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복수를 위하여 (5)
허무하게 오웬을 보낸 벨리타의 입에선 기다란 한숨이 늘어져 나왔다.
“오웬 네빌.”
겨우 정신을 차린 벨리타는 조금 전까지 앞에 있었던 실루엣을 그려 보았다.
당찬 눈빛과 신념이 어렸던 음성이 그녀의 머릿속에 가득 차올랐다.
“날 위해서 힘을 써 줘야겠어.”
이번 생에 오웬은 원하는 대로 프렌시아를 뒤바꿀 것이다.
그의 목적이 왕으로 군림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모두를 위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으나 오웬은 끝내 원하는 바를 이룰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뜻은 벨리타의 염원을 들어줄 탄탄한 토지가 될 터였다.
사라진 실루엣이 뭉개지고 연기가 되어 사라지자 벨리타는 발코니의 문을 열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한 회장 안으로 그녀의 몸이 녹아들었다.
* * *
“대체 생각이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네 위치가 무엇인지 잊은 거냔 말이다!”
앉은 소파가 흔들릴 만큼 큰 소리를 내는 로만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화가 서려 있었다.
당장에라도 큰 벌을 내릴 듯한 그의 태도에도 벨리타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제 고함에도 흔들림 없는 벨리타를 답답한 심정으로 바라보던 로만은 조금 전보단 한껏 누그러진 목소리를 내었다.
“몇 달, 아니 며칠도 아닌 1년이야. 1년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 알고서 그 제안을 수락한 거니?”
어느새 말끝엔 화 대신 안타까움과 안쓰러움이 묻어났다.
처음 벤자민을 통해 아밀리아와의 거래를 들었을 때, 로만은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었다.
살갑게 지내진 못했지만 벨리타는 그에게 특별히 소중한 존재였다.
첫사랑인 죽은 왕비를 똑 닮은 딸이 자신의 성격을 닮아 무뚝뚝하여도 그의 사랑은 한결같았다.
그런데 그런 딸이 단 며칠이 아니라 일 년을 타국에서 홀로 지내게 되었다니!
로만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오. 벨리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겉과 속이 같지 않단다.”
평생을 왕궁 안에서만 살아온 딸이 얼마나 순진한지 느끼게 된 로만은 걱정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밀리아가 무슨 생각으로 유학을 입에 올렸는지는 깊이 생각지 않아도 알 법했다.
볼모.
평화 협정을 빌미로 라플레에게 볼모를 원하는 게 바로 프렌시아의 속뜻이었다.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벨리타의 손을 로만은 부드럽게 잡았다.
“벨리타. 지금이라도 없던 일로 하면 그만이다. 평화 협정도 없었던 일로 하면 그만이야.”
나라를 위한 것만큼 대의는 없다지만, 로만에겐 벨리타가 더 중요했다.
촉촉이 젖은 아비의 눈을 바라보던 벨리타가 그의 손을 놓으며 도리질을 쳤다.
“어렵게 얻은 기회입니다. 전하. 물론 전하께서 무엇을 걱정하시는지 모르지 않습니다만 부디 심려치 마세요. 제 나이 벌써 스무 살입니다. 성년을 지난 지가 두 해를 넘겼어요. 그러니 더는 아무런 말씀 하지 마세요. 전하.”
평화 협정만은 생각하여 떼를 썼던 그날과는 달랐다.
프렌시아가 어떤 마음을 먹을지 뻔히 아는 벨리타였다.
그래서 더욱이 유학길에 올라야만 했다.
이사야에게 접근해 왕실의 정보를 빼내어 오웬에게 넘기려면 그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마음을 돌릴 길이 없어 보이는 눈빛에 결국 로만은 고개를 숙였다.
입을 꾹 다물고서 땅이 꺼지라고 한숨만 내쉬는 로만을 대신하여 르네가 울먹였다.
“가여운 내 새끼.”
“그리 말씀 마세요. 모든 건 우리 라플레를 위한 길이니까.”
온몸이 부서져라 안는 르네의 품 안에서 벨리타는 이를 악물었다.
가능하다면 복수의 마침표를 찍을 때 이사야에게 묻고 싶었다.
왜 나를 버린 거냐고.
왜 나를 배신했느냐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기 직전까지 궁금해했던 것.
‘당신은 나를 진정 사랑하긴 했을까?’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건 그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벨리타는 직감했다.
묻지 못한다면 묻지 않으면 그만이리라.
어차피 일말의 사랑 대신 증오만 남은 지금, 이딴 질문 따윈 우스운 일이기만 했다.
“외숙.”
흐느끼는 르네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 로만을 두고 나온 벨리타는 벤자민을 불렀다.
누이의 슬픔에 함께 취해 있던 벤자민은 빨갛게 달아오른 눈두덩을 누르다 말고 몸을 시립했다.
“예. 공주님.”
“현재 가장 큰 상단의 이름이 어떻게 되죠?”
“미아루 상단입니다. 에릭 호프만이란 자가 운영하는 곳이죠. 그런데 그것은 왜?”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가라앉은 눈을 크게 뜬 벤자민은 고개를 갸웃 움직였다.
갑자기 상단은 왜 찾는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을 깊게 해 보아도 제 머리론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미아루 상단.”
입 안에서 한 번 더 이름을 곱씹은 벨리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 갔다.
“그곳도 보퍼트 가와 연관이 된 곳이겠죠?”
“그렇습니다. 라플레 내의 상단, 상회 중 우리 보퍼트가와 인연이 닿지 않은 곳은 없습니다. 공주님.”
말의 끝엔 자부심이 넘쳐났다.
지난번 프렌시아 왕궁 연회에서도 알 수 있었듯이 벤자민의 가문 보퍼트가는 라플레의 무역을 총책임지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벨리타의 친어미인 왕비가 죽었을 때 왕궁의 대신들 모두가 입을 모아 보퍼트가의 장녀 르네를 새로운 왕비의 적임자로 생각한 것도 그들의 배경이 한몫을 했었다.
“에릭이라 했죠? 그자와 만나게 해주세요.”
“에릭 단주와요?”
“네. 외숙. 이 일은 절대로 새어 나가선 안 됩니다. 다른 이를 시키지 말고 그와 직접 만나세요.”
듣는 이가 없었지만 벨리타는 한껏 낮춘 목소리로 거듭 당부했다.
최대한 몸을 사리는 모습에 벤자민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굽히고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왜냐며 묻고 싶은 말이 산더미처럼 목구멍을 찔러 왔지만, 심연처럼 깊은 에메랄드 눈동자는 그 이상 묻지 말라 말하는 듯했다.
“그럼 부탁할게요. 이번에도 수고해 주세요.”
“예. 공주님.”
마지막까지 낮은 목소리를 고수한 벨리타는 열 걸음 이상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로즈와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홀로 남은 벤자민은 그녀가 사라진 곳을 한참이나 쳐다보고서야 서둘러 걸음을 떼었다.
어쩐지 요 며칠 동안 한 뼘 이상이나 자라 버린 공주가 낯설게만 느껴지는 그였다.
* * *
점점 따뜻해지는 날씨 덕분에 나무들은 새싹이 돋고 땅은 푸르게 물들었다.
이제는 가벼운 가디건만으로도 추위를 덜 수 있음에 벨리타의 옷차림은 꽤 가벼워졌다.
끼익.
왕실 안에서는 볼 수 없던 낡은 나무문이 듣기 싫은 소음을 내며 열렸다.
오히려 바깥보다 시린 공기에 벨리타는 몸을 움츠렸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본 벤자민이 그녀의 어깨 위로 커다란 숄을 둘러 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벨리타 공주 저하.”
둥근 탁자가 있는 중앙 바로 위 계단에서 내려온 사람은 진한 콧수염이 인상적이었다.
머리 위 중절모를 벗은 그는 벨리타를 향해서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숙였다.
손을 내밀어 인사에 화답을 한 벨리타가 벤자민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먼저 자리에 앉자, 그도 재빨리 맞은편에 엉덩이를 내려 두었다.
“준비한 것은요?”
“모두 끝내 두었습니다. 여기. 먼저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족하시다면 지금 당장 은행에서 바꿔 올 수 있습니다.”
남자가 탁자 위에 올린 것은 묵직한 벨벳 주머니 다섯 개였다.
하얀 장갑을 낀 손이 뻗어져 주머니 안을 확인했다.
그 속엔 한눈에 보기에도 값이 꽤 나가는 금이 가득했다.
다섯 개 모두를 꼼꼼히 확인한 벨리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족하진 않을 것 같군요. 모두 잃어야 해서 미안하지만.”
“아닙니다. 모두 라플레를 위한 일 아니겠습니까. 저도 역사에 남을 수 있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요. 에릭. 그대의 노고를 내 절대 잊지 않겠어요.”
진정성이 느껴지는 이야기에 에릭은 콧수염을 만지며 가슴을 활짝 폈다.
벤자민이 말한 에릭 호프만을 처음 만난 건 지금보다 5일 더 전이었다.
느닷없는 제1공주의 호출에 깜짝 놀란 에릭에게 벨리타는 자신의 계획을 털어 두었었다.
‘프렌시아가 스스로 자멸할 길을 만들 것입니다. 그대가 도와주세요.’
벨리타가 에릭에게 원한 건 그의 재력과 능력이었다.
물론 완전히 모든 부분을 말하는 건 아니었다.
일정 부분은 벤자민이 감당할 것이었지만, 벨리타에게 필요한 것은 상회였다.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상회를 만들기엔 벤자민보단 직접 상단을 운영하는 에릭이 적합했다.
자금 부족으로 허덕이는 오웬의 혁명군에게 접근하기엔 상회야말로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마차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최대한 빨리 갈 수 있게 모두 항로로 모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 이름은 베네시아로 지었습니다.”
주머니를 챙긴 벨리타는 에릭이 건네는 작은 명함을 받았다.
[베네시아 상회. 리타.]
단출하지만 깔끔하게 적힌 이름이 썩 마음에 들었다.
필요한 것을 모두 가지게 된 벨리타는 더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자 에릭과 벤자민이 그 뒤를 따랐다.
먼저 준비된 마차에 올라타는 벨리타를 따라 에릭도 함께 오르자 벤자민은 문을 닫아 주었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공주님.”
“다녀올게요.”
창밖으로 머리를 숙이는 벤자민에게 짧은 인사를 마친 벨리타는 곧 마차가 움직이는 걸 느꼈다.
어깨 위 걸쳐 준 숄을 당겨 푹신한 마차 벽에 몸을 기댄 벨리타는 피곤함이 밀려와 눈을 감았다.
앞으로 이십 일.
그녀가 프렌시아 왕실 아카데미에 입학할 날이 머지않았다.
그리고 그 전에 해야만 하는 일을 하기 위해 그녀는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숨을 죽였다.
* * *
골목 어귀는 이곳이 수도, 팔빈이라 생각하기조차 어려운 모습이었다.
당장에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금이 간 벽과 아무렇게나 덮어둔 지붕은 습한 냄새까지 올라와 속이 울렁거렸다.
붉은 홍등가가 근처에 있던 터라 반쯤 헐벗은 여인들이 매혹적인 미소를 짓고 거리를 배회했다.
동냥을 구걸하는 거지들이 곳곳에 깔린 골목 입구에 마차 한 대가 섰다.
척 보기에도 값비싸 보이는 마차의 등장에 많은 사람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도착했습니다. 아가씨.”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마차 안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
콧수염이 난 남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내린 여인은 강렬하고 야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밑단까지 풍성한 프릴이 있는 치마 부분은 허벅지 위까지 찢어져 말간 살이 간간이 드러났고, 가슴 부분은 깊게 파여 조금만 허리를 숙여도 그 속의 골이 전부 보일 듯했다.
그러나 이런 드레스보다 더 깊은 인상을 남기는 건 여인이 쓰고 있는 가면과 기다란 머리카락을 가린 듯 쓴 베일이었다.
반짝이는 검은 보석으로 만든 가면은 여인의 코 위까지 가리고 있었는데 어찌나 화려한지 도톰하고 붉은 입술은 보이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