 하는데....”

 “아- 야채나 향신료는 알아서 주머니에 챙겨 가고. 음- 돼지고기는 잘라야 할 것 같으니 조금 기다리게. 한 마리 전부가 필요한 건 아닐테니.”

 머뭇거리는 배른의 태도가 답답했는지 노인은 그의 말을 자르고 일을 시작했다.

 그는 도대체 왜 그랬는지 이해가 안 되는 뼈째 말려진 돼지의 반쪽을 커다란 식도로 사정없이 후려쳐 고기 한 덩이를 때네고는 자리에 돌아왔다. 그가 열심히 고기를 때리는 동안 배른은 나무통에 담긴 야채들을 둘러보았다. 냄새가 조금 나는 것 말고는 그리 큰 문제점은 없는 것 같았다. 배른은 여러 야채 중 당근과 샐러리, 양파를 골라 가지고 다니는 가죽 주머니에 담았다.

 “아무리 전쟁을 끝내고 싶다고 해도 이건 너무 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 위대한 제국이 한낱 용병들에 의지하다니.”

 일하는 동안의 정적이 싫었는지 노인은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배른은 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너덜한 천 너머로 밖을 보았다. 몇 년재 이어지는 전쟁에서 루마니아 제국은 진전이 없는 육군을 포기하고 두 달 전 큰 피해를 본 해군에 정규군을 대거 투입하기 시작했다.

 남서쪽의 육군들은 해군의 심각한 피해와 맞물려 진격을 완전히 포기하고 방어에만 돌입했으며 오직 불멸의 요새라 불리는 아슬란 성체를 마주보는 서북쪽의 그란츠 장군만이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용병들을 불러모으고 있어 북쪽의 도로는 어느새 온갖 용병들이 몰려드는 도로가 되고 말았다. 뭐 용병들의 씀씀이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야 별 상관없다 느끼겠지만, 이 영감과 같이 과거의 영광스러운 제국의 육군을 기억하는 사람이나, 어쩌다 발생하는 용병의 약탈에 당하는 마을은 이 시국에 절망하고 있는 것이었다. 노인은 중간중간 천 밖을 보더니 이애 큰 한숨을 내쉬었다.

 “특히 저 빌어먹을 놈들까지 부르다니.... 정도가 너무해..”

 배른은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그가 무엇을 본 건지 잘 알고 있었다. 붉은 오메가 문양.

 제발 렌이 그들의 옆에서 기웃거리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네. 저놈들까지 부른 것을 보면 확실히 너무 엇나가긴 했죠.”

 그는 딱히 노인의 비위에 맞춰줄 생각이 없었지만, 배른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노인은 픽 웃고는 도마 밑에서 고기 한 덩이를 꺼내 썰기 시작했다.

 점령지에서 말도 못할 무차별적인 악을 행하는 그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꺼림직했다.

 “자 이정도면 충분할테지. 아까 그 야채까지 해서 4데닛만 두고 가시게.”

 노인은 인자한 웃음과 함께 고기가 가득 든 주머니를 건냈다. 배른은 그가 건내 고기의 양을 보고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단 한마디의 말과 한 번의 끄덕임이 가뜩이나 싫어하는 용병들에 둘러싸인 노인에게는 기쁨의 순간인 모양이었다. 불룩 튀어나온 주머니를 보니

 적어도 일주일은 넉넉하게 먹을 수 있을 만한 양이었다. 4데닛이면 여관에서 한끼 식사를 사는 것이 전부인데 야채까지 해서 이 가격이라니.... 오히려 배른이 미안함 마음을 감출 수 없을 지경이었다.

 “4데닛. 그 이상은 받지 않을 걸세.”

 이번에도 우물쭈물하는 그가 답답했는지 노인은 그를 위협할 모양으로 식갈로 매섭게 도마를 내리치며 말했다. 그의 확고한 눈빛에 배른은 더 이상 뭔가 말하는 것을 포기하고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그.. 감사합니다. 어르신.”

 배른은 멋쩍은 인사와 함께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노인의 앞에 내려놓았다.

 자신의 앞에 놓인 동전을 픽 웃으며 쥐는 노인이 이상함을 느끼기 전에 배른은 얼른 가게를 빠져나왔다.

 “이게 시골 인심이란건가... 곤란하구만-”

 가게에서 충분히 멀어졌을 때 배른은 참았던 숨을 내쉬며 푸른 불꽃이 튀는 손을 저었다.

 물건을 투명하게 만드는 술식은 처음 써보지만, 의외로 잘 먹혀 스스로도 당황스러웠다.

 “자. 그럼 이제 어쩐다.”

 일 하나를 끝냈다는 안도감으로 몸을 쭉 편 후 배른은 다시 복잡한 시장을 둘러보았다.

 어째 사람이 더 늘어난 것 같은 시장에 배른은 곧 포기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사람이 몰리는 곳은 식료품 만이 아니었다. 용병들이 가져온 그 수많은 장비들은 이미 배른이 어찌 손쓸 방도도 없이 대장간을 완전히 메우고 있던 것이다.

 그는 멍한 얼굴로 그것들을 둘러보았다. 칼리번과 거대한 전투 도끼와 망치, 활과 석궁까지.

 이것들이 모두 수리를 마치는 것도 한세월이지만, 돈도 얼마 못 받는 냄비 손잡이를 고치는 일은 아예 받지도 안을 듯 싶었다. 이내 그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걸음을 옮겼다.

 부러진 손잡이는 마법으로 대충 고정하고 쓰면 될 터였다. 뭐 잠깐이라도 정신을 놓는다면 그대로 음식을 잃는 거지만, 목적지가 얼마 안 남았으니 어찌 버틸 수는 있을 것이다.

 곧 그의 눈에 잡동사니를 파는 상점들이 들어왔다. 아예 할 수 없는 일은 빠르게 포기하는 것이 좋은 법. 그냥 눈에 띄는 하얀 로브의 꼬마를 찾고 여관에 들어가기로 그는 마음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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