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를 정에 날 생.
정생의 이름은 언제 어디서든 바르게 살라는 의미로 그의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이다. 그 이름에 걸맞게 정생은 최소한 어디 가서 욕먹지 않기 위해, 성실하고 열심히 살았다. 예전에 잠시 공장에서 일했을 때, 또래의 직원들이 몰래 땡땡이를 치거나 물건을 빼돌려도 그는 제 시간에 나와 묵묵히 주어진 일을 했다. 군대에 있을 때도, 택배기사가 되었을 때도 애초에 쓸 빽도 없었지만 괜히 수 쓰지 않고 FM으로 살았다.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쌍둥이들에게 떳떳한 그런 삶이었다.
그랬기에 정생은 지금껏 그랬듯 앞으로도 그의 삶에 ‘빽’이나 ‘낙하산’ 같은 말이 끼어들 거라곤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애초에 그는 40줄의 아저씨였고, 그의 미래계획이라고 해봐야 쌍둥이들이 각자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게 되면 고향에 내려가 조용히 사는 것이었다. 그때쯤엔 형도 나이가 들었을 테니, 형만 괜찮다면 같이 빵집을 운영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본래 부모님은 형이 아닌 정생이 가업을 잇길 바라셨으니, 겸사겸사 부모님의 오랜 숙원을 이뤄드리는 셈이었다. 노래하는 기사님은 해봤으니, 노래하는 빵집 할아버지가 되어 가끔 쌍둥이들이 올 때마다 품 안 가득 갓 구운 빵을 안겨주는 삶. 정생이 상상하는 미래는 구수한 냄새가 가득 찬 그런 평화로운 것이었다.
단 한 순간도 자신의 이름 석자 앞에 ‘빽’과 ‘낙하산’이란 요란한 수식이 붙을 거라고, 정생은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는 고등학교 검정고시 출신의 가난한 빵집 아들일 뿐이며, 고등학생 쌍둥이를 키우는 싱글대디일 뿐이니까. 정생이 부탁한다고 빽이 되어줄 사람이라고 해봐야 고향에서 형과 <이태리 빵집>을 운영하는 그의 부모님이 유일하다. 부모님의 빽을 써서 낙하산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도 <이태리 빵집>뿐인데, 어떻게 그의 이름 앞에 그런 수식이 붙을 수 있겠나.
그런데 붙었다. 그 수식.
비록 그 수식이 붙은 이름이 박정생이 아니어서 그렇지.
일주일 전, 정생이 처음 연습실에 들어왔을 때 그를 소개한 캐스팅 디렉터는 그의 영입경위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연습생 공채 오디션 기간도 아니었고, 그 또한 정생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설명할 거리도 없었다. 그렇다고 SM엔터의 강대표님 아버지인 로희그룹 강태원 회장이 꽂아줬다고 할 수도 없지 않나. 심지어 19살이라고 하기엔 과한 노안에 캐스팅 디렉터 경력 15년에 빛나는 자신도 처음 보는 요란한 오렌지색 교복이라니. 심지어 고등학교 이름이 로희고등학교란다. 그런 고등학교가 있었음 자신이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가상의 고등학교,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외모, 회장빽 낙하산.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다고는 말 못하겠다. 마음 같아서는 이 녀석은 회장 빽으로 들어온 낙하산이다! 하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로 인해 상처받을 다른 연습생들이 안타까워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자신이 말하지 않아도, 금방 드러날 사실이었다.
“이 친구는 오늘부터 너희들과 함께 연습생 생활을 하게 된 정바른이다. 소개한대로 19살이고, C조에 들어갈 거야. 잘 지내도록.”
“잘 부탁드립니다!”
캐스팅 디렉터는 잠시 할 얘기가 있다며 트레이너들을 부르곤 연습실을 나갔다. 어른들이 모두 나가자, 일부 연습생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연습생들이 우르르 정생의 주위로 몰려든다. 어리면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20대 초반의 소년들이 주변에 모여들어 떠드니 정신이 없다.
“형! 형이라고 해도 돼요?”
“혹시 인○타나 페○ 해요? 친추 걸어도 돼요?”
“교복 되게 특이하다! 이거 줄인 거예요? 핏 대박이네.”
“원래 피부색이에요? 아님 태운 거? 와! 근데 몸 좋다! 무슨 운동해요?”
열댓 명의 소년들이 순서없이 질문을 쏟아내니, 정생은 어디서부터 대답해야 할지 난감하다. 그보다 40대 아저씨가 염치도 없이 19살이라고 우기는데, 의심부터 하는게 맞지 않나. 그런데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들엔 호기심만 가득하다. 거기다 아이돌 지망생들이라 그런지 늦은 저녁에도 대낮처럼 활기가 넘치고, 발랄하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이다. 긴장했던 것과는 달리 좋은 반응에 정생은 마음이 놓인다. 쏟아지는 관심이 어색하긴 하지만, 싫지는 않다. 정생이 첫번째 질문부터 대답을 하려고 입을 여는데, 누군가 짝! 짝! 박수를 친다.
짝- 짝- 짝-
“자, 다들 진정! 바른씨가 당황하잖니. 다들 진정하고 제자리~”
“네, 형!”
“알겠숨돠~”
“예에에에쓰!”
“쏘리요, 형.”
큰 소리를 내는 것도 아니지만, 어수선하던 상황이 순식간에 정리가 된다. 정생의 곁에 모여 있던 연습생들은 정생에게 아까는 미안하다며, 처음 정생이 들어왔을 때처럼 바닥에 옹기종기 모여 앉는다. 흡사 프로 유치원 교사 같은 모습에 정생은 속으로 감탄이 나온다.
“안녕하세요. 전 양시후예요. 많이 놀라셨죠?”
시후는 점잖게 웃으며 정생에게 악수를 청한다. 그 자연스러운 행동이 고등학생보다는 사회생활에 익숙한 어른처럼 보인다. 시후는 주변의 연습생들에 비하면 두드러지는 외모는 아니지만, 함부로 할 수 없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아무래도 이 친구가 이곳의 리더인 건가.
“고마워요. 난 정바른이에요.”
“네, 반가워요. 애들도 이제 진정된 것 같으니 한 명, 한 명 소개해드릴게요.”
시후는 특유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정생과 같은 조가 될 C조부터 B조, A조 순으로 인사했다. A조의 경우 에이스조라 개인연습 때문에 자리에 있는 건 시후가 유일했다. A조가 20명으로 숫자가 제일 적었고, B조가 30명, C조가 50명 순이었다. 대부분이 중고등학교 학생이었고, A조의 경우엔 대학생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종종 초등학교 고학년도 있었다. 그리고 정생의 짐작대로 시후는 연습생들의 반장을 맡고 있었다.
“제가 반장이니까 혹시 쌤들께 말씀드리기 어려운 일이나 고민거리 있으면 저한테 얘기하세요. 다 들어 드릴게요. 그리고 자유연습 때나 합동 수업 땐 당분간 제가 옆에서 도와드릴 테니 걱정 마시고요.”
“고마워요. 시후군은 되게 어른스럽네요.”
“그런가요? 칭찬 감사합니다.”
쌍둥이였다면 칭찬에 호들갑을 떨거나 아닌 척해도 들뜬 티가 났을 텐데 시후는 싱긋 웃는 것 외에는 덤덤하다. 정생이 자신을 신기해 하든지 말든지, 시후는 다시 한번 박수를 쳐서 연습생들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짝- 짝- 짝-
“자, 얘들아. 쌤들이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것 같으니까 각자 시간표 확인해서 레습실로 들어가자. 가서도 놀지 말고, 개인 연습하는 거 잊지 말고. 이제 곧 주간평가 있는 거 기억하지? 다들 열심히 하자!”
“네~ 형!”
“예에에에에에쓰!”
시후의 말이 끝나자 마자 연습생들이 우르르 일어났다. 그들은 여전히 밝은 얼굴로 정생에게 손인사를 하거나 눈으로 인사하곤 제각기 모여 레슨실로 떠났다. 연습생들이 모두 떠나자, 아까까지만 해도 좁아 보이던 연습실이 물류창고 마냥 널찍해 보였다. 물류창고를 생각하자 내일은 까대기 알바들이 탈주하지 말아야할 텐데, 하는 작은 걱정이 들었다. 또 오늘은 쿠키를 직접 구울 시간이 없으니 가는 길에 아직 문 닫지 않은 빵집에서 쌍둥이 간식거리를 사야겠다는 생각도.
“그럼 저희도 갈까요?”
“어디로…”
“회사 출입증이랑 시간표 받으셔야죠. 그리고 그 옷을 입고 연습할 수는 없으니 라커룸도 알려 드릴게요. 물론 레슨실이랑 연습실도요. 오늘은 가볍게 오티라고 생각하고, 절 따라오기만 하면 돼요.”
“고마워요, 정말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걸요.”
시후는 살짝 웃어주곤 잠시 선생님들을 만나고 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시후까지 나가고, 정생은 홀로 연습실에 우두커니 서 있다. 저녁임에도 환한 조명과 한쪽 벽을 가득 채운 거울, 맨들맨들한 바닥. 한쪽 구석엔 정수기와 길다란 소파가 놓여있고, 그 위엔 대충 벗어 놓은 얇은 자켓이 몇 벌 쌓여 있다. 새삼 진짜 연습생이 되었구나, 깨닫게 된다. 정생은 천천히 연습실 거울로 다가가본다. 거울에 비친 그는 80년생 싱글대디 박정생일까, 아이돌 지망생 정바른일까. 이건 현실이 맞을까. 아니면, 잠에서 깨면 모두 사라져버릴 꿈일까. 상념에 잠긴 정생을 깨운 건 듣기 좋은 소년의 미성이다.
“바른씨, 이제 갈까요?”
대충 예상은 했지만 RH엔터는 정생의 상상보다 더 컸고, 복잡했으며, 고급스러웠다. 로희택배는 본사라고 해도 쨍한 오렌지색이 사방에 배치되어 있어 그다지 감흥이 없었는데, RH엔터는 화장실조차도 세련되었다. 잠시 선생님들과 만나고 오겠다더니 시후는 당분간 정생이 쓸 임시 출입카드와 임시 사원증을 가져왔다.
“카드는 여기, 카드그림 그려진 곳에 대시면 열려요. 지하철 교통카드랑 비슷해요.”
“아아~ 쉽네. 이렇게 하는 거 맞죠? 사실 내가 지하철을 거의 안 타봐서…”
“맞아요. 그렇게 하시면 돼요. 그럼 바른씨는 보통 뭘 타고 이동하세요?”
“보통은 자차로… 아, 그… 난 고등학생이라 아직 면허가 없어서… 그러니까… 부모님 차! 부모님께서 운전해주시는 차를 타고 이동합니다. 하하하.”
정생은 혹시 첫날부터 신분이 탄로날까 애써 태연한 척 시후의 눈치를 살핀다. 그러나 시후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다. 그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해보자며 정생에게 다시 카드를 찍어보자고 말할 뿐이다. 들키지 않은 걸까, 정생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다음부턴 정신차리리라 다짐한다.
시후는 RH엔터 입구에서부터 엘리베이터를 타고 연습실이 있는 5층까지 가는 법, 라커룸 및 샤워실 이용법, 연습실과 레슨실 위치 등을 가르쳐줬다. 처음 정생이 갔던 곳은 공동 연습실 겸 전체 집합장소로 주로 사용하고 각 조마다 연습실과 레슨실이 따로 있었다. A조 같은 경우엔 공중정원이 연결된 6층에 개별 연습실과 공동 레슨실이 있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집합에도 모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매주 월요일마다 주간평가가 있고, 매달 마지막날에 월말평가가 있어서 그 결과를 토대로 매달 조편성을 다시 한다고 했다.
“주간평가, 월말평가는 조편성에도 중요하지만 나중에 오디션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해요.”
“오디션?”
“네. 미리 며칠 전부터 공지를 붙여 주긴 하는데, 당분간 데뷔조 오디션은 없다고 해요. 최근엔 <아이돌 콜로세움> 오디션이 있었어요. 거기서 상위 랭킹에 들면 데뷔를 시켜준다고 하니, 일종의 데뷔조 오디션이라고 봐도 되겠네요. 바른씨가 조금만 일찍 들어 왔어도, 기회가 있었을 텐데 아쉽게 됐네요. 그렇지 않나요?”
“……”
100명의 연습생 중 <아이돌 콜로세움> 방송 출연 기회가 주어지는 건 겨우 50명. 그중 데뷔를 하는 건 상위 5명뿐이다. 그렇다면 데뷔기회를 얻지 못한 95명은, 애초에 방송 출연도 하지 못한 50명은 어떻게 되는가. 정생은 아이돌 음악을 오랫동안 들어왔고, 아이돌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즐겨 봤었기에 알고 싶지 않아도 그 답을 알고 있다. 시후는 정생의 굳은 표정을 힐끗 보고는 말을 잇는다.
“한 회사에서 데뷔 팀이 나오면, 적어도 몇 년 간은 새로 데뷔조를 편성하지 않아요. 아마 나이가 어리거나 솔로로 전향하는 애들이 아니면, 대부분은 다른 회사로 옮기겠죠. 안타까운 일이예요.”
그렇지 않나요? 시후의 물음에 정생은 대답하지 못한다.
RH엔터는 청소년 연습생들의 경우 오후 1시부터 밤 10시까지만 레슨 및 연습실 이용을 허락한다. 또한 학생들은 정규수업을 반드시 모두 마쳐야 한다. 그리고 밤 10시가 되면, 성인 연습생을 제외하고 모두 퇴근하며 어떠한 이유로도 회사에 남을 수 없다. 정생이 부캐 정바른의 나이를 고등학생으로 설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강회장은 부캐가 본캐의 영역을 침범하는 걸 원치 않았고, 올해의 택배왕이 택배업무에 소홀한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바른의 나이는 퇴근 이후, 그리고 다음날 출근에 영향을 안 주는 시간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정생은 양심상 고등학생은 할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무시당했다. 그럼 교복이라도 안 입게 해달라고 했지만, 강회장은 캐붕은 옳지 않다며 일갈했다.
일정이 너무 빡빡하다는 것만 제외하면 연습생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이 생엔 결코 이루지 못할 꿈이라고 생각했는데 현실이 되니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그리고 틈틈이 시후가 나타나 챙겨줘 어려운 일도 없었다. 물론 모두가 그를 좋아하는 건 아니긴 했다.
“모두 준비운동이 제일 중요하다는 거 알고 있지?”
“예!”
“그럼 몸풀기 30분. 실시!”
“실시!”
헬스 트레이너 오만득. 그는 이미 텔레비전에도 여러 번 출연한 유명 헬스 트레이너이자 RH엔터에 소속되기 전에도 유명 연예인들의 헬스 트레이너로 활동했다. RH엔터에 소속된 이후론 몇몇 고객들을 제외하면 소속연예인들 케어에 전념하느라 바쁘다. 요새 말로 흙수저 출신인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오직 자신의 노력만으로 지금 이 자리까지 올랐다. 그래서 만득은 옛날부터 금수저, 빽, 낙하산이란 말만 들으면 치가 떨렸다. 순수한 노력을 보잘것없게 만드는 모든 것을 만득은 싫어하다 못해 증오한다. 그러니 그의 눈에 정생이 예뻐 보일리가. 만득은 수업 시간에 정생을 일부러 모른 척하거나, 초보에게 맞지 않는 어려운 동작을 시키고는 못한다며 대놓고 핀잔을 주는 등 적대감을 드러냈다.
섭섭한 마음이 들지 않는 건 아니지만, 정생은 만득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정생이 더하면 더했다. 정바른이라는 말도 안 되는 기회가 오기 전까지 그는 누구보다 평범한 소시민이었고, 싱글대디였다. 엄마 없이 큰다는 소리 안 듣게 하려고 열심히 챙겼지만, 한계가 있었다. 가장 공정하다는 학교에서조차 부모가 조금 더 잘난 아이가, 집안이 조금 더 잘난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정생은 무작정 만득을 미워할 수가 없다. 그래서 만득을 볼 때면 너도 참 힘들었겠구나, 하는 안쓰러움과 동질감이 느껴졌다. 그 눈빛이 만득에게도 전해져, 그를 더 자극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수업이랄 것도 아닌 수업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시후가 기다리고 있다. 분명 정생보다 더하면 더했지, 쉽지는 않은 레슨을 했을 텐데 시후는 막 샤워하고 나온 듯 보송하다. (어쩌면 정말 샤워를 하고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시후는 정생에게 들고 있던 물 한 병과 수건을 건넨다. 살짝 얼린 물이다.
“바른아, 물 좀 마실래?”
“고마워. 안 그래도 목 말랐는데.”
“오늘 오쌤 수업이었잖아. 오늘은 좀 괜찮았어?”
“뭐, 괜찮을 게 있나. 평소랑 똑같지.”
정생은 시후에게 물을 받아 그 자리에서 들이켰다. 오늘은 만득이 정생을 아예 열외로 빼놓아 혼자 구석에서 인터넷 동영상을 보며, 스트레칭을 했다. 이제 40대가 되었고, 택배업무와 연습생 연습을 병행하려면 계속 몸을 풀어줘야 했다. 덕분에 레슨실을 나오는 연습생 중 정생이 제일 땀에 절어 있다.
RH엔터 연습생의 일과는 하루에 단체 레슨은 1개를 듣고, 이후 30분 정도의 자유시간 후 개인레슨 혹은 개인연습을 하는 것이다. 보통 자유시간 동안 급한 용무를 해결하거나, 밥을 먹곤 하는데 시후는 그때마다 정생을 찾아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낙하산이라 꺼려할 수도 있는데, 자신을 살뜰히 챙겨주는 모습에 정생은 항상 고맙다.
“바른아. 혹시 너무 힘들면 그… 어른들께 말씀드리는 건 어때? 예를 들면 부모님이나 아니면 다른…”
“아냐, 괜찮아~ 뭐 이정도 가지고.”
“정말 괜찮겠어?”
“어. 정말. 걱정해줘서 고맙다.”
시후는 정생의 말이 진심인지 가늠하는 표정이었지만, 정생은 백퍼센트 진심이었다. 애초에 어디에 하소연할 만큼 힘들지도 않을뿐더러, 그의 부모님은 자신이 지금 연습생을 하고 있는 줄 꿈에도 모르신다. 지금 시간이면 슬슬 가게를 마감하고 있지 않을까. 굳이 어디에 말을 하자면 강회장 정도인데, 아무리 최근 강회장과 친분을 좀 쌓았다지만 그룹 회장을 사사로이 찾아가기엔 정생의 심장은 작았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때마침 강회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온다. 혹시 자신도 모른 사이 뇌에 칩이라도 심겨서, 생각이 공유되는 건가 심히 두려워진다.
“시후야, 나 잠시 전화 좀 받고 올 테니 먼저 올라가 있어.”
“오래 걸릴 거 같아?”
“음. 조금. 먼저 올라가.”
“그래. 알았어. 너무 늦지 말고.”
정생은 후다닥 핸드폰을 들고 자리를 떠난다. 그 뒷모습을 시후가 무표정한 얼굴로 응시한다. 그리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예, 회장님.”
“어이, 정바른이~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구만. 내 별 일은 아니고, 지나다가 로희택배 차량이 보이는데 갑자기 생각이 나서 전화해 봤네. 어때, 며칠 해보니 할 만 한가?”
“괜찮습니다. 어린 친구들이랑 같이 하니까 오히려 재밌기도 하고, 저도 정말 19살이 된 느낌이 들어 좋습니다. 모두 회장님 덕분입니다.”
“껄껄껄. 방송이 시작할 때가진 일단 무리에 녹아들고, 내가 진짜 정바른이고 연습생이다~ 생각하고 살아. 뭐든 진심을 다해야 되는 거야. 알지?”
“예, 압니다. 새겨듣겠습니다.”
정말 잠깐 정생이 생각나서 전화를 건 건지, 강회장은 다음에 또 연락하겠다며 금방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잠시 한숨을 내쉬고 있으려니 시선이 느껴졌다. 혹시 누가 엿들은 건가, 조심히 살펴보지만 아무도 없다.
다행히 누군가 쳐다보는 느낌이 들었던 건 정생의 착각이었는지, 그 이후 며칠이 지나도 별다른 일은 없다. 여전히 만득은 그를 싫어했고, 시후는 그를 살뜰히 챙겼으며 같은 C조 연습생들과도 형동생하며 원만한 관계를 이어갔다.
문제의 <아이돌 콜로세움> 출연진 명단이 게시판에 붙을 때까지.
***
“후우.”
정생은 휘청거리는 팔다리를 애써 붙들며, 벤치에 앉는다. 관리를 한다곤 했지만 나이를 속일 수는 없는지, 고된 레슨에도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다른 연습생들과 달리 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 정생은 주머니에서 파스를 꺼낸다. 직업이 직업이라, 언제나 몸에 소지하고 다니는 물건이다. 라커룸이나 연습실에서 붙일까, 하다가 조금 민망한 마음에 밖으로 나와 으슥한 곳에 앉았다. 뭐, 으슥한 곳이라고 해봐야 6층 공중정원에서 조금 외진 곳일 뿐이다.
“어휴. 피곤해라. 이래서야 운전은 할 수 있으려나… 쌍디들 오기 전에 가야 하는데.”
아이고, 짧게 곡소리를 내며 정생은 익숙한 듯 옷을 들춰 파스를 붙인다. 착. 착. 착. 보통은 손이 안 닿아 어려워하는 등도 한 번에 깔끔하게 붙인다. 순식간에 온 몸에 파스를 도배한 정생은 그제서야 벤치에 눕는다. 핸드폰으로 알람을 맞춰 놨으니 잠시 눈을 붙일 심산이었다.
아침부터 쌍둥이 챙기랴, 출근하랴 바쁘다가 출근해서도 혹시 연습실에 늦을까 부랴부랴 배달하고 퇴근하고, 또 급하게 집에 가서 집안일 대충 처리하고 서울로 운전해 연습실에 들어왔다. 정말 하루 종일 쉴 틈도 없이 바쁜 시간이라 정생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
RH엔터라 공중정원 곳곳에서 소속 가수의 노래가 은은하게 들려온다. 정생은 그 노래를 자잠가 삼아 눈을 붙인다. 그때 낭랑한 목소리가 들린다.
“연습생이에요? 휴게실 따로 있는데, 거기 있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아, 죄송합니다. 여기서 이러면 안 되는 건가요?”
“안 되기는요. 그냥 안쓰러워서 그러죠.”
화들짝 놀라 일어나니 화려한 복장의 미인이 서 있다. 그는 잠은 짧게 자더라도 푹 자는게 피부 건강에 좋다며, 가방에서 화장품 샘플을 꺼내 준다. 정생은 얼떨결에 그가 주는 것을 받아든다.
“저 혹시…”
“진주아예요. RH엔터 소속 스타일리스트. 그쪽은요?”
“아, 박… 아니 정바른입니다. 연습생이고요.”
“만나서 반가워요. 바른씨.”
주아는 정생에게 손을 내민다. 환하게 웃는 모습이 매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