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에게는 이름이 있다. 적어도 아직까지 정생이 만난 사람 중에 이름이 없어서 인사를 못한다는 사람은 못 봤다. 택배배달만 해도 보내는 사람, 받는 사람 모두 이름이 있다. 심지어 아직 뱃속에 있는 아기도 그냥 ‘아기’가 아닌 이름이 다 있다. 그러니 강태원 회장이 부캐에게도 이름이 필요하다고 했을 때, 정생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근데 부캐 이름 짓는 거에도 보통 사람들 짓듯이 사주팔자를 따질 줄은 전혀 몰랐다.
“박정생씨, 생년월일이 1979년 10월 31일. 맞아?”
“예… 맞습니다.”
“그럼 생일마다 그 노래 부르겠구만. 그… 그 있잖나. 시월의 마지막 밤을~ 하는 노래. 그… 제목이 뭐더라?”
“이용의 <잊혀진 계절>입니다. 회장님.”
“맞아. 고맙네, 최비서. 내가 나이가 드니 머리가 영 빠릿빠릿하지 않아. 쯧.”
“아닙니다.”
강회장은 이왕 얘기 나온 김에 <잊혀진 계절>을 듣고 싶다며, 최비서에게 부탁했다. 최비서는 익숙한 듯 스피커로 노래를 틀었다. 방 안 가득 울리는 피아노 반주에 가볍게 몸을 흔들던 강회장은 이내 들고 있던 펜을 마이크 삼아 구성지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최비서는 태블릿에 가사를 띄운다. 노안인 강회장을 배려해, 몇 미터 밖에서 봐도 읽을 수 있을 만큼 큼직큼직하다. 흥이 난 강회장과는 달리 정생은 묘한 표정이다. 불편한 듯, 그리운 듯 복잡한 표정이다.
흥에 취한 강회장이 <잊혀진 계절>을 부른 뒤, ‘거… 그… 그거…’란 말로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선곡해 열창했다. 이후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 나훈아의 <청춘을 돌려다오>, 산울림의 <너의 의미>, 송가인의 <엄마 아리랑>을 연달아 부른 뒤에야 강회장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펜을 내려놓았다.
노래가 다 끝난 뒤, 정생은 여전히 복잡한 표정이다. 그러나 강회장 몰래 최비서가 보내는 날카로운 눈초리에 애써 어색하게 웃으며 박수를 친다.
“와… 대단하십니다, 회장님. 너무 잘 부르셔서 제가 정신 놓고 들었습니다. 가수 뺨치게 잘하십니다.”
“아무리 그래도 가수 뺨을 치면 쓰나. 껄껄껄.”
정생의 아부가 싫지 않은 듯 강회장은 크게 웃었다. 그는 더운지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곤 셔츠의 단추 몇 개를 풀었다. 최비서가 그에게 에어컨을 켤지 물었지만, 강회장은 창문만 좀 열어도 충분하다고 대답했다. 그들이 있는 곳은 강회장의 별장이었는데, 뒤에 산이 있어 강회장의 말마따나 금방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시끄러운 자동차 경적소리가 아닌 지저귀는 산새들의 울음소리가 꽤나 듣기 좋다.
“그래, 박정생씨. 무슨 생각을 그리 했었나?”
“쿨럭.”
“이 강태원이의 눈을 속일 수 있을 줄 알았나. 내가 그 정도 어색한 연기에 속아넘어갔으면 지금까지 버틸 수나 있었을까. 껄껄.”
아니었음 애저녁에 뒷방 늙은이가 됐을 거라며 강회장은 웃었다. 정생은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물을 마셨다. 정생의 속이 타들어가든지 말든지 강회장의 얼굴엔 웃음기가 가득하다.
“뭐 내가 드라마 속 재벌들처럼 밑도 끝도 없이 괴롭히려는 건 아니네. 난 생각보다 여기가 깨어 있는 사람이야. 자네가 갑자기 우리 인태랑 내연관계라고 말해도 얼굴에 물을 끼얹거나 하진 않아. 뭐… 약점 정도는 조사 하려나. 껄껄.”
“무… 무슨 그런 무서운 말씀을…”
“말이 그렇다는 게지. 말이. 껄껄껄.”
정생은 이제 물잔도 못 잡을 정도로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애써 책상 아래로 감췄다. 새삼 또 자신의 앞에 있는 노인이 보통의 동네 어른이 아니란 걸 깨닫는다. 창백하게 질린 정생과는 달리 강회장은 간만의 열창으로 아까보다 혈색이 좋아 보인다. 강회장은 특유의 인자한 표정으로 정생을 바라본다.
“박정생씨, 갑자기 이 강태원이가 좀 무섭나?”
“아닙니다! 그… 아닌 게 아니고… 아주 조금은… 조금 그렇습니다.”
“그리고 또 궁금하지? 왜 대기업 회장씩이나 되는 양반이 하고많은 사람 중에 박정생이한테 이래 매달리나 싶고. 그제?”
정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부터 계속 궁금해오던 차였다. 최비서를 통해 최고급 호텔 숙박권에, 렌터카에, 페스티벌 티켓까지 받았을 땐 조금은 무서웠다. 솔직히 윗사람들의 놀이판에 놀아나는 기분도 없지 않았다.
"답을 모두 알려주는 건 재미가 없지. 내가 주는 힌트는 이것뿐이네. 난 기념식 전부터 자네를 알고 있었어. 나머지 답은 스스로 찾게.”
“예? 대체 어떻게 회장님이 절…”
“껄껄껄. 생각해보게. 아직은 젊지만 계속 머리를 써 버릇해야 나중에 편해.”
“예?”
강회장은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몸이 기분 좋게 식은 것 같다며 펜을 고쳐 잡았다.
“그럼 하던 거, 마저 해볼까?”
들리는 소리라고는 규칙적인 숨소리와 펜의 서걱거림뿐인 고요한 방. 주인의 취향처럼 블랙과 골드의 세련된 조합으로만 이루어진 인테리어다. 한쪽 벽 가득 빽빽하게 채워진 책과 책장에 얼핏 평범한 서재처럼 보이지만, 군데군데 화려한 화보사진이나 꽃, 상패 등이 장식되어 있다. 다른 벽면에는 포스터들이 하나의 작품처럼 감각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가구 하나하나, 장식 하나하나가 쉽게 구할 수 없는 값비싼 물건인데 그것들이 모두 원래 하나의 세트처럼 조화롭게 놓여 있어 촬영 스튜디오처럼 보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방의 제일 안쪽. 다른 곳과는 몇 계단 높은 곳에 놓인 책상에는 한 사람이 앉아있다.
그는 먼지 한 톨 묻어 있지 않은 깨끗한 철테 안경을 쓰고, 오와 열이 각 잡혀 정리된 책상에서 허리를 곧추세운 채 서류를 훑고 있다. 오늘 미용실을 다녀온 것처럼 흐트러짐 없는 숏컷에 짙은 색 셔츠를 입고 있는 그의 이름은 강로희. 로희그룹 후계서열 1순위이자 대한민국 문화 산업의 1번지 RH E&M(Rohi Entertainment&Media)의 대표다.
삐- 삐-
짧은 전자음과 함께 책상 구석에 있는 등이 켜진다. 고요한 와중에 들리는 소리에 놀랄 법도 하지만, 강대표의 시선은 서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곧 등 가까이 붙어있는 작은 스피커에서 정중한 목소리가 들린다.
“대표님. 진팀장님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딸깍-.
문 밖에서 약간의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조심스레 문이 열린다. 그러나 소음을 극도로 싫어하는 강대표의 성격 때문에 바닥 전체에 카펫이 깔려 있어, 발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 흔한 구두소리 하나 안 들리는데도 강대표는 방문객에 대해 일말의 관심도 없다. 그의 눈은 눈앞의 서류만을 향한다.
“누가 온 거 같으면, 슬쩍 들여다보기라도 해요. 혹시 알아요? 실수로 문을 잘못 연 잘생긴 꽃미남 외계인이 들어올지.”
“그럼 바로 전속계약 맺고 해외 진출해야지. 왜? 너 외계인이야?”
“아뇨. 그 외계인 전담 스타일리스트 될 사람이요.”
연예기획사 RH엔터(Rohi Entertainment)의 스타일리스트 팀장이자 강대표의 개인 스타일리스트인 진주아의 농담에 강대표는 서류를 내려놓고 웃었다. 한국 최고의 스타일리스트로서 최근 회사와 함께 유튜브 크리에이터로도 활동하는 주아는 강대표의 친한 동생이자 동료다.
“너 오늘 옷차림이 너무 과한 거 아냐?”
“오늘 컨셉은 ‘KTX 타고 가면서 봐도 스타일리스트’예요. 어때요?”
“비행기 타고 가면서 봐도 스타일리스트야.”
화려한 무늬의 민트색 퍼프 슬리브 크롭탑에 핫핑크색 부츠컷 바지를 입고, 명품 선글라스에, 얼굴만큼 큼직한 귀걸이, 피어싱, 목걸이, 반지까지… 정말 어딜 데려다 놔도 시선을 끌 옷차림새다. 그럼에도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고, 오히려 조화로워 보인다는 게 놀라웠다.
주아는 강대표의 칭찬에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내친 김에 런웨이 모델 마냥 멋진 포즈로 자세를 잡아본다. 진지한 주아의 모습에 강대표는 짧게 웃음을 터뜨린다. 그리고 그 웃음에 주아도 꺄르르 웃음을 터뜨린다.
“그래서 여기 왜 온 건데? 오늘 레이디라떼 화보 촬영하는 날 아냐?”
“화보촬영은 이미 끝났죠~ 지금이 몇 신데.”
강대표는 의아한 표정으로 주아를 바라보았다. 화보 촬영이 아니라면, 당장 주아가 자신을 찾을 이유는 없었다. 평상시의 주아는 강대표를 만날 때마다 최소 며칠 전부터 비서를 통해 약속을 잡고, 정시에 맞춰 나타났다. 오늘처럼 약속도 없이 만나러 오는 건 정말 드문 일이다. 그렇기에 당연히 오늘 스케줄에 문제가 있겠거니, 짐작한 강대표는 곰곰이 주아의 스케줄을 떠올려보지만 이렇게 갑자기 찾아올 만한 이유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럼 무슨 일인데? 진팀장, 그냥 이유 없이 여기 들이닥칠 사람 아니잖아.”
“들이닥치다뇨~ 누가 들으면 제가 억지로 문 부숴서 들어온 것 같잖아요~”
주아는 억울하다는 듯 입술을 내밀었다. 그러나 강대표는 팔짱을 끼고 가만히 그를 쳐다본다. 삐뚤어진 입술과 매서운 눈빛에 주아는 두 손을 들며 고개를 내저었다.
“졌어요. 말할 게요.”
“진작 그럴 것이지.”
“가만 보면 진짜 못됐어.”
“내가 그 정도로 넘어갔음 지금까지 버틸 수야 있었겠어?”
아니었음 진작에 어디 정략결혼으로 팔려가거나, 한국엔 아예 들어오지도 못했을 거라며 강대표는 웃었다. 그게 아예 없는 말도 아니어서 주아의 표정이 잠시 서글퍼졌다. 주아는 강대표의 손을 잡고 토닥이며 위로해주었다. 강대표는 가만히 그 손길을 받다가 돌연 주아의 손을 쥐고 자신의 품으로 살짝 끌어당긴다. 주아는 잠깐 놀라는 듯하더니, 강대표의 얼굴에 담긴 장난기에 피식 웃는다. 거의 끌어안을 듯한 자세로 강대표가 묻는다.
“그래서 왜 왔는데? 제대로 납득 못 시키면, 나 오해할지도 몰라?”
“뭐예요? 이거 설렘 포인튼가?”
“그래주면 나야 고맙지.”
강대표의 말에 주아는 이내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주아의 웃음에 아쉬운 듯, 아닌 듯 강대표는 그의 손을 놓아주었다.
“시간 없으니까 빨리 온 목적이나 말해. 왜 왔어?”
“우연히 연습생 애들 이야기하는 걸 들었는데, 새로 들어온 연습생이 빽이 어마무시하다면서요? 무려 강회장님 빽이라던데. 진짜예요?”
“아… 그 낙하산?”
“뭐야. 진짜였어요?”
“하아… 그 얘긴 꺼내지도 마.”
강대표는 생각만으로도 불쾌한듯 인상을 찌푸렸다.
강대표가 낙하산을 만난 건 불과 며칠 전이다. 그날은 강대표가 선정한 올해 최악의 날이다. 그날 갑자기 강회장이 점심을 먹자고 하기에, 이 능구렁이 같은 노인네가 드디어 자신을 후계자로 인정해주는 건가 아주 조금 설레는 마음으로 만사 제쳐 놓고 달려갔더랬다. 그런데 그곳엔 강회장만 있는 게 아니었다.
“저 왔습니다, 아버지.”
“어어. 왔으면 어서 들어와. 오느라 고생했다.”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강회장의 옆엔 처음 보는 낯선 남자가 있었다. 어딘가 낯익긴 한데, 그렇다고 이름이 떠오를 만큼 친숙하지는 않았다. 얼굴은 많아봐야 40초반일까. 얼핏 보기엔 30대 중후반의, 태닝을 한 건지 타고나길 그런지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꽤나 잘생긴 얼굴의 남자였다. 갑자기 부르기에 뭔가 했더니, 선자리였나. 망할 노인네 아직도 포기 못한 건가, 강대표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강회장은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는 이미 막걸리를 몇 잔 걸친 듯 뺨에 홍조가 올라있다. 그는 남자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강대표를 가리키며 말한다.
“소개하지. 이쪽은 우리집 장녀 강로희. 테레비에서 자주 봤지?”
“안녕하십니까. RH E&M 대표 강로희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강회장과 강대표의 시선이 닿자 남자는 긴장한듯 손을 가늘게 떤다. 입술이 마르는지 입술을 달싹이는 모습을 보니, 높은 직급에서 회사를 이끄는 인사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럼 대체 저 남자는 누구인가, 분명 낯이 익은데. 강대표는 인상을 찌푸린다. 강회장은 그러거나 말거나 다정한 손길로 남자의 어깨를 톡톡 두드린다.
“고등학교 3학년. 정바른 학생. 자, 바른 학생. 대표님한테 인사해야지.”
“저… 정바른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뭐요? 고등학생?”
강대표는 충격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누가 봐도, 어딜 봐도, 아무리 좋게 봐도 고등학생은 아니었다. 그가 누군가. 대한민국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기업 대표다. 그 또래의 소년소녀를 얼마나 많이 만나봤겠나. 일찍 결혼했으면 고등학생 자식이 있을 수도 있는 외모로 고등학생이라니. 지금 자신을 놀리는 건가. 아니면 이 노인네가 드디어 치매가 온건가.
강대표는 설명을 바란다는 뜻으로 강회장을 쳐다본다. 자신을 정바른이라고 소개한 남자도 수치스러움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는데, 정작 강회장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웃고 있다. 그 모습에 더욱 기가 찬다.
“봐. 교복 입은 거 안 보이나? 정바른 학생. 일어나서 교복 보여드려.”
“예… 회장님…”
몰카인가. 강대표는 입을 벌린 채, 주변을 둘러보지만 카메라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그 와중에 남자는 이제는 목까지 붉어져서는 일어나 한바퀴 빙글 돌며 교복을 자랑한다. 남자가 차라리 뻔뻔하기라도 했으면, 욕이라도 하고 말텐데. 수치스러움이 행동 하나하나에 묻어나 강대표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는 대신 강회장을 쏘아본다.
“지금 무슨 장난하십니까.”
“장난이라니. 난 지금 진지해.”
“대체…”
강대표는 강회장의 당당함에 말문이 막혔다. 그 옆의 남자는 저러다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만큼 붉은 얼굴이었다. 지금 더 말싸움하지 말고, 다 같이 병원에 가는 게 좋지 않나 진지하게 고민이 든다.
“이 친구 보면 알겠지만, 키도 모델처럼 크고 몸도 좋은데다 얼굴도 썩 나쁘지 않아. 그리고 쑥맥처럼 보이지만 보기보다 끼도 많고. 보니까 노래도 곧잘 하더라고.”
“하고 싶은 말씀이 뭡니까.”
머릿속으로 강회장이 정말 치매거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을 경우, 후계승계에 대해 설계하고 있는 강대표에게 강회장은 짓궂은 아이처럼 씩 웃는다. 그 표정에 강대표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옛날부터 강회장이 저 표정을 지으면 언제나 충격적인 일이 이어졌다.
“내 빽으로 얘 아이돌 좀 시켜줘.”
“뭐요?”
“이번에 한다는 <아이돌 콜로세움>에 이 친구 출연시켜줘. 너희 회사 소속으로.”
강대표가 그 남자, 자신을 정바른이라고 소개한 자칭 고등학생의 진짜 정체를 안 건 그날 오후였다. 강대표는 강회장의 충격발언으로 숟가락도 못 들어보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배에선 꼬르륵 소리가 들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분명 어디서 본 얼굴이었다. 강대표는 비서진들에게 그날 스케쥴을 모두 비우라고 말하곤, 온갖 자료들을 뒤져가며 기억을 더듬었다. 강회장에게 심어 둔 스파이에게서 그 남자에 대한 정보를 하나도 듣지 못한 걸로 보아선, 작정하고 준비한 모양이었다.
“분명 어디서 봤어. 내가 대체 어디서 본 거지?”
미친 사람처럼 잡지, 신문, 이력서 따위를 뒤지던 강대표의 손이 멈칫한다.
“찾았다…”
그의 손에 들린 건 로희그룹 사보 <로희 타임즈>였다. 스타일이 조금 다르지만 확실했다. 로희택배 창립 50주년 행사에서 올해의 택배왕으로 강회장에게 상을 받은 남자. 박정생이다.
“아빠, 뭔 일 있어여? 왜 그렇게 앉아 계세여?”
“어디 아프시면 편의점 가서 약 사올까요?”
“우리 쌍디들. 오늘은 아빠 좀 잠시 혼자 있게 해주라.”
늦은 밤. 쌍둥이들의 걱정을 뒤로 한 채, 정생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평소라면 걱정하지 말라며, 아이들을 다독여주거나 아무렇지 않은 척 장난을 쳤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부캐라는 걸로 아이돌에 도전하기로 했을 때,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정말 다른 사람들 말마따나 어릴 때 도전하지 않은 게 난생 처음 후회될 정도로 수치스러웠다.
부캐의 인적사항을 정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강회장은 이전에 부산 관련 서류를 전해줬을 때처럼 최비서를 통해 서류를 전달했다. 사실 말이 서류지, 3호 박스 정도 크기의 상자다. 받아 들었을 때, 전문가로서의 느낌은 의류였다. 크기에 비해 가벼웠고, 흔들었을 때 뽀시락 하고 얇은 비닐 소리가 났다. 대부분 의류는 쇼핑몰 이름이 크게 박힌 택배봉투에 들어있는데,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고 유연해서 분실의 위험이 있다. 최근에도 물류창고에서 까대기하던 알바 실수로 택배가 사라져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최비서는 기밀자료이니, 자료는 집에 가서 혼자 확인하라고 말했다. 정생은 혹시 다 본 뒤엔 불에 태워 없애야 하냐고 물었으나, 최비서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대답했다. 서류를 전달하자 마자 퇴근시간이라며 곧바로 자리를 떠났던 이전과는 달리, 그는 아주 잠시 묘한 표정으로 정생을 응시했다.
“퇴근 안 하십니까?”
“힘내십시오…”
“예?”
“그럼, 저는 퇴근시간이라.”
정생은 평소와 다른 최비서의 행동을 단순히 친분의 표시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바쁜 강회장 대신 정생에게 지시사항을 전달하거나, 강회장이 있을 때에도 함께 만났으니. 깊지는 않아도 얕게나마 친분이 생겼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만약 누군가 앞으로 최비서 대신 일을 처리해준다고 한다면, 정생은 조금 서운할 것 같았다. 정생은 괜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문제의 상자를 열어보곤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교복.
정생에게 교복은 낯선 옷이 아니다. 오히려 매일 아침저녁으로 교복을 빨고, 다리고, 정리하고 하느라 익숙한 편에 가깝다. 쌍둥이들이 고등학생이니, 교복이 정생의 일생에 들어온 지도 벌써 4년째다. 처음 쌍둥이들이 중학교에 올라가 교복을 맞췄을 때 기쁜 마음에 한 번 울고, 그걸 입고 등교하는 모습을 보고 다시 또 울었던 일이 바로 어제 같다. 정생은 지금도 교복을 보면 애틋하고, 자랑스럽고, 새삼스럽고, 서글프다.
그러나 그건 핏덩이 같던 쌍둥이의 성장에 대한 감정이었지, 결단코 다른 감정은 아니다. 맹세컨대 단 한 번도 자신이 그 교복을 입고 싶다거나, 고등학생으로 돌아가고 싶단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학창시절은 IMF다 뭐다 해서 집안도 나라도 너무 힘들었다.
최비서가 전해준 ‘기밀자료’엔 웬 낯선 교복이 한 벌 들어있었다. 쌍둥이들의 교복이 베이지색와 검정색이 잘 배합된 깔끔한 스타일이라면, 이건 교복광고에서나 입을 법한 화려한 오렌지색 체크무늬다. 교복 위에는 작은 쪽지가 붙어 있다.
[하복이라 오렌지색 조끼를 준비하지 못해 미안하네. -太1-]
아주 잠시, 지금 계절이 여름인 것에 정생은 감사했다. 그러나 이내 눈 앞이 핑핑 돌 정도로 화려한 오렌지색에 좌절했다. 교복의 왼쪽 주머니 위엔 [정바른]이란 그의 부캐 이름과 로희그룹 로고가 수놓아져 있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교복은 정생을 강대표 앞에 데려갔고, 그때만큼은 아무리 정생이라도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가장으로서 쌍둥이들 장학금을 견고하게 해야 한다는 것과, 늦었지만 꿈을 이루고 싶다는 의지로 간신히 버텼을 뿐이다.
예상했던 것처럼 강대표는 기겁했고, 정생을 아이돌 연습생으로 받아들여 프로그램에 참가시키라는 강회장에 제안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신을 바라보던 그 눈빛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마 정생에게 이날은 쌍둥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흑역사’로 영영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다시 떠오르는 흑역사의 기억에 정생은 이불을 찼다.
그리고 며칠 뒤, 그는 또 한 번 흑역사를 생성한다.
“안… 안녕하십니까… 저는 후우… 저는…”
수많은 시선이 정생을 향한다. 헐렁한 옷차림에 땀이 범벅된 상태에도 하나같이 인형처럼 고운 소년들과 딱딱한 표정의 성인남녀 여럿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정생은 다시 또 문제의 오렌지색 체크 무늬 교복을 입고 서 있다. 정생은 교복을 다시 입을 바에 속옷 차림으로 가겠다고 했지만, 강회장의 강경한 지시로 다시 또 교복을 꺼내 입었다. 정생은 심호흡을 하고, 눈을 질끈 감는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박정생.
“저는! 로희고등학교 3학년! 정! 바! 른! 입니다! 오늘부터 연습생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이 둘 아빠이자 택배기사 박정생의 부캐 정바른의 첫 시작이었다.
***
“그럼 여기까지 하고, 최비서. 그… 오지선녀한테 연락 넣어서, 최대한 빨리 해달라고 부탁해줘. 사례는 강태원이가 섭섭치 않게 챙겨준다고 하고.”
“예. 회장님.”
강회장은 몸이 찌뿌둥한 지 가볍게 어깨를 풀었다. 진짜도 아니고, 잠시 쓰는 가짜 인적사항을 정하는데 자그마치 몇 시간이 걸렸다. 최비서는 인적사항을 정리한 서류를 가방에 챙겼고, 이제 오지선녀란 사람에게 보여주면 끝이었다. 그럼 그가 사주를 본 뒤, 가장 길한 이름을 몇 개 정해주고 정생은 그 중 마음에 드는 이름을 고르는 것이다.
그러나 정생은 그렇게 일을 마무리하고 싶지 않았다. 이유는 모른다. 굳이 이유를 붙이자면, <잊혀진 계절>이 잊고 싶던 기억을 떠올리게 해서일까. 그 노래가 나왔을 때부터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그래서 그런 것 같다.
“저 회장님…”
“응? 왜 부르나.”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제가 생각해 놓은 이름이 하나 있긴 합니다.”
정생의 말에 강회장의 눈이 빛난다. 강회장은 막 방을 나서려던 최비서에게 기다리라, 신호한다. 그 순간에도 정생은 과연 이걸 말해도 되는가, 갈등이 된다. 하지만 지금이 그 이름을 쓸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계속 말을 해보라는 강회장의 손짓에 정생은 잠시 입술을 달싹이곤 이내 입을 연다.
“정바른. 정바른으로 하고 싶습니다.”
아주 오래 전, 비 내리던 어느 여름날 바닷가에서 받은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