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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코발트 블루
작가 : 현준
작품등록일 : 2020.9.25

수감된 주인공이 옛 사랑을 그리며 추억여행을 떠나는 중편 소설입니다.

 
1화
작성일 : 20-10-14 21:31     조회 : 429     추천 : 0     분량 : 23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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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이름이 숫자로 잠시 개명되었을 때, 한동안 밥맛이 없었다.

  그렇다. 내 영혼이 쇠사슬에 묶여 쳇바퀴의 노예가 되던 날, 내 이름은 간결하면서도 조금은 성의 없게 개명되었다, 2724번으로.

  독보적이지는 않았지만 꽤 감각 있다고 자부하던 나의 패션도 간결해졌다.

  코발트블루색이라니, 너무 하잖아. 내 피부는 검단 말이야. 어울릴 리가 없잖아.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이며 내 이름과 같이 주어진 삶 또한 매우 단순해졌다. 동물원에서 살고 있는 코끼리들은 이런 기분일까. 주면 먹고, 오면 태우고, 갇히면 잠을 자고.

  내 의지대로 삶을 조리할 필요가 없어졌다. 마치 오븐 속의 피자처럼. 때가 되면 꺼내주면 되는 거야. 부디 타지만 않게 잘 돌려주기를.

  나와 같은 옷을 입고 숫자로 개명한 사람들이 본인의 숫자가 불릴 때마다 거대한 철장을 향해 발을 옮겼다. 철장 밖으로 나가기 전에는 관품들이 들어있는 플라스틱 상자를 한 상자씩 나누어 주었다. 헝거게임 같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찰리의 초콜릿 공장 같기도.

  상자 속에는 달콤한 초콜릿도, 남을 살생할 무기도 들어있지 않았다. 작은 베개와 모포, 그리고 성경.

  나는 숨을 죽인 채 설렘을 안고 고무신을 구겨 신었다. 불길하고 나쁜 설렘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발소리를 아무 생각 없이 듣고 있을 때, 교도관이 나의 새로운 이름을 불렀다.

 

  “2724번.”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플라스틱 상자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요란한 열쇠소리와 함께 철장이 입을 크게 벌렸다. 나는 마치 아기 새 목구멍으로 던져 들어가는 지렁이처럼 적당히 꿈틀거리며 제 발로 대지의 세계를 향해 들어갔다. 소화만 시키지 않길 바랄게, 꿀꺽.

  나는 구역질나는 목구멍과 창자를 미끄러지듯 지나 새로운 보금자리에 도착했다. 특유의 곰팡이 냄새가 자욱했는데 그보다 문 색상마저 코발트블루라니, 나는 피식 웃었다. 신의 장난 같아서. 이 색상이 주는 어떤 메시지가 있을지도 몰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오랜만에 자유가 되었다. 2층 수용소 어느 독방에서의 자유, 난감하잖아.

  그렇게 시작되었다. 봄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차가웠던 날에.

  요리사였다, 내 직업은. 푸드 트럭 위의 중식요리사. 요일 별로 장소를 옮겨가며 짬뽕과 만두를 팔았다. 매일 장소를 옮기는 게 좋아서 트럭을 시작했다.

  결코 단골이 많은 것도 아니고 매출이 꾸준하게 높았던 것은 아니지만 맛에는 자부심이 있었다. 맛에 대한 소문이 점점 퍼져서 특정 요일에는 손님이 몰리는 때도 있었다. 매주 수요일로 기억한다. 그날은 경쟁 트럭들도 나를 의식하여 자리를 피할 정도로 붐볐었다. 햇살은 마치 탑조명이라도 된 듯 유독 트럭을 더 밝게 비추던 나날들. 하지만 구름이 태양을 완전히 가리게 된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희극이 비극으로 바뀌는 순간은 작은 만두 하나면 충분했다. 마감을 마친 어느 수요일 저녁, 조사를 받으러 경찰서에 갔다. 경찰은 내 음식에 독극물이 들어있어서 손님 한 분이 위독한 상황에 놓여있다고 했다. 손님은 그날 먹은 음식이 내 트럭의 만두가 유일하다고 그녀의 남편이 진술했다고 한다. 그럴 일은 없다고 오히려 나는 더욱 성질을 냈지만 비극은 조사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결국 숨을 거두었고, 사인은 독극물에 의한 사망. 그로인해 나의 시그니처 만두는 ‘독만두’라는 이름으로 매스컴을 타서 전국적으로 알려졌고, 나는 오랜 시간 인생의 쓴 4교시에 참석해야만 했다. 조사, 구속, 재판, 판결.

  나는 만두 킬러가 되기까지 수개월의 조사와 재판을 거치면서, 오션스 일레븐 같은 이 영화가 현실화 되는 것이 가능 하구나 라는 것을 선고를 받으며 알게 되었다.

  실형 10년.

  변호사를 선임하며 날려버린 수백 개의 만두 값, 밀가루 반죽만큼이나 두꺼웠던 내 자존심의 결과는 코발트블루 의상과 새로운 이름뿐이었다. 아끼던 도끼의 날이 발등 위로 떨어져 찍히는 기분이었다.

  억울하고 힘든 시기였다. 여름날에 땀을 몽땅 흘러내듯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독만두’에 대한 의학적이고 SF적인 검찰의 논술을 이기기 위한 나의 지혜는 초라했다. 왜 하필이면 내게 이런 비참한 일이 일어난 걸까. 나는 번개와 별똥별을 동시에 맞은 것과 다름없는 비현실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SF적인 생각을 해봐도 답을 알 리가 없었다. 알았다면... 알았었더라면.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결국 코발트 블루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영혼이 된 것처럼 조금은 가벼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제 다 끝난 걸까. 하지만 영혼의 무게가 21g이라고 했던가. 그 무게가 느껴질 때마다 방심한 사이 스며든 평온은 순식간에 달아난다. 새벽의 안개처럼.

  또 다른 인생의 트럭 위에서 속피를 채워나가야 하는 일이 주어진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방은 작고 침침했다. 바닥은 뿌연 안개가 내려앉은 듯 먼지가 쌓여 있었고 벽과 천장에는 곰팡이들이 군데군데 피어있었다. 마치 잘게 썰린 트러플로 이루어진 먹구름처럼. 거미줄인지 뭉친 먼지 떼기인지 걸쭉한 회색빛의 실타래는 고드름이 되어 천장 위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고, 오랜 시간 사용하지 않은 방인 듯 사람의 온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화장실은 미닫이문을 가운데에 두고 분리되어 있었다. 낡은 수도꼭지와 색이 바란 수세식 변기, 바닥에 깔린 엉성한 타일 조각들은 마치 억지로 구겨서 맞추어낸 퍼즐 조각 같이 불완전하게 섞여있었다. 세숫대야는 나름 쓸 만해 보였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참으로 난감했다.

  수도꼭지를 돌려보고 있을 때, 녹슨 창살을 통해 시원한 바람이 들어와 자연스레 고개를 들었다. 바람은 새로 맞이한 인기척이 반가웠는지 살랑살랑 머리칼을 흔들며 환영해 주었다.

  맑은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산책하듯 여유 있게 움직이는 뭉게구름과 함께. 그 아래엔 낡은 수용동이 시야를 방해하고 있었다. 내가 있는 건물이 딱 저런 느낌이겠군, 하고 생각하니 왠지 더욱 초라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건너편 수용동 창가에는 여러 마리 새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어쩌면 바람과 소통중일지도. 나는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며 현실을 뒤로 한 채 자연의 시간을 맞이하였다. 그늘에서 고개를 꺾고 낮잠 중인 비둘기 부부, 옥상에서 총총 걸음으로 운동 중이던 까치와 참새들. 나는 유치하게도 그들의 휴식을 방해하고 싶어서 휘파람을 있는 힘껏 불어보았지만 평소에 많이 들어보았는지 고개 한번 까딱이지 않는다. 그래도 이러한 세상이 보인다는 것에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다. 비록 높고 단단한 쇠창살과 방충망이 가로 막고 있다 할지라도.

  나는 방으로 돌아와서 바닥에 털썩 앉았다. 날이 춥진 않지만 바닥이 차서 조금 움찔했다.

  이번에는 무릎 높이에 위치한 배식구를 열자, 바람이 입구에서 솔솔 들어온다. 그 손짓에 이끌려 배식구에 턱을 얹었다. 자그마한 입구로 복도가 보인다.

  두리번, 두리번.

 고요하고 적적한 복도, 다들 이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을까.

  문 앞에는 그림이 걸려있었다. 오래된 시골집 마당에서 붉은 옷을 입은 청년이 마치 바이올린을 켜듯 어깨에 과일바구니를 받쳐 들고 웃고 있다. 휑한 복도에 전시되어서 그런지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는 그림. 아마도 수용자가 그린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 말고는 시야가 좁아서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나는 바람의 언어를 무시하듯이 배식구를 거침없이 닫아버리고 다시 차가운 바닥으로 돌아와 앉았다. 리모콘을 제자리에 갖다 두듯이.

 

  나는 잠시 동안 다리를 모으고 앉아 무릎에 턱을 올리고 벽을 바라보았다. 순백이 바래진 하얀 벽. 벽지는 A4용지로 가득 메운 누군가의 DIY작품이었다. 언젠가 벽이 더욱 새하얀 종이로 덮어진다면 그건 내 DIY가 되어 있겠지.

  Do it yourself!

 

  J가 이사했을 때, 벽지를 교체해 주겠다며 엉터리로 벽을 꾸민 적이 있다.

  무더운 날, 숨 쉴 때마다 더위가 온몸에 스며들던 날에 굳이 벽지를 교체해야 한단다. 달콤한 부탁이 묘하게 설득력 있던 시절이었으리라. 그녀의 부탁이라면 서슴없이 팔을 걷어 올렸다. 열 번이고 백번이고.

  쉽지 않던 작업이었지. 면적에 맞추어 핑크색 벽지를 반듯하게 자르고 사다리에 올라타 천장부터 차근차근 붙여야 했으니까. 공기가 들어가서 볼록해진 공간을 칼로 엑스를 그려 평평하게 만들었고 그것을 반나절 꼬박했으니 잊을 수가 없었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불을 키려는데 전등 스위치가 아무래도 보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실수로 스위치마저 도배를 해버린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우리는 크게 웃었고, 나는 이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할 거라 짐작했다. 아름다웠다. 핑크빛 세상속의 추억.

 

  꿈같은 공간이 새록새록 피어오른다. 하지만 적당히, 피어나야 할 연꽃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잎을 크게 벌려, 추억 속으로 나를 흡수시켜버린다. 지금도 넌 그때의 핑크빛 세상에 살고 있을까.

  웅크린 다리가 저려오면서 핑크빛 세상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마치 풍선이 부풀어 순식간에 터진 듯이. 자세를 고쳐 다리를 쭉 펴고 앉아 눈을 감으니 명석한 뇌는 다른 컬러의 세계로 이끌 듯 서서히 또 다른 영상을 플레이해버린다. 딸각딸각, 무언(無言)의 소리와 함께.

  눈의 초점이 방향을 잃으면서 연인이었던 J와의 추억들이 마구잡이로 뒤섞인다. 현실의 벽을 의식하기도 전에 그녀의 다양한 미소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내가 만든 영화에 내 자신이 취해버린다. 아이러니하게도.

  왼손은 자유롭게 움직이며 마치 감각적으로 팝콘을 찾듯이 휘적거린다. 나는 손가락으로 집게 모양을 만들어 공기처럼 가벼운 팝콘 한 개를 집는 것을 상상한다. 뭐야, 캐러멜 맛이잖아. 내가 원하는 건 레몬맛 팝콘이라고.

  나는 집었던 캐러멜 팝콘을 놓아주고 계속해서 이리저리 휘저으며 레몬맛 팝콘을 찾지만 이내 실패한다. 자석처럼 지문에 찰싹, 하고 붙어주면 좋겠다만 상큼한 녀석은 내 손을 계속해서 피했다.

  불을 켜고 찾아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눈을 떠보니 팝콘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없었다. A4용지들이 벽에 붙어서 한심하게 지켜보고 있을 뿐. 레몬맛 팝콘이라니, 맙소사.

 

 

  *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외출을 하게 된 건 주말이 지나 맞이한 첫 월요일의 운동시간이었다. 점심을 먹고 설거지를 끝내자 굳게 닫힌 문이 열렸다.

  “2724번, 운동 시간입니다. 가시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교도관을 따라 나섰다.

  피터, 사동 담당 교도관이다. 담당 교도관이 되면 여러 잡일을 도맡아 하게 되는 것 같았다. 문을 열어주는 일, 밤에 불을 끄고 아침에 다시 켜는 일(소등), 항시 인원체크, 운동장 바래다주기, 접견실로 모시기, 배식할 때 감시하는 일, 싸움을 말리는 일, 막힌 변기 뚫어주기, 방 소독해주기... 곱하기 삼.

  피터 씨와 이야기를 나누며 거대한 뱀의 몸통과 닮은 긴 복도 속에서 여러 철문을 지나 마지막 자물쇠를 열자, 숫자 ‘4’가 적힌 작은 운동장이 나타났다.

  “시간이 되면 다시 오겠습니다”

  피터 씨의 찰랑거리는 열쇠 소리를 뒤로하고, 나는 오랜만에 바깥세상을 정면으로 맞이했다. 날은 결코 맑지 않았고, 세상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우중충한 구름의 그림자로 모든 게 어둡게 덥혀있었다, 흑백사진처럼.

  또한 회색빛 하늘은 마치 암울한 현실을 비춰주듯 갑갑한 지붕이 되어 나를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공기로 압축해 눌러 버리듯이.

  피터 씨의 열쇠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되자 더욱 고요해진 이 공간은 무인도와 다를 것이 없었다. 실내나 바깥이나, 온도의 차이가 있을 뿐. 흑백 세계인 것은 다르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후련한 기분이 들까하고 내심 기대했건만, 아직은 때가 아닌가 싶었다.

  4구역(운동장)의 구도는 한 조각의 피자를 연상시켰다. 색채가 없는 꼬릿꼬릿한 염소치즈로 도배되어 있을 것 같은 밋밋한 치즈피자. 녹아내릴 것도 없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블루치즈.

  오랜만에 창살 없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예고 없이 비행기가 지나갔다. 근방에 공항이 있어서인지 짧은 시간마다 착륙하고 있는 여러 비행기들을 볼 수 있었다. 동남쪽에서 북서를 향해 서서히 내려가는 각종각색의 비행기. 비밀이 많은 이 땅으로 사람들을 태워 화려하게 착륙한다. 나도 그 무리 속에 있을 때가 있었지.

  유독 이륙하는 과정의 삼십분이 좋았다. USB포트에 핸드폰을 충전하고, 좌석 아래 노트북을 잠시 내려놓고, 여권과 지갑은 앞좌석에 달린 주머니에, 그 위 TV는 세계지도로 맞추어 놓는다.

  승무원이 친절한 미소로 샴페인과 식사 메뉴를 건넨다. 해질녘을 액자삼은 저녁식사였다. 나는 스타터로 참치 샐러드를, 메인은 Bulgogi Bibimbap, 디저트로 치즈 케이크를 체크하고 메뉴판을 다시 승무원에게 건넨다. 달콤한 오렌지 시럽이 흘러내리는 치즈 케이크.

  커다란 엔진 소리가 바람을 타고 귀에 꽂히자, 세상은 다시 회색빛으로 돌아왔다. 잠시 멍하니 점점 작아지는 나의 치즈 케이크를 배웅했다.

  안녕, 그리운 나의 치즈케이크.

  어느새 방으로 복귀할 시간이 되자 피터씨의 열쇠 소리가 서서히 들려왔다. 색채가 없는 하늘은 시간마저 압축해 버렸는지 주어졌던 시간도 짧게 느껴졌다. 하긴 시간이 길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겠지만.

  나는 문을 향해 걸어 나가다가 입구 근처에서 작게 돋은 푸른 새싹을 발견했다. 아주 작고 손톱만한 크기의 초롱을.

  그래, 색은 칠해 나아가면 되는 거야.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야, 하고 나는 생각했다.

  3월이었다. 곧 있으면 꽃이 피어나겠지. 어른이 될 거라는 사실에 설레 이는지 작은 초롱은 덩실덩실 몸을 흔들고 있었다.

  철컹

 

 

  *

  사람의 온기를 더욱 채우기 위해서는 필요한 물건과 함께 공간을 채워주어야 한다. 적어도 이곳에서는 그랬다.

 

  주말이었던 것 같던 저녁. 구매할 수 있는 물품 목록들을 탐독하며 나의 동반자 리스트를 꾸렸다. 구매할 물품 아래 동그라미를 그려서 피터 씨에게 건네면, 이틀 뒤 배식구를 통해서 와장창 쏟아져 들어오는 시스템.

  공항 면세점처럼 tax free를 추구하는 시설 덕에 모든 물품을 굉장히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었다. 다만, 짜장 인가, 짬뽕 인가하는 부족한 결정력으로 인해 수많은 면세품 앞에서 나는 종종 방향을 잃었다.

  식품 45종, 생활용품 60종, 문구류 30종, 의류 30종, 의약품 80여종... 방향을 잃을 만도 하지 아니한가.

  급할 필요 없는 침착랜드에서의 나는, 소소한 시뮬레이션들을 거치며 동그라미를 그려나갔다. 마치 설레는 마음으로 복권을 긁어 나가듯이.

  먼저 속옷과 양말이 충분해야겠지. 좋아, 여러 개를 체크하자. 빨래도 해야 하잖아, 비누도 필요해. 옷걸이도 필요하겠어. 깨끗하게 씻고 싶은데... 마침 목욕제들은 확실하군. 로션은 두 종류네, 뭐로 골라야하지. 고민되는 군. 수건도 몇 장 필요하겠어. 휴지도 탑처럼 쌓아놓자. 오, 할렐루야 시계도 있잖아. 브랜드는 무엇일까. 생수도 동그라미. 이런, 그럼 지급받는 물은 생수가 아니었단 말인가. 아무렴 어때. 머리도 빗어야 할까. 커피는 마시고 싶어. 자는데 수면 안대가 필요할까, 없어도 잘만 살아왔는걸. 편지는 써야할 것 같은데. 식품들이 풍부하네, 일단 뭐든지 쌓아 놓아보자. 지금은 뭐라도 채워 넣고 싶어. 꾸역꾸역.

  이틀 뒤 오전, 배식구를 열자 익숙해지기 시작한 환풍이 불어오면서 수레바퀴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피자 배달의 오토바이 엔진소리처럼 반가웠다. 약속하나는 칼이군, 역시 국가보호시설인건가.

  나는 피자 대신 토핑만큼이나 알록달록한 새 식구들을 맞이했다. 빨강 고무장갑, 주황색의 귤, 금빛의 커피상자, 초록 수건... 차곡차곡 정리해가자 눅눅했던 백색 공간에 무지개가 그려졌다.

  괜스레 신이 난 걸까,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정말 단순하지 나란 녀석.

  작은 기쁨은 폭발적인 주전자의 소리처럼 확 와 닿았다. 소리는 곧 사라지겠지만, 연기는 남아있을 것이리라.

  아침에 받은 온수가 아직 식지 않아서 파랑색 컵에 블랙커피 믹스를 함께 담아 저어준다. 페루산 원두는 내 영혼의 후각을 새로운 곳으로 인도한다. 블루보틀의 예멘 원두도, 에티오피아의 갓 볶은 생 원두도 부럽지 않았다. 커피는 내 몸 안으로 흘러내리며 파랑 컵을 비워가는 동안 나만의 간호사가 되어주었다. 상큼한 바늘로 통증 없이 카페인을 주입시키는 날개달린 간호사.

  나는 파랑 컵이 바닥을 비출 때 즈음, 책상 위에 펜과 편지지를 꺼내놓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밑줄만 그어있는 흰색 종이와 검정 수성펜을.

  펜을 쥐어본지가 언제였던가. 모든 생활이 기계화된 이 시대에서 펜과 친하게 지낸 것 같진 않은데.

  펜보다는 주로 칼을 쥐었다. 이제는 그 무엇보다 친하게 지내야 할지도 모르겠다. 편지를 쓴다는 것, 마음의 정성이기도 하지만 이곳에서는 곧 입이 되고 말이 되어주니까.

  나는 일단 뭐라도 써보자, 하는 심정으로 왼손을 움직였다. 처음에는 아프리카에 살고 있는 부모님께, 그리고 내 모든 과정을 지켜봐온 친구 찰리에게, 오래간만에 쓰는 행위는 생각보다 막힘없이 술술 나아갔다. 마치 꼭 태워버려야 하는 낙엽들을 하나하나 화로에 넣듯이, 조금씩 치유되는 것 같은 마음이 아지랑이가 되어 꼬불꼬불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낙엽은 수북하게도 쌓여있었지만 이미 시들어버린 빈껍데기들이란 생각에 조금은 가벼워졌다.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채워 나아갈수록.

  두 통의 편지를 다 쓰고 나니 과정에 비해 결과는 생각보다 후련하지가 않았다. 우표도 예쁘게 붙였는데, 왜 이렇게 먹먹해지는 걸까.

  그때 나는 J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남이 되어버린 사이인데 편지를 써서 보낼 자격은 없었다. 더군다나 이런 상황에서는 더욱. 그래도 안부는 전해볼까, 괜히 더 심란함을 주는 건 아닐까, 그런데 심란한 일이 뭐가 있을까. 거의 2년씩이나 흘러버렸는데. 나는 풍차처럼 빙글빙글 펜을 돌리며 그렇게 생각했지만 마음은 더욱 심오해질 뿐이었다. 진작 체념했어야 하는 건데.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으리라, 사랑이란 건.

  커피를 한잔 더 마셔야 할 것 같아서 온수를 체크해보니 어느 새 물은 식어버려 미적지근해져 있었다.

  나는 콧노래 대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은 해결해야할 상실의 파편. 한숨은 방심하고 있던 체념하지 못한 내 마음을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예전과 같았으면 그녀의 이름만 떠올려도 금세 눈물을 머금었을 텐데.

  현실과 타협하고 나서부터는 얼이 살짝 삐끗하면서도 가끔씩은 우산을 들 줄 알게 되었다. 장대비처럼 그리움이 우르르 쏟아져 내려도 두 뺨만큼은 가려줄 우산. 불완전한 성숙의 흐름이 지난 시간 속에서부터 계속 흘러왔던 것이리라.

  문득 그렇게 그녀가 떠올랐다. 언제나 그랬듯이.

 

 

  *

  무언가 가슴속에서 녹아버린 날. 그것이 증발해 하필이면 눈에서 흘러내린다. 하필이면 그 많던 구멍들 중에서. 처음에는 심장이 사라지는 줄 알았다. 이별을 하면 심장부터 사라지는 건 줄 알았다. 그러나 통증이 있는 걸 보니 그렇지만은 않나보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 녹아버린 걸까.

  여름 끝자락의 장미처럼 마음이 나약해지고 시들어가는 것이리라. 아침에 맺힌 맑은 이슬도, 나를 보호해주던 장미의 가시도, 모두 제 역할을 상실해져 간다. 코로 천천히 숨을 내쉴 때마다 향기도 사라져간다. 점점.

  “여기까지 인가봐.”

  알림은 장문의 메시지를 알렸고, 마지막 한 문장에서 나는 좌절을 맛보았다. 결코 달콤하지 않은, 그런.

 

  J의 부모님을 뵙고 난 삼일 뒤, 저녁 마감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한손에는 정리 중이던 작은 냄비가 들려있었다. 냄비는 해질녘 기울어져가는 태양의 빛을 받아 붉은 장밋빛으로 물들여 있었다. 그 와중에 참 곱더라, 색이.

  나는 왠지 두 번 다시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없을 것만 같아서 붉은 빛을 반사시키는 냄비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 빛속에 허무함과 얼떨떨함 정도가 담겨있던 것 같다. 그렇게 기억한다. 곧 눈물 한 방울이 신발 위로 떨어지기 전 나의 마지막 행복했던 모습을.

  의사 집안이었다. 모 대학병원의 대원장, 그리고 수의학을 전공중인 그의 딸, J. 애초부터 어울리진 않았어, 나 같은 장사꾼과는. 그렇게 단념할 날이 올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다. 그게 삼일만이라는 게 꽤 빠르긴 했었지만.

  계속해서 바뀌는 그릇들과 사방에서 부딪히는 와인글라스 소리가 들리는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그녀의 아버지를 만났다. 마치 앵커와 출연진으로서의 만남처럼 대화는 인터뷰처럼 흘러갔다. 아마 J는 내가 중식 분야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어쩌면 못했을지도. 엄밀히 말하자면 분야랄 것도 없었을 테니까.

 

  자네 그래서...

  부모님은 뭐하는 분들이신가, 지금 사는 곳은 어디인가, 전세인가 매입인가 (다행히 월세냐고 묻지 않았다).

  대학은 졸업했는가, 아픈 적은 없는가, 실례했네. 직업이 의사라 건강은 늘 우선일세. 혹시 앓고 있는 동물 알레르기는 없고? 아 참, 요리사라고 자네. 이곳 요리는 입맛에 맞는지 모르겠군. 개인적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라네. 프랑스 요리를 좋아하는가. 나는 이곳 푸아그라를 참 좋아하지. 딸기잼과 사과에 곁들인 게 일품이야. 우선 한잔하지. 2015년산 보르도 와인일세. 프랑스 가뭄으로 와인 생산이 가장 적었던 해일세. 품종 퀼리티는 떨어지나 특유의 떨떠름함이 좋더군. 평소에 와인을 좀 하는 편인가. 사실 부끄럽게도 난 와인을 늦게 배웠지. 우리는 아시아인이 아니던가. 달팽이나 크루아상과 와인보다는 아무래도 스시와 정종이지 않겠나, 허허허. J가 어릴 적 생문어를 먹다가 목에 달라붙어 죽을 뻔 한 적도 있었지. 아마 기억 못할게야. 기억하고 있다고? 이런, 해산물을 즐기지 않길래 전혀 기억 못하는 줄 알았어. 자꾸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자네에게 미안하군.

  그가 잠시 와인을 마시며 목을 축일 때 웨이터는 송아지 구이를 들고 왔다. 미디엄 레어, 미디엄 레어, 그리고 웰 던.

  송아지 고기는 좋아하는가? 어린 송아지의 어깨살은 다른 고기에 비해 부드러움이 일품이지. 나는 완전히 익혀먹는 것을 좋아한다네. 오래 씹는 행위를 좋아하는 걸세. 오래 씹을수록 느껴지는 송아지 특유의 향이 있거든.

  요리사 앞에서 별 말을 다하는군. 그렇지, 자네 레스토랑은 어디에 있는가? 실례하겠네. 오기 전에 J에게 물어봤어야 했는데 깜빡했네. 혹시 말해줬었나?! 와인이 조금 들어가니 헷갈리는군. 나이 들면 다 그렇다네.

  그래서. 어떤 요리를 하고 있는가, 자네?... ...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긴장감이 그제서야 풀렸는지 미끄러지듯 침대 위로 쓰러졌다. 조금 전 내가 달팽이 살을 잘 골라먹었는지 껍질 채로 씹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머릿속이 캄캄했다. 마치 긴 겨울잠에서 깨어 난 듯이.

  침대에 엎드려 J에게 잘 들어갔는지 문자를 보내놓고 샤워를 했다. 머리를 털어내며 로션을 바를 때까지도 핸드폰은 조용했다. 어쩌면 그때부터인지도 모르겠다. 향기가 씻겨 내려가기 시작한 순간이.

 

  마지막 문자를 받고 난 뒤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여행을 계획했다. 마침 기계같이 반복되는 현실이 지겨워질 때였다. 어쩌면 괜찮은 척 이별을 외면하고 살려는 가식이 힘들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최대한 멀리 떠나고 싶었다. 그녀의 흔적이 없는 곳으로. 장미의 향기가 나지 않는 곳으로.

  핸드폰을 수도 없이 확인했다. 안톤 체호프의 단편집만 반복해서 읽었던 때처럼, 나는 그녀의 마지막 메시지를 암기할 정도로 읽었다. 수없이 답장을 쓰다 지우고, 통화버튼을 물끄러미 쳐다만 보았다. 잔잔한 물결에 비친 보름달을 바라보듯이.

  나는 조금 울었다. 너무 많이 울면 눈물샘이 말라버리게 될까봐, 그래서 조금. 적어도 내 안에 눈물들을 남겨놓고 싶었다. 모두 쏟아버리면 혹시나 후련해질까 봐, 겁이 나서 삼키고 또 삼켜냈다. 무의식속에 작은 연못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그게 너의 흔적이 되어줄 거라고 믿어버린 거야.

  잊고 싶지 않았다, 잊는다고 더 나아질 것도 없었다.

  선택받지 못해 그 자리에 머물러 메말라가던 불운의 장미는 여기까지였다고, 나는 생각했다.

 

 

 

 

 

 

 

 

 

 

 

 

 

 

 

  *

  Dreams are my reality

  The only kind of real fantasy

  Illusions are a common thing

  I try to live in dreams

  It seems as if it’s meant to be

 

  4구역을 빙그르르 돌며 노래를 불렀다. 정확히 말하자면 흥얼거렸다. 딱히 기분이 좋았거나 기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늘은 흐렸다. 곧 비가 내릴 것처럼 이른 시간부터 잿빛이 펼쳐져 있었다. 어쩌면 이런 날이 오히려 노래하기 딱 좋은 날일지도 모르겠다. 위로의 품으로 파묻히기 좋은 날이잖아.

  이별 후에 한동안은 이 노래에 꽂혀있었다. 가사의 무게보다는 적적한 멜로디가 좋았다. 공기의 흐름 자체가 적적했던 시기였던지라 그렇게 느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날도 오늘처럼 습한 날이었지, 오히려 훨씬 더.

  노랫말은 어느 축축했던 기억의 조각들과 그 속에 머물던 향기를 불러왔다. 결코 향기가 아름답진 않지만, 잊을 수는 없는.

  코로 스며드는 분산된 곰팡이 냄새, 창문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가 가슴을 불규칙한 리듬으로 자극하던 텍사스의 오후. 창문에 서린 습기 위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이 노래를 들었다. 10월의 Reality.

  여행길이라기 보단 방황에 가까웠다. 어설픈 계획을 가지고 이곳저곳 비행기에 몸을 맡기다보니 어느새 태평양을 건너와 있었다. 딱히 목적이 있던 여행은 아니었다. 단지 며칠 장사에 집중할 수가 없었던 것일 뿐(이라고 믿고 싶었다).

  시차 때문에 이른 아침 일찍 눈이 떠졌고, 시리얼을 조금 먹었다. 전날 밤의 숙취가 영원할 것 같은 고통으로 머리를 쪼았지만 기어코 아침을 챙겨먹었다. 해가지면 다시 포도향이 가득한 술로 내면의 기둥을 채워야 하기에.

  시리얼을 먹고 조깅을 하러나가다 실수로 바닥에 세워져있던 와인 병을 쓰러뜨렸다. 조금 남아있던 와인은 그대로 카펫을 적신다. 메이드 인 캘리포니아. 보르도 와인은 없었다.

  호텔 정문을 나서자 빗방울이 미세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타운맵으로 근처에 있는 공원과 코스를 확인하고 천천히 달리기 시작하였다.

  코스트코와 하이웨이 육교를 지나 나무가 웅성한 곳에 다다르자 공원 입간판이 보였다. 이제 막 해가 떠오를 때라 이슬냄새가 빗방울에 의해 부각되면서 기분이 상쾌했다. 밤새 머물던 차가웠던 공기가 소멸되고 있던 터라 유독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내 안에 가득했던 포도와 노폐물은 땀으로 배출되어 풀밭에 맺혀있던 이슬을 향해 날아갔다. 평소에 안하던 조깅을 하려니 폐가 뚱뚱해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내안의 작은 변화를 기대하면서 페이스를 조절하고 계속해서 쉬지 않고 무릎관절을 움직였다.

  나는 이번 기회에 무엇을 바꾸고 싶었던 걸까. 그 때는 그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그 무언가를 발견하기 위해 살아가는 게 아닐까. 때로는 웃고 울면서. 어차피 심장이 뛰지 않기 시작하면 모든 게 멈춰 버릴 텐데. 그런 결론까지 가지 말자. 안 그래도 버겁단 말이야, 하는 식의 생각을 하며 나는 땀을 흘렸다.

  공원을 여러 바퀴 돌고 호텔에 다다르자, 비가 거세지기 시작하면서 땀에 젖은 옷은 짙게 물들어 버렸다.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걸쳐 앉으니 욕조에 부딪히던 샤워물 소리가 창가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운이 좋았어, 나는 빗소리를 감상하며 살며시 두 눈을 감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잠시 후, 눈을 떠보니 낯선 오후였다. 나른함에 취해 잠이 들었다. 일어나서도 몸은 한참동안 침대에 꼼짝없이 붙어있었다. 눈만 깜빡깜빡, 빗소리는 어느새 익숙해져있다. 마른 장작이 타들어가는 소리처럼 비는 여전히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타닥타닥.

  몽롱했다. 나른함은 지속되었으리라. 잠깐 사이 꿈을 꾼 것만 같았지만 기억나지 않아서 공원에서 맡은 풀냄새를 자꾸만 떠올렸다. 방이 습해서 그런지 상쾌함만이 떠올랐다. 과연 습해서 만이었을까.

  오후 12시 19분. 여러 문자가 와있었다. 이틀 전 구매한 주전부리들의 영수증이 찍혀있는걸 보니, 나는 오랜 시간 핸드폰을 보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변화의 한 과정인걸까. 날 좀 내버려달라는 심보였을까(누구에게?). 뭐가 되었든 상관없다. 어차피 너의 메시지는 오지 않을 테니까.

  완전히 몸을 일으켜 카펫을 밟자 왠지 모를 씁쓸함이 밀려왔다. 괜히 핸드폰을 본 것 같다. 나는 일회용 호텔 슬리퍼를 질질 끌고 마치 핸드폰의 시간을 확인하듯이 자연스럽게 냉장고에 있던 새 와인을 오픈했다.

  코르크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봉인을 해체했고, 어젯밤의 포도향이 방안에 풍기자 침이 고였다. 때마침 아침에 쏟은 와인의 향까지 풍미를 돋우는데 일조했다.

  나는 글라스에 천천히 와인을 따랐다. 그리움, 그리고 약간의 허무함과 함께. 소파 밑바닥에는 어제 사용한 와인 잔이 그대로 놓여있다. 입술 자국이 굳어 버린 채로.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나는 창가에 기대어 노래를 틀었다. 습기가 심해 창밖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손가락이 제 멋대로 움직여 창문을 닦았다. 나는 흘러나오는 리듬에 맞춰서 두서없이 단어들을 창문에 끄적였다. 너와 관련된 모든 단어들을. 보드득 보드득.

  와인 한 모금을 크게 마시고 잔속에 남은 와인을 바라보자 기분이 꽤 우울했다. 그리움과 허무함이 잔에 덩그러니 남아있는 것 같아서.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 고독이란 단어를 생전 처음 꺼내게 되었던 때가.

  영화 ‘라붐’ OST가 흐르고 있다. 노래에 대한 추억이 생기고 말았다. 그러나 노랫말처럼 결코 낭만적이지는 않았다.

 

  Dreams are my reality

  I like to dream of you close to me

  I dream of loving in the night

  And loving you seems right

  Perhaps that’s my reality.

 

 

 

 

 

 

  *

  표정만 봐도 상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그런 사이가 있다. 오래된 연인이나 부부, 견주와 반려견, 그리고 찰리와 나.

 

  점심시간이 지나고 운동장에 나가려던 찰나 접견실에서 호출이 왔다며 피터 씨가 알려주었다. 이곳에 손님이 찾아온 건 처음이었다. 기분 좋은 바람이 어느덧 훌쩍 자란 풀의 머리를 살랑살랑 흔들어주던 날이었다.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때마침 바람이 색을 배달하던 때에 찾아와 주어서.

  “벚꽃들이 개화하기 시작했더군. 안에서도 나무가 보여?”

  오랜만에 듣는 찰리의 목소리는 반가웠다. 매년 꽃이 피어나듯 설레는 익숙함이 목소리에 묻어있었다.

  “응. 뒷산이 보여. 그런데 분홍색이 없는걸 보니 벚꽃나무는 없는 모양이던데”

  “벚꽃나무는 도로에만 있어서 그래. 전부 가져다가 심는 거잖아.”

  “일본산일까?”

 하고 나는 물었다.

  “글쎄, 중국산일지도 모르지. 대세는 메이드인 차이나 아니겠냐. 신이 창조한 모든 것을 제조하니까”

  나는 피식 웃었다. 형식에 벗어난 인사말이 오랜만이어서, 꿈을 꾸는 듯이 마음이 가벼웠다. 서로의 입에서 안녕이라는 말을 결코 뱉은 적이 없었다. 그만큼 자연스레 섞여있던 것이리라. 모래 사이에 파묻힌 작은 조개껍데기처럼.

  “그나저나 2724라니, 마치 핸드폰 끝자리 같군. 안은 좀 어때, 지낼 만해?”

  찰리가 묻는 안부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형식적으로 질문하기는, 하는듯한 입꼬리와 함께.

  “잘 있었어, 덕분에. 트럭상태는 좀 어때?”

  “쿄우만큼 잘 있으니 걱정 마. 배터리 방전될까봐 가끔씩 시동도 걸어주고. 요새는 환기도 시켜주고 있어.”

  “고마워. 역시 찰리밖에 없다. 오는 데는 얼마나 걸렸어?”

  스피커에 하울링이 생긴다. 찰리와 나 사이에는 유리벽이 가로 막고 있고, 얼굴 아래쪽으로 마이크가 각자 한 개씩 놓여있다. 마이크 옆에는 남은 시간을 알리는 작은 전광판이 숫자 ‘18’을 띄우고 있었다.

  두 시간, 하고 찰리는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어보였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 나름 수도권이라 금방일줄 알았는데”

  “차가 막혀서 그럴걸. 안막이면 한 시간정도 걸릴 거리야. 이봐, 그런데 여기 다른 사람들은 사는 거야? 왜 이렇게 조용하냐. 꼭 수도원에 온 것 같잖아”

  우리는 자연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햇빛이 통 들어오지 않는 곳이라 그런지 조금은 침침한 듯한 기운이 맴돌았다. 경찰서 안에 책상 하나 달랑 놓인 조사실 같은 그런 침침함이었다. 별로 다를 것도 없겠지만.

  “글쎄, 오늘 유독 더 조용하네”

 하고 나는 이어서 말했다.

  “혹시 J에 대해 들은 소식은 없어?”

  방문을 나설 때부터 어쩌면 J의 소식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사실 그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구속되기 전에 J가 마침내 수의사가 되었다고 들었지만 축하 메시지 한통 보내지 못했다. 이미 그때는 완전히 남이 되었었기에 그녀의 축하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J는 내 소식을 궁금해 하고 있을까. 완전히 잊어버린 걸까. 잘려나간 머리칼 같이 옛것에 대한 그리움이 조금은 남아있지 않을까, 하는 괜한 기대감. 뭐가 되었든 간에 이제는 상관없는 일이겠지만.

  “수의사 시험 패스한건 알고 있지?”

  “응. 그거야 여기 오기 전 일이니까”

  흐음, 하고 찰리는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어갔다.

  “그 이후로 잘 안 풀리는 모양이야. 벌써 두 곳이나 레지던트 생활을 포기했어. 아무래도 요새는 수술 말고도 애견미용이나 호텔까지도 동시에 운영되고 있는 체제다보니 체력적으로 꽤 버거운 모양이야”

  “동물병원이 복지화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네”

  “규정된 법이 없으니 진료만 하기에는 경쟁이 치열해지는 거지. 애완가족만 해도 천만 명인 시대라고”

  그녀는 분명히 병원은 병원답게 아픈 이들을 돌보야만 한다는 확실한 주장만을 내세웠을 것이다. 애초에 연약한 생명을 한 마리라도 더 살리고 치료해야겠다는 목적만이 가득했었으니까.

  “또 다른 소식은 없어?”

  내 눈동자는 “나와 관련된 건 없어?” 하고 묻고 있었다.

  나는 또 무엇을 기대하는 걸까. 사라진 불씨 앞에서 지푸라기는 쥐어서 어쩌려는 것일까. 한줌의 재도 남아있지 않은데. 쥐어진다 한들 아무짝에 쓸모없잖아. 쿄우.

  시간의 일부가 여전히 과거에 머물고 있다는 건 아주 슬픈 일이다. 사랑이라는 서로의 끈끈했던 매듭이 끊어진 날, 떨어진 실타래들은 그대로 아픔이 되어 내 속 어딘가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누군가 찾아주길 원하고 있지만 내 자신이 이를 거부해왔다. 남겨진 실타래의 가치는 내게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었다. 갈라진 운명이 강으로 흘러가버렸다면 찾아볼 수는 있겠지만, 바다로 건너가 버리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왜 항해를 하지 않았을까. 파도가 꼭 거세게 출렁이는 것만은 아닐 텐데.

  겁이 났던 것이다. 엇갈릴까봐. 내가 떠나면 네가 돌아올까 봐. 너라면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믿고 싶었으니까.

  “많이 걱정하고 있어, 쿄우”

  “무슨 소리야?”

  “J가 걱정 많이 하고 있다고”

  심장이 요동친다. 누가 걱정하고 있다고? 다시 한 번 얘기해봐, 요동치는 심장이 재촉한다.

  “J를 만났어?”

 하고 나는 물었던 것 같다.

  “응”

  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전화가 왔었어. 쿄우 트럭이 오랜 시간 보이지 않아서 걱정된다면서.”

  찾아왔었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언제부터였을까, 문자메시지를 보낸 순간부터였을까, 아니면 단순히 사라져서 궁금증에 의한 것은 아닐까.

  “마침 근처에 있다 길래 만났어. 내가 트럭을 관리하고 있다고 하니 깜짝 놀라더군. 쿄우에게 무슨 일이 생겼냐면서. 순간 아뿔싸 했지. J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구나 하고.”

  내 핸드폰 번호가 정지된 것을 알고 집요하게 물어봐서 어쩔 수 없이 그동안의 일을 전부 얘기했다고 찰리는 말했다.

  “당황스러웠어. 맑은 날 소나기가 지나가듯 갑자기 펑펑 울더군. 몇 번이고 사과했지. 쿄우가 이렇게 되기까지 나는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J도 그렇게 느꼈겠지. 눈물은 쉽게 멈추지 않더군. J가 슬퍼하는 걸 보니 나도 울지 않을 수가 없었어. 되돌아간 것 같았지. 말라버린 생선처럼 모든 게 흉측했던 시기로. 비린내가 지진처럼 진동하던 그때로.”

  찰리는 동공이 살짝 흔들리는 나를 보고 잠시 말을 멈췄다. 나는 감정이 약간 올라왔는지 침을 크게 꿀꺽 삼켰다. 찰리는 말을 쉬고 약간의 여운을 남겨두고 싶었지만 시간은 2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시간이 정해져있다 보니 일단 생각들을 언어화시켜 뱉어내야 했다. 소화를 잘 시킬 수 있을지는 이후 내 몫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안절부절 하길래 일단은 내가 쿄우를 만나서 소식을 전해주겠다고 했어”

  “고마워, 찰리”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그리고 조금 복잡했다. 기쁨과 동시에 또 다른 슬픔이 형성된 것 같아서 약간은 침울해졌다.

  그토록 기다리고 궁금해 하던 J가 나를 찾았는데, 왜 하필이면 나는 지금... 너무 한심하잖아, 하고 나는 생각했다.

  고래의 입속처럼 침침한 접견실, 남은 시간은 1분이라며 불이 번쩍 거린다.

  “와주어서 고맙다, 찰리”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급하게 대화를 마무리 짓게 되어 미안하듯.

  “자주 올게. 차 안 막히는 날에 말이야. 혹시 J에게 연락하고 싶으면 이쪽으로 연락해봐. J의 새 주소야. 안부라도 전해 보라구. 쉽진 않겠지만 분명히 기다리고 있을 거야. 오늘은 여기까지”

  찰리는 종이 한 장을 펼쳐 보여주었다. 지난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주소였다. 분홍으로 가득했던 그곳에서부터.

  손바닥 위에 급하게 주소를 적고 있을 때, 마이크가 자동으로 꺼져버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교도관이 문 밖에서 노크를 했다. 찰리는‘펴언지 하알게’ 라며 입을 크게 벌려 말하고는 문밖으로 나갔다. 자, 나도 일어나볼까.

  나는 혹시나 손에 땀이 나서 주소가 번질까봐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호호 불며 방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나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깊은 생각에 잠겨 긴 밤을 지새웠다. 뒤집힌 거북이 껍질 속에 갇혀있는 것 같이 외로운 밤이었다. 답답한 마음은 없었다. 껍질 속에서의 삶은 언제부터인가 낯설지 않게 되었으니까.

  달빛이 들지 않아 밤은 어두컴컴했다. 가끔은 내가 눈을 뜨고 있는 건지 감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또한 익숙하다. 어둠마저 일상이 되어버린 거야.

  나는 어둠으로 둘러싸인 허공 위에 편지를 썼다. 어둠 속 안구는 펜이 되어 요리조리 굴러다닌다. 좌우로 바쁘게 굴려대며 지난 추억을 회상시킨다.

 

  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꿈. 적어도 악몽 같지는 않았다. J를 떠올릴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눈 주위가 뜨거워진다. 현실을 자꾸만 꿈으로 순화시키려는 내가 불쌍해서.

  시간이 얼마만큼 흘렀을까. 조금씩 방안의 사물들이 형태와 색조를 부옇게 띄우며 눈에 담기기 시작했다. 창문을 통해 거대한 해일이 서서히 다가오듯 방안은 점점 파랑으로 물들어갔다. 나는 가만히 누워 스며드는 흐리고 푸른 빛을 반긴다. 오늘도 와주었구나.

  푸른 해일이 온전히 아침을 감싸자 새벽의 편지는 잠시 접어두고, 나는 손으로 바닥을 집고 일어났다. 작은 새들의 언어가 편지가 되어 반갑게 내 귀에 닿는다. 일출이 평소보다 빨라져 유독 더 시끄럽게 지저귄다.

  여름이 오나보네, 아직 희미하게 남아있는 손바닥에 물든 잉크를 바라보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

  날이 점점 따뜻해지면서 4구역에도 다색의 아름다움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각종 곤충들이 잠에서 깨어날 무렵부터 푸른 새싹들도 제법 자라나 꽃의 모양을 갖추어갔다. 민들레꽃, 아카시아 꽃. 카일 그리고 나팔꽃.

  조금 더 자라나면 날개달린 친구들이 찾아와 향기를 맡게 되겠지. 까치들은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낙하 비행을 뽐내며 춤을 출 것이고, 비둘기들은 짝을 지어 다니며 사랑을 전하겠지. 잠자리들은 하늘에서 별자리들을 마구 그려낼 테고, 그것들이 희미해질 때가 되면 뒷산에 초라하게 매달려 있던 힘없는 낙엽들이 바람을 타고 날아와 빙글빙글 돌며 떨어지겠지, 외로운 발레리나처럼.

  곶감이 생기는 시기가 되면 태풍이 불어 모든 낙엽들은 우수수 바닥에 떨어질 것이고, 그 위에는 머지않아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게 될 것이다. 그리고 태양은 어느 순간부터 다시 일찍 떠오를 것이다, 지난날처럼.

  모든 것은 반복된다. 모든 것이 약속이다. 절대로 이 사실은 변하지 않을 거야. 다만 높고 낡은 벽만큼은 언젠가 허물어지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은 언제나 변함없이 가슴속에 존재하리라. 노골적으로. 숨은 채로.

  그렇게 사계의 두 번째 파트가 시작되었다.

 

  내가 1시간 동안 4구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한정적이었다. 달리기를 하거나 뒷짐을 지고 걷거나, 때로는 흥얼거리기도.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 날아다니는 비행기를 바라보는 일. 구름의 모양을 관찰하는 일. 작은 것들과 소통하는 일. 그리고 모든 것과 동시에 무한한 상상을 펼쳐내는 일.

  잠시 앉아 쉴 수 있는 벤치나 나무도 없었다. 묵직한 철문과 높고 단단한 벽만 있을 뿐.

 

  나는 가끔씩 곤충이 되어버린 것 같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방에 있거나 4구역에 나와 있거나 어디서든 눈을 감고 있을 때. 뭔가 나 자신이 번데기 같다고 생각했다. 겉으로 답답함을 잘 표현하지 않기 때문에 뇌가 그렇게 반응한 것인지도 모른다. 부화를 기다리는 번데기 속 사람 모양을 하고 있는 곤충. 난 어떤 형태로 부화하게 될까, 알록달록한 날개를 등에 업은 독 없는 나비? 흉측하고 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

  껍데기를 벗어 나가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다. 이곳은 그런 곳이었다. 변태중인 번데기들의 나무 없는 숲과도 같은. 어째, 징그러운 것 같기도 하고.

  구름한 점 없이 맑은 날, 4구역에서 죽은 풍뎅이를 나르던 개미 무리를 보았다. 나는 개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래도 기본적인 상식은 있다. 몸통이 삼등분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 확대해서 보면 굉장히 무섭게 생겼다는 것 (개인적인 관점). 피가 붉지 않다는 것(피가 있는 건지도 사실 잘 모른다). 그리고 그들만의 의사소통은 확실히 있다는 것. 더듬이 교류랄까.

  나는 개미들이 과연 자신보다 큰 풍뎅이를 어디로 옮기는지 궁금해서 토끼뜀자세로 움직임을 쫓았다. 그들은 한참을 옮기더니 기어코 개미집 입구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입구가 넓어서 깜짝 놀랐다. 밤하늘의 별보다는 크고, 콧구멍보다는 작았다. 풍뎅이는 구멍보단 조금 컸는데 개미들은 이리저리 각도를 바꿔가며 종이를 구겨 넣듯 꾸역꾸역 집안으로 밀어 넣는데 성공했다.

  풍댕이가 구멍(집)속으로 사라지자 힘을 합쳐 나르던 개미들은 사방팔방으로 흩어져버렸다. 아마도 다른 식량을 구하러 발길을 돌린 것이리라. 나름의 포지션이 정해져 있는 거야, 성실의 아이콘 아니었던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거대한 베짱이가 되어.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개미굴 옆에 달달한 사탕 하나를 놓아보았다. 사람에게도 유혹적인 달콤한 사탕이 손톱보다 작은 개미들에게도 매력적일지 궁금했다.

  몇 초도 지나지 않아 굴에서 수십 마리의 개미들이 기어 나와 사탕에 몰려들었다. 유혹에는 너희나 우리나 다를 게 없구나, 하고 나는 웃었다.

  다음 날, 나는 흥미로운 점을 발견한다. 어제 놓았던 사탕의 일부분이 아주 작게 남아있던 것이다. 마치 허물만 남겨진 껍데기처럼. 벌들이 꿀을 채취하듯 단맛만 빼어먹은 걸까, 그렇다면 정말 대단한 거잖아.

  나는 괜히 기쁜 나머지 안경알만한 돌들을 주어 개미굴 근처에 대왕그릇을 만들고, 풀잎들을 쌓아 주변에 낮은 울타리를 세웠다. 다른 먹이들을 무난하게 옮길 수 있게 입구도 여러개 만들어 놓았다.

  나는 매일 텅 빈 사탕찌꺼기를 치워주고, 대왕그릇에 새로운 사탕을 채워주었다. 청포도 맛, 오렌지 맛, 레몬 맛, 그리고 자두 맛.

  따사로운 햇살 아래, 살랑살랑 몸을 터는 꽃들 사이에서 우리는 작은 추억을 쌓아갔다. 개미들을 쫓다 발견했던 네잎클로버와 다섯잎클로버, 무당벌레의 화려한 날개, 커다란 눈송이처럼 자라나있던 민들레씨, 변장중인 메뚜기, CCTV가 되어주는 거미.

  모두가 생명이고 모두가 친구였다.

  강하고 부드러운 저 하늘 위 둥그런 장미도 어쩌면 지금까지 내내 친구였을 거라고 생각하니 외롭지가 않았다, 오늘만큼은.

 

  가만히 보면 목소리는 늘 쉬어있었다. 대화를 나눌 대상이 없다보니 방에서 만큼은 목소리를 사용할 일이 없었다. 사방이 두툼한 벽이었으니까. 소리마저 꼼짝없이 가둬두는.

  물론 혼잣말을 할 수는 있다. 소리 내어 기도도 할 수 있고 책을 소리 내어 읽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홀로 방안에 있을 때만큼은 소리를 내기가 싫었다. 때로는 나 스스로의 묵상을 일종의 형벌로 포함시키고 싶었던 걸까.

  적응되어버린 건지도 몰라. 고요한 외침과 침묵의 메아리들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갓난아기로 세상에 나올 무렵부터 지금까지 수도 없이 울었을 텐데. 이 참에 성대도 잠시 휴식을 가지는 것도 괜찮겠지. 그동안 또 얼마나 많은 연기를 마셨겠어. 당분간은 물에 들어가는 거야. 물고기가 되는 거지. 뻐끔뻐끔 공기나 뱉어가면서.

  비록 혼자 있을 때 나의 성대는 굳게 닫힌 알리바바 도적들의 동굴 같았지만, 언제나 굳게 닫혀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잠자리들이 뜨거운 햇빛을 피하기 위해 그늘을 찾아 날개 짓을 하던 어느 날, 오랜만에 ‘열려라 참께’ 주문을 외친 사람은 사형수 파브였다.

  사형수라고해서 격리가 되거나 마주치지 않거나 하진 않는다. 일반 수용자들과 똑같이 독방을 쓰고 같은 수용동에 머문다. 그만큼 이곳의 철문은 정말 단단한가보다. 벽에 구멍을 내며 탈옥을 계획하는 일은 영화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인 듯 싶었다. 내가 만약 소장이라면 이 벽과 문을 뚫는 자만큼은 내 보내줄 것 같다. 그만큼 안전한 것이리라. 어미 품에 안겨있는 새끼 고릴라처럼.

  파브를 만날 수 있었던 건 운동시간이 같았기 때문이었다. 매일 마주치다 보니 인사를 나누게 되었고, 짧은 대화도 나누게 되었다. 파브는 여러 피자 조각중에서 가장 토핑이 화려한 12구역을 사용했다. 내가 운동하는 4구역이 사하라의 작은 부락 같은 느낌이라면 12구역은 마치 파라오의 안방 같았다. 금처럼 눈부신 정원이자 농장이었다. 풍성한 잎사귀들, 활기차게 땅과 하늘을 누비는 생명들. 운동장 한 가운데에는 허리 높이의 코스모스가 살랑이고 벽 아래에는 각종 채소들이 매달려 있었다. 주렁주렁.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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