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 정생정생 박정생이. 오늘도 정시퇴근이네?”
“예, 운찬운찬 김운찬 점장님. 오늘도 열심히 달렸습니다.”
오후 5시 무렵, 로희택배 남태리지사. 정생은 업체에서 수거한 택배들을 탑차에서 내리며 김점장과 인사한다. 여름이라 그런가 5시에도 대낮처럼 밝다. 정생은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택배를 옮긴다. 김점장은 그런 정생에게 고생한다며 냉장고에서 피로회복음료 하나를 건넨다.
“요즘 너무 고생이 많아. 애들 고등학생이라 뒷바라지하기 힘들지?”
“아뇨, 우리 쌍디들 얼마나 착하고 공부도 잘하는데요. 오늘도 개교기념일인데 공부하겠다고 학교에 간다지 뭡니까.”
“어휴, 효자효녀들이네. 그럼 오늘도 일찍 퇴근인가? 아님 나랑 이거 하러 안 갈래?”
김점장은 손으로 술마시는 시늉을 하며 웃었다. 그러나 정생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애들 밥을 차려줘야 해서요. 다음엔 꼭 가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어. 내가 정생정생 박정생이 애들 아끼는거 하루이틀 봤나. 부담갖지 말어. 대신 나중엔 꼭 가는 거다? 자네가 없으면 어딜가도 너무 재미가 없어.”
“예. 명심하겠습니다.”
김점장은 정생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다시 사무실로 들어갔다. 정생은 김점장의 뒷모습에 꾸벅 인사한 뒤, 다시 택배 작업을 이어간다. 빨리 마무리하고 퇴근해야 늦지 않게 연습실에 갈 수 있었다. 연습실을 떠올리자 다시금 시후와 일행들이 떠올라 정생은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다. 대결이라니. 현직 아이돌 연습생과 대결하기엔 그가 턱없이 모자라다라는 것 정돈 정생도 알았다.
“하아….”
그래도 솔직하게 말하자면 정생은 연습생 정바른으로서의 삶이 꽤나 재미있었다. 반쯤 아니, 애초에 억지로 시작하게 된 부캐지만, 노래하는 것도 춤추는 것도 모두 재밌었다. 실제론 어떻게 생각했듯 모두가 자신을 19세 고등학생 정바른으로 대해주니, 정말 그 순간만큼은 스스로가 19살의 정바른이 된 것 같았다. 추고 싶었던 춤을 마음껏 추고, 하고 싶은 노래를 제대로 부를 수 있었다.
“그러고보니 교복은 어떻게 하지. 언제까지고 거기 둘 수는 없는데. 최비서님한테 나중에 물어봐야겠다.”
정생은 서둘러 업무를 마무리한 뒤, 탑차를 타고 퇴근했다. 공영주차장에 차를 대고, 집정리를 한 다음에 바로 역으로 가려면 한시가 바빴다.
***
“그럼 일단 집 깨끗해진 건 우리가 피곤해서 일찍 들어왔다가 했다고 하자. 그 다음엔 어쩌지.”
“독서실카페.”
“맞네. 근처에 독서실카페 생겼지. 거기 괜찮대?”
“상타.”
“너 가봤어?”
“넌 아직 안 가봤냐?”
한심하다는 투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원에 도원은 뭐라 맞받아치려다 말았다. 지금 이런 시덥잖은 걸로 말다툼이나 할 때가 아니었다. 곧 정생의 퇴근시간이었고, 그전에 집을 나가야했다. 물론 이후엔 정생의 미행을 해야했으니 서둘러 밥도 챙겨먹어야했다.
“박여원. 아까 밥 니가 떴지? 얼마나 남았어?”
“한 1인분?”
“즉석밥 있나..?”
“놉.”
“그럼 내가 라면 끓일 테니까, 넌 상이나 차려.”
여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행주를 들었다. 도원은 시계를 흘끔 보고는 서둘러 찬장에서 라면 2봉지를 꺼냈다.
“난 혼자 2봉 먹음.”
“에휴.”
도원은 한숨을 쉬며 찬장에서 라면 한봉지를 더 꺼냈다.
***
정생이 막 공영주차장에 주차를 마쳤을 때쯤, 도원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공부하다가 피곤해서 집에 일찍 들어왔고, 좀 쉬다가 이른 저녁을 먹고 다시 근처 독서실카페로 간다는 내용이었다. 아마도 평소 학교 마칠 때쯤 집에 돌아올 거란 말도 덧붙여져 있었다. 아무래도 운동도 안 하고, 하루종일 앉아서 공부를 하니 체력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정생은 주말동안 보양식을 든든히 먹여 체력을 보충해줘야겠다 다짐했다.
“일단 기차를 타려면 시간이 빠듯하니까, 장은 내일 봐야겠다.”
정생은 서둘러 차에서 내린 후, 집으로 달려갔다. 대충 샤워를 하고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가야했다. 그리고 공영주차장에서 조금 떨어진 편의점엔 도원과 여원이 모자를 푹 눌러쓰고 정생을 지켜보고 있었다. 양 손에는 편의점에서 산 과자와 음료가 가득하다.
“아빠 집 가나보다.”
“가자.”
“안 들키고 따라갈 자신 있어?”
“나만 믿어.”
여원은 등에 맨 백팩에 들고 있던 간식을 주섬주섬 넣으며, 말했다. 정말 전혀 신뢰가 가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그 유명한 ‘체육대회 치트키’니 뭐 알아서 하겠거니 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
정생은 마지막으로 그가 아침에 나갈 때의 집의 상황을 알고 있기에, 쌍둥이가 더 어지르면 어질렀지 청소를 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언제 또 청소하냐, 속으로 한숨을 쉬며 현관에 들어갔을 때 각이 잡혀 정리된 신발들을 보고 정생은 말을 잇지 못했다. 놀란 가슴을 진정하며 집안에 들어가니, 모든 물건들이 제자리에 정리되어있고 청소까지 깔끔히 되어있어 정생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니, 피곤하면 그냥 좀 쉬지. 언제 또….”
군데군데 제자리를 찾지 못해 엉뚱한 곳에 있는 물건들이 보였지만, 쌍둥이가 애써서 집안을 청소했을 거란 생각에 정생은 코끝이 찡해졌다. 열심히 살아야겠다. 자신에겐 너무 과분하게 착하고 소중한 아이들이니,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겠다. 정생은 울컥하는 마음으로 굳게 다짐하며, 서둘러 옷을 챙겨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끼는 정생과 달리, 그 시각 쌍둥이들은 아파트에서 조금 떨어진 수풀에 몸을 숨긴 채 정생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 근데 넌 이런데를 어떻게 알았어?”
“….”
“야.”
“조용히 해. 그러다 들킨다.”
단호한 여원의 말에 도원은 불만스럽지만 입을 다물었다. 사실 여원이 이런 장소를 어떻게 알고, 왜 이렇게 미행에 익숙해보이는지는 나중에 차차 물어도 됐다. 물론 굉장히 의심스럽고, 나중이라고 해서 순순히 대답할지는 의문이지만. 그렇게 조금 더 기다렸을까, 막 샤워를 하고 나왔는지 젖은 머리칼을 한 정생이 아파트 입구로 내려왔다.
“저 옷은 처음 보는데. 아빠한테 저런 옷이 있었나?”
“모름.”
“RH 스포츠 신상 같은데…. 언제 사신거지? 갈때 나도 데려가지….”
“조용히하고 따라와.”
“넵….”
정생의 이동방향을 눈으로 쫓으며, 여원은 조심스레 몸을 움직였다. 빠르고 조용한 움직임이 역시 한두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도원은 반드시 나중에 그 이유를 밝혀내리라 다짐하며, 조용히 여원의 뒤를 따랐다. 물론 도원의 움직임은 여원보다 조금 더 시끄럽고, 더 느렸다.
“버스정류장?”
“아니. 택시야.”
“그걸 어떻게 알아.”
“전광판.”
“뭐?”
여원은 도원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다. 그 노골적인 눈빛에 도원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정말 여원의 말대로 정생이 택시를 잡자 입을 꾹 다물 뿐이다. 정생의 택시가 출발하자마자, 여원은 도원을 이끌고 아까 정생이 있던 곳으로 갔다.
“어쩌지? 아빠 정말 택시 타셨는데.”
“따라갈거야.”
“어떻게? 어디 가시는줄 알고.”
여원은 핸드폰을 슬쩍 보더니, 검지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 방향엔 빈 택시 한 대가 있다. 놀란 도원이 여원을 보자, 여원은 무심한듯 택시호출앱을 보여준다.
“야, 너 이런 것도 할줄 알아?”
“기본임.”
“그런데 너 언제 이런거 해본거야? 너무 익숙한데?”
“….”
“야.”
“계속 쫑알대면 두고 간다.”
“…. 나중에 두고봐.”
도원은 여원 몰래 주먹을 쥐며, 택시에 탔다. 정생의 택시가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금방 택시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택시 기사는 학생 둘이 타더니만 별안간 앞의 택시를 따라가 달라고 하니, 굉장히 의심스러운 눈빛을 했지만 굳이 별말을 하지는 않았다.
같은 시각, 정생은 뒤에 쌍둥이들이 따라오고 있는 줄도 모른 채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고 있었다. 기차 시간은 넉넉했고, 도로 상황도 쾌적했다. 몸이 좀 피곤하긴 하지만, 기차에서 푹 자면 괜찮아질 터다. 정생은 창밖을 보며 나지막히 흥얼거린다.
“Oh my my my~ oh my my my~”
며칠 춤 좀 췄다고, 절로 어깨가 들썩인다.
정생의 집과 역은 차가 안 막힌다면 택시로 넉넉잡아 30분 정도의 거리다. 오늘은 신호도, 도로상황도 좋아 예상보다 10분 일찍 도착했다. 정생은 돈을 내리고, 가볍게 몸을 풀며 역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여원과 도원도 택시에서 내렸다.
“태리역?”
“기차 타시려나….”
“설마 KTX는 아니겠지? 그러면 용돈 엄청 깨질 거 같은데.”
“맞는듯….”
여원은 심각한 표정으로 도원에게 핸드폰을 보여준다. 태리시에서 출발하는 기차 시간표다. 정생이 대전이나 대구, 부산으로 가는게 아닌 이상 가장 빠른 기차는 KTX다.
“예매해?”
“일단 보자…. 아빠가 그냥 역에 왔을 수도 있고….”
“진심…?”
“아니….”
쌍둥이는 다시금 모자와 마스크를 점검하고, 빠른 걸음으로 역안에 들어갔다. 금요일 오후라 역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태리역은 백화점과 연결돼있어 혼자 걷기에도 복잡했다. 여원이 인상을 쓰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돌연 도원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어! 저깄다! RH 스포츠 신상!”
“…?”
“아… 아빠 말이야.”
여원은 한숨을 내쉬며, 도원이 가리키는 방향을 본다. 정말 정생이 있다. 여원은 이걸 칭찬해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하다 이내 말없이 정생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정생 또한 어딘가로 가고 있다. 정생의 동선을 살피며 도원이 중얼거린다.
“서울방향 KTX…. 대체 어딜 가는 거예요,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