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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아이돌스토리
부캐는 아이돌입니다
작가 : 강토글
작품등록일 : 2020.9.1

[아이돌물/아저씨/부캐/중년로맨스/힐링물/기사님은아이돌/훈훈물]

“박정생씨, 부캐라는 말 혹시 압니까?”

올해는 그야말로 부캐의 전성시대다. 부캐릭터의 준말인 부캐열풍은 지상파 예능에서 시작해 종편 예능, 인기 연예인들까지 퍼져, 처음엔 낯설던 부캐란 말이 이제는 일상처럼 쓰인다.

중년. 한때는 낯설던 ‘아저씨’란 호칭이 익숙해지고, 몸에 꽉 끼는 청바지보단 헐렁한 등산복이 편한 나이. 누군가 미래를 물으면 퇴직과 연금이란 단어가 먼저 떠오르는 나이. 젊은 날의 꿈이 이제는 술자리 안주거리로 전락해버린 나이. 반복되는 일상이 지겹지만 결코 그것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나이.

물론 누군가는 중년에도 꽉 끼는 청바지를 입고, 미래를 꿈꾸며 매일을 신나게 살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지켜야할 가정이 있는 수많은 중년들에겐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본캐(본래의 캐릭터)를 바꿀 수 없다면, 본캐를 유지한 채로 부캐를 하나 더 만든다면 어떨까. 가정을 유지하기 위한 본래의 직업, 생활은 유지한 채 그저 아쉬움으로만 남겨두었던 일들을 부캐로 할 수 있다면 지루하기만 하던 삶이 조금은 즐겁게 느껴지지 않을까?

 
2화. 왕은 아무나 하는게 아니다
작성일 : 20-09-03 00:01     조회 : 385     추천 : 0     분량 : 14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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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들 꿈에 돼지가 나오면 복권을 사야할 복 꿈이라고 말한다. 또 수험생이나 취업준비생 등이 있는 집에서 꿈에 용이 나오면, 그해 대입이 대박 나고 꿈꾸던 취업에 성공할 것이라고 말한다. 아이를 가졌을 때도 복숭아가 나오면 딸 태몽이라고 하 듯이 큰일을 앞두고 꿈은 꽤나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런 의미에서 택배 왕 발표를 하루 앞두고, 정생은 무슨 꿈을 꿨을까.

 “정생정생 박정생이, 얼굴이 왜 그래. 다크 서클이 무릎까지 내려 오겠어~”

 “정생이 어제 너무 긴장해서 밤새 한숨도 못 잤답니다. 안 그래도 출근 하자마자, 전오한테 오후 출근으로 바꿔 달라더이다.”

 “어휴, 우리 정생정생 박정생이 결과 나오면 숙직실에서 한숨 자고 와.”

 “예… 죄송합니다.”

 밤새 핼쑥해진 얼굴로 정생은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동료 기사들이 고개를 내저었다. 정생과 20년 가까이 근무하고 있지만, 솔직히 평범한 자신들로선 정생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누구는 그저 택배를 배송하는 업무에도 지치는데, 그 와중에 노래하고 춤추는 정생은 신기하다 못해 전설 속 존재 같았다. 옛날에, 아주 먼 옛날에 노래하고 춤추며 택배를 배달하는 기사가 있었다더라, 같은.

 평소와 달리 피로가 덕지덕지 붙은 정생의 얼굴에 껄껄 웃으며, 김점장은 노트북을 켰다. 지금 시간은 9시. 본사에서 공지한 택배 왕 발표 시간이다. 솔직한 마음으론 정생이 1등이 되길 응원하면서도, 또 전국 1등은 아니길 바랐다. 지난번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지만, 정생이 본사에 가버리면 많이 아쉬울 것 같았다. 장장 17년 동안 매일 같이 보고 살았는데.

 딸깍. 딸깍. 딸깍.

 김점장의 마음과는 달리 그의 손은 빠르게 화면을 클릭했다. 그의 뒤에 정생을 비롯한 동료 기사들이 모여 있었고, 터미널 직원들 몇몇도 결과가 궁금한듯 근처에서 서성거렸다. 로그인을 하고, 공지에 들어가니 맨 위에 검정색 진한 글씨로 ‘제1회 올해의 택배왕 결과 발표’가 올라와 있다.

 꿀꺽. 꿀꺽.

 너나할 것 없이 모두가 마른침을 삼키며 눈을 떼지 못한다. 개중에는 손에 땀이 차는지 옷자락에 손을 닦거나, 서로 부둥켜안고 기다린다. 정생 또한 바르르 몸을 떨며 두 손을 모아 알고 있는 모든 신들에게 기도한다. 하나님, 부처님, 신령님, 조상님 누구든지 저 좀 도와주십쇼.

 “자, 누른다! 하나! 두울! 서이!!”

 김점장 또한 가볍게 두 손을 푼 뒤, 큰 소리로 외치며 마우스를 잡는다.

 딸깍!

 마우스 클릭과 함께 화면이 바뀐다.

 

 “자, 지금부터 로희 택배 창립 50주년 기념 행사를 시작합니다. 시작에 앞서 이곳에 자리해주신 모든 귀빈 여러분들과 기자분들을 비롯한 로희 택배의 모든 임직원들, 그리고 로희 택배를 사랑해주시고 지금까지 응원해주신 모든 고객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일단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저는 로희 택배 CF 전담 성우 이로운입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로희 택배 홍보모델이자 배우 호이입니다. 반갑습니다!”

 천장엔 결혼식장에서나 볼 법한 화려한 샹들리에가 달려있고, 한쪽에선 드레스와 턱시도를 차려 입은 연주가들이 우아한 클래식을 연주하고,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새하얀 테이블보로 감싼 원형 테이블에 정생은 어색하게 앉아있다. 창립기념 행사라고 해서 그냥 본사 강당 같은 곳에 줄줄이 앉아 박수치고, 선물 받고 그런 형식적인 행사일줄 알았지 이렇게 본격적일 줄은 몰랐다.

 어쩐지 올해의 택배왕 선정을 축하한다며 전화를 건 본사 담당자가 정장을 입고 오라고 그렇게 강조하더니, 평소처럼 후줄근하게 입고 왔으면 민망함에 문도 못 열었을 터다. 경조사용으로 최근에 좋은 정장을 사둔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정생의 자리엔 정생처럼 까무잡잡한 얼굴에 어색한 표정을 한 남성과 여성 여럿이 앉아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정생의 주변엔 다 비슷한 분위기의 테이블들이 몇 있었는데, 아무래도 ‘올해의 택배 왕’ 수상자들을 한데 모아 놓은 것 같았다.

 정생은 요새말로 하면 ‘인싸력’이라고 하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조용히 톡톡 테이블을 두드리고 묻는다. 물론 두 눈은 식장을 향한 채다. 식장은 빔스크린을 내려 로희 택배 50년사 기념영상을 보고 있다.

 “어디서 오셨어요?”

 “대구서 왔어요.”

 “경상북도 구미여.”

 “전 경기도 태리시에서 왔습니다. 다들 현장기사님들 맞으시죠?”

 정생의 말에 테이블에 앉은 기사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서로 다른 지역이라 평생 만날 일 없던 사람들이지만, 같은 직업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벌써 유대감이 생긴 느낌이다. 기사들 중 구미에서 왔다는 예쁜 칼단발의 여성이 조용히 묻는다.

 “태리시 기사님, 그… 그 SNS에서 막 춤추고 노래하던 그분 맞져? 그쳐?”

 “어? 그럼 이분이 그 전설의 기사예요? 이거 하기 전부터, 노래하면서 택배 배달했다는 그…”

 구미 기사와 대전 기사의 말에 기사들의 눈이 정생에게 모인다. 호기심과 놀라움에 가득 찬 네 쌍의 눈동자에 정생은 멋쩍게 웃는다. 그러자 기사들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변한다. 대구에서 온 뿔테 안경의 덩치 좋은 남자 기사가 정생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한다.

 “와, 저 기사님 얘기 엄청 들었어요. SNS에서 가장 유명한 기사님이다, 아니에요?”

 “아니 그 정도까지는…”

 “인터뷰도 하시고. 그리고 이번에 등수도…”

 흥이 오른 기사들이 수다를 떨려던 차, 풍채 좋은 노인이 무대 위로 올랐다. 동시에 박수와 함께 사회자가 외친다.

 “박수로 환영해주십시오! 로운 그룹의 창업자이자, 대한민국 청년들의 넘버원 롤모델 강태원 회장님이십니다!!”

 “회장님께선 스케줄 상 짧은 축사와 함께 제1회 ‘올해의 택배 왕’ 전국 1등 시상식을 마치신 뒤 다음 스케줄을 위해 바로 이동하실 예정입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로희 택배를 위해 귀한 걸음해주신 강회장님을 위해 다시 한번 큰 박수와 함성 부탁드립니다!!”

 강태원 회장. 올해로 딱 여든이 되는, 대한민국의 살아있는 역사라 불리는 기업가다. 강회장의 자서전 <꿈을 꾸라, 시간이 없으니>는 출간 당시부터 지금까지 베스트 셀러에 올라가 있으며, 그의 기업가정신을 다룬 책들 또한 높은 매출을 기록하고 있다. 대한민국을 이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대기업 로희그룹의 회장이면서도 불구하고, 다른 대기업 중직들과는 달리 별다른 사건사고 하나 없이 오히려 기부와 후원 등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으로 꼽힌다. 몇 년째, 대한민국 청년들의 워너비 롤모델 1위에 언급되는 인물이다.

 강회장의 등장에 정생의 테이블을 비롯해 행사에 별 관심을 안 보이던 이들 또한 모두 환호와 함께 박수를 치며 그를 환영했다. 개중에는 기립박수를 치는 이들도 있었다. 악단 또한 이때까지 잔잔하게 연주하던 것과는 달리 웅장한 음악을 연주해, 정생은 이 순간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이게 정말 영화라면 주인공은 강회장이고, 자신은 단역46정도 되려나.

 동그란 철테 안경을 쓴 인자한 표정의 노인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적당한 속도로 단상에 올라가 가볍게 손을 들었다. 아주 가벼운 손짓이었지만, 순식간에 홀 안에 적막이 감돌았다. 강회장이 손을 내린 후에도 아주 작은 수준의 연주소리만이 들릴 뿐, 모두가 강회장에게 집중하는 것이 느껴졌다. 강회장은 여전히 인자한 표정으로 홀을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친애하는 로희택배 가족 여러분 그리고 이 자리를 빛내러 와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인사 드립니다. 이 강태원이, 로희택배 막 문패 달았을 때가 어제처럼 생생한데 벌써 50주년이라니 감회가 아주 새로워요. 이게 다 우리 정경서 사장님, 임직원들이 노력한 것도 있지만, 지금도 현장에서 땀 흘리고 일하는 현장 직원들 덕분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그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싶습니다.”

 강회장은 단상에서 살짝 비켜나와 정중하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 모습에 홀 안에 환호와 함께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기사들 중엔 눈가를 닦아내는 이들도 몇몇 있었다. 잠시 관중의 감동이 가실 때까지 기다린 후, 강회장은 다시 말을 이었다.

 “지난 50년 동안 달려온 것처럼, 앞으로의 50년도 함께 달려갑시다. 정사장님, 멀리 가려면 손잡고 같이 가는 사람들이 행복해야 합니다. 제 말 아시겠죠? 더울 때 시원한 데서 일하고, 추울 때 따순 데서 일하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더울 때 더운 데서 일하고, 추울 때 추운 데서 일하는 사람이 우리 회사의 뿌리예요. 이 회사는 더울 때 더워하고, 추울 때 추워하면서 만든 회삽니다. 현장직들과 주기적으로 소통하세요.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지만, 한사람이라도 더 만족시킬 수 있도록 노력하는 회사를 만드세요. 그러면 1년갈 회사가 10년, 20년 가고 그러다 100년, 200년도 가는 겁니다. 우리 로희 택배 100년, 200년 가야하지 않겠어요?”

 강회장의 말에 홀 안은 다시 환호와 박수소리로 가득 찼다.

 “마지막으로, 우리 꿈을 꿉시다. 대한민국 남바원을 넘어 세계 남바원, 우주 남바원이 됩시다. 다른 회사들 트럭 타고 다닐 때 우리는 비행기 타고, 다른 회사들 비행기 탈 때 우리는 로케뜨 타고 다녀야지. 안 그래요? 우리 시간이 조금이라도 남았을 때, 하루라도 더 있을 때 꿈을 꾸자고요. 감사합니다.”

 쏟아지는 박수와 환호에 손을 흔들며 강회장은 준비된 자리에 착석했다. 곧바로 단상이 치워지고, 작은 테이블과 함께 상패와 꽃다발이 마련됐다. 기다리던 순서에 주변의 기사들 모두 긴장한 모습이었다. 정생 또한 긴장감에 입술이 말라 물을 마셨다.

 사회자들이 무대에 올랐다.

 “자, 여러분 기다리고 기다리던 제1회 ‘올해의 택배 왕’ 시상식을 시작합니다! 특별히 전국 1등이자 제1대 택배 왕 시상은 강태원 회장님께서 수고 해주시겠습니다.”

 “강태원 회장님께선 이후의 스케줄로 인해 이번 순서까지만 함께 해주시겠습니다. 귀한 걸음 내어 주신 강회장님께 다시 한번 감사인사 드립니다.”

 “로희 택배 창사 50주년을 기념해 강회장님께서 직접 기획해주신 제1회 ‘올해의 택배왕’ 콘테스트! 이번 콘테스트는 약 1달 동안 고객 만족도 설문과 대리점 투표, 터미널 투표를 통해 선발되었습니다.”

 “네, 그리고 직원의 근속연수와 결근기록, 고객의 소리 ‘칭찬합니다’와 ‘불만입니다’를 모두 포함해 공정하게 선발하였음을 밝힙니다. 자세한 평가내역은 행사가 마치고, 공식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럼 제1회 ‘올해의 택배 왕’ 시상을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제1대 택배 왕 시상은 강태원 회장님께서 수고해주시겠습니다.”

 박수와 함께 강회장이 다시 무대 한가운데 섰다. 강회장의 손엔 작은 봉투가 들려 있었다. 이미 누가 몇 등인지 다 알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홀에는 긴장이 감돌았다. 강회장이 봉투를 열고 종이를 꺼내 들었다.

 “명예로운 제1대 택배 왕은 바로! 경기도 남태리 지사의 박! 정! 생! 기사님.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박정생 기사님은 무대 위로 올라와 주시길 바랍니다.”

 “박정생 기사님은 남태리 지사에서 15년 근속근무를 하시고, 15년 중 결근은 3회, 고객만족도 5점 만점에 4.8점, 대리점 투표 1위, 터미널 투표 1위에 고객의 소리 221건 중 ‘칭찬합니다’가 무려 219건, ‘불만입니다’가 2건의 우수 사원입니다.”

 정생은 안내 직원들을 따라 무대로 다가갔다. 서둘러 손에 찬 땀도 닦고, 머리도 한번 정리하고,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 심호흡을 하니 무대 앞이었다. 긴장하지 말자. 항상 애들한테 하던 말 생각하자. 허리 펴고, 턱 집어넣고 당당하게.

 올라가서 본 무대는 생각보다 밝았다. 정생이 무대에 오르자 환호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정생은 사회자들의 안내를 받아 곧바로 강회장의 앞에 섰다. 강회장은 여전히 인자한 표정으로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들기고는 그의 품에 상패와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축하합니다. 가까이서 보니 키도 훤칠하고 얼굴도 아주 잘생긴 것이 로희택배가 아니라 우리 로희가 하는 RH E&M 사람이 잘못 온 게 아닌가 싶구만. 껄껄껄.”

 “감… 감사합니다.”

 “자, 우리 잘생긴 기사님은 보상으로 뭘 원하시나? 본사로 이직? 아니면 다른 원하는게 있나?”

 강회장의 눈은 정생을 고요히 응시했다. 괜히 회장은 회장이 아니구나 싶은 것이 분명 키도, 덩치도 정생이 회장보다 컸지만 마치 거인의 앞에 선 듯 압도되는 느낌이었다. 정생은 다시 또 입술이 말라왔다.

 “저는…”

 

 택배왕 시상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정생은 쌍둥이의 고등학교로 택배 배달을 갔었다. 그의 배달지역이라 이전에도 몇 번 갔었지만 쌍둥이가 다니는 학교가 되니 기분이 묘했다. 일로 갔지만 아빠 마음에 아이들 얼굴이나 보고 갈까, 멀리서 공부하는 모습이라도 슬쩍 보고 갈까 마음이 동하던 차에 도원의 담임 선생님을 만났다.

 “어? 도원이, 여원이 아버님 아니세요?”

 “아, 예. 맞습니다. 실례지만 혹시 누구신지...”

 “안녕하세요. 저 도원이 담임 연분홍입니다. 안 그래도 아버님 만나 뵙고 싶었는데… 지금 잠깐 시간 괜찮으신가요?”

 “오래는 안 되고, 한 10분 정도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우리 도원이 학교생활에 문제라도 있습니까?”

 집에선 한없이 밝아 보이던 아들이 혹 학교폭력이라도 당하는 걸까, 홀아버지 밑에서 큰다고 따돌림이라도 당하는 건가 정생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연선생은 손사레를 치며 그런 건 아니라며 정생을 교무실로 데려간다.

 정생을 교무실에 데려간 연선생은 자기자리에서 컴퓨터를 뒤지더니, 곧 글씨가 가득한 종이 몇 장을 프린트해온다. 도원의 생활기록부다.

 “아버님, 이건 도원이 생활기록부예요. 뭐, 이제 1학기 겨우 지나가니까 아직 못 보셨겠지만… 그래도 도원이 중간고사랑 모의고사 성적표는 보셨나요?”

 “네. 봤습니다. 모두 1등급. 전교 1등이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맞아요. 전교 1등도 그냥 전교1등이 아니라 모평이고 중간고사고 죄다 만점에 가까운 성적이에요. 성적이 너무 좋아서, 야자 때 심화수업 듣고 있고요.”

 연선생의 말에 정생의 표정 가득 뿌듯함이 배어 나온다. 세상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 자랑을 마다할까. 그저 건강하게 크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머리까지 좋고, 외모도 저를 닮아서 좋으니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아들이었다.

 연선생이 건넨 생기부를 보니, 성적도 전부 1등급이고 상장이며, 봉사며 빽빽하게 가득 차 있다. 밤이고 낮이고 바쁘게 돌아다니더니 놀러간 게 아니었나 보다. 내심 짠하고, 대견하다. 그런데 담임선생님이 학부모 기분 좋으라고 불렀을 리는 없고, 무슨 일인가 정생은 의아하다.

 “그런데 선생님, 이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혹시 우리 도원이가 너무 똑똑해서 애들한테 괴롭힘이라도…”

 “아니에요, 그런 걱정은 마세요. 도원이 완전 인싸예요. 여자형제가 있어서 그런가 매너도 있고, 여자애들한테 인기도 좋아요.”

 “그렇다면 대체…”

 정생의 물음에 연선생은 잠시 주저하는 표정을 보인다. 그러나 이내 심호흡을 내쉰 뒤 정생을 응시한다.

 “아버님, 도원이 그림에 재능 있는 거 아세요…?”

 “예. 압니다. 어릴 때부터 학원도 안 다녔는데, 곧잘 상을 타왔습니다. 지금도 집에 도원이 어릴 때부터 그린 그림, 상장 차곡차곡 모아 놨습니다. 올해도 그림으로 상장 몇 개 받아와서,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습니다.”

 “아… 그럼 혹시 도원이 장래희망… 뭔지 아세요?”

 연선생의 물음은 솔직히 정생도 오래 전부터 궁금해하던 질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장래희망을 물으면 매번 바뀌기는 해도 곧잘 대답하는 여원과는 달리 도원은 넉살 좋게 웃을 뿐이었다. 아주 어릴 때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했던가.

 “글쎄요. 얼마 전에 물었을 땐, 아직 못 정했다고 나중에 성적 맞춰 생각해볼 거라고 하던데요.”

 정생의 대답에 연선생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조금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는 컴퓨터에 앉아 뭔가를 두들기더니, 정생을 불러 모니터를 가리켰다.

 “아버님, 여기 보시면 이게 도원이 초등학교, 중학교 생기부거든요. 보시면 도원이 장래희망이 계속 디자이너예요. 무슨 디자이너인지는 계속 바뀌는데, 중학교부터는 쭉 패션디자이너고요.”

 “하긴 어릴 때 그런 말을 하긴 했습니다.”

 “보면 도원이 중학교3학년 1학기까진 디자이너가 장래 희망이었는데, 작년 2학기부턴 갑자기 선생님으로 바뀌어 있어요. 아버님은 혹시 이 이유를 알고 계신가요?”

 정생은 고개를 저었다. 연선생은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이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말했다.

 “제가 작년 도원이 담임선생님께 전화를 걸어 여쭤봤어요. 도원이 성적이 워낙 좋아서 이정도면 정말 의대도 불가능은 아니라서요. 근데 담임선생님 말씀이 작년 2학기에 학교에서 단체로 직업체험을 가서 전문가 면담을 했다더라고요.”

 갑자기 바뀐 장래희망. 패션 디자이너. 전문가 면담. 정생의 머릿속에 불현듯 불안감이 스친다. 연선생이 말을 잇는다.

 “그때 담임쌤도 의아해서 같이 면담했던 친구들한테 물어보니, 그분이 집안이 어지간히 부유하지 않으면 미대는 추천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미대 등록금이랑 컴퓨터나 과제 재료비, 평균 생활비, 대출 이율 그리고 졸업 후 평균 연봉 그런 걸 설명해줬다고 하더라고요. 도원이가 그때 충격을 좀 받은 거 같아요.”

 연선생은 사실 도원이 정도의 성적이면, 미대 준비하는 시간을 모아 성적 관리해서 서○대 같은 최상위권 대학에 진학하는 게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연선생은 도원이가 외부적 이유로 자신의 꿈을 포기하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며 자기도 장학금이나 그런 제도를 알아볼 테니, 도원이가 경제적인 이유로 꿈을 포기하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정생은 연선생에게 알려줘서 감사하다며 인사한 뒤, 정신을 차리니 이미 퇴근해 집안일을 하고 있었다. 그가 쌍둥이를 위해 적금을 들고 있었지만, 미대생을 지원할 정도의 금액은 아니었다. 정생은 운전석에 앉아 인터넷을 검색한다.

 미대 평균 등록금. 미대생 컴퓨터. 미대 입시학원.

 그리고 그 결과에 손이 떨린다.

 일단 입시미술학원의 학원비도 상당하고, 그 이후 대학을 가서도 문제였다. 미대생은 국립대라고 해서 저렴하지 않았다. 거기에 사립이면 말도 못했다. 또 미대생이니 일반적인 가격의 노트북 정도는 안 될 테니 고가의 컴퓨터를 사용해야 했고, 과제의 재료비도 적지 않았다. 어떤 포스팅에선 졸업작품 전시회를 위해 상당한 돈을 들였다고 한다. 이래저래 살펴보니 유학에 대한 글도 적지 않았다.

 기회가 된다면 전부 해주고 싶었다. 도원이 얼마나 그림을 좋아하는지, 또 재능이 있는지는 정생이 제일 잘 알았다. 그러나 정생에게는 자식이 도원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에게는 도원의 꿈만큼이나 여원의 꿈도 소중했다. 또 언제까지나 정생이 택배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닐 테니, 노후 자금도 대비해야 했다.

 그냥 미대를 보낸다는 막연한 것이 아니다. 자취방도 구해야 하고, 그렇다고 해서 도원이 집안 형편을 생각해 최소한의 생활만을 하며 궁핍하게 살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학교를 다니며, 과외를 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다. 학자금 대출도 결국 빚이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에 빠진 중에 무언가 정생의 머리 속을 스쳤다. 있었다. 방법.

 

 “전… 본사 관리직이 아닌 다른 걸 원합니다.”

 강회장이 정생에게 계속 얘기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정생은 꿈을 꾸는 하나의 사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쌍둥이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그에겐 그 자신보다도 아이들이 더 소중했다.

 “로희그룹 자체에서 일부 직원의 자녀를 대상으로 대학 등록금 전액과 생활비 일부를 졸업할 때까지 지급하는 제도가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거기 선발되는 것이 굉장히 까다롭다는 것도 말입니다. 거기에… 거기에 명단을 올려주십시오. 저희 애들, 대학교 마음 편히 다니게 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회장님.”

 로희그룹 자체에서 주는 특별장학금. 이는 직원들 사이에서 속된말로 ‘로희 수저’라 불리며, 회사 발전에 큰 공을 세운 직원들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포상 중의 하나다. 이 로희 수저를 쥔 대표적 인물들로는 로희 전자의 주력상품인 스마트폰 ‘포르테’를 최초로 개발한 개발3팀 팀장 도레미, 로희 화학에서 주력 화장품 브랜드 ‘돌체’를 런칭한 개발1팀 팀장 구수도, 그리고 로희 푸드에서 ‘너라면’을 개발한 개발5팀 팀장 김한별이다. 이외에도 히트 친 상품의 개발자나 회사 이미지에 큰 기여를 한 인물 등이 로희 수저를 쥐었다.

 제1회 택배 왕이라는 점, 그가 지금까지 로희 택배에 충성을 다한 우수 직원이었다는 점, 종종 인터뷰를 통해 회사 이미지에 적지만 도움이 되었으리라는 점 등을 고려하면 아예 불가능한 제안은 아니었다. 머릿속으론 그렇게 생각하지만, 강회장의 표정은 고요하다. 그는 가만히 그를 응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수용합니다. 회장 권한으로 오늘부터 장학생 명단에 박정생씨 자녀들 이름 추가하세요.”

 “축하합니다!! 여러분 모두 박수 쳐주세요!”

 “그럼 회장님과 수상자이신 박정생 기사님 사진 한 장만 찍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자, 자세 잡으세요! 김치!”

 “아니에요. 여기에선 로희! 입니다. 자, 정생씨 카메라 보고 로희! 하는 겁니다.”

 “아, 예. 로… 로희.”

 얼떨결에 사진을 찍고, 정생은 강회장에게 고개 숙여 감사인사를 했다. 다시 한번 정생의 어깨를 두들긴 강회장은 이후 비서진들과 함께 홀을 떠났고, 사회자들의 진행 하에 남은 행사가 진행되었다. 서울시 1등은 종로에서 나왔는데, 까대기의 신이라고 불리며 남들은 2시간이 걸릴 작업을 1시간도 되지 않아 모두 마무리한다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는 해외지사 대신 포상금을 요구했다. 각 광역시 1등과 도 1등도 다들 만만찮은 사람들이었다. 어떤 날씨에서도 뽀송한 상태로 문 앞에 고이 배달하는 능력자가 있는가 하면, 손이 빨라 다른 사람보다 택배를 빨리 배달해 다른 사람보다 담당지역이 1.5배 정도 더 넓은 사람 등 전부 대단한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정생은 왠지 아쉽고, 왠지 홀가분하고, 또 왠지 스스로가 대견한 기분에 남은 행사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날 밤, 학교 앞에서 야자가 끝난 쌍둥이를 기다리며 정생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항상 집안일에 치이고, 택배일에 치이고, 그러고 나면 피곤해서 하늘 볼 겨를도 없었는데 오랜만에 올려본 하늘은 썩 나쁘지 않았다. 경기도 외각지역이라 날씨가 좋으면 드문드문 별이 보였는데, 때마침 운이 좋아 별이 꽤 보였다. 종종 이런 밤하늘을 바라보며, 아이들을 기다리는 삶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아빠? 우왕! 아빠다!”

 “여긴 어쩐 일이예요? 피곤하실 텐데 집에서 쉬시지.”

 “가끔은 아빠가 데리러 오는 이벤트도 있어야지, 안 그래? 우리 쌍디들, 오늘도 별일 없었고? 급식은? 오늘 급식 뭐 나왔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 정생과 쌍둥이들은 각자 아이스크림 하나씩 물었다. 정생은 달달한 밤맛 아이스크림, 도원이는 초콜릿 맛 쭈쭈바, 여원이는 커피맛 슬러시다. 짧은 길이지만, 이렇게 아이스크림 하나씩 물고 쭈르르 걸으니 쌍둥이들의 어린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유달리 기분이 좋아진 도원이가 콧노래를 부른다.

 “지난 여름 바닷가~ 너와 나 단 둘이~~”

 “쌍디들아. 아빠 오늘 올해의 택배왕 시상식 다녀왔다. 거기서 상으로 뭐 받았게? 맞추는 사람 만원!”

 “최고급 한우갈비세트!”

 “땡!”

 “음… 유급휴가?”

 “땡!”

 “힌트! 힌트! 먹는 거에여?”

 도원의 물음에 정생은 두 팔로 엑스 자를 만들었다. 여원이 발표하듯 손을 들며 외친다.

 “정답! 보너스!”

 “땡! 좀 더 팍팍 써봐! 아빠가 창립 50주년 기념행사에서 전국 1등을 했는데.”

 “정답! 정답! 뉴 탑차! 막 반짝반짝 미러볼 달려있고, 인공지능 달려있는 탑차여!”

 “땡! 그거보다 큰 거!”

 “정답! 승진!”

 “땡!”

 연 이은 오답에 도원과 여원은 입을 뚱 내민다. 그런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입이 근질거려 정생은 한껏 흥분한 목소리로 외친다.

 “정답은! 두구두구두구!! 바로 장학금입니다!!”

 “장학금?”

 “장학금이여? 아빠 어디 학교 다니게여?”

 “아니. 너희들. 아빠가 우리 쌍디들 대학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이랑 생활비 걱정 안 하게, 장학금 달라 그랬어. 어때? 멋지지?”

 하이톤의 비명소리와 함께 난리를 칠 줄 알았는데, 그저 놀라서 “와, 대박…”이라며 박수치는 여원과 달리 도원은 말이 없다. 그저 멍하니 정생을 바라보며 되묻는다.

 “진짜여…? 아무 대학이든, 어떤 과든 상관없이 전액이여?”

 “어. 로희그룹 강태원 회장님이 직접 약속 해주셨어. 너희 그분 책으로 독후감도 썼었잖아. 기억나지?”

 도원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그 모습이 또 괜히 짠해 정생은 장난치듯 쌍둥이를 양팔에 끼고 흔든다.

 “너희들, 리액션이 그게 뭐야! 좀 더 신나게! 응?”

 “와… 와…”

 “여원이 넌 차라리 안 하는게 낫겠다.”

 “아빠가 하라면서요.”

 “실수.”

 집에 도착할 때까지 도원은 말이 없었다. 집에 와서도 도원은 잠시 생각할 게 있다며, 방안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그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웬일로 여원이 정생에게 다가와 말했다.

 “쟤 원래 미대 진짜 가고 싶었는데, 작년인가 면담 가서 거기 디자이너쌤이 돈 없으면 미대 가지 마라고 팩폭 오지게 해서 포기했었대요. 근데 아빠가 대학교 전액장학금 얘기해서 울컥하고 그러나 봐요. 놔두면 금방 또 뽈뽈뽈 시끄럽게 돌아다닐 테니 걱정 마세요.”

 “고맙다. 아빠가 미안해. 여원이 넌 돈 때문에 포기한 거 없어?”

 “전 뭐 딱히.”

 여원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욕실로 들어갔다. 정생은 도원의 방 앞에서 문고리를 잡고 서성이다, 문 너머로 들리는 작은 흐느낌에 발길을 돌렸다. 평소처럼 남은 집안일을 다 마무리하고, 침대에 누워 정생은 스스로 되뇌었다. 잘한 선택이었다. 아버지로서 반드시 해야 할 선택이었고, 이 선택에 후회는 없었다. 어차피 이 나이에 아이돌 같은 건 진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쌍둥이들의 행복. 그것보다 중요한 건 없다.

 그렇게 잠을 청하는 와중에 정생의 핸드폰이 웅- 하고 진동한다. 스팸 문자겠거니, 무시하고 자려니 다시 한번 웅- 웅- 웅- 하고 울린다. 이 밤에 대체 누군가, 핸드폰을 열어보니 메시지가 와있다.

 

 ***

 

 1년 전, 도원과 여원이 다니던 연주중학교 3학년 현장학습. 장소는 태리시에서 버스로 2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장영시의 <비비디바비디부 테마파크>. 이름만 들으면 단순한 놀이동산 같지만, 여러가지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대규모 체험장이다. 대모요정의 마법으로 무도회에 간 신데렐라처럼 체험장에서는 온갖 의상이나 시대, 나라, 심지어 판타지 세계의 체험도 가능하다. 사진 찍기에도 좋아 주말엔 발 디딜 틈 없이 사람이 몰린다.

 연주중학교가 방문한 건 직업 체험이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각자 직업에 맞는 의상이나 도구를 들고, 체험장소에 가서 실무를 가상으로 체험해보는 것이다. 체험이 마치면 실무자를 만나 면담도 나눌 수 있고, 나중에 집이나 학교로 체험내용이 담긴 포트폴리오 형식의 소책자를 배달해줘 인기 현장학습 코스다. 나중에 자기소개서에 쓰기에도 좋아, 어떤 입시전문가가 요즘 자소서에 <비비디바비디부 테마파크> 안 들어간 학생 찾기 어렵다며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여원은 경찰체험을 하러 갔다. 어릴 때부터 몸이 단단하고, 날렵한 여원은 태권도 검은띠에 최근엔 문화센터에서 주말마다 복싱을 배우고 있다. 본래도 또래들에 비해 분위기가 있던 여원은 경찰 유니폼을 입자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포스를 풍겼다. 체험하는 중에도 계속 월등한 실력을 보여, 같이 있던 동급생들의 환호와 박수를 받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경위는 여원에게 나중에 꼭 선후배로 만나자며, 악수를 청했다. 이 장면은 이날의 베스트컷에 뽑혀, 나중에 큰 사이즈로 인화되어 배달되었다. 지금은 여원의 방 한쪽에 걸려있다. 본래는 정생이 거실 벽 제일 좋은 장소에 걸자고 했으나, 여원은 그 자리엔 나중에 경찰대 졸업사진을 걸 테니 비워 두라며 사진을 자기 방으로 들고 갔다. 그 모습이 자랑스러워 그날 밤, 정생은 혼자 울었다.

 도원은 패션 디자이너 체험을 했다. 체험장에는 마네킹과 리본, 천, 미싱 등이 세팅 되어 있었다. 곳곳에 디자인 스케치와 패션 관련 잡지, 신문 등이 가득했다. 학생들은 그곳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간단한 소품을 제작했다. 그리고 직원의 도움을 받아, 옷이나 소품 디자인을 했다. 도원은 오렌지색과 검정색이 메인으로 사용된 화려한 남성 제복을 디자인했다. 각종 장식이 달리고, 섬세한 자수가 인상적인 옷이다. 자칫 복잡하고 촌스러워 보일 수 있는 조합이지만, 도원의 센스 있는 배치로 오히려 신비롭고 우아한 느낌이다.

 꼼꼼하게 색칠한 디자인 스케치를 품에 안고, 도원은 전문가를 기다렸다. 미술 선생님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것도 물론 좋았지만, 전문가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그날 전문가 면담으로 나온 디자이너는 복한별이었다. 그는 피치(PEACH)란 예명으로 활동 중이며, 아이돌 업계에선 신의 손이라고 불리고 있다. 그의 손이 닿은 무대의상은 팬덤에서 ‘레전드’로 꼽히며, 어지간한 아이돌들의 무대 ‘입덕영상’ 혹은 ‘입덕사진’은 거진 그의 작품이다. RH 엔터 스타일리스트 팀장 진주아와 대학 동기로, RH엔터 아이돌의 의상은 대부분 그의 손을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래 이런 자리에 나갈 급의 인사가 아니지만, 다른 볼일이 있어 테마파크를 들렀다가 지인의 부탁으로 면담을 하게 됐다. 물론 말이 면담이지, 스케쥴 상 짧은 조언에 가깝다.

 그는 유명 디자이너인 만큼 많은 디자이너들과 지망생들이 그를 따랐고, 그만큼 많은 수가 좌절하는 것을 보았다. 잠깐 대학강사로 수업을 했을 때에도 재능이 있지만 경제력이, 집안 사정이 버티질 못해 포기하는 학생들을 수없이 보았다. 그런 경우엔 아무 것도 이룬 것 없이 시간도 시간대로 허비하고, 돈도 돈 대로 낭비하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테마파크 직원에게 마이크를 건네받았을 때부터 한별이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한별이 생각하기에 아직 어리고, 시간도 돈도 남아 있을 때 어른으로서 반드시 해줘야 할 조언이었다.

 “집에 가만히 있어도 따박따박 월세 들어오는 알짜배기 건물 있거나, 우리 부모님 부자다! 자랑스럽게 외칠 정도가 아니면 디자이너는 포기하세요.”

 

 
작가의 말
 

 토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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