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꿀꺽.
전날 고이 걸어 놨던 경조사용 정장을 입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정생은 침을 삼켰다. 대체 여기는 어디고, 자신은 왜 여기 있는가. 이러다 숨쉬는 법을 잊어버릴까, 애써 심호흡을 하는 정생과는 달리, 그를 안내하는 직원들의 얼굴엔 아무 표정도 없다. 혹시 이 사람들 SF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안드로이드들이고, 자신은 안드로이드의 세상에 몇 남지 않은 인간은 아닐까. 머릿속에 떠오르는 쓸데없지만 긴장은 좀 풀어주는 잡생각을 하며, 정생은 문 앞에 섰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그 안에는 로희그룹 회장 강태원이 있다. 그는 한 손에는 커피를 들고, 다른 손에는 핸드폰을 든 채 뭔가를 감상하고 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정생은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어, 왔는가. 여기 편하게 앉게.”
강회장은 자신의 맞은편 자리를 손짓했다. 정생은 애써 허리를 쭉 펴고, 당당한 걸음걸이로 자리에 앉았다. 정생이 착석하자, 비서가 다가와 커피와 주스, 차를 물었다. 정생은 오렌지 주스를 부탁했고, 곧 오렌지 슬라이스가 컵에 장식된 생과일 주스가 나왔다.
“박정생씨, 여까지 오느라 수고가 많았어. 어제는 잘 들어갔고?”
“예. 회장님 덕분에 편히 들어갔습니다.”
“껄껄.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오히려 부담을 주면 줬지. 이렇게 갑자기 불러내어 미안하네. 알다시피 어제 시상식 마치고, 곧바로 월남에 가야 해서 말이지. 아, 베트남. 베트남 말이야. 그 바람에 자네한테 연락하라고 말하는 걸, 깜빡했지 뭔가. 늦었지만 이 노인네가 한밤중에 예의도 모르고 연락한 걸 사과하네.”
“아이고, 아닙니다. 애들 때문에 그 시간은 이제 저한테 저녁시간이나 마찬가지인 걸요. 허허.”
“그런가? 그럼 다행이고. 애들이 고등학생이랬나? 좋은 아버지를 뒀구만. 나보다 훨 나아.”
“아닙니다, 회장님 발끝에도 못 미치는 그저 평범한 아버지인 걸요.”
“껄껄껄. 빈말이겠지만 고맙네.”
껄껄 웃는 강회장을 따라 정생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 정생을 인자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강회장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물었다.
“내가 여기 자네를 왜 불렀나 궁금하지?”
“아, 예… 조금은… 혹시 어제 장학금 때문에 부르신 겁니까? 쌍둥이는 안 된다거나…”
“아냐, 아냐. 박정생씨 애들이 다섯 쌍둥이, 여섯 쌍둥이였어도 문제없어. 혹시 뭐, 박정생씨 숨겨둔 자식이라도 있나?”
“아유, 아닙니다! 숨겨둔 자식이라니. 저한텐 쌍둥이 남매가 전붑니다.”
정생이 기겁하며 세차게 손사레를 치자, 강회장은 농담 좀 쳐봤다며 껄껄 웃었다. 정생은 어정쩡하게 웃으며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회장님 댁 생과일 주스라 그런지, 맛이 예술이었다. 정생은 나중에 비서에게 어디서 오렌지를 샀나 물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이 어색하고 부담스러운 대화가 끝난 후에.
“그런데, 내가 박정생씨 부른 이유가 어제 그 장학금 때문은 맞아. 그 장학금 아무나 못 받는 건 알고 있지?”
“예. 알고 있습니다…”
“박정생씨, 물론 훌륭한 직원이고 로희 택배에 없어서는 안 될 인재지만 자녀장학금 수혜를 받기엔 조금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아. 물론 내가 어제 그 자리에서 허락은 했지만 말이야.”
“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습니다! 저희 애들 걱정 없이 대학 가려면, 장학금 꼭 필요합니다. 부탁드립니다, 회장님.”
정생은 덜덜 떨며, 강회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침에 등교하면서 본 도원의 퉁퉁 부은 두 눈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쌍둥이들은 자신과는 달리 돈 걱정 없이 마음 편히 공부하고, 남부럽지 않은 20대를 보내게 하고 싶다. 돈 때문에 꿈을 포기하는 건 자신의 대에서 끝내야 한다.
“부탁드립니다, 저와 저희 가족에겐 무엇보다 간절한 일입니다!”
강회장은 정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생의 손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러고 있으니, 스스로가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굉장히 못하는 재벌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선량한 가족들을 협박하고 있는 악역이 된 것 같달까.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강회장은 말했다.
“그럴 거 없어요. 일단 자리에 앉고. 내가 무슨 양아치도 아니고, 천하의 로희그룹 강태원이가 사람들 다 보는 데서 한 약속을 다음날 바로 깨버릴까.”
“감사합니다, 회장님.”
정생은 떨리는 손을 애써 감추며 강회장에게 다시금 고개를 숙인다. 에어컨이 틀어져 있었지만, 그의 얼굴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고 옷에는 주름이 져 있다. 강회장은 정생의 옷 매무새를 정돈해줄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랬다간 정생이 경기라도 일으킬까 괜한 오지랖은 참기로 했다.
“대신 그냥 넘어가기엔 좀 아쉬워서, 내가 박정생씨한테 개인적으로 부탁 하나 하고 싶은데 한 번 들어보겠나?”
“예!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패기 넘치는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강회장은 턱을 문지르며 물었다.
“박정생씨, 부캐라는 말 혹시 압니까?”
“예?”
부캐. ‘부 캐릭터’의 준말로, 온라인 게임 등에서 2개 이상의 캐릭터를 운영할 때 사용하던 용어다. 근래엔 예능에서 ‘부캐’란 용어를 사용하면서, 1명의 인물이 가진 다양한 정체성을 이르는 말로 통용되고 있다.
반대로 본캐란 용어는 ‘본래의 캐릭터’의 준말로, 여러 개의 부캐 중 핵심 캐릭터 혹은 예능에서는 보통의 자신을 이르는 말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홍길동이라는 인물이 있다면, 홍길동 자신은 본캐로, 그리고 요리를 하는 홍길동을 요리동, 춤을 추는 홍길동을 춤동 등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말한다.
강회장은 정생에게 애들이 고등학생인데, 텔레비전도 안 보냐며 혀를 찼다. 강회장은 정생에게 왠 서류뭉치를 내밀었는데, 그 안에는 요근래 예능에서 유행하는 부캐들의 자료가 들어 있었다.
“우리가 보기엔 얼굴도 똑같고, 목소리도 똑같고, 실제로 같은 사람이니 DNA도 똑같은데 사람들은 부캐, 본캐 그렇게 부르면서 인물들을 분리해서 생각하더라고. 아주 재밌는 현상이지. 언제 적 <지킬박사와 하이드> 얘기를 하는가 했더니, 그랑은 좀 다르더라고.”
“아, 네. 그렇군요. 근데 이런 건 갑자기 왜…”
정생이 의아한 표정으로 강회장을 바라보자, 강회장이 씨익 웃었다.
“그거, 자네가 해보자고.”
“네에??”
“박정생씨, 부캐 뛸 생각 없나?”
후우. 정생은 얼굴을 쓸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부캐. 부캐라니. 오늘 처음 듣고, 아직 이해도 안 가는데 부캐를 뛰라는 건 또 뭔 소린지.
강회장은 정생에게 2가지 제안을 했다. 하나는 RBC에서 3개월 뒤 방송이 시작되는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 <아이돌 콜로세움>에 연습생 신분으로 출연할 것, 그리고 방송이 진행되는 동안 강로희, 강인호, 강인태의 동태를 살피고 보고할 것. 공교롭게도 올해가 RH E&M의 창사 15주년이며, 이를 기념해 대규모 자본을 동원해 준비하는 프로그램이 <아이돌 콜로세움>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강인호의 로희전자, 강인태의 로희화학이 공동투자를 함으로, 로희그룹 후계서열 1, 2, 3위가 모두 참여한 초대형 프로젝트가 되었다.
탑차에 오르며, 정생은 강회장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이 프로젝트는 협업이란 이름의 전쟁이 될 걸세. 후계자리를 노리는 셋이 모였으니, 분명 사건사고도 생길 테지. 내가 박정생씨한테 부탁하는 건,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시시콜콜한 농담이라도 알려 달라는 걸세. 말하자면 스파이지.”
“왜 하필 저한테… 저는 정말 평범한 사람입니다. 이런 일은 저보다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이 해야 지, 저는 담도 약하고 똑똑하지도 않아 별 도움이 안 될 겁니다.”
“어차피 자네 말고도 심어 놓은 스파이는 많아. 그냥 한번 편하게 생각해보게. 이번이 꿈을 이룰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잖나.”
강회장은 특유의 인자한 표정으로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서류는 정생의 과거 인터뷰와 이력서다. 그중 정생이 아이돌을 언급하는 부분마다 형광펜이 그어져 있다. 강회장이 말한다.
“꿈을 꿔야지. 시간이 없으니.”
정말 자서전 그대로 사는 사람이었다. 자서전 내내 꿈을 꿔라, 시간 없다 그러더니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나 보다. 정생은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강회장은 나중에 비서를 통해 다시 연락할 테니, 그때까지 생각해보라고 했다. 물론 대답은 긍정적이길 바란다는 말도.
“아이돌이라…”
꿈으로 생각할 때는 너무도 달콤한 말이지만, 막상 현실로 받아들이자니 한발자국 발을 내딛는 것도 두렵다. 아이돌은 10대, 20대의 가장 어여쁜 나이의 소년들이나 하는 것이 아닌가. 정생은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햇볕에 타 온통 까무잡잡한 피부에 감출 수 없는 주름살, 팔다리에 가득한 보기 싫은 흉터. 이게 어딜 봐서 아이돌인가. 외모만 놓고 보면 아이돌 콜로세움이 아니라, 진짜 콜로세움에 참가할 것 같다. 정생은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본 포즈 몇 개를 따라해보았다. 차라리 헬스장에 등록해서 3개월 뒤에 보디빌딩 대회에 출전하는 게 더 가능성 있어 보였다.
“그래, 나 같은 게 무슨…”
연갈색 택배박스를 든 오렌지조끼의 택배 아저씨. 쌍둥이 박도원, 박여원의 아빠. 정생은 이미 그걸로 충분했다. 꿈을 꾸기엔 시간이 없었다. 지금 급한 건, 다음 생으로 미룬 꿈이 아니라 손에 든 택배박스다.
늦은 저녁. 여름이라 낮이 길어 그제야 뉘엿뉘엿 넘어가는 태양을 보며, 정생은 집으로 돌아온다. 퇴근하자 마자 들른 마트에서 며칠 치 장을 다 봐온 바람에, 정생의 양 손에는 곧 터질 것 같은 태리시 종량제 봉투가 들려 있다.
“우리는 오렌지 태양 아래~~ 그림자 없이 함께 춤을 춰~~”
흥겹게 춤을 추며, 집으로 걸어가는 정생을 누군가 부른다.
“박정생씨?”
“네?”
고개를 돌려 보니, 정장을 쫙 빼 입은 강회장의 비서가 서류봉투를 들고 서 있었다. 누가 봐도 우연히 지나가다 만난 상황은 아니었다. 비서는 정생에게 뚜벅뚜벅 다가와 가볍게 목례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강태원 회장님의 비서 최강유입니다. 편하게 최비서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며칠 전, 회장실에서 뵀었는데 기억하십니까.”
“아, 네 기억하고 말고요. 반갑습니다.”
최비서는 물 흐르듯 명함을 건넸다. 그 모습에 정생은 급하게 장바구니를 내려놓고, 명함을 받아 들었다. 정생은 지갑을 꺼내 받은 명함을 집어넣고, 곧바로 자신의 명함을 꺼내 건넸다. 공익광고 마냥 서로 정중히 명함을 주고받은 뒤, 최비서는 손목의 시계를 한번 스윽 살피더니 정생에게 들고 온 서류봉투를 건네며 말했다.
“회장님께서 박정생씨께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이게 뭔가요?”
“박정생씨의 결정에 도움을 줄 요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 그 지난번 회장님 제안은…”
“제안에 대한 대답은 일주일 뒤에 듣겠다고 하셨습니다. 봉투 안의 내용물들을 잘 살펴보시고, 좋은 결정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럼, 저는 이제 퇴근시간이라.”
최비서는 정생에게 꾸벅 목례한 뒤, 왔던 것처럼 뚜벅뚜벅 떠났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정면을 응시하며 일정한 보폭으로 걷는 최비서의 뒷모습에 정생은 혀를 내둘렀다. 아무래도 안드로이드가 맞는 거 같다.
서류봉투 안에는 로희자동차의 고급 SUV 렌터카 예약증과 부산 로희호텔 스위트룸 2박 예약증, 부산 <올나잇 워터 뮤직 페스티벌> 티켓이 들어있다. 모두 이번 주말 날짜이며, 전부 3명분이다. 당연하겠지만, 이번 주말은 정생의 비번 차례이고 쌍둥이의 기말고사는 금요일에 마친다. 안 그래도 정생은 주말에 가족끼리 서해 쪽으로 가볍게 당일치기를 갈 계획을 세우고 있던 차였다.
부산이면 멀긴 해도, 못 갈 것도 아니며 동료 기사인 전오와 말을 잘 해보면 금요일 오후쯤 출발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이왕 바다를 갈 거면, 서해보다는 부산이 훨 낫기는 했다. 애들 더 크면 같이 여행 갈 시간도 없을 테니, 가서 추억도 좀 쌓고. 그런데…
“좀 찝찝하네.”
포스터를 자세히 보니 <올나잇 워터 뮤직 페스티벌>은 젊은 사람들이 좋아할 유명 가수란 가수는 전부 출연하는 행사다. 어지간한 유명 래퍼, 솔로가수, 아이돌 그룹들은 다 온다고 생각하면 된다. 해운대에서 밤새 진행되고, 매일 불꽃놀이를 하는 데다 심지어 호텔에서 걸어서 몇 분 되지도 않는다.
“정말 작정을 하셨구만…”
정생은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혹시 뭐 더 없나 싶어 서류봉투를 탈탈 털어보니, 반으로 접힌 작은 카드가 떨어진다. 설마 손글씨는 아니겠지. 정생은 주저하며, 카드를 펼친다. 카드 안엔 휘갈겨 쓴 문장이 적혀 있다. 그 와중에 명필이다.
[부담 갖지 말게. 그냥 가족들이랑 편히 쉬고 온다고 생각해~ -太1-]
“와. 대박…”
“헐! 아빠!! 여기 술 겁나 많아여!! 와!!! 아빠 여기 가는 데마다 꽃 있어여!!!”
금요일. 전오에게 다음에 크게 한 끼 쏜다고 약속하고 받아낸 이른 퇴근으로 정생은 쌍둥이들의 하교와 동시에 곧바로 부산으로 출발했다. 해운대에서 맛집으로 소문난 밀면 한 그릇씩 먹고, 옷부터 갈아입자 싶어 들어간 호텔은 어마어마했다. 스위트룸만 보고 신경을 안 썼는데, 신분증과 예약증을 내밀자 직원이 직접 짐을 들어 방으로 안내하더니 웬 재벌 드라마 세트장 같은 곳이 나타났다. 그냥 스위트룸이 아니라 발음도 어려운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이란다.
도원과 여원은 그냥 이 방에만 있어도 너무 재밌다며, 온 방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정생은 새삼 그가 만났던 인상 좋은 노인이 재벌그룹 회장이구나, 싶어 식은땀이 흘렀다. 대체 그런 양반이 왜 많고 많은 사람 중에 굳이 자신에게 그런 제안을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거기다 설득하겠다고 이렇게 정성껏 돈을 쓴다는 것도.
페스티벌이 시작하기 전까지, 정생과 쌍둥이들은 해운대 주변을 둘러봤다. 동백섬에 가고, 바다 근처 루프탑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도원이 SNS에서 봐 뒀다는 맛집에서 저녁도 먹었다. 여원은 경찰이 되고 싶다고 했고, 도원은 오뜨꾸뛰르인가 뭔가 하는 패션쇼에 나가는 패션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했다.
기말고사는 중간고사보다 대체로 어렵게 나왔는데, 둘 다 그럭저럭 나쁘지 않게 봤다고 말했다. 경찰대를 준비하는 여원도, 상위권 대학 미대를 준비하는 도원도 시험 준비한다고 몇 주를 밤을 새서 요 며칠 야윈 게 눈에 보였다. 짠하고 대견한 마음에 정생은 쌍둥이에게 간식 하나씩 더 손에 들려주었다.
정생은 쌍둥이들에게 은근슬쩍 요즘엔 어떤 아이돌을 좋아하느냐 물었는데, 여원은 그다지 관심이 없다고 했고 도원은 요즘 미국 팝송에 빠져 있다고 했다. 영어 공부한다고 들었는데, 듣다 보니 빠졌다고.
“아, 그러고 보니까 박여원. 너네 반에 아이돌 연습생인가 있지 않아?”
“어. 고예랑.”
“여원아, 반에 아이돌 연습생이 있어?”
“연습생 아니고 전직 연습생이래요. 별로 친하지는 않아서 잘은 모르는데, 이젠 연예인 안 하나 봐요.”
“아니 왜?”
정생의 물음에 여원은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안 친해서 모른단다.
“아빠, 쟤 아싸라서 물어도 몰라여.”
“뭐래. 지는 관종이면서.”
“아니거든! 관종 아니고 인싸거든! 이 아싸야!”
“야! 박도원!!”
“자자, 그만. 좋은데 와서 별거도 아닌 걸로 싸우기는 왜 싸워. 자, 서로 사과해. 어서!”
정생이 엄한 말투로 야단치자, 도원과 여원은 기분 나쁜 표정으로 서로 보지도 않는다. 그래도 서로 미안하다고 말이라도 하니 다행인지. 정생은 한 번 더 쓴 소리를 해야 하나, 아주 잠깐 고민했지만 시계를 보니 곧 페스티벌 입장 시간이었다.
행사장에 도착하니, 이미 사람이 많았다. 아직 공연시간은 1시간가량 남아있었는데, 현장 매표소도 티켓교환처도 모두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단독 콘서트가 아닌 여러 가수들이 참가하는 페스티벌이다 보니 형형색색의 응원봉과 슬로건 등이 가득했다. 쿵. 쿵. 쿵. 음향점검을 위해 기기를 만지는 소리에 정생의 가슴도 쿵. 쿵. 쿵. 뛰었다.
한쪽에는 가수들의 포스터나 비공식 응원봉 등을 파는 노점들이 모여 있었고, 어느 한 쪽에는 팬들이 서로 스티커나 작은 포토카드 등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재잘대는 소리, 환호하는 소리, 노랫소리, 스태프들의 외침소리 따위가 한데 모인 웅성거림은 그 자체로도 설레고 신났다. 그 때문인지 쌍둥이들도 언제 싸웠냐는 듯 어린아이처럼 눈을 빛내며 주변을 두리번대느라 바빴다. 정생은 아버지 마음에 저러다 미아가 되지 않을까, 서로 손잡고 따라오라고 할까 고민됐다.
티켓교환처에 티켓을 보여주니, 스태프는 팔목에 투명한 도장과 함께 형광 팔찌를 채워줬다. 도저히 눈으론 도장이 보이지 않아 혹 잘못 찍히거나 잉크가 부족한 건가, 정생이 물으니 스태프는 익숙한 듯 주머니에서 작은 손전등을 꺼내 정생의 팔목 위를 비췄다. 하늘색 빛이 닿으니, <올나잇 워터 뮤직 페스티벌> 로고가 나타났다.
“쌍디들! 다들 응원봉 하나씩 들고 있는데, 우리도 하나 살까?”
“전 별로… 방에 둘 데 없어요.”
“그럼 얘 빼고 저만 사주세여! 저는 저 보석모양!”
특정 가수들의 응원봉도 가지각색이었지만, 기본 응원봉도 모양, 크기, 색이 전부 다양했다. 도원이 고른 하얀색 보석봉과 자신이 고른 오렌지색 별봉을 계산하며, 정생은 노점상에게 농담을 건넸다.
“와… 사장님, 눈 안 부시세요? 이러다 사장님 눈 너무 부셔서 부쉬맨 되는 거 아닌가 몰라~”
정생은 스스로도 만족스러운지 껄껄 웃었다. 정생의 아재개그에 옆에 있던 여원과 도원은 고개를 내저었다. 노점상만이 평온한 얼굴로 잔돈을 건넸다.
“뭐, 익숙해지면 괜찮습니데이. 글고 여서는 이래 눈 부시도, 거 올라가서 가수들 보맨 밤하늘 맹키로 반짝반짝~ 이뿌게 보인다 카데요. 혹시 눈 부시가 우야노~ 했는데, 참말로 다행아입니까.”
잔돈을 받는 정생의 손이 멈칫한다. 밤하늘. 무대에 서면 모든 별들이 사랑한다고 외치는 기분이 든다던 어느 가수의 인터뷰가 떠오른다. 그리고 강회장의 얼굴도.
“아빠, 우리 어서 들어가요. 곧 시작한대요.”
“어어. 그래. 들어가자. 감사합니다, 사장님. 많이 파세요!”
여원의 말 대로, 그들이 자리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무대 위에 사회자가 뛰어들어왔다. 부산 출신의 유명한 탤런트인 사회자는 구수한 사투리와 함께 자신의 유행어들을 쏟아내며 분위기를 띄웠다. 그의 찰진 진행에 맞춰 가수들의 무대가 시작한다.
“그래, 마음의 결정은 한 건가?”
강회장은 오늘도 특유의 인자한 표정으로 정생을 본다. 이전과 다른 점이라곤 오늘은 커피 대신 쌍화차와 전병을 먹고 있다는 점이다. 강회장은 정생이 사온 전병을 아작아작 맛깔스럽게 먹으며 다시 한번 묻는다.
“박정생 씨, 나랑 부캐 하나 뛰어볼 텐가?”
***
페스티벌은 밤새 이어졌다. 하늘이 검게 변하면 시작해서 일출을 보는 것으로 축제를 파했다. 12시까지는 여러 가수들이 돌아가며 무대를 했고, 12시부턴 밤샘콘서트로 유명한 가수들이 매일 돌아가며 무대를 장악했다.
그래서 밤 12시가 되면, 사회자가 나와 시간을 알리며 회장을 정리한다. 이때 30분간 쉬는 시간을 주는데, 이때 미성년자나 그 외 여러 이유로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을 사람은 앞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 정생과 쌍둥이들은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아침부터 근무하느라 지친 정생도 그렇고, 시험공부 하느라 며칠 잠도 제대로 못 잔 쌍둥이들은 12시까지 버틸 체력이 없었다.
어차피 페스티벌 티켓은 3일 전부 있었고, 남들은 신나서 즐기는 콘서트를 반쯤 꾸벅꾸벅 졸며 있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셋은 중간에 자리를 떠났다. 상대적으로 체력이 좋은 여원이 반쯤 눈을 못 뜨는 도원을 챙겨 나가고, 정생은 마지막으로 자리를 점검하고 따라갔다.
콘서트의 열기가 극에 달한 클라이맥스. 관중은 응원봉을 흔들며 환호하고, 그 환호에 가수는 더욱 신나 노래한다. 하품을 애써 참으며 돌아선 정생은 그 풍경에 그대로 굳어버린다. 관중석에 앉아 무대를 올려다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풍경.
“밤하늘…”
불현듯 아까 만난 상인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욕심이 났다. 남의 것인 밤하늘이 아닌, 오롯이 자신만의 밤하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