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품이 뻑뻑 나오는 나른한 오후.
몇 그램 되지 않는 눈꺼풀이 어찌나 무거운지, 천근만근이다.
2차 평가를 앞두고 보컬 팀 중간 점검에 나선 유라는 병든 닭처럼 졸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다정한 키스… 별빛 내리는 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그 앞에서 노래를 부르던 민주가 긴장한 기색으로 눈치를 살폈다.
건반에서 손을 떼고, 유라는 가볍게 손을 털었다.
비 한 방울 오지 않았는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손목이 시큰했다.
직업병이려니… 하고 넘어가려는데 문득 재미난 생각이 떠올랐다.
붉게 칠한 입술 끝이 음흉하게 말아 올라갔다.
“아우, 손목 아파….”
부러 낸 앓는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안 되겠다. 이수야, 네가 좀 와서 쳐주라.”
유라의 눈길이 가닿는 곳, 그곳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앉아 있는 이수가 있었다.
저요? 하며 검지로 스스로를 가리키는 얼굴이 황당 그 자체였다.
2년차 조연출, 서이수.
늘 모자와 안경으로 화장기 없는 얼굴을 가리고, 가슴까지 오는 머리는 아무렇게나 질끈 묶고 다니는.
“나 손목 나갔나 봐, 아파.”
“음악 감독님 불러올게요.”
자리에서 일어나, 이수는 쓸데없는 소리 말라며 유라의 제안을 단번에 거절했다.
“얘 감 못 잡는 거 봐. 이 노래가 너무 오래 돼서 모른다잖아. 네가 포인트를 딱딱,”
“딱딱, 그거 하라고 언니 부른 거예요. 잘 모르나 본데.”
잔잔하게 시작되는 두 여자의 말씨름에 꾸벅꾸벅 졸던 아이들의 눈이 금세 말똥말똥해졌다.
먹히네, 역시.
저들의 대화에 관심을 보이는 아이들을 보며, 유라는 조용히 웃음을 훔쳤다.
“잘 몰라.”
“네?”
“나도 이 노래 잘 모른다고.”
“이 언니가 진짜….”
“너 김 대표 팬이라며. 이 노래도 그래서 고른 거고, 네가 직접.”
<별밤>, 이번 MBS 아이돌 선발 오디션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는 김본의 숨은 명곡으로 이수에겐 학창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노래였다.
지긋한 눈길로 그녀는 유라의 의중을 파악하려 애썼다.
갑자기 파업 선언하고 뭘 하잔 건지, 대체.
입술 끝에 붙어 있는 장난스런 웃음을 보아하니, 절 놀리려 하는 거 같기도 하고.
근데 또 일하면서 실없는 장난칠 인사는 아니잖아?
“입사할 때 PD 오디션 기가 막히게 했다며, 너. 건반에, 춤에, 노래까지. 소문 쫙 났어.”
“소문을 쫙 냈겠죠, 안 선배가.”
“애들 졸려 하는 거 안 보여? 와서 한 번만 불러줘 봐라, 어?”
그게 목적이었어… 이수는 그녀의 속셈을 알아차리고 핏 웃었다.
“문 잠가요, 그럼.”
그 소리에 유라는 문가에 앉은 재선을 쳐다봤고, 눈치 빠른 그가 벌떡 일어나 연습실 문을 잠갔다.
유라가 옆으로 자리를 옮기자, 그녀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 이수가 그 빈자리를 채웠다.
모두들 기대 가득 찬 얼굴로 이수를 바라봤다.
“딱 한 번만이에요.”
그녀가 건반 위에 손을 올리자, “오오, 서이수!” 하며 재선이 호들갑을 떨었다.
“시끄러.”
특유의 카리스마로 그의 입을 막아버린 이수가 가느다란 손가락을 움직여 부드러운 선율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 * *
키키킥. 장난 삼아 안무 동작을 하며 복도를 지나던 원해는 연습실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우뚝 멈춰 섰다.
“…뭐야?”
걸음을 옮기는 원해를 따라, 건도 연습실 쪽으로 살며시 다가갔다.
“헐, 저거 서 피디님 아니야?”
“맞는 거 같은데….”
건은 세로로 길게 난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이수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클라이맥스에 다다르자, 이수는 목을 길게 빼고 고운 목소리로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아이들이 신이 나 두 손을 흔들어 반원을 그리며 코러스를 자처했고, 그 중심엔 물론 해맑게 웃는 재선이 있었다.
반주는 점점 빨라져 멜로디 위에 그 흥을 그대로 실었다.
단— 소리와 함께 피아노 소리가 멎고. 보컬 반 아이들은 박수와 환호로 이수의 열창에 보답했다.
“…와, 잘한다.”
이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건은 나지막이 탄성을 내뱉었다.
“어? 원해다!”
문 앞에 서 있는 구경꾼들을 발견한 재선이 웃으며 그들을 반겼다.
그 소리에 문 쪽을 쳐다본 이수는 그만 건과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아… 쪽팔려.”
뒤늦게 몰려오는 민망함에 이수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뭐가 쪽팔려, 엄청 잘 불러 놓고.”
유라가 이수의 팔을 툭 건드리며 말했다.
“손목 관리 또 그따구로 해 봐요. 그땐 국물도 없어!”
자리에서 일어난 이수를 올려다보며 유라는 옅게 미소 지었다.
“고마워.”
속삭이듯 작게 전하는 감사 인사를 이수는 몇 번의 끄덕임으로 받았다.
“어떻게 이 명곡을 몰라?”
그녀는 자리로 돌아가 앉으며 괜히 민주에게 한 마디 툭 던졌다.
“우리가 늙어서 아는 거야.”
“시끄러, 넌.”
씨이… 이수에게 매번 당하는 동갑내기 재선이 입술을 쭉 내밀며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다들 앉아, 빨리! 수업 다시 시작하게.”
유라는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리하며 수업 재개를 알렸다.
“미쳤네, 그걸 왜 찍어?”
자리로 돌아간 이수는 카메라를 들고 있던 동료와 카메라 쟁탈전을 벌였다.
* * *
그날 저녁, 건은 식사를 마치고 다시 연습실로 향했다.
처음으로 가슴에 단 ‘리더’ 스티커가 생각보다 무거웠던 까닭에.
계단을 막 올라왔을 때, 그는 서류를 보느라 앞도 보지 못하고 걸어오는 이수를 발견했다.
어떻게 하나 보려고 그녀의 앞길을 막아 서선 가만히 지켜봤다.
제게로 오기까지 딱 두 걸음을 남기고, 이수는 스윽 자리에 멈춰 서서 고개를 들었다.
아깝다.
속으로 조용히 아쉬움을 달래는 그에게 이수가 동그래진 눈으로 물었다.
“놀래라. 뭐 해, 여기서?”
“앞 좀 보고 걸어요, 부딪치겠어.”
“어쭈.”
제 딴에는 걱정이 되어 한 말인데, 또 이렇게 어린애 취급을 당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너, 입술이 그게 뭐야. 틴트 발랐어?”
“보태지 마요. 안 그래도 아까 지적 받았어, 너무 빨갛다고.”
머릴 긁적이는 건을 보며 이수는 하, 짧게 숨을 뱉어냈다.
이럴 때 보면 꼭 몸집만 큰 강아지 같다니까.
“재선이 형이랑 올리브영 가서 고른 건데.”
“명재선… 하여튼 간에.”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이수를 보며 그는 작게 실소를 터트렸다.
“봐봐.”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낸 이수가 다짜고짜 건의 한쪽 어깨를 잡아 움직이지 말라고 했다.
이내 톡톡, 입술 위로 가볍게 닿는 그녀의 네 번째 손가락.
"너희 팀, 사공이 많아 배가 산으로 간다며? 리더도 처음인데 힘들겠다."
립밤을 발라주는 이수의 손길에, 어찌할 줄을 몰라 하는 건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라 답을 해주고 싶은데 입술을 옴작거리지조차 못하겠다.
“그런 말 들어 봤어? 아폴로 신드롬이라고. 우수한 인재 집단일수록 자기 주장들이 강해, 그런 게 다 시간 소모적인 논쟁으로 이어지고, 결국은 성과가 낮게 나타난다는 거야.”
어려운 대화 주제에 건은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모았다.
“그러니까, 지금 이 사달이 꼭 네 잘못은 아닐 거라고…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아주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위로하려고 꺼낸 말이었던가.
이수의 따뜻한 말 한 마디에 용기를 얻어, 그는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려 그녀의 고운 얼굴을 눈에 담았다.
“난 틴트 싫던데. 바르면 건조해지고, 입술에 막 착색도 되구….”
수정을 마친 이수가 한 걸음 물러나자, 잔뜩 긴장했던 어깨가 스르르 풀렸다.
“바를 거면, 이렇게 립밤 같은 거랑 같이 발라. 번갈아 가면서.”
“…네.”
“너는 얼굴이 하얘서 그런 거 바름 더 빨개 보일 텐데.”
자, 하고 그녀는 발라준 립밤을 그에게 건넸다.
“나 선물 받은 건 또 어떻게 알아가지구.”
“이거… 나 주는 거예요?”
“아는 오빠가 인도 갔다 오면서 사왔더라. 딱 한 번밖에 안 바른 거야.”
그는 이수가 준 립밤을 손에 꼭 쥐었다. 입가에 엷은 미소가 걸렸다.
“그럼 연습 잘….”
“나 아까!”
이만 가보려는 듯 걸음을 옮기는 이수를 급히 붙잡으며 그가 말했다.
“봤는데.”
“뭘?”
“노래하는 거.”
순간, 낮에 건과 시선이 마주쳤던 게 떠올라 이수는 부끄러워졌다.
“아… 그거?”
귀 뒤가 왜 이리 가려운지, 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귀 뒤를 벅벅 긁었다.
“피아노도 쳐요? 피디님은 못 하는 게 뭐야.”
“아, 그만 그만!”
왠지 듣기 불편한 제 칭찬 소리에 경기를 일으키며, 이수는 다시 건의 어깨를 잡았다.
“내 눈을 잠시 봐줄래.”
그리고는 빤히 그의 두 눈을 들여다보며 주문을 걸었다.
“그리고 잊어, 아까 봤던 거.”
말을 마친 뒤 그녀는 잽싸게 뛰어가 계단 아래로 도망쳤다.
휑하니 홀로 남겨진 건은 멀어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뭐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