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대결은 일주일 뒤, 오늘. 심사는 우리 연습생 전원과 트레이너쌤들을 모시고 월말평가 형식으로 할 겁니다. 주제는….”
윤설은 고민하는듯 소은하와 장한성을 바라본다. 에이스인 A조에서도 1위인 설은 얼음을 깎아 만든듯 신비로운 외모의 냉미남이다. 19살이란 나이답게 키도 훤칠하고, 몸도 탄탄한 그는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닿자 은하와 한성은 흠칫 놀라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거기 너.”
“저, 저요?”
“어. <나의 시, 나의 노래> 정경서 아역.”
설의 말에 은하가 흠칫 놀란다. 기껏해야 이름으로 부르려니 했는데, 대표작까지 거론할 줄은 몰랐다. 그리고 또 연습생이 아닌, 아역배우로 부른다는 것도. 은하는 자신이 아이돌 연습생이 된지도 1년 가까이 지났는데, 아직도 모두가 자신을 아역배우라고 부르는 것이 스트레스였다. 그런데 연습생 에이스인 설도 자신을 아역배우로 본다는 것에 새삼 서글퍼졌다. 애써 표정관리를 하는데 설이 말을 덧붙인다.
“…이자 RH엔터 최연소 연습생 C조 소은하.”
“!!!!”
“소은하와의 상큼미 대결입니다.”
상큼미. 일종의 귀여움을 어필하는 것이다. 상큼미는 아이돌 입덕에서 꽤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모든 아이돌이 상큼하고 귀여운 류의 무대를 하는 건 아니지만, 많은 아이돌들이 팬싸인회든 무대든 귀엽고 상큼한 분위기를 연출함으로 팬층을 확보한다. 아이돌에겐 외모도, 춤도, 노래도 모두 중요하지만 팬들의 심쿵을 자아내는 큐티한 부분도 중요하다. 특히 이런건 데뷔초에 많이 사용하는 전략이며, 이후 인지도가 쌓였을 때 과거자료 혹은 입덕영상으로 계속 사용된다.
그러나 신인아이돌들이 이 상큼미를 내세우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나이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가장 잘어울리는 테마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설도 수많은 연습생 중 은하를 지목한 것이다. 가장 어리기 때문에. 그리고 그 말은 반대로 바른, 아니 정생에겐 무엇보다 불리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거기 너. 장한성.”
“아, 예!”
“장한성과의 섹시 댄스 대결이 2라운드입니다.”
“예? 저요?”
“단판으로 결정내기엔 아저씨도 우리도 찝찝한 데가 많으니, 대결은 3판 2선승제로 하겠습니다.”
정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운이 좋든 노력을 했든 정생이 은하를 이기더라도 그걸로 모두가 납득하기는 어려울 터다. 물론 지더라도 마찬가지다. 섹시미 대결은 색감으로 치면 밝은톤의 1라운드 상큼미와는 달리, 어두운 톤의 대결이다. 그루브있는 댄스 혹은 파워풀한 댄스를 주로 하며, 무대에선 주로 노출이 있는 옷이나 몸선이 드러나는 옷을 입는다. 한성의 경우 키도 훤칠한데다 꾸준한 관리로 몸선이나 근육이 보기 좋게 잡혀있고, 젊고 힘이 넘쳐 파워풀한 무대에 강하다.
만약 정생이 1라운드에서 진다면, 반드시 이겨야하는 대결이다. 그의 어깨에 쌍둥이의 장학금과 자신의 꿈이 달려 있으니. 그리고 이 순서 대로라면….
“마지막 대결은 A조 양시후. 양시후와는 보컬대결입니다. 이렇게 3판 2선승제입니다. 시간은 저녁 8시. 하루에 1라운드씩 3일간 진행합니다. 만약 시간을 지키지 못할 시 기권으로 간주합니다. 도망치고 싶으면 도망쳐도 된다는 거예요.”
설은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정생을 응시한다. 정생은 고개를 끄덕인다.
“걱정마. 절대 안 도망쳐.”
“그거 잘됐네요.”
설은 모여있는 연습생들에게 이제 자리에 돌아가 연습하라고 말하곤 개인 연습실로 돌아갔다. 설의 말에 연습생들은 잠시 우왕좌왕하는가 싶더니 이내 뿔뿔이 흩어졌고, 시후일행과 정생만이 남았다. 시후는 고요한 눈빛으로 정생을 바라보다 이내 몸을 돌렸고, 은하와 한성이 그 뒤를 따랐다.
정생은 시후의 뒷모습에 입술을 달싹였으나 결국 다물고 말았다. 자신이 지금 시후에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 아무렇지 않은 척 평소처럼 대할 수도, 위로의 말을 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지지않겠다는 둥 자극하는 말을 하고 싶지도 않다. 어쩔 수 없다고 한들 자식뻘의 아이에게 너무 큰 상처를 주었다. 설의 말대로 자신과 달리 시후를 비롯한 연습생들은 이걸 위해 오랜 시간을 땀흘리고 참아왔으니.
“하아….”
정생은 그저 속절없이 한숨만 나온다. 그래도 해야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다음주에 있을 대결을 준비하는 것, 그리고 그보다 먼저 최비서에게 연락하는것. 정생은 핸드폰을 든다.
***
“그러니까… 아버지가 데려온 그 낙하산이랑 연습생 애들이랑 싸움이 붙었다 이건가.”
“예. 대표님.”
강로희 대표의 사무실. 두꺼운 안경을 쓰고,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강대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수롭지 않은 표정의 강대표와는 달리 그의 앞에 선 비서 최고은은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최비서는 강대표의 눈치를 보며 고민하는 듯 하더니, 곧 결심한듯 주먹을 쥐고 물었다.
“연습생들의 반응도 그렇고, 트레이너들도 그렇고 굳이 낙하산을 쫓아내지 않으시는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흐음….”
강대표는 들고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는 턱을 괸 채, 최비서를 말없이 응시한다. 최비서는 이름에서 느껴지듯 강회장의 비서 최강유의 동생이다. 자매가 함께 비서 시험을 응시했고, 언니는 강회장의 전담으로 동생은 강대표의 전담으로 배치되었다. 벌써 8년인가…. 처음 인사를 온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8년차 비서가 되었다. 물론 8년이 지난다고 정의감에 가득 찬 성격이 바뀐 건 아니지만. 강대표는 슬쩍 웃었다.
“최비서는 내가 어떻게 했음 좋겠는데?”
“그야 쫓아내셨음 좋겠습니다. 낙하산인 거도 모자라 고등학생 자식까지 있는 택배기사라는데 수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대표님 곁에 그렇게 수상한 자가 있는 건 싫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내 곁은 최비서가 있지. 난 첫날 아버지께 소개받은 이후로 그 낙하산 본 적도 없어.”
“대표님….”
최비서는 울상이 된다. 그 말이 아닌 거 아시잖아요, 라며 입을 비죽이는 모습에 강대표는 피식 웃음을 터뜨린다. 강대표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는다.
“농담이야~ 내가 최비서 맘도 모를까봐.”
“그럼 저 낙하산 치우는 겁니까?”
“아니. 그건 못하겠는데?”
“대표님.”
강대표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몸을 푼다. 그리곤 최비서가 들어오면서 건네준 커피를 들고 창가로 다가간다. 대표실의 창가에선 건물 6층의 옥상정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벤치에 앉아있는 정생이 눈에 들어온다.
“나도 알아. 저 낙하산이 아버지가 나한테 보내는 경고장이라는 거. 누가봐도 대놓고 보내는 스파이잖아?”
“그럼…?”
“재밌잖아?”
“네?”
위에서 내려다본 정생은 강대표의 손가락보다도 작아보인다. 장난감처럼 보이기도 하고, 작은 바람에도 쓰러질듯 연약해보인다. 강대표는 웃음기를 머금은 표정으로 커피를 마신다.
“재밌어.”
강대표는 커튼을 치고 몸을 돌린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최비서에게 말한다.
“최비서, 끝나고 약속 없으면 나랑 데이트하지 않을래?”
***
시간은 상대적이다. 일주일이란 시간은 벼락치기를 준비하기엔 너무 촉박한 시간이고, 좋아하는 사람과의 만남을 앞두고는 너무도 긴 시간이다. 매일이 지루한 하루의 연속이라면 일주일은 어제와 같은 오늘과 오늘과 같은 내일이 반복되다 지나가는 덧없는 시간이고, 새로운 것에 적응하기엔 실수와 야단이 영원처럼 끝나지 않는 끔찍한 시간일 수 있다.
정생에게 지난 일주일은 정신 차리니 사라진 시간이었다. 그는 본래의 직장이 있었고, 가정도 있었다. 심지어 그는 가장이며, 그를 대신해 청소기와 세탁기를 돌리기엔 그의 자식들은 밤늦게 집에 들어왔다. 바쁘게 새벽부터 택배업무를 시작해 겨우 오후에 퇴근을 하면, 그때부턴 서둘러 집안정리를 해야했다. 동화에선 우렁각시다 뭐다 대신 집안일해주는 요정들도 많던데, 현실에는 식탁을 닦거나 신발을 정리하는 것조차 정생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강회장의 비서인 최강유는 어째서 기존 멤버를 끌어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들어갔느냐는 정생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알아보고 연락할테니 기다리라는 대답만 있을 뿐. 그러나 지난 일주일동안 정생의 핸드폰을 울리는 수많은 이름 중 최강유 비서의 이름은 없었다.
“아빠, 오늘도 힘내세여.”
“다녀오겠습니다.”
“으응, 잘 다녀와. 우리 쌍디들. 급식 잘 먹고, 아프지말고.”
“예에-.”
쌍둥이는 정생을 잠시 바라보았다. 근래 정생이 피로해보이긴 했지만, 최근 며칠 사이 부쩍 지친 게 눈에 보였다. 쌍둥이는 묘한 눈빛을 주고 받고는 꾸벅 인사하고 문을 나선다. 평소였다면 쌍둥이의 변화나 기분에 민감하게 반응했을 정생이지만, 지금 그의 머릿속은 한 가지 생각만이 가득 찼다.
***
“그럼 지금부터 <아이돌 콜로세움> 출연권 배 연습생 자체 대결을 실시합니다. 대결을 펼칠 연습생은 C조 정바른과 소은하입니다. 주제는 상큼미 대결이며, 춤과 노래 모두 포함한 무대를 평가합니다.”
RH엔터 댄스 트레이너 팀장 이상현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댄스 트레이너 부팀장 이하현과 쌍둥이인 그는 과거 ‘반달남매’라 불리며, 홍대와 이태원에서 유명세를 펼치던 댄스크루였다. 이들은 외모도 뛰어나 당시 유행하던 싸☆월드에서도 꽤 인기가 있었다. 정생 또한 영상을 보고 반해 쌍둥이 손을 잡고, 이태원에 가서 구경했던 기억이 있다. 외모도 외모인데다, 실력도 뛰어나 당연히 아이돌 혼성그룹을 결성할 줄 알았는데 소식이 끊겨 궁금했었는데 RH엔터에서 트레이너로 만나 꽤나 놀랐었다.
“본래 예정대로라면 월말평가 형식으로 트레이너들과 연습생들만 모여 평가하게 되겠지만, <아이돌 콜로세움> 출연여부를 건 대결이기 때문에 대표님과의 상의 끝에 <아이돌 콜로세움>의 제작진분들이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영상을 편집해 얼굴을 가린 채 SNS에 업데이트하고, 그 평가를 결과에 반영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안녕하세요, <아이돌 콜로세움>의 연출을 맡은 양동찬PD입니다. 여러분들을 이렇게 미리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아이돌 콜로세움>의 메인작가 전채은이라고 합니다. 잘부탁드립니다.”
정생을 비롯한 연습생들은 다들 당황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한다. 하긴 그럴만도 한게 판이 너무 커졌다. 그저 조용히 자기들끼리 해결하려던 일이었는데, 방송 카메라가 몇 대씩 오고 조명에 마이크에… 트레이너들도 사태를 알아차린듯 평소보다 더 깔끔한 차림이다.
설은 구석에 모자를 눌러쓰고 앉아있었고, 다른 연습생들은 어쨌든 1초라도 더 카메라에 잡히기 위해 급하게 거울을 꺼내거나 외모를 단장했다. 그리고 정생과 은하는 각자 대기실에서 무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연습생들과 달리 실제 대결에 출연하는 둘에겐 미리 촬영에 대한 안내가 있었고, 그때문에 더욱 신중하게 준비했다.
“사회는 저 이상현이 맡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할 수 있을까. 이제껏 카메라 앞에 서본 거라곤 택배기사로서 지역방송 인터뷰가 전부다. 정바른이란 부캐의 이름으론, 그리고 아이돌 연습생으로선 처음 서보는 거다. 정생은 떨리는 마음으로 모자를 쥔다. 그때 노크소리가 들린다.
똑똑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